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세계의 연극/세계의 연극〔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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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演劇〔序說〕 연극은 인류역사와 더불어 태어나서 인류멸망과 함께 죽어갈 공동운명을 지니고 있다. 연극이란 인간이 인간의 행위를 모방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숨쉬고 있는 동안 연극은 밤낮에 따라 죽음과 부활을 반복할 것이다. '자정에 죽은 연극은 솟아오르는 태양과 함께 다시 태어난다' 함은 인류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연극도 계속된다는 뜻 이외에, 일단 끝난 공연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되 다시 상연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태어난 연극은 전날 자정에 죽은 연극과 동일한 것은 아니며, 다만 내용이 같을 따름이다. 연극은 육안으로 보는 순간에만 존재한다고 함은 연극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시나 소설이 활자화되어 그 원형을 유지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연극은 공연이 끝나는 동시에 사라져 버리고 오직 상연대본과 프로그램, 무대사진, 평론 그리고 그 공연을 본 관객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연극이 순간적인 시간예술임에도 강렬한 힘을 지니고 있음은 살아 있는 인간, 즉 배우가 인간의 체험을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모방하기 때문이다. 연극은 어떠한 과거의 사건이라 할지라도 '현재'시간에서 진행되게 마련이며, 관객은 과거를 현재에서 체험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현재'에서 하나의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들)의 행위를 모방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직접적이고 감동적인 것은 없다. "……원래 연극의 목적이란, 예나 이제나 자연을 향해 거울을 들어올려 정과 사(邪)를 있는 그대로 보이고 시대의 양상을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니……" 햄릿의 이 말은 연극이 인간의 행위를 모방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많은 석학들의 이론을 뒷받침해 준다. 물론 모방에 대한 해석은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르고, 또 다를 수밖에 없으나, 모든 예술에 있어서 그렇듯이 고전적 해석은 타당한 바탕을 이룬다고 하겠다. 키케로는 이렇게 말한다. "연극은 인생의 모사(模寫)요, 관습의 거울이요, 진리의 반영이다(Drama is a copy of life, a mirror of custom, a reflection of truth)." 그의 이론에 따르면 결국 연극이란 인생을 거울에 비추어 본 것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곧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모방한다는 뜻이다. 원래 드라마는 희랍어의 행위·행동에 해당하는 말로서, 행동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배우가 인간의 행위를 그대로 모방한다는 것이 바로 연극의 이념이다. 이와 같은 모방론은 19세기 사실주의자들의 예술관과 일치된다고 할 수 있다. 졸라는, "연극이 있는 그대로를 모방하는 것이니만큼, 자기도 영웅과 함께 쓸모없는 인간을, 그리고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평범한 다반사를 삽입했노라"고 <테레즈 라캉>의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역시 프랑스의 보마르셰도 졸라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연극이란 한낱 인생의 축도(縮圖)에 불과하다. 이들은 '미러 오브 네이처(Mirror of nature)'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무릇 예술가는 많은 소재 가운데서 어떤 특수한 부분을 선택한다. 따라서 선택은 기계적이 아닌, 작가의 예술적 창조력을 필요로 한다. 선택은 기교로서의 '아트(art)'와 예술가로서의 '아트'가 합쳐진 곳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연극은 소재의 선택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인물대사 속에 무한한 의미를 암시할 수 있는 전달력을 작가가 지닐 일이다. 극작가는 아티스트(artist)여야 한다. 한 걸음 나아가 모방론에 대한 좀더 광범위한 해석이 있어야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원칙은, 예술은 모방이라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모방설에 대한 해석은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르다. 가령 <크롬웰>의 서문에서 말한 위고의 견해로는, 거울이 편편한 것이어서는 안 되며,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출 수가 있는 포커싱 미러(focusing mirror)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약한 빛이 강해지고 불꽃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연극이란 그럴 때에 비로소 예술 구실을 하게 된다고 결론짓는다. 사르세이(Sarcey)나 에델린(Hedelin)의 이론 역시 위고(Hugo)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발전적인 견해이다. 에델린의 "연극이란 있었던 사건 그대로를 상연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을 상연해야 한다"는 이론은 극작가의 사상과 철학에까지 언급한 것이 된다. 사실 고전적 이론으로, 과거를 다루는 것이 역사라면 문학은 당위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전제는 모방설에 대한 졸라나 보마르셰의 해석에 대해서 수정을 가하게 만든다. 당위의 세계를 그려야 한다는 이론을 부연하는 또 하나의 이론을 브륀티에르의 연극론에서도 볼 수 있으니, 연극은 어떤 목표를 향해 애쓰는 인간의 의지를 그려야 된다고 그는 말한다. 그 의지란 당위의 세계를 이룩하려고 노력하는 의지임을 말한다. 이와 같은 고전적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세계연극은 제나름의 길을 걸어오고, 또 걸어갈 것이지만, 그들의 연극이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어떻게 다르건 간에 인류역사가 변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극 역시 많은 변화 속에서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진리를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이 순간에 막이 내려, 죽어버린 연극이 내일 다시 되살아날 것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연극은 인간의 기다림 속에서 영원히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吳 華 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