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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세계의 연극/세계의 현대연극/기타 서유럽 국가의 현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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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현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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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lia-現代劇

남유럽, 즉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의 연극은 우선 이탈리아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17세기 후반의 이탈리아는 거의 프랑스연극의 추종에 전렴하여, 독자적인 연극활동에는 볼 만한 것이 없었고, 한편, 국가적 통일이 겨우 실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보조를 받는 상설(常設) 극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침체를 깨고, 시인 가브리엘레 다눈치오가 나타났다. 연극사상에 있어서 다눈치오의 위치는 프랑스의 영향에서 벗어난 본래의 이탈리아연극의 재건으로 굳혀졌다. 따라서 다눈치오의 모방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 중에서도 루소 디 상 세콘도(1887-1956)는 그 영향 밑에서 등장하여 <인형극>(1918)으로 독자적인 작품을 보여 주었다. <신연극(新演劇)>이란 표제의 단막물 희곡집은 영화의 수법을 받아들인 점에서 독창적이며, 또한 최후의 작품 <프로셀파나의 유괴(誘拐)>(1933-54)는, 고대 신화의 어댑테이션으로 성공했다.

한편, 다눈치오 양식에 대한 반항으로서 미래파와 황혼파(黃昏派:Crepuscolarsmo)가 각기 연기면에서도 활약했다. 전자는 F.T. 마리네티(1876-1944)를 창시자로 하고, 후자는 F.M. 마르티니(1886-1931)를 대표로 하는데, 시극 <우롱(愚弄)의 야식(夜食)>(1900)의 셈 베넬리(1877-1949)가 그 계열에 속한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작가로서 현대연극에 가장 깊은 영향을 준 것은 피란델로이다.

피란델로와 동기의 작가로서는 부르주아 연극의 제1인자로서 이탈리아의 베른시타인이라 불리는 D. 니코데미(1874-1934), 이에 대하여 사회에 통용하는 피상적인 가치를 부정하고 명작 <가면과 진짜얼굴>(1913)을 쓴 L. 캬렐리(1880-1947), 또한 <자기 자신과 만나는 사나이>(1918)로 알려진 그로테스크극의 L. 안토넬리(1882-1942)를 들 수 있다. 상징적인 작풍(作風)으로서 죽음에 대한 삶의 승리, 과거에 대한 미래의 승리를 주장하는 우고 베티(1892-1953)는, 시인으로 출발하여 1927년 <여주인공>으로 극단에 등장했다. <재판소의 부패>(1949)는 형이상학적이고 사회적인 드라마이다.

전후의 세대로서는 거편(巨篇) <로마냐의 여인>(1957)에서 서사극에 관해 브레히트풍(風)의 솜씨를 보인 L. 스쿠알치나(1922-?), 도덕적인 극과 이데올로기적인 극의 이원성(二元性)을 교묘하게 통일한 <가정의 재판>(1954)의 디에고 팟브리(1911- )가 특히 주목된다. 한편 나폴리에서 나타난 E. 데 필립포(1900-?)는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근대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단막물 소극(笑劇)을 쓴 배우겸 연출가였는데, 1945년 이후 크게 탈피하여 '신사실주의(新寫實主義)'에 대응하는 문제작 <백만장자의 나폴리>(1945) <공포 제1호>(1950) <사랑스러운 사람> 등을 발표함으로써 나폴리 방언극(方言劇)을 전 유럽적 연극으로 확대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慘禍)에서, 이탈리아의 연극은 이러한 형태로 부흥되고 있으며, 항구적(恒久的)인 극단조직이 상설극장을 획득하는 예를 각지에서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밀라노의 피콜로 테아트르일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라틴어에 의한 고대극의 복고적 상연도, 로마를 중심으로 한 고대극장의 유구(遺構)를 이용해서 활발히 행하여진다.

다눈치오, 가브리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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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briele D'Annunzio(1863-1938)1898년 <봄의 새벽꿈>을 가지고 극단에 등장했다. 이듬해에 발표된 <가을 저녁의 꿈>과 함께 대화체의 시(詩)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연극성은 빈약하다. 산문으로 쓰여진 3작품 <죽은 마을>(1898) <라 지오콘다> <영광>(1913)도 지나치게 대사에만 의존하여 무대에서의 성공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대하여, 낭만파가 묘사한 중세라는 이질적인 피비린내나는 황량한 세계에서, 단테로부터 힌트를 얻어 엮은 사랑의 이야기를 전개한 시극(詩劇)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1902)는 다눈치오의 본령(本領)을 보인 것이며, 또한 <요리오의 처녀>(1904)는 원시 그리스도교를 배경으로 한 농민극으로, 신앙의 기적과 동물적인 욕정의 대립에 고도의 긴장을 보이는 걸작으로, 각기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배(船)>(1906)는 고도의 서정성이 있는 작품으로서 연출가에게 큰 흥미를 주며, 그리스 비극에서 취재한 <페드라>(1909)와 함께 주목된다.

피란델로, 루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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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igi Pirandello(1867-1936)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유산이 많은 시칠리아섬 출신의 이 작가는 시인으로 출발하여, 이어 많은 작품을 쓴 소설가가 되었으나, 50세 가까이 됐던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동향의 배우 안젤로 무스코의 권유로 극작에 손을 대어 우선 자작의 각색부터 시작하였다. 그 인간관의 본질을 이루는 인격의 다면성 혹은 유동성의 표현이, 소설보다 연극의 형태에 있어 보다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자율적인 자아의 통일성은 밖에서 보는 눈에 의해 변화있는 다면체 속에서 파악될 수 없게 된다는 사상은, 피란델로가 유학하고 있었던 독일의 철학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받아들이는 방법은 낭만파풍의 인생으로부터 도피는 될 수 없었고, 이와 같은 자타의 모순이 가져오는 비극성을 사회적 또는 심리적으로 추구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지아코미노>(1916), <모두가 옳다>(1917), <명예의 기쁨>(1918), <인간, 짐승, 도덕>(1919),<전과 같이, 전보다 좋게>(1920) 등을 거쳐, 가장 중요한 작품 <작자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1921)과 <엔리코 4세>(1922)를 발표했다. 전자는 드라마 투르기로서, 유럽 연극의 고전적 수법을 초월하여, 오늘날의 안티 테아트르의 계보와 연결되는 것이며, 후자는 흔히 <햄릿>과 비교되는데, 가장(假裝)한 중세의 독일 황제와 자기와의 구별을 할 수 없게 된 미친 청년의 비극을 그린 것이다.

1925년 로마에 '예술극장'을 연 피란델로는, 전후의 이탈리아 연극의 부흥을 기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만년에는 외국을 역방(歷訪)하며, 자작의 연출에 힘썼다. 1930년의 <오늘 저녁 사람은 즉흥극을 상연한다>는 이 시기의 작품으로서, 피란델로의 작품 중, 오늘날에도 흔히 상연된다. 193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리스의 현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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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ce-現代劇

고대극의 상연을 말한다면, 마땅히 그리스 연극 활동을 큰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유럽 열강 등의 외교정책상의 타협의 산물이라고는 1827년 겨우 터키의 통치(統治)에서 벗어나, 독립국 그리스의 탄생 이래, 고대극의 부흥이 국민의식과 연결되었다. 1967년에 발굴된 아테네의 로마시대의 유적 '헤로도스 앗티코스 극장'에서, 이미 소포클레스의 명작 <안티고네>가 상연되었다. 금세기 초기의 연출가 포토스 폴리티스는 옥내의 극장으로 옮겨 근대화에 노력했으나, 주류는 역시 옥외의 공연이며, 1927년에는 고대의 성지(聖地)인 델포이의 유서 있는 극장에서 시케기아노스 부부(夫婦)의 주창(主唱)에 의해 '델포이 연극제'가 개최되었고, 한편 아테네에서는 1936년 이후 헤로도스 앗티코스 극장에 그리스 국립극단이 정착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과 이어 계속된 내전(內戰)으로 고대 극장에서의 활동은 중단되었으나 1955년부터는 외국인을 유치하는 관광정책에 의해 추진된 '아테네 페스티벌'의 테두리 속에서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의 비극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상연이 채택되었고, 더욱이 유적으로서의 보존도(保存度)가 가장 좋은 에피다우루스의 극장을 사용하여 '에피다우루스'라 칭한 연극제도 거행한 바 있다.

국립극단은 알렉시스 미노티스의 연출 밑에, 카티나 파크시누와 안나 시노디누라는, 각기 전전(戰前)·전후의 세대를 대표하는 두 여배우를 중심으로, 특히 코러스 훈련에 힘을 경주하고, 근대 그리스에 의한 정통적인 고대극에의 복고를 기도하여, 에우리피데스의 <헤카베> <메디아> 등에서 성과를 올리고 있는 데 대하여, 칼로로스 쿤이 이끄는 '예술극장'은 자립극단으로서 전부터 전위적인 연출에 특색을 보였고,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人)>과 아리스토파네스의 <새>의 상연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또한 1957년에 디미트리스 론디리스 밑에서 결성된 '피라이콘 극단'은 고대극의 상연 목록을 쥐고, 해외 순회상연을 전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복고운동과 병행하여서 근대 그리스어에 의한 창작도 성하다. 이미 터키로부터 독립하기 이전에 J. 잔베리오스(1787-1856)는 이탈리아의 비극시인 알피에리의 영향 밑에 사극(史劇)을 집필한 바 있는데, 의욕에 불타는 신흥 그리스의 작가군(作家群)이 19세기에 배출되었다. 이오니아 출신의 안토니오스 마테시스(1794-1856)가, 1829년 실러의 영향을 받아 내놓은 5막의 비극 <바실리코스>는 새로운 고전으로서 오늘날에도 상연되고 있으며, 아테네의 데메트리오스 베르날다키스(1833-1907)는 셰익스피어극에서 배운 <마리아 덱사파트리>(1838)를 발표, 1865년 직업극단에 의해 상연되어 특필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민중적 전통에 뿌리박은 장르로서 1880년경부터 가창부(歌唱部)가 있는 희극이 발생했는데, 데메트리오스 코로미라스(1850-1898)의 <마르라의 운명>이 그 대표작이다. 또한 프랑스풍(風)의 풍속희극이 니콜라스 라스카리스(1868-1945)에 의해 창작되었고, 소극작가 티모스 모라이티니스(1875-1952)도 같은 시기에 활약했다.

금세기에 들어와서는 다음에 열거하는 작가군이 독자적인 활약을 보였으나, 1967년 4월 쿠데타로 성립된 군사정권은 연극을 엄한 통제하에 두고, 작곡가이며 가극 <죽은 형제의 노래>(1963)의 작자인 미키스 테오도라키스(1925-)는 정치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추방되었고, 많은 배우가 반(反)정부적인 언동을 추궁받아 출연금지 처분을 받고 있었다. 작품 내용도 검열을 받아야 했으며, 고대극이라 해도, 예를 들어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처럼, 권력에 저항하는 인물을 주제로 한 것은 상연 종목에서 제외되었다. 극평론가(劇評論家) 마리오스 프로리티스가 주재하는 연극 전문지 <테스피스>도 발행이 정지되었었다.

크세노풀로스, 그레고리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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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gorios Xenopoulos(1867-1951)

유럽 각국의 극단에 강한 영향을 준 입센극은 당연히 같은 시대의 그리스 극작가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데, 젊어서 죽은 야니스 캄비시스(1872-1901)의 <쿠르드족>(1847)을 선두로 하여 그레고리오스 크세노풀로스가 그러한 경향의 제1인자이다. <발레레나 백작부인의 비밀>(1904), <포티이니 산드리>(1908), <스텔라 비오란티>(1909), <학생>(1919), <포포라로스>(1933) 등의 일련의 작품이 있다. 금세기 초에 발족한 '왕립극단'과 '네아 스키니'(신무대)가 크세노풀로스극의 상연에 힘썼다. 후자는 또한 코스티스 파라마스(1859-1943)의 중요작품인 <토리세우게니>(1903)를 초연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비참한 아테네의 서민층을 그린 <펜타나키>(1921)의 판테리스 호른(1881-1941), 심각한 사회극의 작가 스퓨로스 메라스(1882-1965)가 이 계통과 연결된다.

그리스 현대극의 작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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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ce現代劇-作家群

두 대전 사이에 등장한 작가로서는 비시리스 로타스(1889-)의 비극 <남편이 발광한다>(1939)가 있고, P. 카기아스(1901-?)는 <사랑의 안내>(1939)에서 가벼운 터치로 인생문제를 다룬 바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가장 심각한 작품을 쓰고, 현재도 활약하고 있는 것은 알레코스 리도리키스(1907)로서, <위험기>로 극단에 진출했다. 안게로스 텔자키스는 사극에 있어서 양심을 둘러싼 영원의 문제를 추구하여, <미카엘 황제>(1936)나 <십자가와 검(劒)>(1939)을 쓰고, 전후에는 <토마스와 그 두 개의 영혼>(1961)을 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白痴)>의 각색으로 알려져 있는 마노리스 스쿨디스(1901-?), 비잔틴 문화에서 착상해 창작을 하고 있는 게오르게 테오토카스(1906-)도 모두 이 세대에 속한다.

카잔차키스, 니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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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os Kazantzakis(1883-1957)시인이며, 소설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리스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작가인데, 시적인 문체의 난해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 1946년에 <카포디스토리아스>, 1959년에는 <배교자(背敎者) 율리우스>, 1962년에는 <메리사>가 각기 상연되었다.

푸사사스, 디미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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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

희극면에서 활약한 디미트리스 푸사사스는 7백회도 넘는 상연기록을 가진 <트럼프꾼>으로 가장 성공한 작가인데, 그 밖에도 게오르게 로소스(1910-?), 니코스 체크라스(1911-?)가 있다.

그리스 현대극의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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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ce現代劇-戰後

전후의 세대로서는 게오르게 세바스티고그(1917- )가 앞서 말한 칼로로스 쿤의 '예술극장'을 위하여 전위적 경향의 작품인 <콘스탄티노스와 헬레네의 축연>(1942)을 쓰고, 같은 계열에는 알렉시스 솔로모스(1918- )와 니코스 치포로스(1911- )가 있다. 게오르게 차베레스(1916- )의 <달 이야기>(1946)는 이색적인 작품으로서, 비참한 운명 속에 가라앉는 고귀한 영혼을 그리고 있다.

스페인의 로르카극의 영향도 현저하며, 노티이스 페르기아리스(1920- )의 <결혼의 노래>(1949), 이아코스·캄파넬리스(1922- )의 <건초 안에서의 춤>(1956)이 있고, 한편 안티 테아트르의 영향은 1959년에 조직된 '12번째의 커튼'으로 불리는 젊은 극작가 그룹에서 볼 수 있다.

에스파냐의 현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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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in-現代劇

'황금세기(黃金世紀)'(시그로 데 오로)의 연극으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에 깊은 영향을 끼친 에스파냐는, 18세기 이후에는 반대로 영향을 받는 입장이 되었다. 즉 프랑스 고전주의가 세운 연극의 규칙은 레안도르 페르난데스 데 모라틴(1760-1828)에 의해 도입되어, 그 낭만주의의 색채는 호세 에체가라이(1833-1916)에 이르기까지, 분명히 엿볼 수 있다.

19세기 말의 극단의 제1인자이며 약 60편의 작품을 쓰고, 1906년에는 노벨상을 받은 에체가라이의 작품은 그 폭이 매우 넓은 것이다. 수학자에서 정치가가 되어, 장관으로 재직 중에는 익명(匿名)의 처녀작 <할부장(割符帳)>(1874)을 발표하고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 본격적으로 극작에 전념했다. 중상(中傷)으로 비극적 결과를 맞는 3각관계를 그린 <무서운 매개(媒介)>(1881)는 그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낭만파풍의 운명극이 빠지기 쉬운 복잡한 줄거리의 구성상 약점을 벗어나 최종 장면까지 극을 무리없이 전개하여 나가는 강한 필력을 보여주고 있다. <돈 환의 아들>(1891)은 입센의 <유령(幽靈)>을 모방한 작품으로서, 그릇된 의사의 진단으로 절망한 주인공은 태양을 찾아 절규하며 죽어간다. <미친 신(神)>(1900)은 종교적 편집(偏執)을 분석한 문제작이다.

거의 같은 시대에 여러 자작소설을 각색한 벤트 페레스갈도스(1843-1920)가 있다. 수녀원으로 들어가는 처녀를 사랑하는 전기기사(電氣技師)를 주인공으로 한 <엘렉트라>(1901)는 물의를 일으켰으나 그 이후로는 오히려 상징주의적인 작품으로 전환한다.

다음으로 볼 수 있는 현대극의 여러 경향과 병행하여, 고전극 부흥의 움직임은 정부에서도 적극 장려하고 있으며, 로오베 데 베가나 칼데론은 물론, 코르네유의 <르 시드>의 원형인 기롄 데 카스트로의 <엘 시드의 청년시대>의 복고적 상연 등 흥미 깊은 것이 많다.

베네벤테, 하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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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into Benavente(1866-1954)

현대의 대작가로서 170편에 가까운 작품이 있으며 1922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유럽 근대극의 모든 특색을 도입하는 수완을 보여주고 있다. 마테를링크의 상징극, 입센류(類)의 자연주의, 소류(類)의 익살스런 문제, 더욱이 프랑스의 풍속희극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는데, 그 교묘한 회화의 진행에는 체호프를 연상시키는 것이 있다. 대표작으로는 이탈리아 희극풍의 <만들어진 이해(利害)>(1909)를 들 수 있다. 베나벤테와 같은 계류(系類)인 알바레스퀸테로 형제(세라핀 1871-1938, 호아퀸 1873-1944)는 안달루시아의 서민생활을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려냈다. 이들 작품으로는 <중정(中庭)>(1900), <꽃들>(1901), <여호도(女護島)>(1920) 등이 있다. 또 그레고리오 마르티네스셰라(1881-1948)는 승려나 가정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많이 썼는데, 대표작으로는 <요람의 노래>(1911) 등이 있다.

마르퀴나, 에두아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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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ardo Marquina(1879-1946)운문극(韻文劇)의 작가로서 '근대파'의 시인이며, 애국적인 서사시극을 많이 썼는데, 대표작으로는 <해는 플랑드르서 졌다>(1910)가 있다. 또한 프란시스코 빌랴스페사(1866-1936)는, 프랑스 <시라노 드 베르즈라크>풍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부르주아 연극에 대한 가장 강한 반항은 시인 라몬 델 발레〓인클란(1866-1936)에게서 볼 수 있다. 이들 작품은 아주 난해하여 상연하기가 매우 어렵다. 특히 야만극(野蠻劇:코메디아스 바르바라스)에 의해 새로운 비극의 장르를 개척하여, 단순한 공포극(恐怖劇)과는 이질적인 세계를 전개한다. 시극으로서는 <후작부인 로자린다>(1912)가 있으며, 독특한 풍자극도 많다.

아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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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zorin(Jose Martinez Ruiz)(1874-1966)

쉬르레알리슴의 작풍에 철저하여 베나벤테 류의 연극을 거절했다. <옛 스페인>(1929)으로 시작되는 3부작이 있다.

우나무노, 미구엘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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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guel de Unamuno(1864-1936)비참한 내전기(內戰期)에 죽은 사상가 미구엘 데 우나무노는 당연히 '삶의 비극적 의미'를 연극에서도 표명(表明)했고, 1933년에는 세네카의 <메디아>를 번역하였으며, 그 밖에 자작소설을 극화한 것들이 많다.

그라우, 하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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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into Grau(1877-1959)

묘한 극작술을 구사하여, 새로운 외국연극의 흐름에 민감한 작품을 보여주고 있는데, 본국보다는 오히려 외국에서 성가(聲價)가 높으며, 대표작 <피그마리온의 두령>(1921)도 우선 파리에서 성공을 거둔 후, 마드리드에서 상연되었다.

로르카, 페데리코 가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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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derico Garcia Lorca(1899-1936)

유럽 여러 나라의 연극의 영향 밑에 놓여 있었던 스페인 연극을 혁신하고, 더욱이 외국의 극단에도 영향을 끼친 대작가 로르카는 가장 애도해야 할 내전 중의 희생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라나다 근처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총살된 이 시인은 미국을 여행한 후, 1931년에 극단 '바락카'를 조직하고 에스파냐 고전연극의 부흥에 분투, 이어 3대 비극 <피의 혼례>(1933), <예르마>(1913), <베르나르다알바의 집>(1934)을 완성했고, 시와 극이 융합하는 경지를 민족적인 소재 중에서 실현했다. 이것은 오늘날 세계 연극의 중요한 상연 종목으로 되어 있다.

알베르티, 라파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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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fael Alberti(1902-?)

정치운동으로 에스파냐에서 추방되어 아르헨티나에 정착했으나 연극의 사회성·정치성을 강조하였고, <페르민 가란>(1931)은 독재정치에 대한 저항을 주제로 하고 있다. 알레한드로 카소나(1903-1965)도 1939년에 아르헨티나로 망명하여 그 후에도 연극활동을 계속했었다. 대표작으로는 <우리들의 나타샤>(1936)가 있다.

미우라, 미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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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guel Mihura(1909-?)

추리극 작가. <대수롭지 않은 여인>(1953) 등이 있다. 알폰소 파소(1926- )는 하층계급을 묘사하는 사회성을 지닌 작가인데, <남편을 위한 독약>(1953) 등의 추리극도 쓰고 있다. 또한 안토니오 부에로〓발레호(1916- )도 사회의 모순 앞에 절망하여, <어느 단계의 이야기>(1949)에서는 20년간에 걸친 한 집안의 역사를 취급했다.

사스트레, 알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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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onso Sastre(1926- )

사르트르극의 영향을 받아 실존주의적인 태도로 1953년에는 <사형수의 수색>을 썼고, 1959년에는 투우사를 주제로 하여 피카소의 그림을 상기시키는 다채로운 작품 <라 코르나다>를 발표하여 화제가 되었다.

북유럽의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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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Europe-演劇

북유럽은 19세기까지만 하여도 덴마크어 문화와 스웨덴어 문화의 지배 밑에 있었다. 북유럽의 몰리에르라고 불리는 루트비히 홀베르크(Ludvig Ho­lberg, 1684-1754)를 제외하고는 북유럽은 주목할 만한 극작가는 없다. 19세기 후반,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난 입센과 스트린드베리는 북유럽의 연극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떨치게 했으나 그 후에도 또다시 빛을 잃고 있다.

노르웨이의 현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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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way-現代劇

홀베르크는 노르웨이 서안의 베르겐에서 태어났다. 코펜하겐에서 활약한 그는 오히려 덴마크의 연극에 속하는데, 대표작 <언덕 위의 옛페>, <에라스무스 몬타누스>는 날카로운 풍자에 가득찬 제1급의 희극이다. 18세기 후반부터 각 도시에 아마추어 극단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19세기에 베르겐에서 극장도 생겼다. 덴마크인의 배우들에게 독점되었던 노르웨이 무대는 올레 불(Ole Bull, 1810-80)이 1850년에 들어와서 연 노르웨이 극장을 얻어 처음으로 노르웨이어에 의한 상연의 길을 터놓기 시작했다. 이 극장에서 입센은 7년간, 뵈른스체르네 뵈른손(Bj

rnstjerne Bj

rnson, 1832-1910)은 2년간의 청년시절을 보냈다.

노르웨이 연극은 입센과 뵈른손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입센은 네살 아래인 뵈른손으로부터 경제적·예술적 도움을 받았다. 비외른손의 사실적 사회 문제극 <파산>(1875)은 입센의 <사회의 기둥>보다 2년이나 앞서 나온 것이다. <인력 이상(人力以上)>(제1부·1883)은 비외른손의 최고걸작으로 이름높다. 그 뒤에 나온 사실주의 작가로는 군네르 헤이베르크(Gunner Heiberg, 1857-1929)가 유명하다.

금세기의 노르웨이 무대는 많은 배우들을 낳았는데, 극작은 헬게 크로크(Helge Krog, 1889-1963)와 노르달 그리크(Nor­dahl Grieg, 1902-1943)로 대표된다. 크로크는 입센 계통의 사실주의 작가로서 <도상(途上)>(1931), <결별(訣別)>(1936) 등이 있다. 그리크는 표현주의로 기울어졌는데, <패배>(1937)는 파리 코뮌에서 제목을 딴 걸작이다. 제2차 세계대전중 나치 점령군에게 지배되었던 노르웨이 극장은, 전후에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일련의 새로운 연출법인 '페르귄트' 연출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객연(客演)되어 주목을 끌었다. 작가로서는 보르겐(J. Bor­gen, 1902-?), 베소스(T. Vesaas, 1897-?), 스카게스타(T. Skagestad, 1920- ), 비외르네베(J.Bj

rneboe) 등이 주목할 만하다. 한편, 두 종류의 노르웨이 공통어 중 소수세력인 신(新) 노르웨이어는 오슬로의 노르웨이 극장을 본거지로 하여 그 진보성을 자랑하고 있다. 신 노르웨이어의 극작가로서는 가르보르크(A. Garborg, 1863-1953), 뒤운(O. Duun, 1876-1939) 등이 유명하다.

덴마크의 현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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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mark-現代劇

18세기의 홀베르크에 이어 19세기 초엽의 낭만파를 대표하는 극작가로서는 엘렌실레게르(A. Oehlenschl

ger, 1779-1850)가 있다. J.L. 헤이베르크(1791-1860)와 함께 그는 청년기의 입센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극작면에서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후광을 입고 있던 덴마크도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카이 뭉크(Kaj Munk, 1898-1940), 셰르 아벨(Kjeld Abell, 1901-1961)의 주목할 만한 두 작가를 낳았다. 나치에게 학살된 뭉크의 애국적 희곡 <닐스 엣베센>, 헤롯왕(王)의 이야기를 취급한 <이상주의자>는 덴마크 근대극의 대표작이다. 아벨은 반(反)자연주의 작가로서 <안나 소피 헤드비크> <구름 위의 나날> 등을 썼다. 나치 점령기의 저항운동은 아벨의 <시르케보르크>, 피셰르(L. Fischer, 1904-1956)의 <전선(戰線)>, 소야(C. M. Soya, 1896-?)의 전후작(前後作) <후일(後日)에> 등에 반영되어 있다. 1950년 이후의 덴마크 연극은 시극열(詩劇熱)에 덮여 있다.

스웨덴의 현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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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den-現代劇

18세기에 들어와 처음으로 직업극단이 생긴 스웨덴 연극은, 올로프 달린(Olof Dalin, 1709-1763)이 그 대표작가이다. 구스타프 3세때, 오페라가 유행하기 시작한 이후, 스웨덴의 연극은 융성의 길을 걷고 있다.

19세기의 낭만적 경향은 무대면에서 매우 현저했다. 1819년에 상연된 <햄릿>, 21년 실러의 <마리아 슈트아르트>가 새로운 시대를 알렸다. 뛰어난 배우가 속출하고, 1853년의 <햄릿>에서 27세로 주역을 맡은 에두아르드 슈바르츠는 내면적인 연기기술의 개척에 큰 공훈을 세웠다.

스웨덴 연극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스트린드베리에 의해서이다. 1880년대에 그와 똑같은 자연주의적 경향을 대표하는 작가로서는 레플레르(A. C. Leffler, 1849-1892)나 베네딕트손(V. Benedictsson)이 있었다. 스트린드베리의 표현주의적 작풍을 계승한 사람은 라게르크비스트(P.F. Lagerkvist, 1891-1974)이다. <천국의 비밀>(1919), <자기의 생명을 되살린 사나이>(1928) 등을 쓴 그는 소설가로서도 유명하여, 1951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이 밖에 벨그만(H. Belgman, 1883-?), 다게르만(S. Dagerman, 1923-1954) 등도 중요하다. 오늘날 스톡홀름뿐만 아니라, 웁살라, 마르메 등의 도시에서도 연극이 성하며 스웨덴이 북유럽 연극의 중심지가 되었고, 가장 진보적이고 높은 수준에 있다 함은 모두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핀란드와 아이슬란드의 현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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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land-Iceland-現代劇핀란드는 스웨덴어(語)를, 덴마크는 아이슬란드어를 오랫동안 공용어로 사용해왔기 때문에, 자국어(自國語) 문학의 발전이 늦었다. 핀란드어 극장이 처음으로 생긴 것은 1872년이었다. 또 창성기(創成期)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키비(A. Kivi), 칸트 부인(M. Canth)이 있다. 오늘날 인구 4백만의 핀란드가 7천 이상의 아마추어 극단과 많은 극장을 갖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일반인의 연극적 흥미의 깊이를 알 수 있다. 한편 전체의 8-9%의 스웨덴어 인구를 위해, 5개의 스웨덴어 극단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헬싱키의 스웨덴 극장은 유명하다.

아이슬란드 연극은 19세기 낭만파의 국민시인 요쿰손(M. Jochumsson, 1835-1920)에 의해서 시작된다. 그의 작품 <무법자>는 오늘날에도 되풀이되어 상연되고 있다. 최초의 무대 창립에 공을 세운 에이나르손(I. Einarsson, 1851-1939)에게는 <원단(元旦)의 밤>(1871)이 있다.

1911년 아이슬란드 대학이 설립되고, 1918년에 덴마크로부터 벗어난 다음에는 차츰 자국어의 문학이 일어나 스테판손(D. Stefansson, 1895-1964), 토어다르손(A. Thojarssbon, 1917- ) 등의 극작가가 나왔다. 노벨상을 받은 락스네스(X. Laxoess, 1902-?)의 뛰어난 희곡도 있다. 수도인 레이캬비크의 인구는 5만여 명이며, 2개의 레퍼터리 극장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