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신극/한국의 신극〔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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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新劇〔序說〕 한국의 신연극(新演劇)은 그 시작을 1908년으로 잡는 것이 정설이다. 이 해에 우리나라 최초의 '신연극장'인 '원각사(圓覺社)'가 세워졌고, 당시 신문사 사장이며, 신소설 작가였던 이인직(李人稙)이 '아국연극을 개량하기 위하야 신연극'을 상연할 것을 처음으로 그리고 뚜렷하게 언명했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1902년에 '협률사(協律社)'라는 이름으로 한국 최초의 상설 실내극장(室內劇場)이 있기는 하였으나 여기에는 신연극에 대한 목적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튼 이인직의 시도를 최초의 것으로 삼는다. 이인직이 의도한 '신연극'이란 같은 해에 상연되었다는 그의 첫작품 <은세계(銀世界)>가 바로 자기의 신소설을 각색(脚色)한 것임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 목표는 '정치사상의 계몽을 도(圖)하고자' 한 데 있었고 방법은 종래의 창부(倡夫)를 지도해서 만든 일본의 신파극(新派劇) 초기를 방불케 하는 이른바 '소시 시바이(壯士芝居)'의 아류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지도층 인텔리의 한 사람이었던 이인직의 개척적 시도는 그것으로 끝나버리고 실제로 뒤를 이어 한국연극을 발전시킨 인물은 일본연극의 그것도 이미 시대착오(時代錯誤)적 대중성에 젖은 초기 신파극에서 전부를 얻어 온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革新團)'이었다. 이 단체는 1911년에 <불효천벌(不孝天罰)>이라는 연극으로 막을 열게 되는데, 그 중 가장 인기가 있었다는 <육혈포강도(六穴砲强盜)>를 포함하여 거의 전부가 일본 초기 신파의 번안이 아니면 아류로서, 계몽적이거나 최루성(催淚性)을 띤 군사극·탐정극·가정비극·화류비극 그리고 <장한몽(長恨夢)> <불여귀(不如歸)> 등과 같은 신문소설의 각색물(脚色物)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1910년대 초에 도입된 이 신파극이 한국인 관객의 연극에 대한 정서적 반응(情緖的反應)의 고정된 틀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는 것이다. 한편 근세 서구(西歐)의 새로운 사조(思潮)와 방법에 영향받아 연극의 문학성을 강조하는 보다더 지적(知的)인 이른바 '신극' 운동은 그 시초를 어디다 두느냐에 이견(異見)이 있으나 1923년에 교토 유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시작한 '토월회(土月會)'로부터 연유한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이들이 영향 받은 원류(源流)가 레퍼토리나 기타 여러 가지 면으로 보아, 일본의 '문예협회(文藝協會)'나 '예술좌(藝術座)'에 있는 것에 의심이 없다고 보면, 대체로 한국 신연극에 있어서의 근대적 자각은 1920년대 이후에 비로소 싹텄다고 보아야겠다. 그것이 1931년에 들어와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로 발전됨으로써 '신극'으로서의 면모는 아주 뚜렷하게 되는데, 상업주의적 신파극이 대중의 기호를 독점하는 반면에 신극운동은 한국 현대극의 주류로서의 긍지와 자부(自負)를 일단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 흐름이 좀더 연륜(年輪)과 경험을 쌓아가면서 연극이 필요로 하는 각 분야의 인재를 양성하고, 존립(存立)의 기반을 굳건히 해 왔더라면 한국 연극도 쉽사리 성년(成年)에 도달할 수 있었으련만 1940년대 초부터 잇따라 생겨난 나라 안팎의 큰 소용돌이, 일제의 강압적 문화정책, 광복, 그 뒤에 닥쳐온 좌우항쟁의 혼란, 그리고 비극적인 6·25전쟁 등등으로 해서 연극계는 시달림의 극한을 헤매게 되었다. 그러므로 정치적, 군사적 수복 뒤에도 오랜 후유증(後遺症)에서 치유되기 힘들었으며 195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한두 개의 의욕적인 공연활동을 빼놓고는 한국연극은 불모(不毛)를 청산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첫째 극작가를 배출해 내는데 실패했으며, 둘째 공연활동의 장소와 관객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고, 셋째 연기자 양성에 지지부진한 결과를 초래했다. 1950년대 후반에서부터 시작된 국산영화 제작의 본격화와 방송매체의 대두에 따라 상업주의 연극은 거의 생명이 끊겼고, 신극운동은 전문화·직업화의 계기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새로운 세대의 극계진출과 아울러 한국신극은 뿌리 없는 그러나 상대적으로 비교적 신선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러한 노력은 우선 동인제(同人制)라는 시작하기 쉽고 각자의 주장을 반영시키기 알맞은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거기에 따라 레퍼토리의 폭은 넓어지고 성격이 새로워졌고, 때로는 실험에의 의욕도 보여 주었다. 이와 병행해서 새로운 극작가의 발굴과 창작극의 개발이라는 명제가 뚜렷이 의식되기 시작했고, 1970년을 전후해서는 전통극 형태에 대한 재검토 기운도 성숙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국연극이 그동안 급격하게 진행된 사회변천에 부응하면서 정착하기에는 아직 너무나도 많은 난제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呂 石 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