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연극〔서설〕
韓國-演劇〔序說〕 한국 연극의 장르는 가면극, 인형극, 판소리, 창극(唱劇), 신파극(新派劇), 신극(新劇)의 여섯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한국 연극의 기원도 다른 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대 제의(祭儀)에서 찾을 수 있겠다. 예컨대 부여(扶餘)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濊)의 무천(舞天), 마한(馬韓)의 춘추농경제, 가락(駕洛)의 계욕 등 어느 부족사회에 있어서나 1년에 한두 차례 제천과 아울러 가무백희(歌舞百戱)를 하였다고 하는데, 이때에 우리의 연극이 배태되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고대 제의는 현존한 동제(洞祭)의 민속에서 그 유풍을 찾을 수밖에 없으며, 그 연행된 가무백희도 현존한 동제의 농악이나 각종 가면희에서 그 모습을 짐작할 수밖에 없겠다. 삼국 중에서 고구려의 악무(樂舞)는 일찍이 서역악(西域樂)의 영향을 받아 발달하였으며, 중국의 수(隋)·당(唐)과 일본에도 전해져서, 수의 7부기(七部伎)와 9부기, 당의 10부기에 들었고, 일본에서는 고마가쿠(高麗樂)라 하여 삼국악의 총칭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특히 일본에 전해진 고마가쿠 24곡 중 12곡이 모두 가면무이며, 백제가 전한 기악(伎樂)과 함께 이러한 대륙 전래의 악무가 한국과 일본 연극의 하나의 연원이 된 것이 사실이다. 신라는 7세기 후반에 삼국을 통일하고, 가야·백제·고구려의 악무를 함께 집성하여 후대에 전한 것이 제일 많았다. 그 대표적인 종목을 들어보면 검무(劒舞)·무애무(無▩舞)·처용무(處容舞)·오기(五伎) 등으로서, 그 중 처용무는 고려와 조선조에까지 계승되어, 처용면을 쓰고 추는 궁중무극(舞劇)으로 연행(演行)되어 왔다. 오기는 금환(金丸)·월전(月顚)·대면(大面)·속독(束毒)·산예의 다섯 가지 놀이로서, 이 놀이들을 최치원(崔致遠)은 신라 고유의 향악이라고 읊었지만, 그 내용으로 보아 중국과 서역 전래의 산악(散樂) 등에서 영향받은 삼국악을 종합한 놀이들임을 알 수 있다. 고려조는 신라의 유풍인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를 계승하여, 이때에 신라 이래의 백희(百戱)를 함께 거행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색(李穡)의 시 산대잡극(山臺雜劇)에서 짐작할 수 있는바, 일종의 장식무대인 채붕(綵棚)과 함께 가악무와 기기곡예(奇伎曲藝)들로 되어 있다. 조선조에는 나례도감(儺禮都監) 또는 산대도감(山臺都監)을 두어 산대희(山臺戱)를 관장하고, 나라의 공의(公儀)로써 연행하여 왔으나, 임진·병자 양난을 겪은 뒤로는 쇠운에 접어들어 18세기 후반 정조조(正祖朝)에는 정파(停罷)되고 말았다. 이 공의로써 정파된 연기자들의 지방 정착으로 현존하는 민속으로서의 산대도감 계통극인 경기 일원의 산대극, 해서지방의 탈춤, 영남지방의 오광대(五廣大)와 야유(野遊), 그리고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 등의 드라마가 형성되어 갔다. 가면극과 인형극 외에 조선조 후기의 특수한 연극 장르로는 판소리를 들 수 있다. 판소리는 대체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선구자인 판소리광대들에 의하여 개척된 독연(獨演) 형태의 극예술로서, 18세기 중엽에는 <춘향가> 이하 열두 마당의 고정된 레퍼토리를 갖기에 이르렀다. 18세기 후반 신재효(申在孝)가 전래하던 판소리 열두 마당을 여섯 마당의 극본으로 재정리하여 구전문학(口傳文學)에서 문자로 고정시키기에 이르렀다. 판소리는 20세기에도 계승되어, 1908년 이인직(李人稙)의 '원각사' 극장 이후 배역(配役)과 합창이 시도되고, 조선성악연구회에 이르는 동안 창극으로 정립되어 갔다. 이 창극을 구극(舊劇) 또는 국극(國劇)이라고도 부른다. 1902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옥내 상설극장이요, 또 황실극장격인 '협률사(協律社)'가 개장되었다. 그 뒤를 이어 최초의 신연극장인 '원각사(圓覺社)'가 이인직에 의하여 1908년 7월에 창설되었으며, 11월에 이르러 우리나라 신연극의 첫작품인 이인직의 <은세계(銀世界)>가 공연되었다. 한국 신연극사의 제2기에 해당되는 1910년대의 10년간은 신파극(新派劇)으로 시종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활약한 연극인과 극단들로는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革新團)', 윤백남(尹白南)의 '문수성(文秀星)', 그리고 이기세(李基世)의 '유일단(唯一團)'을 들 수 있고, 그들의 레퍼토리는 정치극에서 출발한 일본의 신파극을 번안하여 상연하였으나, 점차 민중 계몽극으로 변모하여 갔다. 3·1운동 이후 근대극이 태동되고, 김우진(金祐鎭)이 주도한 '동우회(同友會) 순회연극단'의 뒤를 이어 '예술협회'와 '민중극단'이 생기고, 박승희(朴勝喜)에 의하여 주도된 '토월회(土月會)'가 20년대의 근대극 운동을 대표한다. 1930년대의 신극 확립은 유치진(柳致眞)과 서항석(徐恒錫) 등에 의해 주도된 '극예술연구회'가 담당하였고, 일제 말기의 이른바 국민연극의 암흑기를 지나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의 좌우익 투쟁의 혼란기와 한국전쟁을 겪고, 6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신극은 점차 중흥의 시기를 맞이여, 새로운 국립극장도 개관을 보았고 극계는 서양 연극의 모방이 아닌 한국연극으로서의 신극의 등장을 지향하고 있다. <李 杜 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