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사회 I·문화재/문 화 재/중요 문화재/서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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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편집]

崇禮門

서울 중구 남대문로 4가에 있으며, 우리나라 국보 제1호이다. 남쪽에 있다 하여 보통 “남대문(南大門)”이라 불린다. 남대문 현판에는 “남대문(南大門)”이라고 씌어 있지 않고 “숭례문(崇禮門)”이라고 씌어 있는데 “숭례”란 예를 받든다는 뜻이며, 태종의 첫째 아들 양녕대군의 글씨이다. 태조 7년(1398)에 준공하여 세종 30년(1448)에 처음으로 개수(改修)했고 성종(成宗) 10년(1479)에 다시 중수를 한 것이 문헌 및 1963년 보수할 때 발견된 묵서상량문(墨書上樑文)을 통해 밝혀졌다. 현재의 건물은 수리를 거듭하는 동안 다소 부분적으로 변형된 예도 있겠으나 비교적 성종 당시의 양식을 충실하게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확신할 수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서울의 상징이기도 하다.

흥인문[편집]

興仁門

본래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文)이며 현재의 동대문으로 보물 제1호이다. 종로구 종로 6가에 있다. 태조 5년(1396)에 창건하고 단종(端宗) 1년(1453)에 고쳤으며 고종(高宗) 6년(1869)에 중건되었다. 이 문은 정면, 즉 동쪽의 앞면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다가 끝만을 터 놓은 반원형의 축성, 즉 옹성(甕城)이 있어 유명하며 옹성 윗면에는 앞뒤로 여장을 쌓고 각각 총안(銃眼)을 내어 방비용으로 삼고 있다.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목조 건축물이다.

진흥왕 순수비[편집]

眞興王巡狩碑

국보 제3호.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새로 공략한 국경지대를 순시한 다음 세운 기념비. 진흥왕은 백제의 영토인 한강(漢江) 중류지대를 차지하고, 고구려 땅인 함주(咸州)·이원(利原) 근방까지 정복하여 신라 최대의 영토 확장에 힘썼는데, 이를 기념하고자 순시(또는 순수)한 곳마다 기념비를 세우게 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순수비로는 창녕비(昌寧碑)·북한산비(北漢山碑)·황초령비(黃草嶺碑)·마운령비(摩雲嶺碑) 등 4개가 있다.

경복궁[편집]

景福宮

사적 제117호. 조선시대 궁궐로서 서울 북악산(北岳山) 남쪽 기슭(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자리잡고 있다. 태조 3년(1394)에 서울을 한양(漢陽)으로 천도하고 신도궁궐도감(新都宮闕都監)을 두어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이직(李稷)·심덕부(沈德符) 등에 명하여 궁궐을 짓게 하였다.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光化門), 북쪽에는 신무문(神武門), 동쪽에는 건춘문(建春文), 서쪽에는 영추문(迎秋門)을 두었다. 근정전(勤政殿)의 둘레에는 근정문(勤政門:南門)을 비롯한 4문이 있었고, 북쪽 사정전(思政殿)은 편전(便殿)이며, 강녕전(康寧殿)·교태전(交泰殿) 등의 침전(寢殿), 그 밖에 무수한 전당·누각이 있었다. 태종 12년(1412)에 경회루(慶會樓)를 창건하였다. 선조 24년(1592) 임진왜란 때 모두 타서 없어졌던 것을 26대 고종 4년(1867)에 대원군이 재건하였으나 국권침탈 후 정면에 총독부 청사를 세우느라 대부분 철거되고 근정전·경회루·향원정(香遠亭)·집옥재(集玉齋) 등만이 남아 있다. 궁명(宮名)은 시경(詩經)의 “君子萬年 介爾景福”이란 글귀에 유래한다.

경복궁 근정전[편집]

景福宮勤政殿

국보 제233호. 경복궁의 정전(正殿)으로 고종 4년(1867)에 준공하였다. 정면 5칸(길이 30m), 측면 5칸(길이 21m)의 현존하는 최대 목조건물이다. 상층에서는 가운데 칸을 제외하고는 각 칸의 폭이 아래층의 그것보다 좁아져서 전체 건물에 안정감을 준다. 궁전은 넓은 중층의 석단 위에 세워졌고 석단의 4면에는 역시 돌로 된 난간이 둘려지고 동서남북에 각각 쌍봉운문(雙鳳雲文)을 조각한 돌계단이 있어 화강암판을 깐 뜰과 연결된다. 안에는 10개의 높은 기둥을 정면에 4개, 측면에 3개를 세워 천장을 받드는 동시에 궁전 안을 중앙부의 내진(內陣)과 주위를 도는 외진부(外陣部)로 갈라 놓는 역할을 겸하게 하였으며, 중앙칸 북쪽 후면에 방형의 보좌(寶座)를 두고 그 단상에 어좌와 다시 그 뒤에 오산 일월을 그린 병장을 세우고 그 위에 화려한 보개(寶蓋)를 달았다. 웅대한 규모와 내외의 장식이 우미하여 조선시대 말기 건축의 훌륭함을 보여준다.

경회루[편집]

慶會樓

국보 제224호. 경복궁 내 서쪽 방형의 연못 복판에 세워진 규모가 큰 누각이다. 태종(太宗) 때에 중국 사신을 영접하여 연회를 베풀기 위해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고종 때에 경복궁의 재건과 더불어 건립했다. 이 누각의 특색은 누를 받드는 48개 석주의 장려한 아름다움이라 하겠는데 바깥은 방형기둥, 안쪽은 모두 원형기둥으로 이루어지고 마루바닥 아랫부분에는 마루의 귀틀들을 숨기기 위해 단청을 한 우물 천장으로 형성되었다. 누 위의 마루는 안으로부터 3분하여 단(段)을 낮추었고 내부가 개폐되도록 사분합창(四分閤窓)이 안쪽에 달렸다. 규모가 웅장한 점에 있어 근정전 다음 가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경복궁 향원정[편집]

景福宮香遠亭

경복궁 후원에 있는 누각(樓閣). 2층 규모의 익공식(翼工式) 기와지붕. 누각의 평면은 정육각형이며, 장대석(長臺石)으로 단을 모으고, 짧은 육모의 돌기둥을 세웠다. 1·2층을 한 나무의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4분합(四分閤)을 놓았다. 특히 연못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는 향원정의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1867∼187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경천사 십층석탑[편집]

敬天寺十層石塔

국보 제86호. 고려 29대 충목왕 4년(1348)에 건립된 대리석으로 된 석탑. 서울 경복궁 안에 있다. 별 모양의 3층 기단 위에 같은 모양의 탑신 3층을 올리고, 그 위에 네모 탑신 7층을 올렸다. 기단 둘레에 약각으로 불상·보살상·조화 등이 있으며, 탑신의 전면에는 부처·보살 등이 조각되어 있다. 원래 경천사에 있었는데 일제 때 일본인들이 가져갔다가 다시 되돌려와 지금의 장소에 건립하였다. 높이 약 13m.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편집]

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국보 제101호. 사각당형 부도로서 강원도 원성군 부론면에서 발견되어 현재 경복궁에 소장되고 있으며, 건립 연대는 1085년이다. 세부가 매우 화려하고 섬세한 수법으로 이루어져 당대의 청자기와 함께 고려 미술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부도로서 중요하다. 높이 6.1m. 이 탑은 6·25전쟁 중에 포탄에 맞아 크게 파손된 것을 복원 수리한 것이다.

갈항사 삼층석탑[편집]

-三層石塔

국보 제99호. 갈항사 절터에 있던 2기(基)의 3층 석탑. 일제 때인 1916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신라 35대 경덕왕 17년(758)에 조문 황태후(照文皇太后), 경신 대왕(敬信大王)의 이모, 외숙인 언적 법사(言寂法師) 등 세 사람에 의하여 세운 것이다. 동탑(東塔) 4.3m, 서탑(西塔) 4m.

남계원 칠층석탑[편집]

南溪院七層石塔

국보 제100호. 고려 때의 7층 화강암(花崗巖) 석탑. 고려 석탑의 양식(樣式)을 가장 잘 나타내었으며, 웅장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경기도 개성시 덕암동(德岩洞)에 있었던 것을 1915년 경복궁으로 옮겨 세웠다. 높이 7.54m.

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편집]

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

국보 제102호.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골호형의 부도로서 강원도 중원군 동량면에서 발견되어 현재 서울 경복궁에 소장된 1017년에 건립된 탑, 높이 2.55m. 넓게 퍼진 기단부는 안정감을 주며, 특이한 석재는 부드러운 느낌을 드러낸다.

풍기대[편집]

風旗臺

보물 제847호. 풍향이나 풍속을 관측하기 위해 깃발을 단 깃대의 받침대. 높이 228.1㎝의 화강석으로 하부 대석은 상 모양, 그 위로 구름무늬가 조각된 8각 기단, 그 위로 깃대를 꽂았던 구멍(지름 3.5㎝)이 나 있다.

창경궁[편집]

昌慶宮

사적 제123호. 서울 종로구 와룡 1동에 있다. 지금의 창경원의 일곽(一廓). 조선 9대 성종 14년(1483)에 세조·덕종·예종 등 세 분의 왕후를 위해 옛 수강궁(壽康宮) 자리에 세운 궁궐. 성종 15년(1484)에 완성. 임진왜란 때에 불탄 것을 15대 광해군 8년(1616)에 중수. 대궐 안에 있는 많은 건물 중, 명정전(明政殿)과 홍화문(弘化門)의 건축 수법은 특히 우아,장중하다. 1909년 27대 순종이 창경궁 울 안에 박물관·동물원·식물원 등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옛 궁궐로 복원,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창경궁 명정전[편집]

昌慶宮明政殿

국보 제226호. 창경궁의 정전으로 성종(成宗) 14년(1484)에 건립되어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재건하여 현재에 이른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정전과는 달리 동향(東向)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며, 이는 이 궁전의 위치가 원래의 수강궁(壽康宮)이던 점으로 보아 수강궁이 정계를 떠난 상왕(上王)의 은거처이기 때문에 왕궁남면(王宮南面)이라는 기본 원칙을 피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궁전의 평면은 16개의 평기둥과 전반부의 4개의 높은 기둥으로 형성됨으로써 앞쪽 면에만 퇴간(退間)을 두게 되어 있다.

홍화문[편집]

弘化門

보물 제384호. 창경궁의 정문으로 동쪽을 향한 대문이다. 홍화문은 조선시대 초기의 양식을 보이며 몹시 안정되고 침착한 인상을 주는 조선시대 중기의 대문이다.

덕수궁[편집]

德壽宮

사적 제124호. 서울시 중구에 있다.

임진왜란 뒤 선조(宣祖)가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였는데,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1897년(고종 34) 고종(高宗)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이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큰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1905년 즉조당(卽祚堂)·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함녕전(咸寧殿)등이 중건되었다. 1906년 대안문(大安門)이 수리된 뒤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고 정문으로 삼았다. 1907년(순종 1) 순종(純宗) 즉위 후 고종은 이름을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궁 석조전[편집]

德壽宮石造殿

구한말에 세워진 서울 덕수궁 안의 궁전. 1900년 기공, 1909년 준공한 최초의 서양식 건물. 구한말 총세무사 브라운의 권유로서 영국 사람 하딩(G. R. Harding)이 설계했으며 그리스 건축을 조형(祖型)으로 르네상스 양식을 가미한 이른바 콜로니얼 스타일(식민지 양식) 건물로서 같은 모양의 건물이 18세기 이후 영국 식민지의 여러 곳에 세워진 바 있다. 1950년 6·25전쟁 중 전화(戰火)를 입어 석조의 구조만을 남기고 전부 소실된 것을 1953년 수리하였으며,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덕수궁 중화전[편집]

德壽宮中和殿

보물 제819호. 덕수궁에 있는 정전(正殿). 경운궁 옛터에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부터 옮겨와 1906년(고종 43)에 중건한 건물이다. 처마의 곡선이 날카롭고 추녀의 앙곡(昻曲)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등 조선 말기의 양식이 두드러진다. 1902년(고종 39)에 세워졌으나 1904년에 불에 탄 것을 1906년에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중화전이 중층(重層)으로 규모가 컸을 때는 중화문의 규모도 컸으나 중화전의 축소 중건으로 이 문도 위축되었다.

덕수궁 함녕전[편집]

德壽宮咸寧殿

보물 제820호. 덕수궁 안에 있는 조선시대의 목조건물. 고종(高宗)이 왕위를 물려준 다음 순종(純宗)이 창덕궁으로 옮기자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寢殿)이다. 함녕전 남쪽으로는 행각(行閣)이 있고 치중문(致中門)과 봉양문(鳳陽門)이 있으며 정문은 광명문(光明門)이다.

덕수궁 즉조당[편집]

德壽宮卽祚堂

덕수궁 안에 있는 조선 말기의 목조건물. 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피난갔던 선조가 난이 수습된 뒤에 돌아와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하였다. 1623년(인조 즉위년) 반정(反正)으로 인조가 즉위한 뒤에 즉조당이라 불렀다. 고종이 상왕이 된 뒤 거처하던 궁궐로서 궁명(宮名)을 덕수궁으로 바꾼 뒤인 1907년부터 1911년까지는 후비인 엄비(嚴妃)가 거처하였다.

창덕궁[편집]

昌德宮

사적 제155호. 서울시 종로구에 있다. 조선시대 임금이 상주하며 정치를 하던 궁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1912년부터는 창덕궁의 후원인 비원(秘苑)과 아울러 인정전(仁政殿) 등의 중심부와 낙선재(樂善齋) 등을 일반에게 공개 관람시키고 있다. 창덕궁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고궁이며, 특히 비원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궁궐 후원이라는 점과 우리나라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창덕궁 인정전[편집]

昌德宮仁政殿

국보 제225호. 창덕궁의 정전. 태종 5년(1405)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후 다시 재건되었으나 순조(純祖) 3년에 또 한 차례의 화재를 당한 것을 같은 해 4년에 세 번째의 건립을 보았다.

돈화문[편집]

敦化門

보물 제383호. 창덕궁의 정문. 태종 12년(1412)에 건립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우진각, 다포집으로 원래는 장대석(長台石)의 기단과 층계가 있었다. 초기의 숭례문에 비해 세부가 섬세화되어 그만큼 연대를 내릴 수도 있겠으나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어 재건되었는지의 여부는 가리기 힘들다. 조선시대 중기의 건물로서 창덕궁 안의 여러 건물 가운데서 제일 오래된 건물임에는 틀림없다.

낙선재[편집]

樂善齋

창덕궁 동남쪽에 있으며, 조선시대인 1847년 헌종 13년에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집이다. 낙선재의 뒤뜰은 석단(石段)으로 화계(花階)를 조성하고 석함(石函)·석련지(石蓮池)·굴뚝을 조화있게 늘어놓았으며, 한국 전통적 정원의 대표적인 형태를 보여 준다. 또 아름다운 창살·난간·굴뚝·담장들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다. 순종의 비 윤씨가 이곳에서 지냈으며, 영친왕의 비인 이방자 여사도 이곳에서 지냈다.

창덕궁 대조전[편집]

昌德宮大造殿

보물 제816호. 창덕궁 내전의 정당(正堂). 창덕궁 내전 가운데 첫째 가는 건물. 성종·인조·효종이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태종 때 창건되었으나 연대는 확실하지 않고 1496년(연산군 2)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대조전은 여러 차례의 소실·재건으로 본건물 및 그 부속건물이 많이 변화되었다. 현재의 대조전은 1919년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을 헐어 옮겨 지은 것이다. 조선 말기 황실 내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창덕궁 선정전[편집]

昌德宮宣政殿

보물 제814호. 창덕궁 외전의 편전(便殿).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로, 인조반정 때 창덕궁의 화재로 불탔으나 1647년(인조 25)에 중건되었다. 왕과 왕비가 여러 행사를 벌이던 장소로, 성종 때에는 왕비가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고, 누에 치는 일을 시범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창덕궁 건물 가운데 청기와를 덮은 유일한 건물이다.

비원[편집]

秘苑

창덕궁 북쪽에 창경궁과 붙어 있는 최대의 궁원(宮苑). 옛날에 임금의 소풍·산책지로 설계된 후원(後園)으로 조선 3대 태종 5년(1405) 10월 별궁으로 지은 것인데, 14대 선조 24년(1592) 임진왜란 때에 불타 없어지고, 15대 광해군 1년(1609)에 중수했다. 많은 전각(殿閣)과 누각과 정자가 신축·수축되어 시대에 따른 특색을 보여 주며, 울창한 숲 속에 영화당(映花堂)·주합루(宙合樓)·서향각(書香閣)·영춘루(迎春樓)·소요정(逍遼亭)·태극정(太極亭)·연경당(演慶堂) 등 운치 있는 여러 정자와 연못들이 있으며, 옥류천(玉流川)의 맑은 물이 흐른다. 창경궁을 합한 창덕궁의 총면적 20만 3,769평 중 창경궁은 5만 3,600여 평이고, 비원은 6만 1,937평이다.

서울 문묘대성전[편집]

-文廟大成殿

대성전은 문묘의 정전으로 공자의 위패(位牌)를 모신 곳. 이 시기에 많이 만들어진 대성전 중에서 건물의 규모나 구조 면에서 대표적인 건축물이 서울 명륜동(明倫洞)에 있는 문묘 대성전이다. 이 건물은 태조(太祖) 7년(1398)에 창건되었다가 2년 후에 소실되고 다시 중건했다가 임진왜란 때에 또 소실되어 선조(宣祖) 34년(1601년)에 재차 건립된 것이다.

정릉[편집]

貞陵

사적 제208호.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조선 태조의 비(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능. 원래 정동(貞洞)에 있었던 것을 태종 9년에 옮겼다.

선정릉[편집]

宣靖陵

사적 제199호.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릉(宣陵)과 정릉(靖陵). 선릉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成宗)과 그의 계비(繼妃)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의 능이다. 정릉은 조선 제11대 왕 중종(中宗)의 능이다. 원래는 장경왕후(章敬王后)의 희릉(禧陵)과 함께 동원이강을 이루고 있었는데,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풍수상 수파(水破)가 불길하다 하여 명종 17년(1562)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태릉[편집]

泰陵

사적 제201호. 서울시 도봉구 공릉동에 있다. 조선 11대 중종의 왕비 문정(文定)왕후 윤씨(尹氏)의 능과 고려 6대 성종(成宗)의 생부(生父) 욱(旭)의 능이 있다. 성종 1년(982)에 생부를 대종(戴宗)이라 추존하고 봉릉(封陵)하였다.

헌인릉[편집]

獻仁陵

사적 제194호.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릉(獻陵)과 인릉(仁陵). 헌릉은 조선조 제3대 태종(太宗)과 그의 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능이며, 인릉은 조선조 제23대 순조(純祖)와 그의 비 순원왕후(順元王后)의 능이다.

종묘[편집]

宗廟

사적 제125호. 서울시 종로구에 있다. 조선 시대 역대 임금과 비(妃), 그리고 추존(追尊)된 왕비의 위패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 4대 세종 3년(1412)에 세운 영녕전(永寧殿)은 임진왜란 때에 타버리고, 지금 남아 있는 묘우(廟宇)는 14대 선조 41년(1608)에 다시 세운 것이다.

종묘 정전[편집]

宗廟正殿

국보 제227호.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셔 놓은 곳. 그 옆의 영녕전에는 이성계의 선대 4조의 신주가 모셔져 있고, 공신당에는 조선 왕조의 공신 83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수표교[편집]

水標橋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조선 4대 세종(世宗) 때에 놓은 다리. 서울 종로구 수표동에 있었으나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장충단 공원에 옮겼다가 1973년 다시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겨 보관중이다. 6각형의 큰 화강암 석재로 된 달기둥 위에 길게 모난 횃대를 걸치고, 돌을 깐 매우 드문 수법의 다리이다. 돌기둥에 새긴 경(庚)·진(辰)·지(地)·평(平)의 수위표(水位標)로 물깊이를 재어 홍수에 대비했다.

독립문[편집]

獨立門

사적 제32호.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다. 독립협회가 건양 1년(1896)에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세운 문(門). 러시아인의 설계에 따라 세운 것으로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방하였다. 사대사상으로 건립되었던 영은문(迎恩門)이 청일전쟁 이후에 철거되고 그 자리에 독립협회가 자금을 모아서 건립하였다. 화강암 재료로 중앙에는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좌측 내부에서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1979년 성산대로 공사 때문에 서북쪽으로 70m 떨어진 지점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른다.

서대문 독립공원[편집]

西大門獨立公園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갇혀 지내던 감옥과 그들의 여러 모습을 새긴 조각 등을 갖추고 있다.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산 교육장이다.

서대문 형무소[편집]

西大門刑務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감옥. 서대문 독립공원 안에 있으며, 일제 때 유관순 열사 등 수많은 애국자들이 투옥되어 고문을 받았던 곳이다. 일제강점 후 1921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8·15광복 후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로 개칭되었으며, 1961년 개정된 행형법에 따라 서울형무소가 되었다. 1967년 이름이 다시 바뀌어 경기도 의왕시로 옥사를 옮길 때까지 서울구치소로 불렸다.

탑골공원[편집]

塔-公園

서울시 종로 2가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 1897년 영국인 브라운이 설계하여 건설하였다. 기미년 독립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민족 봉기의 자리로서 유서가 깊다. 원내에는 원각사지(圓覺寺址)·팔각정(八角亭)·앙부일계(仰釜日計)의 대석(臺石) 등 유적이 있고, 13층탑과 귀부(龜趺) 비석 등이 남아 있다. 파고다공원. 탑동(塔洞)공원.

파고다공원[편집]

( 탑골공원

원각사지 십층석탑[편집]

圓覺寺址十層石塔

국보 제2호. 서울 탑골공원 소재. 세조(世祖) 12년(1467)에 건립된 석탑이다. 아형(亞形)의 3층기단 위에 세워진 역시 아형으로 된 3층, 방형 7층의 대리석 탑으로서 목조건물의 세부를 충실히 나타낸 점이나 전면(全面)에 불상군(佛像群)을 조각한 것은 14세기의 경천사지 십층석탑(敬天寺址十層石塔)을 모방한 것이 분명한 조선시대 초기의 방려탑(倣麗塔)이다. 1947년 복원하였다.

원각사지 비석[편집]

圓覺寺址碑石

보물 제3호. 탑골공원 소재. 세조(世祖) 2년(1471)에 건립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비석이다. 비신(碑身)은 대리석이고 귀부(龜趺)는 화강암으로 되었다. 조선시대의 비석은 전반적으로 고려시대 비석의 양식을 따르지 않고 한국 비석의 시원(始源)이 되는 당(唐)이나 송(宋) 이래의 중국의 비석을 따르고 있는데 이 비석 역시 비신, 귀부 모두 당의 비석 형식을 답습하고 있으며 세부나 조각에서는 어디까지나 조선시대의 특색을 보인다.

조계사[편집]

曺溪寺

조선시대 건축양식이 근대로 연장된 대표적인 예. 사교(邪敎)의 왕으로 군림했던 차경석(車景錫)이 전라북도 정읍(井邑)에 세웠던 것을 서울로 옮겼다. 규모에 있어서는 조선시대 왕궁에 비할 만큼 크나 조형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문제될 수 없을 만큼 속악(俗惡)하게 지어졌다. 일제시대에 세워진 최대의 한국식 건축물로서 중요하며 현재 불교의 총본산(總本山)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울 수송동(壽松洞) 소재.

사직단[편집]

社稷壇

사적 제121호. 조선 태조 3년(1394)에 건립한 국사단(國社壇)과 국직단(國稷壇). 높이 약 1m, 면적 72㎡.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에 있다. 신라 중기의 것과 고려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사방(四方) 3층의 돌층계로 꾸몄다. 지금의 사직공원은 이 사직단을 중심으로 이룩되고, 정문에는 사직단 표문(表門)이 있다. 예전에는 1년에 네 차례에 걸쳐 곡신(곡식의 신)과 토신(땅의 신)에게 제사지냈다.

암사동 선사주거지[편집]

岩寺洞先史住居址

사적 제267호. 서울 강동구 암사동 한강변에 있다. 1925년의 대홍수 때 일부가 파손된 채로 발견된 이후 1967년 발굴 조사되고, 1973년 재발굴조사되었다. 그리하여 빗살무늬토기의 대표적 유적지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5천 년 전 신석기 시대의 집단 주거지로, 이 일대가 석촌동 백제고분과 더불어 사적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움집 9군데, 유적 전시관 등이 있으며, 선사시대 유적과 초기 백제 문화 유적이 많다.

아차산성[편집]

阿嵯(且)山城

사적 제234호. 백제가 광주(廣州)에 도읍하였을 때 고구려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쌓은 큰 성. 서울 광장동(廣壯洞) 한강 북쪽에 있다. 처음 쌓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286년에 중수(重修)했다.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遷都)한 후 고구려와 신라 간에 이곳에서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졌다.

성균관[편집]

成均館

조선 왕조를 통한 최고의 교육기관. 명칭은 고려 충선왕 때 국학을 국자감으로 개칭한 데서 비롯되었다. 태조 7년(1398)에 성균관 건물을 준공하고 고려의 제도대로 강학당(講學堂)인 명륜당(明倫堂), 공자를 제사하는 문묘(文廟), 유생들이 거주하는 재(齋)를 두었다. 성균관의 기구는 성종 때에 완성되었고, 입학 유생의 자격은 생원이나 진사 자격을 가진 자에 한하였으나 결원이 있을 경우 4학의 생도로 보충하기도 했다.

몽촌토성[편집]

蒙村土城

사적 제297호.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안에 있다. 둘레 2Km 정도로 백제 초기에 서울을 수비하는 토성으로, 동쪽에 흙으로 쌓은 흔적이 남아 있다. 몽촌토성에서 움집터와 독무덤·무기·낚시바늘·백제 토기·돌절구 등이 출토되었다.

풍납토성[편집]

風納土城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있으며, 흔히 “바람들이 성”이라고 일컫는다. 흙으로 쌓았으며, 이곳에서 발견된 여러 토기들은 백제 초기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이다.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편집]

石村洞百濟初期積石塚

사적 제43호. 백제 초기의 무덤으로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있다. 적석총(돌무지 무덤)과 토광묘(널무덤) 등 백제 초기의 유적 5기가 보존되어 있다. 이 일대는 백제 건국 초에 도읍으로 정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방이동 백제고분군[편집]

芳荑洞百濟古墳群

백제 초기의 무덤군으로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있다. 1971년 조사에 의해 고분 8기가 발견되었고, 1975년 잠실 일대를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발굴되었다. 서울시는 1983년 복원 공사를 하여 오늘날의 고분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명동성당[편집]

明洞聖堂

사적 제258호. 구한말에 세워진 종교 건축의 대표적인 예. 1887년에 부지공사를 마치고 1892년 기공(起工), 1898년 5월에 준공되었다. 고딕식 삼연(三緣), 라틴 십자형의 건물이며, 프랑스인 신부 코스테(Eugene Joan George Coste)가 설계 감독했다. 서울 명동에 있으며, 부지 14,421㎡, 건평 1,498㎡, 길이 69m, 너비 28m, 지붕높이 23m, 종탑높이 45m이다.

세검정[편집]

洗劍亭

서울시 기념물 제4호. 서울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던 정자. 조선 영조 24년(1748)에 세웠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이귀(李貴)·김유 등 여러 지사들이 이곳에 모여 광해주(光海主) 폐위 결의를 하고 칼을 씻었다 하여 이 이름이 생겼다.

보신각 종[편집]

普信閣鐘

보물 제2호.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1가 보신각 안에 걸려 있던 조선 초기 종. 높이 318cm, 입지름 228cm. 원래의 종은 1395년(태조 4)에 만들었는데 이 때에는 종을 울려 성안 사람들의 통금을 알렸다. 임진왜란 때 종과 종각이 모두 소실되었으나 1953년에 다시 고쳐 지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지금의 종은 1469년(세조 14) 주조된 것으로 원래 정릉사(貞陵寺)에 있던 것을 원각사(圓覺寺)로 옮긴 뒤 다시 보신각에 단 것이다. 매년 12월 31일 자정에 타종하는 제야의 종은 새로 만든 것이다.

절두산 천주교성지[편집]

切頭山天主敎聖地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일대의 한강변에 있는 천주교 순교사적지.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들의 넋이 어린 곳이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가 이곳 양화진(楊花津)까지 진격해온 적이 있는데, 이에 흥선대원군이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이와 함께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붙잡아 양화진 근처의 이 산봉우리에서 목을 잘랐다고 하여 절두산으로 불렸다. 잘린 목은 한강에 던져졌고, 머리가 산을 이루며 한강물이 핏빛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진다. 순교 1백주년을 기념하여 1966년 이곳에 한국순교기념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삼전도비[편집]

三田渡碑

사적 제101호. 병자호란 때 인조(仁祖)의 항복을 받은 청나라 태종이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서 세운 비. 내용은 청태종의 덕을 칭송한 것으로 이경석(李景奭)이 비문을 썼는데, 표면 왼쪽에는 몽골문, 오른쪽에는 만주문, 뒷면에는 한문으로 씌어 있다. 원래 이름은 대청황제 공덕비(大淸皇帝公德碑). 높이 3.95m, 폭 1.4m.

사육신 공원[편집]

死六臣公園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1445)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왕이 되자 이에 불복하고 단종 복위에 힘 쓰다 목숨을 잃은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을 모신 곳이다. 이들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고자 숙종 7년(1681) 민절서원을 세웠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전해오다가, 1955년 5월에 육각의 사육신비를 세웠다.1978년 서울시에서 사육신의 충의 정신을 기리고자 묘역을 확장해 공원화하였다.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그 안 좌우로 신도비, 1955년에 세운 육각비, 불이문을 들어서면 의절사가 있으며, 각종 편익시설도 구비되어 있다.

세종대왕기념관[편집]

世宗大王紀念館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여 이를 길이 보존하기 위해 1970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준공하였다. 전시관은 한글실, 과학실, 국악실, 일대기실로 구성된다. 한글실은 세종대왕 당시 펴낸 도서류를, 과학실은 과학 관계자료(금속활자 판자기, 수표측우기 등)를 전시하고 있으며 <국악실>은 국악악기류를 전시하고 있다. <일대기실>은 김학수 선생께서 수년 동안 그린 “세종대왕 일대기 그림” 14폭이 전시되어 있어 세종대왕의 치덕을 살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