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사회 I·문화재/현대사회의 대중과 사상/근대사회의 발전/근대시민사회
근대시민사회
[편집]近代市民社會
근대시민사회는 중세봉건사회의 뒤에 생긴 사회형태이며 그 구조적 특질에 따라서 전근대사회와 대비된다. 시민사회라고 하는 말의 뜻이 나타내는 것과 같이 종교적이 아니고, 군사적도 아니며 또한 국정적(國定的)이 아닌 서민, 즉 시민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가 지배적 지위에 선 사회가 시민사회이다. 따라서 중세사회에 있어서 특권적 지위에 있던 귀족이나 승려로부터 근대시민계급으로 권력이 옮겨졌다.근대사회는 공동체적 구속을 받지 않으므로 자유롭고, "신분에서 계약으로"라고 메인(H.J.S.Maine, 1822-1888)이 말하듯이 문벌·족벌 등 신분상의 차별이 없는 점에서 평등하다. 또한 자본주의 생산이 시민사회의 경제구조를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이는 자본주의사회이며, 그것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자유주의인 것이다.
시민혁명
[편집]市民革命
시민사회를 결정지은 것이 시민혁명이다. 먼저 영국에서는 부르주아 계급이 힘을 얻고 국왕의 간섭에 대해 중압감을 느끼게 되자, 마그나 카르타(1215년에 이루어진 영국 헌법의 근거가 된 문서) 이래 의회의 특권을 앞세워서 전제정치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이 국왕과 의회와의 투쟁은 나아가 종파간의 알력을 수반하여 제임스 1세로부터 찰스 1세에 걸쳐서 혁명적 분위기를 낳았다. 그 결과 내란이 일어나서 국왕측에는 귀족이나 가톨릭 승려·수구적(守舊的)인 지주들이 합세했고, 반국왕측에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인 지주·상인·제조업자가 가담하였다. 결국 1640-1649년의 크롬웰에 의한 퓨리턴 혁명으로 귀착되고 나아가 1688년 명예혁명(名譽革命)에 의해서 시민혁명이 달성되었다.프랑스에서는 프랑스 혁명 이전의 구제도(앙시앵레짐)에 있어서 루이 왕조의 전제정치가 강하게 지배했다. 특히 절대왕정의 기초가 굳혀진 것은 16세기 말, 즉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거의 같은 루이 11세 시대로서, 종교전쟁에서 생겨난 혼란을 회복하기 위해 왕권의 강화가 주장되었는데, 루이 14세 시대에 그 최전성기에 달했다. 그리하여 경제적으로는 콜베르의 중상주의 보호정책(重商主義保護政策) 등에 의해서 국내상업이 발전하고 식민지에 대해서는 열광적 투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국왕의 극단적인 간섭은 상업뿐만 아니라 농업의 발전도 방해했고 농민의 착취를 더욱 조장했다.프랑스 혁명 전의 농민 생활이 얼마만큼 곤궁했었는가 하는 것은 농민에게 과해졌던 여러 가지 세금의 가혹함에 의해서도 능히 상상이 된다. 귀족에게는 봉건적인 각종의 세를, 승려에게는 10분의 1세, 그 밖에 국세(國稅)도 가중했던 것이다. 이에 더해서 악랄한 징수 때문에 농민의 곤궁은 더욱 심해졌다. 이와 같은 농민 착취 위에서 루이 왕조의 전제정치가 행해졌고 궁정의 호화로운 생활이 펼쳐졌던 것이다.이러한 전제정치의 폐해에 대해 고민했던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절대왕정개혁을 위해 계몽운동에 나서게 되었고, 농업생산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중농학파(重農學派)의 경제이론이 나오게 되었다. 결국 영국보다 약 1세기 늦어서 1789년에 시작되는 프랑스 혁명에 의해, 왕권과 함께 승려나 귀족의 특권계급을 넘어뜨리는 시민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시민혁명 후의 생산양식은 아직 '매뉴팩처'라고 불리는 분업에 의한 협업(協業)의 수공업단계로서 산업자본에 기초하는 공장제 대공업의 성립은 산업혁명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시민혁명의 획기적 의의는 영국의 권리장전(1689년)이나 프랑스 인권선언(1789년)에서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영국혁명 후의 성과를 집대성(集大成)한 권리장전에 의해서 의회제가 확립되고, 국왕은 의회의 승인 없이는 법의 제정도, 과세도, 상비군(常備軍)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프랑스에서는 혁명 직후 인권선언이 만들어졌다. 제1조에는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와 권리를 갖고 있으며 사회적 차별은 공공상의 이익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고 하고 있으며, 제 2조에선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천부(天賦)의 것으로 막을 수 없는 권리를 갖는 데 있다"고 하고, 그 권리로서 자유·재산·안전 및 압제에 대해 저항하는 것을 들고 있다. 그리하여 1791년의 헌법에서도 이것이 구체적으로 집약되고, 1795년의 헌법에서도 국민의 권리의무가 명기되었다. 그러나 이 인권선언의 정신은 미국독립 때의 권리장전의 영향을 받고 있다.이와 같이 해서 개인의 자유는 확립되고, 국가의 개인생활에 대한 간섭은 배제되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의 힘이 확대되어 갔다. 그리하여 자유주의가 시민사회의 이데올로기로서 시민계급의 생활원리로 되었다. '계약자유의 원칙'도 새로운 신조가 되었다. 이것은 어떤 인간이라도 자유롭게 상대방과 매매하고 고용하는 계약이 가능하다고 하는 대등의 원칙으로서 근대사회의 새로운 인간관계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자유를 누리는 것은 유산적 지위(有産的地位)에 있는 부르주아 계급이며, 다른 사람들은 자유라는 이름 밑에서 새로운 착취와 희생을 강요당했다. 또한 합리성의 존중도 중세의 비합리성을 극복하는 무기로서 산업혁명을 실현하고 기술의 발달을 도모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렇지만 이것도 마침내는 새로운 비합리성을 만들어 내는 소지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근대시민사회를 형성하는 사상적 배경은 거의가 근대자연법(近代自然法)이나 프랑스 계몽사상 속에 깃들여 있었다.
자연법
[편집]自然法
자연법은 인간의 본성에 근거를 둔 이상적인 것으로서 법에 선행하고 이것을 넘는 것으로서 실정법(實定法)의 구극(究極)에 놓였다. 다시 말하자면 시대의 상위나 민족의 차이를 넘어서 절대불변하게 타당한 법의 원천으로서, 국가가 제정하는 여러 제도나 실정법에 대해서 평가를 가하고 이것을 변혁하려고 하는 도덕(道德)의 이념이다. 물론 자연법의 자연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구구한 해석이 있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현실적으로 효력을 갖는 실정법에 대하여 현실에 효력을 갖지 않는 자연법을 대치해서 실정법의 타당성을 재는 가치척도로서의 기능을 갖게 하는 생각은 자연법론에 일관된 생각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자연법에 일치했을 때가 올바른 법이고, 그와 모순되는 법은 아무리 권력에 의해서 강행된다고 하더라도 옳지 않다. 이런 점에서 개인적 자유를 방해하는 봉건제도나 절대왕정을 무너뜨리는 혁명적 무기로서 사용되었다.근세 자연법의 특징은 (1) 자연권(自然權), 즉 인간이 국가를 형성하기 이전부터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갖는 천부의 인권 개념을 밝혔다는 것, (2) 국가는 인간의 사유(思惟)의 산물로서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것, (3) 국가 내지는 사회 이전에 자연상태가 존재한다는 가설(假說)을 세웠다는 것, (4) 현실의 국가를 옹호 또는 비판하는 무기로서 사용되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자연법은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나 스토아 학파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근세 자연법의 대표자로서는 그로티우스, 스피노자, 홉스, 로크, 루소 등을 들 수 있다.
홉스
[편집]Thomas Hobbes(1588-1679)
영국의 철학자. 홉스는 국가이론을 건개함에 있어서 먼저 자연상태의 가설로부터 출발했다. 이것은 국가도 법률도 없는 자기욕망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절대적 자유상태로서 여기에서의 인간은 자연권에 근거하여 자기의 욕망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한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이기적으로 자기의 이해에 따라서 행동하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이리(狼)라고 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가 생기게 된다.한편 인간은 자기보존의 본능을 갖고 있으며, 자연상태에서 최대의 욕망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의 생명을 부정하는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본성에 반대되는 모순이다.그러므로 이 모순을 극복하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위해 자연법은 평화를 찾을 것을 인간의 이성에 호소한다. 이리하여 자연법에 근거해서 모든 인간이 자기가 갖는 자연권을 한 사람 또는 합의체(合議體)에 양도할 때 비로소 국가가 성립되고, 위탁을 받은 자가 주권자로서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홉스는 절대왕정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기는 했으나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자연권은 주권자라 할지라도 이를 침범할 수가 없다고 하고, 국민이 계약에 의해서 주권자에게 복종하는 것도 군주로부터 자유와 평화를 보장받으려는 것이기 때문에 군주가 개인의 자유를 해친다거나 보호하는 힘을 잃었을 때에는 복종할 의무가 없다고 했다. 홉스가 절대주의 해체기의 이론가라고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로크
[편집]John Lockd(1632-1704)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는 명예혁명기를 대표하는 이론가로, 홉스에 비해 사회와 국가의 구별을 한층 더 명확하게 하고 토지소유권의 보호를 자연권으로서 중요시하였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의 대표자이며, 프랑스 계몽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그는 자연상태를 '자기가 욕망하는 대로 모든 것을 해나가려는 자유로운 상태'라고 가정했다. 이 상태에 있어서도 인간은 일정한 권리, 예컨대 인격적 자유권·노동권·소유권 등을 갖지만 자기를 파괴하는 자유를 가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성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독립된 존재이므로 누구도 그 생명·재산·건강·자유에 관해서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로크는 인간을 사회적 존재라고 말하는 동시에 사회와 국가를 구별하고, 생명·재산을 보장하기 위해 계약에 의해서 국가가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가성립 뒤에도 인민이 주권자이기 때문에 개인의 자연권을 국가가 침해하는 경우에는 저항할 권리가 있다고 해서 혁명을 합법화했다. 이 밖에도 종교에 있어서는 신교(信敎)의 자유를, 경제면에서는 노동을 가지고 가치의 원천으로 삼아 사유재산제의 옹호를, 정치면에서는 권력분립론(權力分立論)을 말해서 절대군주제를 폐지하고 입헌국가(立憲國家)의 이론을 만들었다.
경험적 사회론
[편집]經驗的社會論
18세기가 되어서 영국에서는 자연법에 근거한 사회계약설(社會契約說)이 강하게 비판되었다. 개인이나 가족이 고립해서 존재했다고 하는 자연상태는 의제(擬制)에 지나지 않고, 또 국가가 최초의 정치형태가 아니라는 인식이 높아갔다. 이것은 미개사회의 실증적 연구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경험적 사회론의 입장을 대표하는 사람으로는 흄, 퍼거슨 등이 있고 스미스가 계승하였다.흄은 철저한 경험주의의 입장에서 계약설에 반대하여 원시계약이 있었다는 실증이 없는 것, 또한 설령 계약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자손을 구속하지 않은 것, 국가는 역사상 침략이나 정복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퍼거슨도 『시민사회사론(市民社會史論)』에서 고립한 인간은 가정에 불과하다고 하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 속에 있고 집단을 이루어 생활했다고 했다. 그리고 미개사회에서 문명사회로의 발전단계를 설명하여 국가는 사회의 일정단계의 산물이라고 했다.이같은 사람들에 의하여 사회와 국가가 구별되고, 사회와 개인의 문제가 강하게 대두되었다. 또 국가는 개인의 생명·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서 개인 속에 근대시민계급의 모습을 집어넣었던 것이다.
계몽사상
[편집]啓蒙思想
프랑스에서는 구제도의 폐해가 심해짐에 따라서 로크 등의 자유주의사상을 도입하여 절대왕정을 개혁하려는 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대표자는 백과전서파(百科全書派)의 인물들로서 이들은 디드로, 달랑베르 등의 지도 밑에 프랑스 계몽을 위해서 대백과전서의 편집과 집필을 담당했다. 그 가운데는 볼테르, 몽테스키외, 케네, 젊은 루소도 가담했다.계몽사상가들은 인간의 본성을 연구의 기초에 두었다. 인간은 쾌락인 선을 찾고 불행인 악을 피하려고 한다. 이 본성을 만족시켜 자기의 생명이나 재산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결합했으므로 사회는 당연히 인간본성에 근거한 인간의 자연적인 권리를 보장함과 동시에 개인에 대해서 최대한의 자유방임을 인정하여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행복을 얻을 수 있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이런 점에서 인간의 본성에 일치하지 않는 사회는 폐지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인간의 본성을 해치는 나쁜 질서라고 하여 헌법개정, 개인적 자유의 보장, 과학 및 공업의 발달, 특권의 완화, 재산제도의 확립 등에 의하여 생산자계급을 위한 국가를 만들 것을 목표로 했다.
케네
[편집]Francois Quesnay(1694-1774)
프랑스의 경제학자. 케네는 자연법의 입장을 기초로 한 중농학파(重農學派)를 창설했다. 그의 근본사상은 경제상의 자유주의로서 자유방임이야말로 사회를 올바른 질서에 놓이게 하는 원리라고 말했다. 즉 "각 개인은 자기의 행복이 어떻게 해서 얻어질 수 있는가를 국가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각 개인은 국가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기의 욕망하는 대로 자유롭게 자기 이익을 추구하며, 모르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지고 사회 전체의 진보가 달성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케네의 사상은 스미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루소
[편집]Jean Jacques Rousseau(1712-1778)
프랑스의 사상가.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원류를 찾을 때 루소를 무시할 수는 없다. 루소의 『민약론(民約論)』은 "인간은 그 본질상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실의 국가생활에 있어서는 구석구석이 철쇄(鐵鎖)에 얽매어져 있다"고 하는 유명한 말로 시작하고 있는데, 인간이 자유를 상실한 원인을 『인간 불평등 기원론(人間不平等起源論)』에서 전개하고 있다.이에 의하면 인류의 원시적 자연상태는 자유평등의 낙원(樂園)으로서 문명의 타락에 빠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인지(人智)가 발달함에 따라서 소유욕이 생기고, 자기 토지에 담장을 치고 "이것은 내 것이다"고 선언하는 것을 생각했을 때부터가 불평등의 시작이고 국가의 성립이었다고 말한다.그러나 일단 문명상태가 되면 자연상태로의 복귀는 불가능하다. 때문에 그는 원시적 자연상태에 대신할 만한 대상을 구했던 것이다. 즉 인간의 자연권을 되찾기 위해서 국가제도를 재편성하는 것에 의해서 그 길을 발견하고, 사회계약(社會契約)에서 그 해결을 구했다.사회계약의 약관(約款)은 "우리들 각인이 자기의 몸과 모든 힘을 공동으로 전체의지의 최고지도의 근본으로 삼고 힘을 합하는 데서 전체로서의 각 개인을 전체의 불가분의 부분으로 받아들인다"고 하고 있어 이 약관에 따라서 결합하는 것에 의해 합리적 국가가 성립한다고 하고 그 근저에 개인의 자유와 평등의 자연권을 두고 있다.여하튼 루소의 사회계약설은 혁명 후 프랑스의 정치사조의 요구에 매우 적합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과 인권선언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시민계급과 시민정신
[편집]市民階級-市民精神
근대시민사회의 성립을 촉진한 계층은 신흥시민계급인 부르주아 계급으로, 시민계급에게는 봉건적 특권계급에서는 보이지 않는 근대적 감각이 있었다. 베버는 이것을 자본주의정신이라고 이름붙였고, 좀바르트는 기업정신(企業精神) 내지 시민정신이라고 불렀다.베버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으로부터 "시간은 돈이요, 신용(信用)은 화폐(貨幣)이며, 지불이 좋은 것은 만인(萬人)의 돈주머니의 주인이다" 등의 13가지의 덕을 들어 정당한 이윤을 얻는 것을 사명으로 해서 합리적으로 취급한다는 태도를 자본주의정신이라고 하였다.이와 같은 근대시민사회를 성립시킨 인간상을 금욕적·절약적 인간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으나, 이것은 기왕의 알베르티(1404-1472, 이탈리아의 건축가)의 가헌서(家憲書)에서도 볼 수가 있다. 즉 지출이 수입을 넘어서는 안 되고 토지와 혈연보다도 높은 교육과 업적에 근거를 두는 사회적 지위를 중요시했다.그 밖에도 당시 시민계급의 생활태도에 관해서는 버니언 스위프트(1667-1745), 데포(1660-1731) 등의 문학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데포는
『로빈슨 크루소의 생활과 모험』에서 인간에게는 중용(中庸)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근면(勤勉)을 제일의 덕으로 삼고, 상인에게 쾌락을 구하기 전에 먼저 일을 하라고 호소했다. 근면은 낭비나 지나친 욕심에 빠지는 위험을 방지하는 것이고, 일에 기쁨을 갖는 것이 근면, 즉 부(富)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태만과 빈곤을 연결시켜 근면이 빈곤을 면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했다.둘째로 검약(儉約)을 들고 있다.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이 부르주아지의 관행은 아니지만, 돈이 돈을 낳는 것이 상업의 철칙이므로 검소한 생활을 영위하지 않으면 상업에 의해 돈을 모을 수 없다고 했다.셋째로는 정직(正直)을 들고 있다. 즉, 정직은 부르주아지의 의무라고 했다.
부르주아지
[편집]Bourgeoisie
자본주의 발전의 담당자가 되어 산업혁명을 완성시키고 프랑스 혁명을 완성시켜서 봉건적 특권계급에 대신한 것이 부르주아지이다. 시에예스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에서 부르주아지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일체(一切). (2) 그것이 오늘날에까지 어떠한 정치적 지위를 차지했는가. 무(無). (3) 그것은 무엇을 구하는가. 거기에 상당한 것이 되는 것을.부르주아지라는 말은 성(城), 즉 도시에 사는 인간이란 의미로서, 중세에 있어서는 귀족이나 승려들이 성채도시(城砦都市)에 살고 있었으나 자유민들도 자유를 찾아서 도시에 모이게 되고 상공업을 영위했다. 이런 것으로 해서 부르주아지는 도시에 사는 상공민(商工民)으로서 한편으로는 승려나 귀족과 대립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농민이나 노동자와 대립하는 숙명을 지고 있었다.독일 철학자 카를 레비트도 도시의 시민계급을 한편에서는 농민, 다른 편에서는 귀족과 구별되는 중간위치의 계급으로서, 일반적으로 범용(凡庸)하다는 것이 시민계급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했다. 그래서 '시민적(市民的)'이라는 의미는 비속과 고귀, 평민적과 귀족적의 중간에 위치한다. 질서·평화·안전을 지키고, 근면·검약·겸손·절도·성실을 지향하여 생활하는 것이 시민적이라고 말했다.그러나 부르주아적 인간은 드디어 산업혁명 후의 산업자본주의의 단계에 들어섬과 동시에 종전의 특권계급에 대신해서 자유경쟁의 원리를 근저로 이윤추구를 지향하는 이기적 인간상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스미스의 경제인(經濟人)에서 가장 잘 볼 수가 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편집]産業革命-資本主義
산업혁명은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로부터 기계제 대공업(機械制大工業)으로 이행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확립한 경제상 또는 기술상 혁명으로서의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근대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산업혁명의 달성은 영국이 가장 빨라(1770-1830경) 방적기(紡績機)를 위시하여 일련의 기계발명에 의해 생산의 기계화가 실현되어 생산양식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도 일변시켰다. 이에 따라서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와 생산자로서의 노동자 분화가 확립되고 노동력의 상품화가 이루어졌다.이와 같이 자본주의는 영리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로서 일정한 자본을 투입해서 되도록 많은 이윤을 얻고자 하는 경제원칙을 좇는 경제조직이라는 의미에서 합리성에 지배되고 있다.
합리성
[편집]合理性
베버는 경제조직은 생각하지 않고 근대 시민사회를 합리성을 척도로 고찰했다.그 중에서도 가계(家計)와 경영(經營)을 분리해서 경영 내용의 객관화를 가져온 복식부기(複式簿記)의 발명과 관료조직(官僚組織)을 중심에 두고 중세의 비합리사회와 대비해서 근대화를 합리화의 과정으로 취급했다.확실히 근대의 분업조직(分業組織)이나 기술의 발명, 근대과학 그 자체가 합리성을 존중했다. 그 경우, 합리성은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부터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그 목적이 무엇인가. 과연 그것이 인간의 복지(福祉)에 보탬이 되는 것인가,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아닌가는 별도로 하고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 즉 기술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합리성이다. 베버가 말하는 형식적 합리성이 바로 그것이다.이에 반해서 목적을 중요시하고, 목적 즉 인간의 이상이라든지, 가치를 높이는 방법에서 기술을 사용하는 경우가 실질적 합리성이다. 이 두 개는 반드시 일치할 수는 없다. 지멜은 『화폐의 철학』에서 욕망과 화폐와의 관계를 들어서 인간이 그 욕망을 채우는 것이 궁극의 목표이고, 화폐나 기술도 그것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산업혁명 직후는 기술의 발달이 생산을 증대시켜 그에 따라서 인간의 복지도 달성된다고 생각되었으나, 자본주의는 이윤획득이 목적인 이상 본질적으로 비합리성을 내포하고 있어 두 개의 합리성이 크게 상반된 곳으로부터 그 뒤의 위기와 모순이 생겨났다
자본주의의 변모
[편집]資本主義-變貌
산업혁명 후의 자본주의는 다수의 자본가의 자유경쟁이라는 형태를 띠면서 전개되었다. 부르주아 계급이 얻은 계약의 자유라든가 자유경쟁이라든가 여러 가지 자유평등의 원리는 봉건적 관념이나 특권적 제반 제도를 무너뜨리기 위한 무기로서는 유효적절했으나 실제로 자유를 누린 것은 유산적 지위에 있는 일부 사람들이며, 많은 사람들은 신분적 구속에서 해방된 뒤에는 자기의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안 될 시장이 기다리고 있었다.산업혁명기의 사람들, 특히 애덤 스미스 등은 자본주의에 대해 낙관적이어서 개인의 자유라는 것, 즉 국가의 간섭이 없을 수록 사회가 번영한다고 했고, 벤담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말하는 공리주의(功利主義)를 전개했다.이것은 맬서스의 인구론(人口論)이나 다윈의 진화론(進化論)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걸어온 길은 오히려 이것과 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생산이 아무리 증대해도 분배가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공정·평등하지 않으면 사회의 모순은 해결되지 않는다.자본주의의 모순은 19세기 초부터 공황(恐慌)이나 실업(失業)에 의해서 나타났고 러다이트 운동과 같은 기계파괴운동도 보였으나 그 모순이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영국에서는 1838년부터 48년에 걸쳐 차티스트 운동이 일어나고, 프랑스에서는 1848년의 2월 혁명, 다시 1871년의 파리코뮌에서 한층 더 뚜렷해졌다.
스미스의 시민사회론
[편집]Smith-市民社會論
애덤 스미스는 시민사회를 상업사회(商業社會)라고 생각하여 『국부론(國富論)』에서 분업의 이익을 설명했다. 그는 경제활동의 동기로서 향락의 감정과 자기의 생활상태를 개량하는 욕망을 들어서 이 두 가지 성향(性向)이 사회를 부와 번영으로 이끈다고 했다. 그 때문에 인간의 본성에 근거해서 움직일 수 없는 이기심(利己心)을 들어 이러한 이기심에 려서 교환을 행하는 사람을 경제인(經濟人)이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이기적 인간상으로서 부르주아의 성격이 보인다."각 개인의 이기심은 그로 하여금 자본을 사회를 위해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쏠리게 하여 지출해 나간다. 이 자연의 선택에 의해서 만약 어느 사업에만 너무 많은 자본이 투하된다고 한다면 그 사업의 이윤은 감소하고, 다른 사업의 이윤이 증대하기 때문에 당장에 이기심을 발동해서 이 그릇된 배분을 시정할 것이다. 그러므로 법률의 간섭 없이도 사람들의 이기심은 자연적으로 그들을 이끌어서 각 사회의 자본을 각종의 사업에 적당히 분할·분배시켜서 사회의 이익과 일치한다."이와 같이 경제인이 자기의 본성이 명하는 대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의 이익과 합치된다고 말했다. 이 이기심이 충분히 발휘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인정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고 중상주의(重商主義) 같은 국가의 간섭을 강하게 공격했다.이기심에서 출발하는 제2의 문제는 개인과 사회의 관련으로서, 사회를 전체적으로 조화시키는 것은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조물주(造物主)인 신(神)이 인간을 만든 때부터 조화를 가질 수 있게 하였으므로 인간은 피조물(被造物)에 불과하고 인간의 본성에 따라서 자기의 행복만을 누리면 족하다. 그렇게 하면 신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인도되어 인류 전체가 행복하게 된다는 낙관적인 예정조화(豫定調和)를 말했다.그러나 스미스가 『국부론』을 쓴 1776년 전후는 산업혁명 전야(前夜)로서 자본주의에 따른 계급적 모순은 아직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독일 낭만주의의 입장
[편집]獨逸浪漫主義-立場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시민사회가 성립되었을 때 독일은 전제정치에 머물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독일의 사상가들은 처음에는 프랑스 혁명을 환영하고, 그 자유의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해져 감에 따라서 시민사회를 부정하고, 자유주의나 합리주의에 반대해서 중세사회를 이상으로 하는 사조가 나타났다. 이것이 낭만주의이다.그 대표자는 헤겔로서 『법철학(法哲學)』에서 인륜성실현(人倫性實現)의 과정으로서 가족, 시민사회, 국가를 들고, 시민사회를 가족과 국가와의 매개적 차별태(媒介的差別態)라 하고 자기이익의 추구만을 궁극의 목적으로 하는 분열로서 통일된 것이라고 했다.헤겔은 이것을 욕구의 체계라고 이름 붙였으나 시민사회에서는 분열이 생기고, 빈곤이 생기며, 비참한 상태가 만들어져 도덕적 파괴를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개인을 초월하는 따뜻한 인간감정 세계로서의 국가 가운데서 최고의 도덕과 정신적 자유를 찾아내려고 했다.슈타인도 헤겔의 영향을 받아서 시민사회를 경제문제를 중심으로 다루어 비판했다. 이 생각은 독일 전통의 사상이 되어 20세기에까지 계승되었다. 퇴니에스도 그렇게 생각해서 게젤샤프트(利益社會)를 일시적 허위(虛僞)의 공동생활, 즉 본질적으로 결합하지 않고 분리하고 있는 것과 같은 사람들의 집합이라 하고, 게마인샤프트(共同社會)에 우위를 두었다. 이같이 자유는 아니었지만 따뜻한 인간감정에 연결된 중세에의 복귀를 이상으로 하는 생각은 독일에서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