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사회 II·가정/한국교육의 흐름/한국 현대의 교육/민족의 수난과 식민지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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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수난과 식민지교육〔개설〕[편집]

民族-受難-植民地敎育〔槪說〕

1876년 강화도 조약에 의해 조선에 진출한 일본은 1884년에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키고 1894년에는 민족적 각성운동인 동학혁명(東學革命)을 계기로 하여 다시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갑오개혁이란 미명하에 조선을 그들의 침략적 야심에 맞게 재편성하였다. 이듬해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민비(閔妃)를 살해하고,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조선정부로 하여금 강제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에 서명케 하고, 계속 한일협약(韓日協約) 등의 과정을 거쳐 1905년에는 소위 2차 한일협약인 을사조약(乙巳條約)에 조인하게 함으로써 국권침탈의 단계를 성공시켰다.그 뒤 1907년에는 일본의 만행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고종황제를 헤이그밀사 사건의 책임을 씌워 퇴위시키고, 퇴위한 지 1주일도 되지 않아 조선지배를 더욱 명백히 하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강제로 체결케 했다. 그리하여 합병의 전단계로서 군대를 해산하고, 조선의 모든 사법권·경찰권을 장악했다.이런 과정을 거쳐 1910년 8월에, 동양평화와 제국(帝國)의 안정을 보장한다는 미명하에 조선의 주권을 빼앗는 경술국치가 일어났다. 이후 일본의 지배에 신음하던 36년간에 나타난 식민지정책은 한결같이 조선인을 일본화하려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의 민족정신 말살(抹殺)에 대한 민족의 각성은 더욱 촉구되어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이 아울러 나타났다. 따라서 일본은 조선인의 민족적 반항 때문에 그들의 통치방법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일본의 식민지 교육정책을 몇 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제1단계는 1910년 8월 국권침탈 후부터 3·1 민족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약 10년간의 무단(武斷) 정치에 따른 교육 정책, 제2단계는 1919년 3·1운동 이후 3차 조선교육령이 개정된 1938년까지의 문화정치에 따른 교육정책, 제3단계가 1938년부터 1945년 광복까지의 전시교육정책 등이다.

식민지교육 정책[편집]

植民地敎育政策

조선을 병합(倂合)한 일본은 그들 식민정책의 일환(一環)으로 조선인들의 민족정신을 제거, 새로운 일본정신에 충복할 수 있는 충성된 일본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재편성하려고 하였다.1911년 8월 23일 칙령(勅令) 제229호로 공포된 '조선교육령'은 일본의 초기 식민지 교육정책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 중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교육령[편집]

朝鮮敎育令

조선교육령은 전30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요 내용을 보면 ① 교육은 '교육에 관한 칙어(勅語)'의 취지에 따라 충성된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한다(2조). ② 교육은 보통교육·실업교육 및 전문교육의 셋으로 크게 나누었다(4조). ③ 보통교육은 보통의 지식·기능을 수여하고, 특히 국민된 성격을 함양하며, 일어보급을 그 목적으로 했다(5조). 실업교육은 농업·상업·공업에 관한 지식·기능을 가르침을 목적으로 하고(6조), 전문교육은 고등한 학술·기예(技藝)를 가르침을 목적으로 한다(7조). ④ 학교별 교육연한은 보통학교 3-4년(9조), 고등보통학교 4년(12조), 여자고등보통학교 3년(16조), 실업학교 2-3년, 간이실업학교는 연한 규정이 없고(24조), 전문학교 3-4년(26조)이었다.대체로 이 교육령은 한국인에게 일본어를 습득시키고, 되도록 적은 경비로 초보적인 실업교육에 치중하여 충성된 일본인을 만드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이 교육령에 의하여 위의 표와 같이 초등교육기관인 보통학교에서부터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인 전문학교에 이르기까지 학제가 마련되었다.1916년에 기존(旣存)학교를 승격시켜 몇 개의 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법관양성소로 출발했던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가 경성법학전문학교로 승격하고, 의학강습소인 경성의학교가 경성의학전문학교로, 1906년에 생긴 공업전습소(工業專習所)가 1916년에 경성공업전문학교로, 농림학교가 1918년에 수원농림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교육령에 전문학교 설립을 명시했으나 대부분은 기존교를 승격시킨 것에 불과했지 새로 신설된 것은 없다. 그나마도 인문·사회계는 배제하고 공업·농림·의학·법률 등 기술분야에만 한했다. 이로 보아 조선의 민족지도자 양성을 의식적으로 기피하는 정책의 일단을 볼 수 있다.

성균관·향교에 대한 탄압[편집]

成均館·鄕校-彈壓

조선역사 500년 동안의 고등교육기관인 성균관도 일본의 교육정책에서 볼 때는 장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일제(日製)는 1908년 새 학칙으로 성균관 학제를 재편하였다. 입학자격은 경학(經學)에 소양이 있고 신체건강한 20세 이상 30세 미만의 자로 한정하고, 수업연한은 3년, 교육과정(敎育課程)은 수신·경학·국어·일어·역사·지리·수학·이과·도화·법제·경제·체조로 하여, 형식적 최고학부로 성균관을 존치(存置)시켰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전문적 연구는 배제하고 고등보통교육의 성격으로 재편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1911년 6월 17일에 부령(府令) 73호인 경학원 규정에 의하여 폐지하였다.일제의 침입과 국권침탈에 대해 강력히 반발한 향교 중심의 유림(儒林)에 대해, 일본은 경술국치 이듬해에 학교비용령을 공포하여 "공립보통학교의 신설 및 그 유지비는 향교재산 수입과 학교설립 구역내의 조선인이 부담하는 교육세에 의한다"라고 규정해 버렸다. 이것은 지금까지 향교운영과 유림행동의 기금으로 사용되었던 향교재산을 학교비라는 명목으로 박탈하고, 아울러 유림의 반발을 막기 위하여 헌병과 경찰로써 유림의 향교출입과 동태를 사찰·감시하게 하였다.

제2차 조선교육령[편집]

第二次朝鮮敎育令

총독부는 사이토(齊藤) 총독의 교육방침에 따라서 1921년 1월 임시 교육조사위원회를 개최하여, 일본 본토의 교육제도에 준거한 학제의 개혁을 심의케 했고, 1922년 2월에는 교육령을 전면 개정하여 제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다.중요 내용을 보면 ①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4년에서 6년으로, 고등보통학교는 4년에서 5년으로, 여자고등보통학교는 3년에서 4년(또는 5년)으로 연장하였다. ② 종래 각급 학교에서 폐지되었던 한국어가 필수과목으로 가해졌다. ③ 한국인과 일본인의 공학을 원칙으로 했다. ④ 새로 사범학교와 대학설치의 길을 마련하였다. ⑤ 실업교육·전문교육·대학교육은 일본의 제도에 따랐다. 이와 같이 교육령을 개정하여 표면상 일본학제와 동일하게 함으로써 융화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기본의도가 다른 곳에 있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2차교육령'에 담긴 '문화'란 이름의 교육정책 내면은 다음과 같다. ① 동일한 교육제도·교육기간을 확충함으로써 일본식 교육을 강화하여 한국민족 사상을 말살하려는 데 있었다. ② 새 교육령의 전체내용은 곧 일본어 습득에 있었다. ③ 대학의 설치를 규정함으로써 한국에 대학교육의 문이 열린 것처럼 가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3·1운동' 후에 일어난 자극된 것에 불과하였다. 사이토의 문화정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학교 교정에 심어져 있는 무궁화를 뽑고 '사쿠라(벚꽃)'를 심도록 하는 데까지 뻗어나갔다. 사이토 총독의 문화정치는 전대(前代)의 무단정치보다 더 가혹한 통치방법이 되었다.

황국신민화 정책[편집]

皇國臣民化政策

일본의 끝없는 침략야욕은 자승자박이 되어 1930년대부터 군국주의적 경향으로 옮아가게 되었다.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1932년 초에는 만주에 '만주국'을 세워놓고, 1933년 10월 국제연맹에서 탈퇴하는 등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다.이에 군국주의자들은 한국에 대해서도 교육을 통한 민족말살(民族抹殺)정책을 사용하게 되었다. 1936년 8월 5일 우가키(宇垣一成)가 물러나고 7대 총독으로 미나미(南次郞)가 취임하였다. 그는 1929-1936년까지 조선군사령관·일본유군대신·관동군사령관을 역임한 자로, 일본 내에서도 전쟁확대론자의 거물이었다. 그는 1938년 3월 칙령 제103호로 제3차 '조선교육령'을 개정·발표하였다. 개정된 교육령의 중요사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교명을 개칭하였다. 종래 보통학교를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 고등보통학교를 중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를 고등여학교라고 하였다.

② 교육내용으론 일본어·일본사·수신·체육 등의 교과가 강화되었다. 이때부터 각급 학교에서는 학칙개정을 하여 교육목적을 "…국민도덕을 함양함으로써 충량유위(忠良有爲)의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바꾸었다. ③ 한국어를 못쓰게 금하였다. 각급 학교의 조선어 교과목은 정과(正果)에서 수의과로 떨어졌다. 총독부는 될 수 있는대로 이를 교육과정으로부터 제거하기 위하여, 특히 사립학교에 대하여는 과하지 않도록 하였다. ④ 사립중학교 설립을 불허하였다. 총독부는 제3차 교육령을 통하여 "내선(內鮮)인이 다같이 동일한 법규 밑에서 교육을 받는 길을 연 소이"라고 하면서 1938년부터 1943년에 이르기까지 공립중학교 17교, 공립고등여학교 22교를 신설하면서도 사립중학교 설치는 억제하였다. 예를 들면, 황해도 안악(安岳)에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려고 지방 유지 백여 인이 50만원의 기본금을 거둬서 설립인가를 청하였는데, 당국은 "공립으로 하라, 실업학교(實業學校)로 하라"고 거절하였다. ⑤ 기독교 계통 학교의 성경과목(聖經科目)을 폐지시켰다.

제4차 조선교육령[편집]

第四次朝鮮敎育令

1941년부터 일본은 전시(戰時)에 호응하여 전문학교 이상의 수업연한을 단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총독부는 첫해인 1941년에 3개월(12월 졸업), 1942년부터는 6개월(9월 졸업)을 단축시켰다. 이렇게 총독부는 전문학교의 수업연한을 단축하고, 1943년 3월에는 종래 조선교육령을 근본적으로 개정하여 4월 1일에 시행하였다. 즉 대학·예과·전문학교·중학교·고등여학교·실업학교·사범학교 등에 학제개혁을 단행하였다.개정의 목적은 황국(皇國)의 도(道)에 다른 국민연성(國民鍊成)에 있다고 하였다. 4차개정안의 중요내용을 보면 ① 중등학교의 교육목적은 '황국의 도'에 입각하여 국민의 연성을 주안으로 한다고 했고, ② 전문학교의 교육목적 역시 고등한 학술·기예(技藝)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되, 국가 유용의 인물을 기르는 데 있다고 하였다.또다시 1945년 5월 일본정부는 학부의 결전태세(決戰態勢)확립을 위하여 소위 '전시교육령(戰時敎育令)'을 공포하였다.제1조는 '학도는 진충(盡忠)으로써 평소 길러낸 교육의 정화(精華)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을 본분으로 한다'이고, 제2조는 '교직원도 솔선수범하여 학도와 더불어 전시에 긴절한 요무(要務)에 이바지한다'이며, 제3조는 '학교는 교직원 및 학도로써 학도대(學徒隊)를 조직한다'는 것이었다.그리하여 이 해 7월 총독부 명령으로 각급학교는 학도대를 결성하고, 정규교육보다 근로봉사 내지 방공호 작업·군사훈련에 더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