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동양미술의 흐름/중국의 미술/중국의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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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도자의 전개[편집]

中國陶磁-展開

이미 선사시대(先史時代)에 중국에서는 채도(彩陶)나 흑도(黑陶) 등의 아름다운 토기(土器)가 만들어졌으며, 은주(殷周)시대에는 벌써 고온에서 유약(釉藥)을 바른 경질(硬質)의 도기(陶器)가 등장하고 있다. 한시대(漢時代)에는 납(鉛)을 내포하며 저온에서 용해되는 녹색이나 갈색의 유약이 많이 사용되고 있었으며 3국(三國)·6조(六朝)시대에는 원시적인 청자(靑磁)가 만들어졌다. 당(唐)·송(宋) 시대에는 자기(磁器)의 제작이 눈부시게 발달하고, 아름다운 제품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해외로도 많이 반출되었다. 원(元)·명(明) 시대에는 청화(靑花)·오채(五彩)라고 하는 그림무늬를 넣어 특징 있는 자기가 발달하였다.

선사시대[편집]

채도[편집]

彩陶

주로 중국 북부 황하유역 지방에서 발달한 것으로서, 서아시아의 채도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결이 고운 흙으로 노끈 모양으로 길게 빚은 다음 감아서 만들어지고 주로 평지에 축조(築造)된 원형(円形)의 작은 가마(窯)에서 1000도 내외의 화도(火度)로 구워낸 것이다. 얄팍하게 완성되어 있으며 표면을 다듬은 후에 흑(黑)·적(赤)·백(白) 등의 이상(泥狀)물감으로 와문(渦紋)·기하문(幾何紋)·동물문(動物紋) 등을 붓 같은 것을 이용하여 뚜렷하게 그려져 넣는다. 제작 연대는 기원전 2500년에서 기원전 2000년경까지의 것으로서, 출토 상황에서 보아 채도는 특수한 용도를 위해서 특별히 제작되고, 일상용으로는 무늬가 없는 적색(赤色)으로 구은

'홍도(紅陶)'라고 불리는 토기와 소지(素地)에 모래(砂)가 섞인 갈색(褐色)의 '조도(粗陶)'라고 불리는 조제(粗製)한 토기가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흑도[편집]

黑陶

채도에 이어 등장하였던 흑도는 채도의 가마와 닮은 원형 소형(円形小型)의 가마에서 구어졌던 것인데 채도가 산화소성(酸化燒成)으로 붉게 구어지고 있는데 대해, 흑도는 환원소성(還元燒成)으로 소지토(素地土)의 철분(鐵分)이 환원되어 회색이 된다. 거기에 소성(燒成)의 최후 단계에서 그슬려서 탄소의 미립자(微粒子)를 소지(素地)에 스며들게 하고 다시 이를 닦아서 검게 광택있는 표면을 만든다. 성형법(成形法)도

노끈 감는 식과 더불어

녹로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아주 얄팍하고 정교(精巧)한 것이 있다. 기형(器形)은 변화가 많고, 정(鼎)·역·규 등 중국 독특한 기형을 볼 수 있다. 무늬는 거의 없고, 기형의 아름다움이 두드러지게 만들어진 것이 많다. 흑도는 역사시대에 들어와서도 제작되었다.

은주·전국·한시대[편집]

회도[편집]

灰陶

은(殷)의 도시국가는 흑도문화(黑陶文化) 위에 구축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은대(殷代)의 토기의 주류(主流)는 회도(灰陶)인데 이는 흑도와 거의 동일한 수법에 의한 것으로서, 다만 그슬리는 방법이 적어서 회색으로 구워냈다. 대부분이

녹로 제조로 다소 후상(厚狀)으로 만들어졌으며 기형에 당당(堂堂)하고 힘찬 데가 있다. 일용(日用)하는 용기(用器)는 밧줄무늬의 타문(打紋)이 있는 것이 많고 점토의 끈을 붙여서 장식으로 보이게 한 것과, 특히 공들여 만든 것에는 동기(銅器)를 그대로 본따 뇌문(雷紋)과 도철문을 새겨 넣은 것도 있다. 그러한 제기적(祭器的)인 것 중에는 흑도도 있고 또한 순백(純白)의 도토(陶土)를 사용한

'백도(白陶)'도 있다. 백도는 은(殷)의 토기를 대표하는 것이라 하며, 후상으로 만들어진 소지(素地)를 예리하게 파고 새겨서 동기와 같은 복잡한 무늬를 나타낸 것이 있어 왕자(王者)의 토기라고 불리기에 알맞은 격조 높은 것이다.

회유도[편집]

灰釉陶

은대(殷代)의 토기 중에는 고온도(高溫度)의 유약(釉藥), 소위 회유(灰釉)를 의식적으로 입힌 도기가 있고 그것은 처음 딱딱하게 구어 나가는 도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생한 자연유(自然釉)가 단서였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가마 속의 재(灰)가 덮어 씌워져서 고온으로 소지(素地)의 규산(硅酸)과 녹아 엉겨서 유리질을 생기게 하는 현상이다. 이 자연유의 효과에 주목하여, 회(灰)를 물에 녹인 것을 기면(器面)에 바르고 또는 회와 진흙을 섞은 것을 기면에 칠해서, 반들반들한 유리질로 도기를 싼 것을 회유도(灰釉陶)라고 부르는 것이다. 은대에 시작된 이 회유도야말로 후일의 청자(靑磁)의 선구로서, 중국의 도자사(陶磁史)는 여기에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은대(殷代) 토기의 작풍(作風)은 서주(西周)에서 춘추전국, 다시 한대 이후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나 토기의 기술적인 발전은 은주(殷周)시대에 정점에까지 도달하고 그 후는 양식의 변화에만 머물고 있다. 다만 전국시대에는 가마(窯)의 용량이 매우 거대해져서, 생산기구(生産機構)의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회유도(灰釉陶)의 허난성(河南省)·안후이성(安徽省)·장쑤성(江蘇省)·저장성(浙江省) 등에서 발견된 유례(遺例)에는 동기(銅器)를 모방한 기형(器形)에 담록색(淡綠色)·황록색(黃綠色)의 회유(灰釉)가 매끄럽게 칠해 있는 것이 있다. 개중에는 비교적 흰색의 소지(素地)에 투명하고 누르스름한 회유가 칠해진 것도 있어, 이것은 백자(白磁)의 선구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한대(漢代)에는 자연유(自然釉)의 도기는 셀 수 없이 많으나 회유도는 극히 소수의 것밖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녹유·갈유[편집]

綠釉·褐釉

전국시대에는 전혀 새로운 유법(釉法)이 중국에 생겼다. 이것은 납(鉛)을 사용하며, 낮은 온도에서 녹는 유약(釉藥), 소위 연유(鉛釉)를 사용하는 수법이다. 이는 동분(銅分)을 가한 녹유(綠釉), 철분(鐵分)을 가한 갈유(褐釉)의 2종에 한정되고 한(漢)시대에는 명기(明器)에 자주 이용되었으나, 전국시대의 유례도 적으나마 남아 있고 해서 그 출현의 시기가 문제시되고 있다. 초기의 유례로서는 흙의 소지(素地)를 유리로 덮은 잠자리구슬류(類)가 열거된다. 연유는 서아시아로부터 배운 것으로 생각되고 있었으나, 도리어 중국에 오래된 연유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근년에는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창시(創始)된 것이 아닌가 주장되기에 이르렀다. 7∼8천도(度)에서 녹는 연유는 회유에 비해 그 제조가 용이하기 때문에, 한대(漢代)에 들어서는 중국 각지에서 대량으로 제작된 듯하다.

한대의 녹유(綠釉)·갈유(褐釉)의 유례는 묘(墓)속에 넣는 명기(明器)가 그 대부분으로서, 지중(地中)에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녹유의 유면(釉面)이 변화하여 은색의 피막(皮膜)이 생겨 있는 수가 많으며, 그것이 무지개 모양으로 번쩍번쩍 빛나 참으로 아름답게 보인다. 이 현상을 은화(銀化)라고 부르며 한의 녹유가 인기가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한대의 도기는 일반적으로 실용적인 기형(器形), 간소한 장식문(裝飾紋)이 특징으로서 은주(殷周)의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연유의 보급에 의해 유법도 현저한 발달을 보았다.

삼국·육조시대[편집]

고월자[편집]

古越磁

한말(漢末)의 동란시대(動亂時代)에서 3국시대(三國時代)에 걸쳐 회유도의 기법은 양쯔강(長江) 하류역(下流域)에서 성숙되어, 소위 고월주요(古越州窯)의 청자(靑磁=古越磁)가 등장하였다. 이는 회(灰)에 장석(長石)과 같은 규산분(硅酸分)이 있는 것을 가하여, 안정된 고온의 유약(釉藥)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서, 유약에 내포되는 미량(微量)의 철분에 의해 청록색의 색조가 생긴다. 유약은 두께도 두껍고 매끄럽게 녹아 있어, 아름다운 점에서도 회유와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자기(磁器)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고월주요(古越州窯)의 청자 가운데서, 연대(年代)가 명확한 최고(最高)의 작품례는 3세기 중엽경의 것으로서, 대충 그 무렵에 기법(技法)의 완성을 이룬 것으로 생각된다. 초기의 오(吳)·진(晋)시대의 것은, 한의 동기(銅器)나 도기(陶器)에 보이던 웅혼(雄渾)한 작풍이 그대로 전하고 있어, 후의 것보다 어딘가 강하고 격렬한 기분을 준다. 대부분의 유품은 명기적(明器的)인 것으로서, 특히 두드러진 기형(器形)으로는 항아리 상부에 누각(樓閣)이나 인물을 가득히 장식한 신정(神亭)이라 불리는 항아리와 항아리 어깨 부분에 닭의 머리를 장치한 천계호(天鷄壺)라고 부르는 수주형(水注形)의 용기와 동물모양을 형용한 호자(虎子)라고 불리는 물병 등이 있고 또한 인물이나 동물의 모양을 형용한 용(俑)의 종류도 적지 않다. 요지(窯址)는 장쑤성(江蘇省) 이싱(宜興) 부근과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 및 사오싱(紹興) 부근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다.

이 초기의 것에 대해서 남조(南朝) 5∼6세기의 고월주요(古越州窯)에서는 한풍(漢風)의 딱딱한 기분이 약해져, 기형(器形)에서 유연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많아진다. 기종(器種)도 명기적(明器的)인 신정(神亭)·천계호(天鷄壺)·용(俑) 등이 눈에 띄지 않게 되고, 실용적인 공기나 접시 등이 많아졌다. 기법의 관점에서는 오진(吳晋)의 것과 대차(大差)가 없으나 유조(釉調)에 농담의 변화가 보이며 산화(酸化)하여 누렇게 된 예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 제작지(制作地)도 넓어져 저장(浙江)·푸젠(福建)·광둥(廣東)의 각성(各省)에서, 후난(湖南)·쓰촨(四川)에 이르기까지 많은 요지(窯址)가 발견되고 있다.

고월주요(古越州窯)의 제품 중에는 청자 외에 검은 유약이 칠해진 도기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후일에 천목(天目)이라 불리는 흑유자(黑釉磁)의 조형(祖型)을 이루는 것이다.

또한 소지(素地)가 꽤나 희고, 청자유(靑磁釉)의 푸른 기(氣)가 엷은 백자에 가까운 것도 간혹 있어서 이는 백자(白磁)의 조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북방(北方)에서는 불교문화의 화려한 개화(開花)를 볼 수 있었던 북위시대(北魏時代)에도 도기(陶器) 분야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고, 한대(漢代) 작풍을 답습하여 약간 채색(彩色)을 가한 명기(明器)류에 조소적(彫塑的)인 아름다움이 엿보이는 데 불과하다. 그러나 북조(北朝) 중엽을 지나 6세기가 되자 명백히 화북산(華北産)이라고 생각되는 청자가 점차 많이 등장하였다.

북조 후기(北朝後期)의 화북(華北)의 자기(磁器)에 관해서 본다면 그것들은 남방(南方) 자기(磁器)의 영향하에 생겨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더욱이 일단 출현하게 된 그런 자기는 놀랄 만큼 신속하게 성장하여, 화북의 독특한 작풍을 만들어 낸 듯하다. 북조말(北朝末) 수대(隋代)의 유적(遺跡)으로부터 출토되는 수가 많은 백자는 그 대표적인 것으로서, 청자에도 남방에서는 볼 수 없는 웅장한 기형(器形)·작조(作調)의 유례가 있다. 이러한 북방(北方)의 자기는 남방 것에 비하면 일반적으로 두툼하며 소박하고 힘찬 감(感)을 갖게 하는 것이 많은데 드물게는 세련된 서방적(西方的)인 의장을 갖는 유례가 있어서, 당대(唐代)의 그러한 의장(意匠)의 선구적인 것으로서 특별히 주목을 끈다. 이와 같이 6세기의 중국에서는 넓은 지역에 도자기가 제작되게끔 되어 있어서 당송(唐宋)의 도자기의 눈부신 전개의 기반이 이때에 이미 구축되어 있었다.

당시대[편집]

당의 도자기[편집]

唐-陶磁器

당시대는 중국사(中國史) 중에서 주목할 만한 고양(高揚)의 시대이었는데 이 사실은 도자기에 관해서도 해당되는 말이다. 당의 도자기는 일반적으로 동체가 여유 있게 퍼져 있으며 바닥이 평평하고 커서 안정감이 있다. 무엇보다도 흙의 유연성이 조형상으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 특색으로 둥근 항아리(丸壺) 등에 있어서의 몹시 둥근 성격은 다른 데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어서 내용의 풍요함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마치 초당(初唐)·성당(盛唐)의 부유한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왕성한 의기(意氣)를 나타내는 것 같다.

당대(唐代)에는 각종 자기가 제작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백자(白磁)의 대두는 특기할 만한 일이다. 허난성(河南省)에서 백자를 조공(調貢)한 기록도 있으나 8∼9세기경에는 허베이(河北省)의 형주요(邢州窯)의 백자가 가장 유명하며 거의 같은 시기에 많이 만들어졌던 단계(端溪)의 벼루(硯)와 더불어 천하귀천(天下貴賤) 없이 이를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형주요의 백자는 아직껏 그 실체를 확정할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소지(素地)가 딱딱하게 구워져 있고 또한 눈(雪)처럼 보드라운 느낌을 주는 흰 살갗을 갖는 백자라고 하며 이것에 해당하는 유품은 상당히 많은 수에 이르고 있다.

또한 남방(南方)의 광저우 방면과 장시성(江西省)의 경덕진요(景德眞窯)와 쓰촨성 등지에서도 백자를 구웠다고 하며 허베이성(河北省) 정요(定窯)의 기원도 당대(唐代)라고 전해진다. 남방의 백자는 광둥항(廣東港)에서 해외로 반출된 듯하며 서아시아 각지에서 출토되는 일이 많다.

청자(靑磁)는 월주요(越州窯)의 청자가 유명하다. 중당(中唐)의 시인 육우(陸羽)는 그의 저서 <다경(茶經)> 중에서 형주(邢州)의 백자와 월주(越州)의 청자를 비교하여 "혹자(或者)는 형주를 웨저우(越州)의 상위에 놓는다면 그것은 천부당한 일이라 할 것이다. 만일 형자(邢瓷)를 은(銀)에 비한다면 월자(越瓷)는 구슬에 비유되는데 이것이 형과 월이 다른 첫째 점이며, 만일 형자를 눈(雪)에 비긴다면 월자는 얼음에 비길 수 있어 이것이 형·월의 둘째번 차이점이다"라고 기술하였다. 이 글은 월주요청자(越州窯靑磁)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낸 말로서 예부터 유명하다.

당(唐)의 월주요청자는 그 전신(前身)인 남조(南朝)의 고월주요(古越州窯)의 청자에 비하면 훨씬 진보된 정교한 것으로 유약은 맑은 느낌이 강해서 청자다운 아름다움이 나타나 있다. 당말(唐末)에는 유하(釉下)에 아름다운 모조(毛彫)나 투조(透彫)를 가한 것이 등장하였다. 제작지는

저장성(浙江省) 동북부에서 여러 곳 발견되고 있고, 위야오현(余姚縣) 상림호반 (上林湖畔)의 요지군 (窯址郡)은 유명하다. 제품은 해외로 자주 반출되어 한국·동남아시아·인도·이란·이집트에서까지 도편(陶片)의 출토를 볼 수 있다. 그 밖에 후난성(湖南省)의 악주요(岳州窯), 안후이성(安徽省)의 수주요(壽州窯) 등, 당대(唐代)에 청자를 구웠던 요(窯)는 여러 가지가 있다.

흑자(黑磁)도 화북(華北)·화남(華南)의 각지(各地)에서 제작되었던 듯한데 요지(窯址)는 허난성(河南省)에 있는 것이 알려져 있다. 당말에는 칠흑(漆黑)의 유약이 칠해진 유례(遺例)와 함께 이에 청백색의 불투명한 유약을 칠한 독특한 흑유자(黑釉磁)가 만들어졌다.

당삼채[편집]

唐三彩

한대(漢代) 이래 무덤에 넣는 명기류(明器類)에는 무유(無釉)의 회도(灰陶)에다 채색(彩色)을 가한 것이 주로 사용되어 왔으나 당(唐)시대에 녹색(綠色)·갈(褐)·백(白)·황(黃)·남(藍) 등 저온도의 유약으로 명기(明器)를 채색하는 것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당삼채(唐三彩)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귀족들 사이에 유행한 후장(厚葬)의 풍속과 더불어 발달한 연질(軟質)의 도자기로서 실용성은 적은 것이다. 그의 유례를 살펴보면 당시의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을 엿볼 수가 있으며 또한 당시 서방제국(西方諸國)에서 중국으로 유입된 서방문물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어 참으로 흥미를 끄는 바이다. 복잡한 고도(高度)의 기법이 고안되어 있어서 이 시대에 처음으로 저온도유(低溫度釉)가 눈부신 발달을 이룬 것을 알 수가 있다.

당삼채는 장안(長安)·뤄양(洛陽) 부근에서만 제작된 모양으로 제작시기도 700년 전후에서 약 50년간에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성당(盛唐) 귀족문화의 융성에 따라 나타났다. 쇠퇴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영향은 지극히 큰 것으로 발해(渤海)의 삼채(三彩), 통일신라·고려·요(遼)·금(金)의 삼채(三彩) 등은 모두 당삼채에 자극되거나 직접 그 기법을 배워서 생겨난 것이다.

송시대[편집]

송의 도자기[편집]

宋-陶磁器

9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중국의 도자기는 크게 변하였다. 그것은 혼연(渾然)하면서도 커다란 기형(器形)으로부터 부분적 특색을 살린 단정한 기형으로의 변화로서 파악되며, 또는 따스하고 유연한 기분에서 긴장되고 예리한 기분으로의 변화로 감취(感取)되는 것이다.

문양(紋樣)에 관해서 말한다면 당대(唐代)에는 조각풍(彫刻風)의 각문(刻紋)이나 침첨문양(砧添紋樣)이 두드러진 것이었는데 송대(宋代)에는 편각(片刻), 선각(線刻)과 같이 예리하고 얕게 파서 흐르는 듯한 아름다운 문양(紋樣)을 나타낸 것이 많아진다. 생산지도 급속하게 확대되고 각기 작풍의 특징이 유난해서 세련되고 아름다운 도자기가 만들어지게끔 되었다. 소위

송자(宋磁)의 황금시대였다.

우선 당대에 가장 유명했던 웨저우요(越州窯)에서는 5대 오월왕전씨(五代吳越王錢氏)의 치하(治下)에서 더욱 당풍(唐風)이 강한 청자가 양산(量産)되었으나 작풍은 점차 예리하고 섬세해져, 마침내 용천요(龍泉窯)의 청자로 이행해 갔다. 화북(華北)에서는 형주요(邢州窯)를 계승하여 정요(定窯)의 백자가 두각을 나타내었다. 정요의 제품은 정교한 크림색의 백자로서 송대궁중(宋代宮中)의 어용품(御用品)이 되었다고 말하며, 그 유려한 각문양(刻紋樣)은 타에 그 유례(類例)를 찾아볼 수 없다. 또 더러는 시유(枾釉)나 흑유(黑釉)를 바른 것도 있고, 금박(金箔)을 구워 입힌 금화(金花)의 정완(定碗)이라 불리는 것도, 극히 적으나마 있기는 있어서 소중히 여겨지고 있다.

남방에서도 화남일대(華南一帶)에서 아름다운 백자가 제작되었다. 이것은 푸른빛을 띤

'영청(影靑)'이라 불리는 백자(靑白磁)로, 극히 얄팍하고 예리하고 엄격한 작조(作調)에 그 특색이 있다. 순백(純白)의 기면(器面)에 새겨진 문양(紋樣)에 푸르스름한 맑은 유약이 괴어 있어, 한가닥 경쾌한 의장(意匠)이 등장하였다. 정요(定窯)의 백자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징더전(景德鎭)의 영청(影靑)은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한다.

각문양(刻紋樣)이 있는 청자가 송대에 화북 각지(華北各地)에서 만들어졌다. 소위

북방청자(北方靑磁)로서, 올리브색의 유약 중에 편각(片刻)의 당초문양(唐草紋樣)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그런 예리한 작조(作調)는 산시성(陜西省)의 요주요(耀州窯)에서 대표적인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후일 압형(押型) 수법(手法)에 의해 양산(量産)을 가능케 한 듯하며, 각지에서 동종(同種)의 의장(意匠)을 가진 것을 볼 수가 있다.

화북의 츠저우요(磁州窯)에 있어서는 각문양(刻紋樣)으로부터 진일보하여 독특한 소락문양(搔落紋樣)과 철화문양(鐵畵紋樣)이 발달하였다. 이는 원래 백자(白磁)를 모방한 것으로서, 쥐색(鼠色)의 소지에 백토(白土)를 녹여 칠하고 투명유를 발라 구워내는 수법의 것인데 유하에 각문양을 베풀면 백토가 떨어져 나가 쥐색의 바탕이 드러나 보인다. 이를 의식적으로 행하여 백색과 쥐색으로 문양(紋樣)을 나타내는 것이 소락문양의 기본이다. 이를 다시 강조하여, 백토 위에 철물감을 일면(一面)에 흘러 칠하고 그것을 소락(搔落)시켜 백(白)과 흑(黑)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것이 있으며, 또한 백지 위에 철물감으로 자유롭게 문양을 그리는 일이 행해졌다. 이렇게 하여 백지(白地)에 뚜렷이 칠흑(漆黑)의 문양을 나타낸 것이 츠저우요(磁州窯)의 독특한 수법으로, 그 정연(整然)한 기형(器形)과 더불어 송자(宋磁)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되고 있다. 산지(産地)는 허베이(河北)·허난(河南) 일대에서 발견되며, 민간(民間)의 일용품으로서 널리 보급되었다.

저장성(浙江省)의 용천요(龍泉窯)에서는, 북송대(北宋代) 이후 점차로 독특하고 아름다운 유색(釉色)의 청자가 성장하였다. 그것은 벽옥(碧玉)보다도 아름다운 밝고 맑은 청록색으로서 한(漢)·6조(六朝) 이래의 회유(灰釉)의 흐름이 여기에서 정점에 달하였다. 13∼14세기경에는 그 생산량도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동아시아 일대(一帶)는 물론이고 남아시아에서 서아시아에 걸쳐 용천요청자(龍泉窯靑磁)는 많이 반출되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특히 궁정의 어용품(御用品)으로 만들어진 관요(官窯)의 청자(靑磁)이다. 이것은 휘종 황제 때 수도(首都) 변경 부근에 설치된 북송관요가 그 최초의 것이라 전해지고 있는데 그 유품은 아직 알려진 것이 없다. 1127년, 여진인(女眞人)의 침략을 피해서 항저우(杭州)로 옮긴 후에 항저우 교외(杭州郊外)에 관요가 설치되어 청자가 많이 만들어졌다. 소위 남송관요가 이에 해당된다. 수내사요(修內司窯)·교단요(郊壇窯)라고 불리는 두 종류의 요(窯)가 있었으나 이 두 가지가 모두 침청자(砧靑磁)와 닮아 있고, 더욱 정묘전아(精妙典雅)한 청자를 구웠다. 이것은 송대(宋代)의 귀족들의 세련된 취미에 가장 잘 알맞는 것으로서, 송자(宋磁)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송대의 도자기로서는 당시 유행했던 말다음용(抹茶飮用)의 풍조에 따라 만들어진, 독특한 흑유의 공기(碗)를 간과하여서는 안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은 다(茶)산지로도 알려진 푸젠성(福建省) 북부의 젠야오(建窯)의 찻잔, 소위 건잔(建盞)이다. 그것은 칠흑의 광택이 있는 유약이 두껍게 발라진 짜임새 있는 모양의 공기(碗)로, 유면(釉面)에 갖가지 변화를 보이는 것이 있다. 은색의 세로 줄무늬가 전면에 나타나 있는 토호잔(兎毫盞=禾天目), 수면에 기름방울이 떠 있는 듯한 은색의 작은 반문(斑紋)이 보이는 유적천목(油滴天目), 또는 무지개와 같이 빛나는 결정군(結晶群)이 유적(油滴)과 함께 나타나 보이는 요변천목(曜變天目) 등, 그 어느 것이나 인공(人工)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정취이다. 이런 것은 가마(窯) 속에서 우연히 생긴 현상으로서 소위 요변(窯變)인데 역시 송자(宋磁)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또한 장시성(江西省)의 길주요(吉州窯)에서도 젠야오(建窯)와 닮은 천목(天目) 찻잔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여기서는 이중(二重) 입히기 수법에 의해서 문양(紋樣)을 만든 대피잔(玳皮盞)이라고 불리는 것이 특징적인 것이다. 또 목엽천목(木葉天目)이라 불리는 나뭇잎(木葉)을 응용한 것도 진귀한 의장의 천목 찻잔으로서 알려져 있다.

당시 송대의 도자기로서 실투백유(失透白釉)를 사용한 균요(均窯)가 있다. 이것은 화북일대의 소산(所産)으로, 홍자(紅紫)의 반문(斑紋)이 보이는 화려한 것이다. 또한 자주요풍(磁州窯風)의 백유(白釉)의 공기(碗)에 적색과 초록색의 덧그림 유약으로 그림을 그려 넣은 송적화(宋赤畵)라고 하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후일 오채(五彩=赤畵)의 선구(先驅)로서 주목을 받는 것이며 애틋하고 귀염성 있는 그 의장(意匠)을 즐기는 사람이 많다. 또한 허난방면(河南方面)에서 만들어진 흑유자(黑釉磁), 소위 허난천목(河南天目)도 갖가지 수법을 사용한 것이 있어, 짜여진 기형(器形)과 함께 송자의 특색을 잘 나타낸 것이 많다.

원·명·청시대[편집]

원·명·청의 도자기[편집]

元·明·淸-陶磁器

14세기경 원시대(元時代)에 이르면, 도자기에 있어서 당송(唐宋)의 변화보다도 더욱 큰 근본적인 변동이 엿보인다. 기형에 관해서 본다면, 그것은 예리한 이상적인 형태에서 안정된 실용적인 형태로 변화를 일으켰다. 기면 장식(器面裝飾)에서도 단일(單一)한 유약을 쓴 자기(磁器)에서 백자 기면(器面)을 청색과 적색의 문양(紋樣)으로 장식한 청화(靑花=靑畵白磁)·오채(五彩=赤畵)의 유행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송대(宋代)에 백자요(白磁窯)로서 두각을 나타낸 정더전요(景德鎭窯)가 원대(元代)에 급격하게 성장하여 그 번영으로써 다른 요(窯)는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징더전의 소장(消長)은 그대로 중국 제도(製陶)의 성쇠와 더불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청화(靑花)의 수법은 백자 유하(釉下)에 코발트 안료로 문양을 그리는 단순한 것으로서 환원염소성(歡元焰燒成)에 의해서 백지(白地)에 아름다운 청색의 문양이 나타난다. 그것은 음식기(飮食器)에 알맞는 청결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두고 두고 세계에 보급되어 현대에까지 미치고 있다. 그 기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혹시 서방(西方) 이슬람권(圈)으로부터 수입된 기법이 아닌가 말해지고 있다. 또 원(元)의 청화(靑花)는 짙은 청색으로 복잡한 문양을 나타낸 것이 많고 역감(力感)에 충만되어 있어, 청화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세계적으로 진중되고 있다.

명대(明代)에 이르러 청화의 수법은 더한층 세련되어, 영락(永樂)·선덕(宣德) 때에는 백옥(白玉)과 같은 아름다운 도면(陶面)에 깊이 있는 청색문양을 나타낸 정묘(精妙)한 청화가 만들어졌다. 성화년간(成化年間)에는 엷은 색조의 청화가 유행되었다고 하는데, 가정년간(嘉靖年間)에는 새로이 서방에서 수입된

회청(回靑)'이라 불리는 코발트를 사용한 화려한 청화가 많이 제작되었다. 만력(萬歷) 이후, 작풍(作風)은 거칠어져

고청화(古靑畵)

남경청화(南京靑畵) 등의 조제(粗製)된 청화가 양산(量産)되었다. 청조에는 관요(官窯)에서 정치(精緻)한 의장의 청화가 제작되었으나 그 색조(色調)는 차고 딱딱하여 옛날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원말(元末)·명초(明初)경, 백자의 기면(器面)에 적(赤)·녹(綠)·황(黃)색 등의 덧그림 물감으로 문양을 구워낸 오채(五彩=赤畵)가 등장하여 점차 성장해 갔다. 그리고 이것은 명대(明代) 중기(中期)에 이르러 완성되어, 청화를 제치고 유행하기에 이르렀다. 초기의 오채(五彩)는 농려(濃麗)한 채색이 전면적으로 베풀어져, 개중에는 금채(金彩)를 가하여

'금란수(金瀾手)'라고 부르는 것도 있다. 금란수의 최성기(最盛期)는 가정년간(嘉靖年間)이라고 하지만, 오채의 최성기도 거의 동시기(同時期)로서 만력년간(萬歷年間)에 이르면 난숙(爛熟)의 극(極)에서 퇴폐로 기울어 마침내 명말(明末)에는 분방조잡(奔放粗雜)한 오채가 양산(量産)되기에 이르렀다.

청시대(淸時代)의 도자기는 징더전(景德鎭)에 설치된 관요, 즉 어기창(御器廠)의 제품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는 모든 점에서 정치(精緻)를 다한 것으로 기술적인 점에서는 극치라 할 만큼 정교한 것인데 특히 강희(康熙)·옹정(雍正)·건륭(乾隆) 3대(代)의 어기창 제품은 전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강희년간(康熙年間)에는 청화(靑花)·오채(五彩)가 가장 뛰어난 것이며, 또 '낭요(朗窯)'라 불리는 동정색(銅呈色)의 홍유자(紅釉磁)가 특징적이다. 옹정년간에는 오채의 일종으로 담색조(淡色調)를 살린 두채(豆彩)가 존중되고, 불투명한 덧그림 물감으로 치밀한 문양을 나타낸 '분채(粉彩)'가 크게 발달하였다. 보통 고월헌(古月軒)이라 부르는 분채는 옹정(雍正)에서 건륭년간(乾隆年間)에 걸쳐 제작된 기교의 극(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분채(粉彩)로서 일종의 전아(典雅)한 풍취(風趣)가 있어 진품(珍品) 취급을 받고 있다. 건륭년간에는 전면을 도화용(陶畵用) 물감으로 담뿍 칠한

협채(夾彩)라 불리는 일종의 분채(粉彩)가 출현하였고, 청자나백자 등으로 옛 송(宋)·명(明)의 작풍을 모방하는 일도 성행되었다. 이 동안에 새로운 갖가지의 유법(釉法)이 개발되어 기법상으로는 도예의 정점에 달한 듯이 보였으나 기술의 편중(偏重)은 결국 목죽(木竹)·금속·칠기(漆器) 등까지 도자기를 모방케 하는 그러한 그릇된 방향으로 진전되어, 소위 공예(工藝)의 정도(正道)를 일탈한 퇴폐(頹廢)로 전락되어 갔다. 청말(淸末)의 동란(動亂)시대에 징더전은 크게 타격을 입어 그후 오랫동안 재기하지 못하였다.

현 대[편집]

현대 중국의 공예[편집]

現代 中國-工藝

현대 중국의 공예는 편의상 19세기 후반, 즉 청말(淸末)부터 1960년대까지의 100년간을 살펴보는 것으로 했다.

중국의 공예는 역대왕조(歷代王朝)의 특별한 관심과 장려·숭상으로 발전되어 왔는데, 예를 들면 은대(殷代)에는 이, 주대(周代)에는 정(鼎), 진대(秦代)에는 동경(銅鏡), 초대(楚代)에는 칠기(漆器), 한대(漢代)에는 옥기(玉器), 수당대(隋唐代)에는 조각(彫刻), 송대(宋代)에는 자기(瓷器), 명청대(明淸代)에는 자수(刺繡) 등이 대표적 공예품이라 하겠다.

그런데 현대는 서양제국주의 열강(列强)의 침략, 중화민국의 건국과 내란(內亂), 일본의 침략, 국공내전(國共內戰), 중화민국의 대만(台灣)으로의 철수,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등으로 중국의 모든 질서는 무너져 문화대국이었던 중국은 병든 사자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만 시대였다. 물론 중국의 질서는 40∼50년대부터 회복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의 공예도 복고와 새로운 창조라는 2원(二元)시대를 맞게 되었다.

중국의 공예품은 그 모습(形制)·빛깔(色彩)·무늬(紋飾)에서 3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돈후(敦厚)하면서 주적색(朱赤色)을 많이 쓰며, 다양한 변화미를 추구하는 것이 중국공예품의 특성이다.

현대의 공예품은 이러한 전통적인 중국공예의 특성과 외국으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양식과의 마찰·갈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침체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기도 했다. 과거 100년간의 중국공예품, 특히 자기·칠기·옥기 등의 공예품은 전통적인 기법의 타락과 값싼 상품화(商品化)로 인해 생기를 잃고 저질화(低質化)되기도 했다.

그러나 1950년대 초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우선 대만(台灣)이 자리를 굳히게 된 중화민국 정부는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전통공예의 부흥과 전승(傳承)에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는데, 그 첫번째 사업으로 타이베이(台北)에 수공업연구소를 설립하고 각 지방에 공예연습소를 두었다. 그러면서 죽·목·금(竹·木·金)의 공예품과 편직품(編織品)에 관한 각종 실험과 연구를 활발히 하고, 전문기술자 양성에 박차를 가했다. 또 질이 좋은 대리석이 많이 나는 화롄(花蓮)에서는 석공예품(石工藝品)을 양산하여 수출까지 할 수 있도록 했다. 오늘날 대만의 3대 수출공예품은 죽·석·목(竹·石·木)공예품이라 하겠다.

1949년 10월 베이징(北京)에 5성홍기(五星紅旗)를 올린 중국(中國)도 전통공예의 활기를 되찾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본토에서의 전통문예부흥운동은 각종 공예연구소와 베이징(北京)·톈진(天津)·상하이(上海)·항저우(抗州)·광저우(廣州) 등지에 있는 미술학원(미술대학)이 중심이 되었다.

공예연구소와 미술학원에서는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공예가들이 견습생과 학생들에게 전통공예의 비법을 가르쳤으며, 젊은이들은 개인기(個人技)도 익혔지만 집체제작(集體制作:공동제작)에 힘썼다.

중국은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공장을 재건하고 새로운 공장을 세우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재건된 징더전 도자창(景德鎭陶瓷廠)과 신설된 베이징 옥기창(北京玉器廠) 등을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한(漢)나라 때부터 만들어져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의 옥(玉)공예품은 현재 베이징·톈진·상하이·광저우·양저우(揚州)·진저우(錦州) 등지에서 수만 명의 기술자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고, 이러한 전통공예품은 세계 각지에 있는 중국특산물 판매센터에서 팔리고 있다.

지금 중국이 대량생산하고 있는 공예품은 대부분이 전통적인 의장(意匠)을 지키고 있지만 도구의 기계화와 많은 재료의 현대화로 미학상(美學上)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許 英 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