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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동양미술의 흐름/중국의 미술/중국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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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각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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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彫刻-展開

중국인의 조형활동 중에서 조소분야를 살펴보면, 은주(殷周)에서 한(漢)·위(魏)·진(晋)에 걸친 공예감각이 앞선 청동기(靑銅器)나 회화적인 표현형식을 가진 화상석(畵像石) 등의 조소유품이 만들어진 시기와, 인도(印度)에서 발상(發祥)한 불교미술, 그 중에서도 불교조각이 5호16국(五胡十六國) 시대에 서역의 사막지대를 넘어 전래(傳來)된 후, 북위(北緯)·남북조(南北朝)·수(隋)·당(唐)·5대(五代)·송(宋)에 걸쳐서 허다한 유품을 창조한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물론 종교활동의 포교(布敎)의 일단(一端)으로서 불교뿐만 아니라 중국 고유의 유교나 도교에도 미술활동이 있고 유품(遺品)도 적으나마 남아있다. 그러나 불교미술에 비하면 그런 것들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불상(佛像) 등의 영향을 받고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중국 조각사(彫刻史)의 전개는 태반이 불상조각에 의해 점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상의 표현형식을 시대순에 따라 고찰하면 중국 남북의 지역이나 그 왕조(王朝)의 성격(왕조의 민족성이라고 하여도 무방)이 소위 시대양식이나 지역양식으로 변천되고 있음을 잘 알 수가 있다.

더욱이 인도나 서역(西域)의 불상 표현형식(양식)이 부단히 자극을 주었고, 그것을 중국인의 미의식을 통하여 수용해서 독자적인 미술양식을 만들어 내어 동아시아권(圈)에 있는 각지(各地), 즉 한국·일본 등에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본다면 중국 불상조각사(佛像彫刻史)가 가장 구체적으로 유품을 통해 조소(彫塑)의 역사를 뚜렷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개설(槪說)에서 언급한 한족(漢族)의 미의식과 새외민족(塞外民族)의 미의식 사이의 소장변화(消長變化)를 고찰하는 데 있어 불상조소(佛像彫塑)는 극히 적합하고 흥미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선사시대로부터 한·위·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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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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彩陶

황하유역(黃河流域) 농경민의 조소활동의 시작은 앙사오채도문화(仰韶彩陶文化) 가운데서 볼 수 있는 채도상(彩陶像)과 석조유품(石造遺品)으로, 마치 인더스 문명이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조소(彫塑), 즉 찰흙을 반죽하여 만든 지모신(地母神)·토우(土偶) 등을 연상케 한다. 더욱이 이런 것들은 오곡풍요와 행복기구(幸福祈求)의 호부류(護符類), 지모신상(地母神像)보다는 물(水)의 신앙에 연유된 인면사신(人面蛇神)이나 사자(死者)의 재생을 비유한 누에로 된 소박치졸(素朴稚拙)한 유품으로 남아 있다. 그 어느 것이나 황하(黃河) 농경대주민(農耕帶住民)의 생활감정의 구현물(具現物)이었다.

은주의 청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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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周-靑銅器

은주의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 기형(器形)과 장식의장(裝飾意匠)이 복잡한 동기(銅器)가 갑자기 만들어지고, 한족(漢族)의 미의식과 창조활동이 극히 승화(昇華)된 형태로 발휘되었다. 그 중에서, 인면사신화나 호두시굉, 수우형희존(水牛形熙尊), 쌍양형존(雙羊形尊) 등의 기형(器形)에 동물이나 인물두부(人物頭部)를 붙인 매력 있는 작품이 만들어졌다.

은주시대(殷周時代)의 사람들이 이러한 형상동물을 기형(器形) 속에 교묘히 옮겨 넣어 엄격장중(嚴格莊重)한 형식으로 표현하게끔 된 데에는 소니(塑泥)로 제작해 온 오랜 역사가 있었던 점과 제사 희생에 사용한 동물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있었음을 예상케 한다.

전국시대의 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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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時代-明器

전국시대에 들어서는 묘(墓) 속에 부장(副葬)된 명기(明器)에 흑도무용상(黑陶舞踊像)이나 청동인물상(靑銅人物像), 은제호인상(銀製胡人像) 등의 소상유품(小像遺品)이 다수 제작되어서, 인물 모양의 조형감각이나 표현형식에 은주동기(殷周銅器)의 동물표현과는 상당히 다른 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사전국묘(長沙戰國墓)의 목용(木俑)과 휘현흑도용(輝縣黑陶俑)에는 인물 표현에 있어서 대량생산을 엿보이게 한 생략과 치졸하고 힘찬 강도(强度)를 보여 매력의 한가지로 간주되고 있다. 호인상(胡人像)과 청동인물상(靑銅人物像)에는 한족(韓族)의 전통적 미의식과는 상이한 이국의 풍속·표정 등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 있고 조형감각도 달리 되어 있다. 인물조소의 누벨바그(새로운 파도)의 도래를 생각케 한다.

한대의 문양·용·화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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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代-紋樣·俑·畵像石한대에 접어들면 무제(武帝)의 서역원정과 흉노문화(匈奴文化)와의 교섭을 통해 서방문화와 기예(技藝)가 유입되었다. 인물·동물을 사실적으로 관조(觀照)하여 종래의 전통적인 한족의 미의식에 적합한 조형화가 행하여진 시대로서, 장식의장(裝飾意匠)에 공상수(空想獸)·신선(神仙)·운기문(雲氣紋)·반리문 등의 유동감(流動感)이 넘치는 무늬가 자유활달하게 표현되는 한편 곽거병(藿去病:한무제 때의 장군) 묘(墓)의 석조동물과 묘분부장품(墓墳副葬品)인 도용(陶俑) 등의 환조(丸彫) 조소 유품이 다수 제작되었다. 이들 유품에서 볼 수 있는 인물상은 정면관조(正面觀照)로써 만든 형식적인 전통적 기법에 의한 유례(遺例)가 많은데 대해, 동물도용(動物陶俑)과 석조작품에는 뛰어난 것이 많다. 오히려 화상석(畵像石)이라 호칭되는 부조의 벽화상(壁畵像) 속의 인물, 동물(말과 새, 신선) 등에 생생하고 약동적인 자태나 조형이 보이며, 회화 수법도 상당히 진보된 표현형식과 기술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대(漢代)에 이르러 한족의 그때까지의 오랜 전통을 집대성한 조소의 표현형식이나 기법이 완성되어, 위진시대(魏晋時代)로 계승되어 갔다.

불상조각의 유입에서 남북조시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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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식금동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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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式金銅佛

불교미술의 전혀 새로운 조형감각과 표현기법, 미의식은 서역(西域)의 유사도시(流沙都市), 또는 스텝로드를 통하여서 중국의 북변경역(北邊境域)으로 유입(流入)되었다. 중국으로의 불교유전(佛敎流傳)은 후한(後漢)의 명제(明帝)나 환제(桓帝) 때라고 전해지나 불상의 유입과 유품의 존재는 5호16국시대라고 하여도 무방하다. 황하북변(黃河北邊)의 쑤이위안지방(綏違地方)에는 유목기마민족인 흉노(匈奴)·선비(鮮卑) 등이 세력을 펴서 북시베리아의 스키타이 양식을 농후하게 반영한 청동기문화를 발달시켜 그 유품 중에는 소금동불상(小金銅佛像)이 남아 있다. 후에 북위왕조(北魏王朝)를 세운 선비족인 척발(拓跋)은 쑤이위안의 포두(包頭)에 있으며 불교를 수용하고 있었다고 여겨지며, 또한 5호16국의 후조(後趙)·북량(北凉)·전진(前秦)의 제왕(諸王)들이 서역호승(西域胡僧)을 국사(國師)로서 초빙하여 조사조불(造寺造佛)을 행하였다.

이러한 조불활동(造佛活動)의 표본 분본(粉本)이었던 소금동불상(小金銅佛像)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338년의 금동불좌상, 산시성, 삼원현(三原縣) 출토의 금동보살입상, 윈스로프 컬렉션의 고식금동불좌상 등이 그 일례이다.

이러한 고식금동불상(古式金銅佛像)의 특색은 산시성 출토의 보살입상에서 볼 수 있듯이 간다라 출토의 청색편암제(靑色片岩製) 보살입상을 그대로 모사(模寫)한 듯한 조형형식과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있다. 표정·수염·영락(瓔珞)·완천(腕釧)의 형식, 의문(衣紋) 주름의 표현, 샌들을 신은 발의 조형까지 북서(北西) 인도의 기원 2세기경의 작품과 닮았다. 윈스로프 컬렉션의 고식불좌상(古式佛坐像)도 안모(顔貌), 통견(通肩)한 법의(法衣)의 형식이나 의문(衣紋) 주름의 표현 등이, 역시 간다라 불좌상(佛坐像)을 모방한 소금동불(小金銅佛)의 하나로 인도승 강승회(康僧會), 강거(康居)의 강승개(康僧鎧), 월지(月氏)의 축법호(竺法護), 불도징(佛圖澄) 등이 청래(請來)한 불상의 전형이라 생각하여도 무방하다.

재명상(在銘像)으로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건무(建武) 4년 불좌상(佛坐像)에 있어서는 통견(通肩)한 납의(衲衣)의 주름표현이 가슴께에서부터 밖으로 흘러내리는 원호중문식(圓弧重文式) 표현으로 간다라 불상의 법의 형식이라기보다는 더 시대가 경과한 굽타조(朝)의 마투라 불상의문(佛像衣紋)의 형식화를 연상케 한다. 이 통견상의문(通肩相衣紋)의 표현은 소금동불의 계보 중에서 437년(劉宋元嘉14) 불좌상과 원가(元嘉) 28년 유국지(劉國之)의 상(像), 다시 443년(北魏太平眞君4) 불입상(佛立像) 등의 작품으로 전개된다. 그밖에 석조대상(石彫大像)으로서 허베이(河北省) 줘셴(▩縣) 청래환씨(請來桓氏) 일족의 불입상(拂入像)이 4세기 말년에 조립되고 또한 금동소불(金銅小佛)을 그대로 석조(石彫)에 옮긴 중국 제작의 작품도 출현하게 되었다.

윈강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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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崗石窟

진조(晋朝)의 남도(南渡)는 남이(南夷)·만족(蠻族)의 거주지(居住地)로 되어 있던 양쯔강(揚子江) 유역 일대에 한족·한문화의 유입을 가져와, 문화양상(文化樣相)을 일변시켰으며 마침내 거기에 유송(劉宋)의 불상조각을 남기고, 남조계(南朝系)의 미술전통을 성립케 하여 문화양상을 일변시켜 갔다. 한편, 삭북유목민(朔北遊牧民)의 화북침입(華北侵入)에 부수되어 황하이남(黃河以南)에까지 불교미술이 도입되어 황하유역에 축적되어 있던 부(富)를 수탈함과 동시에 그 일시적 소비형식으로 불교미술의 일대(一大) 조영(造營)이 행해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북위(北魏)의 대동윈강석굴(大同雲崗石窟)의 개착(開鑿)이었다. 이미 4세기 중엽에 둔황천불동(敦煌千佛洞)의 개착과 조불사업이 시작되어 있었으나 북위건국(北魏建國)의 무렵으로부터 양주(凉州) 남쪽 천제산석굴(天梯山石窟), 란저우(蘭州)의 병령사석굴(炳靈寺石窟), 타이저우(泰州)의 맥적산석굴(麥積山石窟) 등이 계속 조영되고 있었다. 북위(北魏) 문성제(文成帝)가 담요(曇曜)라는 승(僧)을 등용하여 왕도(王道)인 평성(平城=大同) 서쪽에 있는 무주새(武州塞)의 마애벽(摩崖壁)에 태조(太祖) 도무제(道武帝)로부터 문성제(文成帝) 자신을 포함한 5제(帝)를 위해 윈강담요오굴(雲崗曇曜五窟:석굴번호제16동에서 20동까지)의 조립을 시작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석굴조영(石窟造營)의 동점현상(東漸現象)의 하나였다. 조사조불은 이 경우에 제왕(帝王) 권위의 앙양(昻揚)과 과시였다고 생각된다.

약 14∼17m의 좌상·입상의 조형은 불상의 아이코노그러피(軌儀:iconography)에 의해 표현되고 있는데, 눈을 크게 뜨고, 단정히 높은 코와 입술이 두꺼운 건장한 모습을 지닌 표정은 확실히 척발족(拓跋族)의 미의식의 조형화이었다. 5불(五佛)은 제왕의 저마다의 모습과 닮았다고 하는데 제왕의 이상미(理想美)를 담뿍 담은 건강하고 명쾌한 조형표현이 특색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중인도(中印度)의 마투라 조각이 유목 기마민족인 쿠샨조(朝) 제왕(帝王)의 이상미를 조형화한 현상과 마찬가지이다. 담요오굴(曇曜五窟)의 대석불이 의문(衣紋)의 형식과 조형감각에 있어서 간다라풍(風)이나 굽타기(期) 마투라풍(風)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5호16국 시대에서 북위(北魏)까지의 조불(造佛)의 표현방식에서 보더라도 당연하다 하겠다. 태화초년(太和初年)에는 제5동에서 제20동까지의 커다란 석굴이 완성되었고, 각 석굴 앞에 걸쳐서 세운 목조건축도 완성을 보았다. 문성(文成)·헌문(獻文)·효문(孝文) 등 3제(帝)의 북위시대는 윈강석굴조영의 약 45년간에 해당하는데 특히 효문제(孝文帝)는 유(儒)·도(道),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을 가까이 하여, 한식제도로의 개혁, 한식생활로의 접근 수용 등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조형활동에서도 나타나 불상의 납의(衲衣)가 통견상의 한식 제복으로 변하여, 명쾌하고 때로는 불균형을 느끼게 하는 대장부의 상(相)에서 균형 잡힌 세련된 미(美)로, 그리고 신체를 어느 정도 화사하고 섬세한 미(美)로, 또 쾌활한 둥근 얼굴에서 세면(細面)의 명상적인 표정으로 변화한 조형이 엿보이게끔 된다. 더욱이 의복의 의문(衣紋)의 끝이 소매나 옷자락, 치맛단(裳先) 등에서 유동적으로 리듬을 담고 표현되어 있다.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섬세한 기교가 소박하고 힘찬 면 구성과 긴장미 있는 조형이 도처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5굴(窟), 제6굴(窟), 또한 21굴(窟) 이서(以西)의 소석굴조상(小石窟彫像)에 그러한 변화가 나타나 있다.

룽먼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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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門石窟

효문제(孝文帝)는 493년(太和17). 평성(平城)에서 남하하여 한위(漢魏) 이래의 고도(古道) 뤄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기었다. 제(帝)의 한화정책(漢化政策)이 진행되는 가운데 조불활동도 계속되어, 뤄양의 성내는 물론, 남교(南郊)인 이수이(伊水)의 마애벽룡문(磨崖壁龍門)에 석굴사(石窟寺)가 계속 개착(開鑿)되었다. 룽먼석굴의 석상은 윈강 후기의 조형표현을 취하면서 또한 한족 미의식(漢族美意識)에 적합한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는 얼굴이나 몸도 세장형(細長形)으로 화사하게 되고 이목구비가 예리하고 강하게 조각되었고 의문(衣紋)의 면 구성은 편평(扁平)하며 의문(衣紋) 주름도 두꺼운 의상의 질감에 알맞은 병행유동선(竝行流動線)으로 여러 줄로 예리하게 표현된다. 특히 좌상 무릎에서 대좌(台座)에 늘어뜨려진 치맛단(裳先)이 장식적인 의문 주름을 보여서 좌우로 펼쳐지는 상현좌형식(裳懸座形式)을 볼 수 있다.

북위굴(北魏窟)로 유명한 것에는 선무제(宣武帝)의 칙명(勅命)으로 505년(正始2)에서 20여년 걸려서 만들어진 빈양동(賓陽洞)과 그 제불상(諸佛像), 또한 벽면 일부를 장식하는 제왕후비(帝王后妃)들의 공양 행렬을 소재로 한 부조(浮彫)군상, 연화동(蓮華洞)의 5존상(五尊像) 등을 들 수 있다. 북위후반(北魏後半)의 소위 이런 룽먼양식(龍門樣式)은 천하(天下)의 조상(彫像) 전체에 영향을 주어 이 양식의 단독 석조상(單獨石彫像), 금동불상이 허다히 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허난성(河南省)의 공현석굴(鞏縣石窟)도 룽먼양식을 답습하여 북위 후반기에 만들어진 유구(遺構)인데 질(質)이 다소간 무른 사암(砂岩) 탓인지 유연한 조형감각이 보여, 룽먼상(龍門像)과는 좀 상이한 바가 있다. 제2·제3동(洞)에 귀인(貴人) 공양 행렬의 부조군상(浮彫群像)이 만들어져 있는데, 룽먼의 예보다 조형이 복스럽게 귀여운 표정이 되어 있는 점이 주목을 끈다.

제주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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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周樣式

북위는 535년 위수(渭水)의 장안(長安)에 도읍(都邑)한 서위(西魏)와 장수 근처 업에 근거를 둔 동위(東魏)로 분열되고, 뤄양(洛陽)은 이미 문화의 중심무대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여 룽먼석굴조영(龍門石窟造營)도 일단락을 고하였다. 동서위(東西魏) 불상조각의 양식은 룽먼양식을 답습하고 있으나 한층 정미세련(整美洗練)된 작풍을 나타내고 있다. 이후 550년 동위(東魏)로부터 북제(北齊)가 557년 서위(西魏)로부터 북주(北周)가 제위(帝位)를 뺏고 왕조를 세웠다. 소위 미술의 새로운 시대양식인 제주양식(齊周樣式) 전성기에 들어갔다.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의 전고(全高) 340cm의 연화형후광(蓮華型後光)을 가진 보살입상(菩薩立像)은 552년(北齊의 天保3) 장자현령(長子縣令) 위만(魏蠻)이 조립한 유품이다.

온건하고 온화(溫和)한 표정이나 의문(衣紋)주름이 얕고 유동감이 있는 조형은 북위 룽먼양식에서의 탈화(脫化)가 엿보이며, 북제 초기의 대표례의 하나이다. 산둥(山東)에서 허베이(河北)에 걸쳐, 이즈음에 백옥제(白玉製)의 나형반가사유보살상(裸形半跏思惟菩薩像)이 제작되어 있으나, 그것들은 자태의 파악에 관심이 베풀어지고, 의문(衣紋) 주름과 면의 기복이 작은, 온건한 조형이 특색이라 하겠다.

북제시대(北齊時代)의 석굴유구(石窟遺構)로서 대표적인 예로 태원(太原)에 가까운 톈룽산석굴(天龍山石窟)과 허베이(河北)과 허난(河南)에 걸쳐 있는 남북(南北) 향당산 석굴군(響堂山石窟群)이 이에 해당한다. 톈룽산석굴은 동위(東魏) 때부터 개착(開鑿)이 시작되어 그 제10동, 제16동 제존(諸尊)은 북제양식을 완성하고 있다. 거기서는 인간의 육체를 극단적으로 무시한 룽먼양식의 형이상학적인 미(美)가 육체의 실재감(實在感)과 그 풍화유연(風和柔軟)한 미(美)에 자리를 양여(讓與)하여, 의문(衣紋)이 얇은 주름 밑에 육체가 의식되고 주름도 얕아 눈에 띄지 않았다. 육체의 사실적 관조(觀照)의 소산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표정의 온화한 표현으로부터 점차 흉복부(胸腹部)를 통과하여 직강(直降)하는 유동감 있는 의문 주름을 따라 잇단 치맛단의 표현에 인상점(印象點)을 옮겨 놓은 허베이(河北) 딩톈(定縣)의 석불입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향당산석불상(響堂山石佛像)의 조형표현에는 보관(寶冠)·장신구 등의 세부의장이 정세하게 조각되어, 육체는 블록상(狀)의 실체로서 관조파악되어 풍만한 육체미를 보이고 있음이 특색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도의 굽타조(朝)에서 완성된 얇은 납의(衲衣)를 통하여 육체를 표현하는 조형표현이나 그러한 시형식(視形式)이 6세기에는 이미 중국에 도입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당시대-불상조각 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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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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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彫刻

북위(北魏)에서 시작된 대규모적인 조불사업은 유목기마민족이 재래(齋來)케 한 북서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쿠샨왕조의 미술과 서역호족(西域胡族)의 미의식을 혼재시켜 만들어 낸 조형표현·양식을 본으로 하여, 거기에 한족 미의식과 조형이념을 기조(基調)로 하여 추진되어 왔다. 유정(有情:人格者)에 대한 이해(理解)를 경전(經典)에만 비추어 본다면 한족(韓族)이 추상화를 자유로이 다루는 경향에서 신선(神仙)과 도자(道者)·현인(賢人)의 이상상(理想像)인 육체를 화사하게 만들고, 세신(細身)의 명상적(瞑想的)인 표정을 갖는 불상(즉 龍門樣式)이 선택되게 되었다.

그러나 인도나 서역과의 교통이 오아시스 루트를 통해 빈번해져 구법승(求法僧)의 순례(巡禮)와 유학(留學)에 의해 인도 고전조각의 이상미가 소개되자 그 수용소화(受容消化)가 행해져, 마침내 제주양식(齊周樣式)의 완성을 보았다. 이러한 풍조하에 수(隋)는 남북중국을 통일하여 581년(開皇1)에 복불(復佛)의 조칙(詔勅)을 발(發)하여 금은(金銀)·단향(壇香)·협저(夾紵)·아석제(牙石製)의 대소 10만 6580구(軀)를 새로이 만들고, 한편 10만 1000체(體)의 고불상(古佛像)을 수리하였다. 조불활동은 각지에서 일어나, 이러한 유품(遺品)이 있는 곳을 열거하면, 룽먼석굴의 약방동(藥房洞), 빈양남동(賓陽南洞)의 5존상(五尊像), 톈룽산석굴(天龍山石窟) 제8동(第八洞) 감불군(龕佛群), 산둥성 위한산(山東省玉函山) 불욕사의 제불(諸佛), 이두원먼산석굴(益都雲門山石窟) 제1동(洞)·제2동(洞), 타산석굴(駝山石窟) 제2동(洞)·제3동(洞) 등이 있다.

이러한 조상(彫像)들의 특색은 풍만하고 당당한 체구로 직사각형의 얼굴이 목의 삼도표현(三道表現) 위에 크게 인상적으로 창출되고 의문 주름과 납의(衲衣) 밑의 내의(內衣) 수대(綬帶)의 매듭이 뚜렷하게 얕은 부조(浮彫)로 정돈되고 표현되어 있는 점에 있다. 보살·나한(羅漢)·역사상(力士像) 등도 원통상(圓筒狀)의 블록을 기조(基調)로 한 육체표현을 보이고 보관(寶冠)·영락(瓔珞)·천환(釧環)·치마 등이 얇게 세밀히 조각되어 있다. 특히 영락은 가슴께에서 밑으로 늘어졌고 복부 중앙에서 치마와 마찬가지로 X자(字)로 교차되어 표현되었으며, 육체의 미묘한 면구성(面構成)이 의식되지 않는 흉복부(胸腹部)의 평활한 조형에 액센트를 주고 있다. 그의 호례(好例)로는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개황(開皇) 5년(585)이라 새겨 있는 관음입상이 있다. 상의 높이 305cm, 백대리석제(白大理石製)의 대상(大像)이며, 온화한 표정과 목에서 흉복부(胸腹部), 다시 각부(脚部)까지의 면구성의 단순한 조형에다가 X자로 교차하는 치마나 영락(瓔珞), 그리고 하의(下衣)의 의문 주름의 아름답고 간결한 표현 등이 주목할 만한 것이다.

수대조각(隋代彫刻)의 특색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수조각(隋彫刻)은 제주양식의 계승과 완성이라는 양면(兩面)을 상당히 짙게 갖고 있으며, 한편 산둥지역의 원먼산(蕓門山)과 타산석굴(駝山石窟)의 제상(諸像)은, 룽먼양식의 초인간적인 유정(有情)의 조형표현을 답습하면서 장신구의 세밀한 공예감각을 추구하여, 초자연적인 장신상(長身像)을 만들어 낸 이색적인 지방양식을 확립하고 있다.

초당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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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唐-彫刻

당제국(唐帝國)은 동(東)아시아의 문화·미술의 창조자이자 규범전형의 확립자이며, 주변제족 미술의 중앙양식 제시자(提示者)이기도 하였다. 물론 그 300년간의 미술창조활동은 조불사업의 질적인 내용에 초당(初唐)·중당(中唐)·만당(晩唐) 등의 산형(山形) 커브가 있어서 중국고전조각(中國古典彫刻)의 맹아상승기(萌芽上昇期)·완성기·원숙퇴폐기의 세 시기로 구분된다. 초당은 태종의 정관기(貞觀期)와 고종치세기(高宗治世期)의 약 80년으로 서(西)아시아·인도와의 교통도 빈번하며 인도 구법승(求法僧)의 내왕도 빈번하였다. 현장(玄裝)이 645년(貞觀19)에 신지식(新知識)을 가지고 귀환했고, 왕현책(王玄策)도 647년(貞觀22)에 돌아와 당문화의 세계적 성격형성을 위해 공헌하였다. 이러한 영양소는 차후 중당기(中唐期)의 개화완성(開花完成)에서 발휘되나 이미 정관불(貞觀佛)이라고 불리는 일군(一群)의 조상(造像)에 있어서 굽타 고전조각이 강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 일례(一例)로서 장안(長安)에서 만들어진 정관 13년 명(銘)이 있는 좌불상(坐佛像)이 있다.

봉선사 노사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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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先寺盧舍那佛

룽먼석굴에서는 당대(唐代)에 들어서도 조불활동이 계속되었다. 재발동(齋跋洞), 밀양 북동(密陽北洞)의 정관불상(貞觀佛像)의 유품이 있는데, 수대(隋代)의 블록 형상(形狀)의 육체관조(肉體觀照)를 벗어나 형자(形姿)에 육체적인 풍만한 곡선미를 나타내고 삼도(三道)도 곡선미가 풍만한 육체미를 표현하여서, 풍만한 신체에 걸치고 있는 의문 주름도 사실적으로 조각된 면구성의 자연스러운 기복이 표현되어 있다.

고종시대(高宗時代)는 650년(永微1)에 시작되어, 현경시대(顯慶時代)의 전반(前半)까지의 전기(前期) 작품으로서, 룽먼의 경선동(敬善洞), 마애삼존(磨崖三尊)이 있는 6동(洞), 노용동(老龍洞)의 제존(諸尊), 산둥신통사(山東神通寺) 천불애(千佛崖)의 불의상(佛倚像)과 아미타좌상(阿彌陀坐像)의 유례가 있다. 또한 동물조각(動物彫刻)의 걸작인 소능(昭陵)의 6준마(六駿馬) 부조(浮彫)도 이 무렵 만들어졌다. 고종치세(高宗治世) 후반기(後半期)는 660년에서 683년에 걸치는데, 룽먼석굴 조불사업의 절정기인 봉선사노사나대불(奉先寺盧舍那大佛)을 중심으로 눈부신 활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봉선사는 칙명에 의해 672년(咸享2)에서 675년(上元2) 사이에 만들어진 대조영(大造營)의 결정(結晶)으로서 본존노사나좌상(本尊盧舍那坐像:높이 약 13m)과 나한(羅漢)·보살·공양(供養)·역사상(力士像)이 좌우로 거의 환조(丸彫)풍으로 마애(摩崖)에서 조출(彫出)되었다.

신체의 프로포션도 잡히고, 길쭉한 눈매, 아름다운 콧마루와 비익(鼻翼), 구순(口脣)의 자연스러운 조형 등은 사실에 좇으면서 노사나불의 이상미를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걸작품이다. 보살의 보관과 영락(瓔珞), 치마와 하의(下衣)의 예리한 주름의 조형, 또는 호화로운 화염후광(火焰後光) 등도 볼 만한 것 중의 하나이다.

성당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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盛唐-彫刻

성당기(盛唐期)는 측천무후(則天武后) 치세(治世)로부터 현종(玄宗)의 개원(開元)·천보(天寶) (713∼755) 연간(年間)까지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측천무후시대의 걸작은 702년∼703년(長安2∼3)경, 왕도 장안의 광택방(光宅坊) 광택사(光宅寺)에 측천무후가 만든 칠보대누각(七寶台樓閣)의 내면 벽을 장식하고 후일에 보경사(寶慶寺)로 옮겨져, 보경사석불로 알려진 약 20점(點)의 작품이 이에 해당된다. 감불형식(龕佛形式)의 고부조(高浮彫) 삼존상과 오존상(五尊像), 십일면관음입상(十一面觀音立像) 등으로 되어 있으며, 당대(唐代) 일류공인(一流工人)들의 손으로 제작된 것이라 생각된다.

모양이 균형잡힌 적확한 조형이나 표정의 풍만 우아한 면 구성, 의문주름을 육체에 밀착시켜 만들어 낸 아름다운 선조(線條), 더욱이 천개(天蓋)나 후광, 대좌(臺座)의 제형식(諸形式)과 장식의장의 참신함에서 당제국(唐帝國)의 세계성의 일단(一端)을 나타내는 동서문화 교류의 영향이 엿보이는 등, 주목할 만한 점이 많은 중요 유품이다. 룽먼석굴에서도 서산(西山) 최남단(最南端)과 동산남단(東山南端)의 극남동(極南洞)·뇌고대중동·간경동(看經洞)의 나한군상(羅漢群像) 등의 제상(諸像)이 만들어졌으나, 그 자태에 굽타조(朝)의 삼굴법(三屈法)이 도입되어 허리를 틀고 서있는 보살상과 풍만한 육체관조가 우아한 경향을 나타내고 표현되게끔 되었다.

이 무렵 불상 이외의 조소(彫塑)에 고종건능(高宗乾陵)과 무씨순능(武氏順陵)의 묘전석인(墓前石人)이나 석수군상(石獸群像), 그리고 후장(厚葬)의 풍습을 반영하여 무수히 만들어진 삼채명기(三彩明器)의 용(俑)이 있다. 그 어느 것이나 사실을 구사하면서 당조(唐朝)의 이상미를 인간, 동물, 공상수(空想獸) 등에서 발휘하여 사람을 매료시키고 있다.

현종(玄宗)의 개원(開元)·천보기(天寶期) 이후, 인간의 이상미(理想美)가 그 때까지의 균정(均整)이 잡힌 프로포션에서 극단적으로 풍만우염(豊滿優艶)이라는 표준으로 변화하여 몹시 인간적인 미태(媚態)가 풍기는 조형이나 자태가 환영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미의식은 부인용(婦人俑) 등에 특히 현저했으나 마침내 불상조각에도 영향을 끼쳐 이상미에 대신하여, 고혹적인 퇴폐미를 보이는 조형이 출현하게 되었다.

소위 반당양식의 등장이었다. 이 경향은 인도의 굽타 후기(後期)이나 파라기(期)의 퇴폐미의 매력이 영향을 준 일면도 있다. 대표적인 유구유품(遺構遺品)이 산시(山西) 톈룽산석굴(天龍山石窟)에서 볼 수가 있다. 제4동(洞)·제5동(洞), 제14·제17·제18 등의 각굴(各窟)의 조상은 각자(覺者=부다)와 각자(覺者)가 될 수 있는 유정(有情=사트바)의 숭고미나 초인적인 정신성은 없고, 몹시 친근미를 갖기 쉬운 우아하고 요염한 조형을 보이고 있다.

오대·송·원 이후-불상조각 쇠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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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조각의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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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像彫刻-衰退

당(唐)이 멸망하고 재차 북방유목민(北方遊牧民)의 침입에 의한 5대(代)에 들면서 조불사업은 신통치 못했다. 이것은 밀교교의(密敎敎儀)와 선사상(禪思想)의 소개에 의해 주술의례(呪術儀禮)의 집행에 봉사하든지, 자력본원(自力本願)에 의한 자기정진(自己精進)을 구하는 불교로 탈피되어 갔고 만당기(晩唐期)의 퇴폐미를 갖는 조상(彫像)에 대한 반성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한족의 송조(宋朝)에는 강남(江南)을 기반으로 항저우(杭州) 부근의 비래봉(飛來峰)·연하동(煙霞洞)·장대산(將台山)·석옥동(石屋洞) 등 석굴조상활동(石窟造像活動)과 쓰촨(四川)의 대족현 마애불(大足縣磨崖佛), 간쑤마이지산석굴(甘肅麥積山石窟)의 송대소상군(宋代塑像群) 등이 있다. 불상조각에는 선종(禪宗)의 조사상(祖師像)을 중심으로 한 나한상(羅漢像)에다 개성 묘사를 구하고 농민들의 주술대상(呪術對象)으로서 만들어진 관음상 가운데 친숙하기 쉬운 조형이 추구되어 갔다. 관음상에 현세(現世)의 여성미가 첨가되어 나한(羅漢)에 극단적으로 스토이크한 표정이 표현되었고, 또한 내면의 정신성을 구체화하려고 하였으므로 만당조각(晩唐彫刻)에 없었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원(元) 이후, 티베트로부터 북변(北邊)의 초원대(草原帶)에 걸쳐서 풍미하였던 라마교(敎)가 신봉되었고, 다비다목(多臂多目)의 그로테스크한 조상이 만들어졌으나 조형성의 관점에서는 주목할 만한 점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원(元) 이후 명(明)·청(淸) 시대의 불교는 기왕(旣往)에 조사조불(造寺造佛)을 위해 부(富)를 제공하였던 지배자가 이제는 현세의 궁전이나 그 밖에다 부(富)를 소비하였고 상공농(商工農)에 종사하는 서민들도 현세이익(現世利益)의 즉효성을 추구하였으므로 조형활동은 부진하였었다. 명(明)·청(淸)의 불사불상(佛寺佛像)의 수리보선(修理保繕)만이 부질없이 눈에 띄게 된 것은 이러한 사정에 기인하는 것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