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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르네상스의 미술/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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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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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및 16세기의 공예에 있어서 장식과 실용의 구별은 그 제품이 예술품으로서 감상 평가되느냐의 여부에서 결정된다. 장식의 분류에는 태피스트리·금은세공의 대부분이 있고, 실용의 범주에는 철제품·유리그릇류 및 가구가 있다. 요약하면 장식품은 다른 예술 특히 회화나 조각을 모방하는 경향이 있는 데 대하여, 실용품에는 소재의 성질과 목적을 살리기 위하여 의장(意匠)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었다.

직물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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織物類 (태피스트리)

금란 비단의 직물은 특히 부르고뉴 지방에서 애호되어 메믈링크(플랑도르) 등의 회화에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16세기에는 한층 더 중후하게 되었다. 또 성직자의 호화 미려한 제복도 피렌체를 비롯해 루카 시에나·베네치아 등지에서 짜 각국으로 수출하였다. 그 도안은 신화와 성서의 성경에서 취재하였다. 자수(刺繡)는 이미 중세 말 이탈리아에서 기술적으로 완성되어 이러한 포지(布地)의 장식에도 응용되었다. 당시 가정용으로 자수를 하기 위한 무늬 교본도 출판되어 크게 활용되고 있었다. 16세기에 이탈리아의 제후(諸侯)들은 부르고뉴 지방의 화사한 궁정생활을 모방하여 네덜란드 특히 아라스에 다량의 태피스트리를 구하기에 이르렀다.

이탈리아의 거장(巨匠)과 플랑드르의 베짜는 직공과의 긴밀한 유대는 로마의 시스티나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하여 라파엘로가 1515∼1516년에 도안한 사도행전(使徒行傳)의 연작이 보여준다. 그 가운데 누가복음 제5장 제1∼2절의 '대어(大漁)의 기적'이 잘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태피스트리는 바티칸에 있지만 밑그림 중 7매(枚)는 런던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태피스트리가 라파엘로의 회화 경력에 드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오히려 회화의 영역에 넣는다고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 즉 벽걸이 본래의 재료는 무시되고, 평면적인 무늬 장식과 단순함과 억셈, 중후한 짜임새 등은 주제의 회화적 표현과 정확한 육체 묘사 때문에 약해져 버렸다.

마졸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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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jolica

석유를 칠한 채색도기로 15세기에는 북이탈리아의 파엔차를 중심으로 발달하여 지금은 파이안스라 불린다. 처음 마졸리카섬을 거쳐 들어온 이슬람의 병 종류를 모방하고 있었으나, 1440∼1530년 사이에 도자기 공업은 가장 번성하여 토스카나 각지에 그 제조공장이 많이 세워졌다. 16세기에는 도화(陶畵)가 회화의 영역에 가까워지고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판화를 본으로 하여 고전신화를 그 장식으로 활용하였다. 이 세기의 중엽에는 라파엘로의 바티카노 홀의 그로테스크 무늬가 채용되어 양식화한 화초와 과일 그리고 오이디푸스 및 구약에서 취재한 장면도 그려졌다. 그리하여 본래의 장식적 성격을 잃어 버렸다. 루카 델라 롭비아 일가에 의한 르네상스 건축의 벽면을 장식하는 도판(陶板)은 그 초기의 예이다.

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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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具

고딕 시대에 비하면 르네상스의 가구는 종류와 수에서 훨씬 증대하였다. 중세의 실용 위주인 가구는 일상생활을 보다 향락하고 미적 감상을 주로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의자도 팔걸이가 붙어 있고 안을 넣어서 가죽이나 베로 쌓았다. 궤(櫃)는 중세의 건축적 양식이 아직도 답습되어 벽기둥과 코니스에 의해 종횡으로 구획한 패널을 만들고 있다. 이 패널에는 부조나 회화로 풍속·신화·종교에서 취재한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일류에 속하는 예술가는 이러한 궤의 장식을 하지 않았지만, 보티첼리와 폰토르모의 장식은 유명하다. 재료로는 호도나무가 그 치밀한 나무결로 해서 정묘한 세공이나 유채화 또는 납화(蠟畵)를 그릴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애용되었다.

소청동상(小靑銅像)·메달·소비(小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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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 대한 동경과 인체에 대한 관심은 르네상스 예술의 형식에 새로운 자료를 부여하였다. 이것을 구체화한 작은 청동상을 소유한다는 것은 당시 휴머니스트의 이상이기도 하였으며, 소청동상의 역사가 조각사(彫刻史)와 일치한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다. 15세기 작품에는 폴라이우올로, 베로키오의 것을 들 수 있겠고, 16세기에는 산소비노와 볼로냐가 있으며, 볼로냐의 <메르쿠리우스>는 마니에리슴 조각의 걸작이다. 유명한 사람의 초상은 역사상에도 중요한 재료인데 메달과 소비(小碑)도 그러한 기념적 성격과 더불어 예술성을 가지고 있다.

금은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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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銀細工

르네상스에서 이상하게 발전한 공예 부문에 금은세공이 있다. 요약하면 15세기 및 16세기에 있어서 금은세공의 중심은 피렌체였으며, 당대 일류의 조각가나 화가가 금은세공가의 아틀리에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은 주목할 사실이다. 그들의 제품은 종교적 또는 세속적 목적에서도 이루어졌던 것이며, 전자에 속하는 것에는 성궤(聖櫃)와 감실(龕室)이 있고, 후자에는 보석이 많다. 르네상스의 금공사상(金工史上) 가장 유명한 사람은 첼리니이고 그가 만든 <황금제 소금 단지>는 그 대표작이다.

철공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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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工製品

연철에 의한 실용적이고 장식적 효과는 당시의 갑옷 종류에서 찾아볼 수 있고 그 기교는 섬세하고 화려하다. 또 극히 작은 모양을 갖춘 각등(角燈:예로 피렌체의 스트로치 저택)에도 당시의 세속적 문화와 그 소유자의 부(富) 및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각등의 받침은 건물의 모서리에 놓여지고 장식 받침대 위에 있으며 벽에서 튀어 나와 있다. 광원(光源)은 뾰죽한 고딕식인 조그만 창으로 이루어진 작은 통 속에 있다. 위로 튀어 나온 큰 못은 받침대를 크게 돋보이게 하고 그것을 건물의 건축 설계에 연결하고 있다. 르네상스 양식은 소용돌이형 까치발의 받침대와 코니스에 나타나서 지배적인 요소가 되어 있으나 작은 창은 고딕식이다. 1484년 이것이 제작된 무렵은 건축에 있어서는 르네상스 양식이 이미 이탈리아에서는 확립되어 있었다.

글라스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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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器具

글라스 기구의 최고급품은 16세기의 베네치아에서 제작되었다. 무라노섬의 글라스 공장은 이미 13세기부터 활동하고 있었고 공화국의 주요 산업이 되고 있었다. 이 평판은 멀리 터키까지 알려져, 16세기에는 베네치아 대사를 통하여 900점의 큰 램프의 제작을 주문하였다. 그 광택과 투명도와 형식미는 그 어떤 것과도 비할 바가 없었다.

장식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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裝飾寫本

서구 전체에 걸쳐 장식사본은 1460∼1490년 사이에 최후의 꽃을 피웠다. 피렌체에서는 수도원의 사본실이 쇠퇴하여, 전례서(典禮書)나 고전적인 사본의 복제가 개인에 의해서 출판된다. 이들 사본의 장식은 이류(二流)에 속하는 화가가 대부분 담당하였다. 중세에는 쓰여진 문자 자체에 초월적인 가치를 두었으나, 중세말에는 이러한 사고방식에 의심이 일게 되어 종래에는 장식만으로서만 생각되었던 회화가 독립적인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15세기 후반의 장식 사본에는 이 경향이 더욱 강하다. 그러나 1450년경 인쇄기가 등장하여 인쇄본이 수사본(手寫本)을 대신하게 되면서부터 특권계급의 독점은 무너지고, 값이 싼 인쇄본이 일반화하여 종래의 치밀한 장식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초기의 인쇄본에는 <포리피리스 광연몽(狂戀夢)>과 같은 목판화(木版畵)의 수작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