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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중 세 미 술/중세초기·로마네스크·고딕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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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초기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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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초기 미술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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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세계에서는 로마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한 4세기경부터 게르만의 여러 민족이 각지에 침입하여 새로운 지배자로서 정주(定住)하게 되었다. 로마에 퍼져 있던 그리스도교는 이 지방민족(地方民族) 사이에도 깊이 침투되어 있었다. 이교(異敎)나 아리우스파(4세기 전반에 비잔틴제국의 교회내에 일어났던 이단파)를 믿고 있던 그들의 지배자도 5∼7세기에 걸쳐 점차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마침내 프랑크제국을 중심으로 서구적 그리스도교 미술이 형성되는 길이 열렸다. 고대제국의 붕괴로부터 소위 로마네스크 미술이 생겨났던 10세기경까지의 사이를 넓은 의미의 중세초기라고 부르고 있다. 근년에는 8세기 중엽을 경계로 하여 전기(前期)를 메로빙거 왕조 시대(또는 갈로-로만시대), 후기를 카롤링거 왕조시대로 구분하여 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이 시대, 특히 전기(前期)에는 강력한 통일국가도 없으며, 토지개발도 충분히 진척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지역차가 컸다. 중세초기란, 몇 개인가의 문화권을 집합적으로 가리키는 명칭이기도 하였다.

메로빙거 왕조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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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朝-美術

고전고대의 미술과 중세미술을 잇는 꼭 중간점에 있었다. 이 시대에는 갈리아(프랑스), 게르마니아(독일), 비지고트(에스파냐), 브리타니아(영국과 아일랜드) 등이 각각 다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구(舊)로마제국의 지배가 강했던 지역에서는 고전 양식을 좇은, 사실성이 강한 그리스도교 미술이 생겨나려 하고 있었으나, 알프스 이북(以北)이나 에스파냐에서는 북(北) 또는 동(東)으로부터 이동하여 온 게르만 민족과 선주민(先住民)인 켈트족이 가지고 있던 추상적인 형체감각이나 순수한 장식성과 결부된 조형(造形)이 행하여지고 있었다.

5세기경부터 프랑크족의 여러 왕은 종교 건축물의 건립을 원조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예는 없으나, 파리, 마르세유, 낭트, 리옹 등의 대성당은 이 시대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교회의 건축양식은 바실리카식(式)에 의하였다. 공법(工法)은 석재(石材)를 쌓아올리는 로마 고래(古來)의 방법에 따라 주두(柱頭)가 있는 원주(圓柱)를 사용하였는데, 이미 목재 사용에 뛰어났던 북방 민족인 게르만인은 그 기술까지도 병용(倂用)하여 지붕은 주로 목조(木造)로 하였다. 갈리아·게르마니아 지방의 교회의 특유한 종탑(鐘塔)도 목조기술의 산물이며, 후일 중·북유럽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시설이 되었다. 7세기에 들어서는 생드니, 생 밴드릴 등의 수도원이 만들어져서, 대수도원 건축이 시작되었다.

서(西) 고트족이 이주한 남프랑스와 에스파냐에서는 비잔틴제국과의 접촉이 잦아 교회 건축에도 동방적인 것이 출현하였다. 석조(石造)의 아치 구조와 돔도 쓰이게 된다. 내부는 동방의 그것을 본떠 호화로운 모자이크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었다는 것이 기록에 의해 알려져 있다. 포아체의 생 피에르 사원의 벽화나 8세기에 소실된 쓰루즈의 두라도 사원의 모자이크는 그 잔영(殘影)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 거기에서 자연주의적인 사실표현은 그 빛이 희미해져 있다.

조각은 남부에서는 석관(石棺)이나 기둥머리에 고대 로마의 모습이 엿보이는 반환조(半丸彫) 수법으로 고대전설이나 그리스도교 도상(圖像)을 남기고 있다. 갈리아 이북에서는, 석관과 석비(石碑) 표면에 있는 도상은 아직 자연주의적인 사실적 수법이 쓰이면서도 선각(線刻)이나 철판면(凸版面)과 같은 평부조(平浮彫)가 되어 있어, 입체상으로서의 조각이 전통을 가지지 못하는 민족의 특질을 보여 주고 있다. 도상의 주위는 와문(渦紋)이나 꽈배기 무늬로 둘러져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8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북이탈리아나 지중해에서 활약하던 노르만인의 영향을 받은 영국 등에, 게르만적인 선각과 동방적인 환조(丸彫)의 융합으로 생긴 석조의 반부조(半浮彫)가 재차 대두된다. 또 서유럽 일대에 로마풍(風) 석관 조각(石棺彫刻)의 방법이 조금씩 보급되고 후에 로마네스크 조각으로 옮겨 간다. 이즈음부터 활발하게 된 수도원 활동 중에서도 포교(布敎)와 더불어 다수의 직업 예술가가 신을 찬미하는 제기(祭器)와 성전(聖典)의 제작에 봉사하고 있었다. 칠보(七寶), 금공(金工), 상아조각(象牙彫刻), 사본장식(寫本裝飾) 등의 분야가 그것이다. 게르만인은 이러한 공예적 기술이나 색채감각 방면에 뛰어났다. 그들은 장신구나 무구(武具)에 제각기 재질미(材質美)를 살려 추상적인 기하학무늬·곡선무늬, 공상적인 동물무늬로써 뛰어난 장식미를 만들어내는 전통적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종교미술의 제작에 참가함으로써 종교공예는 미술 가운데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금공과 칠보는 중요한 것이다. 이 두가지 기술로 나타내는 단순한 선(線)의 미(美)의 윤곽선에 둘러싸인 편편한 색면(色面)이 주는 느낌은 사본(寫本)의 삽화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켈트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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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術

켈트인(Celt人)은 거석문화(巨石文化)를 이루어 놓은 중부·북부 유럽의 선주(先住) 민족이었다. 그 조형의 특질은 지중해민족이 지니고 있던 자연주의적인 사실법(寫實法)에 대해 직선과 곡선의 조합이나 나란히 배열하는 추상적 장식표현이었다. S자무늬, 나선문(螺線紋), 와문(渦紋), 꽈배기무늬는 그 대표적인 모티프였다. 이 무늬들은 원래 장식인 동시에 어떤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스도교가 그들의 고장에 전파되었을 때 이러한 토착적 장식요소는 그 종교적 의미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미술에 흡수되었다(최초에는 그리스도교가 그 고장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러한 것에 동화되었다고 생각하여도 좋다). 또한 켈트 미술의 모티프에는 그 외에 라틴 민족에게 없는 동물무늬와 괴수(怪獸)무늬가 있다. 그것>은 모름지기 옛날에 중앙아시아의 우랄스키타이족과 왕래가 있었을 때, 그들로부터 전승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켈트의 장식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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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裝飾寫本

초기 중세의 켈트 미술의 특질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그리스도교 미술과의 결합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일랜드와 북잉글랜드의 수도원에서 제작된 장식사본(miniature)의 예술이다. 이 지방은 5세기 중엽쯤에 그리스도교에 귀의하고, 대륙보다도 빨리 수도원 활동이 활발해졌다. 성전사본(聖典寫本)은 둘레와 특히 두문자(頭文字)를 복잡하게 짜넣은 장식문자로 아로새겨서 두 문자만으로 한 페이지 전체를 채우고 있는 경우도 있다. 가장 복잡한 모양을 나타내고 있는 <켈스의 책>(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 소장)의 모노그램 속에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리스어(語)의 3자(字), XPI가 바탕이 되어 있는 배경 부분과 마찬가지로 기하학적 무늬나 와문·식물·조수(鳥獸), 도안화된 인물 등으로 그려져 있다. 북부 영국에서 만들어진 <린디스판의 복음서>(8세기, 대영박물관 소장)는 사물의 양식화(樣式化)가 전자(前者) 같지는 않지만 같은 계열에 속하는 걸작이다. 그 외에 <다로우의 복음서>(8세기), 트리니티 칼리지 소장) <성(聖) 갈렌 복음서>(8세기) 등은 대표작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전(聖典)을 장식하는 것은 신의 말씀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었다. 지나칠 만큼 장식요소를 사용하여 힘찬 느낌을 나타내고 있는 점에 켈트인의 풍부한 감성을 엿볼 수 있다.

잉글랜드를 점령한 앵글로 색슨인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자, 이곳을 거쳐 아일랜드의 수도사들은 7∼8세기에 북프랑스로부터 스위스에 걸쳐서 활발한 포교를 했기 때문에 아일랜드켈트의 미술, 특히 장식사본의 양식이 이들 지방에 전해져 켈트미술의 제2의 영향이 대륙에 나타났다. 로마네스크 미술은 그 감화를 다분히 받았다. 또한 사본(寫本)을 장식 두문자로 시작하는 습관은 전유럽에 보급되었다.

카롤링거 왕조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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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朝-美術

8세기 말, 샤를마뉴(카를)는 스스로 서로마 황제의 왕관을 받아 고대로마의 재래(再來)를 기대하며 동시에 문화적으로도 고전문화의 부활을 시도하면서 서쪽의 그리스도 교권(敎圈)의 지도적 지위를 구축하고 있다. 수도 아헨에는 영국인 아루비누스, 프랑크인 아인하르트를 위시하여, 각지의 유명한 학승(學僧)이 모여 학예의 중심이 되었다. 조형예술도 예외일 수는 없어 이 학예운동에 포함되었다.

이보다 앞서, 대제(大帝)의 부친 피핀이 랑고바르트로부터 탈취한 라벤나를 법황령(法皇領)으로 기증(756년)함으로써 궁정과 교회의 결탁(結託)이 성립되었다.

그리스도교 미술은 종래와 같이 신을 믿는 사람들이나 교단(敎團) 가운데서 만들어지던 것으로부터, 점차 확립되어 가는 봉건제도하의 궁정이나 영주 등의 권력을 배경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성격이 바뀌어 갔다.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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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築

현존하는 소수의 당시의 건축 유적 중,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아헨의 궁정 예배당(현재는 아헨 본사원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이다. 라벤나의 성 비탈레 사원을 본따서 만들어진 팔각당 형식의 이 건물은 석재를 써서 만든 큰 돔을 이용하여 넓은 공간을 메우고 있다.

로마 말기에 동방제국(東方帝國)에서 해결되었던 돔의 공법은 서구권(西區圈)에서는 아직 생소한 것이었다. 아헨 사원은 단지 웅장한 건축물일 뿐만 아니라 돔 시공(施工) 기술의 곤란성을 고려에 넣는다면, 궁정에서의 미술정책을 토대로 해서만이 실현될 수 있었던 예외적인 작품이었다. 다른 대부분의 교회나 수도원은 바실리카 형식으로 메로빙거 왕조 이래의 공법을 계승하고 있음이 기록과 초석(礎石)의 연구로 규명되어 있다.

건축물의 내부는 모자이크나 프레스코화에 의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모자이크가 남아 있는 예는 생 제르맹 데 프레 사원을 들 수 있을 뿐으로 비잔틴 풍(風)의 힘찬 것이었다. 오세르의 성(聖) 제르만 교회의 벽화에는 고대풍의 모습을 한 성자상(聖者像)이 그려져, 구상적(具象的)인 종교 도상(宗敎圖像)의 표현을 거부해 오던 종래의 게르만 미술에 새로운 국면이 나타났다.

장식사본·금공예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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裝飾寫本·金工藝品

건축이나 그에 부수되는 미술이 대부분 소실(消失)된 오늘날, 소미술(小美術)이라고도 할 장식사본(미니어처)·제기·성기류(聖器類)의 공예품은 카롤링거 왕조 미술의 모습을 잘 전해 주는 것이다. 샤를마뉴는 의식으로서의 예배를 존중하였다. 의전서(儀典書)인 성전(聖典)은 아름답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각 페이지는 물론이요, 표지까지도 금공(金工)이나 칠보(七寶)로 아로새겨졌다. 비잔틴 제국에서는 성상파괴운동(聖像破壞運動)이 성행되고 있을 즈음 아헨에는 많은 성제기류(聖祭器類)가 동방으로부터 수집되어 왔다. 그것은 의전(儀典)과 성상 숭배를 존중하고, 인간존중과 자연주의를 사랑하는 고전의 부흥을 부르짖은 대제 밑으로, 즉 아헨으로 동방의 뛰어난 장공(匠工)이 옮겨와서, 여기에 종교미술 제작의 중심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장식사본은 라인강 유역과 북프랑스 일대에 여러 유파(流派)가 형성되어 제각기 독특한 표현이 행해지고 있었다. 이들 여러 유파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그리스도를 위시하여 사도 여러 성자(聖者)의 풍부한 도상화(圖像化)이며, 그 둘째는 동적(動的), 사실적인 형체 표현(예컨대 <위트레흐트 시편의 미니어처> 위트레흐트 대학 소장)과, 3차원을 의식한 볼륨 있는 채색법(가령 <고데칼크의 복음서> <카를 대머리 왕의 제일성서>, 둘 다 파리 국립도서관소장) 등이 있다.

그러나 한편 게르만이나 켈트족의 유산인 추상적 모티프에 의한 구성도 가장자리 장식 부분과 꽃문자에 의한 두문자에 여전히 그 모습을 강하게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체는 추상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의 한 구성단위로서 라틴적 또는 동방적 영향을 받는 사실표현이 나타나 있다고 할 것이다.

게르만, 켈트의 전통은 공예품, 특히 금공품에 더욱 뚜렷이 나타나 있다. 금은(金銀)의 단조(鍛造)나 각선(刻線)으로 그려진 형상에 보석이나 칠보를 풍부하게 박은 성적상자(聖蹟箱子)나 성서 표지, 성배(聖盃) 등의 미(美)는 재질 자체의 빛깔이나 광택, 또는 가공 기술상의 제약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이미 고도로 발달되어 있던 그들의 기술은 윤곽선과 색채 대비의 추상미를 재차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구상적인 인물상(주로 신이나 성자)은 여기서도 부차적 모티프에 불과하였다. 이 경향은 성서의 표지에 흔히 쓰여진 상아판의 옅은 부조를 위시한 공예기술 일반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카롤링거 왕조의 미술은 고전고대(古典古代)·동방·게르만·켈트의 여러 전통이 일체화되어 생겨난 새로운 서유럽적 표현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샤를마뉴의 제국 통일(帝國統一)에 의해 영내(領內) 각지에 보내진 공인(工人)들의 손으로 서유럽 전체에 공통되는 그리스도교 미술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로마네스크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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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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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esque

10세기부터 12세기(지역에 따라서는 13세기 전반까지)경까지를 로마네스크 시대라 부르며, 11세기에서 12세기 초에 걸쳐 그 전성기를 이루었다. 로마네스크란 원래 건축사상의 용어였다. 두꺼운 석조의 벽체(壁體), 아치, 돔을 가진 건축에 끼친 고대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로마네스크(로마풍)라는 호칭을 붙였으나, 그후 개념의 변화가 생겨 고대 로마의 전통을 가미하고 에스파냐를 거쳐 전해진 사라센 양식(樣式)이나, 활발해진 수도원 상호간의 교류, 십자군, 성지 순례 등을 통하여 전래된 동방 여러 지역의 양식 또는 카롤링거 양식, 비잔틴 양식 등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생겨난 중세 중기의 양식을 가리키게 되었다.

로마네스크 미술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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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術-特質 광대한 프랑스제국이 분열되고, 노르만인, 사라센인 등의 거듭되는 침입으로 서유럽에 혼란과 공백(空白)이 계속되는 사이에 각지의 봉건제후(封建諸侯)는 세력을 넓혔고, 중앙집권제는 붕괴되었다. 미술활동도 궁정 중심의 전유럽적인 것을 상실하고, 각지에서 부흥한 수도원을 단위로 해서 창조되는 것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따라서 저마다 지방양식이 로마네스크 미술의 특질의 하나가 되게 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지방양식에도 불구하고 일괄된 공통성을 부여해 주고 있는 것은 서유럽에 착실하게 뿌리를 박아가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증거이며 교의(敎義)의 명확이다. 권위의 상징이었던 종교미술은 수도승의 손으로 돌아와 점차 그림을 통한 교의 해설, 즉 '그림으로 보는 성서'로서의 성격을 나타내게 된다. 그것은 신앙의 대중화(大衆化)로의 과정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지의 작은 마을에서는 성상(聖像)으로 꾸미고 가꾼 교회가 세워졌다.

로마네스크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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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築

카롤링거 왕조 밑에서는 아헨 성당과 같은 예를 제외한다면 건물의 지붕은 박공 형태의 목조였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은 주요 부분(네이브와 제실)에 석조의 아치 구조를 쓰고 있는 점에서, 종래에 없던 진보의 흔적을 찾을 수가 있다. 이것은 네이브의 양쪽 벽체(壁體) 위에, 부채꼴의 석재를 석회칠로 쌓아올려서 반원형의 통 모양으로 쌓아올린 것이다. 이 통 모양의 아치는 천장을 높게 하고 내부 공간을 확대시킬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무거운 돌지붕을 떠받치기 위해서 벽체는 두껍고, 곳곳에 바깥쪽으로부터의 버트리스를 필요로 하였다. 벽체로부터 직각으로 나와 있는 버트리스는 건물의 겉모양에 아름다운 실루엣을 던져주고 있다. 하중(荷重)에 대하여 벽의 강도(强度)를 유지하기 위하여 커다란 창을 만들기는 어려웠고, 따라서 내부 공간은 채광 부족을 면치 못하였다. 이러한 어둠도 당내의 종교적인 통일감을 이루는 데는 유효하였다. 안팎이 모두 묵직하고 장식이 적은 것이 특색이다. 이 경향은 12세기 이전의 북이탈리아 남프랑스, 카탈로니아 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독일에서는 이러한 영향을 받으면서도 카롤링거왕조의 전통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키고, 탑·세례당(洗禮堂) 등을 종합한 설계의 대형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인츠, 아우크스부르크 등의 본사원과 마리아 라하 수도원 등이 그 좋은 예이다.

로마네스크 건축은 12세기에 들어와 부르고뉴 지방에서 그 정수를 찾을 수 있다. 오턴, 베즐레의 두 사원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채광량을 늘리고 내부 공간을 확대하기 위해, 네이브를 높게 하고 아일(側廊)도 아치로 하였다. 여기에서 고안된 교차아치는 후일 고딕건축을 출현시킨 모체가 되었다. 내부는 네이브 측벽을 복층(複層)으로 하고, 그 상부에 높은 창을 가진 형식이 채택되고 있다. 기둥은 굵은 문설주에 주두(住頭)를 붙여 아케이드를 떠받치게 한다. 기둥의 형식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장식주(裝飾柱)가 부가되거나 홈이 파진다. 외관도, 파사드에 장식조각이 새겨지고, 또는 북방에서 발달해 온 탑(塔)이 부착되기도 하여 신의 집 입구에 어울리게 모양을 갖추었다.

로마네스크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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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彫刻

로마네스크의 조각은, 교회 건축의 일부를 이루는 주두(柱頭)나 팀펀(입구 상부의 아치를 막는 반원형의 석판), 또는 입구의 옆쪽과 제실의 외벽(外壁) 등의 공간을 메우고 있는 조각 가운데 가장 잘 대표되어 있다. 순수하게 추상적 요소에 의해 지배되는 일이 많은 건축 자체는, 라인 연안을 주로 하는 북부 지방에서도 독자적인 발전을 찾아볼 수 있었으나, 구체적인 형체를 추구하는 조각에서는 3차원적 시각에 익숙하던 고전적 조형의 전통을 가진 남부 지방인 프랑스나 에스파냐가 전개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11세기 중엽 이후의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에 속하는 일파의 활동 영향은, 중세조각의 양식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오턴, 베를레, 소류 등 클뤼니 파(派)의 사원은 오늘날 로마네스크 조각의 보고가 되어 있다.

신의 모습을 공공연히 표현하는 것은 종래의 그리스도교 미술 중에는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문맹의 농민에 대한 포교 장소가 되어 있던 교회에서는 사람의 모습을 한 신이나 성서의 이야기가 도처에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그리스, 로마의 신(神)들이 자연주의적인 의인상(擬人像)으로 표현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고전부흥이었다. 여기에도 동방적인 괴수나 괴인이 나온다. 구약 성서나 묵시록이 주제가 되는 것은 이즈음부터이며, 그런 주제는 계율이나 교의를 도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장식조각은 어디까지나 건축의 일부로서, 건축의 기능에 의해 정해진 형체, 즉 일정한 형식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두(柱頭)는 도립(倒立)된 각추대(角錐臺)이며, 팀펀은 반월형이다. 주제는 이 정해진 모양 내에서만 전개되었다. 이 때문에, 비사실적(非寫實的)인 형상의 왜곡된 표현도 행하여졌다. 그러나 무명(無名)의 조각가는 결코 그것을 부자연한 모양으로는 만들지 않았다. 오턴 본사원의 입구 상부에 있는 길다란 마구릿돌(楯石)에 조각된 <이브>는 일견 엎드려 사과를 따고 있다. 동일한 주두(柱頭)의 <마지의 각성>은, 세 사람의 마지의 부감도(府瞰圖)와 헤롯의 음모를 고하는, 측면시(側面視)된 천사가 교묘한 구성에 의해 대형(臺形) 속에 정리되어 있다. 베즐레의 팀펀에서는, 신의 모습은, 겨우 비현실적으로 다리를 구부리게 함으로써 반월형 속에 들어가 있다. 이 커다란 신의 모습은 신의 위대함을 표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정면성(正面性)의 법칙(法則)도 그 특색이다. 로마네스크의 조각상에서는 신·그리스도·성모 등 신앙의 주대상(主對象)은, 반드시 정면을 향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상(像)들은 대부분 반부조(半浮彫) 또는 고부조(高浮彫) 수법으로 제작되고, 옥내(屋內)의 것은 대부분 채색되어 있다.

유럽 각지의 로마네스크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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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地-彫刻

노르망디나 영국에서는 인상(人像)보다 기하학적 무늬가 꽈배기 무늬의 부조(浮彫)가 주두의 모티프로 채택되는 경우가 많아 여기서는 그림 해설 기능보다는 오히려 장식으로서의 기능이 강하다. 켈트 예술의 전통이 강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아를에서 에스파냐에 걸쳐서 고전적 전통이 강하였으나, 12세기에 들어 콘포스테라의 <영광의 현관>이나 레온의 성(聖)인드로 사원의 팀펀 등에서, 중부 프랑스로부터 유래한 영향과, 지역성이 교묘히 융합된 풍성한 로마네스크 조각의 결실을 찾아볼 수 있다.

환조(丸彫)로 된 단독상(單獨像)은 많지 않으나 북 프랑스, 라인 연안, 스칸디나비아 등을 중심으로 채색목각(彩色木刻)의 성모자상과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상이 만들어졌다. 일정한 형식의 지배는 받지 않으나 소재가 가지는 길이의 특성을 살린 것이 많다. 표현 형식은 아직 소박한 것이나 신앙 대상으로서의 정신성이 중시되고 있다.

로마네스크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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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繪畵

로마네스크의 건축 대부분은 내부를 벽화로 장식하고 있으나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조각만큼 많지는 못하다. 기술적으로는 프레스코·템페라·데트랑트 등이 경우에 따라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 표현 방법은 조각의 경우만큼은 건축 부분의 형체 기능에 제약을 받지 않고 있다. 벽면에서는 배경의 배색에 의해 다소의 순응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제는 전체와의 조화를 꾀하여 신장(伸張)·단축·왜곡(歪曲) 등의 변형이 가해져 있다.

생 사방(프랑스, 푸아투 지방) 수도원 성당의 벽면군(壁面群)은 구약성서, 사도전(使徒傳)·묵시록·성자전을 연속된 구도로 취급한, 가장 웅장한 유례(類例)이다. 이 밖에 타반·피크 등, 루아르강 유역에는 교의(敎義)의 도해(圖解)를 카롤링거 왕조의 전통에 바탕을 두고 독자적 양식으로 그린 것이 남아 있다. 이 회화에서는 공간감은 인정되나 전대(前代)에서 보였던 사실적인 3차원성은 상실되어 있다. 색의 종류는 많지 않으나 색채의 병치효과(倂置效果)에 의해 관념적인 입체감으로서 포착된 형체가 중심이다. 사물의 모양과 실재감보다 형체의 배합이나 구도에 의해 창출(創出)되는 화면의 설화성(說話性), 또는 정신적인 설득력이 표현의 주목적이었다.

한편 카탈로니아·부르고뉴 지방의 중남부 프랑스나, 에스파냐에 걸쳐서는 클뤼니 수도원계(系)의 것 가운데서 비잔틴 미술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양식화된 형체나 강한 색채 효과를 구하는 작품군(作品群)이 있어, 조각적이고 풍부한 살붙임을 나타내는 윤곽선이나 고전적이고 정형화(定形化)된 구도법의 채택은 루아르 지방의 것과 대조를 이룬다. 타플의 성(聖)클레멘테 사원, 벨제 라 빌의 예배당, 오베르의 르 퓌이 사원의 벽화 등이 그러한 예에 해당된다.

독일 지방도 라인 연안을 중심으로, 카롤링거 왕조의 전통을 더욱 발전시키고 있었다.

로마네스크의 장식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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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裝飾寫本

장식사본은 이 시대에 대단한 수량이 제작되어 현재도 양호한 상태의 것이 보존되어 있다. 이 소미술(小美術)은 라인·도나우 두 강의 유역과 그 영향을 받은 동 프랑스가 하나의 중심지가 되었다. 세련된 양식에 정신성을 추구한 라이헤나우파(派)와 이에 비잔틴 양식을 가미한 페히테르나하파는 그 주된 유파(流派)이다.

영국의 윈체스터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일파도 아일랜드-켈트의 복잡한 선적(線的) 구성과 대륙에 발달한 고대풍(古代風)의 표현을 융합시킨 독특한 사본예술(寫本藝術)을 만들어냈다. 유려한 선 묘사와 활기 있는 채색에 특색이 있다.

에스파냐의 <모르간의 베아투스>(뉴욕 모르간 도서관 소장)로 대표되는 일련의 묵시록 주석서(默示錄註釋書)들도 특히 그 배색(配色)에 특이한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성전의 장식은 신의 집인 교회를 장식하는 것과 같은 가치를 가지며 장식승(裝飾僧)은 '빛을 주는 자'라고 불리었다. 각 유파의 표현 중에 공통적인 경향은 일체의 세부(細部)를 생략하고 형체의 본질을 나타내는 추상적 선에 의해 묘사된 사물의 모양과 테오필스의 <제기예론(諸技藝論)> 제1권에 기술되어 있는 것같이 각 부분에 관해 일정한 채색 원리(彩色原理)에 따라서 행해지는 착색법인 것이다.

이러한 무기적(無機的)인 표현 수단은 화공의 풍부한 창조력에 의해 화면상에 구성되어, 실재감이 강한 초현실의 세계, 신의 이야기를 강력하게 창출하고 있다. 장식사본의 표현 방법이 벽화나 조각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로마네스크의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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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工藝

로마네스크 미술은 공예면에서는 특히 금공(金工)과 칠보(七寶)에서 장족의 발전을 엿볼 수가 있다. 금공에서는 마스강(Mass 江)의 계곡을 따라서 일어난 모잔파(派)의 활약이 뚜렷한 것이다. 금은상감(金銀象嵌)·보석·색유리 등을 금단조(金緞造)의 성적상자(聖蹟箱子)나, 십자가·성기(聖器)에 뛰어난 작품이 많으며, 12세기에는 명공(名工) 니콜라 드 베르단을 탄생시켰다.

프랑스의 리모지는 금공과 동시에 칠보공예의 중심지였다. 윤곽선을 남기고 판(彫) 금속판(金屬板)의 요부(凹部)에 불투명하게 만든 색유리를 녹여 넣은 독특한 기법(에마이유 샨루베라고 불리는)을 채택하여, 금속이 그리는 선과 윤곽선에 의해 둘러싸인 색면(色面)이 강하게 대비를 이룬 가운데 소재가 지닌 아름다움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상아판(象牙板)의 부조(浮彫)도 전시대(前時代)에 이어 많이 제작되어, 조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고딕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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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미술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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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術-展開

12세기 초엽 북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나, 마침내 전 유럽에 확대된 예술운동을 고딕이라고 부른다. 지역적인 차이는 있으나 15세기경까지 계속되어 르네상스의 전 운동(前運動)이 되었다.

고딕(Gothic)의 어원은 번족(蕃族)인 고트에서 나온 것으로, 전화(轉化)하여

'야만적'의 의미로 쓰였으나 르네상스시대에는 중세미술은 야만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오늘날에는 중세후기를 나타내는 고유명사로서 사용되고 있다.

고딕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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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築

고딕 미술의 주역(主役)은 건축으로 일드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카페 왕조의 지배하에 놓여있던 북프랑스가 주된 무대였다. 수도원장 슈제르가 세운 생드니 교회나 상스 본사원(둘 다 12세기 전반)이 시초가 되어, 그 후 약 1세기 동안에 건축의 고전이라고도 할 건축이 속속 나타났다.

교회 대형화의 문제는 궁륭구조와 그것을 떠받치는 벽체공법(壁體工法)의 엄청난 발전으로 단번에 해결을 볼 수 있었다. 첫째는 교차궁륭의 완성이다. 로마네스크 시대에 그 원형(原型)은 있었으나 힘이 모이는 교차부분(交叉部分)의 완성이다. 로마네스크의 통형궁륭 대신에 내 개의 통형궁륭을 직교(直交)시켜, 하중(荷重)을 네 곳에 집중시키는 공법이다. 로마네스크 시대에 그 원형(原型)은 있었으나 힘이 모이는 교차부분(交叉部分)에 석재의 아치로 보강하고 더 나아가 첨두(尖頭) 아치를 병용하는 것으로서 크기와 높이 모두가 자유롭게 만들어졌다. 둘째는 네이브 외벽(外壁)에 얹혀 있는 궁륭의 중량(重量)을 떠받치기 위해 종래에는 두꺼운 벽이 필요했으나, 고딕식(式)에서는 아일의 벽 밖에 지벽(支壁)을 만들어 이것에 신랑(身廊)에서 아치형(形)의 비량(飛樑)을 가설하여 횡압력(橫壓力)을 밖으로 배출하여 벽 자체는 얇게 경량화하였다. 이 두가지 공법의 완성에 의해 건물은 측벽(側壁)의 가느다란 기둥과 지벽(支壁)만 필요하게 되어 두꺼운 측벽은 없어지게 되었다. 12세기 후반의 레옹 본사와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은, 아직 측벽을 높은 위치에까지 부설(敷設)한 것이었으나 후일 13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이 부분은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로 메워졌다. 광량(光量)이 부족한 북방(北方)에서는 창을 크게 만드는 것도 자연적 요구의 하나였다. 이 시기에는 유럽의 주요한 성당 대부분이 만들어지는데 특히 샤르트르, 랭스, 아미앵의 세 성당은 전형적인 예이다.

내부는 주열(柱列)이 역학적인 구조로 배열되었으며 시각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지주(支柱)는 높이 가설된 아치와 직결되어 수직의 상승감을 내고 있으나, 후기에는 벽체와 그에 따르는 트리븐(司敎座)이 트라이포리엄(교회 입구의 아치와 지붕 사이)이 없어지고 또한 리브에 연결된 장식소주(裝飾小柱)를 지주에 붙이게 되므로 내부의 천상계(天上界)로 향하는 상승감은 한층 더 강해진다. 아미앵 본사원의 신랑(身廊) 내부의 높이는 42m가 된다. 서쪽 정면의 문 상부에는 커다란 장식으로 둥근 창이 뚫리고 여기는 스테인드글라스를 장식한다.

건물의 외면은 정면으로 세개의 입구가 배열되어 있고 각각 입구로부터 속까지가 길게 되어 있다.

팀펀에는 로마네스크식(式)과 마찬가지로 조각으로 꾸며져 있고, 또 문의 양쪽과 후부 제실(祭室)의 외부도 마찬가지로 되어 있다. 또 정면의 양 옆구리에는 한쌍의 탑이 서 있어 당당한 풍격을 나타내고 있다.

유럽 각지의 고딕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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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地-建築

14세기 이후에 들어와서는 특히 내장면(內裝面)에서의 장식 과잉의 경향이 일어난다. 강조된 수직선에는 마룻바닥에서 아치까지 똑바로 연결되는 보조주(補助柱)와 방사상(放射狀)으로 퍼져 있는 장식 리브가 부착되어 있다.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영국에서는 링컨 본사원과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의 경우와 같이 천장 부분에 장식 리브가꽃과 같이 펼쳐져 교차하는 성상궁륭(Star­vault)으로 발전하여 복잡한 아름다움을 보인다. 창의 장식에도 대륙의 내외를 불문하고, 첨두(尖頭) 아치에 둘러싸인 상부에 복잡한 곡선을 휘감게 하여 불타는 화염(火焰)을 연상시키는 형식(플랑부아이앵 양식)이 탄생되었다.

독일이나 에스파냐에서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쾰른 본사원, 프라하 본사원, 톨레도 본사원, 바르셀로나 본사원 등이 건립되었다. 이탈리아에서도 밀라노 본사원, 피사의 칸포산트 등이 건립되었는데 수직선의 풍취(風趣)를 살리면서, 상승감보다는 크기를 강조하는 데 힘썼다. 아시지의 성 프란체스코 사원, 시에나 본사원 등은, 한편으로는 고딕 양식을 취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로마네스크의 수평선적 요소를 강조하며 또 색대리석을 풍부하게 사용한 아름다운 것이다.

14세기 후반 고딕 건축은 북방에서도 종교건축에 한정되지 않고, 도시와 길드의 발달에 따라 세속적 건축에도 채택되었다. 브뤼셀 시청사(市廳舍)와 루앙 재판소는 그 좋은 예이다.

고딕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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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彫刻

고딕 조각은 로마네스크의 그것보다 한층 조각적(彫刻的)이며, 건축에 대해서는 비종속적이다. 12세기중엽에 확립된 스콜라 철학의 원리에 좇으면 각각 독립된 부분이 하나의 단위가 되어 질서와 조화를 이룬 전체상을 창출(創出)해 냈다. 조각도 성당이라는 전체상의 조화를 깨뜨리지 않는 한 그의 독립성은 인정된다. 그 하나의 표징은 로마네스크 시대의 '한계의 법칙'으로부터의 해방이다. 팀펀은 이미 입구 상부의 아치를 덮는 장식 부분으로서 배설(配設)되는 것이 아니라 입구 전체의 장식으로서 건축상 필수적이며, 그 주위를 포함한 커다란 공간 속에서 구성된다. 본사원 오턴(로마네스크)과 파리의 노트르담 또는 샤르트르 본사원의 팀펀을 비교하면, 후자는 주제(主題)의 양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의 가치관계나 각 인물이 보여 주는 이야기로서의 전개가 정리되어 알기 쉽게 표현되어 있다.

로마네스크 시대에 융성을 보인 주두조각(柱頭彫刻)은, 이 시대에는 뛰어난 것이 드물다. 수직선에 의한 상승감을 강조하고 있을 때, 그것을 가로지르는 구실을 하는 주두에 뜻있는 장식을 부여함으로써 상승감을 시각적으로 방해하는 것은 좋은 것이 못 되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점차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이나 단순한 형체로 교체되었다. 오히려, 고딕 조각 중에서 그 특색을 가장 잘 발휘하게 된 것은 원주(圓柱)에 조각된 인물상이다. 이러한 인물상은 정문 입구의 양쪽에 줄지어 서 있는 원주에 등을 대고 서 있는 것이 보통이나 교회 내부의 주열(柱列)에 붙어서 설교자와 같은 모양을 한 것도 있다. 전체적으로 세로로 긴 원통상(圓筒狀)으로 길게 늘인 모양으로 입구에 배열되어 있는 성자의 군상은 완성된 성당의 리듬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원주 조상군(圓柱彫像群)과 조화된 팀펀에 의하여 교회 입구 자체가 하나의 군상(群像)을 형성했다.

원주 조상을 하나하나 보면 스콜라 철학에 의한 명석판별(明析判別)의 원리는, 독립의 상(像)으로서 나타나 있다. 로마네스크에서는 벽에 부수(附隨)되는 부조가 주된 것이었으나 고딕에서는 요철(凹凸)이 뚜렷한 환조에 가까운 것으로 오히려 환조가 원주에 붙어 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다. 고딕 초기에 해당하는 샤르트르 본사원의 <왕의 문(門)>의 여러 조각에는 전 시대의 정면성(正面性) 법칙이나 고부조(高浮彫)의 면모가 남아 있으나, 성숙기(13세기)에는 샤르트르의 <아름다운 신(神)>, 랭스의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비롯한 여러 상(像)은 균형과 조화를 이룬 고전적인 걸작이다.

거기에는 중세초기부터 지배하여 온 추상적인 요소 대신에 강한 자연주의를 인지(認知)할 수 있다. 자연스런 형체의 여러 상이 대중에게 친숙하기 쉽게 교화(敎化)되어, 신의 세계로의 친근감을 보여 주고 있다. 장엄한 그리스도, 미소짓는 마리아 등의 표정에 기품 높은 정신성을 강조하고 있는 점은 전성기 고딕 조각의 또 하나의 특색인 것이다. 조각의 독립은 인간에 대한 재인식(再認識)과 결부된다.

14세기 이후, 사회의 변천과 더불어 예술의 중심은 교회에서 세속적인 것으로 옮겨진다. 조각도 사실적인 경향이 진전됨에 따라 점차 작가의 개성이 중시된다. 세기말 부르고뉴 공(公) 휘하에 있던 스류타스는 종교조각의 형식을 타파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독일에서는 전체적으로는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으나 나움부르크나 프라이부르크 본사원의 조각군에 개성적인 입체감이 있는 작품의 예를 볼 수 있다. 라인강 유역과 보헤미아 지방에서는 사실적인 채색을 한, 종교감이 강한 목각의 그리스도 가형상(架刑像)이나 마리아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 고딕의 영향과 더불어 고대 로마의 전통에 대한 재인식이 대두되어, 피렌체의 피사노 부자(父子)를 중심으로 인간미가 넘치는 르네상스를 향한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유리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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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繪畵

고딕 회화의 대표는 스테인드글라스일 것이다. 색유리의 사용은 이미 6세기경이라고 알려져 있고, 또 12세기 이전에 속하는 한두가지 예(아우크스부르크 본사원의 12사도의 일부)도 남아 있으나, 그 개화(開花)는 역시 12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두껍고 넓은 벽면이 제거되고 크고 높은 들창의 형성이 가능해지자 이 예술은 놀라운 진보를 보였다.

13세기까지의 기술은 주로 모양에 맞추어 자른 색유리를 H자형 단면을 가진 납(鉛)테에 끼워 한 장의 그림을 조립하고 필요에 따라 쇠 테로 보강하여 창으로 시공하였다. 이것은 게르만 켈트의 전통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긴 중세의 역사를 통하여 발달하여 온 소공예(칠보 등)의 색면 대비(色面對比)의 아름다움에, 투과광(透過光)의 영롱함을 결부시켜 대예술로 발전을 본 것이다. 어두운 성당 안은 영롱하게 비치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색과 빛 속에 완전히 종교적인 분위기가 넘치게 되었다.

전형적 작품 예로 샤르트르 본사원의 150개에 가까운 대소(大小)의 창이 모두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있다. 도상(圖像)은 성서의 설교화(說敎畵)거나 성자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색과 빛의 아름다움을 내세우는 이 예술에서는 도상은 2차적인 것이다. 공예적 전통에 많은 것을 의존하였기 때문에, 스테인드글라스는 상당히 오랜 기간, 중세전기(中世前期)의 표현양식과 적색·청색을 대담하게 사용한 구도가 특색으로 되어 있다. 또 두께의 불균일(不均一)과 불순물의 혼입 때문에 그 조합에 따른 색의 변화가 아름다운 효과를 낸다.

13세기는 가장 우수한 작품을 남긴 시대이며, 샤르트르 외에도 브뤼지·생스·톨로아 등의 본사원이나 파리의 생트샤페르에 그 수작(秀作)이 있다. 13세기 후반 이후가 되면 사실조각(寫實彫刻)의 영향도 있고 하여, 대담한 구도법보다도 사실적인 것으로 옮겨 갔다. 유리의 제조 기술이 향상되고, 색이 균일화됨에 따라 열처리에 의한 보채기술(補彩技術)이 생겼기 때문에 표현은 보다 정교하게 되나 오히려 유리 그림으로서의 장식성이 상실되어 그 아름다움을 잃게 되었다.

고딕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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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繪畵

사실적 경향의 발달과 더불어 순수한 공예는 사양화(斜陽化)하나 사본류는 13세기의 파리를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교회에 귀속하는 것보다 귀족의 주문에 의한 것이 많고 랭부르 형제의 작품인 <베리 공(公)의 호화로운 기도서(祈禱書)>는 그 좋은 예이다. 특히 그 웃머리를 장식하는 저명한 12개월의 달력에 그려져 있는 농민의 풍속과 풍경 부분은, 회화에 있어서의 자연미의 발견으로서 특기할 만한 것이다. 성채 건축(城砦建築)이 14세기 이후 발달되어 넓은 홀을 의식하는 미술로서 태피스트리가 등장하였다. 또 북부 지방의 교회에서는 판화 형식의 제단화(祭壇畵)가 요청되게 되었다. 북프랑스를 중심으로 발달한 고딕 회화는 후에 플랑드르파(派)의 탄생을 맞게 되는 것이다.

국제 고딕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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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際-樣式

14세기 전반 아비뇽 법황청(法皇廳)에 시모네 마르티니가 초빙되어 전파케 된 시에나파(派)와 북방의 고딕 기법이 교류하여, 후기 고딕의 정교한 화려성이나 사실성과 시에나파의 정서 표현이나 설화성(說話性)이 혼합되었다. 아비뇽에 관계한 각지의 성직자에 의해 이 양식은 전유럽에 보급되어, 14세기로부터 15세기에 걸쳐 유행하였다. 랭브르 형제, 케른파의 로호나, 체코파의 화가들, 이탈리아의 우첼로, 안젤리코 등은 이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다. 이 경향은 조각에도 파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