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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현 대 미 술/주관의 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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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비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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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uvisme (야수파)

20세기 미술은 반자연주의를 기조로 하는 혁신적 유파(流派)와 사조가 어지럽게 뒤바뀌게 되지만 그 발단이 되는 것은 포비슴의 운동이다.

이 명칭은 1905년의 가을 파리에 있는 살롱 도톤에 출품한 일군의 청년화가들이 극채색(極彩色)으로 그린 작품에 대해 당시의 비평가 루이 보크셰르가 '포브(Fauves)'라 부른 것이 그 유래라 한다. 주요한 화가로서 파리 미술학교의 귀스타브 모로 문하생인 마티스, 마르케, 카므왕, 망갱을 중심으로 하여 여기에 레옹 봉나의 아틀리에에서의 뒤피, 프리에스, 브라크 등이, 또 개인적인 교우를 통하여 블라맹크, 드랭, 반 동겐이 참가하고 있었다.

마티스를 리더로 한 이들 화가는 거의 1870년대 태생이라는 같은 세대의 연대감에 서서 이론적인 기반에서보다 기성 회화에 대하여 어떻게 하든 일격을 가하려고 하는 젊은 패기와 야심에서 공통되고 있었다. 그들이 당면한 적으로 삼은 것은 시각의 진실을 추구한 나머지 창조의 주체성과 내면적인 감동을 잃어버린 인상주의(印象主義)였으며, 따라서 이 인상주의에 중요한 수정을 시도한 선배 고흐의 격정과 고갱의 원시적 생명력의 표현은 그들을 한결같이 분발하게 하는 모범이 되었다. 파괴와 혁신에 불타는 포브들의 유일한 무기는 색채이었다. 그것도 빛깔의 인상을 조금씩 칠해 가는 타율적인 색채가 아니고, 단숨으로 캔버스에 범람시킨 강렬한 원색, 이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다이너마이트의 뇌관(雷管)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강렬한 원색이 작렬(炸裂)하는 가운데 감성의 해방과 자아의 고양(高揚)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고 창조적인 에너지의 대담한 연소를 다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젊은 생명력의 연소와 그것이 기성 회화에 끼친 적잖은 충격에 그들의 야수 중에도 야수다운 영역이 있으며, 거기에 포비슴이 수행한 역사적인 역할의 거의 전부가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에 가서 그러한 패기에 앞서서 확고한 이론을 갖지 못하고 다만 같은 세대라고 하는 친밀감을 바탕으로 나오게 된 포비슴의 운동은 흩어지는 것도 또한 빨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1908년에는 이미 클럽으로서의 결속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마티스는 독특한 장식체계의 확립으로, 마르케는 중후한 풍경화로, 드랭은 고전으로, 그리고 브라크는 세잔에게서 본을 딴 엄밀한 화면 구성으로, 각자가 자기 본래의 자질을 지향하여 떨어져 나갔다. 관점을 바꾸어 말한다면 밖으로 향하였던 혁신의 기개에 불탄 젊은이들이 안에서 각자의 개성의 차이를 발견해 내는 기회와 장소로 삼은 것이 클럽으로서의 포비슴의 의미였다고도 할 수 있다. 포비슴은 에콜(流派)이 아니라고 하는 의견도 이 때문에 나오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고하는 화려한 '색의 계절풍(季節風)'이었다.

초기의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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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이 세기 최대의 거장(巨匠)으로서 스스로 20세기 미술의 전개를 구현하고 있는 피카소는 1881년 10월 25일 에스파냐의 항구 도시인 말라가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는 화가로 관립 미술학교 교사였고 피카소는 모친 마리아의 성(姓)을 계승하였다. 14세에 집안은 바르셀로나로 옮겨 갔으며, 피카소는 부친이 교편을 잡고 있던 그 곳 미술학교에서 배웠다.

이 무렵에 이미 그는 수르바란과 벨라스케스의 사실(寫實)에 눈을 떴고 미술전에서 상을 받을 만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듬해인 15세 때 그는 마드리드에 나와서 산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학교에서의 수업에도 만족하지 못하여 프라도 미술관을 매일 다니다시피 명화를 감상하였는데 특히 그레코에 열중하였다. 그리하여 점차로 부친과 관학파(官學派)의 영향을 벗어난 그는 1901년에 당시 파리 몽마르트르의 술집을 근거로 하여 기지와 풍자를 무기로 삼고 세기말의 풍속을 그리고 있던 화가 로트렉과 스텐렌의 작품에 이끌리어 파리의 땅을 밟게 되었다.

1901년부터 4년 동안 피카소는 파리와 양친이 있는 바르셀로나를 왕래하면서 사회의 패잔자(敗殘者), 뒷거리의 영락한 사람들, 노인, 고독자 등의 인간상을 화면에 포착하였다. 그러나 결코 기지와 풍자를 쓰지 않고 대상에 충분한 공감을 가지고 그렸던 것이다.

대상은 짙은 블루의 거의 한 가지 색 속에 표현되고 있었다. 화면의 형체는 야위었고 선은 병적일 만큼 섬세하며, 색채는 어둡고 안타깝고 또한 아름답다. '눈물에 흥건히 젖은 예술, 촉촉한 계곡의 푸르름'(시인 아폴리네르의 평), 이것이 이른바 '청색의 시대'이다. 이 시대의 작품에는 <애정>, <늙은 유대인>, <다림질하는 여인> 등이 유명하다.

이 시대를 이어 짧은 기간인 '분홍색의 시대'(1904∼1906)가 계속된다. 화면은 밝은 연분홍색으로 채색되고 간소한 형체 파악으로, 대상은 겨우 물 속에서 이제 막 떠올라와서 화면에 붙여진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당시에 피카소는 몽마르트르의 아파트 '바토 라보아르(洗濯船)' (시인 막스 자콥의 명명)에 거처를 정하고 친구와 연인도 사귀게 되어 시야를 내면에서 외면으로 넓혀 갔다. 그는 서커스에도 흥미가 있어 <공을 타는 소녀> <아를퀴앵의 가족> 등 유랑하는 연예인을 많이 대상으로 하였다. 유명한 동판화 <살탐방크>(16점, 1913년 출판)의 제작도 거의 이 무렵이었다. 이 동판화는 유채(油彩)와 같이 방금이라도 형체를 잃을 것만 같은 섬세한 선으로 그려져 있다.

총괄하여 초기 피카소에게서 감성의 과잉과 문학적 취미를 찾을 수 있으나 그것이 단순한 감상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조형(造形)에 뛰어난 천분 탓이다. 그의 젊고 고독한 영혼과 대상과의 교류는 화면에서 대상의 음성이 울부짖게 하고 있는 점에 주목을 받고 있다. 이윽고 피카소는 흑인조각에 열중하게 되어 초기의 섬세함을 스스로 파괴하여 1907년에 중요한 변모를 수행하는 것이다.

마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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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 Matisse (1869∼1954)

마티스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가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게 된 동기는 전혀 우연한 계기라 하였다. 1869년 북프랑스의 르 카토에서 출생한 마티스는 유복한 곡물상인 부친을 따라 처음에는 법률을 배우려고 파리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병으로 입원했던 병실에는 바로 옆의 병상에 가끔 그림을 그리는 남자가 있었다. 이것을 보고 배운 그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이윽고 병상에 미술교본을 가지고 오게 하여 그림그리기에 열중하였다. 이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한 계기이며 1890년 그의 나이 21세 때의 일이었다.

1892년에 양친을 설득하여 재차 파리에 나온 마티스는 처음에는 아카데미 줄리앙의 부그로의 문하생이 되었다가 이어서 미술학교의 모로에게 사사(師事)하였다. 동문인 마르케와 루오와의 교우는 이 때에 시작하였다. 그는 루브르에서 고인(古人)을 배웠고 인상파·신인상파를 한 발짝씩 연구해 갔다. 화상(畵商) 볼라르의 점포에서 세잔, 고흐, 고갱의 데생을 구입하였고, 런던으로 여행, 터너를 보았으며, 더욱이 인상파의 유산을 계승하여 우키요에에 열중한 것도 초기 마티스에 있어서는 필요한 영양이 되었던 것이다. 1896∼97년경부터 그는 원색의 대비(對比)에 의하여 선명한 표현을 시도해 보지만 이윽고 앙데팡당 미술전의 출품을 통하여 젊은 드랭과 블라맹크와 깊이 사귀게 되어 색채는 더욱 선명해진다. 이리하여 그는 젊은 화가들의 선두에 서서 포비슴의 기치를 올리게 되었다.

마티스에 의하면 포비슴의 운동은 무엇보다 먼저 표현수단의 순수함을 재발견하는 용기를 고취하고 추진하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용기와 더불어 그가 회화에서 구한 또 하나는 '표현'이다. 그가 말하는 표현이란 얼굴을 찡그린다든지 강렬한 동작을 과시한다든지 하는 격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화가가 주체적으로 화면에 만들어 내는 색과 모양의 배합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긴밀한 질서를 가리키는 것이다. 1908년 이후 그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질서 있는 조형(造形) 탐구의 발걸음을 재촉하였는데, 가령 그가 자신하던 장르인 임의의 실내화(室內畵)와 정물화에 주목하여 보기로 하자. 거기에는 인물이 그려져 있으며 의장이, 장신구가, 가구와 꽃, 꽃병, 융단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들 여러 요소 가운데 마티스는 과연 어느 부분에 역점을 두고 그렸을 것인지, 가끔 눈도 코도 없이 다만 달걀모양으로 그려진 사람의 얼굴인가, 아니면 색채의 아라베스크를 화면에 차지하고 있을 뿐인 비실용적인 가구나 융단인가, 물론 그 어느 것도 아니란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의 그림에 있어서는 인물이 의장보다 중요하다든가 융단의 색채가 다른 형태보다 뛰어난다든가 하는 관점은 성립되지 않는다. 화면은 모든 구성 요소의 균등한 비중에서 또 그 비중의 하모니에서 성립되고 있다. 다양하면서도 단일한 것, 질서·조화의 창조야말로 그의 과제이다. 그는 '동비중(同比重)·순일(純一)·절도(節度)'를 자기 스스로 표현의 3원칙이라 말한다. 마티스의 이러한 질서에 대한 감각은 자연법칙을 지상(至上)으로 하는 리얼리즘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도(邪道)임에는 틀림없지만 본질적으로는 명석한 형식감정을 존중하는 라틴적인 조형정신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균형이 잡힌 무구(無垢)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지쳐버린 사람에게 조용한 휴식처를 제공하는 것과 같은 그림을"이라 하였다.

포브 시대의 마티스 그림에 <호사(豪奢)·정밀(靜謐)·쾌락을 위한 에튀드>라고 하는 작품이 있다. 보들레르의 시에서 얻은 이 세 낱말처럼 마티스의 예술적 생애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은 없다. 그는 항상 색채를 호사하게 탕진하는 일에 대하여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고, 동시에 조용하게 다양한 통일을 반드시 추구하였던 것이다. 쾌락이란 그에 있어서 방종을 규제하는 질서 속에서 절도 있는 사치에 속한 것이었다. 만년에 80세의 고령인 마티스가 5년의 세월에 걸쳐 완성한 반의 <마티스 예배당>은 그 예술의 집약이며 명쾌함과 단순함에 넘치는 조형이었다.

블라맹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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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rice de Vlaminck (1876∼1958)

프랑스의 화가. 예술에 있어서 이론이란 의사의 처방과 같은 정도로 필요하다고 믿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병자임에 틀림없다. 지식은 본능을 말살해 버린다. 그림의 창작은 유통(流通)이 자재(自在)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렇게 단언하는 모리스 드 블라맹크는 가장 포브적인 화가였으며 포비슴 속에 산 화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1876년 파리에서 출생하였으나 그 집안은 플랑드르 출신이라 한다. 양친은 음악가로 자제의 교육에는 무관심한 보헤미안 기질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하였고, 바이올린을 켠다든지 자전거경주의 선수를 해 가면서 자수성가(自手成家)의 인생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그는 본능에 의하여 화가가 되려고 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화가란 무정부주의자와 같아 직업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나는 어린이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라고도 하였다. 그는 드랭과의 교우로 마티스와 사귀어 포비슴 운동에 가담하였다.

블라맹크는 무엇보다도 생명력의 표현을 화면에서 추구해 보려던 화가이다. "나는 미풍양속에 혁신을 불러일으키고 싶다. 진부한 이론과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에서 해방된 자연의 활달함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하던 그의 패기는 색채의 과잉과 범람으로 화면에 마구 넘쳐 흘러 포브 중에서도 더한층 높은 음색의 절규가 되었다.

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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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uol Dufy (1877∼1953)

프랑스의 화가. 라울 뒤피가 자기의 묘화 과제에 대하여 스스로 계발(啓發)된 계기는 마티스의 작품 '호사·정밀·쾌락'을 접한 때라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그림을 보고 나는 그린다고 하는 참다운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정말 놀라운 발명이라 할 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상주의적인 리얼리즘의 매력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다." 이 말에도 있듯이 1877년 르 아브르에서 태어난 뒤피는 23세에 파리로 나와 오로지 인상파의 드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림을 약간 어두운 색조로 그렸던 것이다. 그러나 포비슴의 운동에 참가한 후부터 그는 자랑으로 여긴 속필(速筆)을 유감없이 구사하여 삶의 기쁨을 다채롭게 표현하는 화가가 되었다. 보트 경주, 수욕장 풍경, 길거리 축제 등 환희의 소리가 울리는 장소와 장면은 그가 애호하는 모티프가 되었다. 그 후에 그는 퀴비슴으로 접근했으며, 한때는 화상(畵商)도 위험시하는 실험가인 척도 하였지만 그 금욕적인 분석과 구성의 수법은 결국 그의 기질과 맞지 않아 그는 또다시 자칭 '바캉스의 화가'로 돌아와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현세는 괴로운 세계로 보기에는 너무 아름답고 기쁨에 충만한 빛깔과 빛에 넘쳐 있었다. 특히 그는 생활을 위하여 디자인을 하는 일에도 손을 대어 장식 미술가로서도 높이 평가를 받아 그 힌트에 의하여 회화도 충실하였다.

마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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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 Marquet (1875∼1947)

프랑스의 화가. 알베르 마르케는 1875년 보르도에서 출생하였다. 처음 장식화가를 지망하였으나 22세 때 마티스와 더불어 모로 문하생이 되었다. 마티스와는 절친하였고 같은 아틀리에에서 1900년의 만국박람회의 장식화를 공동 제작한다든지 또는 같은 전람회에 각자의 작품을 출품하면서 그림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성격적으로 볼 때 마티스를 양(陽)이라고 한다면 마르케는 음(陰)이라 할 만큼 달랐다고 한다.

마르케는 일찍부터 바다와 항구와 해변의 풍경화를 그렸고, 이러한 기호는 늙어갈수록 화면에 인적이 없는 고요한 취향을 가미하여 그 제작을 일관하였다. 같은 모티프의 풍경화에도 뒤피의 경우에는 축제의 광경, 그 생생한 환희의 표현에 특색이 있으나 마르케가 노리는 것은 대범한 색면 구성 즉 넓고 넓은 하늘의, 언덕의, 모래 형태의 이조(移調)에 중점을 두고 있다. 마르케는 격렬한 색채에 의한 포브의 화가가 아니고, 그 색조의 대담함에 의해 포비스트라 말하는 견해도 있다. 확실히 단조로운 색채로 덮여진 그의 화면은 때때로 중후한 이면의 뉘앙스가 노출되어 몽롱한 애수마저 풍기고 있다. 포비슴 운동 이후의 그는 구성을 더욱 순화하여 견고하고 평형감이 넘치는 작품을 만들었다. 마르케는 현대 회화에 유니크한 지위를 차지하는 풍경화가로 기억되는 화가일 것이다.

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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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s-Henri Rouault (1871∼1958)

프랑스의 화가, 판화가. 파리의 노동자 동네인 베르빌의 초라한 방에서 정부군의 포격에 벌벌 떠는 모태로부터 탄생하였고 부친은 빈곤한 목수였다.

루오는 14세 때에 글라스 그림을 그리는 공방(工房)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중세 스테인드글라스의 복원 수법을 배웠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4년 후에 미술학교에 입학, 포브의 스승인 모로의 지우를 얻는 바가 되었다. 그래서 모로는 예술의 스승 이상으로 정신적인 선배이며 때로는 동지나 친구로서 마음의 지주가 되었다. 이것은 모로의 사후(死後)(1898)에 많은 제자 가운데서 뽑혀 루오가 '모로 미술관'의 관장이 되어 스승의 유작을 관리하는 지위에 오랜 기간 머물렀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모로는 루오가 성장한 베르빌의 주민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어둡고 과묵한 종교예술의 애호자이다.' 이러한 지적은 루오의 장래를 멀리 예견하고 있었다. 모로의 사후 루오의 시야에는 포랭과 로트렉 및 도미에가 뚜렷하게 부각되었고, 모두가 사회 비판의 경향이 농후한 화가들이었다. 또한 카톨릭의 문필가 위스망스와 레온 블르와와의 교우는 루오의 종교적인 인생관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가난하고 학대받는 자들에 대한 공감, 부자나 권력자를 향한 분노는 루오에 있어서의 깊은 종교적인 감정에서 유래한다. "가령 창부를 그리는 경우 루오는 이 죄많은 여인이 풍기는 전율할 향기에 취하는 것이 아니고 그녀의 죄에 울고 그녀와 더불어 괴로와하는 것이다(美術史家 드리발)." 세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루오는 포비슴의 와중에 있지만 밝게 삶을 구가하는 그들과는 대극(對極)의 위치에 있었다.

루오의 신앙과 그에 입각한 예술관은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이다. 그는 "나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느낄 수 있는 것뿐이다." 그는 이처럼 비합리적 세계에서의 계시(啓示)를 어둔 밤 속에서는 빛나는 별을 인정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예술적 탐구는 완성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완성해 낼 수 없는 것의 극(極)을 다하기 위하여 행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참다운 예술은 열렬한 고백을 토로할 수 있는 까닭에 가치를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암야(暗夜)의 절규이며 자기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울음소리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영혼의 극점에 서서 루오는 단언하기를 '구세주로서 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했다. 이 동안의 소식을 여실히 말해 주는 것으로 판화집 <미세레레>(1948년 발표)가 있다.

1913년 루오는 화상(畵商) 볼라르에게 인정을 받아 아틀리에를 제공받음과 동시에 일정한 금액으로 전작품을 인수받게 되었다. 1917년에는 역시 볼라르와의 계약으로 한때 유채화를 중지하고 판화에만 전념하였으나, 이것이 일반 사람에게 공개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었다. 이런 것에서도 그가 시류(時流)에서 멀어져 가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더욱이 그는 용이하게 완성을 인정하지 않는 화가이어서, 독특한 에나멜을 칠한 것과 같은 중후한 마티에르와 농밀(濃密)한 색채로 덮인 작품으로 완성이 될 때까지는 상당히 긴 세월이 소요되었다.

1948년 볼라르의 유산 속에 들어가 있던 약 3백점 이상의 작품을 재판에 의하여 되돌려받았을 때에도, 벌써 이것들을 마음대로 가필 수정할 여력이 없다고 하여 아낌없이 태워버렸던 것이다. 판화 때문에 중단된 유채화의 제작을 다시 시작한 때는 1929년이며, 이 때부터 그의 명성은 높아졌으나 이후 87세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루오는 현대 화단에 초연한 성화상(聖畵像)의 화가이기도 하였다.

표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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表現主義 Expressionismus

표현주의란 일반적으로 자연묘사에 대립하여 감정표현을 주안으로 하는 예술상의 이념을 말하며, 직접적으로는 20세기 전반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던 주관 표출을 목표로 한 전위(前衛)예술운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술분야에는 고흐와 고갱의 흐름을 따른 반(反)인상주의·반자연주의 입장에 서게 되는데, 이러한 입장은 항상 현상보다는 그 배후에 있는 것을 탐구하려고 하는 게르만 기질에 있어서는 생득적(生得的)인 것이라 하겠다. 독일 표현주의 운동은 나비파(派)와 접촉이 있던 노르웨이 화가인 뭉크처럼 뛰어난 선구자 이외에도 독일 향토예술과 정감적인 자연파(自然派)와 세기말의 미술 가운데에 선구자를 가졌으며, 또한 16세기로 소급하는 독일미술의 전통 중에서도 풍부한 영양을 섭취한 것이었다.

독일 표현주의의 최초의 그룹은 1905년 드레스덴 고등공업학교 건축과 학생들로 결성된 '브뤼케(橋)'였다. 키르히너, 헤켈, 시미트로틀루프를 창립멤버로 하는 이 그룹은 후에 활약 무대로서 베를린으로 옮겨가서 페히시타인, 뮐러가 첨가되었다. 그룹의 명칭은 독일 각지에 있는 젊은 세대가 널리 결집하기 위하여 다리를 건넌다는 뜻으로 그러한 이름을 붙였다. 1909년 뮌헨에서 '신예술가동맹(新藝術家同盟)'이 탄생하여 인상주의를 신봉하는 분리파인 구세대에 대항할 새로운 세력을 결집하였다. 1910년에는 베를린에서 평론가인 헤르바르트 발덴이 화랑 '시투름(暴風)'을 개설하였고 같은 이름의 미술잡지를 발행하여 화가·시인·문학가들을 모아 신사조를 고취하고 있었다. 당시 무명이었던 샤갈이 첫 개인전을 시도한 곳도 이 화랑이었다. 시투름의 서클에서는 코코슈카가 독특한 심리적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더욱 1911년 신예술가동맹에서 새로이 '블라우에 라이터(靑騎士)' 그룹이 파생하여 칸딘스키, 마르크, 마케, 쿠빈, 클레 그리고 여류 뮌터 등이 여기에 속하였다. 이 그룹은 다분히 낭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제예술(諸藝術)의 통합'을 이념으로 내건 모임이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뒤의 '바우하우스' 운동을 선취하는 것이다.

1912년 제2회전에는 피카소, 브라크, 블라맹크, 라리오노프, 말레비치 등이 출품자로서 참가하였다.

이리하여 독일 각지에 고양된 표현주의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전야의 위기적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여 인간 존재의 심각한 문제를 강렬한 색채와 형태로 호소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그룹은 흩어지고 이후는 1인1파적인 추구로 파고들면서 나치스의 탄압을 받을 때까지 독일 현대미술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더욱 표현주의의 고독한 탐구자로서 월프스 베테의 자연파에서 나온 여류화가 모데르존베카와 닷하우의 자연파에서 나온 놀데가 있으며, 또 조각가로서 바를라흐 및 여류인 코르비츠가 유명하다.

키르히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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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

독일의 화가, 판화가로 아샤펜부르크에서 출생하였다. 1901년 드레스덴 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 재학 중에 뮌헨의 공예가 헤르만 오프리스트의 감화를 받았다. 1905년 학우인 헤켈, 시미트(로틀루프)와 더불어 그룹 '브뤼케'를 조직하여 미술 혁신의 기치를 올렸다. 의도한 바는 강렬한 색채와 분방한 묘선(描線)으로 주관적 진실을 그려내는 것이었다. 1911년 그룹과 함께 베를린으로 옮겨 뭉크와 고갱의 영향을 받아 독일 표현주의 운동의 유력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 시기에 있어서 키르히너의 제작에는 대도회의 단면을 모티프로 한 것이 많고 흑(黑)을 기조로 하는 액센트가 강한 색채와, 경질(硬質)이며 가슬가슬한 형태에 의하여 문명의 모순과 인간의 비참함을 가차없이 폭로하는 것을 그 취지로 삼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결핵에 걸린 이후는 오로지 이주한 스위스의 다보스에서 인간의 채취가 강렬한 풍경화를 제작하였다. 키르히너는 조국 독일과 독일의 예술을 깊이 사랑하였고 또 극단적으로 자아의식이 강한 성격이었으나 나치스에게 경원당한 화가로 퇴폐예술가라는 낙인이 찍히기에 이르러 1938년 조국예술의 전도를 절망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판화도 많으며 이 분야에서도 독일미술의 전통을 계승함과 동시에 표현주의 회화에 광채를 부여하였다.

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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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 Nolde (1867∼1956)

본래의 성(姓)은 한젠으로 에밀 한젠이 본명이었다. 1867년 북독일의 노르트시레스비히의 농가에서 태어났고, 그가 성을 바꾸게 된 것은 이 북방의 고향에 연유되며, 1901년인 34세에야 미술에 전념하려는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본래 그는 공예를 배워 1892년 스위스의 산크트 가렌 공업학교의 교직에 있었다. 그 곳에서 그린 알프스산의 의인화(擬人畵)가 호평을 받아 화가수업의 자금을 얻을 수가 있었다. 1898년 교직을 사임하고 뮌헨·파리·코펜하겐 등지로 유학하면서 인상파풍(印象派風)의 스타일을 익혔다. 닷하우의 자연파에 접근한 것도 이 시기이다.

성을 바꾼 경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놀데는 북방의 풍토를 사랑하여 스스로 향토화가라 자칭했고, 북변(北邊)의 황량한 풍토화와 범신론적인 종교화에 대한 애호(愛好)는 점차 그를 인상파와는 정반대의 길로 이끌어 갔다. 1909년 그의 종교화 <성령강림제(降臨祭)>가 인상파적인 베를린 분리파(分離派) 미술전에서 거부당하자, 그는 공개적인 질문장을 제출하여 이에 반론을 펴고 분리파와 인연을 끊었다. 이보다 먼저 드레스덴에서 개최한 그의 개인전에 찬사를 보낸 브뤼케파(派)의 화가나, 분리파 가운데서도 혁신적인 신세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놀데를 표현주의의 맹장(猛將)으로 추앙하였다. 그러나 놀데는 자수성가한 예술가이며 평생 파벌을 형성하는 일은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놀데는 시베리아를 거쳐 동양을 여행하고, 더 나아가 동남아시아에 와서 원시예술을 접하였다. 그는 원시예술의 단순 소박한 형식 가운데에 화려하고 기괴한 생명력의 표현을 흡수하여, 그것을 그의 주요한 모티프인 가면과 인형에 관한 제작의 영양분으로 삼았다. 영원히 회귀(回歸)하는 근원적인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엿보는 것 같은 중후하게 채색한 풍경화, 항상 핏자국의 적색이 부착하여 있는 이단적인 종교화, 본능과 정열을 싫증날 정도로 강렬하게 상징한 가면과 인형의 화면, 그리고 개화 그 자체를 선명한 색채로 포착한 꽃의 그림, 또한 흑백 2색의 소박한 판화, 이들 놀데의 주요한 제작은 그가 순수하게 게르만적인 정신의 조형자임을 보여준다.

1937년 놀데의 작품은 나치스에 의하여 퇴폐예술이란 낙인이 찍힌다. 그는 북독일의 제뷔르에 은신하여 1956년 그 곳에서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자기 작품을 공개하려 하지 않았다.

코코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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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kar Kokoschka (1886∼1980)

오스트리아의 화가. 도나우의 푀히라룬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 빈 공예학교의 급비생으로 수학하는 한편, 구스타프 클림트가 지도하는 '빈 아틀리에'에 들어가서 환상적인 작풍(作風)의 판화·그림책·플래카드 등을 제작하였다. 1910년 화랑 및 미술잡지 <시투름>의 창립자인 발덴의 초청으로 베를린에 이주하여 그 곳에서 표현주의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 시기에는 초상화의 제작이 많았고, 그 심리묘사에까지 육박하는 작풍은 대상으로 하는 인물의 운명을 예언한다는 평을 받아 '화필의 점술사'라 불리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여 부상을 입었고, 전후에는 1918년∼1924년까지 드레스덴 아카데미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이윽고 유럽·아프리카·중근동 각지를 편력하여 광대한 시야에 입각한 바로크적인 풍경화를 그렸다. 나치스의 대두로 정치적인 압박을 받아 1938년 런던으로 망명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그 곳에서 침략주의에 대항하여 전란의 유럽을 비판하는 경세적(警世的) 작품을 발표했다. 이런 종류의 제작에는 '예술은 언어와 같아서 자아로부터 타아(他我)에의 사자(使者)이다'라는 그의 신념이 구체화되었다. 초기의 환상화로는 <바람의 신부>, 초상화는 <포렐 박사상(博士像)>이 있고, 편력시대의 풍경화에 <몬타나>가 있으며 풍자적 작품인 <테레모피레>는 유명하다. 그는 또한 표현주의의 시인, 희곡작가로서도 주목할 작품을 발표하였다.

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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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z Marc (1880∼1916)

독일의 화가. 프란츠 마르크는 1880년 뮌헨에서 출생하였다. 그 곳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웠고, 1903년 및 1907년에는 파리로 가서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특히 고흐)를 연구하였다. 1910년 칸딘스키와 사귀어 이듬해 그와 함께 그룹 '블라우에 라이터'를 창립하였다. 마르크의 주제는 동물이며 즐겨 쓰는 색채는 청색이며 또 화면은 구상(具象)의 묘사를 지양한 형태의 구성으로 처리되고, 더욱이 로맨틱한 색채로써 깊은 내면성을 표현하고 있다. 1912년 들로네와의 교우로 퀴비슴을 흡수하고 또 친구 칸딘스키의 영향도 받아서 순수한 색채 형태의 탐구를 시작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종군, 1916년 베르됭 공방전에서 전사하였다.

그는 표현주의에서 추상으로 향하는 길을 모색한 선각자적인 화가이며, 1920년대의 바우하우스 운동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한 이론가이기도 하였다.

초기의 칸딘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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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sily Kandinsky (1866∼1944)

바실리 칸딘스키는 1866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하였으나 30세가 될 무렵부터 화가를 지망하여 뮌헨으로 나와 프란츠 시투크의 문하생이 되었다.

회화로 전환한 동기는 고향에서 개최된 인상파 전시회에서 모네의 작품 <노적가리>를 보게 되어, 빛깔 즉 색채의 해조(諧調) 안에서 거의 형태를 잃어 가고 있는 그 화면에서, 대상을 떠나서도 성립되지 않을까 하는 새로운 회화에의 시사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는 러시아 민속예술이나 세기말의 양식(아르누보), 그리고 인상주의 영향을 서서히 벗어나 1902년에는 스스로 회화학교를 개설하였고, 이듬해부터 1907년에 걸쳐 튀니스·이탈리아·프랑스 및 네덜란드 각지를 여행하여 견문을 넓혔다. 그 동안 포비슴의 영향으로 밝은 색채와 넓은 색면에 의한 화면의 구성을 배웠다. 1910년, 수채(水彩)로써 최초의 비구상화(非具象畵)를 그렸고 동시에 논문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을 발표하여 시각적인 대상에 종속하지 않는 새로운 회화를 지향한 제일보를 디뎠다. 그런데 당시 그 자신이 조정 역할의 지위에 있던 뮌헨의 젊은 그룹 '신예술가동맹(新藝術家同盟)'의 내부에서조차 이러한 새로운 시도를 의구하는 소리가 높아, 그 때문에 그는 마르크, 마케, 쿠빈과 더불어 동맹을 탈퇴하여 1912년에 새로이 '블라우에 라이터' 그룹을 조직했던 것이다.

그의 초기 비구상화는 오직 색채가 갖는 정신적인 환기력의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이 점으로 보면 순수한 음성으로써 이미지를 형성하는 음악의 영역에 가깝다. <콤퍼지션>이라든가 <즉흥곡>이라는 작품이 있는 것은 그러한 까닭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한때 러시아로 돌아가 혁명 후는 계몽적인 문화인으로 요직에 취임하였지만 그간 구성주의에 접하여 형식 문제에 관해 깨달은 바가 있었고, 그 성과를 가지고 1920년대의 독일 미술계에 복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