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현 대 미 술/추상의 여러 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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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오니슴[편집]

Rayonisme 光線主義

레이오니슴은 유럽전위 미술사조의 영향을 받아 20세기의 러시아에서 가장 일찍 싹튼 전위운동이다. 미하일 라리오노프와 그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에 의해 주창되고 또 추진되었다. 퀴비슴(특히 오르피슴)과 미래파와의 총합을 지향하여, 색채를 독자적인 법칙성과 운동성에 의해서 질서를 갖도록 화면에 예각적(銳角的)인 색채 형태를 다차원적으로 배합해 가는 추상화다.

1913년에 발표된 마니페스트는 다음의 구절로 시작한다. "현대의 수호신-그것은 바지이며, 야크이며, 버스이며, 비행기며, 철도며, 호화선이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불가사의! 비교도 할 수 없는 세계사의 이 커다란 에폭! 이러한 시대에 개성이 다 무어냐, 우리들은 예술작품에 있어서 개성의 가치를 부정한다." 즉 기계시대의 현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인식에 입각하여 개성적이고 정감적인 과거의 묘사적 회화를 부정하여 순수한 색과 형식의 콤퍼지션을 행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혁명 전야의 러시아에는 이러한 미의식(美意識)의 변혁이 그대로 정치적인 자유에의 희구와 권위에 대한 반항으로 통하였던 것이다. 이 점은 미술의 테두리 안의 개혁과는 다른 격렬함을 지니고 있었다. 마니페스트의 끝 구절에는 '그리하여 예술의 참다운 자유가 시작되어 삶은 예술의 법칙으로 형성된다'라는 말로 맺어져 있다. 1914년 라리오 노프 부처는 레이오니슴의 전람회를 파리에서 개최하였는데 거기엔 아폴리네르가 카탈로그의 서문을 써서 소개를 하였다.

그러나 레이오니슴의 주장은 국제적인 무대에서 널리 공감을 불러일으킬 운동이 되지는 못하였다. 라리오노프느 후에 파리로 이주하여 오로지 무대미술의 분야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갔으며, 여기에는 러시아의 민족적 장식미술에서 출발한 아내 나탈리아의 협력이 큰 추진력이 되었다.

쉬프레마티슴[편집]

Suprematisme 絶對主義

쉬프레마티슴은 1915년 말레비치가 주창하여 러시아 혁명 전후의 미술계를 구성주의와 함께 2분하여 전개된 전위 미술 사조 및 그 운동을 말한다. 구성주의가 물질적 소재의 개발에 의해 외적인 현실로 향한 비회화적인 사조인 데 반하여 쉬프레마티슴은 2차원의 세계에서 인간의 내적인 현실에 대결한 사조라고 말할 수 있다.

퀴비슴의 영향을 받은 말레비치는 순수한 형태에 의한 화면 구성을 목적하였고, 그러기 위하여 모든 시각적인 대상을 버리고 이것을 조금도 상기시키지 않는 추상적 도형을 가장 간결하게 응축(凝縮)시킨 형태로써 화면에다 배치하였다. 이것은 검은 정방형을 기조(基調)로 하여 여기에 원·삼각형·십자형 등을 조합한 단순한 화면인데, 말레비치에 의하면 이 화면은 무슨 상징도 기하학도 도안도 아니며, 내면의 질서에 따라서 스스로 형성되고 구성된, '자연을 훨씬 초월한 순수한 감각'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감각 바로 그것의 표현을 그는 '절대'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 쉬프레마티슴 선언에는 시인인 마야코프스키의 지지와 협력이 있었다고 하며, 화면에 보이는 것에는 어떠한 비유와 설화(說話)도 시사하는 일 없이 이른바 미지의 공간 체험의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말레비치의 작품에는 포에지 바로 그것의 시각화가 겨냥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단순한 도형은 현상에서 추출된 상형문자가 아니고 감각의 순화에서 생겨나온 구체적인 조형언어이다. 그가 '절대주의란 비구상적 제작에 의한 새로운 리얼리즘이다'라고 하는 그 진의도 이 점에 있다.

추상미술이 현상의 추출 작업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쉬프레마티슴의 사상은 대단히 중요한 미술의 가치 전환을 시사하는 것이며 그 영향력은 크다. 러시아 본국에서는 소비에트의 정책 변경과 함께 소멸한 운동이지만 그 이념은 널리 유럽에 있어서의 추상미술의 저류가 되었다. 특히 신조형주의(新造形主義)와 바우하우스에 끼친 영향은 무시할 수가 없다. 더욱 말레비치의 감화를 직접 받은 엘 리시키는 혁명 후에 쉬프레마티슴의 원칙에 입각하여 그래픽 디자인의 분야에 새로운 면을 개척하여 큰 공헌을 남기고 있다.

말레비치[편집]

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1878∼1935)러시아 화가. 키예프에서 출생하였고, 초기의 수업은 인상파 및 포비슴에서 출발하였으나 1912년 파리로 나와 퀴비슴을 접하여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1913년 백지(白紙)에 검은 정방형만 그린 작품을 발표하여 화제를 일으켰고, 이 작품을 계기로 하여 감각의 궁극을 탐구하는 쉬프레마티슴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1915년 시인 마야코프스키의 협력으로 '쉬프레마티슴 선언'을 발표하여, 러시아 전위미술의 기수로서 활약하였다. 1919년에는 모스크바 미술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1921년에는 레닌그라드 미술학교의 초청을 받았다.

1926년 그는 단기간 독일에 머물렀는데 귀국 후에 문화정책을 변경한 당국에 의하여 공직서 추방당하였고, 그 이후는 오직 실용미술(제도·직물·벽지)의 분야에만 종사하다가 1935년 레닌그라드에서 사망하였다.

리시츠키[편집]

El Lissitzky (1890∼1941)

리시키는 스몰렌스크에서 출생하였다. 1909년부터 1912년까지 그는 다름시타트의 고등기술학교에서 건축을 배웠으며, 귀국하여 말레비치와 사귀어 쉬프레마티슴의 유력한 작가로 활약하다가 1921년 모스크바 예술 아카데미의 교수에 취임하였다. 그 해에 재차 독일에 가서 모홀리 나기와 친교를 맺었다.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주로 스위스에서, 1925년에서 1928년까지는 주로 하노버에 머물렀고 그 동안 장 아르프, 반 도스부르크, 반 데르 로에 등과 협력해 많은 인쇄 디자인과 디스플레이·포스터의 제작을 통하여 유럽의 추상미술운동 및 현대 디자인운동에 큰 공적을 남겼다. 마야코프스키의 시집 <낭송을 위하여>의 삽화와 장정(裝幀)은 그의 대표작의 하나이다. 만년에는 나치스에게 추방당하여 모국으로 돌아가서 1941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였다.

구성주의[편집]

構成主義 construtivism

구성주의는 혁명 전후 러시아에서 전개된 전위운동인데 타틀린, 로드첸코, 가보, 페브스너 등이 주창하고 추진하였다. 퀴비슴이 시사한 추상적 조형과 미래파가 촉발한 기계주의적인 이념의 영향을 받아 이것을 독자적인 방향으로 발전시켰고, 더욱 혁명 전후 민중의 입장도 반영하여 미술뿐만 아니고 건축·공예·무대·디자인 등 광범위에 걸친 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

미술의 분야에서 구성주의는 오직 물질의 세계와 대결하여, 이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을 대폭적으로 미술에 도입함으로써 미술과 물질계에 가로놓여진 장벽을 한꺼번에 제거하려고 하였다. 즉 종래에 오로지 개인적 정감의 표현에 사용된 그림물감을 폐지하고 나무·쇠·금속·돌·글라스 등 시대의 요구와 민중의 생활에 밀착된 물질적 소재의 개발과 이들 새로운 소재를 가지고 공간 구성을 표현하려는 데에 그 특색이 있다. 이것은 퀴비슴에 있어서도 파피에 콜레와 콜라주의 기법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 시도되었던 것인데, 구성주의는 이러한 착안을 더욱 철저화한 것이다.

'현실의 사물을 현실의 공간에' 이것이 구성주의자의 모토이며 그 근저에는 단지 기법상의 모험에 그치지 않고 미술을 질적으로 전환시키려고 하는 의욕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이 주목된다. 1913년경부터 혁명 직전까지의 구성주의에 의한 부조 작품은 사물이 갖는 중후한 실재감을 대담한 구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새로운 공간의 탐구는 평면적 구성에서 필연적으로 입체적 구성으로 나아가서, 혁명 후의 유물적(唯物的)인 사상에 의하여 더욱더 새로운 환경의 구축에로 의욕을 가지게 하였다. 타틀린이 설계한 <제3 인터내셔널의 기념탑>(模型)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시세(時勢)의 작용도 있어 혁명 후의 구성주의는 예술을 한갓 기술로 대체하여 예술이 무(無)로 돌아가는 것도 불사한다고 하는 과격한 풍조가 생겨났다. 모스크바에서 구성주의의 대총합 전시회가 열렸던 1920년을 최종의 피크로, 그 해에 페브스너와 가보의 형제가 이 그룹을 이탈하고, 이윽고 소비에트 문화 지도이념의 전환으로 인하여 이 운동은 형식주의라 비판을 받아 러시아에서의 활동은 끝났다. 그러나 그 이념은 유럽에 전파되어 특히 독일의 바우하우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또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귀국한 칸딘스키도 1921년까지 이 운동에 참가하였다.

타틀린[편집]

Vladimir Evgrafovich Tatlin (1885∼1953)

구성주의의 기수였던 블라디미르 타틀린에 관해서는 그의 활약이 혁명 전후의 러시아 본국에 한정되어 있어서인지 그의 전기적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예술은 1914년 마테리알, 매스 및 콘스트럭션을 그 원칙으로 인정하였을 때에 이미 1917년의 사회혁명을 선취하고 있었다"고 말한 그는 목재와 금속 등 본래의 물질로 부조의 제작뿐만 아니고 혁명 후에는 노동복과 난로, 기념비나 글라이더의 설계까지 구성주의의 원칙에 따라 다방면으로 제작의 장르를 펼치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무릇 사물에 형태를 부여하는 행위는 모두가 예술인데, 이러한 주목되는 예술개념의 확대도 혁명 후 유물사상에 젖은 젊은 세대 및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전환한 미술정책이 용인하는 바가 되지 못하였다. 타틀린은 페트로그라드·키예프·모스크바 등지에서 일시적인 교육활동을 하였으나 고독하게 은퇴해 버렸다.

로드첸코[편집]

Alexandre Mikhailovich Rodchenko (1891∼1956)로드첸코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생했고 카잔의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로 나와 말레비치와 사귀어 한때 쉬프레마티슴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후 타틀린과 더불어 구성주의의 대표적인 작가로 활약하였으며, 그 자신도 비구상(非具象)의 조형에 대하여 별도로 독자적인 주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제작분야는 앞의 타틀린과 같이 다방면에 걸쳐 있지만 특히 실용적인 분야의 공헌은 컸다. 예를 들면 포토 몽타주의 수법도 그가 개척한 것이다.소비에트의 문화정책 전환 후는 오직 선전미술 및 각종의 디자인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1925년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 장식 공예전(工藝展)에 출품한 <노동자 그룹의 모형(模型)>은 건축과 실내장식의 분야에 있어서 그의 활약을 보여 주었던 것이며, 당시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데 스틸[편집]

De Stijl

양식(樣式)이란 뜻이다. 데 스틸은 1917년에 테오 반 도스부르크가 라이덴에서 결집한 그룹의 명칭인데, 1931년까지 같은 이름의 기관지를 발행하여 추상미술의 한 유파(流派)를 이루었다. 멤버로는 몬드리안, 반통겔루, 아우드, 리트벨트 등이 있으며 미래파의 세베리니, 쉬프레마티슴의 리시츠키, 조각가인 브랑쿠시도 한때 이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 운동은 주로 몬드리안과 도스부르크의 <데 스틸> 지(誌)에 발표한 논문과, 바우하우스에서 발행된 저서 및 유럽 각지에서 행한 강연 등으로 널리 보급되어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목적하는 바는 단순한 미술 창작의 분야만이 아니고 생활양식의 전반에 걸치는 예술의 총합적 혁신에 있었다. 기하학적인 선과 순수한 색채와의 몰개성적(沒個性的)인 관계에 기초를 둔 이 운동의 미학은 회화에 몬드리안과 도스부르크, 조각에는 반톤게를로, 건축에는 아우드, 실내장식과 가구에 리트펠드 등 이들이 각기의 분야에서 구체화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이 지향하는 총합(總合)은 너무나 유토피아적 성격인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실현되지 못하고, 그 이념은 오히려 독일의 바우하우스에게 계승되었다. 몬드리안은 1920년에 저서 <신조형주의(Neo Plasticism)>를 발표하여 데 스틸의 주장을 이론적으로 추진시키는 한편, 시각을 속이지 않는 수평·수직의 선분에 의하여 회화형식의 순화를 달성하여,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시조(始祖)로서의 길을 개척하였다. 도스부르크는 추상이야말로 가장 구체적인 현실을 표현하는 것이라 하여 기관지(機關誌)에서 '요소주의(要素主義)'의 선언을 하였으나, 그의 평면 분할의 수법은 몬드리안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리고 데 스틸의 네덜란드어(語)의 발음은 데 스타일이다. 또한 이상의 운동을 신조형주의란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몬드리안[편집]

Piet Mondrian (1872∼1944)

피에트 몬드리안은 네덜란드의 아머스포르트에서 출생했다. 초기의 그림은 인상파 및 아르누보의 영향하에 있었으며, 이 시기의 그는 암스테르담의 아카데미 야간에 다니고 있었다. 1907년 포비슴과 접하고, 이어 1912년부터 1914년까지 파리에 체재하면서 신인상파와 분석적 퀴비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퀴비슴의 영향은 결정적이며, 이 시기에 그려진 정물화의 시리즈에서는 대상을 그 기본형태에까지 환원하려는 의욕이 현저하다.

귀국 후에 그는 반 도스부르크와 더불어 라이덴에서 데 스틸의 그룹 및 같은 이름의 잡지로 퀴비슴 영향하에 발견하였던 기하학적인 순수 추상의 길을 제작에서나 이념에서나 심화하여 갔다. 플러스, 마이너스의 짧은 선의 집적(集積)이 타원형을 구성하여 가는 '콤퍼지션'을 시도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1919년 그는 재차 파리에 가서 1920년에 저서 <신조형주의(Neo Plasticism)>를 발표하여 스스로 자기의 이론적 입장을 명백하게 하였다. 이 무렵부터 제작도 한층 더 명확화하게 되고 순색의 사용과 수평·수직의 두 직선으로 단순하고 질서 있는 화면 구성을 하여 그의 독자적 스타일을 확립하였다. 그가 목표한 바는 자연에 길항하는 그리고 항시 불변한 리얼리티를 생산하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그는 센 강(江)이 바라다보이는 조망이 좋은 아틀리에에 있으면서도 종일 창문을 닫고 제작하였다고 하는 에피소드는 그러한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후 그는 독일과 영국으로 여행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에 이주하여 1944년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거기에서 제작한 <브로드웨이 부기우기>(1942∼1943)는 그 만년의 수작으로 유명하다. 그는 기하학적 추상의 시조이며 그 영향은 매우 크다.

도스부르크[편집]

Theo van Doesburg (1883∼1931)

테오 반 도스부르크는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부터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하고, 화가와 조각가로 제작을 하면서 이론가로서도 적극적으로 활약하였다. 초기에는 도미에에 쏠린 적도 있었으나 1917년 라이덴에서 데 스틸의 그룹을 만들고 동명의 기관지를 발행하였으며, 그는 실제 제작과 더불어 이론적 활동에도 종사하여 여러 곳에서 강연을 하면서 데 스틸 운동의 보급에 힘썼다. 저명한 논문으로는 '요소주의(엘리멘터리즘)'라고 제목을 붙인 선언으로, 자연의 구상성을 일체 배제한 기본적인 형태와 순색의 배합에 의해서 참다운 리얼리티를 창조하는 길을 설파하였다. 그의 작품은 몬드리안과 매우 비슷하고 분석적 퀴비슴을 궁극적으로 추진한 기하학적 추상으로서 평면의 분할에 그 특색을 볼 수 있다. 1931년 다보스에서 사망하였다.

바우하우스[편집]

Das Bauhaus

건축의 집이란 뜻이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바이마르에서 공립 미술학교와 공립 공업학교를 합병하고, 새로이 건축의 분야를 첨가하여 창립된 국립 종합 조형학교이며,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가 입안자이며 지도자가 되었다. 그 요람의 목적의 항(項)에는 '바우하우스는 모든 예술 창조를 하나로 결집하고, 모든 예술 부문-조각·회화·공예·수공을 새로운 건축의 긴밀한 구성 요소로서 재통일하는 데에 힘쓴다'라 하였다. 중세의 바우피테(교회 등 대건설의 현장에 만들어지는 각종 직인의 조합조직)에서 따 왔다고 하는 바우하우스에는 위의 건축을 바탕으로 총합적인 이념에 입각하여, 공방(工房)을 기본으로 독특한 연구 교육의 조직을 갖추어, 한 공방에서 형태와 실기의 연구지도가 일시에 진행되었다. 공방에는 벽화, 글라스화·판화·제도(製陶)·금속·직물 등이 있었고, 각 분야에는 칸딘스키, 클레, 파이닝거, 마르크스, 모홀리 나기, 무헤 등 전위 미술가가 형태의 연구지도를 담당하였다. 이들 지도자를 프로페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포름 마이스터(마이스터는 공방 스승이란 뜻)라 칭한 것도 미술과 손으로 하는 수공 사이에 본질적인 차별을 두지 않는 바우하우스의 새로운 교육 이념에 의한 것이다.

이리하여 바우하우스에서는 자칫하면 미술가의 자의(恣意)에 빠지기 쉬운 미술이 건축이라고 하는 실제적인 목적을 가짐으로써 합목적적으로 되살아날 수가 있고, 그 미적인 성과가 건축·공예·디자인 등으로 환원되어서 이들 분야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926년 바우하우스는 데사우로 이전하여 그 때까지의 표현주의적 이론에 새로이 합리적 기능적인 구성 이론을 첨가하고, 가구집기로부터 인쇄업무까지 취급하는 '바우하우스 유한회사'를 병설하여 국제양식센터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이 시기가 되면 바우하우스에서 배운 요제프 앨버스, 헤르베르트 바이어 등 젊은 세대가 교수진에 들어가게 된다. 바이어가 고안·디자인한 스틸 파이프제(製)의 의자는 바우하우스에서 수준의 척도를 표시해 주는 것으로 국제적인 평판을 받았다.

1928년 그로피우스가 지도적 지위를 사임하고 후계자로서 한네스 마이어가, 또한 1933년에는 미스 반 데르 로에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예술의 자유에 대한 나치스의 정치적 압력이 강화하게 되어, 바우하우스도 사학교(私學校)로 격하되고 베를린으로 옮겨졌으나 이윽고 폐쇄당해 버렸다. 그러나 그 이념은 현대미술의 여러 분야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1937년, 모홀리 나기는 그로피우스를 고문으로 추대하여 시카고에서 뉴 바우하우스를 설립, 그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미국에 전하였으며 이것이 훗날의 시카고 디자인 연구소이다.

파이닝거[편집]

Lyonel Feininger (1871∼1956)

그는 독일계(系) 이민의 가문으로 뉴욕에서 출생하였다. 1887년 독일로 유학, 함부르크 공예학교와 베를린 미술학교에서 배웠고, 처음에 그로테스크한 삽화를 그리는 소묘가(素描家)로 출발하였다. 그후 수차에 걸친 파리 체재 후 1906년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하여 파리의 전위(前衛) 회화와 접촉하면서 자기 자신의 양식을 모색해 갔다.

1911년 뮌헨의 '블라우에 라이터'파(派)에 가입하였으며, 이 시기에 퀴비슴과 오르피슴의 영향을 받아 그의 독특한 양식이 확립되었다. 그것은 프리즘의 분광(分光)이 결정(結晶)한 것과 같이 보이는 시가지·탑·다리·선박 등의 구축물의 표현인데, 교착하는 직선과 색면의 리드미컬한 구성은 추상과 구상의 개념적 구별을 지양하는 자율적인 화면을 만들어 냈다.

1919년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에 초청을 받아 판화의 공방(工房)을 담당하는 포름 마이스터로서 연구교육의 활동을 하였다. 또한 칸딘스키, 클레, 야우렌스키와 '청색의 네 사람'의 그룹을 만들어 상호간에 연구와 수련을 쌓았다. 1936년 나치스에게 추방당하여 미국으로 돌아왔으며, 만년의 작품은 특히 구성이 엄격한 것이 특색이다. 1956년 뉴욕에서 사망하였고, 그에게 붙여진 '독일 표현파의 거장(巨匠)'이란 찬사는 그의 작품과 더불어 미국의 젊은 화가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칸딘스키[편집]

Wassily Kandinsky (1866∼1944)

러시아 출신의 화가. 추상화의 창시자. 모스크바 출생. 1921년 모스크바 미술아카데미의 교수직을 버리고 조국을 이탈한 칸딘스키는 1922년 바우하우스의 포름 마이스터가 되었다. 그가 담당한 것은 벽화 공방이었는데, 이후 1911년 바우하우스가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나아가서 사학으로 격하되어 베를린으로 이전하고 1933년 정치적 압력으로 폐쇄당하는 날까지 계속 그 자리에 있었으며, 바우하우스의 말기에는 부교장의 자격으로서 널리 신망을 모았다고 전해진다. 바우하우스에서 강의록을 기초로 하여 1926년에 그의 제2 이론적 저작인 <점·선·면>이 출판되었다. 회화의 기초적인 평면에 대한 기본적인 조형요소의 관계에 대하여 기술한 것인데, 제1의 저작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칫 잘못하면 무미건조하게 되기 쉬운 조형의 기본적인 사고에 직관과 상상의 비합리적인 내용을 기술한 유니크한 저작이다.

당시 합리주의적 경향으로 나아가려던 바우하우스에 있어서 그와 같은 존재는 매우 귀중하였던 것이다. 바우하우스에서 배운 조각가 막스 빌은 '칸딘스키는 청년들의 의혹을 제거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확실한 판단력을 길러 주어, 끊임없는 비판과 자기 비판을 환기시킨 인물이었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그의 제작에 있어서 1910년부터 1920년에 걸치는 기간에는 색채와 형태의 격렬한 다이너미즘이 1920년에서 1924년에 이르는 시기에는 자취가 없어지고, 대신 명확한 형식에 의한 구축적인 콤퍼지션이 현저해진다. 이것은 모국에서 구성주의와 쉬프레마티슴을 체험한 성과이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는 이 경향이 더욱 순화되어 이른바 원(圓)의 시대에 들어간다. 1931년 그는 이집트·그리스·터키로 여행하여 동양의 풍물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으며, 이 여행에서 얻은 인상이 익어서 다채로운 형태 가운데에 동양의 여정(旅情)과 향수를 표현한 것은 1933년 파리에 이주한 뒤의 일이었다.

이 만년의 제작으로 그는 원의 시대의 기하학적인 추상을 탈피하고 형식과 색채에 의한 서정적 내지는 환상이 넘치는 음악적 해조(諧調)를 만드는 데에 성공하였다. 내면의 표출을 주안점으로 하는 추상의 이념은 이론적으로도, 실제적인 제작에서도 그에 의하여 기초가 닦여진 것이다. 1944년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클레[편집]

Paul Klee (1879∼1940)

그는 스위스 베른 근처인 뮌헨부후제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독일에서 이주한 주립 사범학교의 음악교사였고 모친은 젊었을 때에 가수를 지낸 적이 있었던 스위스 부인이었다.

클레는 그림보다 오히려 음악적인 환경에서 성장하여 7세 때부터 바이올린 교습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음악에 대한 애호는 평생 변하지 않아, 1906년에 결혼한 처 릴리이도 피아니스트였으며, 이들 부부는 곧잘 바흐나 모차르트, 베토벤의 만년 작품인 소나타 등을 듣고 또 연주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으며, 음악이 클레의 그림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라고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1899년 김나지움을 졸업한 클레는 화가수업을 위하여 뮌헨으로 가서 처음으로 크닐의 사숙(私塾)을 찾았고, 후에는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유겐트 시틸의 화가인 프란츠 시투크의 가르침을 받았다. 3년 후 그는 이탈리아로 연구 여행을 떠나서 제노바·나폴리·피렌체·로마 등지에 체재하였다. 그러나 이 여행의 수확은 고대 로마나 르네상스의 미술보다도 해항도시(海港都市)의 풍경과 나폴리 수족관의 풍물이었다. 내륙지방에서 자라온 그의 회화의 모티브로 배나 고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그 여행의 체험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1903년부터 동 6년까지 베른으로 돌아와 오로지 세기말적인 환상과 풍자에 입각한 에칭을 제작하였다.

1906년 재차 뮌헨으로 돌아간 클레는 당시 바야흐로 발흥의 기운이 움튼 표현주의의 분위기 속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마르크, 마케 쿠빈, 칸딘스키 등과 사귀어 이윽고 블라우에 라이터의 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의 제작은 흑백의 판화나 또는 단채(單彩)의 파스텔·수채·구아슈·템페라 등으로 한정되어 그 표현은 기괴하고 환상적인 소묘가(素描家) 알프레트 쿠빈(1877∼1959)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 흑백 또는 단채에 의한 대상의 도식화를 통하여 그는 '예술이란 눈에 보이는 것의 재현은 아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라는 신념을 굳혀 갔다.

1914년 그는 북아프리카의 튀니스와 카이루안으로 여행을 하여 그 아열대의 풍토에서 색채에 눈뜬다. '빛깔이 나를 갖는다. 나와 색은 일체이다. 나는 화가이다'라고 자각한 바를 일기에 적은 것도 그 때의 일이며, 1919년 이후 이러한 자각은 유니크하게 실현되어 간다. 1920년 비평가 레오폴트 츠안 및 빌헬름 하우젠시타인 등이 맨 처음으로 비평을 발표하였다. 일찍이 아동화의 모방이라 냉소를 받은 클레의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몰락의 위기에 허덕이던 유럽문화의 전통에 색다르게 청신한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것으로 기대되었던 것이다. '화가가 일찍이 현상계에서 정신계로 가지고 가버린 것을 반대로 정신계에서 현상계로 돌이키려고 한다'라는 클레의 독특한 추상에 대한 사고가 시대의 지지를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1921년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에 초대를 받은 클레는 글라스화(畵)의 공방을 담당하여 후진을 지도하는 한편, 파이닝거와 칸딘스키를 이 곳에서 재회하여 활발한 제작 활동을 하였다.

<자연연구의 길>과 <교육적 스케치북> 등 이론적인 저술도 바우하우스에서의 활동을 통하여 정리되었다. 1930년 뒤셀도르프 미술학교로 자리를 옮긴 클레는 이윽고 나치스에 의하여 자유가 박탈되어 가던 독일에서 추방되어 1933년 베른으로 돌아온다.

클레의 평생을 통한 작품은 9천 점이란 다수에 이른다. 베른에 돌아온 후에도 제작욕은 왕성하였고 만년에는 독특한 천사의 상이 눈에 많이 띈다. 그의 단순한 표현은 형태 그것보다도 형태를 만드는 일을 주안점으로 한 것이며, 보는 자로 하여금 그 형성의 과정을 좇아 체험하여 가는 것을 그는 바랐던 것이다. 1940년 무랄토 로카르노에서 사망.

모홀리 나기[편집]

Ladislaus Moholy­Nagy (1895∼1946)

헝가리 출생. 처음에는 법률가가 되려고 하였으나 1915년 미술로 전환하여 1917년 러시아의 구성주의 및 말레비치의 영향을 받았다. 1920년에 베를린으로 이주하였고 이 시기의 그의 작품에는 몬드리안의 영향을 볼 수 있다. 1923년 바우하우스에 초대되어 1928년까지 이 곳에서 연구와 교육에 종사하였다. 구성주의에서 신조형주의의 흐름에 따른 그의 합리적인 이론과 제작은 표현주의를 기조로 하여 출발한 바우하우스의 체질을 개조하는 데 강력한 힘이었다. 원래 그는 새로운 소재에 대하여 끝없는 욕망을 일으켜, 타블로 회화에 만족하지 않고 금속을 사용한 조형적인 실험을 시도하는가 하면, 그 성과를 새로운 사진의 수법과 결합하여 선전미술과 인쇄에 응용하는 등, 장르를 초월하여 새로운 표현 영역을 확대하였다. 평면 및 입체의 기하학·역학·광학 등 그의 탐구는 4차원의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는 화가라든가 조각가라는 종래의 개념으로 분류될 수 있는 예술가가 아니라, 미술의 모든 장르에 창조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조형가였다. 예를 들면 바우하우스의 그래픽 공방에서 참신하며 구성적인 레이아웃이나 디스플레이를 초래한 최초의 공적자는 그였다. 그는 또 그로피우스를 도와 바우하우스 총서의 출판 사업에도 공헌하였다.

바우하우스를 떠나 1933년까지 그는 주로 베를린에 정주하였으나 독일의 국내 정세가 긴박하게 되자 런던으로 이주하고, 1937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시민권을 획득했다. 그 해에 그는 그로피우스를 고문으로 추대하여 시카고에서 뉴 바우하우스를 설립,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미국에 전하였으며, 1946년 시카고에서 사망하였다.

압스트락숑 크레아숑[편집]

Abstraction­Creation 抽象創造派압스트락숑 크레아숑은 1932년에 파리에서 결성된 추상미술가의 그룹을 말한다. 그 멤버는 칸딘스키, 몬드리안, 들로네, 글레즈, 반톤게를로, 곤잘레스, 브랑쿠시, 모홀리 나기, 카르더, 벤 니콜슨, 가보, 페브스너 등이며, 이것은 당시 융성하고 있던 쉬르레알리슴에 대항하여 추상미술가의 대동 단결을 절규한 것인데 한때는 400명의 미술가를 집결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기관지인 <추상·창조·비구상 예술>을 발행하여 활발하게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연적으로 해소되어 버렸다. 위기적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단기간의 운동이기도 하였으나 추상미술가를 국제적인 규모인 일파로 집결한 이 그룹의 의의는 크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