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17∼18세기의 미술/17∼18세기의 이탈리아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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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건축[편집]

17∼18세기의 건축[편집]

이 시대의 건축은 르네상스에 흡수된 고대건축의 여러 부분, 즉 도리아식(式)·이오니아식·코린트식 등의 주식(柱式), 주름 모양의 처마, 아치, 박공의 형식 등을 짝지어, 거기에 만들어진 공간과 여러 부분과의 극히 유기적인 통일감에 특히 그 특징이 나타나 있다. 그때 천장에 그려진 회화, 제단의 조각 등이 건축과 일체가 되어 유동적인 공간을 만드나 그것에는 르네상스 이래 극도로 발달된 원근법(遠近法)과 입사광선(入射光線)을 교묘하게 이용한 조명효과, 또는 시각을 혼란시키는 묘사법 등의 기교에 의한 회화·조각·공예를 건축과 결부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건축은 착시효과까지도 이용한 복잡한 내부공간을 엮어낸다. 그때까지의 건축에 있어서와 같이 기능과 구조가 한눈으로 알 수 있는 단순한 공간은 아니나, 거기에는 감각기능을 자극하는 뚜렷한 표현효과가 있다. 가령 로마의 산티냐치오 성당을 볼 것 같으면 승천(昇天)하는 성 이그나티오스를 그린 포초의 천장 프레스코가 당내(堂內)의 정해진 한 점에 세워지면 원근법의 교묘한 효과로써 머리 위의 천사들이 춤추는 천공(天空)이 열리는 듯한 환상을 자아낸다. 그것은 어디까지가 건축의 벽체(壁體)이고, 어디까지가 조각이고, 어디서부터 그림이 시작되는가를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기교적 착시효과(錯視效果)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또 그것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성당 내에 장엄한 파이프 오르간이 울려퍼지고, 흔들리는 촛불과 자욱한 향연 속에 장중한 미사가 행해질 때, 미사에 참석한 신자들과 더불어 당내는 바로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화하는 것이다.

반종교개혁과 예술[편집]

反宗敎改革-藝術

16세기 이래 알프스 이북의 북·중구(北·中歐)의 각국을 피비린내 나는 혼란 속으로 빠뜨린 종교 개혁 운동은, 성서를 중심으로 한 신앙에 대한 결벽성으로 해서 카톨릭의 성당과 그 전례(典禮)가 갖는 형식적인 요소를 배제한 결과 르네상스의 성과인 예술이 충분히 육성될 수가 없었다(17세기의 네덜란드 회화와 18세의 독일의 바하는 예외에 가까우며, 그 내용은 특수한 것이었다). 그에 대해 예수회를 대표하는 반종교개혁의 세력은 왕후귀족에게 필요한 권력을 과시하는 데 있어서나 민중의 호기심을 유도하는 데 있어서 어쨌든 폭넓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각과 관능을 통하여서라도 끌어당기는 힘을 예술에 요구하고, 예술은 그에 응한 것이다. 그러므로 17세기의 바로크 예술을 카톨릭 교회의 승리의 증거라고 보는 것도 아주 그릇된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이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난 것이 회화·조각·공예의 유기적 통합체가 된 이 건축, 즉 첫째로는 성당이고, 다음으로 권력을 과시하는 왕궁 건축이었다. 시민 건축이 문제가 된 것도 18세기에 들어선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건축의 외부공간으로서의 도시의 가로(街路), 특히 광장을 가로의 매듭점으로 만들고, 또는 계단에 의해 도시 전체를 바로크적으로 형성하며, 또 건축물과 주위의 자연과의 조화를 고려에 넣게 된 것도 이 시대부터이다.

이탈리아 예수회 성당 형식·이르 제스[편집]

실생활과 차원이 다른 종교건축은 이 시대에도 새로운 경향을 우선 반영한다. 그러나 그 맹아는 마니에리슴의 예술 속에 이미 산재하여 있었다. 이 대표적인 예는 로마의 이르 제스 성당(1568∼1584)이다. 비뇰라 설계의 신랑부(身廊部)의 기본 플랜은 중세 이래의 라틴 십자형이나 그 양쪽 부분을 축소시켰기 때문에 바실리카 형식에 가깝다.

그리고 측랑(側廊)을 폐하고 일련의 제실(祭室)이 신랑쪽으로 열려 있을 뿐이다. 중세의 성당이 예배당의 집합체인 것 같은 성격에 비하면 이 형식에는 주제단(主祭壇)과 거기에서 행해지는 미사에 신자의 관심을 집중시키려는 의도가 명백한 것이다. 이 단순하고 명확한 구성은 토렌토 공회의(公會議) 후의 반종교 개혁기의 엄격한 정신 아래 만들어졌음을 알려 주나, 17세기 말에 가우리에 의한 호화로운 천장 프레스코를 위시하여, 내부에 화려한 장식이 시공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파사드는 쟈코모 델라 포르타에 의해 완성되었으나 마니에리스틱한 한쌍으로 된 부착주(附著柱)를 반복하며 중앙부에 장식적 모티프를 집중케 하고 또 좌우 상부에 커다란 소용돌이 모양의 장식을 부착시켰다. 반종교 개혁운동의 중심 세력이 된 예수회 본부인 이르 제스 성당 형식의 영향력은 절대적인 것으로 얼마 안가 세계 각지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면서 유사한 성당을 낳게 했다.

카를로 마데르노와 산 피에트로 대성당[편집]

-大聖堂여기서 새시대의 경향을 불어넣은 것은 카를로 마데르노(1556-1629)이다. 산타 수잔나 성당(1603년)은 중앙부에 단(段)을 이루며 접근되어 있는 코니스와 4분의 3 원주를 조성하는 것으로써 비로소 바로크적인 힘찬 리듬을 낳았다. 산 안드레아 델라 바레 성당의 도움도 그의 걸작이다. 카톨릭의 총본산 산 피에트로의 건축을 계승한 마데르노는 미켈란젤로 원안(原案)의 대원개(大圓蓋)를 얹고 있는 집중식 회당(集中式會堂)의 한 쪽을 길게 뽑아서, 그것을 네이브로 하는 라틴 십자형 설계로 바꾸고, 그 전방에 네이브보다 폭이 넓은 파사드를 설치하였다. 2층을 꿰뚫는 거대한 원주는 중앙으로 향해 간격을 바꾸면서 접근되어 역동감(力動感)을 높이고, 두꺼운 애틱의 수평선과 장중한 힘의 균형을 보여준다.

전성기 바로크 건축의 세 거장[편집]

마데르노의 사후(死後)에 베르니니, 보로미니, 코르토나 등 세 사람의 예술가가 바로크 건축의 전성기를 이루어 놓았다. 그것은 교황 우르바누스 8세 이후의 현란한 바로크 미술의 개화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코르토나[편집]

Cortona, Pietro da(1596∼1669)

에트로 다 코르토나는 이탈리아의 화가로서도 이 시기의 대표자이나 건축가로서는 산타 마리아 델 라파체 성당(1656∼57), 바로크적인 최초의 정원으로 알려진 빌라 델 피네트(1626∼1636, 현재는 파괴되어 없다)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산타 마리아 델라파체의 파사드에서는 하부가 반원형으로 돌출되어 강한 음영(陰影)을 이루고 좌우 양익(兩翼)은 요면(凹面)을 이루며 크게 양쪽으로 뻗는 역동적 구성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세 갈래로 된 곳에 세워진 이 회당 앞에 작은 광장을 만들어 파사드의 효과를 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하고 있다.

베르니니[편집]

Bernini, Giovanni Lorenzo (1598∼1680)

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 르네상스의 미켈란젤로와 견주는 대조각가이며, 또한 화가로서도 뛰어났던 베르니니가 본격적인 건축가로서 등장하는 것은 1650년대 이후이나 그 이전에 산 피에트로의 대원개(大圓蓋) 아래에 높이 28.5m의 청동으로 된 <발다키노(天蓋가 붙은 祭壇)>(1624∼33)를 설치하여, 초인간적인 규모를 가진 대성당의 내부공간에 인간적인 친근미를 부여하려고 하고 있다.

후년 다시 뒤편 끝에 금색으로 빛나는 <베드로 사교좌(司敎座)>(1656∼1667)를 만들고, 대성당에 들어온 신자는 청동색의 발다키노를 통해서 사교좌(司敎座)의 화려한 곡선과 색채가 엮어내는 신랑(身廊)의 투시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보다 상위의 걸작으로는 산 피에트로 광장이 있다. 도메니코 폰타나(1543∼1607)가 건설중이던 산 피에트로 앞의 광장에 베르니니는 성당 파사드로부터 전방에서 끝이 오므라든 날개 부분을 뻗어, 거기에서 네 줄의 도리아식(式) 원주의 회랑(回廊)을 넓혀 옆으로 긴 타원상(350m×240)으로 광장을 둘러싼다. 광장에 모여 교황의 축복을 받는 신자들은 회랑(回廊)을 타원이 아니고 원으로, 파사드 앞의 날개부분의 대형(臺形)의 공간을 장방형으로 잘못 알기 쉬우며, 회랑(回廊)의 웅대함과 그로부터 생기는 착시효과도 곁들여서 이 광장은 생생한 공간으로 보인다. 이것은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위용에 알맞은 것일 뿐 아니라, 광장 공간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성당 건축의 대표작으로서 산 안드레아 알 쿠이리날레(1658∼1660)가 있고 세속 건축으로서는 마데르노의 일을 계승한 바르베리니 궁전의 파사드와 타원형의 나선상 계단인 키지 오데스칼키 궁전(1665) 등이 있다.

보로미니[편집]

Borromini, Francesco(1599∼1667)

이탈리아의 건축가. 베르니니의 다채로운 조형력과 고전적인 균형감에 대하여 보로미니의 건축은 신경증적(神經症的)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형성의 독창성에 있어서 가장 바로크적인 특질을 발휘하고 있다. 산 카를로 알레 쿠아트로 폰타네 성당(1638∼1641)은 정삼각형을 합친 마름모꼴 플랜의 세 모서리에 타원형의 감실(龕室)을 만들고, 감실의 격자천장(格子天障)과 타원형 돔의, 벌집과 같은 기하학적 무늬를 교묘히 감축(減縮)시켜 감실과 돔의 깊이를 착시에 의해 불명확한 것으로 하고 있다.

이에 의해 불안정하나 감각적으로는 풍부한 자극을 주는 공간이 성립된 것이다.

만년(晩年)에 건조된 그의 파사드(1667)도 요철(凹凸)의 불규칙한 리듬에 의해 불가사의한 관능성을 띠고 있다. 산 티보 엘라 사피엔차성당에 육릉(六綾)의 별모양(星型) 플랜을 기초로 하여 라테르나(頂塔)까지 커브를 그려 감축케 한 변칙적 돔을 만들었다. 그 파사드는 르네상스의 중정(中庭) 회랑의 일부로서 일견 요(凹)면의 커브를 갖는 것만 같은데 그 상부의 돔은 기묘한 나선형이 라테르나에 달함으로써 시각적으로 느끼게 하는 심리적 효과에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그보다도 더욱 환상적인 라테르나의 형체는 미완성인 채 끝난 산 안드레아 델레 프라테(1654∼1665)가 있고 그 밖에, 산 타뉴세(1653∼1657)의 피사드, 또는 필리포 네리 예배소(1637∼1642), 프로파간다 피데(1660년경) 등 감능적(感能的)이라고도 할 곡면(曲面)을 응용한 대담성과 섬세함이 교착되는 구상 아래 베르니니에 필적하는 위대한 예술을 만들어 냈다. 보로미니의 건축은 구아리니에게 계승되어 18세기의 남독일(南獨逸)과 오스트리아의 건축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기타 건축가[편집]

其他建築家

이들 3인의 거장에 이어 산타 마리아 인 칸피테리 성당(1657)의 작자 카를로 라이나르디(1611∼1691), 또는 베네치아의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1630∼1687)과 페사로 궁전의 작자 알렉산드로 론게나(1598∼1682)등이 중요한 건축가이며, 그 이외에는 특히 로마에서 17세기 후반부터는 거장들의 아카데믹한 형식의 반복만으로 시종하였다.

구아리니[편집]

Guarini, Guarino (1624∼1683)

이탈리아의 건축가·성직자·수학자·신학자. 구아리노 구아리니는 보로미니의 건축이 지니고 있는 마술적인 표현력을 계속 발전시켜, 이탈리아에 있어서의 다이내믹한 바로크 건축을 클라이맥스에 오르게 하였다. 토리노의 산타 신도네 교회(1667∼90)에서는 원(圓)에 내접(內接)하는 여섯 개씩의 아치가 겹쳐 위로 올라감에 따라 점차로 축소되어 라테르나에 달하나 각 소(小)아치의 작은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광선효과와 아치의 기하학적인 중첩(重疊)은 무한성(無限性)을 암시하기에 충분하였다.

산 로렌초 성당(1668∼1687), 인마그라타 성당(1672∼1697)과 카리냐노 궁전(1679∼1692)도, 리스본이나 파리에서의 그의 작품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작풍(作風)을 아는 귀중한 예이다.

18세기의 건축[편집]

18세기에는 로마의 라구치니 작(作)의 산타 마리아 케르치아 성당(1727), 산타 마리아 인제르 사렌메 성당에서 로코코적인 작풍(作風)이 감지될 수 있다. 로마 이외에는 구아리니의 영향을 받은 토리노의 베르나르도 바이토네(1704∼1770)의 산타 키아라 인 브라 성당(1742)이 있고, 교외의 스케유피니지 궁전의 작자로서 국제적으로 활약한 필리포 쥬바라(1678∼1736)가 라 스페르카 성당(1717∼31)에서는 세련된 형체 가운데 이미 신고전주의적(新古典主義的)이 간결성을 표현하고 있다.

한편 남쪽의 나폴리나 시칠리아, 레체에서는 에스파냐의 바로크와 공통되는 지나친 장식의 건축이 세워지고 있었다.

도시계획[편집]

都市計劃

바로크 건축가는 내부공간의 형성에 가장 큰 공헌을 하였으나 외부공간에 관해서도 파사드의 강조에 그치지 않고 가로(街路)나 광장에 새로운 의욕이 엿보인다. 그 중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교황 시크스투스 5세의 로마시(市) 계획이다. 그것은 시내의 7개의 성지(聖地)를 직선도로로 연결하여 로마를 성지화(聖地化)하는 것으로서, 성지의 광장에는 샘이나 오벨리스크로 액센트를 주며, 도로는 넓은 마차도(馬車道)로 하고, 콜로세움도 실업자용의 융단공장으로 변경될 예정이었다.

광장은 특히 바로크 도시의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 전술한 산 피에트로 광장 외에 고대 경기장(古代競技場)의 토지구획을 이용한 나보나 광장은 베르니니의 <하신(河神)들의 샘>(1647∼1652)과 보로미니의 산 타뉴세 성당 파사드에서 그 형태를 정돈하고 있다.

쌍동이와 같이 생긴 소(小)성당이 병립(竝立)되어 있는 포폴로 광장도 이 시대에 기초가 이루어졌다.

반짝이며 흐르는 물은 바로크에 꼭 들어맞는 것으로 광장은 이 물과 군상조각(群像彫刻)에 의해 생기가 감돌고 있다. 베르니니가 세운 또하나의 샘터 <토리토네>(1640), 사르비에 의하여 세워진 <트레비 샘>(1732∼1665)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바로크 건축과 계단[편집]

-建築-階段

계단은 움직이는 것에 의해 변화하는 공간구성의 묘미(妙味)에 있어서 바로크 건축가의 흥미를 끌었다. 16세기의 에스파냐 건축에서 그 싹을 볼 수 있으나 베르니니는 바르베리니 궁전에서 타원의 선회계단(旋回階段)을 만들었으며, 산 피에트로와 바티칸 궁전을 잇는 스칼라 레지나(1663∼1666)에서는 위로 올라감에 따라 원근법에 기초하여 축소된 아치를 배설(配設)하고 그것에 광선이 비쳐 들어온다. 구아리니의 카리냐노 궁전도 명암의 리듬을 고려하여 돌면서 2층에 달하게 된다. 에스파냐 광장(1728)도 도시공간의 훌륭한 악센트가 되어 있다. 그러나 계단실(階段室)이 특히 발달되 있는 것은 18세기 독일의 건축가 노이만의 브루후잘 궁전과 브륄 궁전이다.

이탈리아의 회화[편집]

바로크 회화[편집]

-繪畵

16세기의 마니에리슴에 있어서 지적(知的)인 편중은 복잡한 우의(寓意)를 즐겨 쓰기도 하여 그의 호기심과 유희성(遊戱性)은 환상적이기도 하고 에로틱하기도 한 작품을 만들어 세련된 유미주의(唯美主義)에 의해 귀족과 일부 지식계급의 주목을 끌었으나 과연 어느 정도로 대중의 심리를 파고들 수가 있었는가는 의문이다. 이에 대해 17세기의 이탈리아 회화는 카라바조의 사실주의와 카라치의 아카데미즘을 두개의 축(軸)으로 하여 출발하나 이 양자가 모두 현실성과 감각성의 다과(多寡) 여하로 마니에리슴 회화와 구분되고 있다. 특히 종교화에 있어서는 반종교 개혁시대의 카톨릭 체제를 정비하는 토렌토 공회의(公會議)의 결정에 따라서 의문나는 전설이나 출처 불명(出處不明)의 주제를 배제하였다. 마리아 숭배, 성(聖) 베드로 숭배, 새로운 성인(聖人)이나 순교자 숭배 등이 즐겨 묘사되고 있는 것이나 주제는 단순·명확해지고, 또한 종종 격렬한 감정표현을 그려내고 있다. 묘사법상(描寫法上)으로 보아도 화면의 세부까지 균등한 강도(强度)로 그리는 것이 아니고, 주제의 명확을 위해 세부는 생략되는 수가 있다. 보는 사람의 감각이나 감정에 직접 호소하는 만큼 대중의 마음을 끄는 힘도 크다.

비종교화(非宗敎畵), 특히 궁전의 장식화 등속은 르네상스 이래의 고전신화가 역시 제재(題材)로 환영을 받으나, 거기에는 강한 현실감이 있어, 그 화려함은 왕후(王侯)들의 권세의 표현으로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신파조의 과장된 몸짓, 과장된 표정, 그리고 언제나 현란한 감각을 자극하는 이 예술은 표현의 배후(背後)에 있는 그러한 정열의 진실성이 상실되었을 때에는 큰 소리로 과장할 뿐 실은 텅 빈 한 형해(形骸)만 남을 위험성도 크다. 물론 그러한 작품도 적지는 않으나 인간의 감각과 정서가 이와 같이 개방된 적은 그때까지는 없었다는 것도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르네상스 이래, 고전 고대의 그리스 로마라기보다는 순수한 그리스 미술을 모르기 때문에 특히 로마미술을 미의 이상으로 하여, 사실이 전제가 되면서도 자연으로부터 아름다운 형체를 선택하여 이상미를 창출하는 것이 중세적인 교양있는 화가의 할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볼로냐파(波)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론의 주장도 그러하였기 때문에, 노골적인 사실보다는 이상미에 치우치기 쉬운 화가도 적지 않았다.

이 시대의 고전주의가 그것에 해당된다. 이상미는 또 틀에 박힌 것이 되기 쉬워, 여기에서부터 생기가 없는 아카데미즘이 퍼져간다.

카라바조[편집]

Caravaggio, Michelangelo da (1571∼1610)이탈리아의 화가. 마니에리슴의 지적·유미적 예술은 카라바조(본명 미켈란젤로 메리시)에 의해서 충격을 받았다. 그는 북이탈리아의 밀라노 근교에서 태어났다. 1590년 전후에는 로마로 나가 극히 사실적인 정물화(밀라노 암브로시아나 미술관)나 바쿠스(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등을 그렸으나, 1590년대의 후반에는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을 위해 혁명적 작품을 제작하였다. 특히 <성(聖) 마테오의 초대> <성 마테오의 순교>에서는 그리스도나 사도(使徒)를, 하층사회의 인간을 모델로 하여 추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그렸다. 거기에다 강한 측면광선(側面光線)을 주어, 그 명암의 격렬한 대조에 의해 극적이며 현실보다 높은 차원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것은 미를 찾는 세계에서는 얻을 수 없는 정신적인 표현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오만불손하고 격하기 쉬운 기질을 가진 카라바조는 살인자로, 만년을 남부 이탈리아를 방랑하며 짧은 생애를 마쳤으나 로마 시대 최후의 <성모의 죽음>(1606, 파리 루브르 미술관)과 방랑 시절의 작품 <그리스도 탄생>(1608년경, 메시나 국립미술관) 등에서는 침울한 표현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카라바조파[편집]

카라바조에서 받은 영향은 그가 로마를 떠난 1607년경에서 1620년경까지, 그 고장에 있으면서 강한 명암의 대비 때문에 테니브러스(tenebrous=暗黑派)라고 불리던 화가들에게 그 자취가 가장 뚜렷이 남아 있어 그 중 독일인 엘스하이머, 프랑스인 발랭탱, 네덜란드인 테르브르흐·혼토르스트 등이 1620년 전후까지 알프스 북쪽에 이 화풍을 이식(移植)하였다. 이것이 그렇게 급속하게 보급될 수 있었언 것은 카라바조의 예술이 불러일으킨 미학이 기성(旣成)의 미학으로부터 반발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못지않게 젊은 예술가들이 품고 있던 열렬한 찬동(贊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이탈리아인으로서는 로마에 있던 만프레디(1580∼1620), 사라체니(1585∼1652) 특히, 오라치오 젠틸레스키(1565∼1638) 등이 직접 이 화풍을 계승하였다.

나폴리파[편집]

카라바조가 만년에 작품활동을 한 나폴리의 조반니 바티스타 카라치올로(1570∼1637)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나, 에스파냐의 후세페 리베라(1588∼1652)는 이곳에 살면서 카라바조의 종교적인 리얼리즘과 조명법(照明法)을 다소 통속화(通俗化)시키면서도 가장 잘 계승하고 있는 사람이다.

17세기 중기 이후 카라바시슴은 볼로냐파(派) 등을 수용해 보다 복잡한 기교를 쓰고, 또한 카라바시슴도 회화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로 되어 누구에게나 이용되게 되는데, 마티아 프레티(1613∼1699), 루카 조르다노(1632∼1705) 등 대화면(大畵面)의 장식가(裝飾家)도 그 유파를 좇았다. 리베라의 영향을 받아 보다 로맨틱한 점에서 주목을 받은 것이 사르바토르 로사(1615∼1673)이다.

반보치아테[편집]

Vanbocciate

1628년에 로마에 온 네덜란드인 반 데르 라르는 반보치오라고 불리고, 체르쿠오치와 더불어 네덜란드류(流)의 서민적인 소폭(小幅)의 풍속화를 그려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여기에서는 카라바조에서 볼 수 있었던 불순종의 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

카라치[편집]

Carracci

카라바조의 사실주의와 함께 이 세기의 주축이 된 것은 볼로냐파(派)의 절충주의(折衷主義)이다. 로도비코 카라치(1555∼1619)와 그의 사촌 안니발레(1560∼1609), 아고스티노(1557∼1602) 등은 1585년 볼로냐에 미술학원을 설립하고, 회화의 역사, 이론, 실기해부학, 원근법 등을 주지적으로 가르쳤다. 그들은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코레조 등 각자의 장점을 절충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였다. 그러나 너무 이론에 구애되어 생명력이 없는 아카데미즘으로 빠지기 쉬운 점이 유파의 약점이었다. 그러나 1590년대에 로마의 파르세 네궁전의 장식을 맡은 안니발레는 가장 재능이 뛰어나 현실감을 잃지 않은 신화화(神話畵)를 그렸다. 또 <누에콩을 먹는 사람>에서는 철저한 사실주의를, <이집트로의 도피>에서는 고전주의적 질서와 서정성을 나타내고 있다.

볼로냐파의 화가[편집]

-派-畵家

토렌토 공회의 후의 새로운 종교도상 형성에 이 일파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으며, 제자도 많았으나 그 중 고전적인 엄격함을 지녔던 도메니키노(1581∼1641), 우아함을 지녔던 기도 레니(1575∼1642)와 바로크적 정열을 잃지 않았던 게르치노(1591∼1661) 등이 주목을 받았다. 그들은 19세기까지 아카데미즘의 본보기가 되어 갔다.

바로크 대장식화[편집]

-大裝飾畵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를 통해서 궁전과 성당의 벽이나 천장에 큰 구도의 그림이 그려졌다. 신화나 종교화에 원근법과 인물의 단축법을 자유로이 이용하여 벽과 천장이 그대로 하늘과 천국의 광경을 연상케 하는 환각적 수법을 쓰고 있다. 볼로냐파(派)의 기도 레니의 로스필리오시 궁전, 게르치노의 루드비시 저택뿐만 아니라 건축가이기도 한 피에트로다 코르토나의 바르베리니 궁전, 가우리(통칭 바치치오, 1639∼1709)의 예수 성당, 포치오(1642∼1709)의 산 티냐치오 성당의 천장화 등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포치오는 알프스의 북방에도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지방의 화가[편집]

地方-畵家

도시국가의 전통이 강한 이탈리아 각지에서는 나폴리파(派) 이외에도 로마로부터 독립하여 있는 화가들이 적지 않았다. 피렌체의 카를로 도르치, 볼로냐의 사소페라토는 종교화로, 베르가모의 바스케니스는 정물화로, 루벤스, 반 다이크가 체재하였던 제노바의 스트로치는 북방(北方) 바로크의 자극을 받은 종교화나 풍속화로, 비첸차의 마페이는 색채의 아름다움으로 각각 알려져 있었다. 또한 로마에서는 프랑스인 푸생과 로랭이 고전주의를 창달시켰고 나폴리에는 환상적인 건축 풍경화가 몬스 데미데리오가 있었다.

18세기로의 매개[편집]

-媒介

17세기 말기로부터 필치(筆致)의 경쾌함이 증대되어 마침내 밝고 경묘(輕妙)한 로코코 시대를 맞는데 그 중개 역할을 행한 몇 사람의 화가가 있다. 볼로냐의 G.마리아 크레스피(1664∼1747), 알렉산드로 마냐스코(1667∼1749), 베네치아의 세바스티아노 리치(1659∼1734) 등으로, 특히 마냐스코는 풍자적 주제를 격렬한 필치로 페시미스틱하게 표현하였다.

18세기의 베네치아파[편집]

안토니오 카나르카날레토 1697∼1768), 프란체스코 그와르디(1712∼1793), 바티스타 티에폴로(1696∼1770) 등을 낳은 이 세기의 베네치아파(派)는 다시금 황금시대를 맞게 된다. 소인물(小人物)이 점재(點在)하는 극명한 시가도(市街圖)를 취급하는 화가 카날레토는 영국에서, 티에폴로는 독일과 에스파냐에서도 활약한 대장식가이다. 그와르디는 인상주의적인 필치로 수향(水鄕)을 경쾌하게 그려 내었다.

신고전주의로의 이행[편집]

新古典主義-移行 18세기 후반에는 신고전주의가 국제적으로 유행하나 무수한 고대유적을 간직하고 있는 로마는 판니니와 바토니가 있어 그 경향을 촉진시키고 있었으나 다수 외국인 가운데에 고대 미술사가(古代美術史家) 빈켈만의 이상의 보급자가 되었던 안톤 라파엘 멩스(1728∼1779)도 있었다. 프랑스의 루이 다비드도 이곳에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그렸다.

고대 미술의 고취자(鼓吹者)인 동판화가(銅版畵家)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1720∼1778)도 이곳에 살고 있었다. 그의 일련의 작품 <감옥(監獄)>은 신고전주의를

뛰어 넘어서 낭만주의에 접근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조각[편집]

이탈리아의 조각[편집]

-彫刻

르네상스 이래 조형미술은 그리스 로마 예술을 본으로 해 왔으나 조각에서는 특히 그 경향이 강했었다. 그것도 헬레니즘 시대의

<라오콘> 등이 전대 못지않게 많이 연구되고 모방되었다. 조각은 거의 인간상(人間像)이며, 인간의 영혼을 표현하는 내용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은 얼굴의 표정과 몸짓에 의해서 표현할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격렬한 정열과 감정을 전하기 위해 극단적인 표정이나 동작으로 표현되었다.

또한 건축의 내부공간의 극적인 형성에 관해서는 회화와 마찬가지로 조각도 그 일익(一翼)을 담당하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바로크 조각의 천재는 베르니니이다. <아폴론과 다프네>(보르게제 미술관)와 같은 고전적으로 세련된 형체, 그러나 전 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훌륭한 유동감(流動感)과 관능성(官能性)을 갖는 작품에 있어서도, <시피오네 보르게제 추기경>(보르게제 미술관)과 같이 생생하게 말을 건네올 듯이 보이는 초상(肖像) 조각에 있어서도, 또한 전술한 <바르다키노>의 건축적인 조각에서도, 또 광장과 샘터의 조각에 있어서도 이 시대의 대표작이 만들어졌다.

<베드로의 사교좌(司敎座)>에서는, 외광(外光)을 배경으로 정령(精靈)인 비둘기에서 광선이 사방으로 퍼지게 빛의 화살을 만들고, 산타 마리아 인 빅토리아 성당 내 <황홀한 성 테레사>에서는 외광을 가려서 천상(天上)으로부터 오는 신비한 빛으로 생각되도록 한 그 빛에 의해 조상(彫像)을 비추어 주는 착시적 수법을 쓰고 있다. 이 그림 중의 성녀(聖女)는 관능적이라고도 할 법열(法悅)에 젖어, 몸의 선이나 모양이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운 자세로 된 전형적인 바로크 조각의 특징과 베르니니의 천재성을 아울러 알 수 있다.

기타 조각가[편집]

其他彫刻家

베르니니 외에도 로마에는 마니에리슴을 더욱더 세련시킨 F. 모키(1580∼1654), 고전적 경향을 엿보이게 하는 알가르디(1595∼1654), 보다 고전적인 벨기에의 뒤케느와(1594∼1643) 등이 있다.

다수의 다른 조각가들은 베르니니의 초인적(超人的)인 경향력으로부터 거의 자립하지 못한 채로 신고전주의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다만 나폴리에서는 코라다니(1668∼1752), 퀘이로로(1704∼1762) 등이 보다 일류저니스틱한 작풍을 전개하여, 회화와 공예와의 한계를 용해시키고 있는 점이 주목을 받는다.

이탈리아의 공예[편집]

이탈리아의 공예[편집]

-工藝

이탈리아는 전시대(前時代)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공예 제작이 쇠퇴했으나,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걸쳐 호화로운 조각이 베풀어진 가구가 만들어졌다. 베르가모의 폰토니스와 베네치아의 안드레아 브르스토론(1662∼1732) 등은 그 대표자로서 그들의 작품에서는 바로크의 짙은 조형 감각이 엿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1730년대에는 단순한 형식을 취택하게 되었으며 로코코적인 경향이 뚜렷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