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17∼18세기의 미술/17∼18세기의 플랑드르 미술
17∼18세기 플랑드르의 건축
[편집]-建築
네덜란드의 북부 7개주가 1579년 위트레흐트 동맹을 통하여 독립한 데 반하여 남부 여러 주는 여전히 에스파냐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은 정치는 물론 미술에서도 명백한 차이점을 낳게 되었다. 시민생활이 발달한 북부 7개주(네덜란드)에서는 공공 건물과 주택의 건축이 성행하였으나 구약을 신봉하고 있던 남부 제주(플랑드르)에서는 로마 바로크 양식의 영향을 받은 교회건축이 많이 세워졌다.
17세기 플랑드르 바로크 건축은 안트워프의 성(聖) 샤를 보로메오 교회당에서 시작한다. 당시 바로크 양식의 발전에 있어서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예수회파(派)의 전도사였던 페테르 호이헨스와 프랑수아 아기욘과의 공동 작품인 이 건축은 바로크라고는 하지만 아직 마니에리슴의 양식이 많이 남아 있으며, 현존하여 있지 않으나 루벤스가 고문으로서 지도를 한 다채로운 천장화에서 알려지고 있다. 그 밖에도 17세기 전반에는 야크 프란카를이 세운 브뤼셀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를 위한 교회당이 있다. 르왕의 성 미하엘 교회당은 위럼 헤시우스가 건립하였으며 파사드의 둥근기둥이 벽면에 짜여져서 약동적인 장식의 모티프와 일체가 되어 상승하는 운동의 인상을 만들어 낸 형식은 17세기 후반에 건립한 대표적인 세속건축이며 브뤼셀의 그랑 파레에서도 볼 수가 있다. 이 길드 건축의 조소적(彫塑的) 파사드는 기둥이나 코니스에 만든 장식에 의하여 생긴 상승감(上昇感)과 어울려 조각과 건축이 혼연하게 융합하고 있는 우수한 작품의 예이다. 플랑드르 바로크는 그 이전에 있었던 고딕 양식 위에 세워진 독특한 양식이며, 너무 지나칠 정도의 장식이 전체의 회화적 인상을 강화하고 있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18세기 전반에는 여전히 바로크 양식이 남아 있었으나 후반으로 가는 데에 따라 확실하게 프랑스의 영향이 농후해져서 궁전건축에서 보는 바와 같이 루이 15세 양식과 로코코 양식이 지배적으로 되어갔다.
17∼18세기 플랑드르의 회화
[편집]-繪畵
건축의 경우와 같이 17세기 초엽 네덜란드가 독립한 이후의 회화도 플랑드르와 네덜란드는 전혀 별도의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여전히 에스파냐의 속령(屬領)으로 궁정과 교회가 지배적인 권력을 잡고 있던 플랑드르에 있어서는 대규모의 화면에 호화스러운 감각적 세계가 격동하는, 이른바 바로크 양식을 가지고 표현하는 루벤스에게 매우 적합한 것이었다. 그의 출현은 마니에리슴이 지배적이었던 그 이전의 플랑드르 화단(畵壇)에 있어서 종래의 방향을 일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후의 방향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은 겨우 반 다이크뿐일 것이다. 그러한 그도 한번은 루벤스의 아틀리에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루벤스의 양식을 계승하여 플랑드르의 세속적인 생활을 그린 요르단스와 풍경화가 프랑스 스나이델스, 피터 브뤼겔의 아들인 정물화가 얀 브뤼겔 등도 그의 아틀리에에서 성장한 화가였다. 루벤스의 영향권 밖에 있었던 오직 한 사람으로 주목할 만한 작가는 작은 화면 속에 농민생활의 어두운 측면을 그려간 아드리앙 브라우웰이다.
18세기가 되어도 루벤스의 영향은 농후하였으며 이탈리아에 가서 고대 로마를 배웠던 앙드레 코르네유 랭스에 이르러 처음으로 도래할 고전주의가 이곳에서 나타나지만 그것도 예외이며 18세기 이후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독창적인 화가는 나오지 않았다.
반 다이크
[편집]Anthony van Dyck (1599∼1641)
네덜란드의 화가. 벨라스케스가 출생한 해인 1599년에 안트워프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잠깐 동안 헨드릭 반 발렌에서 배운 후 17세에 루벤스의 아틀리에에 들어갔다. 겨우 19세가 될 무렵에 안트워프 화가조합의 거장이 될 정도로 그의 재능은 조숙하였다. 1620∼1621년 제임스 1세의 초청으로 런던에 갔으며, 그 후 1626년까지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특히 티치아노와 파올로 베로네제 등 베네치아파(派)의 영향을 받았고, 이탈리아에서는 걸작인 <추기경 벤티볼리오상(像)>과 기타 몇 점의 초상화를 그려서 명성을 떨쳤다. 그리고 피렌체에 있는 몬테 카바로 성당의 <삼현자(三賢者)의 예배> <승천>도 이 무렵의 작품이다.
그리하여 1627년 안트워프에 돌아올 즈음의 그는 루벤스와 맞서는 정도의 지위를 확립하고 있었으며, 티치아노와 루벤스의 모방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작풍을 수립하였고 안트워프의 도미니코회(會)를 위하여 그린 대제단화(大祭壇畵)를 위시하여 종교·신화·우의적(寓意的) 주제의 작품을 많이 그렸다. 1632년 영국의 궁정화가로서 런던으로 건너가 1641년 그곳에서 객사(客死)하기까지 찰즈 1세의 왕실을 위하여 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이 시대에는 플랑드르 시대와 비교하여 차가운 색조를 즐겨 우아한 가운데도 어딘지 모르게 취약한 인상이 엿보였다.
그도 역시 루벤스와 마찬가지로 그의 아틀리에에 얀 반라인과 다비드 페크와 같은 조수를 두고 공동제작의 형식으로 방대하게 주문해 오는 작품을 만들었으나 그의 제자 가운데에 중요한 인물은 없었다. 그가 그린 초상화는 인물의 동작을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서 포착하여 일상적인 현실 속에 사는 인간의 모습이 우아한 화풍에 의하여 떠오르게 하였다.
1621년으로 추정되는 자화상은 신경질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표정에서 그의 예술의 한 특질이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풍은 레놀즈와 게인즈버러 그리고 로렌스가 그린 18세기 영국 초상화의 흐름 속에서도 살아 있다.
루벤스
[편집]Peter Paul Rubens (1577∼1640)
플랑드르의 화가. 1577년 양친이 웨스트팔리아의 지겐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태어났으나, 10세 때 부친이 사망하여 고향 안트워프로 돌아와버렸다. 화가로서의 수업은 풍경화가·장식화가였던 페르헤히트에게 6개월쯤 배우고 아담 반 노르트르와 오토반벤에게 배웠다. 1600년에 이탈리아로 가서 만토바의 곤차가공(公) 아래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티치아노·틴토레토·베로네제의 수법을 배웠다. 이 시대에 이미 그 최초의 대규모의 작품인 만토바의 예수회의 교회당에 있는 제단화를 만들었다. 외교 사절로서 에스파냐로 간 그는 말을 탄 레르마공을 그려 명성을 떨쳤다. 귀국 후에는 브뤼셀에서 총독의 궁정화가로서 그의 창작력을 가장 잘 표현하는 시대를 맞이하였다. 1610∼1612년 안트워프 대성당을 위한 <십자가 건립> <십자가 강하(降下)>와, 1615∼1620년 현재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에 있는 <최후의 심판>을 제작하여 대규모의 매우 독창적인 양식을 처음으로 만들어 보였다. 그의 명성이 절정에 달한 것은 1621∼1625년 마리 드 메디치를 위한 21도면의 연작(현재 루브르 미술관 소장)을 제작한 때부터일 것이다. 또 1625년 안트워프 대성당을 위하여 유명한 <마리아 피승천도(被昇天圖)>를 그렸다. 당시의 그는 화가로서의 명성과 함께 외교관으로서도 유명하여, 1629년 영국과 에스파냐 사이의 평화조약을 채결하는 데에도 성공을 거두었다.
1630년 루벤스가 53세 때 헬레나푸르망과의 재혼을 경계(境界)로 하여 1640년 사망할 때까지를 만년으로 하고 있다. <스잔나의 목욕> <파리스의 심판>과 같은 이 시기의 특색은 표현이 감각적이고 세속적으로 되어 대체로 터치는 빠르고 윤곽선은 주위에 녹아드는 것 같은 형식에서 다채로운 관능성이 풍요한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총괄하여 그의 작품에는 대립되는 두 요소가 통일되어 있다. 인체의 모든 동작을 철저하게 표현하려는 조소적(彫塑的) 측면과, 색조가 독특하게 아름다운 회화적 측면이 미묘한 광선에서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민중적·세속적인 쾌락과 종교적 정열도 신비롭게 통일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양식은 바토와 프라고나르 이후 들라크루아·르누아르에 이르기까지 후세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모든 작품은 그의 이름으로 발표되었고 그의 공방에는 무수한 화가가 있었으며, 또 그 작품을 동판화로 뜨기 위하여 그는 많은 동판화가를 양성하고 있었다. 그에 관하여 말할 때에 이러한 교육자로서의 측면도 빠뜨릴 수 없다.
요르단스
[편집]Jacob Jordaens (1593∼1678)
프랑스의 화가. 1593년 안트워프에서 출생하였다. 루벤스와 같이 반 노르트의 문하생이었으나 후에 루벤스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한 사람의 조수가 되며, 프랑드르 바로크의 회화에서 루벤스·반 다이크에 이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사틸스와 농부> <주신(酒神) 바쿠스 축제> <주현제(主賢祭)> 등의 작품에 보이듯이 그의 주요한 테마는 향연에서 가장 잘 나타나는 민중생활 속에 있는 향락적인 측면이었다. 과장된 표정의 화중의 인물에 충만한 삶의 기쁨은 그의 종교화와 초상화, 또 신화에서 소재를 취한 작품까지 화면에 나타나고 있다.
17∼18세기 플랑드르 조각
[편집]-彫刻
17세기의 플랑드르에서는 조각이 제법 성행하고 있었다. 안트워프·브뤼셀·뤼니히·메헬렌 지역의 조각가는 네덜란드만이 아니고 파리와 베르사유와 로마에서도 초청을 받아서 각지에서 명성을 떨쳤다. 그 가운데서도 로마에서 활약한 뒤크노아는 귀엽게 재롱떨거나 한숨짓는 작은 천사의 제작으로 유명했다. 또 크벨리너스도 비상한 재능이 있어 안트워프의 여러 교회당과 시청사에 루벤스나 베르니니풍(風)의 조상 장식을 제작하여 마음껏 그의 수완을 발휘하였다. 이들 작품은 이탈리아의 것과 비교하면 우미한 면이 조금 떨어지나 시민의 안락한 생활감정을 엿볼 수 있다. 가령 크벨리너스의 부조(浮彫) <디아나상(像)>(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의 자유롭고도 침착한 자태에는 이탈리아에서 배운 고전주의를 명백하게 인정할 수가 있으며, 플랑드르인의 호사한 취미를 옷 무늬와 샌들, 그리고 각반(脚絆)의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