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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조각
[편집]조각은 르네상스의 최성기(最盛期) 이래, 회화와 비견될 수 있다고 일컬어지면서도, 실제에는 의욕 있는 활동을 정지하고 궁정과 귀족의 취미에 좌우되고 있었는데, 프랑스 혁명의 발발(勃發)은 그런 권위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아 새로운 시대를 도래케 함과 동시에, 조각 분야에도 일찍이 없었던 활발한 활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활동은 회화와 마찬가지로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발한 발전을 보이나, 19세기에는 프랑스가 오랫동안 계속된 이탈리아 예찬의 습관을 탈피하고 완전하게 자립하여 근대적인 제작으로 급속하게 옮겨 간 시대였다. 동일한 예술의 일환(一環)으로서 조각은 회화와 평행하여 가는데, 우선 나폴레옹 제정시대에는 전체적으로 고대 로마의 예찬풍조를 계승하여 조각도 회화의 고전주의에 뒤떨어지지 않는 고대 모방(古代模倣)을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발흥(勃興)은 조각에 있어서도 감정과 감동의 표현을 촉구했다. 그것은 동적인 박력을 낳고 조각은 새로운 생기를 되찾고 있다. 그 동적인 박력은 조각에 일찍이 없던 활기를 제공하고 있는데, 19세기의 후기에는 다시 로댕이 출현하여 조각의 활로를 개척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회화 분야에서 인상파(印象派)가 과거와 절연을 이룰 정도로 새로운 방향을 개척한 것과 같이 로댕의 출현은 조각에 대한 기성관념을 타파하고, 바로 현대와 연결되는 조각의 존재방식을 개척하고 있다. 조각은 고대나 고전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성격이 부여된 것으로서 조각에 대한 인식도 일변되어, 조각은 왕성한 활동을 통해 현대로 향해 움직여 가고 있다.
고전주의와 카노바
[편집]古典主義-
19세기 초두의 회화에 있어서 다비드가 군림한 것과 같이 조각에서는 카노바가 이탈리아의 고전주의를 수립하면서 압도적인 영향을 주었다.
카노바(Antonio Canova=1757∼1822)는 이탈리아의 조각가로서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석공(石工) 밑에서 일하는 동안에 조각의 재능을 인정받아 22세 때 로마로 나갔는데, 폼페이의 발굴(發掘)에 따라 로마는 고전연구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그리스 조각의 단정함과 간결함에 감동하여 18세기의 과다장식적(過多裝飾的) 제작을 부정하고 고대의 단정성을 현대에 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이탈리아의 국정(國情)이 복잡한 중에도 제작은 왕성하여, 작품으로는
<법황(法皇) 클레멘스 13세의 묘비(墓碑)>(1792), 고대에서 제재를 취한 <헤라클레스와 리카스>(1810) 등등이 있고, 나폴레옹의 영매(令妹)를 비너스 모양으로 만든 반나상(半裸像) <폴린 보나파르트의 상(像)>(1807)이 유명해져서 나폴레옹의 초빙을 받아 파리에 간 일도 있다.
카노바 작품은 고대의 형태에 심취하여 고대의 단아하고 화려함을 단지 외형적으로만 모방하였기 때문에 형태상으로는 단정연(端正然)한 완성을 보이고 있으나, 안으로부터 북받쳐 오르는 생명력을 결여하여 무감동한 아름다움으로 그치고 있다.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는 전적으로 고대 로마를 예찬하던 시대여서 카노바의 고전주의적 조각은 프랑스에 있어서도 크게 주목을 받아 19세기 초두에는 프랑스의 조각에도 강한 영향을 주었다.
뤼드와 낭만주의
[편집]-浪漫主義
조각에 있어서의 고전주의는 회화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고대의 양식을 모방하여 형식만의 단조(單調)로움에 빠져 들어갔다. 그 당시의 문학과 회화의 영향을 받아 조각에도 정열적인 작품이 그 반동으로 등장되는데 그 중에서도 뤼드의 작품이 빛나는 것이었다.
뤼드(Francois Rude=1784∼1855)는 열렬한 보나파르트 당(黨)으로서 나폴레옹이 실각하였을 때에는 브뤼셀로 피신하여 그 곳에 12년간 머물러 있었다. 그 때 역시 망명객이던 다비드를알게 되고, 귀국 후에 <거북이와 노는 어린이>(1831)를 발표하여 유명해졌다. 이 작품은 자유로이 노는 어부인 소년을 취급한 것인데, 인체를 형식적으로 보지 않고 자연을 참되게 관찰하여 부드러운 묘사와 밝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조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것은 파리의 개선문을 위해 제작한 <진군(進軍)>이었다. 이 작품은 개선문을 장식하는 4개의 커다란 부조(浮彫) 중의 하나인데, 뤼드는 1792년에 파리의 방어를 위하여 마르세유로부터 출발한 의용군의 진군을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고대 로마의 무사의 모습으로 되어 있어, 중앙에 투구를 높이 들고 질타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군상(群像)은 진군의 열기를 재현하고, 군상의 머리 위에는 날개를 펴고 치닫는 전쟁이 여신을 묘사하고 있다. 그 모양은 열렬한 정열을 내뿜는 듯하여 사람을 감동시켜, 뤼드는 조각을 통해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리듬과 생기 있는 충실성을 부활케 하였다. 그의 이러한 개척활동은 프랑스 조각에 강렬한 움직임을 촉구하는 것이었으며, 뤼드의 작품에는 또한 <네이 장군의 상>(1853)이 있고 초상 조각(肖像彫刻)도 생기가 넘친다.
바리와 동물조각
[편집]-動物彫刻
낭만주의는 조각에 생명감을 되찾게 하여 주나, 조각의 활동은 아직 강대(强大)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작품에 정열을 쏟으며 형식적으로 묘사하는 제작이 아니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며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자연으로부터 취재하여, 그것을 분방(奔放)한 움직임을 품는 조각으로 나타낸 것은 바리였다.
바리(AntoineLouis Barye=1796∼1875)는 금세공사(金細工師)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금세공술과 조각이 오묘하게 융화되어 있었다. 그는 한때 화가인 그로 밑에 있었으나, 아카데믹한 조각의 사장(師匠)보다도 그로의 회화로부터 강한 감화를 받았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하는 한편 파리의 식물원을 찾으며 그에 부속된 소규모 동물원에 열중하였다. 우리 속에 있는 맹수는 작가의 상상을 자극해 주는 것이었다. 당시는 낭만주의의 화가도 맹수를 묘사하고 있었으나, 바리는 해부(解剖)에 정통하여 맹수를 단순히 자연적으로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공상은 비약하여 맹수를 정글의 가장 맹렬한 싸움터에 옮겨 놓고 그 생사의 한순간을 약동하는 매력을 갖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그의 작품 <사자와 뱀>(1833)은 일부에서는 찬사를 보냈으나 많은 사람의 공격 대상이 되어 살롱으로부터는 냉대를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바리는 조각에 맹수라고 하는 전혀 새로운 제재를 채택하여 정글의 비극을 연상시키며 상박(相搏)하는 야생 동물을 정열적으로 묘사하는 작품을 낳았다.
뤼드는 작품에 생동감을 보였으나, 바리는 조각을 희곡으로까지 승화시켰다. 바리는 조각 이외에도 장식적인 제작에도 뛰어났었으며, 인상(人像)에도 <켄타우로스와 라피테>(1850)가 있고, 수채화와 유화에도 매력 있는 작품을 남기고 있다.
카르포
[편집]Jean-Baptiste Carpeaux (1827∼1875)
프랑스의 조각가. 발랑시엔 출생. 카르포는 형식만을 중시하는 아카데믹한 조각을 멀리하고, 자연을 주시하여 얻는 바에 의해서 조각에 감동을 불어넣음으로써, 바리의 뒤를 이어 프랑스 조각을 더 한층 발전시켰다.
그는 격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일찍이 뤼드에 의해 계발(啓發)되었는데, 이탈리아에서 수학(修學)할 때에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위골리노와 그의 아이>(1860)에서 격렬한 희곡적인 군상(群像)을 표현하고 있다. 파리로 돌아온 후에는 초상조각으로 호평을 받아 상류사회의 환영을 받으나, 그의 특징은 극적인 구성과 매력에 있다. 1866년에는 루브르 궁의 장식으로서 <플로라>를, 이어 1869년에는 오페라 극장의 장식으로서 <댄스>를 상징하는 군상을 제작하였다.
<플로라>에서는 꽃의 여신이 몸을 꼬며 꿇어앉고, 배후에는 꽃으로 울타리가 되어 있으며, 주위에 5인의 애신(愛神)들이 뛰놀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회화적인 구성을 갖고 있으며, 인물상은 자연적 생기가 넘치고, 리듬을 낳아 종래와 같은 딱딱한 관념을 타파한 새로운 조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댄스>는 젊은 신(神)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춤추는 나부(裸婦)를 취급하는데, 군상이 보여주는 정열적인 약동은 도리어 냉랭한 단정(端正)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어, 그 작품은 어느 날 밤 잉크 세례를 받는 사건까지 생겼다.
카르포는 부단히 인간을 관찰한 작가로서, 그의 작품은 철저하게 사실적이어서 인간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일컬어지며, 그 인체에는 생명감이 넘치며, 더욱이 군상에 있어서는 자태의 움직임이나 구성으로부터 분방한 극적(劇的) 힘이 솟아나고 있다. 카르포는 조각을 회화적인 움직임과 발랄함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카르포는 최후의 여인상이 천구(天球)를 떠받치고 있는 <세계(世界)의 네 개 부분>(1872)을 마지막으로 제작하고, 그 해에 병을 얻어 한창 일할 나이인 48세로 영면하였다.
로댕과 조각의 근대성
[편집]-彫刻-近代性
조각은 19세기에 들어 뤼드나 바리, 카르포를 낳았으나, 조각은 여전히 회화에 종속되어 있어, 이 3인의 출현도 아카데믹한 경향에 저항하는 소수의 움직임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각의 고정관념을 근저로부터 깨고 새로운 전도(前途)를 개척하여 조각에 대한 인식을 회화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은 로댕의 제작이었다. 그러나 로댕은 생활에 쫓겨서 조각작품의 발표가 늦어졌다.
그가 최초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그의 <청동시대(靑銅時代)>(1876)의 발표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공격의 대상이었다. 심사원은 그 생생한 청년상(靑年像)을 보고 산 사람을 방불케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최선을 다한 로댕의 오랜기간의 탐구와 관찰로 이루어진 것으로, 조각을 하나의 형(型)에 따라 제작하는 사람이나, 고정된 미(美)의 관념으로 보는 사람은 이해하지를 못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외형을 단순하게 묘사한 것이 아니고, 작가가 포착하고 생각한 인간상을 한 사람의 청년의 육체를 통해 생명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로댕은 시종 기성관념과 충돌하여 가나, 그는 살아 있는 것같이 조각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 속에 산 인간을 놓고 생명의 상호 접촉을 실현시켰다. 그러므로 빛과 그늘의 역할을 아주 크게 비약케 하여 조각의 면(面)이나 요철(凹凸)을 내적 생동에 결합시키고 있다.
로댕은 <지옥의 문>을 구상하여 초인적인 노력으로 인체의 비밀을 탐구하였다. 인상(人像)은 외치고, 두려워하고, 노호하면서, 공간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순간적 모습을 보여 약동의 분방성(奔放性)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창조된 것은 기왕에 걸쳐 있던 건조의 구렁으로부터 끌어 내어 점토에 살아 있는 언어를 부여했다. 더욱이 만년에는 <발자크의 상(像)>(1898)을 발표하여 더 한층의 물의를 자아냈다. 그것은 문호(文豪)가 잠옷 바람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인데, 이 제작은 부분을 떠나 조상을 거대한 덩어리로 조형하여 모든 것을 내부에 포함시켜 외면의 묘사로서는 불가능한 내면적인 웅대성을 파악하였다.
그것은 조각분야에 다시금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으로, 로댕은 전생애를 통해 조각에는 별재(別在)하는 웅변이 있음을 입증하고,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는 기술을 통해 표현의 방법을 모조리 개선하여, 조각을 근대적인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로댕
[편집]Auguste Rodin (1840∼1917)
근세에 전무후무한 명성을 떨친 조각가로, 파리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생활에 쫓기나, 14세 때 데생을 배울 기회를 만나 우연히 점토(粘土)를 만져 보고 큰 감동을 받는다.
젊어서 미술학교 입학에 세 차례나 실패하였으나 벨뢰스라고 하는 통속적인 조각가 아래에서 심부름하며 생활하기도 하고, 또 세브르의 도기공장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작품 <코가 없어진 사나이>(1864)가 12년 후에 살롱에서 입선(入選)했으나, <청동시대(靑銅時代)>(1876)의 발표는 강렬한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로댕이 벌거숭이가 되어 낡은 조각의 관념에서 떠나 새로운 조각을 향해 스타트를 하게 한 제작이었다.
로댕은 1880년에는 <세례자 요한>을 발표하여 재차 물의를 일으키며, 로댕은 인체를 항시 기능면에서 관찰하여 그 자태에 움직임의 지속을 느끼게 하는 강한 웅변을 표현하고 있다. 대표작에는 <칼레의 시민(市民)>(1886)이 있으나, 한편에서는 단테의 신곡(神曲)으로부터 웅대한 구상을 취하여, <지옥의 문(門)>을 계획하고 186명의 인상(人像)을 준비하였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은 <생각하는 사람>을 위시하여 출입문을 장식하기 위한 제작이나 그 문(門)은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1898년에는 <발자크의 상(像)>을 발표하여 다시금 물의를 자아내었으며, 이 조각은 내면적 힘을 강조하고 외면은 간결하게 하여 조각에 더한층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
그의 생애는 초인답게 과거의 조각양식을 무너뜨리고 근대의 조각을 수립시키면서 거대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종하는데, 그의 문하(門下)에 부르델을 비롯한 거재(巨才)들을 배출시켰고, 1917년 파리 교외의 뫼동에서 영면하였다.
칼레의 시민
[편집]로댕의 작품(1884∼86). 북프랑스의 칼레시(市) 광장에 놓여 있는 기념상으로 로댕의 최고 걸작 중의 하나이다. 14세기 중엽 칼레시는 영국군의 침입을 받아 함락되는데, 그때 전시민을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되어 적진으로 향한 것이 이 6인의 시민이었다. 이 군상은 종래의 그림과 같이 전개되는 구성은 아니다. 6인은 원을 그리며 걷는 모습으로, 희생이 되기 위해 가는 괴로움에 찬 긴장과 분노와 침통함이 넘쳐 흐르는 듯하다. 로댕은 통속적인 영웅으로서 묘사하는 것보다는 죽음으로 향하는 인간 감정에 의해 묘사하고 있는데, 6인의 조상(彫像)은 대담한 강조와 생략으로서 근육이 울퉁불퉁한 인상(人像)이 되고, 그러면서도 세부의 표현은 경외를 느낄 만큼 정과 한이 넘쳐 그 조각의 하나하나가 발소리를 울리게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갖고 있으며, 각자의 동작이 겹쳐져 군상에 전체적으로 무거운 긴장과 거대한 약동을 보여주고 있다. 그 발소리를 의식케 하는 발걸음 자세나 움직임이 불러일으키는 긴박감은 종래의 조각 표현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힘이 있어서, 청동의 강도(强度)를 극한으로까지 발휘케 하며, 이 6인의 병렬(竝列)은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절박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벨기에의 조각
[편집]-彫刻
프랑스의 화가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19세기의 후반기에 이웃나라인 벨기에에 대해서도 강한 감화(感化)를 주는데, 그 사실주의적 제작에 있어 벨기에는 조각 분야에서 콩스탕탱 뫼니에를 낳고 있다.
뫼니에(Constantin Meunier:1831∼1905)는 브뤼셀에서 출생, 처음에는 조각 방면에 뜻을 두었으나 곧 회화로 옮겼다. 그의 회화 제작은 25년간이나 계속되었으나 1885년 54세 때에 갑자기 조각 방면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통상적이라면 평온한 만년에 들어갈 나이에 뫼니에는 조각을 시작하여 그 후 20년 동안 계속 작품을 발표하였다.
뫼니에는 종교와 마찬가지로 노동을 예찬하였다. 그는 제재(題材)를 모두 심한 노동을 하는 농부나 하역인부, 또는 탄광부(炭鑛夫) 등에서 택하는데, 뫼니에는 일하는 사람을 생활의 진실을 보여 주는 새로운 사회의 용사(勇士)라고 생각하였다. 작품으로서는 <부선하역부(浮船荷役夫)>와 <물을 마시는 사람> 등이 있고, 또 미완성으로 끝난 노동기념비를 위해 제작한 부조(浮彫)조각이 있는데, 그의 작품은 특히 과장을 피하고 일하는 자태에서 볼 수 있는 진실을 전하는 정묘(精妙)한 묘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노동 예찬은 일말의 낭만주의를 띠는 것으로서 항상 인간애(人間愛)를 내재시키며, <수확(收穫)> 등 기타의 부조도 회화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
북구의 조각
[편집]北歐-彫刻
북구의 조각은 19세기 초기에 덴마크에서 토르발센(Bertel Thorvaldsen, 1770∼1844)을 배출시켰다. 덴마크가 낳은 최초의 세계적 조각가로서,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 곳 미술학교를 거쳐 1797년 대망의 로마에서 수학했다. 로마에서는 카노바가 군림하던 시절로서 고대 연구의 성지(聖地)였으며, 토르발센은 고대 조각의 기품과 완성에 심취하여 이후 이탈리아에 체류하기 40년, 거의 그 곳에서 제작활동을 하였다.
그의 작품은 순정(純正)한 고전을 표방하여 양식의 정당함을 존중하며 규칙 바른 묘사를 통하여 간결한 작품을 낳고 있다. 그러나 모든 고전주의와 마찬가지로 너무 형식에 치중하나, 최초로 <자존>(1803)을 발표하여 카노바를 놀라게 하고, 카노바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고전주의의 대표자가 되어, 로마에 와서 수학하는 북구의 작가들에게 압도적인 감화를 주었다. 그의 명성은 전유럽에 퍼져서 각국으로부터 주문을 받았었고, 1819년에는 고국으로 돌아가 대환영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와 12사도(使徒)>의 제작 의뢰를 받고 로마에 돌아가 이를 제작하였다. 마지막으로 고국에 돌아가 영면하는데 그의 작품은 신화(神話)를 취급하는 것이 많다.
독일의 조각
[편집]獨逸-彫刻
19세기 상반기(上半期)에는 고전주의의 제작이 성행했는데, 샤도(Gottfried Schadow, 1764∼1850)는 로마에서 수학하고 처음에는 고전주의를 신봉하나, 자연 그대로의 인체를 공부한 후로는 더욱 사실적 수법으로 기울어졌다. 그의 작품은 고전주의의 양식에 유연함을 가한 제작으로 기념상(記念像)은 다소 딱딱한 면도 있으나, 대표작으로는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개선문을 장식하는 <4두전차(四頭戰車)와 승리의 상(像)>이 있고, 그 밖에 슈테틴의 <프리드리히 대왕상(大王像)>이 유명하며, <루이제 황후 자매(皇后姉妹)>가 섬세한 표정과 자연적인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라우흐(Christian Rauch=1777∼1857)는 샤도의 문하생인데 스승의 만년의 낭만주의적 경향을 계승하여 유명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 처음에 한때는 궁정에서 일하면서 황후 루이제의 비호(庇護)를 받았으며 이어 로마에서 수학하였다. 작품 <황후 루이제의 묘묘(墓廟)>는 엄숙함이 넘치는 대표작이며, 또 필생의 대작인 <프리드리히 대왕의 기념상>은 영걸(英傑)의 면모를 방불케 하며, 대좌(臺座)에 새겨진 부조(浮彫)도 다수의 군상을 취급하여 새로운 효과를 개척하고 있다. 또 <칸트의 입상(立像)>도 성격 묘사가 훌륭한 점에서 알려져 있고 이 시대에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힐데브란트
[편집]Adolf von Hildebrand (1847∼1921)
19세기 후반기에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조각가로, 두 차례에 걸쳐 로마에 유학하였고 후일에는 주로 뮌헨에서 제작하였다. 그의 작품은 1884년에 <벌거벗은 사나이>를 발표하여 단순화된 간명성(簡明性) 가운데 고전적인 균정성(均整性)을 나타내고 있다. 힐데브란트는 장식이 많은 표현을 피하고 고대 작품의 전아하고 정적한 제작에 유념하여, 로댕의 약동과는 반대로 단정한 양식을 통해 새로운 고전주의를 이룩하고 있다. 특히 조각을 건축에 종속케 할 만큼 공간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더욱이 광장에 있는 분수(噴水)나 기념상의 제작에 뛰어난 재주가 있고 군상(群像)의 광범한 통일을 보이며, 작품으로 뮌헨의 <비텔스바하 분수> 등이 있고, 브레멘시(市)를 <비스마르크의 상(像)>으로 장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명한 저서 <조형미술에 있어서의 형식의 문제>를 남기고 있다.
클링거
[편집]Max Klinger (1857∼1920)
그는 처음에는 판화를, 다음에는 화가로서 활약하고 다시 조각이 그의 본령(本領)임을 깨닫고 조각에 몰두하였다.
판화에는 월등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회화도 대담한 작품이 있고, 그는 로마에서 수학할 때에 버클린과 교분을 맺고 있다. 조각에서는 회화적인 효과를 고안하여 관능적인 <살로메>를 제작한 외에 대표작인 <베토벤 좌상(坐像)>에서는 대리석에 상아(象牙)·청동 기타의 재료를 병용하여, 복잡한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색적인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서, 조각은 번거로울 정도의 열정을 내재(內在)시키며, 또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사실을 통해 니체와 기타의 인물에 대한 뛰어난 흉상(胸像)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