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상/서양의 교육사상/서양 고대의 교육/로마의 교육
로마의 교육〔개설〕
[편집]Rome-敎育〔槪說〕
로마는 그리스의 뒤를 이어 독특한 사회를 발전시킨 곳이다. 또한 서양 고대시기에 있어서 그리스와 함께 가장 중요한 민족이며, 교육사에 있어서도 다같이 하나의 시기를 구분할 만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 두 민족은 대조적인 민족성을 지니고 있었던 만큼 그들의 교육성격도 그들 민족성에 상응하는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그리스 민족이 이상주의적이었다면 로마 민족은 현실적이고 실제적 방면에 적극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인들은 지극히 실제적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일에 있어서도 실용성을 중시했다.
따라서 로마인은 그리스인을 비현실적인 몽상가로 보았고, 반면에 그리스인은 로마인의 현실적이고 호전적(好戰的)인 면을 들어, 그들은 인생의 고상한 가치를 알지 못하는 미개민족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인은 철학을 존중하였고, 로마인은 법률을 소중하게 생각한 민족이었다.
로마인은 그들의 이상으로 애국심·공리심·경건심·인내·노력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덕목이 곧 교육의 이상이기도 하였다. 교육기관으로는 가정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학교는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았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도덕적·육체적 훈련에 대한 책임을 졌고, 어머니는 현모(賢母)로서 어린이의 양육에 힘썼다.
어린이는 부모로부터 고대 로마의 영웅·위인의 전기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 훌륭한 행동을 모범으로 삼는 것이 가정교육의 특색이었다. 어린이들은 성장함에 따라 실제적 수단에 의해 교육을 받게 되었다. 예컨대 어린 소년들은 승마·수영·무기사용법을 배우는 육체적 훈련을 받았고, 어린 소녀들은 어머니로부터 예의범절을 배웠다. 그러나 그리스 문화의 수입과 더불어 로마의 교육도 점차 그리스화(化)하여 세계주의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로마인은, 그리스인이 발칸반도 남단으로 남하하기 시작할 무렵 이탈리아로 진입하였다. 로마는 최초에는 왕정(王政)이었으나, 그 후
B.C. 509년에 공화정으로 바뀌었고, B.C. 27년에 로마제국이 탄생되었다.
이와 같은 로마 정치체제의 변천은 교육에도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로마의 교육은 공화정 시대와 제정 시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공화정 시대의 로마교육
[편집]共和政時代-Rome敎育
공화정시대의 교육은 B. C. 753년경의 건국 이후 B. C. 146년 그리스를 정복하기까지, 즉 그리스 문화를 수입하기 이전의 교육을 말한다. 이 시대는 로마 고유의 문화가 보존되었던 시대로, 정치적으로는 국가의 중요한 업무인 국토방위와 전쟁의 수행을 위해 적절히 마련된 귀족적 공화정체(共和政體)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인들은 애국심을 기르고, 전쟁에 있어서나 일상생활에 있어서 국민을 강건한 시민으로 훈련시키는 것을 중시하였으며, 선량한 시민·군인·노동자, 즉 선인(善人)의 양성에 교육의 목적을 두었다.
이러한 로마인의 교육은 실제적 생활을 통한 훈련에 의한 것이었고, 그 중요한 목적은 용감하고 충성심이 강한 군대의 양성이었다. 결국 초기 로마교육의 목적은 전시에는 정복자가 되게 하고, 평시에는 선량한 노동자, 유능한 시민이 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교육의 내용은 초보적인 읽기·쓰기·셈하기와 12동판법 및 체육이 위주가 되었다. 즉 그들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초적인 읽기·쓰기·셈하기를 배우고, 군사훈련을 통하여 병영에서 체육을 실시했으며, 생활의 실제적인 안내자가 될 로마인의 기본법인 12동판법을 암송하게 했다.
12동판법은 시민권을 얻기 위한 훈련이기도 하였으므로, 초기로마의 교육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 12동판법은 원래 사법권을 독차지하고 있던 귀족이 관습법을 악용하여 평민을 억압하였으므로 이 불만을 풀어주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이로써 평민은 민법상 귀족과 평등한 권리가 보장되었다. 12동판법에는 공사간의 관계, 각 개인의 권리·재산 등이 명백히 나타나 있고 그 내용은 ①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권리, ② 처에 대한 남편의 권리, ③ 노예에 대한 주인의 권리, ④ 자유민 상호간의 계약 혹은 상실에 관한 권리, ⑤ 소유권에 관한 각자의 권리 등이 규정되어 있다.
초기 로마의 교육기관은 가정이 중심이었다. 즉, 부모가 자녀의 교육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가정에서 실제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다. 소년들은 아버지를 모방하여 배우고, 소녀들은 어머니를 모방함으로써 배웠다.
특히 아버지는 아들을 사교장·공무장(公務場) 등에 직접 데리고 다니며, 실제 경험을 통하여 교육하였다. 읽기·쓰기·셈하기 등도 가정에서 부모에게서 배웠으며, 가정에서의 양친의 교육은 로마 고유의 정신인 경건·복종·노력·신중·절제·용기 등의 덕을 쌓게 하여 선량한 군인, 선량한 시민을 만드는 데 노력하였다.
초기 로마에는 공립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병사(兵舍)·공회소·농장 등이 아동교육의 중요기관이기도 하였다. 그 후 일반시민들이 그들의 자녀에게 초보적인 지식을 가르치기 위하여 시의 네거리에 사립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로마에 있어서 조직적인 학교교육은 제정 시대부터 실시되었다.
제정 시대의 로마교육
[편집]帝政時代-Roma敎育
포에니(Poeni) 전쟁의 승리로 지중해의 정복자가 된 로마는 정치적으로 강력한 권력자가 통치하는 1인 지배체제인 제정(帝政)이 확립되고 공화정은 몰락하게 되었다. 특히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함으로써 그리스의 문화가 로마에 수입되어, 로마의 정치·문화·사회의 각 방면에 걸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교육면에 있어서 로마는 그리스적 학교교육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이 시대부터 로마의 교육은 가정 중심의 부모교육으로부터 그리스적인 학교교육으로 변하게 되었다.
제정 시대에 있어서 교육의 주목적은 지적 발전을 지도하는 데 있었다. 언어의 능력과 공적(公的) 담화 및 토론의 성공이 훈련의 목적이었다.
교육의 기능은 연설에 능숙해져서 국가에 실제적 봉사를 할 선량한 사람을 양성하는 데 있었다. 결국 제정 시대의 로마에서는 웅변가 양성을 교육의 최고목적으로 했다. 웅변가가 되기 위해서는 도덕적 성격, 넓은 교양 및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능력 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보고 이같은 면에 중점을 둔 웅변가 양성교육을 실시하였다.
로마의 학교교육
[편집]초등학교(문자학교)
[편집]初等學校(文字學校)
초등교육기관으로, 6세에서 12세까지의 아동을 수용하여 읽기·쓰기·셈하기의 초보적 지식과 12동판법을 가르쳤다. 교육방법은 대단히 엄격하였으며, 사립기관이기 때문에 수업료를 받아 학교를 유지하였다.
문법학교
[편집]文法學校 grammar school
중등교육기관으로 12세부터 16세까지의 청소년들을 수용하여 문학·그리스어·라틴어·신학·역사·지리와 문법학·수사학·논리학(변증법)·수학·기하학·천문학·음악 등의 7자유과(七自由科:seven liberal arts)를 고등교육의 예비과정으로 가르쳤다.
수사학교
[편집]修辭學校 school of rhetoric 고등교육기관으로 16세 이상이 된 자를 입학시켜, 웅변가 양성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교육내용으로는 7자유과를 비롯하여 로마법·윤리학 등의 과목이 있었다.
교육사상가
[편집]키케로의 교육사상
[편집]Cicero-敎育思想
대(大)로마의 철학자·정치가·도덕철학적 수필가였던 키케로(M. T. Cicero, B. C. 106-43)는 소년시대부터 천재적 소질을 나타냈고, 특히 시를 매우 좋아하였다.
소년시대의 학업을 마친 키케로는 B. C. 79년에 아테네로 가서 문법·철학·법률 등을 공부하면서 수사학자들에게서 웅변술을 배웠다. 웅변가가 된 키케로는 정계로 진출해 시칠리아의 재무관·고등안찰관·법무관이 되고, B. C. 68년에는 안토니우스와 함께 집정관(執政官)에 선출되어 정계에서 활약하였다.
키케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자유교육을 그의 교육원리로 삼았다. 그는 인간의 성향은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보고 교육의 본질은 인간으로 하여금 선을 가질 수 있도록 함에 있다고 했다. 즉 교육에 의하여 선을 실현시킬 때 인간은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키케로는 교육의 본질을 인간의 천부적 소질을 완성하는 것으로 보고, 특히 인간이 본래 잠재적 소질로 소유하고 있는 선의 소질을 교육에 의하여 실현시키면 선으로 인도되어 행복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교육의 목적을 첫째, 인간의 목적이 선한 생활에 있으므로 교육은 인간이 선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둘째 넓은 교양과 철학적 지식을 배경으로 가진 웅변가를 양성하는 데 두었다. 훌륭한 웅변가에게 필요한 교육내용으로 철학·국사·정치학을 강조하고, 철학은 모든 지식의 왕관이요, 도덕의 학교라고 하였다. 그는 또 정치학은 과학의 여왕이며, 국사는 로마민족의 주체성을 기르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환경의 힘에 의하여 올바른 태도와 고귀한 사상이 형성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교육의 방법으로서 벌을 주지 말 것과, 명예심을 존중하여 그것을 선의 본질적 동인(動因)으로 생각하고 이용해야 한다고 했다. 또 그는 개성 존중의 교육을 역설했다. 개성을 존중하여 교육하되,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은 일찍이 선으로 향하는 맹아(萌芽)를 길러주고, 악의 근원인 관능적인 향락을 금해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청년기의 최대의 위험은 성욕과 관능적 경향성에 있기 때문에 교육자는 이 점에 특히 주의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종교가 중요한 교과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또는 그는 교육은 아동으로 하여금 조국과 국가에 대한 감사정신을 기르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퀸틸리아누스의 교육사상
[편집]Quintilianus-敎育思想
퀸틸리아누스(M. F. Quintilianus, 35?-95)는 로마 제정 시대의 대표적인 교육사상가·수사학자요, 웅변가였다. 그는 에스파냐에서 출생하였는데, 부친이 로마에서 수사학자로 활약했기 때문에, 그도 부친을 따라 로마에서 법률과 수사학을 공부했다. 그는 후에 교육 실천가로서 수사학교에서 20년간 웅변술을 강의하고 이로 인해 당시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T. F. Vespasianus, 9-79)의 신임을 얻어 웅변술 교수의 칭호를 받고, 국가로부터 봉급을 지급 받는 로마 최초의 공교사(公敎師)가 되었다.
20년 간의 웅변술 교수직을 그만둔 후 그는 웅변가 양성의 실제적 경험을 토대로 하여, 2년 간에 걸쳐 12권에 달하는 <웅변교수론(Institutes of Oratory)>을 썼는데, 이것이 그의 대표적 저작이다.
1권과 2권에서는 주로 교육원리·교육방법·교과목 관리·훈련을 다루고, 3권에서 7권까지는 문장의 창작과 구상, 8권에서 12권까지는 웅변술, 교육의 이상과 웅변가의 이상 등을 논함으로써 로마의 대표적 교육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 후세의 교육사상가들은 퀸틸리아누스의 <웅변교수론>이 교육을 과학적으로 취급한 최초의 것이라고까지 평하고 있다.
그는 이상적 웅변가의 양성에 교육의 목적을 두고, 웅변가를 이상적으로 교육된 사람으로 보았다. 그것은 웅변가야말로 성실하고 선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가 말하는 웅변가는 단지 변론상의 특수한 재능면에서 우수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사적 생활이나 공적 생활에 있어서 모두 모범적이어야 한다. 또한 웅변가는 선한 도덕적 품성을 소유하고, 7자유과의 교양을 충분히 습득해야 하며, 언어 표현력이 능숙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훌륭한 변론가가 되려면 어릴 때부터 학문적 기초가 확고하게 구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소년기 교육의 중요성을 논하였다. 또 그에 의하면 웅변가가 되려고 하는 아이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의 자극과 경쟁 속에서 자기의 역량을 길러야 하며, 또한 우정을 키워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학교는 공공생활에의 준비를 위한 적절한 장소이며 사회생활에 중요한 우정 및 사회 연대의식을 싹트게 하는 장소가 된다고 했고, 아동은 교사나 부모 또는 가정교사의 가르침보다도 학우의 자극에 더 크게 영향을 받으므로 학교는 가정에 비하여 대단히 우수한 교육 장소가 된다고 했다. 교사의 제일가는 임무는 아동의 특수한 성질·능력, 즉 기억력과 모방력 및 성격을 판별하여 각자의 개성에 따라 지도하는 것라고 했다. 웅변교사로서 구비해야 할 것으로 대화력·시 해석력·작문 능력 등과 다방면의 문예작품을 읽어 내용과 어휘를 풍부히 알고 있어야 하며, 음악적 소양과 천문학 및 철학을 연구하고, 웅변에 뛰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퀸틸리아누스의 교육사상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체벌을 금하고, 체벌보다는 포상(褒賞)이 교육적 효과를 가져온다고 믿었다. ② 교사가 아동의 성질을 연구하여 개인차를 고려하여 교육할 것을 주장했다. ③ 조기교육을 지지하였다. ④ 학습에 있어서 흥미와 유희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⑤ 학습에 있어서 경쟁의식을 조장하였다. ⑥ 교사 선택의 중요성을 지적하였다. ⑦ 가정보다 학교교육의 우위성을 인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