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상/서양의 교육사상/서양 중세의 교육/서양 중세의 교육〔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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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중세의 교육은 로마적·가톨릭적·게르만적 요소에 사라센적 요소를 가미한 것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그 출발은 게르만의 이동에서부터 문제가 된다. 게르만은 이미 몰락과정에 들어간 로마인에 비하면 청신한 자연민족이었고, 아직도 건전한 가족정신으로 뭉친 자유인만으로 구성된 민족이었다. 유럽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한 이 파괴적인 자연민족이 문화민족이 되기까지의 4세기 동안 서로마 세계는 참으로 암흑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광폭한 파괴자들의 정신을 유순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법을 가르쳐서 사람다운 행실을 하도록 만든 것은 바로 그리스도 교회의 노력이었다. 특히 이곳저곳에서 교육의 봉화를 높이 들고, 이 혼란하고 무질서한 문화의 폐허 위에 문화 수호의 성탑을 쌓고, 대학과 농사시험장과 출판사와 도서관의 임무를 한 손에 맡아본 것은 일생을 수도에 바친 사람들의 모임인 수도원이었다. 이 수도원의 발달에 따라 여러 가지 수도의 규율이 생겼으나, 남이탈리아의 베네딕트(Benedict, 480-543)가 제정한 73조의 수도규칙이 이 시대의 교육을 규정한 중요한 문헌이 되었다. 중세를 통하여 학교였으며 동시에 병원이요, 공장이요, 모든 문화의 중심이었던 수도원은, 북쪽의 스코틀랜드·아일랜드로부터 남쪽의 모로코·이집트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산재했고, 4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약 1천 200여년 간에 유럽의 교육을 실지로 담당하였으며, 그 중의 더러는 오늘날 7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학이 되었다. 수도원 교육의 직접목적은 영혼의 구제를 위한 도덕적·신체적 훈련이었다. 수도원은 '청결·가난·복종의 3대 서원(誓願)을 지키고, '기도하며 노동하라!'는 교육의 목표를 내세웠다. 이 중 노동 존중은 다만 보건과 자활에 필요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개한 게르만인의 물질문명을 향상시켰고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신성의 정신을 강조하게 되었다. 따라서 전 인류가 다같이 매일 7시간의 노동과 2시간의 공부를 실천한다면 인류사회는 분명히 고도의 평화와 문화를 가진 지상천국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수도원 학교의 교과는 소위 7자유과(七自由科)란 것이었다. 고대에서 내려온 초급 3과(trivium)인 문법·수사학·논리학과 고급 4과(quadrivium)인 수학·기하학·천문학·음악을 그렇게 불렀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교양과목보다는 광범위한 이 자유과(liberal arts)라는 명칭은 전문적인 철학과 신학의 입문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명명한 것이며,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 문리과 대학이니 교양학부니 하는 데까지 계승되어 왔다. 이와 같은 광대한 교육망을 통한 부단한 교육의 성과는 드디어 열매를 맺을 때가 왔다. 게르만의 자연민족이 문화민족이 되어 가고, 혼란한 유럽에도 신질서가 서기 시작했다. 그래서 800년에는 찰스(charles)대제에 의하여 게르만인의 로마제국이 재건되었다. 그리고 이 로마 황제는 칙서를 반포하여 군·읍의 교회에 부속학교의 창설을 적극 장려하였으며, 특명 순찰사를 보내어 그 실시를 감독했고, 그 결과로 유럽은 제1차 문예부흥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것이 소위 카롤링거 왕조의 문예부흥(Carolingian Renaissance)이었다. 그 중심은 왕국학원이었고 이 학원장은 영국인 알비누스(Albinus, 735-804;英名 Alcuin)였다. 그리고 이때에 비로소 오늘날의 로마문자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중세기는 불행히도 처음부터 끝까지 민족이동의 세기였다. 게르만이 대부분 정착한 이후에도 북에서 노르만이, 동에서 마자르, 동남에서는 사라센이, 그리고 다시 동쪽에서 몽고와 터키족이 연달아 돌진하여 왔다. 교통·통신 수단은 유치했고, 완력과 인원수로 전술이 결정되던 이 때에, 이와 같은 불안한 사회를 질서화할 방도는 결코 중앙집권적 통일국가의 구성에 있지 않았음은 명백한 일이었다. 그래서 봉건제도에 의한 질서회복이라는 방안이 나타났다. 그것은 자연히 토지를 중심으로 하여 직업적 군인·농민이 단계적으로 봉사와 보호라는 상호의존적 관계를 맺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교육의 목표는 사회의 유일한 요청인 치안의 확보를 위한 직업적인 무사 양성과 이러한 제도의 고정화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직업적 무사를 기사(騎士)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 교육을 기사도 교육이라고 한다. 기사 교육의 목표는 그 존재이유 자체에 비해서는 퍽 고상한 것이었고, 그것은 분명히 교회의 감화가 낳은 성과였음에 틀림없다. 물론 기사 교육인 만큼 체육과 무술이 중점이 아닐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상 또는 실질상 종교와 예절을 표면에 크게 내세운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며, 정신교육을 토대로 하여 만용의 시골 무사를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한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기사 교육은 무엇보다 예절을 존중하여 전에 없이 철저한 사회기풍을 수립하여 서양 현대인의 신사도를 비롯한 사회생활의 예의범절의 표본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소위 오늘날 서양의 에티켓인 신사도(紳士道)가 여기서 나온 것은 중요한 사실이라 하겠다. <李 海 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