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상/서양의 교육사상/서양 중세의 교육/세속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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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교육의 발달[편집]

世俗敎育-發達

종래에 그리스도교가 주체로 되었던 교육이 7-8세기에 걸쳐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그 원인은 봉건제도가 강화됨에 따라 각국의 왕권이 차츰 확립되었고, 그리스도교를 배경으로 한 교권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게르만 민족이 세운 왕국 중에 프랑크 왕국은 서양 교육사상에 주목할 만한 업적들을 남겼다.

특히 그 가운데 카를대제(Karl the Great)는 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고 대중의 일반 교육을 장려하였으며, 당시의 교육제도 개선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는 영국의 석학이었던 알퀸(Alcuin, 735-804)을 초빙하여 교육고문으로 임명하고, 교회와 국가를 위해 더욱 지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지도자 양성을 위해서 귀족 자제를 수용할 궁정학교(宮廷學校:palace school)를 세우고, 알퀸으로 하여금 궁정학교에서 수사학·변증법·수학·천문학 등을 교수하게 하였다.

카를대제는 게르만 민족을 세속적 교육을 통하여 교화시키고자 노력하는 한편 국내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신학 이외의 세속적 학예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도록 하는 명령을 내려 세속적 교육을 장려하였다. 또한 802년에는 전국에 의무교육령을 선포하고 모든 아동에 대한 의무교육을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시민교육의 발달[편집]

市民敎育-發達

십자군 전쟁의 결과로 동서간의 무역이 활발해지고, 상업과 공업이 발달되었으며, 자유시(自由市)의 성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상공업에 종사하던 이들이 새로운 사회적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그의 직업에 관련된 교육과 그들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을 하기 시작하였다.

즉, 신흥시민으로 등장한 이들이 원하는 교육은 종래의 승려·귀족·기사를 위한 교육과는 다른 직업적이고 생산적인 교육이었다. 따라서 시민교육의 이상(理想)은 실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유능한 인물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의도에서 그들은 조합학교(guild school)와 도시학교(city school)를 설립하였다.

조합학교[편집]

組合學校

도시 상공업자들의 자제들을 위한 학교제도로서 대학준비교육을 실시하는 라틴어중학교와 직업훈련을 목적으로 하는 직업학교의 두 가지 유형으로 발달하였다. 라틴어중학교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의 자제들이 입학하였고, 직업학교는 빈한한 하층계급의 자제들이 입학하였다.

도시학교[편집]

都市學校

도시학교는 도시민의 교육기관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의 자제들이 입학하는 영국의 문법학교(文法學校:grammar school)와 공중학교(公衆學校:public sc­hool), 독일의 라틴어학교 등 오늘날 중등교육의 기초가 된 학교와, 사립학교로서 부유치 못한 가정의 자제들에게 초등 정도의 교육을 실시하는 습자학교(習字學校)가 있었다.

도제교육제도[편집]

徒弟敎育制度

기술자를 양성하는 특별한 교육제도이다. 당시의 기술자는 모두가 도제교육을 통해서 양성되었다.

이의 구체적인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술자가 되려는 자는 10세 전후에 도제(견습공:apprentice)가 되어 배우고자 한 기술의 마스터(master)를 찾아가 그에게 봉사하면서 일정기간 동안 기술을 습득한다.

마스터에게 기술을 습득한 후 도제는 직공으로 승격하여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더 높은 기술을 습득하고, 앞으로 마스터가 되어 도제를 지도하는 데 필요한 교양과 수양을 쌓는다. 이같은 수련을 쌓은 직공은 독자적인 작품을 제출하여 심사를 받아 정식 마스터로서의 자격을 받고 조합원이 되어 자신이 도제도 가르치고 직공도 두면서 독자적인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문예부흥기의 많은 인문주의 예술가들도 이러한 도제교육제도를 통하여 훈련을 받았다. 한편 이상과 같은 중세 시민사회의 도제교육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기술교육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러한 중세의 시민교육은 교육사상 큰 의의와 가치를 지니게 되었는데, 그것은 교육의 대상을 일반 서민계급으로까지 확대케 하였고, 교회로부터 교육을 완전히 분리시켜 공공단체가 경영하게 하였다.

또한 생활을 위한 실제적인 교육을 실시하여 직업교육·기술교육·실업교육을 최초로 실시하였다는 점이다.

기사교육[편집]

騎士敎育

봉건제도의 확립에 따라서 기사(knight)계급이 등장하였고, 기사를 양성하는 교육이 세속적 교육형태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

기사의 교육목적은 야만적 무사에게 그리스도교적인 정신을 불어넣는 데 있었다. 즉, 기사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교적인 무인(武人)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기사의 군사적인 미덕은 용기·충성·관용이었고, 대(對)사회적 미덕은 예의·공손·자비였으니 이런 점에서 기사는 그리스도교적인 무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기사의 교육은 약자와 숙녀에 대한 보호와 만사에 정직할 것을 가르치고, 상사에 봉사하는 훈련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기사의 교육은 완전하고 우아한 기사를 만들기 위해서 전쟁, 사랑, 종교를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에 따른 기사교육의 십계율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① 기도, ② 죄악을 피하는 일, ③교회를 지키는 일, ④ 과부와 고아의 보호, ⑤ 여행, ⑥ 충성스러운 전쟁의 수행, ⑦ 귀부인이나 숙녀를 위해 싸울 것, ⑧ 정의의 수호, ⑨ 신을 사랑하는 것, ⑩ 진실하고 성실한 사랑의 말을 듣는 것 등이다.

기사교육의 조직과 단계를 보면 제1단계는 7세까지 가정에서 순종의 미덕, 쾌활한 성격, 경건한 신앙심 및 예의에 관한 훈련을 받고, 제2단계로 7세에서 14세까지 시동(侍童:page)으로서 영주의 저택이나 궁정에 들어가 귀부인에게 시중을 들면서 궁정생활의 예법과 충성심, 노래·무용·종교의식과 읽기·쓰기 등을 배우며, 달리기·권투·씨름·말타기·수영 등 신체적 훈련과 간단한 무기 사용법을 익힌다. 제3단계로 14세부터 21세까지는 기사의 종자(從者:squire)가 되어 장래 기사가 되기 위한 경험을 본격적으로 쌓는다. 특히 이때는 말타기·수영·활쏘기·검술·수렵·서양 장기·시 짓기와 읊기 등 기사로서 필수적인 7예(藝) 외에 음악·무용 등을 배운다. 21세가 되면 전투와 경기훈련의 실력 여하를 검사받는 기사입문식을 거행하여 정식 기사가 되는 것이다.

대학의 발달[편집]

大學-發達

중세 후기 세속교육의 발달은 대학의 발달로 나타났다. 원래 대학은 길드(guild)사회의 성립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11세기에 유럽을 풍미하던 조합운동의 하나로 발흥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배우려는 학생과 가르치려는 교수들이 모여서 하나의 길드를 형성한 것이 대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대학의 성립은 길드사회의 성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 위에 십자군 원정과 사라센 문화의 접촉에 의한 영향으로 대학의 발전은 더욱 자극되었다.

대학이 발생된 구체적 원인은 다음과 같다. 즉, ① 유럽인들의 이슬람 및 그리스 학자들과의 교류, ② 도시의 지식 발달과 함께 나타난 세속적 학문에 대한 열성, ③ 변천하는 사회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의학과 법학의 발전, ④ 중세의 그리스도교 사상에 만족하지 못한 학자들의 학문열 등이었다.

초기에 발생한 대학으로는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 1158)대학과 살레르노(Salerno, 1231) 대학, 파리 대학(1180) 등이었는데 볼로냐 대학은 법률학으로 유명했고, 살레르노 대학은 의학으로, 파리 대학은 신학으로 유명했다. 한편 영국에서는 옥스퍼드(1167)·케임브리지(1209)가 설립되었다.

중세대학의 일반적인 강의는 라틴어로 했고, 교과목은 7자유과로 기초를 쌓은 후에 전공에 따라서 신학·의학·법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였다. 수업 연한은 일정치 않았으나 대체로 4년 내지 7-8년 간이었다.

대학의 성격[편집]

大學-性格

초기의 대학은 학문에 흥미를 가진 학생과 교수가 자발적으로 모인 이지(理智)의 생활처였다. 교수와 학생은 대체로 빈곤한 생활을 하고 종교적 훈육보다도 세속주의에 치중하였다. 라틴어에 지식이 있으면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국가와 교회의 간섭없이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초기 대학은 처음에는 사적(私的) 연구단체로 건물도 비품도 미약하였으나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서 국왕의 공인을 얻게 되어 대학은 물적 원조를 받게 되고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당시의 대학에 부여되었던 특권을 살펴보면 교수와 학생은 병역·부역·세금이 면제되었고, 대학 내에 독립된 법정을 설치하여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은 교회의 감독이나 국가의 사법권 밖에 있는 일종의 치외법권적 특권을 누렸다.

또 대학은 학사·석사·박사 등의 학위 수여식을 가졌으며 학장·총장을 선출하는 자치권이 보장되어 있었다. 또한 교수와 학생은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신분상의 보호와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중세대학이 끼친 영향을 살펴보면 첫째, 지적 활동의 중심부가 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제문제에 관한 언론의 자유가 이로부터 발생하였다.

둘째, 고전문화를 계승하는 역할을 수행, 헬레니즘 문화를 서구문화의 기초가 되게 했고, 아라비아 문화를 서양문화에 소개하였다.

셋째, 자유로운 학문연구의 기관이었기 때문에 문예부흥운동의 선구자적인 역할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