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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로마시대의 사상[편집]

Hellenism·Roma時代-思想

그리스의 철학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까지 도달되었다. 이 높은 수준이란 학(學)으로서의 완성도를 의미한다. 수없이 그것을 돌이켜 보고 그것에 비추어서 사물을 생각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우리들의 피와 살이 되는 것을 준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의 사상은 철학은 물론 갖가지 학문의 원천(源泉)도 되었다.

그러나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이다. 그들도 그 시대의 인간임을 벗어날 수가 없다. 뒤에 뒤따르는 것이 있다. 현실도 변화한다. 현실의 변화에 관해서 그것을 설명하는 원리가 되어 있어도, 그 설명의 원리를 사용하는 사람과 장소와 정세(情勢)와는 추이(推移)가 불가피한 것이다. 철학의 존재방식도 그것들과 무관(無關)한 채 계속될 수는 없었다.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에 걸쳐 이미 그리스의 명운(命運)은 다하고 있었다. 폴리스(도시국가)는 붕괴되고 사람들의 교류가 성해지니,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자랑하는 문화를 통해서만 격류(激流) 속을 헤엄쳐 나가야 했다. 더욱이 그 변용(變容)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재위 전 336-전 323)의 동정(東征)은 그 속도를 촉진시켰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 문화는 변화 가운데 놓이면서 지중해 세계로 침투되었다. 시대는 세계정신(世界精神)으로, 세계국가에로의 동향을 띠기 시작하였다. 그리스 정신의 세계화인 것이다. 이것이 헬레니즘이라 불리는 시대이다.

철학의 무대도 아테네에서 알렉산드리아, 로마, 기타로 옮아 갔다. 그 내용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는 아니다. 작은 학파로 나뉘고 이론철학에서 실천을 주로 하는 철학으로 변하였다. 사람들에게는 의지할 것이 없었다. 국가는 자유를 잃어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외부적 혼란에 자신을 내맡길 수는 없었다. 비록 혼자 힘으로라도 안에 은거하면서 자기 내면(內面)에 의지해야 했다.

이렇게 하여 에피쿠로스 주의, 회의론(懷疑論), 스토아 철학 등이 등장한 것이다. 철학은 지식을 위한 지식임을 벗어나게 되었다. 행복을 위한 처세지(處世知), 인생지(人生知)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였어도 사람은 행복에 대한 소원(所願)을 전적으로 채울 수는 없었다. 동방의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정신을 구제하고자 서방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로마 시대의 종교철학이 되고 그리스 사상과 합류한다. 철학의 역사는 관념(觀念)에서 영혼의 평정(平靜)으로, 그 뒤에 영혼의 구원과 겹쳐진다. 이 인간의식(人間意識)의 변천은 행복의 내용의 추이를 의미한다. 여기에 헬레니즘·로마 시대의 사상적 특색이 있다.

또한 이 시대에 있어서 간과될 수 없는 것이 있다. 과학의 철학으로부터의 독립이 촉진된 것이다. 수학(數學) 분야에서 우선 에우클레이데스가 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사람으로 유클리드 기하학의 <원론(原論)>을 저술한 수학자이다. 이어 아르키메데스(전 287?-전 212)는 시칠리아섬에서 태어나 알렉산드리아에 유학, 부력(浮力)의 원리 등을 발견한 수학자·물리학자이다.

에피쿠로스[편집]

Epicouros (전 342/341-전 271/270)

그리스의 철학자. 사모스섬 태생의 아테네인으로 부친은 아테네 태생의 교사였다.

검소한 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12세-14세경에 철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읽고 쓰는 선생을 경멸한 때문인 것 같다. 진정한 동기는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을 깨우친 데에 있다.

18세 때에 아테네로 나아가 32세 때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35-36세 때 아테네에 있는 자기 집 정원에 철학학교를 개설하여 죽을 때까지 이를 주재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정원학교(庭園學校)'이다.

그의 철학은 아타라쿠시아(心境의 平靜)를 구하였다. 다수의 제자들과 검소하고 우정(友情)에 넘치는 생활을 함께 하였다. 그리고 부인(婦人)은 물론 심부름꾼이나 노예들도 참가를 허용하였다. 저술은 다작으로서 300권을 헤아렸다고 한다. 그러나 잔존되어 있는 것은 <서간>과 <주요교설(主要敎說)> 그리고 <단편(斷片)>뿐이다.

그의 철학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原子論)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원자의 운동, 자유의지(自由意志), 결정론(決定論) 등의 문제로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였다. 원자론적 유물론(原子論的唯物論)이라고도 한다. 그 스스로는 불가분(不可分)·불변(不變)·무수(無數)한 원자가 근본물질이라 한다. 그것이 무수의 공허(空虛) 속을 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윤리학설에서는 개인주의(個人主義)의 형태를 취한다. 에피쿠로스의 고유한 사업은 사람들을 종교적 미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오로지 학문에만 의지케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각 개인에게 선택과 기피(忌避)의 자유가 있어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라고 한다.

에피쿠로스 학파[편집]

-學派

이 학파를 창시한 것은 신(神)과 같이 추앙을 받던 에피쿠로스이다. 다수의 제자가 쾌락주의(快樂主義)를 계승하여 그리스어로 논문을 쓴 피로데모스, 메트로도로스(전 331/330-전 278/277)가 유명하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설을 라틴어로 남김없이 철학시(哲學詩)로 정리해 낸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는 더욱 유명하다.

메트로도로스는 란프사코스의 사람으로 열렬한 에피쿠로스 동조자(同調者)였다. 그를 안 후 그의 곁을 떠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스승보다 7년 앞서 53세로 타계하였다. 그는 에피쿠로스의 모사(模寫)라고까지 불리었던 선량한 사람으로, 곤란에 부딪혀 또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 학파의 사람들은 철학을 행복추구의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행복이란 일종의 정신적 쾌락으로, 그것을 구하며 그것을 얻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단순히 그때그때의 일시 쾌락으로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언제 어떤 때에도 마음이 '어지럽혀지지 않은 상태'를 쾌(快)로 보았다. 공(公)의 생활을 단념하라, 숨어서 조용히 살라고 권하고 있다. 국가는 한사람 한사람이 서로를 지킬 필요에서 계약을 맺은 단체에 불과하다. 이 사상은 근세 국가계약설의 선구가 된 것이다.

서간·주요교설·단편[편집]

書簡·主要敎說·斷片

에피쿠로스는 많은 책을 저술하였으나 대부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세 가지의 <서간>과 <주요교설>로부터 취해진 집록(集錄)이 전해진다.

제1의 서간―헤로도토스에게 보낸 것. 철학의 주요 원칙을 논하고 있다. 자연학(自然學)에 관한 것이다.

제2의 서간―퓨토그레스에게 보낸 것. 천계(天界)의 여러가지 일을 취급하고 있다. 제3의 서간―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낸 것. 생활에 관한 가르침이다. 이러한 편지를 통해 에피쿠로스 철학의 기본선(基本線)을 알 수 있다.

<주요교설>은 40개의 단편을 모은 것. 제신(諸神), 죽음, 쾌락, 고통, 정말로 있는 것의 증표, 정의 그 자체 등이 기술되어 있다.

<단편>은 <에피쿠로스의 권고>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윤리적인 사안(事案), 그의 사람 됨됨이, 윤리학 등을 알 수 있다.

서간과 교설은 현대에 있어서 에피쿠로스의 인품과 사상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3세기 전반)가 <저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학설> 중에 <에피쿠로스전(傳)>이라는 저서를 남겨준 덕분이다.

타인의 저서로부터의 인용은 하나도 없고, 에피쿠로스의 말만이 수록되어 있다.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질에 관해서>와 더불어 고전적(古典的)인 저작이다.

루크레티우스[편집]

Lucretius (전 94-전 55)

로마의 시인·철학자.

재능과 영감(靈感)이 뛰어난 사람. 그의 시는 극히 기교적(技巧的)이며, 열렬한 에피쿠로스 신봉자(信奉者)였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설에 의하면 미약(媚藥)으로 인해 발광하고 광란 발작의 사이사이에 수권의 책을 썼다. 40세경에 자살하였다고 전해진다.

조국의 난세(亂世)를 개탄하고 마음을 편히 하여 의론을 행할 수 없음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야만스러운 전쟁의 즉시 중지와 평화를 희구하였다. 그런데도 현자(賢者)들의 가르침으로 이룩된 굳은 결의의 조용한 전당에 들어박혀 <자연론(自然論)>을 저술하였다고 전해진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시경(詩境)을 개척함을 즐거운 일이라고 노래한, 교훈적 시인이기도 하였다.

자연론[편집]

自然論

루크레티우스는 높은 긍지를 갖고 있던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미묘한 점에 이르기까지 시(詩)로 재현시키려 하였다. 로마인으로서는 처음 있는 시도였다. 그가 취급한 것은 에피쿠로스의 자연학 부분이다. <자연에 관하여>의 라틴역(譯)으로, 그 의미를 본다면 <사물의 본질에 관하여>라고 번역된다. 그것이 이 <자연론>이다.

사물(事物)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의 일체(一切)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자연학이 주로 되어 있고 에피쿠로스파의 주장이나 윤리관, 주관적인 것을 간혹 첨가시켜 놓은 데 불과하다. 그는 자연학을 기술한 후 윤리 방면에도 확대하려 하였다. 작품 내용의 추이(推移)상 명백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이 작품도 미완성이다.

에피쿠로스는 원자(原子) 상호의 충돌은 중량의 차에 의한 낙하 속도(落下速度)의 상위(相違)가 원인이라 하고 있다. 루크레티우스는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경운동(斜傾運動)'을 일으키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문제도 이 생각으로 해결하려고 했으나 그 논지는 애매하고 난해했다.

이 작품은 키케로의 주선으로 출판된 듯하나 대중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일부 사람은 일찍부터 충분히 진가를 인정하고 있었다. 후배인 베르길리우스(전 70-전 19)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시인 오비디우스(전 43-후 17)는 언제인가 대지(大地)가 멸망하는 날이 있다면 그날이야말로 숭고한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멸실하는 날일 것이라고 하여 이 작품의 영속성(永續性)을 예언하고 있다.

스토아 학파[편집]

-學派

'스토아'란 원래 전방을 기둥으로, 후방을 벽으로 둘러싼 고대 그리스 여러 도시에 있어서의 일종의 공공건축(公共建築)을 의미한다. 이 학파의 창시자 제논이 아테네의 한 '주랑(柱廊)'(스토아)에서 강의를 한 데서 연유하여 이 말이 학파 전체를 나타내는 명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 학파는 통상 역사적으로 3기로 구분되어 기원전 3세기를 '고(古) 스토아' 시기(제논, 클레안테스, 크리시포스), 기원전 2-1세기를 '중기스토아' 시기(파나이티오스, 포세이도니오스), 기원후 1-2세기를 '후기 스토아' 시기(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고 부른다.

지리적으로 고찰한 경우 고스토아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중기 이후는 주로 로마로 활동무대를 옮기고 있다. 또 파나이티오스(전 185?-전 109)를 제외하고 이 학파에는 순수한 그리스인이 없고, 대부분 소아시아의 신흥무역도시 출신의 셈계(系)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의 출신계층과 직업도 상인의 자제·고학생·노예·황제와 같이 잡다했다.

스토아는 반드시 하나의 핵(核)을 중심으로 형성·계승되어 고정화된 사상체계(思想體系)는 아니다.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 사상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고 내용은 다양성(多樣性)을 갖고 있다.

스토아파 사람들은 학문을 우주의 구성·생성(生成)을 주된 대상으로 하는 '자연학'과 '논리학(論理學)'·'윤리학(倫理學)'의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이러한 3개 부문은 각각 독립하고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논리학을 매개로 하여 상호 관련되어 자연학에서 윤리학에 이르는 독특한 세계관(世界觀)을 형성하고 있다. 다만 사람과 시대에 따라 초첨(焦點)의 추이는 엿보여 고스토아에서 후기로 넘어감에 따라 윤리학에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스토아 사상은 윤리학 면에서는 주로 키니코스 학파의 계보(系譜)를 좇고, 자연학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갖가지 요소가 혼재(混在)하며 절충되어 있어 선행하는 특정 학파와 관련짓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

다만 이 학파의 사람들에게서 지배적인 현상은 외적 권위(外的權威)나 세속적인 것을 거부하고 금욕과 극기(克己)의 태도를 갖고자 하는 것인데, 실천적 경향과 유물론적 일원론은 각각 키니코스 학파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은 흔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살던 시대가 이전과 같이 좁은 특정의 폴리스(도시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한 동·서(東·西) 양세계에 걸친 지배권의 확립이나 로마 제국의 성립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생활 공간이 확대된 시대이며, 또한 정치적으로도 과도기이던 사실에 기인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시대에 개인은 생존 근거를 추상적인 공론(空論)이나 정치적·사회적 현실 중에서가 아니라 자기의 의지라든가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사실 중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스토아의 근본 특징은 이 세계(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물체이며, 어떤 불(火)과 같이 미세한 물질(퓨르·테크니콘=創造的 火, 스페르마티코스 로고스=種子的 로고스, 프네우마=氣息·靈氣 등 사람에 따라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린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자연학에 있다.

신(神)조차도 예외는 될 수 없이 인간이나 그것을 둘러싸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물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만물은 이 근원적 불로부터의 생성과 그 곳으로의 환귀(還歸)의 과정을 반복하도록 결정지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물체로서의 신(神)이 마치 봉밀(蜂蜜)이 벌집 속으로 번져나가듯이 우주 만물을 관철하여 순환하는 것이 섭리이며, 인간의 측면에서 말하면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스토아에게는 우주 만물은 동질(同質)이며 상호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한발 나아가 신·자연·운명·섭리는 동의어로 되어 있다.

다만 작용을 하는 것과 작용을 받는 것과의 상위가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작용의 원천(源泉)도 감각(물체로부터의 자극과 그것에 대한 반응)에서 구해지고 있다. 스토아의 사람들은 종종 "인간은 우주라는 큰 도시의 시민(코스모폴리티스)이다"라고 주장하는데 이 발상(發想)도 이상과 같은 관점과 관련이 있다. 이런 견해를 취하는 한 스토아의 입장은 유물론적 일원론(唯物論的一元論)·결정론(必然論)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유물론은 근원적 물체(根源的物體)가 '프네우마(氣息·靈氣)'라고 표현되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어딘가 포착될 수 없는 것으로, 유물론과 표리(表裏) 관계에 있는 유심론(唯心論)으로 전체계(全體系)를 전환시켜 버릴 가능성을 갖고 있다. 사실 스토아는 후기로 접어들면서 그런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스토아의 유물론적 일원론은 앞서 본 신(神)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이 일종의 범신론(汎神論)과 표리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스토아의 사상은 전체로 볼 것 같으면 이러한 모순된 면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표면상의 주장 내지 학파가 창설된 당시의 주장과 상반되는 사실이 점차 강조되어 온 경우가 있다.

가령 윤리학 면에서 우주를 지배하는 필연성 중에서 "인간이 여하히 자유를 획득하여 사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필연과 자유와의 관계가 문제이다. 스토아의 사람들은 "일관하여 산다" "자연에 순종하며 산다"라는 것을 목표로 하여 강조한다. 이는 본시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을 통찰함으로써 인간의 유덕(有德)한 생활에 의해 유익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선택하면서, 우주의 커다란 흐름에 순응(順應)하여 조화있게 살고자 하는 주체적·적극적 태도를 의미했다. 논리학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주법칙의 인식수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후기가 되면서 자기의 권능내(權能內)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여 후자를 선악(善惡)과는 무관한 것으로 무시 내지 체념하는 태도를 취하려 한다. 스토아의 사람들은 종종 아파티아(어떤 것에도 마음의 동요를 받지 않는 것)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것도 후기로 옮아감에 따라 소극적 의미로 강조되었다.

스토아의 사상은 고대(古代) 말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종교·문학 분야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가령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을 스토아의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이른바 '신플라톤 주의'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0 ?-221/220)나 오리게네스도 그리스도교를 신학으로 체계화하는 데 있어서 스토아의 입장을 원용(援用)하고 있다. 자연사상(自然思想)의 성립이나 브루노·스피노자의 사상 등 근세에 있어서도 신과 자연을 동일시하려는 스토아의 관점이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 후기 스토아의 윤리사상은 몽테뉴 등의 모랄리스트들에게 일종의 처세훈(處世訓)으로 애독되었다.

현대에 있어서는 논리학 분야에서 말과 말의 관계가 아니라, 명제(命題) 상호의 관련을 문제 삼으려는 스토아의 논리학이 재평가되고 있다.

제논[편집]

(키티온의) Zenon (전 334-전 262)

스토아 학파의 체계적 창시자·수립자.

키프로스섬의 키티온 출신이다. 원래 무역상인의 아들이며 그 자신 상업상으로 항해 중 난파되어서 아테네에 기착한 것이 철학에 종사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가 스토아에서 강의를 행한 것이 이 학파의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

그는 '모순이 없는 것' '수미일관(首尾一貫, 호모로기아)'이라는 것을 특히 강조하였다고 전해지며 이것이 그 후 스토아의 기조(基調)가 되었다. 그의 저작으로는 <자연을 좇는 생활에 관하여>등 몇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하나도 현존(現存)하는 것은 없고, 후대 저작가들에 의해 그 내용이 단편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데 불과하다. 이는 다른 고(古)·중기(中期) 스토아 사람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클레안테스[편집]

Kleanth

s(전 331-전 232)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 제논의 후계자. 철학자.

소아시아의 아소스 출신으로 물 긷는 노동을 하면서 제논의 강의를 듣고 후일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스토아의 신학자(神學者)라고 일컬어져, 신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발상은 그에 의해 확립되었다고 한다. 특히 시(詩) 형태로 사상을 전개하는 것을 장기로 하여 <제우스 찬가(讚歌)>가 전승(傳承)되고 있다.

크리시포스[편집]

Chrysippos (전 280?-전 207?)

초기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클레안테스의 제자.

소아시아의 소로이 출신. 엄청난 다작가이며 반드시 독창적인 사상가는 아니었으나 스토아 사상을 체계화하는 데 공적이 있었다. 특히 논리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자신만만한 사람이어서 "내가 없으면 스토아 학파는 존재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스토아 사상은 파나이티오스, 포세이도니오스(전 135 ?-전 51)(中期 스토아) 등 로마의 지배계급과 친교가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 로마로 중심이 옮겨졌다.

중기 이후의 스토아는 한편에서는 플라톤의 입장이 대폭적으로 받아들여져 2원론적 색채를 농후하게 하였다. 다른 한편, 로마인의 실리적 국민성에 적응하기 위해 처세훈화하여 가고, 또 종교적 경향을 띠며 학파로서는 상당한 변질을 보았다.

세네카[편집]

Seneca(전 54-후 39)

후기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에스파냐 코르도바 출신으로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 부친은 당시 유명한 수사학자였다.

그 자신은 이미 젊어서부터 변호사·작가로서도 명성을 떨쳐 궁정에 출입했다. 클라우디우스제(재위 41-54)의 비(妃) 메사리나에게 경원받아 8년간 코르시카섬으로 추방되었다. 이때의 고독한 체험이 스토아 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게끔 하였다고 한다. 그 후 네로 황제(재위 54-68)의 가정교사를 하였으나 음모에 말려들어 혈관에 독액을 주사하여 자살하였다고 한다.

그는 플라톤적인 영혼과 육체의 2원론을 바탕으로 인간에 있어서의 근원악 존재를 인정하고, 악에 있어서의 인간 평등과 인인애(隣人愛)·인간애를 강조하고 있다.

행복한 생활에 관하여[편집]

(저술된 연대는 未詳)

그에게는 <대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12권의 저작이 남아 있다(일부는 斷片的). 실제 내용은 대화가 아니고 서간이다. 이 책은 그중 한 가지로, 그의 형에 대해 씌어진 것으로 스토아의 관점에서 행복을 논하고 있다.

재산·명예·쾌락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행복의 제1 조건이 아니고 정신(靈魂)의 건전성이야말로 필요한 것임을 많은 실례를 들어가면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경우 재산·명예 등을 전적으로 부정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런 것을 이용하고 지배하라고 주장한다.

에픽테토스[편집]

Epictetos (55?-135?)

후기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소아시아의 프리기아 출신으로 원래 노예였는데 팔려서 로마로 왔다. 그의 이름 자체가 '뒤에 산(買) 사람'을 의미한다. 그 자신 자기의 생애를 "노예 에픽테토스로서 나는 태어나 절름발이이며 곤궁하기는 이로스(호메로스의 시에 등장하는 걸인의 이름)와 같다. 그러나 제신(諸神)의 친구"라고 2행시(二行詩)에 읊었다고 한다. 후일 해방되어 학원을 개설하고 강의를 하였다.

그는 우리들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 지배할 수 있는 내적(內的)인 것과, 육체·부(富)·주위 환경이라든가 하는 의지에 의해 좌우될 수 없는 외적인 것과를 구별한다.

그리고 우리는 후자를 무리하게 얻으려 한다든가 피하려 하지 말고, 자기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아 무관심한 태도를 취해야 하며, 전자에 대해서만 세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은 최대의 선(善)인 자유를 획득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해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내하고 억제하라'를 모토로 하였다고 전해진다.

어록[편집]

語錄

에픽테토스는 아무 저작도 남기지 않았다. 제자인 아리아노스(95년경-175)가 그의 담화를 필록(筆錄)한 <데이아토리바이>(語錄·談話)라고 하는 것이 전해진다. 더욱이 아리아노스는 <엔케이리디온>(提要·要錄)이라 불리는 <데이아토리바이>로부터 적당하게 발췌·요약한 소책자를 편집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편집]

Marcus Aurelius (121-180)

로마 황제.

그가 재위하던 시대는 국외에서는 게르만족의 침입에 의해, 또 국내에서도 전염병의 유행, 천재 등이 계속되어 로마 제국이 위기에 직면하였던 시대였다. 그는 소년시대로부터 에픽테토스의 영향을 받아 스토아 사상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명상록[편집]

暝想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저서. 원제(原題)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한 일>을 의미하며, 12권으로 되어 있다. 대우주(大宇宙)와 그 속에 사는 소우주로서의 자기 자신과의 대비(對比)를 기조로 하는 내면적 자기 반성의 기록. 특히 죽음의 문제가 끊임없이 논해지며 또 세계(宇宙) 시민의 발상이 되풀이하여 강조되고 있다.

회의파[편집]

(스켑시스 학파) 懷疑派

이 파를 창시한 사람은 엘리스 출생의 피론이다. 회의파는 초기가 고회의파(古懷疑派), 중기가 중(中)아카데미아, 후기가 신회의파이다.

회의론은 주관성이 강하다. 그 방향이 가장 철저한 것이다. 주관과 객관과의 통로를 파괴하며, 보편적인 학(學)도 인식도 진리도 부정한다. 주로 주관적 의견 가운데 파묻혀 버리고 만다. 명백한 주장을 피하는 것이다.

가령 무엇을 말할 때에도 "그렇게도 말할 수 있다" "그럴는지 모른다" "그럴 것이다" "내게는 그렇게 생각된다" "단정(斷定)은 않는다" 등의 말을 쓴다. "단정 않는다"는 것도 "단정은 않는다"라고까지 한다.

결국 에포케(判斷中止)에 의해, 행동의 목적인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철학의 목적은 행복하게 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고회의파에는 피론의 제자 플리우스 출생의 티몬(전 320-전 230?)이 있다. 회의파 이외의 모든 그리스 철학자에게 총명하고 기지에 찬 조소를 가하였다.

중기 아카데미아의 아르케실라오스(전 316-전 241)는, 플라톤학파에 처음으로 회의론을 도입하였다. 카르네아데스(전 214/213-전 129/128)는 이 파의 후일의 학두이다.

신회의파에는 회의 10조(條)를 모아 해석을 붙인 아이네시데모스가 속해 있다. 이 10조란 판단을 삼가야 할 10가지 이유이다. 아그리파, 섹스토스, 엠피리쿠스(후 200년?)도 이 파의 사람들이다. 섹스토스는 그리스의 회의론 연구의 주요 자료로 되어 있는 <제학자반박(諸學者反駁)> 11권을 쓴 의사이다. 이러한 사상은 근세 초기에 몽테뉴 등에서 부활을 보았다.

피론[편집]

Pyrrh

n (전 360년?-전 270년?)

그리스의 철학자.

엘리스 출신으로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연배인 아낙사르코스에게 사사하였다.

30세 때 아낙사르코스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정(東征)에 참가하여 인도에 갔다. 거기서 고대 인도의 나체 수도자를 알았다. 그것은 육체적 쾌락을 피하고 자연의 관상(觀想)을 주로 하는 것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비술(秘術)·금욕·현자의 도(道)를 배웠다고 한다. 인도에서 돌아와 철학자로서의 생애를 시작하고 엘리스에 학교를 개설하였다. 신(神)과 같이 혼의 안정(安靜)을 얻은 사람으로 유명하였다. 저서는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애초에는 일개 화가에 지나지 않았다. 데모크리토스설을 공부한 것이 동기가 되어 회의론의 기초를 만든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고대회의론이 그의 이름에서 연유하여 피론 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제자인 티몬이 그의 학설을 전하고 있다. 우리들은 다만 이것저것 알 수 있는 데 불과하다. 어떠한 주장도 동일한 강도로 반대설이 대치(對置)될 수 있음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모든 의견·결정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판단중지의 입장이다. 여기로부터 행복에 이르는 새로운 생활 이상은 그리스 회의론의 근본 사상을 이루는 것이다.

절충파[편집]

折衷派

절충파란 특정한 무리의 사람들 또는 틀이 잡힌 사상 체계를 표시하는 것은 아니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기원후 3세기에 걸쳐, 철학상의 여러 학파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경향을 말하며, 오히려 '절충주의'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처세상의 지침을 부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일종의 핸드북과 같은 것이 유행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각 학파의 관심이 점차로 독자적 사상을 전개하는 것보다 오히려 일반 사람들의 교화에 힘쓰게 되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더욱이 이 배후에는 당시 각 학파에게 이미 독창성을 표방할 수 없게끔 된 사정이 있었다.

그 때문에 각 학파는 학조(學租)라고도 할 인물로 환귀하여 재해석(再解釋)으로 시종하든가 또는 통속철학(通俗哲學)에 철저하든가 두 가지 길 이외에는 학파의 존재 의의(意義)를 발견하고 존속을 꾀할 수가 없게 되었다. 통속철학으로의 길을 더듬게 된 데에는 문화의 중심무대가 로마로 옮겨감에 따라 현실적인 국민성으로 해서 각 학파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엄밀·추상적인 이론을 전개하는 것보다 오히려 현실에 대한 각각의 신봉하는 사상적 유효성·적절성을 역설할 필요가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이상 두 가지 길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각 학파간에 정도의 차이가 엿보이며 또 하나의 학파 내에서도 그것을 둘러싸고 분열이 생기는 경우가 있었다. 가령 '아카데미아'의 경우 플라톤으로 돌아가 그것에 충실하려고 하는 그룹(플라토니코이=플라톤 일문)과의 대립이 일어났다.

하여간 이러한 풍조와 더불어 각 학파는 점차 변질하여 종래의 학파간의 한계가 해체되게 되었다. 그리고 각 학파는 각자의 교설(敎說)의 기원을 되도록 옛날로 소급하여 거기서 권위를 구하려 하였다. 철학자는 어떠한 의견을 펼 때에는 언제나 고전(古典)을 참조하여 전거(典據)로 삼으려 하였다. 그 결과 기원전 2세기경부터 과거 철학자의 교설을 집성(集成)한 '학설지(學說誌)'나 플라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해·전집의 편집과 같은 활동이 성행하였다.

철학 분야 이외에도 바르로(전 116-전 27)와 같이 로마의 종교·사회제도·언어·관습과 같은 모든 분야에 관한 고사내력(古事來歷)을 집성·고증한 백과전서적 저술가가 출현하고 있다.

절충주의는 이와 같은 소위 상고주의(尙古主義)라고도 할 풍조와 표리 관계에 있다.

절충주의의 구체적 내용은 각 학파에 따라 다른데, 여하튼 자기 학파의 사상을 중심으로 다른 학파의 사상을 흡수·절충하려 하고 있다. 그 근저에는 학파간의 차이는 명목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결국은 하나의 근원으로 환원되어 근본이 일치한다는 상고주의적 발상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이용하여 플라톤의 2원론적 세계관 중에 스토아의 윤리학을 엮어 넣으려고 한 후기 아카데미아, 특히 아스칼론의 안티오코스(전 130/120?-전 68?)는 당시 절충주의의 전형을 나타낸다. 그의 제자 키케로는 <아카데미카> <최고의 선과 악에 관하여> 등의 저작 가운데서 스승의 설을 소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은 극단적인 경우 단지 당시 제 학파간의 학설상 차이를 절충·해소해 버릴 뿐만 아니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의 근본적 대립마저도 소멸시켜 후자를 전자 속에 전적으로 환원시키는 시도조차 행해지고 있다.

하여간 플라톤의 사상을 중심으로 다른 여러가지 사상을 절충화하려는 경향은 아카데미아뿐만 아니라 중기 이후의 스토아에도 엿보이고, 후일 기원 1세기 후반경에 플루타르코스 등에서 볼 수 있는 플라톤 주의의 부흥이라고도 할 현상으로 계승되어, 3-4세기의 '신플라톤 주의파'에서 체계화되고 결실을 보았다.

다른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사상을 절충화하려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레노스(129년?-199)는 그 일례이다. 그는 본시 담즙(膽汁)·점액(粘液)과 온(溫)·냉(冷)·한(寒)·난(暖)의 짝지음에 의해 독특한 병인론(病因論)을 전개한 의학자였다. 그리고 의학론의 입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에 대한 공감(共感)과 스토아에 대한 반감을 품고, <히포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학설에 관하여><유리아노스 반론(反論)> 등의 저작 속에 여러 사람의 학설을 인용하면서 독자적 절충주의를 전개하고 있다.

키케로[편집]

Cicero (전 106-전 43)

로마의 철학자·정치가.

아르피눔이라는 시골 소읍의 신흥계급인 기사 가문 출신이다. 후일 로마로 나가 변설(辯舌)과 문재(文才)에 의해 집정관이라는고위직에 올라, 공화정시대(共和政時代)에 정치가로서 활약하였다. <베르레스를 고발한다> <바니리우스법 변호(辯護)> <카틸리나를 고발한다> <필리피카> <공화정에 관하여> 등의 저작은 그의 이 방면에서의 활약을 나타낸다. 동시에 그는 아카데미아파 아스칼론의 안티오코스, 스토아 학파 파나이티오스의 강의를 들었고, 다수의 철학적인 저작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사상가로서의 독창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의 공적은 그리스어의 철학 용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데에 있다. 오늘날 영·독·불의 철학 용어 중 대부분은 그의 라틴어에 의거하고 있다. <제신(諸神)의 본질에 관하여> <투스쿨룸 담의(談義)> 등의 철학 저작은 당시 철학 제파(諸派)의 사상을 아는 데 있어서 불가결의 자료이다.

그는 대개의 경우 자기 자신을 비판자의 위치에 놓고 당시의 3학파 인물을 등장시켜 논쟁케 하는 형식으로 철학의 저작을 전개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사상은 전체적으로 절충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정치가·공인(公人)으로서의 입장에서 사회로부터 분리된 곳에서 개인적 행복을 추구하려 하고 있다. 에피쿠로스 학파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나머지 2학파에 대해 공감을 나타내고 있다.

플루타르코스[편집]

Ploutarchos (46?-120 이후)

그리스의 말기의 역사가.

중부 그리스의 카이로네이아 출신. 아테네, 로마 등 각지로 유학했고 카이로네이아의 시정에 관여하기도 하였으나, 만년에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의 최고 신관이 되었다. 그의 저작은 전기(傳記)와 수상(隨想) (<모라리아>-倫理論-라 불린다)으로 대별되어 보다 방대한 양의 논고(論稿)로 이루어져 있다.

사상적으로는 플라톤을 신봉하며 특히 만년의 우주 생성을 주제로 하는 <티마이오스>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우주가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생성된 것이라는 데 대해 독창적인 해석을 표시하였다. 그는 궁극적으로는 플라톤의 사상을 축으로 하여 그리스의 종교적 전통과 이집트로 대표되는 동방 종교와의 종합을 꾀한 것 같다.

영웅전[편집]

英雄傳

<대비열전(對比列傳)>이라고도 한다. 테세우스와 로물루스, 데모스테네스와 키케로처럼 그리스·로마의 유사한 인물끼리 짝지어져 구성되어 있다. 후일에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도 영향을 주는 등 현대에 이르도록 애독되고 있다.

신아카데미아[편집]

新Academia

중기 아카데미아의 카르네아데스 이후 플라톤 학파는 신아카데미아로 재차 독단적 방향을 걷는다. 스토아 철학으로 기울어져 절충주의로의 길을 한층 추구하게 되었다. 대표자는 라리사의 필론과 아스칼론의 안티오코스이다.

라리사의 필론(전 160-전 80)은 로마에서 강의를 하였다.

키케로는 그것을 들었다고 한다. 필론은 카르네아데스와 스토아파를 조정하여 안전의 명백한 지식을 주장하였다.

아스칼론의 안티오코스(전 68 사망)는 회의사상은 자기모순이라 하여 방기(放棄)하였다. 그리고 진리는 모든 진정한 철학자가 일치하는 곳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가장 행복한 생활을 위해서는 덕(德)만으로는 불충분하나, 어떤 종류의 행복한 생활을 위해서는 충분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필론은 제4차 아카데미아를 수립하여, 그 이후를 신아카데미아라고 하였다. 제5차 아카데미아의 학두는 안티오코스이다.

유대·알렉산드리아의 철학[편집]

Judea·Alexandria-哲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정 이후 동·서양세계의 융합에 있어서 사상면에서 주도적 역할을 다한 것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기원전 2세기경, 히브리어로 쓰인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였다. 이는 통상 <70인역성서(七十人譯聖書)>(세프사긴타)라고 불리는데, 그 성립의 사정은 역시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의 저작이라고 추정되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서술되어 있다.

이와 같은 번역과 동시에 구약성서를 그리스 철학의 관점에서 해석·주해하려고 하는 시도도 있었다. 기원전 2세기 중엽경의 아리스토브로스, 기원후 1세기경의 필론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전자의 저작은 단편적으로밖에 전존(傳存)되어 있지 못하나, 후자의 것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이러한 작업을 행하는 전제로서 그들은 그리스의 철학 사상과 모세 율법과의 동질성 및 전자의 역사적 기원을 후자에서 구하는 '그리스 철학의 유대 기원설'이라고도 할 특이한 주장을 한다.

필론[편집]

Phil

n (알렉산드리아의) (전 25?-후 50?)

유대인 철학자.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이며, <구약성서>를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의 사상을 원용하여 비유적 해석을 행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즉 그의 <창세기> 해석을 예로 들면,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전개되어 있는 데미우르고스(造物神)와 이데아의 관계를 교묘히 엮어 넣으면서 전체가 신에 의해 창조된 혼의 타죄(墮罪)-정화(淨化)의 과정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 그에 의해 <구약성서>의 신의 초월성은 주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의해서 비로소 이론적으로 뒷받침되어 체계화되었다. 또한 그는 저서 중에 유대인의 종교상 절대적 정당성을 그리스 철학자의 주장을 많이 인용하면서 증명하려 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당시의 사상을 알기 위해 그의 저서는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다.

그의 사상은 신플라톤 주의나 그리스도교 교부(敎父) 및 근세의 스피노자 철학 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천지 창조에 관하여> <비유적(比喩的) 해석> <특수율법에 관하여> 등 주로 <구약성서>의 모세 5경(五經)이라고 하는 부분을 대상으로 하는 방대한 저작이다.

신피타고라스 주의[편집]

新Pythagoras主義

1세기경부터 피타고라스의 이름을 빌린 갖가지 문서가 유포되었다. 내용으로 보면 사후 영혼의 운명을 신비적으로 묘사하면서 금욕주의를 설파한 것이 대부분이다. 또 '수(數)'를 감각에 의해 파악할 수 없는 세계를 상징하고, 그와 같은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하는 전제 아래에서 플라톤·스토아의 양 사상을 절충한 것과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출현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제정기(帝政期) 로마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유행되고 후일의 신플라톤 주의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다. 인물로서는 니기디우스·피굴루스(전 1세기 후반)·티아나의 아폴로니오스, 가데스의 모데라투스(모두 후 1세기 후반), 아파메아의 누메니오스, 게라사의 니코마코스(후 2세기 중엽) 등이 있다.

신플라톤 학파[편집]

新Platon學派

3세기 이후,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를 기초로 전개해 오는 사상 체계로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스토아 학파 등 고대 여러 학파의 사상 종합화 위에 성립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는 이데아계-현상계(現象界)라고 하는 플라톤적 2원론을 계승하고 있으며, 특히 전자를 세분화하여 전 존재를 계층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데 특색이 있다.

신플라톤 주의는 그 학파로서의 존재는 529년 유스티니아누스제(帝)에 의한 이교도(異敎徒)의 학원폐쇄령과 더불어 종지부를 찍게 되는데, 사상 자체는 중세·근세를 통해 커다란 영향력을 가졌었다. 르네상스에 있어서의 플라톤 주의 부흥이라 일컬어지는 것도 실제 내용은 신플라톤 주의의 색채를 농후하게 갖는 것이었다.

학파의 발전을 역사적으로 보면, 학조(學祖) 플로티노스에서 제2대 학두 포르피리오스(232/233-305? )를 거쳐 얌블리코스(4세기 중엽)까지는 로마에 그 중심이 있었다. 그 후에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 등지의 동방세계로 중심이 옮겨졌다. 특히 전자의 경우, 그 곳에 존속하던 플라톤을 계승하는 아카데미아가 그대로 신플라톤 학파의 학원(學園)화가 되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의 학풍은 프로클로스(410-485, <신학원리>나 플라톤의 주해서를 다수 저술했다), 시리아누스, 다마스키오스(470년- ?), 신프리키오스로 계승되어 갔다.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은 여류 철학자들이었으며 그리스도 교도에 의해 학살된 휴파티아, 시네시오스(370경-413) 히에로쿨레스 등에 의해 4-5세기에 걸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다른 한편, 서방세계에 있어서도 신플라톤 주의는 전적으로 소멸되어 버린 것은 아니고 마크로비우스(400년경의 사람. 신플라톤 주의의 관점에서 키케로의 <공화정에 관하여>에 수록되어 있는 <스키피오의 꿈>을 해석하였다), 마르티아누스 카페르라, 칼키디우스(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라틴어로 번역, 주해를 거쳐 등장하였다) 등의 인물이 4-5세기에 걸쳐 등장하였다. 다만 그들은 동방의 경우와 달리 반드시 틀이 잡힌 그룹을 형성하였던 것은 아니다. 또 서방세계에서 신플라톤 주의는 그리스도교와 점차 결합되어 갔다.

이에 대해 동방의 경우 쇠퇴 일로에 있던 이교(異敎)에 대해 이론적 지주를 주려는 경향이 엿보인다. 즉 이교의 제신(諸神)이나 신화를 플로티노스의 사상 체계 속에 엮어 넣어 재해석하려는 의도가 보여 신비주의적 경향을 심화해 갔다.

신플라톤 주의는 플로티노스의 경우를 예로 들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즉 이데아계와 현상계로 2분(二分)하고, 전자 중에 '1자(一者)', (토·헨), '누스'(지성 내지 정신), '프시케'(영혼)의 3원리(三原理)를 설정한다.

이 '1자'에 관해서는 '선(善)한 것' '단순한 것' '자족적(自足的)인 것' 등 갖가지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명확한 규정이 불가능한, 오히려 "그 무엇이 아닌가"라고 하는 부정적인 형태로밖에 말할 수가 없는 온갖 존재의 구극적(究極的) 원리라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1자'의 발상은 여러가지로 다양하게 나타나 있는 현실(現實界)의 배후에는 무엇인가 그것을 통일하는 구극적인 '1'('多'에 대한 '1')이라는 것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논리적 전제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더욱이 이러한 3원리는 각각 독립된 실체는 아니고 '1자'로부터 유출(流出)되어(에마나티오) 생겨난 것이라고 되어 있어 동적(動的)인 관계에 있어서 통일적으로 포착되고 있다('一者'→'누스'→'프시케').

즉, 불(火)이 열(熱)을, 얼음(氷)이 냉(冷)을 발산하고, 인간이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이 물건(物)은 자신이 성숙·충실해지면 자기와 동형(同形)의 물건을 산출하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충실해진 '일자(一者)'로부터 '누스', 다시 '누스'에서 '프시케'가 산출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프시케'에는 '이데아계'(英智界)와 그 그림자인 '현상계'를 연결하고 양자를 매개하는 기능이 주어지고 있다. 또 이와 같은 '일자'로부터의 것의 산출·유출의 길과 동시에 일체의 것의 일자에의 환귀(還歸) 과정이 고려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체계는 플라톤적인 '이데아계(英智界)'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운동·생성(生成)의 견해와 스토아적인 통일된 하나의 생명체·유기체(有機體)로서의 우주를 보려고 하는 관점 등을 도입하여, 그렇게 함으로써 플라톤적 2원론(二元論)이 갖는 모순(상호간에 따로 존재하는 '이데아계'와 '현상계'를 어떻게 결합하여 관련을 맺게 할 것인가)의 한 가지 해결책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또 '1자' '누스' '프시케'의 3원리는 인간의 의식 내 사고(思考)의 반영(反映) 내지 산물로 생각되고 있다. 즉 현상계의 다양성이 의식 내에 있어서 논리적으로 정리되어 가는 단계를 3원리는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3원리는 초월적(超越的)인 동시에 내재적(內在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결국 이와 같은 체계를 구상함으로써 초월적 절대자와 유한존재(有限存在) 인간의 신비적 합일을 의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3원리는 초월적인 실체로서 생각하게 되어 절대자('토·헨', 그 밖에 갖가지 명칭으로 불린다)를 정점으로 하는 존재의 계층단계를 표시하는 것으로 되었다.

플로티노스[편집]

Pl

tinos (205-269/270)

그리스 말기의 철학자.

그 자신은 자기의 생애에 관하여 쓴 것을 한 마디도 남기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그가 현세에 있어서의 생활을 그림자 생활이라 생각하여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 사는 것을 오히려 수치로 여겼던 데에 기인한다. 다만 그의 제자 포르피리오스가 그로부터 간간이 얻은 전문(傳聞)을 바탕으로 <플로티노스전(傳)>을 써서 <엔네아데스>의 서문(序文)으로 삼은 것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것에 의하면, 그는 이집트의 리코폴리스에서 태어나 28세 때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양자(兩者)를 절충한 것과 같은 철학을 가르치던 암모니오스의 제자가 되어 거기서 11년간 연찬을 쌓았다. 그 후 로마로 나가 철학을 강설하였다고 한다. 만년은 유행병에 걸렸기 때문에 제자들도 두려워서 접근하지 못하고 고독한 가운데 생애를 마쳤다고 전해진다.

그가 최후로 남긴 말은 "우리들 가운데 있는 신(神)의 것을 만유(萬有) 속에 있는 신의 것으로 끌어올리려고 하는데"라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엔네아데스[편집]

플로티노스가 남긴 54개의 논문을 제자 포르피리오스가 정리한 것이다. 포르피리오스는 이들 논문을 내용상 9개씩으로 정리하고 전체를 6권이 되게 편집하였다.

'엔네아데스'란 본시 '9'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엔네아스'의 복수(複數)이다. 따라서 각 권(卷)은 '엔네아스'라고 불리며 '엔네아데스'는 전체를 지칭한다. 다시 '6'이 '1'·'2'·'3'의 합이므로 전체가 제1-3권까지의 3권으로 되는 제1부와 제4-5의 2권으로 되는 제2부 및 제6권을 제3부로 하는 총3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3부는 각각 플로티노스의 3원리(三原理)가 반영되도록 잘 편집되어 있다. 즉 제3부에 해당하는 제6권에는 <선한 것, 1인 것에 관하여> 등 '1자(一者)'에 관한 논문이 집록되어 있다.

포르피리오스[편집]

Porphyrios (232/233-305?)

플로티노스의 후계자.

페니키아의 무역도시 틸로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우선 당시의 풍습대로 아테네에 유학하여 롱기노스에게 배웠다. 그 후 로마로 나가, 플로티노스와의 해후(解逅)로 그에게 쏠려 문하에 들어갔다. 스승의 논문을 정리하여 <엔네아데스>를 편집하고 스승의 학설 보급에 진력하였다.

그는 다방면에 걸쳐서 저작을 했다고 전하는데, 그 태반은 단편적으로 전해지는 데 불과하다. 그는 채식주의자였다고 전하며, 그 관점에서 <동물적 식물의 기피(忌避)에 관하여>를 내놓았다. 또 그리스도교를 적대시하여 <그리스도교 반론(反論)>을 저술하였다. 그는 만년에 여섯 아이를 가진 미망인 마르셀라와 결혼하였으나 그녀에게 보낸 서간에는 그의 이교(異敎)의 제신(諸神)에 대한 경건한 심정이 나타나 있다.

그 밖에 호메로스의 시 해석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관계 저서의 주해와 입문서 등이 있다.

시루라에[편집]

Saturae

이것은 로마제국 초기의 작가 페트로니우스(Gaius Petronius, 別名 Petronius Arbiter)가 쓴 풍자소설의 제목이다. 페트로니우스는 네로 황제(Claudius Caesar Augu­strus Germanicus Nero, 37-68)에게 프로터콜(protocole)을 가르치던 Titus Petronius와 동일인물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폴란드의 소설가 시엔키에비츠(Henryk Sienkiewicz, 1846-1916, 1905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유명한 소설 <쿼바디스>(Ouo vadis, 1895)에도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 그는 "낮에는 잠자고, 밤에는 공무(公務)와 생활을 위한 환락으로 보낸 사람. 다른 사람들은 공무에 정진하여 명성을 얻었지만, 그는 놀고 태만하면서도 명성을 얻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한때 속국의 총독까지 지냈으나, 중상모략 당하여 자살을 명령받고 자결하였다. 그러나 <쿼바디스>에서는 그의 자결장면을 아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사투라에>의 줄거리는 엔콜피우스(Encolpius, 이야기하는 사람)가 아스킬투스(Ascyltus)라는 하층계급출신 불량소년과, 노예인 기톤(Giton)이라는 두 소년을 데리고, 주로 남부 이탈리아 지방의 그리스인 도시들을 방랑하는 과정에, 여러 가지 사건에 부딪치면서 놀아나는 음란하고도 추잡한 짓을 하는 국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것은 네로 황제시대, 로마의 타락한 사회풍조를 폭로·풍자한 것으로서 당시의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라고 한다.

네로[편집]

현대 공산폭군의 대표자는 소련의 스탈린(Iosif V. Stalin, 1879~1953), 북한공산집단의 김일성(1912~1994), 알바니아의 독재자 엔베르 호자(Enver Hoxha, 1908~1985) 등으로 꼽지만, 동서간 고대폭군의 챔피언은 중국 은(殷)의 주왕(紂王)과 하(夏)의 걸왕(桀王), 그리고 로마의 네로(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Nero, 전명 Lucius Domitius Nero, 37~68, 재위 54~68)황제를 꼽는다.

로마제정시대 초기에는, 현명한 황제가 많아서 로마의 국위도 크게 떨치었다. 그러나 네로만은 이 무렵에 집권한 예외적인 암매한 군주였다. 네로는 아그립피나와 선부(先夫)사이에 태어났고, 등극 직후는 근위대장 부르루스(Sextus Afranius Burrus, ?-62), 사부(師父)인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BC 54-AD 65)의 후견하에 선정을 베풀었지만, 성장함에 따라 우리나라 조선조의 연산군(燕山君)마냥 방종하게 되어, 어머니(아그립피나)와의 권력투쟁 끝에 그녀를 살해했다. 부르루스의 사망과 세네카의 은퇴(66년, (피소의 반역행위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자결명령을 받고 자살)로, 간신배 티겔리누스(Gaius Ofonius Tigellinus)를 신임하게 되자 이미 그의 방종을 제지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 특히 여자관계가 지저분한 바 모자간통죄를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황후 옥타비아(Octavia, 40c-59, Claudius 황제의 딸)를 살해하고, 오토(Marcus Salvius Otho, 32-69, 68년에 황제로 추대됐으나 3개월간 집권후 자살)의 처 폽파에아사비나(Poppaea Sabina, ?-65, 62년 네로황제와 재혼했으나 네로의 발길에 채여 죽었다)와 재혼하였다.

그의 포학성은 기독교가 널리 신앙됨에 따라 더욱 증대되었다. 64년에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했는데, 이것은 네로가 당시 불법화됐던 기독교인을 대량학살하기 위한 방화였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네로는 이런 여부를 부정하고, 그 죄를 기독교도들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 적반하장격으로 그 화재는 기독교도의 소행이라고 역선전하면서 그들을 대량 체포하여 박해를 가하였다. 68년에 갈리아지방에 반란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원로원과 근위병도 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로마를 탈출한 후 곧 자살로서 자기가 저질렀던 죄과를 치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