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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자연과학 사상〔槪說〕[편집]

현대 자연과학의 특징은 우선 형성과정에서 엿볼 수 있다. 예로서 역학(力學)의 발달과정을 생각해 보자. 인류는 오랜 세월을 두고 천체(天體)를 관측해 왔고 여러가지 규칙성을 발견, 이용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겉으로의 파악'은 객관적 존재로서의 자연을 인식하는 첫 수단에 지나지 않아 그러한 현상을 지배하는 주체를 찾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티코 브라헤의 천문학 기록에 의한 케플러의 유성운동(遊星運動)에 관한 3법칙의 방법이다. 다음은 이런 실체들이 어떤 상호작용을 하기에 그런 결과가 생기는가를 알아보는 단계로 옮겨진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뉴턴의 만유인력(萬有引力)의 법칙이며, 또 소위 운동에 관한 3법칙으로 이끌게 한 것이다. 한편 이 뉴턴의 운동법칙을 서술하는 방편으로서 3차원의 공간과 어느 관측자에게나 동등한 시간개념으로 된 좌표계(座標系)를 이용하는데, 이때 절대계(絶對系)라는 것이 필요하게 되어 자연기술(自然記述)의 객관성(客觀性)을 충족하지 못하는 결과가 생긴다. 아인슈타인은 소위 4차원의 시간좌표를 써서 자연법칙의 객관성을 고수할 수 있는 상대성원리(相對性原理)를 제창하여 이 애로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물론 인과율(因果律)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모든 분야가 이런 단계를 밟으며 발전한다.

다음의 특징은 원자(原子)의 세계를 서술하는 양자론(量子論)에서 찾을 수 있다. 플랑크에 의하면 빛은 보통 파동적(波動的)이지만 때로는 입자적(粒子的)이어야 하며, 또 드 브로이에 의하면 전자(電子)가 동시에 두 구멍을 지나갈 수 있다는 불가사의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고 위치와 운동량 또는 에너지와 시간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는 없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를 낳게 했지만 원자세계(때로는 原子核內)에서의 거동까지도 잘 기술하는 방도가 되었고 오늘날 물질과학의 발달을 가져온 터전이 된 것이다. 즉 이러한 원자세계는 우리가 거시세계에서 사용하는 개념이 편의상 적용되기는 하나 무작정 연용(延用)할 수는 없는 다른 차원의 것이며, 또 이런 미시계(微視界)의 실체에는 확률적인 취급만이 가능하고 결정론적인 예언은 불가능한 것이다.

물질세계의 이러한 계층성(階層性)은 위아래로 퍼져 갈 것이며, 각 계층마다 특징적인 지배법칙이 존재하겠지만 우리는 이제 겨우 우리의 의식세계에서 쓰이는 개념으로 바로 밑의 계층을 다루고 있을 뿐이므로, 원자핵(原子核)을 구성하는 일원인 양자(陽子)가 또 내부구조를 갖고 있다는 증거가 나오는데도 거기서 적용되는 지배법칙을 못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계층성은 무생물과 생물과의 경계에서도 나타난다. 생물의 하한(下限)은 세포이고, 세포가 나타내는 생명현상은 그것을 구성하는 입자적 존재인 핵산(核酸)이나 단백질(蛋白質)에 의한 것이며, 이 핵산이나 단백질은 전자현미경으로 보고 구조를 알 수 있지만 아직도 생명은 설명되지 않는다. 즉 생명현상의 밑바탕이 되는 분자수준(分子水準)의 것은 물리법칙에 지배되지만 그들의 집합체인 세포는 별개의 기능을 갖고 존재한다. 이렇게 보면 분자→세포→기관→개체→사회의 모든 줄기를 현재와 같은 단순한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고, 그렇다고 신비의 베일에 영원히 덮여 있지는 않을 것이며, 자연과학의 각 분야의 협력에 의해서 이들 계층을 꿰뚫는 법칙을 발견하는 일이 필요하다.

끝으로 특히 전자공업에서의 기능의 소형화에 의한 집적회로(集積回路) 또는 대규모 집적회로 소자군(素子群)의 개발에 의한 소위 제2 산업혁명이라는 전산기시대(電算機時代)를 맞이하는 정보과학의 등장을 지적해야겠다. 정보이론은 원래 샤논에 의해 전송계(傳送系)를 통해서 신호(情報)를 보낼 때의 최대정보량을 얻기 위한 조건을 규명하는 수학적 이론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이 사실은 가령 기업 경영의 경우 내외의 사회·경제·기술에 관한 정보를 종합 처리해서 기업의 능률화를 기하고 경쟁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는 사실과 유사점이 있어 근래 모든 분야에서 컴퓨터의 사용도가 빈번해지고 새로운 컴퓨터의 발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것은 1차산업 혁명이 육체노동의 해방을 가져온 것과 같이 두뇌노동의 해방을 가져오고 새로운 가치관의 세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魯 鳳 煥>

생명의 과학[편집]

生命-科學

생명이란 무엇인가, 과연 물질인가 하는 문제는 아주 옛날부터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생명현상은 무기계(無機械)의 물질의 움직임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생물에는 무엇인가 물질 이외에 영혼이라는 생명력이 깃들여 있어서 생물을 형성하는 물질로서 과학적으로 추구할 수는 없다는 관념론이 팽배해 있었다.

현재는 생물학, 특히 생화학(生化學)과 생리학의 발달에 의해 이러한 사고방식은 원칙적으로 거의 무너져 버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과학은 생명을 단순히 물질의 기계적 집합이 아니라, 어떤 복잡한 물질이 갖는 운동으로 파악하고 있다.

생물은 세포로 구성되었는데, 그 주요 부분은 탄소와 수소를 주체로 하는 유기화합물(有機化合物)이다. 유기물의 종류는 무한히 많으나 생체구성물(生體構成物)은 한정된 소수이며, 단백질·당질(糖質)·지질(脂質)·핵산(核酸) 등으로 나누어진다.

생체의 특징은 그 구조물질이 현저한 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쥐의 몸의 단백질 중 반은 평균 7일 만에 식물(食物)의 단백질과 바뀌고 있다. 일종의 효소는 일종의 반응을 촉매할 수 있을 뿐이므로 많은 효소의 공동작용에 의해 복잡한 변화가 질서정연하게 일어나고 효소의 변화에 의해 대사 조절이 가능하다.

대사의 특징은 그 에네르기면에도 나타난다. 무기계의 반응에서는 반응의 에네르기는 열이 되어 발산되지만, 생체 내에서는 에네르기를 생기게 하는 분해(分解) 반응과 에네르기를 필요로 하는 합성 반응이 결합되어 일어난다. 이 결합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ATP(아데노신 3인산)라는 고(高)에네르기를 포함하는 인산화합물이다.

생물체는 이와 같이 밖으로부터 물질을 섭취하여 일부를 분해해서 ATP를 만들고 이에 의해서 다른 것의 일부를 재료로 하여 자기의 신체를 합성하고 생명을 유지하며 또한 성장·증식해 가는 것이다.

증식은 양적으로는 이와 같이 생각되거니와 생물이 자손으로서 같은 것을 낳아가는 질적 측면은 어떠한가? 어버이가 갖는 성질이 어떤 형태로든 자손에게 전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생물의 일정성(一定性)은 간단히 말하면 그 효소계(酵素系)의 일정성에 의한 것이며 이를 추궁해 보면 일정한 단백질의 합성, 기본으로는 일정한 아미노산 배열의 형성이 기본적인 문제가 된다. 최근의 생화학 연구에 의해 일정한 아미노산의 결합에는 그 생성 반응에 관계하는 핵산의 일정한 구조가 근본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 밝혀졌다. 곧 세포핵의 염색체 성분인 핵산은 유전자(遺傳者)에 실체적(實體的)인 담당자이며, 세포분열시에 같은 구조를 가진 채 분열하고 단백질 생성시에 그 구조성질을 결정하여 일정한 생물을 재생산한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생물이라고 이름붙여진 물질운동 기구를 더욱 상세히 밝히고 그것이 어떻게 생성되었는가를 밝혀가는 것이 금후의 생물학에 부여된 임무이다. 또 지구상의 생물 진화와 기원의 필연성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지구의 생물을 대상으로 하는 우주생물학에 거는 기대도 크다.

오파린[편집]

Aleksandr Ivanovich Oparin (1894-1980)

구 소련의 생화학자.

러시아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 모스크바 대학 교수. 구 소련의 대표적인 생화학자로써 국제생화학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자연과학의 많은 분야에서 연구성과를 광범하게 채택하여 처음으로 생명의 기원에 대해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생명의 기원>을 썼다. 그는 신비적·관념론적 생명론을 타파하고 생명을 과학적으로 기원까지 탐구하는 길을 개척했다. 현재 세계의 생명의 기원에 대한 연구의 방향은 그의 학설에 힘입은 바가 크다. 또 생화학 공업을 비롯한 실험적 연구에서도 성과를 올렸다.

생명의 기원[편집]

生命-起源 (초판 1936, 개정 재판 1957)오파린의 주저. 정확하게는 <지구상의 생명의 기원>이다. 원시생물은 탄산가스로부터 생체 주성분의 유기물을 만드는 생물(식물 따위)이라고 하는 당시의 학설에 오파린은 의문을 품고, 생물의 비교연구에 의해 거꾸로 유기물을 영양원(營養源)으로 이용하는 생물(많은 미생물·동물)이 생화학적으로는 원시적이라는 설을 1923년에 발표했다. 그 후 이 논리를 더욱 전개하면서 천문학·지질학·화학·생화학 등 최신의 성과를 기초로 채택하여 1936년 이 책을 저술했다. 과학의 발달에 따라 1957년에 다시 썼다.

이 책은 생명의 기원에 관해 옛날부터 행해진 논쟁을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이라고 비판하고 자연과학적인 추구 방법을 제안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지구생인설(地球生因說)과 원시지구의 발전을 추구하고, 탄소가 유기화합물의 형태로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간단한 유기물이 방전(放電)·빛·열 등의 작용에 의해 현재의 생물 성분의 기본이 되고 있는 아미노산(酸)이나 당(糖) 등의 물질을 필연적으로 생성했고, 그 중합체(重合體)인 단백질이나 핵산이 생물 이전에 지구 표면에 자발적으로 생겼다고 말한다. 이러한 고분자물질(高分子物質)이 분자간에 결합함으로써 수층(水層)으로부터 액적(液滴)으로 분리된 코아세르베이트를 원시생물로 이행하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외계로부터 독립했고 또한 화학변화를 일으키기 쉬운 액상(液狀) 형태로 어떤 코아세르베이트 입자(粒子)는 외부로부터 물질을 흡수하여 증대하며 다른 입자는 성분을 상실하고 소멸된다. 이러한 코아세르베이트 입자간의 경쟁과 도태 속에서 자기보존·성장·증식의 성질을 물질적 체제로서 획득한 것이 남아 최종적으로는 원시적 생명이 되었다고 한다.

원시적 생물은 외계로부터 유기물을 흡수하여 생활했으나 그 체제가 정비되어 감에 따라 빛의 에네르기를 이용하여 탄산을 환원시켜 산소를 방출하는 유기물을 만드는 광합성(光合成)을 일으키는 것이 생긴다. 이에 의해 산소가 없었던 원시 대기에 산소가 출현하고 호흡을 하게 되는 동시에 유기물의 공급원이 확립되어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많은 미생물이 발전하는 기초가 만들어졌다.

이상이 개략이지만 그 과정의 증거로서 많은 자연과학 분야가 소개되고 모두가 생명의 기원과 발전에 집중되는 점은 규모가 웅대하여 장관을 이룬다. 이 책은 지구상의 생명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연구나 우주생물학 연구의 실제적 지침을 주었을 뿐 아니라, 신비적인 생물론을 타파하고 과학적인 생명관을 확립하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유전학설[편집]

遺傳學說

아들이 어버이를 닮는 것, 곧 어버이의 형질이 자손에게 전해지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는 의문은 매우 오랜 옛날부터 있었으나 지금부터 약 100년쯤 전까지는 양친의 혈액이 자손에게서 혼합되는 것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이 되자 유전을 지배하는 법칙에 대한 관심이 생물학자 사이에서 고양되었다. 그것은 가축·농작물의 품종개량, 인종문제 등의 사회적 요청이 강해지고, 진화론 사상이 보급된 결과였다. 한편 같은 요청에 의해 통계적 방법이 발달하고 세포설(細胞說)의 성립(1839)에 의해 생식과 발생의 과정이 명백해진 결과, 유전현상을 수량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초가 생물학 내부에 조성되었다.

이리하여 1864년 오스트리아의 멘델이 완두를 이용하여 유전의 기본법칙을 발견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멘델은 당시 무명의 연구자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 발견의 의의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 후 세포의 분열증식, 수정(受精)의 과정이 더욱 정밀하게 연구됨에 따라 세포핵 내에 포함된 염색체가 갖는 생식에 있어서의 중요한 의의 그것이 어버이로부터 자손에게 대대로 전달되는 양식의 법칙이 밝혀진 것을 계기로 3명의 생물학자에 의해 거의 같은 무렵에 멘델의 법칙이 재발견되었다. 멘델은 유전하는 형질(形質)의 원인이 되는 유전자를 가정하였으나, 재발견 후 유전자는 염색체상에 종배열(縱配列)되어 있음이 확인되어 그 실체 및 형질발현기구(形質發現機構)의 추구가 행해졌지만 오랫동안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1940년경, 염색체를 구성하는 물질 데오키시리보핵산(核酸-DNA)이 유전자의 물질적 실체임이 점차 밝혀져 현대의 유전학설이 성립하였다.

이에 의하면 DNA는 당(糖)과 인산 이외에 A.T.G.C.라고 약칭되는 4종류의 염기화합물(鹽基化合物)을 포함하고 있다. DNA는 사상의 거대분자(巨大分子)이므로 A.T.G.C.의 순열(順列)은 거의 무수히 있을 수 있으나, 세 개씩이 단위가 되어 세 개로 한 종류의 아미노산을 의미하는 암호가 되었다. 그런데 아미노산은 단백질을 구성하는 물질로서, 어떠한 아미노산이 어떠한 순서로 배열되는가에 따라 단백질의 종류가 결정되므로 DNA분자는 단백질의 종류를 지정하는 암호를 갖고 있는 것이 된다. 유전자가 어버이로부터 자손으로 전달되는 것은 이 단백질 암호가 전달되는 것에 귀착된다.

이 암호를 어버이로부터 받은 자손은 수정란으로부터의 발생과정에서 암호를 해독하면서 지정된 단백질을 합성하므로 자손은 어버이와 동류의 단백질을 갖게 된다. 이러한 단백질 중의 대부분은 효소작용을 갖고, 각기 특정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능력을 갖고 있으므로 자손의 세포내에서는 어버이와 같으므로 자손의 세포내에서는 어버이와 같은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이러한 화학반응과 그 생물질의 총화가 생체이며 형질이므로, 결국 자손의 형질은 어버이의 형질을 닮는다는 결과가 된다.

DNA는 화학적으로 매우 안정된 물질이며, 또 생체내에서 DNA가 합성될 때 먼저 있던 DNA의 염기 배열(鹽基配列)이 복사된다는 것이 알려졌으므로 유전자가 오랜 세대에 걸쳐 안정되어 있는 것도 DNA의 화학적 성질에 의해 설명된다.

이러한 현대 유전학설은 유전현상이 갖고 있는 매우 복잡한 여러 국면을 설명하는 데는 아직 불충분한 점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생물의 환경적응성, 진화의 설명에는 아직도 무력하고 유전의 근저에 있는 물질 단계의 현상을 설명한 데 지나지 않으나, 이러한 점에서는 멘델 법칙의 발견 이래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복잡한 생명 현상을 물질분자의 운동으로 파악하는 입장에 유력한 지지자가 되었으며 생물학의 많은 분야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멘델[편집]

Gregor Johann Mendel (1822-1884)

오스트리아의 성직자·박물학자.

체코의 슐레지엔 지방 하이첸도르프에서 태어나 브륀의 여왕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되고 후에 빈 대학에서 수학·물리학·박물학을 배웠다. 브륀에 돌아가 국립 실과(實科)학교의 대리교사가 되어 주로 물리학을 가르쳤다. 교사 생활을 하는 한편, 승원(僧院) 뜰에 각종 식물을 이식하고 또 여러 가지 동물을 사육하며 학생들과 함께 야외로 동식물의 채집, 자연관찰을 위한 소풍을 가기로 했다.

1856년에 완두를 이용하여 어버이의 형질이 어떠한 법칙에 의해 아들, 손자의 대로 전해지는가를 수량적으로 연구하는 실험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이른바 멘델의 법칙을 발견하여 1865년 브륀에서 열린 박물학회의 집회에서 발표하고, 다시 다음해인 66년에 논문으로 공개하였으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멘델은 완두에 의한 유전의 연구 이외에도 벌꿀·쥐 등의 유전도 연구하였으나 여기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868년 브륀 수도원장에 취임, 그 후 교회의 이익을 대표하여 오스트리아 의회의 종교기금세법(宗敎基金稅法)과 싸웠으나 패배했다. 또 지방 민족간의 싸움에 말려들기도 하였고, 만년에는 실의 속에 지내며 건강을 잃어 1884년에 사망하였다.

사후 16년이 지난 후인 1900년에 멘델의 법칙은 드 브리스, 코렌스, 체르마크 등 3명에 의해 우연히도 거의 동시에 발견되어 현대 유전학의 기초가 되었고 멘델리즘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리센코[편집]

Trofim Denisovich Lysenko (1898-1976)

구 소련의 농업생물학자.

우크라이나의 농가에서 태어나 키예프의 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다음, 키로바바도 농사시험장에서 식물의 발육에 대한 춘화처리(春化處理)의 영향에 대해 연구하여 발육단계설(發育段階說)을 세웠다. 이 설에 의하면 식물은 그 발육 과정에서 특정한 환경조건을 축차적(逐次的)으로 경과함으로써 정상적인 생육(生育)을 한다는 것으로 식물의 생리학이나 재배기술에 대해서 의의가 큰 것이다.

그 후 리센코는 유전육종학 연구소장(遺傳育種學硏究所長), 농업 아카데미 총재 등 요직에 취임하는 한편 유전론, 진화론 등에 강력한 발언을 하여 구 소련의 생물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동안 미추린 생물학의 발전이라고 일컬으며 제창한 주장 중에는 종(種)의 돌연발전설처럼 이론적으로 옳지 못한 것, 둥지뿌리기 이론처럼 실천적으로는 유효하면서도 이론화 과정에 잘못이 포함되어 있는 것, 멘델 유전학의 전면적 부정처럼 현대 생물학의 성과를 무시하는 것 등이 섞여 있었으므로 내외의 비난을 받고 또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1955년 요직을 떠나 그의 학설은 영향력을 잃었으나 영양잡종(營養雜種), 획득형질유전(獲得形質遺傳)의 가능성, 유전현상에 있어서의 환경과의 상관관계, 집단유전학(集團遺傳學)에 대한 비판 및 생존경쟁설 비판 등 리센코의 업적 중에는 발육단계설 이외에도 평가할 만한 것이 적지 않다.

조건반사[편집]

條件反射

파블로프가 1903년 마드리드의 국제생리학회에서 한 강연 <동물에 있어서의 실험심리학과 정신병리학>에서 처음으로 정의한 생리학 용어이다. 동물 및 인간의 반사활동 중에서 후천적으로 획득한 반사를 '조건반사'라 하고, 선천적·유전적으로 갖추어진 반사를 '무조건반사'라고 하였다.

예컨대 개의 입안에 염산 같은 자극물질을 넣으면 침이 많이 흐르는데 이 현상은 모두 개에게서 일어나는 분비반사(무조건반사)이다. 만일 산(酸)을 줄 때에 타액 분비를 일으키지 않는 자극, 예컨대 소리나 빛의 자극(無關刺戟)을 동시에 주는 일을 몇 번 되풀이하면 무관자극만으로도 타액분비가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조건반사이며, 무관자극이었던 소리 또는 빛이 산의 신호(조건자극)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타액분비의 조건반사가 형성되는 생리학적 메커니즘은 뇌의 고차부(高次部)에 있어서의 타액분비중추와 당해 감각중추 사이에 새로운 신경로(神經路)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일시적 결합, 또는 조건결합).

무조건반사는 동물의 종족에 공통된 반사활동이지만 조건반사는 생물이 끊임없이 변동하고 있는 환경에 적응하도록 하여 생물체의 식이(食餌)·방어·성활동의 전부를 보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개념에는 매우 큰 생물학적 의의가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동물의 뇌활동에는 흥분과 억제의 두 신경 과정이 있어서 양자는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한다. 억제 과정에도 선천적으로 갖추어진 무조건억제와 경험을 통해서 획득되는 조건억제(內抑制)가 있다. 조건억제는 뇌의 고차부에서 형성되는 억제적 조건반사이다.

예를 들면 타액분비의 조건반사가 일어나고 있을 때에 외부에서 강한 소리가 나면 이 분비활동은 중지될 것이다. 이 강한 소리는 억제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이것은 무조건억제(外抑制)이다.

이에 반해 억제적 조건반사는 예컨대 타액분비의 조건반사를 형성한 후에 조건자극만을 주고 무조건자극을 주지 않으면(非强化), 점점 타액분비는 일어나지 않게 된다(消去抑制). 이것은 산을 의미하는 양성(陽性)의 조건자극이 반대로 산을 주지 않는다고 하는 음성(陰性)의 신호, 곧 억제적 작용으로 전화된 것이다.

그 외에 원과 타원이라는 같은 종류의 성상(性狀)을 가진 두 형태를 식별하는 것(분화억제), 조건자극을 주고 나서 반사가 일어나기까지의 시간 간격을 연체시키는 것(연체억제), 복합자극간의 각 성분을 분화하는 것(복합억제) 등 고차신경활동의 억제 기능이 명백해졌다. 이것은 생리학적으로도 생물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또 조건반사의 연구법에 의해 고차신경활동에 있어서의 흥분과 억제의 확연(擴延)과 집중, 상호유도, 부(負)와 정(正)의 유동 등 제 현상에 관한 법칙이 세워지고 고차신경활동의 기본적 기능으로서의 분석과 종합의 메커니즘이 이해되게 되었다. 현재는 파블로프의 이른바 고전적 조건반사법과 뇌의 전기생리학적(電氣生理學的) 연구법을 결합시킨 연구에 의해 조건반사에 관한 생리학적 메커니즘이 해명되고 있다.

또 조건반사를 기초로 하는 파블로프 학설은 동물과 인간의 기질·성격에 관한 신경계(神經系)의 형(型), 신경증이나 정신병에 관한 유물론적인 정신병리학, 또한 파블로프의 제자 뷔코프(1886-1959)에 의한 내장 제 기관의 조건반사학적 연구의 확립에 의해 생물학, 의학, 심리학의 기본적 이론이 되었다.

특히 파블로프는 만년에(1932), 인간의 단계에 이르러 나타나는 조건반사, 곧 언어신호계(言語信號系)에 관한 학설을 세웠다.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과 달라서 현실의 신호를 추상화·일반화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언어 또는 말이며 진화 과정에서 인류가 획득한 것이다. 파블로프는 현실의 감각신호에 관여하는 것을 제1신호계(第一信號系)라 부르고 제1신호의 신호에 관여하는 것을 제2신호계라 이름지었다. 제1신호계는 인간과 인간에 공통된 것이지만, 제2신호계는 인간에게 특유한 기능이다. 엥겔스는 <원숭이가 인간이 될 때의 노동의 역할>에서 노동이 언어의 발달을 가져왔다고 했는데 파블로프는 이것을 생리학적으로 해명한 것이며 심리적 과정을 생리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또 물질과 정신의 관계를 조건반사이론에 기초하여 유물변증법적으로 파악하여 제2신호계는 자연과 사회의 객관적 현실을 반영하는 최고 형식이라고 하는 유물론적 반영이론(反映理論)의 기초를 닦았다. 따라서 파블로프 학설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은 객관과 주관의 통일 활동이며 객관적 세계의 수동적 각인(受動的刻印)을 식별하고 판정·보정(補正)하는 적응적인 뇌의 생리활동이며, 최고의 반영활동인 사고(思考)도 이러한 생리 과정의 산물이라고 이해한다.

파블로프[편집]

Ivan Petrovich Pavlov (1849-1936)

소화생리학(消化生理學)이나 대뇌생리학(大腦生理學)에 많은 귀중한 업적을 남기고 조건반사학설의 학립에 의해 생물학·의학·심리학, 그리고 유물론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구 소련의 생리학자.

러시아 제정시대에 구교 사제의 장남으로 리야잔시에서 태어났다.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당시 러시아의 혁명적 사상가 겔첸, 체르니셰프스키, 피사레프 등의 영향을 받아 신학교를 중도퇴학하고 페테로그라드 대학의 물리수학부에 입학했다(1870). 동대학의 생리학 교수 치온의 감화를 받아 생리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또 러시아 생리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세체노프의 저서 <뇌의 반사>에서 배운 바가 많았다.

대학 졸업 후 페테로그라드의 수의학교에서 조수가 되어 혈액순환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처음으로 국외여행을 나가 브레스로의 하이덴하인 교수 밑에서 단기간 유학하였다(1877). 귀국 후 보트킨 교수 밑에서 생리학 연구에 종사하였다. 심장의 신경지배, 소화의 생리, 췌장의 분비 신경 연구 등을 해서 생체의 모든 기능이 신경계의 영향 밑에 있다고 하는 사고방식, 이른바 신경주의(神經主義)의 이론을 확립하였다. 또 개를 이용하여 유명한 위이실험(僞餌實驗)의 연구법, 소위형성수술법(小胃形成手術法)이나 타액선의 누관(瘻管) 실험법을 창시하고 소화효소의 일종인 엔테로키나제를 발견했다. 이에 앞서 다시 하이덴하인과 루드비히 교수 밑에서 공부했다(1884). 귀국 후 1895년부터 1924년까지 레닌그라드의 군의학교 교수로 근무하였다. 1904년 소화생리학 연구로써 노벨 의학상을 받았다. 마드리드의 국제의학회(1903)에서 조건반사와 무조건반사에 관한 정의를 내리고, 이후로 많은 문하생과 더불어 조건반사에 관한 연구를 거듭하여 대뇌생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생리학뿐만 아니라 생물학, 의학, 심리학, 철학에 있어서 유물론적 이론으로서의 파플로프 학설을 확립했다.

86세에 폐렴으로 레닌그라드에서 사망하였다.

주저로는 <주요소화선(主要消化腺)의 작용에 대한 강의>(1897), <동물의 고차신경활동(高次神經活動)의 객관적 연구 20년의 실험>(1922), <대뇌반구(大腦半球)의 작용에 대한 강의>(1927) 등이 있다.

프로이트 주의(정신분석)[편집]

Freud 主義(精神分析)

원래 '정신분석'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프로이트의 독창에 의한 '자유연상법(自由聯想法)'을 써서 신경증 등의 병을 치료하는 기술을 의미하며, 또 하나는 인간의 심리를 잘 설명하는 뛰어난 이론 또는 사상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두 번째 의미에의 프로이트 주의에 대해 개설하기로 한다.

프로이트는 2월혁명의 8년 후에 태어났으므로 이미 오스트리아에도 "인간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새로운 시대의 물결이 밀려들고 있었다. 또 그가 세 살 때 이미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었고, 그가 재학 당시의 빈 대학에는 진화론을 지지하는 여론이 가득 차 있었다.

또 마이어(1814-1878)가 발견하고 헬름홀츠(1821-1894)가 일반화한 '에네르기 보존의 법칙'이 당시 세간의 주목을 받아 사람들은 '에네르기'라는 말이 갖는 불가사의한 매력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페히너의 '정신물리학(精神物理學)'이나 헤르바르트의 '표상역학(表象力學)' 등의 영향을 받으며 연구하였으므로 그의 사상은 당연히 생물주의·과학주의·기계론·결정론 등의 색채를 띠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신현상을 질적(質的)인 것이 아닌 양적(量的)인 것으로 생각하고(프로이트의 '경제적 견지'라고 한다), 마음을 무의식(無意識) 전의식(前意識)·의식이라는 세 개의 공간적 영역으로 도식화(圖式化)해서 생각하고(프로이트의 '국소적 견지'라고 한다), 또한 인간의 마음의 움직임을 내부에서 서로 대립하는 '힘'과'힘'의 다이내믹한 경합의 결과라고 생각하였다(프로이트의 '역동적 견지'라고 한다).

그리고 그에 의하면 우리 마음의 움직임의 한 토막 한 토막은 얼핏 보기에는 서로 불연속이며 반드시 상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 듯이 보이지만 이것은 외견상의 일이고 인간의 심리도 물리·화학적인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우연히 일어나는 현상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심적 결정론'이라고 한다). 물론 그는 이것의 원인은 이것이라고 하는 1대1의 인과관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얼핏 보기에는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것 같은 의식의 움직임도 실은 그 배후의 심층(深層)에 있는 무의식적인 정신작용에 의해 인과의 끈이 굳게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무의식'의 가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의 움직임에는 모두 반드시 동기가 있고 목표가 있다"('목표지향성'의 가설)고 하므로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마음을 밑바탕에서 흔들고 있는 동기는 무엇인가, 그의 심적 에네르기는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가, 그 에네르기의 흐름은 방해받고 저지되지 않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디선가 엉뚱한 길을 뚫어서 분출하려고 하지는 않겠는가 하는 것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정신분석'이다.

그런데 그는 처음에는 인간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근원적인 에네르기는 넓은 의미에서의 성적(性的) 에네르기와 자기보존적 에네르기의 두 가지라고 생각했으나 얼마 후에는 후자를 버리고 오랫동안 전자를 중심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 넓은 의미의 성적 에네르기를 '리비도'라 부르고 리비도는 탄생 때부터 이미 활동을 하며(유아성욕론), 인간의 성장에 따라서 그것이 지향하는 대상이 변화된다고 주장한다.

그의 사상의 기조가 되고 있는 이러한 범성욕적(汎性慾的) 색채에 비난이 집중되고 있지만, 그는 단지 연구 순서로서 우선 본능적인 현상을 조사하고 다음에 자아, 인격의 구조, 문화 등으로 연구를 옮겨 간 것이다.

그런데 제1차대전의 체험을 계기로 그는 다시 이론의 일부를 수정하여 인간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근원적인 에네르기는 성적인 것 이외에 공격적 욕동(攻擊的欲動)이 있다고 하였으나 이미 연로하여 후자에 대하여는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에 의하면 인간행동의 근원을 이루는 이러한 에네르기는 인간의 마음의 가장 깊은 무의식층('에스' 또는 '이드'라고 한다)에 살고 있으며 오직 쾌만을 구하고 불쾌나 불안을 피하는 쾌감원칙(快感原則)에 의해 인간을 움직이려고 한다. 갓 태어난 유유아(乳幼兒)의 마음에는 이 '에스'의 층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태어나서 살아보면 에스의 욕망은 이 세상의 여러가지 사정에 의해 간단히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인간은 환경의 여러 사정을 음미하고 에스의 욕망과 현실의 사정을 조정하는 기능을 새로이 분화, 발달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자아의 기능으로 지각, 기억, 사고 등 고급 정신기능인 것이다.

이러한 자아는 에스의 욕망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방해에 의해 발달되는데, 그에 의하면 다음에는 자기자신 속에서 스스로 에스의 욕망을 억제하는 기능이 발달하게 된다. 곧 5세쯤 되면 남아는 어머니를 독점하고 싶다는 무의식의 원망(願望)을 갖게 되지만, 아버지의 복수를 받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 때문에 '스스로' 그 욕망을 억제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여아는 아버지에게 집착하여 사랑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원망을 갖지만, 남아와 마찬가지 사정으로 '스스로' 억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이론). 그리고 이러한 '자기자신 속에 스스로 욕망을 억제하는 기능'을 가진 것을 초자아(超自我)라 하고, 이것이 인간의 윤리관을 형성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의 이론에서는 인간의 마음은 에스·자아·초자아의 3층으로 되고, 이러한 3자 사이의 에네르기의 다이내믹한 관계가 인격이며 또한 히스테리나 꿈이나 각각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그의 사상에 대해서는 인간의 심리를 잘 설명할 수 있고 정신의학적인 치료에 대해서도 유효하다는 호평으로부터 본질적으로 비과학적인 속론(俗論)이라는 혹평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현재 전 세계의 도처에서 연구되고, 또 정신의학·심리학·교육학·문학·예술·종교학으로부터 철학·정치학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프로이트[편집]

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라이부르크에서 태어나 3세부터 82세까지 빈에서 지냈으나, 유대인이기 때문에 히틀러의 나치스 독일에 의해 추방되어 런던에서 사망하였다(83세). 아버지 야곱은 처와 사별하여 아마리아 나탄존이라는 20년 연하의 여성과 재혼하였으며 프로이트는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첫아이이다. 야곱은 이때 이미 죽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장자 임마누엘을 낳았는데 임마누엘은 이미 한 살먹은 아들 요하네스가 있었고 게다가 프로이트 밑으로 한 살도 되기 전에 죽은 동생 유리우스 이외에 다섯 명의 누이동생과 한 명의 동생이 태어났으며 형도 거의 동거하고 있는 상태여서 가정은 매우 복잡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프로이트는 어머니의 총애를 받으며 자라났는데 이러한 어머니의 총애가 자기의 소신을 끝까지 관철한다는 그의 정신을 형성시켜 준 셈이다.

빈 대학 의학부 졸업 후 존경하는 브로이어(1842-1925)에게 히스테리 환자 안나의 치료 체험담을 듣고 어떤 영감을 얻어 히스테리 연구를 시작했다. 브로이어에 의하면 히스테리 증상은 환자의 마음 속에 과거의 감정에 대한 강한 집적(集積)이 있어서 발생하는 것이며, 환자를 최면상태로 유도하여 집적물을 발산(發散)시켜 주면 낫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환자를 다루는 중에 프로이트는 병인(病因)이 되는 감정의 집적에는 반드시 성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데 착안하여 이를 주장하였다가 격심한 비난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고독해진 프로이트를 따뜻하게 감싸준 것이 사랑하는 아내 마르타 베르나이스였으며, 그는 약혼시절에 900통의 편지를 그녀에게 보냈다고 한다.

드디어 그는 환자의 무의식 밑바닥에 쌓이는 감정의 집적물을 찾는 방법으로 자유연상법(편안한 기분으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환자가 무엇이든 말하게 하는 방법)을 창안하고, 다시 환자의 꿈을 분석·해석하는 방법 등을 고안하여 1900년에 <꿈의 해석>을 출판했다.

20세기가 되면서 융이나 아들러를 비롯한 많은 제자가 프로이트의 주위에 모이게 되어 정신분석학은 대단한 융성을 보았으며, 미국의 클라크 대학에서도 창립 20주년 기념 강연에 초청하고 법학박사의 명예학위를 수여하였다. 그러나 제1차대전을 전후하여 그의 범성욕설(汎性慾說)에 찬성할 수 없었던 아들러, 융 등 몇 명의 제자가 탈락했다. 이러한 제자의 탈락, 대전의 체험, 불치의 병(구내암), 노쇠 등의 여러 조건 때문에 그는 차츰 사변적인 경향을 증대시켰으나 자아의 구조론, 문화론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주저로는 <히스테리 연구>(1895년 브로이어와 공저), <꿈의 해석>(1900), <정신분석입문>(1917) 등이 있다.

꿈의 해석[편집]

(1900)

환자의 마음의 심층(무의식의 세계)에 억압되어 있는 여러가지 바람이나 감정의 집적을 밖에서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을 탐구하던 프로이트는 1895년 7월 23일 밤, 뜻깊은 꿈을 꾸었다. 그날 그는 한 환자의 회복이 더디다는 친구의 비난을 들었는데, 그날 밤 그는 친구를 비난하고 자기를 변명하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여기서 힌트를 얻은 프로이트는 꿈이 마음의 심층에 있는 감정의 집적물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꿈의 해석법을 창시한 것이다.

이 책은 전체가 7장으로 구성되었는데, ⑴ 지금까지 꿈은 어떻게 연구되어 왔는가? ⑵ 꿈의 해석법, ⑶ 꿈은 원망(願望)의 충족이다, ⑷ 꿈은 어떻게 왜곡되어 나타나는가? ⑸ 꿈의 자료는 무엇인가? ⑹ 무의식적인 원망이나 사고의 시각화(視覺化) 과정, ⑺ 꿈의 심리학 등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의 심층에 감추어진 여러가지 원망이나 불만이 흔히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인간의 감정을 고양시키고, 이러한 감정의 고양이 꿈을 만들어내는 에네르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마름, 배고픔, 불쾌한 더위, 자명종시계의 소리 등 감각적 자극이나 그때 그때의 중심적인 원망, 인상깊은 체험, 잊을 수 없는 어릴 적의 체험, 또는 끝내 충족되지 못한 욕망 등을 재료로 해서 꿈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꿈의 재료를 '잠재몽(潛在夢)'이라 하며 이를 꿈으로 만드는 것을 '꿈의 작업'이라고 한다. 그러나 꿈의 작업은 그 사람의 윤리관, 자존심, 잠재적인 쾌, 불쾌감 등에 의해 생략, 압축, 왜곡 등을 받으므로, 꿈을 바르게 이론적으로 분석하지 않으면 꿈이 그 사람의 어떠한 원망과 관계가 있는가를 알기 힘들다. 태고적부터 인간은 누구나 꿈을 꾸며 살아왔지만 이러한 꿈의 의미를 과학적·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프로이트가 처음인 것이다.

이 책은 20세기에 주어진 일대 계몽서이며, 이 책의 간행의 해를 정신분석학 발상(發祥)의 해로 보고 있다. 그 자신 후년에 "지금 생각해도 이 책에는 지금까지 내가 다행하게도 발견한 사실 중에서도 가장 가치 있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통찰은 일생에 한 번밖에 갖지 못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정신분석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이 책을 되풀이해서 정독해야 한다.

정신분석입문[편집]

(1917)

프로이트의 주저.

이 책은 1915년부터 16년까지의 겨울학기와 1916년부터 17년까지의 겨울학기에 의사 및 일반 청강자에게 한 강의를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전체는 3부 28강(講)으로 되어 있다.

제1부(제1-4강)에서는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가끔 겪게 되는 사소한 일인 잘못 말하는 일, 잘못 읽는 일, 잘못 쓰는 일, 착각 등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저마다 이유나 의미가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Y씨는 어떤 여성을 몹시 애모하고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녀는 X씨와 결혼했다. 그런데 Y씨는 X씨를 훨씬 이전부터 잘 알고 있으며, 거래 관계까지 있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그후 가끔 X씨의 이름을 잊어버려서 X씨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할 때에는 언제나 정확한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 물어야 했다"는 예화를 들고 그것을 Y씨가 무의식중에 행복해진 연적 X씨를 상대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증거라고 말한다.

제2부(제5-15강)에서는 예컨대 "3세 3개월이 되는 어떤 여자 아이가 처음으로 호수를 보트로 건넜는데, 보트에서 내릴 때 내리기 싫다고 몹시 울었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어제 저녁 호수를 건넜어요'라고 말했다"고 하는 예화를 들면서 꿈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꿈의 해석> 참조).

제3부(제16-28강)에서는 일반신경증학(一般神經症學)으로 총괄하면서 인간의 마음을 근저로부터 동요시키고 있는 에네르기로서의 '리비도'에 대해, 저항과 억압에 대해서, 불안에 대해서 등, 독특한 정신분석 사상을 논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사상을 세밀하게 고찰하면 약 40년간의 긴 연구생활을 통해 현저히 변화·발전하고 있는데, 제3부에 나타난 사상은 대체로 중기의 사상에 해당되는 것이다(프로이트의 신경증에 관한 기본적인 사상은 '프로이트'항 참조).

이 책은 말하자면 정신분석학개론이라고 할 수 있는 책으로 정신분석학을 연구하고자 하는 자가 제일 먼저 읽어야 할 책이다.

아들러[편집]

Alfred adler (1870-1937)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심리학자. 후에 미국에 이주.

빈에서 자란 유대인. 빈 대학 의학부 졸업 후 트로츠키의 친구인 러시아 여성과 결혼하여 친구 중에는 사회주의자가 많았고 그 자신도 사회주의자였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강연에 매혹되어 그의 문하로 들어갔으나 그의 범성욕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분파하여 사회 감정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어떠한 형태의 사회도피든간에 모두 모두 불건강의 징후이다. 또 병약한데다 2남이고 형과 사이가 나빴던 데에서 출생 순위와 성격의 관계에 주목하던 중 열등감을 특히 중요시하게 되었다.

곧 인간은 누구나 여러가지 원인으로 열등감을 갖고 있으며 이를 보상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생활양식이 형성되어 가므로, 만일 보상될 수 없는 열등감이나 과도하게 보상된 열등감이 있으면 인격의 왜곡이 생긴다고 생각하여 이를 시정하기 위한 재교육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 때문에 정신분석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성욕주의를 혐오하고 있는 교육자·사회사업가·종교가 등에게 환영받았다.

그의 심리학은 '개인심리학'이라고 하며 신프로이트파나 카운셀링 이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연설을 잘 해서 구미(歐美)를 누비며 강연여행을 계속했는데, 영국에 강연여행 중 스코틀랜드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주저로는 <개인심리학의 실제와 이론>이 있다.

[편집]

Carl Gustav Jung (1875-1961)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심리학자.

스위스에서 태어나 스위스에서 자람. 바젤 대학 의학부 졸업.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고 감동하여 그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범성욕설을 싫어하여 분파하였다. 아버지가 목사였고 엄격한 칼뱅 주의가 강한 나라인 스위스에서 자랐다는 것이 분파의 한 원인일 것이다.

그는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사상이 몹시 다르다는 데 주목해 이는 인간 유형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 보고 내향형(內向型)·외향형(外向型)이라는 인간유형론(人間類型論)을 창안했다. 내향형의 인간은 심적(心的) 에네르기가 주로 자기 안으로 지향되어 비사교적이고 외향형의 사람은 거꾸로 자기 밖의 세계에 관심이 있고 쾌활하며 사교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신비현상, 신화, 원시인의 사고 등에도 관심을 갖고 이를 연구하기 위해 인도·북아프리카·뉴멕시코 등 각지를 여행했다. 이러한 체험에 의하여 무의식을 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으로 나누고, 후자는 말하자면 인류 공통의 것으로서 선조 이래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정신활동의 침전물이라고 생각하였다. 동양종교, 선(禪), 역경(易經) 등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인간이 갖는 종교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심리학은 '분석심리학'이라고도 하며 그의 언어연상법 기술은 오늘의 프로젝티브 테크닉(투영적 기법)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은 지금도 심리요법가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는 85세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물리학적 세계상[편집]

物理學的世界像

뉴턴에 의해서 대성된 물리학(역학)의 체계는 18세기 말 칸트에 의해서 그 기초개념의 철학적 근거가 주어진 다음 오랫동안 모든 정밀과학의 이상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이 되어서 새로이 열역학(熱力學), 기체의 분자운동론 및 전자기학(電磁氣學)이 완성되었다. 현상론적(現象論的) 성격을 갖는 열역학의 커다란 성공은 마흐나 오스트발트가 에네르기론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또한 패러데이(1791-1867)의 전자장(電磁場)에 대한 연구를 기초로 맥스웰(1831-1879)은(뉴턴 이래의 물체간에서 작용하는 힘을 원격작용으로 설명하는 설에 대해 전자기 현상을 장을 매개로 하는 근접적·연속적 작용이라고 한다) 전자장의 이론을 완성시켰다. 또한 이 무렵에는 공간은 에테르라는 것으로 충만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전자장을 이 에테르의 왜곡이라고 설명하려는 노력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 시도되었으나 결과는 어느 것이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에테르의 존재는 부인되더니 이윽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이 탄생하고 또 플랑크의 양자론(量子論)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구미의 산업은 산업혁명 이래 가속도로 발전했다. 수십 년에 걸쳐 '세계의 공장'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던 영국을 폭풍적으로 약진한 독일이 위협하기 시작했다. 특히 1890년대 독일의 야금(冶金)·금속·전기·화학공업의 발전은 눈부신 바가 있었다. 그리고 구미제국에서는 기술개량의 절실한 요구에 응하기 위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엽까지 물리과학 관계 연구기관의 창설·확장이 적극적으로 촉진되어, 독일에서는 1884년 베를린에 국립 물리공학 연구소가 창립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독일에서 플랑크의 양자론이 열복사론(熱輻射論)을 통해서 탄생하는 것이다. 이 양자론은 하이젠베르크 등에 의해 양자역학(量子力學)으로 발전된다.

원자의 세계를 지배하는 여러 법칙을 설명하는 양자역학은 고전물리학의 물질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혁시켰다. 곧 빛과 물질입자(物質粒子)는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다. 입자는 물결을 동반하고 있는데, 이 물결은 실재하는 물결이 아니라 입자의 통계적 진동을 설명하는 물결(파동함수)이다. 플랑크나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법칙이 통계적 성격을 갖는 데 반대하고 양자역학의 배후에 고전물리학의 인과율에 따르는 '숨겨진 변수(變數)'가 틀림없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또 파동역학(波動力學)의 창시자 슐레딩거, 드 브로이도 파동함수(波動函數)를 실재파(實在波)로 보는 등, 고정 관념을 고집하였다. 한편 전기 양자론(前期量子論)의 난점을 극복하려고 매트릭스 역학을 만든 하이젠베르크, 보른, 요르단은 반대로 오직 경험에만 의존하려고 하는 실증주의적 경향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전자(電子)의 위치·속도라는 양(量)을, 그것은 동시에 관측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양자역학에서는 이러한 양은 다시 소생되고 있다. 보어를 위시하여 코펜하겐 학파 철학의 핵심은 동시에 관측되는 것이 원리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양, '상보적(相補的)인 양'을 인정한 점에 있다. 그러나 양자역학에 있어서의 측정장치의 중요한 역할을 올바르게 지적하면서도 관측이 대상의 상태에 미치는 교란을 '주관의 개입'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등 관념론적 경향을 갖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에 의한 특수상대성이론(1905)은 모든 물리법칙이 등속도운동을 하고 있는 관측자(기준좌표계)에 대해서도 동일한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요구로부터 출발하여, 종래 모든 관측자에 대해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하던 시간·공간 개념을 무너뜨렸다. 두 개의 다른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이 어떤 관측자에 비해 '동시'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절대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며, 다른 관측자에 있어서는 한편의 사건이 선행하게 된다. 또 작용이 매개물 없이 순간적으로 전달되는 뉴턴 이래의 신비적인 원격작용(遠隔作用) 사상은 부정되었다.

가속도운동을 하는 기준좌표계(基準座標系)도 취급한 일반상대성이론(1913)은 중력의 문제를 해결하고 질량이 존재하면 그 부근의 공간이 일그러져서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성립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29년부터 하이젠베르크와 파울리는 양자론과 상대론을 결합시켜 장(場)의 양자론을 발전시켰다. 장의 이론에 있어서는 빛을 포함한 모든 소립자가 연속적인 '장'이라는 개념으로 파악되어 장끼리의 상호작용에 의해 소립자의 생성·소멸·상호전화(相互轉化)의 과정이 취급된다. 진공은 이미 공허한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소립자가 충만한 상태이며, 한 개의 전자는 이미 단독으로는 존재하지 못하고 각종 소립자의 옷을 입고서야 존재하게 된다. 최근에는 소립자 자신의 내부구조를 해명하는 노력도 진척되고 있다.

이러한 자연계는 질적으로 다른 대단히 많은 계층으로 되어 있고, 전체·지상·분자·원자·원자핵·소립자 등의 각 단계에서는 그 계층을 지배하는 고유한 법칙이 존재한다. 그리고 하나의 계층에 나타나는 우연적 요소는 다음 계층에서 필연적인 것으로 해명된다. 원자라든가 소립자라든가 하는 것은 무한한 계층 중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물질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물리학 연구는 자연의 무한한 계층을 하나하나 밝히면서 우리들의 물질에 대한 인식을 풍부하게 만드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편집]

Albert Einstein (1879-1955)

독일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상대성이론의 건설자.

유년시대를 뮌헨에서 보내고 스위스의 중학교에 들어가서 1900년 취리히의 연방공과대학을 졸업했다. 2년간 샤프하우젠시의 중학교 교사로 일한 후 1902년에 기사(技師)로서 베른의 연방특허국(聯邦特許局)에 들어가 1909년까지 일했다.

아인슈타인의 과학적 창조력이 가장 풍부했던 시기는 1900년부터 1906년까지의 짧은 기간이고, 그가 전 세계의 칭찬을 받게 된 분자물리학·양자론 및 상대성이론에 관한 연구는 이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있던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1909년 취리히 대학의 원외 교수가 되고, 이어 프라하, 취리히의 연방 공과대학에서 강좌를 갖고, 1913년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1914년에는 카이저·빌헬름 물리학연구소장, 베를린 대학 교수가 되었다. 1933년 나치스의 유대인 배척정책에 의해 추방되어 미국의 프린스턴 고등과학연구소 교수가 되고, 1945년 은퇴한 후에도 프린스턴에서 지냈다.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 열렬한 반전주의자(反戰主義者)이며, 원자무기의 사용에 대해서는 특히 강력하게 반대했다.

아인슈타인은 플랑크와는 반대로 플랑크에 의해 발견된 자연현상의 새로운 측면을 철저히 추구하여 '양자'가 단순한 수학적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빛의 본성을 푸는 열쇠임을 인정했다.

시간·공간이라는 개념의 근본적 수정을 가져온 상대성이론의 건설은 뉴턴의 업적과 함께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인식이라는 업적 중에서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의 출발점에 있어서 일견 자명한 개념인 '동시성(同時性)'의 개념을 문제로 삼아, 그것이 물리학적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것을 결정하는 물리적 방법이 지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것은 양자역학에 있어서 보어나 하이젠베르크의 사고방식을 이끈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양자역학에 대해서는 고전적인 입장에서 반대했다.

그 후 아인슈타인의 전자장과 중력장(重力場)을 결합하는 통일장(統一場)의 이론을 위해 생애 후반의 거의 40년을 바쳤다. 그에게 있어서는 전 우주, 또는 물리학 전체는 통일된 완전한 것으로 생각되어 그 안에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집요하게 외견상 모순의 근원을 탐구하여 내적 불완전성(不完全性)이 없는 물리적 묘상(描像)을 대담하게 구축하여 통일 이론 발견의 길을 전진했다.

아인슈타인의 철학적 의견에는 유물론적 입장과 함께 마흐주의적·관념론적인 사상이 있었다. 또 그는 개인생활에 있어서는 부끄러움을 잘 타서 세상의 존경을 피하는 등 부조리한 점이 많았다. 주저는 <나의 세계관>(1930).

나의 연구의 자취[편집]

(1949)

아인슈타인이 67세 때 쓴 자서전.

생활의 외면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오직 학문상의 사상이나 생애를 통해서 차례차례 흥미를 가졌던 문제에 대해 견해를 말하고 있으므로, 이 책을 통해서 위대한 과학자의 창조적 연구 활동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구체적인 학문상의 문제 이외에도 아인슈타인은 일반적인 문제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는 자기의 학문상 작업에 있어서는 자연발생적으로 유물론자였으나 동시에 생애를 통해서 마흐의 관념론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아인슈타인의 사상에 의하면 이론은 사실을 설명해야 할 뿐 아니라 간결성과 그 원리적 기초의 논리적 조화성으로 나타나는 내적 완전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실험적인 사실과의 일치는 아무것도 보증하지 못한다. 사실은 적당한 방법으로 정리하기만 하면 정해진 정확성에 따라 여러가지 이론에 의해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여러가지 이론이 동일하게 주어진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중에서 해답을 고르는 경우 간결성이 결정적인 것이 된다. 이론은 사색적인 방법에 의해 만들어지며 그 후 사실에 의해 검증되면 되는 것이다. 이론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논리적인 성격을 갖는 일반적인 원리이다. 사실은 그 세부를 정확히 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다.

그는 일반적인 물리학의 원리 발견을 생애의 목표로 삼고 중력, 소립자의 구조, 전자장 기타 모든 장을 포함하는 보편적인 물리이론에 대한 사색에 몇 번씩이고 되돌아가고 있다.

양자론 발전의 초기에 많은 공헌을 한 아인슈타인이 현재의 양자역학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플랑크[편집]

(막스) Max Planck (1858-1947)

독일의 물리학자.

빛나는 양자의 세기의 서곡이 된 플랑크의 복사공식(輻射公式)으로 유명. 아버지는 법률학자. 뮌헨·베를린의 대학에서 공부. 1892년 베를린 대학 교수가 되었다. 1920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

처음에 그는 화학자 오스트발트와 함께 원자론의 투사(鬪士) 볼츠만에게 반대하였으나 1895년의 자연과학자대회에서는 외견상 보편성을 띠지만 실은 공소한 에네르기론을 고취한다고 하여 오스트발트를 비판하고, 점차 원자론적 방향으로 접근하였다. 플랑크는 열복사(熱輻射)에 대한 윈과 레리의 두 식(式)을 극한으로서 포함하는 복사분포식(輻射分布式)을 반쯤 실험식으로 풀며 이에 이론적인 기초를 놓았다(1900). 이때 에네르기를 "연속적으로 무제한하게 분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산적(離散的)인 정수개(整數個)의 유한하고 동등한 부분으로 합성된 양으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여 '에네르기 양자'가 탄생했다. 당시 독일학계의 중요 문제였던 열복사론을 광의 전자론, 열역학, 확률론을 갖고 한걸음 한걸음 꾸준히 사상(事象)의 핵심에 육박해 간 플랑크의 과학적 인격성은 널리 칭송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 필연성의 개념을 버리고 통계적 법칙만을 주장하는' 양자론에 대해 고전론의 입장에서 계속 반대했다.

주저는 <열역학>(1927), <물리학적 세계상의 통일>.

물리학적 세계상의 통일[편집]

物理學的世界像-統一 (1908)플랑크가 1908년 네덜란드의 라이덴 대학에서 한 강연. 플랑크의 인식론에 관한 대표적 저작.

당시 자연과학계에서 행하고 있던 마흐의 실증주의적 사유경제설(思惟經濟說), 곧 "자기의 감각 이외에 실재(實在)는 없다. 모든 자연과학은 결국 생존경쟁의 결과로 일어나는 우리들의 사상(思想)의 우리들의 감각에 대한 경제적 순응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물심(物心)간의 한계도 실용적·인습적인 것에 그치며 세계의 진실하고 유일한 요소는 감각이다"라는 견해에 반대하고, 플랑크는 물리학에는 고유한 방법적 특색을 가지며 탈레스에 있어서의 '물', 오스트발트에 있어서의 '에네르기'처럼 일정한 지도원리에 의거하여 통일적인 물리학적 세계상에 접근하는 것이 물리학 발전의 방향이라고 주장했다. 물리학의 기본 개념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도 그 전제인 특수감각·의인적 요소(擬人的要素)가 점차 제거되고 여러 영역에 공통된 언어가 되며 체계의 통일, 상(像)의 통일을 지향하고 있음을 명백히 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더욱 정밀하게 조사해 보면, 종래 물리학의 결과는 결코 단일한 화상(畵像)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화상의 집합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연현상의 어떤 종류에 대해서도 일일이 특수한 상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은 상호간 연관되는 바가 없어서 다른 것을 해치지 않고 그중 하나를 제거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일은 장래의 물리학에 있어서는 불가능하다. 장래의 물리학에 있어서는 일점 일획이라도 중요하지 않다고 하여 제거할 수는 없다. 반대로 각부가 전체의 결여할 수 없는 요소이며, 이러한 것으로서 관찰된 자연에 대해 각기 일정한 의의를 보유하고, 거꾸로 관찰된 물리현상은 모두 세계상 안에서 자기에게 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또 이러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이젠베르크[편집]

Werner Heisenberg (1901-1976)

독일의 물리학자·양자역학의 창설자.

아버지는 유명한 고전언어학자. 뮌헨·괴팅겐·코펜하겐의 각 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을 배우고, 1926년에 코펜하겐 대학 강사가 되었으며, 라이프치히·베를린 양 대학의 교수를 거쳐 1942년 이후에는 괴팅겐 막스 플랑크 연구소 물리학연구소장으로 일하였다. 1932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

원자의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을 설명하는 양자역학, 매트릭스 역학의 창시자이며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규정할 수는 없다"는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를 세웠다. 양자역학은 입자가 분명한 궤도를 그리며 운동한다는 생각을 부정하여, 입자의 장래 위치와 속도를 일의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는 의미의 인과율은 성립할 수 없게 됐다. 1929년에 파울리와 함께 시작한 장(場)의 양자론은 현재 소립자의 생성·소멸·상호전화(相互轉化)를 취급하는 기본형식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립자물리학 분야에서 야심적인 연구를 발표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매트릭스 역학을 만들 때 '물리학은 직접 관측 가능한 양만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실증주의의 원리를 지침으로 하여 원자내의 전자(電子) 궤도라든가 속도라든가 하는 양의 도입을 피하고 원자로부터 방출되는 빛의 진동수(振動數)나 강도만을 갖고 원자현상을 기술하려고 하였다. 또 양자역학에 있어서의 측정장치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지적하였으나 연구 목적이 장치의 판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객관적 성질에 있다는 점을 경시하였다.

또한 그는 소립자의 배후에 우주방정식(宇宙方程式)에 따르는 시원물질(始原物質)이 있다고 생각하여 "우주방정식의 발견에 의해 물리학 문제는 이미 깊이를 재는 것이 아니라 넓이를 구하는 것이 되었다"고 말하고 새로운 기계론을 부활시켰다.

주저로는 <현대물리학의 자연상>(1955), <현대물리학의 사상>(1958) 등이 있다.

자연과학 기초에 있어서의 변혁[편집]

自然科學基礎-變革 (1936)

하이젠베르크가 1935년 빈 대학에서 한 강연을 책으로 출판한 것. 하이젠베르크는 "우리 물리학의 기초개념 수정은 어떻게 해서 가능해졌는가? 이 수정에 대해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의 진리는 어떤 내용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한 다음 다음과 같은 생각을 전개시키고 있다.

고전물리학의 법칙은 그 타당성 자체가 아니라 적용범위에 있어서 현대물리학의 제한을 받았다. 고전물리법칙(古典物理法則)의 공리계(公理系)에 나오는 개념의 애매성은 제한된 범위내에서만 허용된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 이전에 모든 개념을 명확히 규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개념의 수정은 경험의 강제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고전물리학의 근거에는 공간·시간내에 객관적 사상(事象)이 놓여 있다는 전제가 있다. 고전물리법칙은 일반적·추상적인 양자역학 법칙의 극한이지만 고전물리학의 개념은 현대물리학에 있어서도 여전히 자연과학의 불가결 요소이다. 물리학상의 결과는 적당한 장치에 의해 기록되는 언어로, 곧 고전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현대물리학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대로는 절대시간(絶對時間)이라는 개념을 부정했다. 물리법칙에 나타나는 시간은 이미 일의적인 시계의 진행에 대응하지 않으며 다른 장소에 있어서의 사건의 동시성은 절대적인 의미를 갖지 못한다. 양자론은 기초 법칙에 통계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전자가 윌슨의 '안개상자' 속에서는 궤도를 그리는 입자처럼 행동하고 회절격자(回折格子)에서 반사될 때는 파동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사고방식과는 반대로 입자는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히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개념의 변경은 우리들의 경험 범위가 기술적으로 확장된 결과 생긴 것이다. 새로운 개념은 결코 낡은 개념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새로운 사상에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관측의 이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양자론에 있어서는 관측의 측정장치간의 상호작용이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 양자역학의 법칙에 따르는 물리적 체계와 고전개념으로 기술되는 측정장치 사이에는 틈이 있으며, 이 틈에서 측정장치가 체계에 대해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교란을 주는 결과로 체계의 통계적 성격이 나타난다.

사이버네틱스[편집]

cybernetics

과학의 경계영역(境界領域, 어느 학문 분야와 다른 학문 분야가 갈라지는 영역)의 공동 연구에 대한 필요성을 인정한 미국의 수리철학자(數理哲學者) 위너, 의학자 로젠브뤼트, 물리학자 바리야르타, 기술자 비게로 등이 1930년대부터 시작한 과학 방법론에 관한 토론, 연구를 통해 출현한 종합과학.

위너는 제2차대전 중에 고사포의 성능 향상을 위하여, 항공기의 비행진로 곡선을 예측하는 것을 문제로 삼아, 과거에 어떤 종류의 연산조작(演算操作)을 실시하여 곡선의 장래를 근사적으로 예측하는 일을 기계적으로 실현하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는 피드백 기구(Feed Back 機構)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곧 주어진 하나의 형(型)대로 어떤 것에 운동을 일으키려고 하는 경우, 그 운동의 원형과 실제로 일어난 운동의 차를 지령으로 보내고 그 차를 끊임없이 적게 되도록 조작하는 제어 방법에 의해 이 운동을 더욱 원형에 접근시키는 것이다. 배를 주어진 코스에 가장 가까운 항로로 가게 하는 조타장치는 이것의 한 예이다.

피드백계(系)는 신경생리학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들이 한 자루의 연필을 주워 올리려고 할 때, 손끝과 연필의 거리가 동작의 각 단계마다 감소되도록 진행한다. 그리고 이러한 동작을 할 때, 우리가 연필을 줍는다는 목적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정도가 각 순간마다 신경계에 보고되고, 한편 다음 순간의 손의(근육의) 운동은 끊임없이 수정된다. 이와 같이 중추신경계의 어떤 종류의 기능은 신경계로부터 시작되어 근육으로 갔다가 감각기관을 통해서 다시 신경계로 되돌아오는 순환의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위너는 제어공학(制御工學)과 통신공학(通信工學)이 통보(通報), 곧 '시간의 경과에 따라 분포되어 있는 수량의 계열'이라는 개념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밝혔다. 통보의 장래는 과거의 어떤 종류의 연산을 해서 예측할 수 있다. 그래서 통보의 통계적 성질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최적의 예측을 발견하는 문제가 풀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장치의 설계가 가능해진다. 위너, 로젠브뤼트 등은 이와 같이 동물신경과 기계에 공통된 정보전달·제어를 연구하는 학문을 사이버네틱스(그리스어로 '타수(舵手)'를 의미한다)라고 불렀다(1947). 뉴턴 이래의 '정밀과학'에 대해 사이버네틱스는 통계적인 사고방식에 기초를 두는 '준정밀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사이버네틱스는 오토메이션 장치를 만들어내고 컴퓨터를 출현시켰다.

사이버네틱스는 논리수학(論理數學)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미 라이프니츠 철학의 '추리계산법(推理計算法)'에서 '추리기계'의 싹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계산기는 산출 연산을 하는 동시에 논리계산을 하는 기계이며, 계통적인 산법(算法)에 따라 수를 결합해 가는 것이다. 이 산법은 이진법(二進法)의 산술과 마찬가지로 '이분법(二分法)', 예스냐 노냐의 선택에 기초를 두고 있다. 즉 계산기의 구조는 '도통상태(導通狀態, on)'와 '비도통상태(off)'의 두 상태를 취할 수 있는 계전기(繼電器)의 조합 구조와 같은 것이다. 인간 및 동물 신경계도 계산기로서의 작용을 할 수 있는 계(系)로 알려져 있다. 신경은 본래 두 가지 활동 상태, 곧 흥분(발화)과 휴지(休止)의 상태를 갖는 계전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사이버네틱스나 이에 의한 전자계산기의 출현은 경제학·사회학 분야만이 아니라 문화의 여러 영역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위너 자신 또한 오토메이션이 고속도 계산기에 의한 지령전달 기구임을 인정하고 그 사회적 영향의 심각성을 노사(勞使) 쌍방에 일찍부터 경고하였다.

위너의 저작 중에서 수학에 관한 여러 논문은 계발되는 점이 많으나 사회를 다룬 논문에는 관념적인 것이 많다.

위너[편집]

Norbert Wiener (1894-1964)

미국의 수리철학자. 커뮤니케이션과 오토메이션 과학의 개척자. 사이버네틱스의 명명자.

미국의 미주리주에서 언어학자의 장남으로 태어나 수학·생리학·철학을 배우고 하버드 대학과 대학원에서 수리철학을 연구하여 18세에 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 버트런드 러셀에게 사사(師事)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갔다. 제1차대전 말기에 육군의 탄도(彈道)연구소 연구원, 또 1919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수학 전임강사가 되었다. 동대학 전기공학과의 바네버 부슈 교수의 계산기계 제작에 협력하고 자신도 광학적(光學的) 계산기계를 설계했다. 1930년대에 신경생리학자인 로젠브뤼트 박사와 과학 방법론에 대한 공동연구를 하고 제2차대전 중에는 자동조준기(自動照準機)·레이더·유도탄을 연구했다. 전후에도 멕시코 국립 심장연구의학소 등과 공동연구를 계속했다.

위너는 계산기의 본질은 일종의 통신장치이며, 자동제어기계의 이론 전체를 통신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또 신경계, 계산기계 및 제어기계 상호간의 유사성에 주목하고, 통신공학을 통계적인 사고라는 관점에서 취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밝혔으며, 통계적 사고를 기상학·사회학·생물학·생리학의 연구에도 적용하였다. 위너는 맥스웰, 볼츠만과 기브스에 의해 20세기에 처음으로 수립된 통계적인 물리학 개념에 수학적인 기초를 놓고 뉴턴 이래의 '정밀과학'에 대해 '준정밀과학'이라 할 수 있는 통합과학(統合科學) ―― 사이버네틱스를 발전시켰다. 그는 오토메이션의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사이버네틱스(제2판)[편집]

(1961)

위너의 주저.

그가 로젠브뤼트와 함께 10년 이상이나 진행시켜 온 과학의 방법에 대한 연구성과가 1948년에 출판되고, 제2판에서는 그 후에 발전한 새로운 사상을 다룬 두 장(章)이 첨가되었다. 위너는 사이버네틱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우리의 상황에 관한 두 개의 변량(變量)이 있다고 하고, 그중 하나는 우리들이 제어할 수 없는 것, 다른 하나는 우리들이 조절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자. 이때 제어할 수 없는 변량의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값에 의거하여 조절할 수 있는 변량의 값을 적당히 정하고 우리들에게 가장 편리한 상황을 생기게 하고 싶어한다. 이를 달성하는 방법이 바로 사이버네틱스이다. 배의 경우, 풍향이나 바다의 상태가 지금까지 변해온 모양에 따라, 키를 잘 잡으면 주어진 코스에 가장 가깝게 배를 몰 수 있다는 것――이것이 바로 그 한 예이다."

서문과 서장에서는 저자의 사이버네틱스에 관한 사상적 발전과 철학적 고찰이 기술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통계적 사고방식의 수학적 기초를 다루고 정보와 통신, 피드백, 계산기와 신경계 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수학적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제2판에서 보충된 제9장에서는 생물조직의 특징인, 생존을 위해 필요한 학습능력과 종족보존을 위한 증식능력(增殖能力)을 기계적으로 구현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학습기계의 개념은 여러가지 예측기, 방해를 받은 통보로부터 원래의 통보를 찾아내는 여파기(濾波器), 체커와 같이 상대가 있는 게임을 하는 기계의 연구 제작 등에 널리 응용되고 있다. 제10장에서는 자기조직 과정의 예로서 뇌파(腦波)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신경계의 활동에 어떤 종류의 전위(電位)가 부수되고 있다는 것은 19세기 초엽에 카엘이 다리 근육 신경의 표본을 만들 때에 발견되었다. 그래서 전기생리학(電氣生理學)이라는 학문이 탄생하고 일렉트로닉스 기술의 진보에 의해 오늘날에는 이 미소전위(微小電位)의 시간추이(時間推移)를 정확히 기록하고 해석(解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위너는 뇌파에 있어서 극히 좁은 범위의 특정한 주파수만이 형성되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 발생·기능·의학적 이용에 대한 이론을 제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