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나폴레옹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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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등장〔槪說〕[편집]

테르미도르 반동(反動)으로 권력을 잡은 구(舊) 지롱드파는 급진적 민중과 왕당파(王黨派)를 적으로 삼고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1795년에 제정된 헌법은 91년 헌법과 유사한 부르주아적인 헌법이며, 제한선거에 의한 2원제의 입법부와 5명의 총재(總裁)에 의한 총재정부를 설립했다. 정부의 부르주아적 경제정책은 인플레이션을 격화(激化)시켜, 민중의 불만은 높아지고 바뵈프에 의한 평등파의 음모 등도 발생했다. 정부가 좌파(左派)를 탄압하면 왕당파가 진출하고, 왕당파를 누르려고 민주주의적 자유의 제한을 얼마간 완화하면 자코뱅파가 진출한다는 식이어서, 정부는 안정된 권력을 형성할 수가 없었다. 나폴레옹은 왕당파의 방데미에르 봉기(蜂起)를 진압하여 총재정부로부터 북이탈리아 방면의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나폴레옹[편집]

Bonaparte Napolon (1769

1821, 재위 1804∼1814)

코르시카 태생.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프랑스혁명을 맞아, 한때 코르시카에 돌아가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후에 혁명전쟁에 참가하여 툴롱 항(港) 탈환의 포병 지휘관과 이탈리아 전선의 여단장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테르미도르 9일 사건이 일어났을 때 로베스피에르파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으나, 석방 후 왕당파의 폭동을 진압하였으며, 보아르네 장군의 미망인 조제핀과 결혼하였다. 이탈리아 군사령관이 되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 명성을 떨쳤다. 그후 영국과 인도와의 연락을 끊기 위하여 이집트에 원정, 카이로에 입성했는데, 총재 정부의 위기가 닥치자 단신으로 귀국, 1799년 11월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제1통령(統領)이 되었다.

뤼네빌, 아미앵 양조약의 체결로 평화를 회복하고, 종교협약, 나폴레옹 법전 등으로써 구프랑스와 혁명프랑스를 부르주아지와 토지 획득 농민의 선에서 균형을 취해 안정시키고, 1804년 5월 황제가 되어 12월에 대관식을 가졌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 체제에 의하여 이루어진 근대적 국민군과 군사 생산력은 혁명전쟁의 게승으로서의 유럽지배를 위해 투입되었다.

트라팔가 해전에 대패하여 영국 본토 상륙작전은 좌절되었으나 울름, 아우스터리츠, 예나·아우어슈테트 싸움에 승리하여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누르고, 대륙 봉쇄령을 발표했으며, 틸지트 화약과 에스파냐 점령으로 봉쇄권을 확대했다. 1809년에 조제핀과 이혼하고, 이듬해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 이 기간이 그의 전성기로서 사실상 전유럽을 지배하고, 형제나 근신(近臣)을 각국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프랑스는 대륙봉쇄의 영향으로 경제적 불황에 빠졌고, 러시아는 반항적으로 프랑스 상품에 과세하여 대륙 봉쇄령에 복종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1812년 5월 60만의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 원정을 시작하였으나, 9월에 동시(市)를 점령하고도 러시아의 초토작전과 동장군의 맹위에 견디지 못하고 후퇴, 12월 니이멘 강을 건넜을 때는 원정군의 병력은 거의 괴멸되었다. 또한 라이프치히에서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스웨덴의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에스파냐에서 영국군이 북상하여 3월말 파리가 함락되어 엘바섬에 유배되었다.

루이 18세가 복위한 후 1815년 2월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남프랑스에 상륙, 파리에 입성(백일천하)하여 제위에 올랐으나, 워털루 싸움에서 패전하고,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1821.5.5.)

통령정부[편집]

統領政府

부르주아지는 총재정부가 약체화되었고, 좌우에서의 반격으로부터 부르주아적 이익을 수호하기가 곤란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총재정부에 대신하는 강력한 부르주아 정권의 출현이 그들에 의해서 열망되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빛나는 군사적 재능과 명성, 그리고 그의 야심은 부르주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최적임자였다. 그는 대상인·은행가 등으로부터 지지를 받아 군사력을 배경으로 원로원(元老院)·오백인회의(五百人會議)를 해산시키고, 3명의 통령(統領)에 의한 통령정부를 형성하고, 스스로 제1통령의 지위에 올랐다. 이것은 사실상 그에 의한 군사독재였다.

제2회 대불동맹[편집]

第二回對佛同盟

1799년 영국의 윌리엄 피트는 유럽 제국에 호소하여 제2회 대불동맹을 형성했다. 여기엔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등이 참가하고 있었으나 러시아와 영국 간에 대립이 생겨서, 러시아는 스웨덴, 덴마크, 프로이센과 함께 영국에 반대하는 동맹을 맺었다.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편집]

-遠征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원조를 얻어 북이탈리아를 탈환하고 대군을 집중하여 프랑스에 대한 반격의 거점으로 삼았다. 나폴레옹은 1800년 5월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북부 이탈리아에 침입, 격전 끝에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1801년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화평을 청하고, 캄포포르미오 조약의 여러 조건을 재확인했던 것이다.

캄포포르미오 조약[편집]

-條約 Treaty of Campo Formio

나폴레옹 전쟁 중 프랑스·오스트리아간에 이루어진 평화조약. 1796년 알프스를 넘은 나폴레옹군은 사르데냐를 정복하고, 오스트리아의 5개 군단을 궤멸시키고, 북이탈리아를 석권하여 사르데냐로부터 니스와 사보이를 얻었다. 이어 나폴레옹군이 빈으로 진격해가자 오스트리아는 화해를 요청, 이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의하여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이오니아 제도를 얻었고,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 공화국 이외의 이탈리아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확약했는데, 이로 인하여 제1차 대(對)프랑스 동맹은 와해되었다.

아미앵 조약[편집]

-條約 Treaty of Amiens

영국은 오스트리아의 패퇴 후에도 전쟁을 계속했는데 재정력이 풍부한 영국에 있어서도 장기간의 전쟁에 의한 경비는 국가 재정을 압박하여, 식량을 비롯한 여러 물가의 앙등은 대중의 불만을 증대시켰다. 부르주아지도 대륙 시장의 재개를 요망하여 드디어 1802년 3월 프랑스와 화약(和約)을 맺었다.

영국은 점령한 식민지의 일부를 반환했고, 프랑스는 이집트, 이탈리아의 중남부로부터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집트는 터키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트라팔가 해전[편집]

-海戰 Battle of Trafalgar

지브롤터에 가까운 트라팔가 앞바다에서 영국 함대와 프랑스·에스파냐 연합 함대와의 해전. 아미앵의 조약 이후, 프랑스의 이탈리아 및 네덜란드에 대한 군사적 우위(優位)는 영국에 커다란 위협이 되어 1803년 두 나라의 국교가 단절되고, 제3회 대(對)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나폴레옹은 영국 본토 상륙작전을 결행하기 위하여 영국 함대를 멀리 해양으로 유도하려 했는데, 도리어 넬슨이 인솔하는 영국함대에 의해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연합함대가 격파당했다. 이 때문에 나폴레옹의 영국 본토 상륙 계획은 실패하게 되어 대륙 봉쇄령을 강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