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나폴레옹과 빈 체제/19세기 전반의 일본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19세기 전반의 일본〔槪說〕[편집]

19세기의 일본은 상업적 농업의 전개를 바탕으로 도시 수공업이 발달하여 고용(雇用) 노동이 성립하고, 부농(富農) 경영이나 매뉴팩처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근대적’ 생산 양식의 맹아(萌芽) 단계에 도달했다.

거기에다 구미 자본주의 자유무역시장의 일환에 끼여들게 됨으로써,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러한 개국(開國) 상황은 일본의 지식인층으로 하여금 중국 중화관(中華觀)에서 서구 문명국관(觀)으로 시점을 전환시켜 넓은 세계에서 지식을 찾게 했다. 그러나 이 전환은 서양의 과학, 동양의 예(藝) 의식을 매개시켰기 때문에, 유교적 합리론에 밑받침된 봉건의식을 유지시켰다.

그러나 구미의 자유무역은 일본 산업계에 일대 타격을 가하였고, 특히 견직물 공업지대의 조업을 부진하게 했다. 그 결과 바쿠후(幕府) 말기에는 재래 산업의 근대적 전개(展開)가 오히려 저해되었다.

산업근대화의 맹아[편집]

産業近代化-萌芽

18세기에 들어선 일본은 상업적 농업의 전개와 전국적 상품 유통의 발달에 따라, 농촌지대에 면모·견직물 등의 섬유업을 비롯하여 제지(製紙)·제도(製陶) 등 지방수공업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종래 원료 내지 반제품(半製品)의 생산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차차 가공·완성 공정(工程)도 실시하게 되어,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도시수공업을 압도하는 세력으로서 우수한 상품을 중앙시장에 다량 출품하게 되었다. 따라서 농민 중에서도 영속적으로 수공업 생산에 종사하는 자가 나타났고, 또한 농민층 분해(分解)의 진전에 따라서 대량으로 발생한 영세농민은 생계유지를 위해서 이에 종사했다.

이와 같이 부업적인 농촌공업은 차차 연속적인 생산으로 발전해 갔으나, 봉건제의 규제가 강하여, 직접생산자인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하여 임금노동자가 되는 일은 적었다.

이러한 민간산업과는 별도로 일부 지방의 영주 직영 직물공장에서는 매뉴팩처 경영이 실시되었고, 또한 바쿠후(幕府)나 사가(佑賀)·사츠마(薩摩)·초슈(長州) 등의 한(藩)에서는 군사적 요청에 따른 서양식 공장이 설립되었다.

학문·사상의 발달[편집]

學問·思想-發達

19세기가 되자 국학(國學)이 발전하여 농촌에 침투되었다. 그리하여 농촌의 봉건적 황폐를 구제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 따위의 실학성(實學性)을 가지고, 생산성 향상을 위한 농업기술을 발달시켰다. 란가쿠(蘭學)는 차츰 번역기술학(飜譯技術學)으로 변한다든지, 나아가서 의학(醫學)·병학(兵學) 등의 학문으로 바뀌었다. 여러 한(藩)의 정책 개혁은 개명적(開明的)인 사상가와 동시에 서양의 기예(技藝)를 익힌 사람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학숙(學塾)이 많이 생겨서 인재육성을 담당했다. 향학(鄕學)과 같은 서민 교육기관이 생겨서, 유학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학문을 가르치게 되었다. 반면에 서민 신앙도 왕성해져서, 출구(出口)를 찾아 구원을 희구하는 서민을 상대로 절(寺)들이 성황을 이루었다.

개국[편집]

開國

19세기에 들어서자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 등의 여러 나라가 자기 나라 제품의 판매와 원료 획득을 위하여, 새 시장으로서의 아시아에 진출해 왔다. 당시 항해에서 필요로 했던 신수(薪水) 보급상 일본에 개국을 요구해 오는 나라가 많아졌다. 1853년에 함대를 이끌고 일본에 온 미국 사절 페리 제독의 압력에 굴복하여 이듬해인 1854년에는 마침내 200년 이상 계속된 바쿠후(幕府)의 조법(租法), 쇄국책(鎖國策)을 버리고 개국을 단행하여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을 맺었다. 이어 영국·러시아·네덜란드와도 거의 같은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에 개국을 강요한 여러 나라는 단순히 신수 보급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산업혁명을 거쳐서 대량으로 생산한 상품의 시장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화친’으로 끝나지 않고 자유로운 통상관계를 맺기를 요구했다. 이리하여 1858년 미·일 통상조약을 시초로 영국·러시아·네덜란드·프랑스와 통상조약을 맺음으로써 일본의 개국은 일단 완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