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남북전쟁과 제국주의의 발전/일본의 천황제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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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천황제 확립〔槪說〕[편집]

일본에서의 19세기 후반은 300년에 걸친 바쿠한(幕藩) 체제가 붕괴되고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거쳐 천황제(天皇制) 국가가 확립되어 가는 시기이다.

개국(開國)은 일본 국내의 부르주아적 발전을 촉진시키는 한편, 물가 앙등을 비롯한 경제혼란은 민중의 생활을 동요시켜 봉건지배에 반대하는 농민반란이 각지에서 고조되었다.

메이지 유신은 기본적으로는 농민의 반봉건투쟁을 동인(動因)으로 하면서 토막파(討幕派) 지도자들의 지도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봉건적 제도들을 철폐함과 동시에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슬로건으로 하여 급격한 ‘근대화’를 도모했다. 이 정책 실현을 위해서 지조(地租) 개정에 의한 새로운 세제가 확립되었는데 농민들로부터의 수탈은 과중했다.

농민은 각지에서 지조개정 반대의 반란을 일으켰고, 한편에서는 ‘문명개화’에 반발하는 보수적 무사(武士)층이 일으켰다. 이와 같은 움직임에 대처하여 메이지 정부의 전제적 성격은 한층 강화됐다. 이리하여 전제정부에 반대하였고 국민의 권리와 자유의 확충, 국회개설을 요구하는 자유민권운동이 전국적 규모로 전개되었다. 정부는 이 민권운동을 억압하면서 메이지 헌법을 제정했는데, 초기 의회에서는 역시 민당(民黨) 공세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양자의 항쟁은 조약개정의 성공과 청일전쟁(淸日戰爭)의 승리로 종지부를 찍었다. 이 과정에서 교육칙어(敎育勅語)를 정점으로 하는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이데올로기가 성립되어 학교교육을 통해서 국민에게 침투되어 소위 ‘신민(臣民)’이 육성되어 나갔다.

메이지 천황[편집]

明治天皇 (1852

1912)

일본의 천황(재위 1867

1912). 이름은 무쑤히토(睦仁). 부친 고메이(孝明) 천황 사후 즉위하여 토막파(討幕派)에 업혀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수행, 왕정복고(王政復古)·무진전쟁(戊辰戰爭)·도쿄 천도(東京遷都) 등에 의해서 차츰 천황의 권위를 형성해 갔다. 이후 황실 재산의 설정·군인칙유(軍人勅諭)·대일본제국 헌법·교육칙어 등과 함께 메이지 헌법체제의 중핵에 앉게 되어 그 신성화·절대화가 추진되었고, 또한 청일(淸日)·러일(露日)전쟁의 승리도 곁들여 메이지 천황제는 정점의 자리를 확립하여 세계 열강의 대열에 끼게 되는 획기적인 시대였다.

문명개화[편집]

文明開化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를 추진시키기 위해 봉건적 여러 제도나 봉건적 사상의 타파를 위하여 유럽 근대문명의 적극적 수입을 도모했다. 철도 개통, 전신·전화나 우편의 개시, 가스 등의 사용, 벽돌로 만든 서양식 건축이나 양복의 착용, 쇠고기를 먹고 맥주를 마시는 등의 양식(洋食) 보급, 상투를 폐지하여 이발을 하며, 태양력을 채용하여 1일 24시간 주일제를 취하여 일요일을 휴일로 결정하는 등 문물제도·풍속 습관의 모든 면에 걸쳐서 개혁이 실시되어 구미풍 양식이 들어왔다. 이 풍조가 문명개화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그 문명개화도 극히 일부분의 층에 그친 것으로서 일본 대부분의 지역은 사회의 진보로부터 외면당했다. 또한 예컨대 학제(學制)가 국민의 부담에 의해서 국민개교육(國民皆敎育)을 실시하려고 했던 것과 같이 근대화가 실정에 맞지 않고 위에서부터 급격히 실시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국민의 반감도 초래한 면이 있었다.

메이지 헌법체제[편집]

2 明治憲法體制

1881년의 정변(政變)에서 정부의 지도권(指導權)을 장악한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은 천황(天皇) 주권의 원칙을 유지하면서 입헌제(立憲制)에의 점진적 이행(移行)을 도모하려고 했다. 이토는 헌법 조사를 위해서 유럽 제국을 순방하고 특히 독일제국(諸國)의 군주제 헌법을 배웠는데, 정부는 헌법제정·국회개설에 이르는 과정에서 천황제 국가 확립에의 프로그램을 착착 실행했다. 즉 군제(軍制)를 확립하였고, 국민칙유(軍人勅諭)를 발포하여 천황의 군대 실현을 기했으며, 화족령(華族令)을 제정하여 새로운 신분 질서를 만들어 화족을 황실(皇室)의 번병(藩屛)으로 삼았다. 또한 내각제도를 실시하여 재상(宰相)의 임명은 천황의 권한으로 하여 의회의 의사와는 무관하도록 했고, 황실 재산의 증가를 꾀하여 천황제의 경제적 기초를 견고히 한 것 등이 그것이다. 한편 자유민권운동(自由民權運動)에 대해서는 철저한 탄압을 가하여 인민주권사상을 질식시켜 국약헌법(國約憲法)에의 길을 봉쇄했다. 헌법 초안은 이토 등 여러 명의 손으로 기초되어, 1888년 설치된 추밀원(樞密院)에서 심의되었는데, 그동안 국민에게는 전혀 그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 추밀원은 천황의 최고 자문기관으로서 그 후 계속해서 의회나 내각을 장악하게 된다.

이와 같은 경로에 의해서 제정된 메이지 헌법이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충분히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천황에게 대폭적인 권한을 부여하여 행정부 우위의 방침이 취해졌고, 그 반면 의회의 권한이 약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토 히로부미[편집]

伊藤博文 (1841

1909)

일본의 정치가. 초슈(長州) 출신.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쇼카 손주쿠(松下村熟)에서 배우고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를 따라서 존왕양이운동(尊王揚夷運動)에 참가했다. 1863년 런던에 유학했으나 4국 연합함대의 시모노세키(下關) 포격을 알고 귀국하여 강화교섭을 담당했다.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밑에서 토막운동(討幕運動)에 종사하여 메이지 신정부(新政府)에 들어갔다. 기도 다카요시·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사후, 차츰 두각을 나타내어 1881년의 정변에서 오쿠마 시게노부(大常重信)를 추방하고 정부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1882년 헌법 조사를 위하여 유럽으로 갔다가 귀국 후 일본제국 헌법의 기초를 진행시키는 동시에 화족(華族)제도·내각제도·추밀원(樞密院) 설치 등 헌법체제의 확립에 주력했다. 1885년 초대 내각총리대신·추밀원 의장·귀족원 의장을 거쳐 제2차 내각에서 청일전쟁(淸日戰爭)을 수행했다. 이후 2번 내각을 조직했다. 1900년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를 결성했다. 러·일전쟁 후 한일합병(韓日合倂)을 추진, 초대 한국 통감(統監)이 됐다. 1909년 하얼빈역에서 한국의 의사(義士) 안중근(安重根)에게 사살되었다.

메이지 전기의 문화와 교육[편집]

明治前期-文化-敎育

메이지의 문화는 구미 근대문화의 적극적인 도입으로 형성되었다. 문명개화(文明開化)라는 말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사회·생활양식·풍속 습관의 모든 면에 걸쳐서 구미문화가 전통문화를 압도했던 것이다. 그런 급속한 근대화는 구미 열강의 압박하에 있어서 일본의 국가적 독립을 달성시킬 목적에서 나온 것이며, 메이지 정부가 그 선두에 서서 실시했다. 대량의 유학생 파견이나 외국인 교사 초빙도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정치 우위의 문화정책은 국가 목적을 위해서는 문화 또한 여기에 봉사하는 것을 불가피하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의 독자성은 당초부터 희박했었다.학제(學制)에서 전국민의 교육을 선언하였고 그 후 약간 자유주의적인 교육령(敎育令)을 시행했으나 때마침 일어난 자유민권운동의 전개에 대처하여 곧 국가주의적인 교육으로 전환했다. 제국대학(帝國大學)에서는 국가가 필수로 하는 학술 교수가 목표가 되었고, 사범학교에서는 준(準)군대식 교육으로 획일적인 교사가 양성되었다. 한편 특색있는 사학(私學)이 성립되었으나 관학(官學)에 비해서 그 입장이 약하였고 여자교육도 현모양처형 교육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국민교육의 보급은 국민의 지식을 풍부히 하여 지적(知的) 인구를 증대시켜, 인쇄기술의 향상과 함께 신문·잡지를 급속히 발달시켜서 자유민권 사상의 보급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