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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절대왕제〔槪說〕
[편집]15세기 이반 3세에 의하여 모스크바 대공(大公)의 군주권(君主權)이 신장되었는데, 이반 4세(雷帝)는 정식으로 차르의 칭호를 채용하여 귀족을 누르고, 드보랸스토보(士族)의 지위를 향상시켜서 군주권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한편 차르는 지방 행정 개혁을 통하여 행정과 사법의 권한을 귀족으로부터 사족(士族)에 옮겼다. 사족계급의 입장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유농민 공동체의 토지를 강제로 몰수, 수도원령(修道院領)에까지 영토 확대의 손을 뻗쳤다. 이 정책으로 농민은 궁핍해지고, 도망하는 농민이 늘어났다. 이러한 농민과 귀족계급의 불만은 17세기 초 대동란의 원인이 되었다. 이 동란 중에 많은 명문 귀족을 몰락으로 이끈 사족계급이나 상인을 배경으로 하여, 로마노프 왕조의 새로운 전제정치가 성립되었다.
국내 질서의 재건으로 도망농민의 귀환을 강화하고 농민의 영주(領主)에 종속성(從屬性)을 굳혀 사족계급의 권리가 강화되었다. 이러한 농노제(農奴制)의 재편성 강화는 1662년의 모스크바 민중 반란이나 1770년대의 스테판 라진 대반란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 반란이 진압되자 차리즘(Tsarism)은 다시 강화되고, 미카엘의 아들 알렉세이의 만년이 되면 전국회의(全國會議, Ze- mckii Sobor)의 소집은 차차 적어지고 군주권은 강화되었다. 사족계급과 상인층도 확실히 세력을 강화하고, 특히 사족계급 출신 지사(知事)를 중심으로 지방 권력의 이행(移行)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절대왕제의 강화와 중앙 행정기구의 재편성이 진척되었다.
로마노프 왕조
[편집]-王朝 Romanov
러시아의 왕조(王朝). 혼란시대 이후 미하일 로마노프가 전국회의(全國會議)에서 왕으로 추대(推戴)된 후, 러시아 2월 혁명에 의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기까지 약 300년 18대에 걸쳐서 러시아에 군림하였다. 14세기초 독일에서 이주해 온 안드레이 코빌라의 제5차 코시카(고양이의 뜻)가 세운 코시킨가(家)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유리에비치 때 로마노프의 가명(家名)을 세웠으며, 딸 아나스타시아는 이반 4세와 결혼했다.
1612년 포자르스키의 해방군(解放軍)과 트르베츠코이에 의하여 모스크바가 폴란드군으로부터 해방되자 1613년 차르 선출을 위한 젬스키 소보르(신분제 전국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로마노프가(Romanov家)의 미하일이 황제로 선출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로마노프가를 지지한 다수파(多數派)는 사족·상인·카자흐 들이었다. 이 왕조는 이반 4세의 전제정치의 원칙을 답습함으로써 대귀족을 누르고 하층 귀족이나 상인의 지지에 의하여 권력을 강화했다.
미하일 로마노프
[편집]Michael Romanov (1596
1645, 재위 1613
1645)
로마노프 왕조 최초의 차르. 1613년 전국회의에서 16세로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로 선출되었다. 미하일은 어머니와 친족의 도움으로, 모스크바에서 새로운 통치를 시작하고 농민폭동을 진압하여 질서 회복에 노력했다. 1619년 부(父) 필라레트가 폴란드에서 돌아와 실권은 ‘대군(大君)’에게 장악되었다. 1633년 아버지가 죽은 후, 전국회의의 지지 아래 국책을 결정하고 서유럽과의 접촉도 촉진시켰다.
농노제도
[편집]農奴制度
러시아에 있어서 농노제도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적어도 농노제도가 확립된 것은 이반 4세(雷帝)의 치세(治世)였으며, 로마노프 왕조의 성립에 의하여 강화되었다고 생각된다. 차리즘의 성립과 발전은 농노제도의 재편 강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반 4세는 군주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지방의 보야르(대토지 귀족)를 누르고 왕에게 충실한 드보랴스토보(士族)를 강화했다. 그 때문에 농촌 공동체의 자유로운 토지는 봉건적 영토가 되고, 영주 직영지(直營地)의 확대를 촉진하고, 한편으로는 농민에 대한 부역(賦役)·화폐지대(貨幣地代)를 강화했다. 다시 일정 기간 농민 이동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조치가 단행됐다. 이러한 일련의 농노정책은 17세기 농민반란을 빈번하게 했다. 미카엘 시대는 일시 혼란했던 농노제도를 고쳐서 도망농민의 체포 기간을 5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하고 농노의 신분적 고정도 강화했다. 1649년의 단속법은 도망농민이나 탈세자를 증대시켜 농민들로 하여금 라진의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다.
시베리아 동진
[편집]-東進
16세기부터 예로마크에 의한 시베리아 정복이 행해졌다. 그 후 카자흐에 의하여 이 정복이 추진되어 1619년에는 예니세이강까지, 1629년에는 레나강까지 이르고, 다시 1637년에는 오호츠크 해안까지 진출했다. 1640년대에는 몽골계의 부리야트족(族)을 정복하여 바이칼 호반에도 진출했다. 1654년에는 네르친스크, 1665년에는 알바진 등이 건설되고, 아무르강 유역에 도달하자 벌써 청조(淸朝)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시베리아 정복의 동기는 좋은 모피 획득에 있었으므로 많은 러시아 상인도 뒤를 이었다. 러시아인은 정복지에 성채를 만들고 그 부근에 상인들이 모여들어 도시를 건설하여 그 후에 농업식민(農業植民)이 행해졌다.
스테판 라진의 난
[편집]-亂
17세기 러시아에서 일어난 농민반란. ‘알렉세이 미카엘로비치 황제의 칙령(勅令)’이라 불리는 농노법(1649)에 의하여 도망농민의 단속이 강화되고 농민의 이동은 전혀 인정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농노제(農奴制) 강화에 따라 도망 농민이 속출하고 카자흐 내에서의 계층분화 진전에 의해 무산(無産) 카자흐가 증가하여 그들 사이에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식량 부족으로 돈 카자흐의 통수(統帥) 라진(Stepan Timofeevich Razin)의 지휘 아래 도망농민이 1667년 돈에서 볼가로 이동했다. 라진이 인솔하는 부대는 대상인의 곡물이나 상품 운반선을 습격했다. 1688년에 농민군은 카스피해(海)에 나타나 무역선을 습격하였다. 이 농민군은 차차 커져서 정부·지주·대상인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으므로, 정부는 대군을 파견하여 진압했다. 1671년 라진은 붙잡혀서 사지(四肢)를 찢기는 처형을 당했으나, 농민 구제의 영웅으로서 민요로 불리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