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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그리스도교의 성립/로마 문화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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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문화의 발전〔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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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란중의 공화정 말기는 로마문화의 황금시대이다. 정적(政敵)과의 목숨을 건 대결에서 기백이 넘친 변론이 나왔으며, 조국의 앞길을 걱정하는 마음이 역사적 산문을 빚어냈다. 그것은 정치가가 문화인인 로마 전통의 꽃이었다.이 전통은 아우구스투스의 치하에 급속히 고조되었다. 작품은 세련되고 기교를 자랑했지만, 그 작자는 마에케나스를 보호자로 받들고, 정치적 선전을 삼가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신시대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그러한 예상을 뒤엎고 2세기에 판을 치게 된 것은 취미·향락·전문적 지식의 과시였었다. 이윽고 3세기 군인황제의 잇따른 폐립시(時)에 사람들의 마음은 신(新)플라톤주의의 ‘이성(理性)’ 신앙, 동방계의 일신교적 태양신 숭배로 향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가 몇 차례 수난을 겪고 제국에 침투해 들어갔다.변론辯論

공화정 말기를 장식하는 변론 무대는 주로 법정과 민회였다. 정적의 고발, 피고의 변호, 민회에서의 법안 설명, 선동 등 변론은 실용적 기능이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카이사르 정도의 실리주의자가 변론의 제1인자가 아니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듯이, 변론은 단순한 기능 이상으로 교양이나 학식을 알려주는 척도였다. 키케로(전 106

전 43)에 이르러서는 변론(즉 학식)에 의한 지배조차 꿈꾸었다.그의 웅변은 「카틸리나 탄핵 연설」에 의해 ‘국부(國父)’의 영예를 가져오지만, 「필리피카에」(안토니우스 탄핵연설)는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 키케로에게는 연설 형식의 시론(時論) 「베레스 탄핵」이 있다. 그러나 키케로뿐만 아니라 정치적 선전문서를 만드는 사람은 많았고, 그 중에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戰記)」가 생겨났다.산문散文

카이사르의 문체는 알기 쉽고 분명하며 긴장감이 있고 힘차다. 불리한 사실을 생략하기 위해 간결한 말을 쓰고, 3인칭(카이사르는…했다)을 즐겨 써서 객관적인 인상을 풍기고, 암암리에 자기 선전·자기 변호에 힘썼다. 「갈리아 전기」는 라틴어 산문의 걸작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객관성과 성찰의 완성(完成)은 역사가 살루스티우스의 작품들이다(「카틸리나 음모」「유구르타 전쟁」 「역사(歷史)」). 조국에 해를 끼치는 사람들에게 대한 노여움, 그리고 냉엄한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생긴 산문은 타키투스(55?

117?)의 모범이 되었다.시詩

혼란한 시대에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에피쿠로스파(派)의 루크레티우스(전 94?

후 55)는 철학시 「사물의 본질」에서 무력한 기성 종교를 통박했다. 그러나 시끄러운 세상에 ‘로마에서 제일가는 민감한 시인’(테니슨의 평)인 카툴루스(전 84?

후 54?)가 나타난 것은 하나의 경이이다.22세 때 약 10세 연상의 유부녀인 클로디아를 알게 되어, 미모의 여인에 대한 열렬한 사랑, 그리고 그로 인한 질투와 절망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시집』).철학哲學

공화주의자 카토(전 95

후 46)는 죽는 순간까지 플라톤을 읽었다. 키케로는 플라톤에게서 배웠으며 대화 형식의 철학논문(「우정론」 「국가론」 등)을 썼다. 놀라운 것은 그리스로부터 배우려는 태도였으며, 백과전서적 지식인 바르로의 방대한 저서 『라틴어론(論)』 『농업론』 등이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카틸리나 음모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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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陰謀事件 Catilina

로마 공화정 말기에 일어난 국가 전복 음모사건. 카틸리나(?∼전 62)는 처음에 술라파(派)에 속했으나, 술라파의 몰락 후에도 중앙의 공직(公職)과 속주(屬州) 아프리카의 총독을 역임했다. 기원전 65년 콘술에 입후보하였지만 속주 지배 시대의 실정을 적발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 불만으로 음모를 꾀했으나 실패하였다(제1차 카틸리나 음모 사건). 그후 기원전 63년에 재차 콘술에 입후보하였으나, 안토니우스와 키케로에게 탄핵되어 실패하자, 자포자기하여 로마사회의 부랑자·전과자·몰락귀족·불평군인·방탕 파산자 등을 모아 도당을 조직, 여기에 야심이 있는 일부 원로원 관료(元老院官僚)를 참가시켜 폭력에 의한 정권탈취를 기도하였다.그 해 11월 8일 키케로는 원로원에서, 다음날에는 시민 공개석상에서 결사적인 용기를 내어 카틸리나 파(派)의 탄핵 연설을 하였다. 카틸리나는 공적으로 선고되어 성밖으로 도망하고, 그의 잔당은 그와 교묘하게 연락을 취하며 재기를 꾀했으나, 키케로의 제3, 제4의 탄핵 연설에 의해 성내의 도당은 추방되고, 마침내 기원전 62년 6월에는 지방의 잔여도당마저 소탕되었다(제2차 카틸리나 음모사건).

마에케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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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ius Maecenas (전 70?

전 8)

복고를 표방하는 아우구스투스의 신체제 밑에서 문인은 마에케나스(아우구스투스의 친구이자 중신)의 보호를 받고, 전제정치 지배의 찬양에 동원되었다. 기원전 17년의 세기제(世紀祭) 때에 호라티우스(전 65

전 8)는 축전가(祝典歌)를 만들었다. 그가 마에케나스에게 소개한 베르길리우스(전 70

후 19)는 「농경시(農耕詩)」로 권농 정책을 지원하고, 장대한 서사시 「아에네아스」에서 세계 지배의 사명을 진 영웅 아에네아스(아우구스투스의 선조)를 노래했다. 역사가 리비우스(전 59

후 17)의 대저서 『건국 이래(建國以來)』에서도, 로마인의 세계 지배는 민족적 사명이다. 그것은 단순한 애국 취미가 아니다. 옛날을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가지는 것이다. 권력에 봉사하면서도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문인은 청신함을 잃지 않고 있다.

로마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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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和

2세기는 미술이 발달하여 라틴문화(주로 서쪽의)가 속주에 영향을 주고 속주 출신의 문화인이 배출된 시대이다. 번영은 평화의 결과지만, 그 평화는 전제지배의 산물이다.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 55?

135?)는 미개인의 자유를 찬양하고(「게르마니아」) 권력에 아부하고 퇴폐만을 일삼는 자국인의 추악함을 파헤쳤다(「연대기」, 「역사」). 젊은 시인 루카누스(39

65)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다툼을 제재(題材)로 삼아 잃어버린 공화정치를 애석해 했다(「파르살리아」). 도미티아누스 치하의 마르티아누스(40?

104?)는 추종만을 일삼는 천하고 음란한 인간 군상을 풍자했다(『에피그램(短詩集)』). 그의 친구 유베날리스(50?

후130)의 풍자시는 악덕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 대한 ‘통분이 쓰게 한’ 것이었다. 스토아의 철인 세네카(전55?

후40?)는 학식과 수사(修辭)의 재주를 뽐내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끝까지 빠져나오지 못했다. 풍류의 판정자 페트로니우스는 방탕과 향락을 「사티리콘」으로 소설화했다. 학문 분야에서는 방대한 『박물지(博物誌)』(폴니우스), 『수도론(水道論)』(프론티누스, 30?

104), 고사(故事) 연구서 『아티카의 밤』(겔리우스, 123?

165), 『농업론(農業論)』(콜루멜라)이 나왔다. 『영웅전』의 플루타르크스(46?

120?), 역사가(歷史家) 요세푸스(37

100?), 철학자 에픽테토스(55?

135?)는 그리스어로 저술했다.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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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敎

공화정 말기에 동방의 종교가 이탈리아의 민중 속에 전파되었는데, 지배자는 전통적 종교를 지켰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모두 대신관(大神官)으로, 각각 ‘조화’의 신전 ‘평화의 제단’을 쌓았다. 카이사르는 그의 사후 신이라 불렸다. 아우구스투스는 생전에 ‘신의 아들’로 불렸고, 사후 신격화되었다. 황제 숭배는 원래 동방이 기원이지만, 로마의 국가적 종교로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대결 상대도 이 황제 숭배이다. 다신교의 세계에도 일신교적 경향이 엿보인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동란의 3세기에 신(新)플라톤파(派)의 철인(롱기노스 213?

273, 플로티노스 205

269/270 등)이 많은 신들을 태양신의 현신(現身)이라 생각하였고, ‘이성(理性)’의 하위에 있다고 말하였다. 태양신의 신앙은 국가 종교로 받아들여 시리아의 에메사시(市)의 태양신이 헬리오가발루스(군인황제의 한 사람)에 의해 로마에 전해지고, 태양신의 신전이 아우렐리아누스에 의해서 세워졌다. 지배자라 함은 신이 임명하는 ‘신의 대리인’이라는 그의 신조는 후세의 그리스도교 전제군주(專制君主)를 생각하게 한다.

로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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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12표법)은 특별 위원이 민회에 제안했지만, 원칙적으로는 집정관(또는 법무관)이 민회에 제안하는 것이다. 민회는 3주 내지 30일 전에 예고하고, 신의 뜻을 점쳐서 개회한다. 제안을 낭독하고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말한 대로 원하고 또 그렇게 명하겠습니까? 시민 여러분, 나는 여러분께 묻습니다”에 대해서 ‘제안 그대로(찬성)라든가’, ‘현상태 그대로(반대)’라고 대답한다. 하급 관리가 투표 결과를 보고하여 의결이 성립된다. 질문이나 반대 제안·수정은 허용되지 않았다. 노빌레스가 지배하던 시기에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 민회에 제안하는 습관이 생겼지만, 그라쿠스 이후에는 무시되는 경향이 드물지 않았다. 원수정기(元首定期)에는 원로원에서 원수가 연설하고, 그것을 구체화한 법안을 집정관이 제안하고 심의했다. 민회의 심의는 거치지만 형식적이다. 하드리아누스(100?

169?)는 법학자 사르비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법무관 고시를 편찬시켜 이후의 수정·추가를 원수의 권한으로 하고(『영구 고시록』), 지배자의 일방적 명령은 법률이 되었다. 로마의 시민법은 지중해 진출을 계기로 자연법의 관념을 첨가하여, 평화의 2세기에 만민법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 로마 시민의 자유가 상실되는 이정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