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그리스도교의 성립/로마 원수정에서 전제군주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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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원수정에서 전제군주정으로〔槪說〕[편집]

3세기 중엽 제국에 유사 이래의 동란이 일어났다. 50년간 30명 가량의 원수가 군대에 의해 옹립되고 그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동란에 덧붙여 유행병의 만연,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공세, 게르만의 이주가 불안감을 고조시켰다. 3세기 말에 이르러서 동란은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수습되고, 4세기 초의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질서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 질서는 전제군주의 지배체제이며, 로마의 전통보다 오리엔트의 전제 지배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회도 변했다. 세수(稅收)를 확보하기 위해서 종래 자발적 봉사였던 도시의 공직을 유산자에게 강제로 취임케 하고, 상공업자에게 조합을 결성시키고, 농촌의 직접 경작자의 이동을 금한 정책으로 사회적 신분의 고정화가 진행했다. 그리하여 정신세계에서는 태양신의 숭배나 그리스도교 등 일신교적 신앙이 전통적 다신교를 압도해 갔다.

세베루스 왕조[편집]

-王朝

192년 섣달 그믐날에 콤모두스가 살해된 후 로마의 근위대가 수개월 동안에 2인의 원수를 폐립했다. 이것이 속주의 군단을 자극하여 사령관을 원수로 옹립하는 군단이 속출하였기 때문에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경쟁에 이겨낸 것은 상(上)판노니아 지사 세티미우스 세베루스(Lucius Sep- timius Severus 146

211, 재위 193

211)이며, 그는 근위군을 새로운 친위군(親衛軍)으로 교체하여 군사력에 의한 지배 방침을 굳혀 나갔다. 원로원에는, 세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아프리카인이었기 때문에 다수의 속주 출신을 넣었지만 그 발언권은 대폭 제한했다. 원로원 의원급이 차지하였던 요직에 기사급(騎士級)을 임명하고, 원로원 관할 속주의 수입도 국고가 아니고 원수 금고에 넣었다. 또 법학자 그룹을 원수의 고문단으로 하고, 속주 지사의 감독, 속주민의 재판에 임하게 했다. 여기에는, 단순한 원수의 권력 강화 이상의 전제 지배에 대한 의욕이 따랐다. 군용도로를 정비하고, 1일에 40마일의 속도를 자랑하는 역전 제도를 정비하고, 또 파르티아, 게르만 전선에 군대를 증강했다. 제국의 위용(威容)은 커졌지만 재정난이 심각하게 되었다.

세베루스[편집]

Severus (146∼211, 재위 193∼211) 스스로 ‘페르티낙스 황제의 보복자’라 칭하면서 그 정당한 후계자임을 자처한 그는 무력으로 획득한 권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자기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인척 관계가 된다고 거짓 선전했다. 이리하여 귀족출신임을 자처하게 된 그는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를 다음 황제로 삼도록 준비를 끝냈다. 이로써 세베루스 왕조가 성립된 것이다.세베루스 황제의 정치는 기사 계급의 중용을 특징으로 하는 본격적인 절대군주정치의 확립이었다. 그는 종래 원로원 계급이 독점하고 있던 유력한 속주의 총독과 군단 사령관 등의 요직을 기사 계급에게 맡겼다. 국정에 있어서는 문관에 대한 무관의 우위를 더욱 강화했다. 그는 이미 권위가 실추된 원로원을 무시하고 권력의 기반이 전적으로 병사에게 있다고 공언하면서 그들에게 많은 경제적, 사회적 특권을 부여했다.행정면에 있어서는 중앙 집권화 및 관료 정치가 진전됨에 따라 제실(帝室) 재산과, 몰수 재산으로 형성되는 황제의 사유 재산과의 구별이 명확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증대되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한층 더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그는 법제면에서 공평하고 인간적인 법의 적용을 도모할 뿐만 아니라 법 앞에서는 모든 신민이 평등하다고 공언하고 파피아누스, 파울루스 및 울피아누스와 같은 유명한 법률가의 협력을 얻었다.

카라칼라[편집]

Marcus Aurelius Severus Antoninus Caracalla (188

217, 재위 211

217)

세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들 카라칼라의 시대에도 전대에 이어 증세(增稅), 통화의 개주(改鑄)가 행하여졌지만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212년에 제국 안의 전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안토니누스 칙령)는 것은 종래 로마 시민에게서 거두고 있던 세금을 전(全) 제국에 과세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여하튼 이 칙령에 의해 이탈리아인과 속주민의 격차, 정규군단과 현지인의 보조군과의 차별이 없어졌다. 동생 게타를 죽이고, 이것을 비난한 파피아누스 등을 죽인 카라칼라의 강인함이 제국의 일체화를 추진했다. 카라칼라는 게르만에 대한 방비를 굳게 한 후 파르티아로 향하여 가다 친위대장 마크리누스에게 살해당했다. 1년 후, 마크리누스(재위 217

218)는 헬리오가발루스(세티미우스 세베루스 처의 일족)에게 살해되고, 그 헬리오가발루스(재위 218

222)는 친위군에게 살해되어 다음의 알렉산더 세베루스(헬리오가빌루스의 從弟, 재위 222

235)도 게르마니아 출정중 군대에게 살해되었다.

군인 황제의 시대[편집]

軍人皇帝-時代

3세기 중엽 약 50년 동안에 26인의 원수가(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원수를 내세운 자도 주로 군인이었다. 세베루스 왕조의 군단 강화 정책과, 이전부터 현지인을 병사로 채용한 것 때문에 속주의 군단은 자기 이익을 위해 원수를 폐립하게 되었다. 갈리아 군단은 사령관 포스투무스를 원수에 앉히고 ‘갈리아 제국’을 분립시켰다(260). 국내의 혼란을 틈타, 고트인(人)은 소아시아와 그리스를 약탈했다. 라인, 다뉴브 방면에서는 게르만의 침입이 심해서 동방에서는 파르티아에 대치된 페르시아(사산 왕조)가 공세로 나왔다(226 이후). 더욱이 251년에 발생한 유행병이 15년간이나 맹위를 떨쳐, 수도 로마에서는 하루 5천 명이 죽었다고 전해진다. 평화로운 2세기에 번창했던 상공업은 쇠퇴하고, 화폐의 남발 때문에 인플레가 일어났다. 중세(重稅)와 봉사가 사람들을 괴롭혔지만, 특히 군대가 이동하는 도로변의 시민은 과대한 부담을 졌다. 도시에서는 유산자가 강제적으로 시참사(市慘事) 회원으로 임명되어 징세의 책임을 졌다. 군대를 위한 세금은 현물로 징수되었다. 화폐경제의 혼란 때문이다.

아우렐리아누스[편집]

Lucius Domitius Aurelianus (214 ?

275, 재위 270

275)

이와 같은 대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단서를 만든 것은 아우렐리아누스이다. 그는 페르시아의 창기병(槍騎兵), 팔미라의 궁기병(弓騎兵)을 모방해서 기병대를 강화하고, 다뉴브 방면을 지켜 시리아의 팔미라 왕국과 서쪽의 갈리아 제국을 멸하고, 짧은 치세(治世) 동안에 제국통일을 실현했다. 그러나 그가 로마시의 성벽을 고친 것은, 재통일된 제국이 옛날의 강성함을 잃어버린 것을 뜻하는 것이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시리아의 에메사시(市)의 태양신을 믿어 로마에 태양신의 신전을 세우고, 원수는 신의 대리인이며, 신에 의하여 선택된다고 생각했다. 그를 이은 6인의 원수 중 한 사람 카루스(재위 282

283)는 원로원에 의한 원수의 승인이라는 수속조차 무시했다. 원로원은 그 권위를 실질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모두 잃고 원수는 전제군주로 전환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편집]

Diocletianus (230 ?

316?, 재위 248

305)

3세기 말, 제국을 재통일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분치제(分治制)에 의해 유력자의 내분을 막고, 갈리아의 바가우다에의 난,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고, 또 다뉴브·라인 방면, 페르시아 전선의 수비를 견고히 하고, 제국의 새로운 편성에 착수했다. 전국의 12관구 밑에 속주(100)를 두고, 각 속주에 총독과 군사령관을 파견했다. 72개의 전(全)군단은, 현지에 정착하는 변방군과 전제군주 직속의 야전군으로 되어 있었다. 약 60만 명의 병사와 방대한 관료를 부양할 세(稅)는 성인 남자 한 명의 노동력과 토지의 비옥도·작물에 기초를 둔 단위에 따라 현물로 징수했다(카피타티오 유가티오제)·세금을 확보하기 위해 코로누스(직접 경작자)의 이주를 금하고, 세금징수원인 참사회원을 세습제로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도미누수(전제군주)로서 제국을 재건했다. 그리하여 절대 권력자가 인민을 신하로 지배하는 도미나스(專制君主政)가 제국의 체제로 되었다.

막시미아누스[편집]

Maximianus (?∼310, 재위 286∼305, 306∼308)

로마 황제. 판노니아에서 출생.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부제(副帝), 이어서 정제(正帝)에 임명되고, 제국(帝國) 북변을 통치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함께 기독교도를 박해하고(303), 그와 함께 퇴위했다(305.5).그 아들 막센티우스의 거병(擧兵)을 도와 다시 활동(306), 후에 불화로 갈리아(Gallia)에 도피하고(308), 사위 콘스탄티누스와 싸웠으나 패배, 자살했다.

막센티우스[편집]

Maxentius (280∼312, 재위 306∼312)

로마 황제.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아들. 특권을 빼앗긴 근위병과 로마 시민에 의해 추대되고, 306년 부제(副帝)라 했다. 이어서 이미 은퇴한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 정제 세베루스를 패사케 한후, 정제라 이름했다. 308년 아버지와 분쟁, 이를 추방하고, 스페인, 이탈리아, 아프리카를 영유했다. 라에티아(Raetia)까지 얻으려 하여 콘스탄티누스와 대립하고, 로마 성외(城外) 밀비우스(Milvius) 교(橋)에서 영격(迎擊), 패배한 후, 티베르(Tiber) 강에 익사했다.

콘스탄티누스[편집]

Caius 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274?

337, 재위 324

337)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 제2정제(第二正帝)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물러나고 두 사람의 부제(副帝)가 정제(正帝)로 승격했다. 그러나 공석의 부제 자리를 위한 투쟁이 격화하여, 4분치제는 붕괴하고, 결국 콘스탄티누스가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324). 기독교를 공인(313)하고, 니케아 종교회의를 열어(325) 정통교리를 정했으며, 이단적 전통이 강한 로마를 떠나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로 천도, 전제군주제를 확립하고 관료제도를 정비, 화폐를 개혁하는 등 내정에 힘쓰고 만년에 콜로누스 토지령을 발표, 제국의 재건을 꾀했다.그는 문관과 무관을 세밀하게 구별하고 복잡한 관료기구를 만들어 냈으며, 관료군의 유지, 새 수도 비잔티움의 조영, 라인·다뉴브 방면의 싸움 때문에 세 수입 확보의 필요성이 절박했으므로 상공업자에게 조합을 만들게 하여 납세를 연대 책임으로 부과했다. 조합원은 도시의 참사회원과 똑같이 점차 세습제로 되어버렸다. 군단장교에 만족(蠻族) 출신을 등용하고, 또 이주자를 변경에 정주시켜 방위에 임하게 한 것은 그의 폐제(幣制) 개혁과 함께 후대에까지 효과가 미쳤다. 336년 아들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고, 337년 페르시아 왕의 도전을 받아 싸우러 나가다가 병사했다. 최초의 기독교 공인자로서 역사적인 영향을 미쳐 유명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