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인류의 탄생/신석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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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槪說〕[편집]

러보크에 의한 시대 구분으로 본다면 구석기시대는 뗀석기(打製石器)와 수렵채취(狩獵採取) 생활로서 특징지워지고, 신석기시대는 마제(磨製)석기와 농경목축(農耕牧畜) 생활의 특징을 갖는다. 이 시대는 식량을 채집하고 뗀석기를 사용하던 구석기시대에서 식량생산을 하면서 정착생활과 촌락의 형성이 가능해져 문명 형성의 기틀을 마련한 시대이다.기술의 진보로 식량을 저장하거나 익혀먹기 위해 토기가 발명되고, 수렵과 농경을 위한 도구로 마제석기가 사용되었다. 기원전 6500년경, 북이라크의 쟈르모나 팔레스티나의 예리코에서 최초의 농경·목축이 시작되며, 기원전 6천 년경에는 이집트도 농경의 중심지대가 된다. 드디어 기원전 5천 년경에는 오리엔트 지방 일대가 신석기시대로 접어들었다. 한편 유럽에서는 마제석기 시기와 토기를 갖게 되지만, 농경·목축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기가 오래 계속되다가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아서 기원전 3천 년경까지에는 거의 모든 지방에서 농경·목축을 실시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인류는 자급자족의 경제 단계에 도달했는데, 곡물 재배에 따른 잉여생산물의 출현에 의해서 더욱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었다. 금석(金石)병용기에 들어가자, 농경지대의 중심은 대하(大河) 유역으로 옮겨져서 한층 생산력이 증대했다. 그러나 농경·목축의 생활이 불가능한 사막·스텝(steppe)·툰드라(tundra)지대에서는 유목(遊牧)생활이 영위되고 농경민과의 접촉에 의해서 고도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요인이 된다. 나아가서 동물이 많이 서식하는 삼림지대나, 수산자원이 풍부한 연해지대(沿海地帶)에서는 수렵·채집의 생활이 계속된다.신석기시대-금석병용기의 사회 구성·종교에 대한 연구는 억측(臆測)의 영역을 넘지 못하지만, 고고학적 연구, 민족학적 연구에 의해서 차차 알려지게 되었다.

농경목축의 기원[편집]

農耕牧畜-起源

팔레스티나의 나투프 문화, 이라크의 팔레가우라 문화는 중석기시대의 문화에 속하며 농경목축의 개시 이전 단계에 있다. 거기서는 야생의 곡물 수확, 후에 가축이 되는 동물의 수렵이 행해졌다. 드디어 인류는 토지를 경작하여 곡물을 재배하게 되었다.최초로 농경을 실시한 지역은 북이라크의 산악지대이다. 재배된 곡물은 보리·밀·에메르 밀(Emer 小麥)이다. 야생의 보리는 북아프리카, 팔레스티나, 소아시아, 트란스코카서스, 아프가니스탄에 분포했고, 밀은 발칸 반도, 크림 반도, 소아시아에 야생했으며, 에메르 밀은 팔레스티나와 이란에 야생하고 있었다. 북이라크의 최초 농민은 이러한 품종을 서서히 개량해 나갔다. 곡물은 탄수화물을 많이 함유하며 영양가가 매우 높고 오래 저장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한 낟알로 몇십 배나 수확할 수 있다. 또한 경작에 요하는 노력이 적게 들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농민은 기아 상태에서 구제되었다.농경구(農耕具)로서 중앙에 구멍을 뚫은 둥근 돌(막대에 꽂아서 찍는다)이나 마제(磨製) 돌도끼가 발명되고, 아스팔트로 뭉친 낫, 곡물을 제분하기 위한 돌절구, 돌공이도 제작되었다. 당시의 농경은 천수(天水)에 의지하고 있었다. 농경과 함께 목축이 행해졌는데, 사육된 동물은 양·염소·돼지·소 등의 유제류(有蹄類)의 동물이었다. 이러한 동물의 고기·젖은 식용으로, 피혁·털은 의복으로, 똥은 비료로서 유용했다. 더욱이 이러한 동물은 양순하여 사람을 따르기 쉬운 성질을 가졌고, 풀이나 곡물, 인간이 먹고 남은 것을 먹이로 할 수 있었다. 최초의 목축은 야생 동물을 길들인 것들이다. 야생의 양은 터키에서 이란에 이르는 산악지대에 존재했고, 야생의 돼지(멧돼지)도 같은 장소에 있었다. 서아시아 특히 북이라크는 이와 같이 야생의 곡물·동물을 쉽게 입수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농경과 목축은 거의 동시에 기원전 6500년경 개시되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편집]

肥沃-地帶미국의 역사가 제임스 헨리 브레스테드(Brestead:1865∼1935)에 의해서 발굴된 서아시아의 고대문명 발생지에 대한 아칭(雅稱). 이 지대의 동쪽 끝은 페르시아 만(灣)의 충적(沖積) 평야인데, 이란 고원, 자그로스 산맥의 서쪽을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북상하여, 아르메니아로부터 타우루스 산맥의 동쪽을 시리아, 팔레스티나로 연결된다. 브레스테드가 명명할 때에는 이 지역을 지칭하였으나, 나중에는 바다를 건너서 그 서쪽 끝은 나일강 유역의 충적평야까지 포함하여 말하게 되었다. 세계 최고(最古)의 농경문화가 이 지대에서 일어난 것은 명백하며, 아마도 시리아, 팔레스티나가 그 발상지이고, 이 문화의 영향하에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및 나일강 유역(메소포타미아 및 이집트)에 고도의 문명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지대에 정착한 농경민족과 주변의 유목민족과의 평화적·전투적 교섭 속에서 고대 오리엔트사(史)의 전개를 보았다.

북이라크의 원시 농경 촌락[편집]

北-原始農耕村落

북이라크의 구릉(丘陵) 지대에 있는 카림 샤히르(Karim Shahir)의 유적은 개지(開地) 유적이며, 기원전 8000년경에 속한다(카림 샤히르기). 토기는 발명되지 않았으나 국부마제(局部磨製)의 돌도끼, 세석인(細石刃)의 낫, 맷돌이 출토되어 초기 농경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발견된 수골(獸骨)의 반수 이상이 가축화된 양·염소·돼지의 뼈였다.쿠르디스탄 산맥의 서쪽에 있는 자르모(Jarmo) 유적은 기원전 6500년경의 유적(자르모기)으로서, 본격적으로 농경목축이 실시된 가장 오랜 유적이다. 두 개의 문화층으로 나누어져, 하층에서는 토기가 발견되지 않았으나, 지면에 구덩이를 파서 그 표면을 구워서 굳힌 시설(토기의 전단계)이 발견되었다. 주거의 바닥은 다져졌고, 화덕 자리가 있었다. 상층에서는 채문(彩紋)토기(적색의 사선문「斜線紋」)와 조제(粗製)토기가 발견되고, 주거는 하천 바닥의 돌로 된 기초 위에 네모꼴의 흙집이었다. 자르모에서는 25채의 집터가 발견되었다. 석기로서는 조립식의 돌낫·돌가래·돌절구·방추(紡錘)가 있고, 흙으로 만든 동물소상(小像)·여성상도 출토되었다. 자르모에서는 보리와 밀이 재배되고 가축인 양·염소·돼지가 식량이 되었다. 또한 사자(死者)는 마루 밑에 굴장(屈葬)되어 있었다. 이어서 이라크는 하수나(Hassuna)기(전5500?)에 들어선다. 하수나 유적 밑의 다섯 개 층이 하수나기에 속하며, 주거는 안뜰을 둘러싸는 네모꼴의 방으로 이루어졌고, 빵 굽는 아궁이·저장고 등이 볕에 말린 벽돌로 만들어졌다. 무늬가 없는 조제토기·정제토기 이외에, 기하학 무늬를 그린 채문토기·각문(刻紋)토기도 출토되었다. 돌낫이나 마제 돌도끼·돌절구·돌쟁반도 발견되었다. 가축이 사육되고 곡물이 재배되었다.

예리코 유적[편집]

-遺跡 Jericho

카스피해 북쪽에 있는 유적. 나투프기(期)층의 상부에 선(先)토기 시대의 두 개의 층이 확인되었다. 그 아래쪽의 A층에서는 주벽(周壁)과 탑이 발견되었고, 위쪽의 B층에서는 네모꼴의 건물이 발견되었다. 또한 주거에 작은 사당(祠堂)이 붙어 있었다. 석기로서는 돌낫·돌송곳이 출토되었다. 가축으로서는 염소를 들 수 있다. 예리코의 선토기(先土器) 시대는 대략 기원전 6500년경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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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l

서남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의 각지에 텔·테페찰 등으로 불리는 유구(遺丘)가 사막 속에 존재한다. 이것은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에 이르는 사람들이 남긴 유적이다. 샘이 있는 부근에 사람들이 취락을 만들었는데 주거는 흙을 이겨서 만들었거나 햇볕에 말린 벽돌로 지었기 때문에 약 30년 정도면 부서지고 또한 주위의 농촌도 비료를 주지 않아서 황폐해 버린다. 따라서 사람들은 다른 지방으로 옮겨가 버린다. 그런데 몇 년인가 지나서 부서진 집의 토대를 편편하게 하고 그 위에 주거나 신전·궁전을 만든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어 수십 층으로 퇴적이 되는 것이다.

농경문화권[편집]

農耕文化圈

중석기시대를 거쳐서 최초로 농경생활에 들어간 것은 초승달 지대의 가장자리였으나, 기원전 5000년경까지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바다리「Badari」, 파이윰「Fayum」, 메림데「Merimde」의 유적), 시리아·팔레스티나·이란(탈리바쿤「Tal-i Bakum」, 챠슈마 알리「Chashmah Ali」) 중앙아시아 남부(아나우「Anau」, 조이 툰「Joy-tun」), 소아시아(하지랄「Hacilar」)의 각 지역이 농경생활에 들어갔다.이러한 지역은 아열대로서 모두가 인공관개(灌漑)·천수관개나 호소(湖沼)·샘에 의해서 물을 얻었던 지방이며, 더욱이 주변에 풍부한 수산 자원이나 동물이 서식하지 않는 지방이었다. 시리아·키루키아를 경유하여 농경문화가 차츰 유럽으로 들어갔다. 금석병용기가 되자 그리스 본토, 발칸 반도, 흑토(黑土)지대, 다뉴브강 유역, 프랑스 및 독일의 북부, 스위스, 영국에까지 농경이 전파되었다.

유목문화권[편집]

遊牧文化圈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부(아라비아 사막, 이란 고원, 톈산 산맥, 몽골 고원) 및 유라시아 대륙의 극북지방, 북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유목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육된 가축은 염소·낙타·순록·말 등이다. 유목민은 천막에 살았다. 이러한 지역은 사막이나 초원지대, 툰드라로서 농경을 할 수 없는 지역이다. 유목민이라도 곡물·야채가 필요하기 때문에 농경민과 교역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농경민을 약탈하고, 정복한다든지, 그곳에 정착한다든지 한다. 유목민의 끊임없는 자극을 받아서 농경지대의 문명이 현저히 발달되는 것이다(예컨대 수메르인의 문화권에 침입한 반유목의 셈인). 유목 문화권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 성립된 것 같다.

수렵문화권[편집]

狩獵文化圈

신석기시대에서 금석병용기에 걸쳐 농경 문화권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은 수렵 문화권에 들어 있었으나, 주요한 수렵 문화권은 열대

아열대의 북아프리카, 남아프리카, 한대의 북방 유라시아였다. 이러한 지역에서는 농경은 거의 실시되지 않았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카프사 문화 말기 시대에 기하학적 세석기가 만들어졌고 소나 영양(羚羊)이나 타조를 활로 잡았으며, 조개와 달팽이를 식용으로 했다. 포르투갈로부터 북구의 해안지대에서는 어로·채집을 주요한 생업으로 했고, 패총(貝塚)문화를 발전시켰다. 북방 유라시아의 삼림지대에서는 석촉(石鏃)이나 석제 손도끼를 사용하여 사슴이나 곰을 잡았고, 볼가·오카강 유역에서는 즐목문(櫛木紋) 토기가 제작되었다.

금석병용기[편집]

金石倂用期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에서 금속기시대(金屬器時代)로 넘어가는 과도적(過渡的) 시대를 금석병용기라 한다. 시리아의 텔 할라프(Tell Halaf)를 표준 유적으로 하는 할라프기(전 5000?)에 메소포타미아는 금석병용기에 들어간다. 석기와 최초의 금속기인 동기(銅器) 또는 청동기(靑銅器)가 병용된 것이 특색이다. 이 말은 19세기의 후반 무렵부터 이탈리아의 학자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Calcolithic(cupro 구리+lithos 돌) 또는 Eneolithic(aeneue 청동+lithos 돌)를 의역한 것이며, 또한 Copper Age[순동(純銅)시대)]라는 말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청동기시대의 문화라고 말하지만,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된 이기(利器)는 그 최전성기에 있어서조차도 석기(石器)를 사용한 것이 보통이며, 청동제품은 특수한 무기나 장신구에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특색을 기준으로 하여 이 과도기의 문화를 설정함은 타당치 않다. 이들의 공통된 특색으로서는 동(銅) 제품은 검·투부(鬪斧)·창·촉(鏃) 등의 무기나 장신구에 많으며, 일상 생활에 사용되는 이기(利器)는 돌이나 나무를 재료로 하였으며, 이미 농경기술이나 관개(灌漑)·여경(犁耕)의 발달을 보았고, 녹로나 수레의 발명으로 대량 생산과 교역이 발달된 한편, 계급도 분화되어 원시적 소국가(小國家)의 형성시기에 해당된다. 동제(銅製)의 구슬이 만들어지고, 야금술이 일어나고, 목제품·석기제작도 진보되었다. 양식화(樣式化)된 동물무늬·기하학무늬를 가진 채문토기(彩紋土器)가 고열로 구워졌고, 햇볕으로 말린 벽돌이 보급되었다. 이 시기의 유적은 메소포타미아의 텔 브락(Tell Brak)·아르파치야(Arpchiyah), 테페가우라(Tape Gawra), 이란의 테페 히사르(Tape Hissar), 투랑 테페(Turang Tepe)이다. 할라프기의 말기에 남메소포타미아의 에리도기에 정착한 사람들은 에리도기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다. 알 우바이드(al Ubaid) 유적의 하층에서 동제품·베틀·채문토기가 발견되었다. 우바이드기(전 4500?)의 문화는 북메소포타미아에도 파급하여, 텔 탈라타트(Tell Thala­that), 테페 가우라 등 많은 유적에서 이 시기의 문화층이 발굴되었다. 이즈음부터 신전(神殿)이 세워졌고, 에리도에서는 기단(基壇) 위의 신전이 출현했다. 기원전 4000년경 남메소포타미아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채문토기 제작의 전통이 쇠퇴하고 무늬 없는 쌍구(雙口)토기나 삼(杉)나무 잎사귀 모양의 각문(刻紋)이 새겨진 토기가 제작되고, 드디어 회문자(繪文字)를 새긴 점토판이 만들어졌다. 아마도 수메르인이 침입한 것 같다. 유적으로는 우루크, 가우라, 니네베를 들 수 있다. 이 우루크기의 말기부터 다음의 젬데트 나스르기까지를 원문자기(原文字期, 原史時代)라 부른다. 기원전 3500년경 수메르 지방은 젬데트 나스르기에 들어가서 다채(多彩)토기·동제품의 제작, 원통인장(圓筒印章)의 사용, 점토판의 제작이 이루어졌다(유적은 젬데트 나 르〔Djemdet Nasr〕, 우르크). 원문자기에는 두 강의 인공관개가 이루어져 생산력은 증대하고, 직업의 분화가 일어나고, 재산의 사유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하여 차츰 빈부의 차가 생기고, 도시국가가 탄생하고, 신전을 배경으로 한 지배자가 출현했다.

씨족[편집]

氏族 Clan

수렵·채집·어로의 채집경제에서 농경목축의 생산경제로 이행하여 촌락이 형성되자 공동체는 군(群)에서 단계(單系) 혈연집단(씨족)으로 변천했다고 한다. 토지(土地)는 씨족의 공동체에 의해서 점유되고, 씨족의 성원의 공동노동에 의해서 경작되었다. 토지의 경작권은 드디어 씨족의 성원의 것이 되어 경작권이 상속된다. 씨족이 연합한 것이 부족이다. 씨족사회를 묶는 인연은 혈연관계이나, 지연적 관계도 처음부터 공존했던 것 같다. 씨족의 장이 모여서 평의회를 열어 전쟁이나 강화에 관해서 협의했다.

모계제[편집]

母系制

초기의 농경사회(씨족사회)에서는 여자의 사회적 지위가 높고, 어머니 쪽의 혈통이나 재산·지위·특권 등을 남자가 상속하는 모계제도가 존재했다. 모건(L. H. Morgan), 엥겔스(F. Engels)는 모계제 다음에 부계제가 생겼다고 생각했으나, 그 양자는 공존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가부장제[편집]

家父長制

농업이 갓 발생했을 때쯤에는 신앙면으로 모권적(母權的) 요소가 강했었다. 공동체 가운데 모계제 씨족도 존재했다. 남자가 농업에 전념하게 되자 가부장이 모든 가족과 재산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되었다. 한편 유목민의 사회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가부장제가 실시되고 있었다. 노예의 출현 시기는 가부장 출현의 시기와 같은 시기였다. 오리엔트의 전제군주는 가부장권이 최대로 확장된 것이다.

촌락공동체[편집]

村落共同體

중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이행하여 농경이 개시되자 촌락이 형성된다. 최초의 토지 점유 형태는 혈연집단에 의한 공유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혈연집단의 공동작업에 의한 노동이 실시되었다. 원시농경부락에 있어서의 생산력 증가에 따라서 공유지의 일부는 택지나 채원지(菜園地)로서 차츰 혈연집단의 사유지로 화하여 부계적(父系的)으로 상속된다. 또한 촌락에는 차츰 비(非)혈연집단의 사람도 들어와서 지연적(遲延的) 공동체로 변화했고, 공유지는 지연적 공동체의 관리 아래 놓여진다. 이와 같은 촌락공동체의 공동노동은 관개망(灌漑網)의 정비 확충을 위해서 이용되어 곡물 생산은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그리하여 인구 증가, 직업의 분화가 이루어진다. 또한 대규모의 치수 관개 시설을 건설할 필요에서 촌락공동체의 결합이 이루어지고, 도시국가나 노모스(nomos)가 탄생한다. 이렇게 하여 촌락공동체는 국가의 일부가 되고 드디어 지배자의 출현과 함께 지배의 대상이 된다.

원시 공산사회[편집]

原始共産社會

씨족사회의 시대에는 토지(농지·목장)가 공유되어 있었다. 차츰 택지나 채원지가 씨족의 각 성원의 사유지화하고, 동일 씨족의 성원에 대해서 매각할 수 있게 된다. 이윽고 그 토지가 부계적으로 상속되고, 가부장제가 탄생했다. 가부장제를 기초로 하여 원시 공산사회의 최후 단계인 촌락공동체가 출현한다. 씨족사회에서 촌락공동체까지의 토지 소유 형태는 공유를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사회를 원시 공산사회라고 부른다. 촌락공동체의 시대에는 공동작업과 농경구의 개량에 의해서 생산력이 높아지고 사회적 분업이 실시된다. 촌락의 결합에 의해서 국가가 발생하고, 토지는 국가가 영유하는 것과 개인이 사유하는 것으로 갈라진다. 이렇게 하여 원시 공산사회에서 국가로 옮겨졌다고 한다.

애니미즘[편집]

Animism

나무·웅덩이·바위·도구 등 모든 자연현상에 영혼이 깃들인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영혼을 달래고 사령(死靈) 등에게 괴로움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한 신앙. 원시·미개인의 종교의 일종. 이 신앙이 사물에 적용되면 자연숭배나 주물숭배(呪物崇拜)가 된다.

토테미즘[편집]

Totemism

어느 친족집단(씨족)과 어느 일정한 동물(Totem이라고 부른다. 토템은 식물·자연현상의 경우도 있다)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고 양자를 동일시하는 일. 어떤 경우에는 친족집단의 선조와 토템이 동일하다고 생각하여 토템을 숭배하여, 죽이지도, 먹지도 못하게 한다. 토템 집단의 성원은 족외혼(族外婚)을 한다. 이와 같이 해서는 안되는 것, 해서는 안되는 행위를 금기(禁忌, 터부, taboo)라 한다.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아메리칸 인디언 등의 미개 종족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종교다.

샤머니즘[편집]

Shamanism

신(神)을 불러들이는 무당(巫堂)을 샤먼이라 한다. 그는 초자연력을 가진 인물이나 신령(神靈)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져서 그 힘을 빌려 수렵의 풍요, 가족의 안전, 전쟁의 승리 등을 기원한다. 샤먼은 질병의 치료사, 마술사로서의 역할을 한다.

주물숭배[편집]

呪物崇拜 Feticism

나무·돌·동물 등 모든 사물에 초자연적인 정령(精靈)이나 귀신이 붙어서 공간에는 정령이나 귀신이 충만해 있다고 생각하여 그러한 사물을 숭배하는 것, 원시인의 종교 그러나 고대 이집트·인도 주물숭배를 행하여 이집트의 신의 모습에서 그 잔재를 볼 수 있다.

토기[편집]

土器

신석기시대에 토기가 발명되었다. 토기는 물이나 곡물을 담는다든지, 곡물을 저장한다든지, 물건을 삶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점토에 조개껍질·운모·석영·짚 등을 섞어서 토기를 만든다. 토기의 모양은 손으로 빚는다든지, 점토를 가늘게 꼬아서 말아 올린다든지(卷上法), 고리 모양을 쌓아올리는 방법(輪積法)으로 만들어져서 凹凸을 정형하고 토기의 살갗을 마연(磨硏)한다. 정형이나 마연할 때에 무늬(具殼紋·繩紋·波線紋 등)가 새겨지고 그 다음에 가마에서 굽는다. 이라크의 자르모 유적의 토지는 기원전 6500년경에 만들어졌다. 이윽고 회전반(回轉盤)이 발명되어 토기의 성형(成形)이 용이해지고 고패의 발명에 의해서 대량의 균질의 토기 제작이 가능해진다. 또한 오리엔트에서는 장토(粧土)를 하고 그 위에 적색계통의 안료로서 무늬를 그린 채문토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토기에 유약을 바른 도기(陶器)가 만들어졌다.

마제석기[편집]

磨製石器

신석기시대가 되자, 석기의 최후 마무리에 마연을 하는 기술이 발명되었다. 농경구로서 마제석부(石斧)·돌괭이·돌가래가 만들어졌고, 곡물의 수확도구로서 돌낫·석제 부엌칼이 제작되었으며, 수렵용구로서 석촉·석창 무기로서는 투부(鬪斧)가 만들어졌다. 경옥(硬玉)이나 연옥을 마연함으로써 아름다운 장신구도 만들어졌다. 또한 한 개의 석재에서 많은 석기를 제작하는 기술――찰철법――이나 돌에 구멍을 뚫는 방법도 발명되었다.지석(砥石)으로 가는 지마법(砥磨法)과 마사(磨砂)로 가는 연마법(硏磨法)의 구별이 있다. 석부(石斧)가 대표적이고, 그 외에 칼·낫·가래·괭이·바늘·화살촉 등이 있다.

직물[편집]

織物

구석기시대·중석기시대의 의복은 짐승의 가죽이나 식물성 섬유를 짠 것이었다. 신석기시대가 되자 직물이 발명되었다. 아마·모시·면과 같은 식물성 섬유와 더불어 양모(羊毛)가 직물의 원료가 되었다. 섬유를 손으로 꼰다든지 토제나 석제의 방추로 꼬아서 실을 만든다. 도구를 사용하여 씨와 날을 짠 것이 직물이다. 이집트의 파기늄에서 출토된 직물(전 5000?)은 아마를 평직(平織)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직기는 수평기(水平機)이며 오리엔트의 유목민들 간에 사용되었다. 이집트 중왕국(中王國) 시대에는 수기(竪機)가 사용되었다.

수혈주거[편집]

竪穴住居

구석기시대 후기부터 평지주거 외에 수혈주거가 출현했다. 지면에 구덩이를 깊이 파고 평면을 만들어 그 위에 천막이나 지붕을 만든 주거를 말한다. 주거 안에는 노(爐)가 만들어졌다. 남러시아의 코스텐키 유적(솔류트레기)의 주거 흔적은 모양이 부정형(不整形)하고 주거의 배치도 불규칙하였다. 메소포타미아의 하수나기에도 수혈주거가 영위되었다. 신석기시대 이후의 수혈은 원형·타원형·구석이 둥근 규칙적인 모양이며, 취락(聚落)을 형성하게 되었다. 수혈의 바닥에는 기둥구멍을 팠고 지붕은 원추형으로 입혀졌다. 수혈은 주거 이외에 창고나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서도 이용되었으며 철기시대에 들어와서도 만들어졌다.

패총[편집]

貝塚

원시인이 버린 조개껍질이 다량으로 퇴적된 장소로, 중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에 걸쳐서 해안 가까이에 형성되었다. 유럽에서는 포르투갈에서 발트해 연안에 걸친 지역, 남아프리카·북아메리카 동해안, 태평양 연안, 아시아에서는 한국·일본 등의 각지에 있다. 원시인이 어로나 수렵·채집한 식물의 잔해(수골·어골·다량의 조개 껍질·식물의 종자) 파손된 도구(석기·토기·골각기)가 층을 이루어 퇴적하고, 매장된 인골·주거의 자리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덴마크 에르텔벨레 문화(신석기시대)의 패총은 패층(貝層)의 두께가 1

2m나 되며, 바다표범·돌고래·바다제비·어골·해조골·굴껍질·골제의 낚시 바늘 소공문(小孔紋)이 있는 토기, 석제의 사다리꼴 편평부(扁平斧), 가래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