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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제2기 문명/그리스의 폴리스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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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폴리스 성립〔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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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아인의 침입은 각 지방에서 원주민과의 심한 충돌을 야기했으며, 이 때문에 그들이 정착한 지역에서는 어디에서든, 정복된 원주민들의 철저한 집단적 총(總) 노예화라는 공통현상을 일으켰다(예를 들면 테살리아의 노노(勞奴, 페네스투이), 아르고스의 ‘복복(僕伏:귬네티스)’ 스파르타의 ‘포로(헬로타이)’, 크레타의 ‘복노(僕奴:무노이타이)’ 등). 또한 아이올리스인이나, 이오니아인 등은 에게해(海) 대안(對岸)의 소아시아 연안에 이주하여 이 난(難)에서 빠져나온 집단도 많았다―이오니아가 동서에 있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이다(그리스인의 제1차 식민). 도리아인의 일부는 또 바다를 건너 크레타섬으로 진출(골튠 등)하였고, 다시 소아시아 연안 남부에 식민한 이외에, 선단은 팔레스티나 해안에까지 진출하였다(이스라엘과 싸운 필리스티네인들「舊約 사무엘書」). 이집트에서도, 이 무렵 해구민족(海寇民族)으로서 그들의 습격을 기록하고 있다. 이 혼란과 파괴를 겪는 동안에 미케네 문명은 종식되었고, 그 전통도 단절되었다. 오리엔트와 흡사한 전제 소왕국군(群)의 멸망과 함께 궁정적 미케네 문자도 영구히 없어졌고, 그 후 약 300년 동안 그리스 역사는 문헌이 전혀 없는 암흑 시대(dark age)에 들어갔다.서광은 다시 기원전 8세기경부터 비치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도리아인의 침입과 함께 철기시대에 들어가, 기원전 9세기에 이르러 페니키아인으로부터 문자를 습득하여 표음문자인 알파벳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오늘날의 그리스 문자인 것이다.고전기(古典期)까지의 약 300년 동안은 미술 사상(史上)의 소위 ‘고졸시대(古拙時代:아케이크)’에 해당되는 내면적 충실의 여명기며, 또 폴리스의 발생, 공동체의 진전, 헬라스 세계의 확대 등, 발전에의 형성기로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하여 이 기간 동안 폴리스는 그 기초를 굳혔고(입법자의 시대) 또 흑해, 남이탈리아, 시칠리아섬(마그나 그리스) 방면에의 소위 제2차 식민도 이루어져서 그리스사(史)의 내적(內的)·외적 대윤곽이 잡혀지는 것이다.

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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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s

때로는 ‘도시국가(都市國家)’라고 번역되지만 마땅한 번역은 아니다. 가령 아테네(Athenai)는 아티카 전역을 포함하여 폴리스였다. 폴리스가 도시의 의미로 전락하는 것은원래의 기능(機能)을 잃은 다음(헬레니즘 시대 이후)의 일이며, 만약 그 본질을 표현한다면 오히려 ‘공동체국가’가 적당할 것이다. 폴리스의 원뜻은 방채(防砦)이다. 황무지를 개척해서 세운 아테네로 말하면, 그것은 원래 견고한 암석으로 되어 있으며, 외적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모여(전 780?) 웅거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생활의 불편이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동기의 혼란이 끝나고 안정을 찾자 그 곳에서 내려가 토지에 거주를 옮기고, 외각에 성벽을 구축하였다(이즈텍). 자연풍토나 사회적·종교적 원인에 따라 수많은 폴리스가 생겨났으나, 그 규모는 작았고 식민지(植民地)로서 성립된 것이 많았다. 이후에 폴리스는 성벽을 넘어 생활공간이 확대되어 중심 시가(市街)와 농경주역부(農耕周域部)로 이루어져, 거의 성벽을 갖추었다. 그 중심에 마을이 형성되고 둘레에 영토가 형성되었는데, 마을 중심에는 아크로폴리스나 시장(아고라)이 있어 행정·경제·종교의 중심이 되었고, 마을 주역부에는 시민의 공유지·소유지가 있었는데, 그 영역은 통상적으로 좁은 범위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그리스의 고대국가는 유럽의 중세도시와는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폴리스의 성벽이 둘러싸인 것은 방위의 목적일 뿐 법적·신분적으로 성벽 안과 밖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시민 모두 동일한 시민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통의 시민권을 누렸으며, 시민은 정무(政務)·군무(軍務)에도 종사하였다. 정치적·사회적 기본조직으로 완성된 폴리스에서 이와 같은 시민단의 지위는 재류외국인과 노비는 제외된 특권적인 것이었다. 직접민주정치라는 체제를 기반으로 시민 전체의 정치참여를 실현한 민회(民會)의 존재는 폴리스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들 폴리스는 지리적·역사적 조건에 따라 규모·형태·사회 구성 등이 다양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아테네로, 그 민주적인 조직은 다른 폴리스에 큰 영향을 미쳤다. 폴리스는 내부의 당파싸움과 상호간의 끊임없는 항쟁으로 기원전 4세기에 쇠퇴하기 시작하여 북방 마케도니아에 의해 정복될 무렵 그 성격은 급속히 상실되었는데, 도시라는 의미의 폴리스는 존재하였지만, 정치적 실권은 부유층이 독점하였고 민회는 명목적인 존재로 변하였다. 그러나, 많은 폴리스는 여전히 다소의 독립을 유지하면서 자치적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헬레니즘 시대의 문화적 기반은 폴리스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

네크로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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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kropolis

고대도시 가까이의 많은 묘로 형성된 묘지를 가리킨다. 그리스와 로마의 도시와 그 문화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는 네크로폴리스가 성벽 밖에 마련되어 성문에서 시작되는 가도(街道)를 따라 있었다. 고대도시 대부분이 그 시가지 위에 후대(後代)의 도시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발굴이 곤란하지만, 네크로폴리스는 후대의 시가지 밖에 있어 발굴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부장품 등이 출토되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시민단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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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民團共同體

폴리스는 그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본질, 말하자면 공동체적인 유대에 의해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토지를 획득한 종족단은 가장 좋은 땅을 데메노스(切取地)로 하여 공동체를 대표하는 왕과 신전의 영유분으로 하고 나머지를 공동체 성원(成員)인 전사(戰士) 전원에게 추첨으로 평등하게 배분(?)했다고 생각된다. 이 할당된 땅은 크레로스라 하여, 전사들의 자립적 경제 기초가 되었다. 나중의 규제로 미루어 보건대 할당지(분배받은 소유지)의 최종적 소유권은 씨족단에 귀속(여자 상속인의 규정)되고, 양도불가(讓渡不可)를 원칙으로 한 세습적 가산으로서, 그 상실은 공동체 성원에서의 탈락을 뜻했다. 각 성원은 씨족단체에 속해 있었고, 그것을 떠난 개인적 존재는 의미조차 없었다(드라콘의 혈수법「血讐法」). 이와 같은 엄한 규칙과 제약 속에서만이 시민 공동체가 유지되었고, 이와 같은 시민단이야말로 폴리스의 핵(核)이었다. 후의 민주정치도 언뜻 보기에는 역설적이기는 하나 이 시민단의 본질 속에 있는 것이다.

서사시와 서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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敍事詩-敍情詩

문학의 형식상 발전 단계는 일반적으로 서사시→서정시→산문의 순서를 취한다. 민족 형성기의 동란과 창조를 영웅(헤로스:半神)들의 정의·모험·사랑·싸움을 이야기의 줄거리로 삼았고, 민족의 형성기는 ‘영웅 시대’로 형용된다. 기원전 9

8세기에 성립된 것으로 생각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트로이 전쟁)와 「오디세이아」는 세계문학의 주옥으로 고전기(期)에 있어서의 그리스인들의 정신적인 양식이었던 것이다. 『테오그리아이(神統記)』에 의하여 올림포스 12신(神)의 신화 체계가 세워졌고, 기원전 700년경의 농민시인 헤시오도스는 또 『노동과 나날』에 의해 사회 정의를 구현했다. 서사시 자체보다도, 그리스의 농민이 오리엔트의 농민――문화적 소산의 여유가 없는――과 전혀 다른 경우에 있고, 또 자립성을 갖고 있었음을 볼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서사시의 시대가 사라지자 기원전 7세기경부터 그리스 세계의 조숙지대(早熟地代), 아이올리스·이오니아 식민지에 서정시가 일어난다(아르킬로쿠스, 알카이오스, 여류시인 사포 등이 유명하다). 시인의 정신적 해방 속에, 본토와는 달리 공동체의 해이가 빨랐고, 참주정(僭主政) 성립이 선행(先行)되었던 식민지 조건의 하나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헬레네스의 의식과 제사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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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意識-祭祀同盟

기원전 8세기 중엽부터 시작되는 활발한 제2차 식민 활동(전 6세기 중엽까지)에 의해 그리스인이 동서로 현저하게 뻗어 나가게 된 결과, 그들은 식민을 할 때마다 알지 못하는 이민족과 접촉하여, 그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그리스인끼리의 초(超)폴리스적 동족 의식을 자각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기원전 7세기 초엽에는, 개개(個個)의 폴리스를 초월한 그리스인 전체의 총칭으로서, 그들은 의식적으로 이민족(異民族, barbaroi)에 대해 자신들을 ‘헬레네스(Hellenes)’라고 불렀다(원래는 한 종족의 명칭에 불과하고, 총칭에의 유래도 불명하다. 본토는 ‘헬라스’. 그리고 ‘그리스인’이란 보이오티아의 남이탈리아 식민지 그라이아에서 온 로마인의 그릇된 호칭에 유래한다). 이 동족 감정은, 특히 그들 공통의 신화에 따른다.공통의 제사를 매개로 하여 기원전 8세기 이후, 각 지역의 폴리스 사이에 각각 제사동맹(Amphi Ktyonia, 隣保同盟)이 결성되어, 그 산하에서 상호 친선과 안전 보장을 도모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델포이의 아폴론 신제(神際)를 중심으로 한 제사동맹이 가장 유명하여, 그 신탁(神託)은 폴리스 세계의 정보(情報) 중심이 되어 위급할 때에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올림피아 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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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典

제사동맹 등의 대제(大祭)에는 그리스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 신사(神事, 供犧) 후에 합창이나 시작(詩作)의 경연, 봉납무예(奉納武藝) 등이 거행되는 것인데, 그 중에서도 델포이, 이스트모스, 네메아, 올림피아의 4대 제전이 특히 유명했다. 올림피아는 오히려 벽지(僻地:펠로폰네소스 서북쪽 구석)였었으나, 강력한 비호자(庇護者) 스파르타 등의 도움으로 이 4년마다의 제전은 본토나 해외의 모든 폴리스의 참가를 권해서, 가장 성대히 하고 또 영속시켰다(393까지). 올림픽 경기는 육체를 예찬하며, 용기와 충성을 표명하고, 순수한 투쟁 정신을 발휘하기 위한 육체 단련이 목적이었다. 경기는 5일간 계속되고, 각 시는 공식적 선수단을 파견하였는데, 선수는 모두 그리스인으로서 자유로운 신분이어야 했다. 유명한 올림픽 경기가 원래는 신기(神祇)에의 봉납무기였던 것은, 가장 인기가 있었던 전차(戰車)경주나 창던지기 등, 그 종목이 전기(戰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의 중요한 경기는 도보(徒步) 경주, 무장 병사(武裝兵士)의 경주, 레슬링, 권투, 판크라티온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씨름을 포함한 자유로운 레슬링, 그리고 단거리 경주, 넓이뛰기, 레슬링, 원반던지기, 창던지기로 구성되는 5종목 경기였다. 경주는 경마 경주, 두 필의 말이 끌고 달리는 전차 경주와 네 필의 전차 경주였다. 우승자에 대한 시상은 금전이나 물품 등이 아니고, 단순히 올리브나무의 꽃으로 만든 머리의 장식과 그의 조상(彫像)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국에서는 거국적으로 그에게 영예를 주었던 것이다.제전은 성대한 공물(供物)과 우승자를 찬양하는 축연이 베풀어지는 가운데 막을 내렸다. 제전 기간 동안에는 물론, 그 제전을 전후한 기간에는 폴리스 사이에 일체의 전쟁을 일시 중지하여 제전을 지켰던 사실은, 전 그리스 세계에서의 참관인들과 함께 헬레네스 의식을 더욱더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