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봉건제도와 이슬람 문화/프랑크 왕국의 분열
프랑크 왕국의 분열〔槪說〕
[편집]프랑크 왕국은 카를 대제(찰스 대제)의 사후, 아들 루트비히 1세(루이 1세)를 지나 분열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루트비히 1세 사후, 제국은 그의 세 아들 로타르 1세, 루트비히(루이), 카를(찰스) 2세에 의해 분할 통치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자인 로타르에 대해 루트비히와 카를이 결합하여 대립했고, 베르됭, 메르센의 두 조약으로 왕국의 분열은 결정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왕국은 동프랑크, 서프랑크, 이탈리아의 세 지역으로 나누어졌지만, 동프랑크에서는 10세기 초에 프랑크 왕통과 관계 없는 작센가(家)가 왕위에 올랐다. 또 서프랑크에서는 10세기 말 카페 왕조가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역시 이탈리아에서는 소국 분열 상태가 진행되고 있었고, 노르만인의 침입이나 독일의 간섭 정책도 가중되어 중세를 통해 통일 왕조는 출현하지 않았다.
루트비히(루이) 1세
[편집]-世 Ludwig Ⅰ(778
840, 재위 814
840)
프랑크 국왕 카를 대제의 셋째 아들.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이며, 그리스도교 문화의 진흥에 힘을 다하여 루이 경건왕(敬虔王)이라 불리었다. 신앙심이 두터웠으나, 통치자로서는 무능하여 즉위 후 곧 장남(長男) 로타르 1세에게는 제호(帝號) 및 프랑크 본토를, 차남(次男) 피핀 및 3남(三男) 루트비히에게는 변경지방을 주기로 정했으나, 재혼하여(818) 카를 2세가 태어나자 영토의 재분할(再分割)을 시도하여 세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829∼833). 833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4세의 중개에 의해 세 아들에게 항복, 폐위되었으나 다음 해 복위되었다. 그러나 노르만의 침입을 막지 못하였고, 또한 상속분쟁이 재연되어 실의(失意)중에 죽었다. 그의 사후 베르됭 조약, 메르센 조약에 의해 프랑크 왕국은 3분되었다.
로타르 1세
[편집]-世 Lothar Ⅰ (795?∼855, 재위 840∼855)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大帝)의 손자. 서로마 황제. 부왕(父王) 루트비히 1세 경건왕(敬虔王)의 사후 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동생 루트비히 및 카를과 영토 소유 문제로 싸워 패전하였다. 843년 베르됭 조약을 맺고 제국을 3분하였다. 로타르는 황제의 칭호와 제국의 중앙부 및 북이탈리아, 부르고뉴, 로렌을 얻었다. 로트링겐이란 지명은 그가 지은 것이다.
루트비히 2세
[편집]-世 Ludwing Ⅱ (804?∼876, 재위 843∼876)
동크랑크 국왕. 루트비히 1세 경건왕의 3남. 817년 왕국의 제1회 분할 때 바이에른을 얻었고, 841년에는 아우 카를과 결탁하여 형 로타르 1세를 격파하고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라인 동쪽의 땅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870년 메르센 조약에서 로렌 지방을 병합시켰다.
카를 2세
[편집]-世 Karl Ⅱ (823∼877, 재위 843∼877)
서프랑크의 왕, 서로마 황제. 루트비히 1세의 아들, 카를 대제의 손자. 아버지가 죽은 뒤 형 로타르와 영토싸움을 벌였는데 843년 베르됭 조약을 맺고 프랑크 영토를 3개로 나눈 뒤 서프랑크 왕이 되었다.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중부 프랑크를 다시 동서로 나누어 프랑스의 기초를 세웠다. 형의 아들 로타르 2세가 죽자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875년 서로마 황제라 불리었다.
카를 3세
[편집]-世 Karl Ⅲ (839∼888, 재위 881∼887)
서프랑크의 왕, 서로마 황제. 동프랑크 왕 루트비히의 셋째 아들로서 그 형이 죽자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881년 서로마의 황제가 되고, 884년 서프랑크의 왕을 겸하여 카를 대제의 땅을 되찾았다. 886∼887년 노르만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고, 굴욕 끝에 폐위되었으며 빈곤 중에 사망했다. 그 이후 카를 대제의 영토는 모두 분열되고 말았다.
베르됭 조약
[편집]-條約 Treaty of Verdun 루트비히 1세 사후, 프랑크 왕국을 3분한 조약. 루트비히 1세를 계승한 장자 로타르에 대해 차남 카를 2세와 3남 루트비히 2세가 대항하여 싸웠다. 그 결과 843년에 국토 분할을 결정한 베르됭 조약을 로타르에게 승인시켰다. 이 조약으로 로타르는 중부 프랑크와 이탈리아를, 루트비히 2세는 동프랑크를, 카를은 서프랑크를 각각 통치하게 되었다.
메르센 조약
[편집]-條約 Treaty of Mersen
프랑크 왕국의 분열(베르됭 조약) 후 로타르가 죽자 그 유령(遺領)을 가지고 루트비히, 카를 2세, 그리고 로타르의 아들 루이 2세 사이에 맺어진 국경획정조약. 870년에 메르센에서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으로 중(中)프랑크, 즉 로덴 지방이 동서 양(兩) 프랑크에 분할 부여되어, 루이 2세는 이탈리아만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 조약의 본문 및 부대(附帶) 계약서는 독일, 프랑스 쌍방의 속어(俗語)로 기록되어 있지만, 내용이 부자연스러운 베르됭 조약(843)보다는 훨씬 독일, 프랑스 양국 성립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 후 수정하기 위한 조약이 두 번 체결되었지만, 이 메르센 조약은 중세의 독일(동프랑크)과 프랑스(서프랑크)를 분리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서프랑크 왕국
[편집]西-王國
베르됭 조약의 결과 성립된 왕국으로, 후에 프랑스 왕국으로 발전해 갔다. 메르센 조약에 의해 나중의 프랑스 왕국 영역과 거의 비슷하게 확대되었다. 카를 2세의 사후, 한때 동프랑크 왕 카를 3세에 의해 통치된 일도 있었지만 887년에는 파리 백(伯)유드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노르만인이 침입했을 때에 이를 물리치고 공을 세웠다. 후에 한때는 카롤링거 계통으로 왕통이 옮겨지고(샤를 3세, 루이 5세 등), 그 동안에 노르만인의 추장이 노르망디공(公)으로 인정받고, 노르망디 지방에 노르만인이 정착했다. 그 후 파리 백(伯) 로베르가 강성을 자랑했으며, 987년에 파리 백(伯) 위그
카페가 카페 왕조를 세워, 프랑스 왕국의 기초가 되었다. 카페 왕조는 처음 부르고뉴공, 노르망디공 등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약체(弱體)였지만, 13세기에는 왕권이 크게 신장되었다.
중프랑크 왕국
[편집]中-王國
베르됭 조약에 의해 성립된 왕국(843
870). 일명 로타르 왕국이라고도 불렸고, 로타르가 통치했다. 영토는 이탈리아 반도와 동쪽으로는 라인강(江)·후리센, 서쪽으로는 에스코강·마스강·론강에 이르고 있다. 또 이 지방에는 로타르의 나라, 즉 로트링겐이란 이름이 남겨졌다. 중프랑크 왕국은 후에 메르센 조약에 의해 소멸했다.
동프랑크 왕국
[편집]東-王國
베르됭 조약 이후 카를 대제의 손자 루트비히가 국왕으로서 군림했는데, 메르센 조약으로 서쪽으로 영토를 확대했다. 영토는 바바리아, 작센, 아라만넹, 프랑켄 등 여러 지방을 포함하여, 독일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카를, 아르눌프, 루트비히 등 카롤링거 왕조계의 왕이 상당 기간 왕위를 계승하였다. 당시 노르만인이나 마자르인의 침입에 시달리던 동프랑크에서는 몇 개의 부족을 단위로 한 제후가 할거하고, 루트비히가 어려서 죽으니 이들 제후의 세력이 증대하였으며, 로트링겐, 프랑켄, 작센, 스와피아, 바바리아 등의 제후가 회의를 열어, 911년에 프랑켄 공(公) 콘라트를 동프랑크 왕으로 추대했다. 그 후 작센가(家)의 하인리히 1세가 919년에 국왕으로 추대되고, 이후 오토 1세 때에 와서 신성로마 제국이 성립되었다.
콘라트 1세
[편집]-世 Konrad Ⅰ (?∼918, 재위 911∼918)
독일 왕. 프랑켄공(公). 911년 카롤링거 왕조 단절 후 독일 왕에 선출되었는데, 항시 부족공(部族公)들의 분립적 경향으로 괴로움을 당하였으며, 특히 작센공(公) 하인리히의 항쟁을 받았다. 또한 대외적으로도 마자르인, 노르만인, 슬라브족의 침입을 받아 왕권이 가장 쇠퇴한 시대였다. 그 죽음에 임하여 과거 대항자 하인리히를 다음 왕으로 지명하였다. 그가 하인리히 1세이다.
하인리히 1세
[편집]-世 Heinrich Ⅰ (876∼936, 재위 919∼936)
독일 왕. 작센 왕가의 창시자. 원래 작센공(公). 콘라트 1세에 의하여 국왕에 추대되어 반항하는 부족공국(部族公國)을 정복하여 통일을 이룩하고, 또 슬라브족과의 경계지대에 많은 성새(城塞)를 건설하여 성채구역을 지방행정의 단위로 삼아 중앙집권화에 힘썼다. 한편으로 슬라브족(929), 마자르인(933), 데인인(934)을 격파하였으며, 독일 황제시대는 사실상 그로부터 시작된다.
하인리히 2세
[편집]-世 Heinrich Ⅱ (973∼1024, 재위 1002∼1024)
신성로마 황제. 하인리히 1세의 증손(曾孫). 995년 바이에른공(公)을 계승하고, 오토 3세가 자식 없이 죽자 반대파를 누르고 즉위하였다.1004, 1014, 1021∼1022년에 걸쳐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1014년에는 교황 베네딕투스 8세로부터 제관(帝冠)을 받았고, 또 1015, 10 17년에는 대군으로 폴란드 왕 볼레슬라프 1세를 토벌, 항복받았다. 친구인 클뤼니 수도원장 오딜로의 감화로 교회개혁운동을 지지하여 왕비와 더불어 가톨릭 성자(聖者)의 반열(班列)에 올랐다.
카페 왕조
[편집]-王朝 Capet
프랑스 중세의 왕조. 넓은 의미로는 방계(傍系)인 발루아 왕가 및 부르봉 왕가까지 포함하지만, 보통은 위그 카페에서 샤를 4세에 이르는 왕가만을 지칭한다. 카페 왕조는 카롤링거 왕조의 단절 후 바이킹에 대하여 영웅적으로 싸워 왕위를 계승하였다.초기에는 대제후에게 압박을 받아 왕령(王領)도 극히 작은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12세기초 루이 6세 이후에 이르러 왕권의 강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영국의 플랜태저넷 왕조가 프랑스의 서반부(西半部)에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면서 카페 왕조를 압박하였으나, 필리프 2세에 이르러 영국 왕 존을 격파함으로써 실지(失地)의 대부분을 탈환하는 데에 성공했다.그후 13세기 중반 루이 9세는 법제(法制)를 정비하여 견고한 봉건국가를 이룩하고, 또한 필리프 4세 때에 교황권을 내리눌러 현저하게 왕권을 확대시켰지만, 1328년 샤를 4세의 사망으로 남계(男系) 자손이 끊어지자, 발루아 왕조가 대신 들어섰다.
작센 왕조
[편집]-王朝 Saxonia
신성 로마 제국 초기의 왕조. 작센 공이었던 동프랑크 왕 하인리히 1세가 창건했다. 다음 오토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을 창립하고 오토 2세·3세, 하인리히 2세가 제위를 계승하였으나, 하인리히 2세로 왕조는 끝났다. 911년 카롤링거 왕조 단절 후, 콘라트 1세의 과도적 통치에 이어서 하인리히 1세가 선립(選立)되어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노르만인(人)·마자르인(人)·슬라브족(族)의 침입을 격퇴하여, 국경 방위라는 국왕에 대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동시에, 분립적부족공(分立的部族公)을 굴복시키고, 일족을 제후에 봉하여 집권화(集權化)에 노력하였다. 그 가부장(家父長)적 집권화 정책은 오토 대제에 의해서도 계승되었으나, 일족제후(一族諸侯)에 반란이 일어나자, 교회 지배에 의한 집권(集權) 정책으로 전환하여, 962년 교황으로부터 제관(帝冠)을 받아 신성로마제국을 수립하였다. 그를 계승한 오토 황제와 하인리히 2세도 이탈리아 정책을 계속하여 교회 지배에 진력, 사실상의 제위(帝位) 세습제를 확보하였는데, 1024년 하인리히 2세의 죽음으로 단절되고 잘리에르 왕가로 바뀌었다.
오토 1세
[편집]-世 Otto Ⅰ (912
973, 재위 962
973)
신성 로마 제국 제1대 황제. 작센공 하인리히 1세의 아들이며, 아버지의 통일 대업을 계승하여 외적의 방위 및 국내 제후 세력의 억압에 노력했다. 955년에는 아우크스부르크 근교에서 마자르인을 격파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그러나 그후 국내 제후의 세력을 누르는 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오토 1세는 교회와 결합하여 통일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그 결과 그는 로마 교황과의 제휴를 밀접히 하게 되어, 951년 이후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그는 국내의 분립주의적(分立主義的)인 경향에 대해서 치세(治世) 초기에는 인척(姻戚)들에게 부족 대공령(大公領)을 얻도록 하는 정책을 썼으나, 오토의 근친(近親)까지도 여러 차례 그에게 반항하여 그 후에는 오로지 관직 세습화의 염려가 없는 교회 세력과의 제휴에 힘을 기울였다.그때 당시의 교황 요하네스 12세가 제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오토 1세에게 원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오토 1세는 961년에 로마로 원정하여, 교황 요하네스 12세로부터 로마 황제로서 대관되었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962
1806)이 성립되었다.오토 1세는 이탈리아 왕국의 봉건적인 무정부 상태를 종식시키고, 로마의 귀족들의 전제로부터 교황을 해방하며, 최종적으로는 이전의 카를 대제의 제국을 재흥하기 위해서 정력적으로 이탈리아 경영에 착수했다. 이와 같이 오토 대제는 이탈리아 그리고 교회를 제압함으로써 통일을 강화했다. 그러나 그의 이탈리아 간섭, 소위 이탈리아 정책은 후에 교황과 황제의 대립 원인이 되고, 독일의 분열 원인이 되었다.
오토 3세
[편집]-世 Otto Ⅲ (980∼1002, 재위 983∼1002)
오토 3세는 아버지가 죽은 후 며칠 만에 왕이 되었으나 그 때의 나이는 3세였다. 그 결과, 오랜 기간에 걸쳐 섭정정치가 행해졌다. 처음에는 어머니인 테오파노가 991년에 죽을 때까지, 이어서 할머니인 아델하이트가 어린 황제를 보좌했다.오토 2세가 죽은 이듬해에, 그의 적대자들은 요하네스 14세를 배격하고 콘스탄티노플에서 돌아온 보니파키우스 7세를 또다시 교황으로 맞이했다.그러나 새 교황은 그 후 곧 죽었기 때문에 친(親) 오토 일파가 요하네스 15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995년 요하네스 15세는 그 당시 15세였던 오토 3세의 개입을 요구하여 황제는 급히 로마로 갔다. 이때 교황 요하네스 15세가 죽었기 때문에 오토 3세는 사촌형인 부르노를 교황에 앉히기 위해서 로마에 불러들여 그레고리우스 5세라 하여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는 최초의 독일인 교황으로 996년 5월 12일 오토 3세는 이 새 교황으로부터 제관(帝冠)을 받게 되었다.그레고리우스 5세가 죽자 오토 3세는 그의 스승이었던, 당시의 라벤나 대사교 오리야크의 게르베르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는 실베스테르 2세로서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교황 실베스테르 1세의 예를 본받아 황제의 야심적인 계획, 즉 로마제국의 부흥에 협력했다.오토 3세는 제국의 부흥이 교회와 국가와의 유효한 조화, 즉 교황과 황제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교황과 황제는 다같이 신의 의지를 이 세상에 집행하는 사람들로서 그리스도교 세계를 지배하고 국경을 넓히는 성스러운 사명을 이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토 3세의 제국정치나 포교정책은 그것에 협력한 모든 사람들에게 다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독일에서는 수많은 고위 성직자나 속인(俗人)인 귀족들이, 오토 3세의 정책은 그 세계성(世界性) 때문에 독일의 우위를 손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로마에서는 황제파의 지도자였던 그레고리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교황과 황제에게 로마를 떠나가 줄 것을 강요했다. 오토 3세는 원군(援軍)을 구하러 이탈리아의 각지를 떠돌아 다니다가 파테르노 성에서 죽었다. 그는 당시 22세였으며, 때마침 신부가 될 비잔틴 궁정의 황녀(皇女)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오토 3세의 유해는 카를 대제의 무덤 근처에 매장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제국의 부흥은 중단되었다. 그가 품은 장대(壯大)한 꿈은 실현을 보지 못한 채 하나의 에피소드로서 중세인의 기억에 남아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성립
[편집]神聖-帝國-成立
작센공 하인리히 1세의 아들 오토가 962년에 교황 요하네스 12세로부터 대관됨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이 성립되었다. 오토는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이에 교권과 정권의 결합이 강화되어, 그에 앞서 교황으로부터 대관된 카를 대제와는 그러한 의미에서 자주 비교되어 왔다. 그러나 오토 대제의 경우는 독일 국내의 통일 사업에 교회 세력을 충분히 이용하려 한 점에서 카를 대제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다. 즉 교회에 막대한 토지를 스스로 기부하는 한편 성직자를 국가의 관리로 간주하여 성직 임명권을 획득하고, 공조(貢租)를 징수했다. 이와 같이 세력을 항상 수중에 장악하기 위해서도 오토 대제 이하 역대 황제는 이탈리아 지배에 전념하였고, 그 때문에 오히려 제국은 끊임없는 분열을 되풀이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성립은, 고대 로마 제국 재현의 기대에 호응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일시적이긴 하나 유럽에서의 제국의 우월을 가져온 것이었다.
이탈리아 정책
[편집]-政策
신성 로마 황제가 10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자주 이탈리아에 간섭하여 그 경영에 힘쓴 정책. 오토 대제의 이탈리아 원정을 기점(基點)으로 오토 2세는 나폴리, 살레르노, 타렌툼을 지배했다. 프랑코니아가(家) 시대에 들어가서도 간섭 정책은 계속되었지만 11세기의 하인리히 4세 때부터 이 정책으로 말미암아 국내 통일은 동요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