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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도시와 시민층의 대두〔槪說〕[편집]

상인의 정주, 수공업자의 이주가 활발해졌어도 중세 도시는 애당초 행정·재판·군사 등에 걸쳐서 봉건 영주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시민의 중심은 상인이며, 그들은 영주의 시장세·관세 등에 손해를 깨닫고 봉건 영주의 지배를 차차 압박적인 것으로 느껴 여기에서 빠져나가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도시 인구의 증가, 시민 생활구의 성벽(城壁)에 의한 구획 등으로 일반 시민 가운데서 공동체 의식이 생기게 되었. 이렇게 하여 상인 길드의 지도를 받은 시민 전체를 망라한 선서 공동체(宣誓共同體, 코뮌)가 형성된다. 영주의 폐쇄적인 지배에 반항하는 상인은 자유로운 교통, 넓은 판로를 찾아 봉건 영주로부터의 독립을 시도하여 11

13세기의 서유럽에 왕성하게 코뮌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때 도시는 봉건 영주 위에 있는 지배, 즉 국왕이나 황제의 지배권을 배경으로 삼았고, 국왕이나 황제는 또한 이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지배를 강화하려고 생각하여 이들 도시에 특허장(特許狀)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자치권을 획득한 도시는 차차 봉건 영주와 견주는 실력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발전 형태는 주로 북구(北歐) 도시에 현저하다. 여기서 발생하는 중세 도시의 자유·자치 의식은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게 한다”라는 속담에 단적으로 표현되어 그 후의 유럽 시민 의식과 근대 정신의 원류(源流)가 되었다고 한다.그렇다고는 하나 영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한 여러 도시 내에서는 상층 시민(도시 귀족)이 시정(市政)을 독점하고 일반 시민을 압박했기 때문에 13

15세기에 걸쳐서 수공업 길드가 발달함에 따라 수공업자는 권리 획득을 위해 상층 시민과 새로운 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코뮌 운동[편집]

-運動 Comm- une

11세기 말에서 12세기에 걸쳐 중세도시운동의 과정 중에 발생한 주민의 서약단체이다. 코뮌운동은 프랑스에서는 먼저 플랑드르의 캉브레에서 시작되었으며(1070), 12세기에 북프랑스 일대에 집중적으 코뮌을 성립시켰다(랑, 아미앵, 스와송 등). 이는 당시의 사회적 변모에 합치되지 않는 영주권(領主權)을 배제(排除)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의도에 바탕을 두고, 철저한 단결과 상호부조(相互扶助)를 서약한 주민의 공동체이며, 왕 또는 영주의 인가에 의하여 독립된 시장(市長)과 시참사회원(市參事會員)을 선출하여, 그 밑에 재판 기관을 구성하고, 스스로 영주권과 군사력을 보유하였다. 프랑스 중세도시 중에서도 코뮌은, 이와 같은 점에서 남부의 집정도시(執政都市), 중부 내지 서부의 해방도시로 구별된다. 카페 제왕(諸王) 중 특히 필리트 2세는 코뮌운동을 보호하여, 다른 영주권을 견제하려고 하는데, 1214년 부빈 싸움에서의 코뮌군(軍)의 활약을 정점(頂點)으로 하여 이 운동은 급속히 쇠퇴하고, 루이 9세는 도시에 자유를 부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중앙집권정책에 의하여 도시에 간섭하였다. 게다가 도시귀족에 의한 과두정치(寡頭政治)가 일반화하면서부터, 중세 코뮌은 100년 전쟁의 참화 속에 매몰되어 갔다. 프랑스 혁명 중에 나타나는 코뮌은 중세 코뮌의 폐지 후에 성립한 시민의 혁명적 자치조직이었다.

준프트 투쟁[편집]

-鬪爭

중세 도시에서는 애당초 부유한 상인·대지주·금융업자 등의 도시 귀족이 실권을 잡았으나 도시가 단순히 상인의 거주지에만 머무르지 않고 농촌에 대립하는 수공업 생산의 장소로서 중요한 존재가 되자, 수공업자는 상인이 상품 판매 일체를 지배하고 있던 단계를 극복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산의 지배·판매권 등을 가지려고 그들 도시 귀족으로부터 실력으로써 여러 권리를 획득하려다가 때때로 여러 도시에서 심한 폭동을 유발했다. 칸, 쾰른, 트리에르, 피렌체 등의 투쟁은 유명하다.

북이탈리아의 상권[편집]

北-商權

이탈리아는 옛날부터 로마 제국에 의한 지중해 무역 등으로 상업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나 중세 상업의 출발은 11세기부터 십자군 운동에 의한 교통 발달에서 비롯된다. 북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무역은 동방과의 사치품 무역이 그 중심으로서 동서의 가치 차이를 이용하여 이익을 얻었다. 무역 범위는 주로 동지중해를 중심으로 하였고, 때때로 대서양 연안, 플랑드르, 영국 방면에까지 미쳤다.

레반트 무역[편집]

-貿易

10세기의 상업(商業)의 부활(復活)에서 16세기의 지리상(地理上)의 발견(發見)에 이르기까지의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와 동방(東方)과의 무역을 말한다. 레반트란 이탈리아어의 태양이 뜨는 지방, 즉 동방을 뜻하는 말이다. 이탈리아는 고대 이래 동방과 유럽과의 교통의 요지로서 큰 비중을 가졌으며, 베네치아, 라벤나, 아말피는 비잔틴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관계로 중세(中世)를 통하여 레반트 무역이 발전하였다. 특히 베네치아는 십자군(十字軍)을 계기로 하여 피사와 제노바를 누르고 동방무역(東方貿易)을 독점, 알렉산드리아, 트레비존드에 1년에 2회의 무역선대(貿易船隊)를 보내어 동인도산(産)의 향료(香料) 및 기타의 사치품과 유럽에서 가져간 모직물(毛織物)·은(銀) 등과 교환하여 이를 전유럽에 전매(轉賣)하여 폭리를 취하였다. 그러나 15세기에 들어와 오스만 투르크의 진출과 영국, 피렌체의 레반트 무역의 가담으로 베네치아의 독점은 무너졌으며, 1498년의 바스코 다 가마의 신항로 발견에 의한 동인도 무역의 등장으로 완전히 그 의의를 잃었다.

북서유럽의 상권[편집]

北西-商圈

지중해의 상권에 대응하여 북구 여러 도시에 의해서 영위된 발트해·북해 및 북프랑스의 상파뉴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상권이다. 옛날 노르만인의 상업 활동에 의해서 여러 하천과 항구가 개척되어 있고, 특히 플랑드르의 모직물 공업 등을 배경으로 하여 발전하게 되었다. 그 성격은 사치품을 취급하는 원격지 무역보다는 수산물·농산물 기타 목제 등 북구 경제 발달에 부응한 필수품의 교역이 주였다.

한자 동맹[편집]

-同盟 Hans- eatic League

한자란 상권 확보를 위한 제도시·제상인 단체간에 맺어진 동맹을 말하는데, 13세기 뤼벡, 함부르크를 중심으로 결성된 ‘한자동맹’이 대표적이다. 목적은 북구 일대의 무역을 독점하고 해외에서의 동맹 제도시의 거래상 이익을 보장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서 제도시 대표가 모이는 한자 회의가 있어 상품 보호, 해상권의 확립 등을 의결했다. 이리하여 유럽 북반의 통상을 독점하고, 해군도 보유하여 봉건 제후·국왕 등과 대항할 만큼 위세를 드러내었고, 14

15세기에는 동맹 도시가 100개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강대한 절대주의 국가의 성립, 신대륙의 발견에 의한 경제권의 이동 등으로 17세기 초두에 쇠퇴했다.

메디치가[편집]

-家 Medici

이탈리아의 금융업자이며, 피렌체 공화국과 토스카나 공국의 지배자(公國). 14세기부터 발흥한 명문으로서 살베스트로는 소시민층의 중핵(中核)으로서 알비치파(派)와 싸우다 패했으나, 조반니(1360∼1428)가 신흥시민계급의 중망(衆望)을 얻어, 상업으로 번 거리(巨利)를 배경으로 과두(寡頭)정치에 대한 반항의 급선봉에 섰다. 그 아들 코시모(1389∼1464)는 수년간의 추방을 당한 후, 민중의 지지와 상업자본에 힘입어 피렌체에 황금시대를 출현시켰으며, 은행장과 국가의 원수(元首)의 지위를 겸임하여 국부(國父)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대폭적인 감세(減稅)를 단행하고 다액(多額)의 자선금(慈善金)과 공공비(公共費) 지출을 아끼지 않았으며, 기업가는 원조로 회유하고, 결혼정책에 의하여 바르디가(家)와 유대를 유지하였다. 유럽의 16도시에 은행을 세우는 한편, 교황청의 재정을 장악하여 자가(自家)의 경제력을 축적하였으며, 사재를 시정(市政)에 투입하였다. 그 후 피에로의 5개년간의 통치 후 로렌초(1448 ∼1492)가 뒤를 이었는데, 영국 왕 에드워드 4세 실각으로 인한 대부금 회수의 불능, 밀라노, 리용 출장소의 실태(失態) 등이 겹쳐서, 상업자본으로부터 지주적(地主的)인 고리대자본으로 보수화(保守化)하게 되었다. 그는 정치적 권력에 의지하여 내정(內政)을 강화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외교수단에 의하여 피렌체의 안전을 도모하고, 문예보호에 전력을 기울였다. 1530년 피렌체 공화정의 몰락 후, 분가(分家)인 코시모 1세(1519∼1574)가 토스카나 대공(大公)의 칭호를 받아 전제군주로서 토스카나 공국(公國)에 군림한 이래, 1737년 최후의 대공 가스토네가 죽기까지 메디치가의 토스카나 지배가 계속되었다. 이 문중(門中)에서는 교황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를 배출했으며, 프랑스의 유명한 앙리 4세 비(妃)도 이 가문(家門)의 출신이다. 특히 로렌초는 정치적 수완에 빼어났을 뿐만 아니라 교양이 넓어 미켈란젤로와 그 밖의 예술가를 보호한 것 등으로도 유명하다.

푸거가[편집]

-家 Fugger

중세 말기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호상(豪商)이다. 15세기부터 16세기에 걸친 야콥 푸거 때에 전성기를 맞아 유럽 각지에 광산을 소유하고 동양과의 사치품 무역으로 거액의 부를 쌓았다.이 재력을 가지고 신성 로마 황제·로마 교황을 비롯하여 각국에 융자하여 때때로 유럽의 정치를 좌우하는 세력을 보였다. 그러나 그 경영은 투기적 이윤 획득을 근간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멕시코 은(銀)의 수입으로 비롯되는 유럽 가격 혁명(價格革命)이나 16세기에 거액을 빌려간 에스파냐의 국고 파산 등으로 인해서 몰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