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중세 유럽의 성립/북인도의 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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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인도의 번영〔槪說〕[편집]

4세기 초, 마우리아 왕조의 시조와 같은 이름을 가진 찬드라굽타(1세)에 의해서 굽타 왕조가 탄생했다. 마우리아 왕조의 멸망 후, 수세기 동안 갠지스강 유역에 두드러진 강국(强國)은 나타나지 않았었는데, 이 굽타 왕조에 의해서 북인도가 재통일되기에 이르렀다.굽타 시대는 또한 인도 고전문화의 황금시대로 알려져 있다. 산스크리트 문학은 크게 번영하고, 고대 인도 최대의 시인(詩人) 칼리다사를 낳았다. 2대 서사시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도, 이 시대에 거의 지금의 형태로 정리되었다. 한때 불교에 압도되어 부진했던 브라만교학(敎學)이 왕실의 보호를 받아 부흥하여 6파 철학이라고 불리는 브라만 여러 학파의 철학체계도 완성을 보았다.불교는 지난날의 융성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학문적 연구는 여전히 계속되어, 날란나 승원(僧院)은 불교교학의 중심으로서 내외에 알려졌다. 불교가 민중으로부터 유리되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아리아적인 브라만교와 비(非)아리아적인 원주민의 신앙과 습속(習俗), 불교적 요소 등이 융합되어 생긴 힌두교는 민중 사이에 침투하고 있었다.종교와 결부되어 천문학·물리학·수학·의학 등의 여러 과학도 발달되었다. 10진법에 따른 인도 수학은 여러 과학 중에서도 특히 훌륭한 분야였다. 제로(0)의 발견은 수학사상 인도가 가져다 준 커다란 공헌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술 방면에서는 전대에 이어서 불교미술이 중심이 되고 있었다. 조각에 있어서의 굽타식 불상이나, 회화에서의 아잔타 벽화는 인도 불교 미술의 정점을 차지하는 것이다. 북인도를 통일하고 인도 고전문화의 황금시대를 실현시킨 굽타 왕조도, 6세기가 되자 서북 방면으로부터 에프탈의 침입을 받아 국력이 다하여 쇠망했다.

굽타 왕조[편집]

-王朝 Gupta

쿠샨 왕조의 쇠퇴와 때를 같이하여 갠지스강 유역에서는 강력한 통일국가가 새로이 탄생했다. 이것이 굽타왕조이다. 이로써 쿠샨왕조 쇠퇴 후의 인도에서는 정치적 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굽타 왕조는 4

6세기에 걸쳐 북인도를 지배했던 왕조이다. 도읍은 파탈리푸트라이다. 창시자인 찬드라굽타 1세(재위 320

335?)와 제2대의 사무드라굽타(335

375?) 시대에 왕국의 기초가 다져지고, 제3대의 찬드라굽타 2세(超日王, 375

414?) 시대가 전성기였다. 이 나라를 제국적인 규모로까지 확대시킨 것은 사무드라굽타(재위 335∼375?)로서 그가 원정으로 이룩한 수많은 승리는 프라야가 고을 근처에 있는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서 갠지스강 유역 전토의 지배자가 된 굽타 왕조의 왕은 카마루파, 네팔, 동부 펀자브, 그리고 벵골의 일부에까지 권위를 넓혔다.이 무렵까지 아직 라자스탄, 펀자브, 중앙 인도 각지에 남아 있던 최후의 과두제(寡頭制) 국가도 그의 승리로 끝내 소멸되고 말았다. 또 데칸 지방의 원정도 여러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이 원정은 전혀 영토 병합을 이룩하지는 못했으나, 국왕으로서의 위신은 높일 수 있었다. 말와의 서(西)크샤트라파족, 간다라 지방에 남아 있던 쿠샨족, 실론 섬의 국왕 등 사무드라굽타 왕의 세력권 밖에 있던 민족들과도 모두 외교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 왕은 평화주의적 경향을 가진 불교보다도 오히려 영웅적 종교인 힌두교를 신앙하여, 과감하게 정복과 영토확장을 단행했다. 그 결과 인도는 세계 사상 처음으로 강국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되었다.사무드라굽타의 뒤를 이은 것은 왕자인 찬드라굽타 2세(재위 375∼414?)였다. 그는 말와에서 서크샤트라파족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구자라트와 사우라시트라를 정복했다. 한편 정복이 불가능하다고 믿어지던 바카타카 왕국(중부 데칸 지방)에 대해서는 정략결혼으로 동맹을 맺어 남쪽 국경의 평온을 확보했다. 중국의 승 법현(法顯)의 여행기 『불국기(佛國記)』 『법현전(法顯傳)』에, 찬드라굽타 2세 시대의 인도의 번영 양상이 기록되어 있다. 그후 쿠마라굽타 1세(재위 414∼455?)는 굽타제국의 평화를 유지했으나, 이 평화는 그의 오랜 치세 말기에 이르러 후나족의 인도 침입으로 어지럽혀지고 말았다. 이 후나족의 침입은 당시의 황태자였던 스칸다굽타에 의해 겨우 저지되기는 했으나, 455년경에 왕위를 물려받은 그는 그의 치세 동안 후나족과의 싸움에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경제적·인적 손실은 제국을 위기에 몰아넣었고, 이와 아울러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분쟁까지 일어나 제국위기의 심각성을 더해 주었다. 그리하여 5세기 말부터 6세기에 걸쳐서 제후(諸侯)의 이반(離反), 에프탈의 침입이라는 내외의 재난에 시달리다가 쇠망했다.

굽타 왕조의 사회[편집]

-王朝-社會

굽타 왕조의 지방 행정은 영토를 몇 개의 지방으로 나누고, 이를 각각 총독이 통치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방은 다신 현(縣)으로 분할되고 현지사(縣知事)의 임명권은 총독(總督)이 갖고 있었다. 현지사는 또 구입판매, 증여행위 등을 감독하는 의회의 보좌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의회는 주요한 직업 조합의 대표자, 그리고 때로는 촌락의 촌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와 아울러 봉건군주에 의해 거의 독립적으로 통치되는 영지(領地)도 따로 존재하고 있었다. 한편 중앙에서는 지고의 신, 위대한 황제, 왕 중의 왕 등 거창한 칭호로 그 권위를 장식하기 좋아하는 국왕이 인도의 전통적이고 특색있는 피라미드형의 관료기구를 이용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이 관료기구의 정점에는 재상(宰相)이 있고 그 밑에 총사령관, 대장군, 재무 대신 등이 있었다.생산은 직업조합이라는, 아주 강력한 사법권, 때로는 행정·군사권까지 소유하는 조직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상업은 굽타조 초기에는 성했으나, 5세기 말에 이르러 화폐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는 파기되고, 촌락의 성립과 농업의 확립이 한데 어우러져 물물교환(物物交換)에 기초를 둔 경제로 바뀌었다.

산스크리트 문학[편집]

-文學 Sanskrit

인도·유럽 어족의 일파인 인도·이란어파에 속하는 인도의 고어. 속어(俗語)에 대한 아어(雅語)를 의미한다. 넓은 뜻으로는 베다에 쓰인 베다어와 기원전 4세기경의 문법가 파니니 등에 의하여 정리된 고전 산스크리트를 포함하나, 일반적으로는 후자를 지칭한다. 복잡하고 풍부한 굴절어(屈折語)의 특징을 나타내는 문법을 가졌는데,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에 보이는 서사시체(敍事詩體), 칼리다사로 대표되는 미문체(美文體), 판차탄트라 등의 평이한 문장 등 여러 문체(文體)가 있다. 이 말은 힌드교의 문헌에 널리 사용되어 왔으나, 불교, 자이나교의 경전(經典)에도 쓰였고, 특히 문학작품으로는 귀중한 것이 많으며, 그 후 근대 인도·아리아어, 남인도의 드라비다계어(語)의 문학에도 쓰였다. 그리고 인도문화가 파급된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의 언어문예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는데, 이른바 사어(死語)는 아니며 현대 인도의 브라만 학자 중에는 회화·문장에도 사용하는 사람이 있으며, 그 국어화를 주창하는 일파도 있다. 인쇄체에 많이 쓰이는 자체(字體)인 데바나가리는 힌디어에도 사용되고 있다. 한국·중국·일본에서 이를 범어(梵語)라고 부르는 것은 범천소조(梵天所造)의 말이란 전설에 의한 것이다.

「사쿤달라」[편집]

Sakuntala

칼리다사에 의해서 쓰여진 7막으로 된 희곡(戱曲)이다. 사쿤달라 낭자의 사랑의 이야기를 내용으로 한다. 산스크리트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서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애독되고 있다. 칼리다사의 작품으로서는 이 밖에 서사시「구름의 사자(使者)」가 유명하다.

「마하바라타」[편집]

Mahbhrata

「라마야나」와 아울러 고대 인도의 2대 서사시(敍事詩)의 하나. 18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시수(詩數)는 10만을 넘는 세계 제일의 서사시이다. 바라타족(族)의 대전쟁을 주제로 하여 그 사이에 수많은 설화(說話), 특히 신화와 전설을 가미하여 구성되었는데, 작자는 비야사선(仙)이라고 하나, 동일인(同一人)의 손으로 한 시대에 이룩된 것이 아니며, 민족적 서사시로서 구화(口話)로 전승되어 대략 4세기경에 현재의 형태를 갖춘 것으로 생각된다. 힌두교도의 성전(聖典)인 바가바드기타도 이 속에 포함되는데, 마하바라타의 줄거리와, 그 속에 포함되는 삽화(揷話)는 후세의 문학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영향을 미치게 하고, 산스크리트어의 작품은 물론, 근대 인도의 여러 방언 및 드라비다계(系)의 여러 언어에 의한 번역·번안(?案)은 아주 많다. 또, 인도문화의 전파에 따라 티베트, 동남아시아에도 전해졌다. 특히 자바에서는 고대 자바어에 의한 번역이 이루어져 그 번안 작품과 더불어 자바어의 귀중한 자료(資料)가 된다.

「라마야나」[편집]

Ramayana

인도 고대의 대서사시(大敍事詩). 「마하바라타」와 더불어 고전 산스크리트 문학의 최고봉을 이룬다. 이는 발미키의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사실은 기원전 4세기경에서 기원후 4세기까지의 사이에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그 내용은 비시누신(神)의 화신(化身)으로 여겨지는 라마왕자와 그의 처 시타를 소재로 한 이야기로 모두 7편(篇) 24,000송(頌)으로 되어 있다. 이 서사시는 12세기 이후 여러 인도말로 번역되어 통속적 설화(說話)로 농민을 비롯한 힌두 사회 전반에 널리 전승되고, 인도인의 생활규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 중국, 티베트, 동남아시아 등지에도 전래되어 문예·미술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에는 라마야나 설화를 담은 아름다운 부조(浮彫)가 있다.

날란다 승원[편집]

-僧院 Nalanda

인도 북부 비하르주(州) 날란다 지역에 있는 불교유적으로 굽타 왕조의 왕 쿠마라굽타 1세(재위 414∼455?)가 오늘날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날란다사(寺)를 건립한 이후 역대왕조에 의해 증축, 확대되었다. 굽타 왕조 후반기인 5세기경부터 12세기에 걸쳐 불교교학의 중심지로 국외에까지 알려져서 아시아 각지 출신의 학승(學僧)이 운집했다. 중국의 승(僧) 현장(玄奬)·의정(義淨) 등도 여기에서 배웠다. 지금도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힌두교[편집]

-敎

인도의 민족종교. 인도교라고도 불린다. 일반적으로 베다 성전에서 볼 수 있는 초기 인도 아리아인의 종교를 브라만교라고 부르며, 여기서 선주민(先住民)의 신앙·습속이 복잡하게 융합하여 성립된 종교를 힌두교라고 불러 구별한다. 힌두교에 있어서는 베다 시대에 존중된 인드라신(神)이나 아그니신 등이 후퇴하고, 파괴신 시바, 유지신(維持神) 비시누, 창조신 브라흐마라는 3대 신에 대한 신앙이 중심이 되어 있다. 오늘날 인도공화국 인구의 85%(약 8억 명)가 힌두교도이며 교도의 대부분은 시바파·비시누파 중 어느 쪽이다. 힌두교도의 신앙 형태는 종교나 카스트마다 다르며, 또한 지방적인 차이도 크다. 그러나 베다 성전과 브라만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과 카스트 제도에 따라 생활을 한다는 것은 힌두교도로서의 의무로 되어 있다.

인도 수학[편집]

印度數學

이슬람 세계와 인도와의 만남은 실로 유럽세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 만남에 의해서 이슬람 세계는 인도에서 기원(起源)한 갖가지 지식을 서구에 전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10진법에 의한 수학이 상업이나 종교와 결부되어 발달하였다. ‘제로(0)’는 인도 수학에 있어서 위대한 발견이며, 기원 전후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아라비아숫자는 인도에서 탄생되어, 아라비아를 거쳐서 12세기경 유럽에 전해진 것이다. 고대 인도에서는 5세기의 아리야바타, 7세기의 브라흐마굽타 등 대(大)수학자가 나왔는데, 그들의 저서는 8세기 이후 아라비아어로 번역되어, 아라비아 수학의 발달에 공헌했다.

굽타 미술[편집]

-美術

굽타 시대에는 순인도적인 미술이 번영했는데, 그 중심이 된 것은 전대에 이어 불교미술이었다. 대표적 건축으로는 아잔타, 엘로라 등의 석굴사원(石窟寺院)이 있으며, 아잔타 석굴의 벽화는 동양 미술의 지보(至寶)로 간주되고 있다. 조각 분야에서는 불교조각이 중심이며, 엷은 옷을 특색으로 하는 세련된 불상이 제작되었다. 굽타식(式) 불상의 제작지로서 마투라와 사르나트가 이름높다. 인도에 있어서의 불교 미술은 굽타 왕조 시대를 정점으로 하여 이후 쇠퇴로 향하는데, 이와 반대로 힌두교 미술이 굽타 시대에 등장하여 급속도로 발달한다.

아잔타의 석굴사원[편집]

-石窟寺院

데칸 서북부의 아잔타(Ajant)촌 부근에 있는 불교사원이다. 이 지방의 29개 석굴사원에는 건축·조각·회화 등 각 분야의 훌륭한 작품들이 남아 있다. 이러한 굴원(窟院)은 기원전 2세기부터 8세기에 걸쳐서 개굴(開窟)된 것이다. 이 석굴사원은 굽타 제국의 영 외에 위치해 있었으나, 시대적으로는 굽타 시대 전후의 굴원이 미술적으로도 가장 걸출하다. 특히 이 곳의 벽화는 고대 인도 회화의 최고봉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귀중하다.

에프탈의 침입[편집]

-侵入

굽타 왕조 쇠망의 한 원인으로서 에프탈(Ephtalite)의 침입을 들 수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남하하여 펀자브를 지배했던 에프탈은 6세기 초의 트라마나와 미히라그라 부자(父子) 시대에 가장 강성하여 인도 중부까지 그 영토를 넓혔다. 미히라그라는 불교 박해자로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미히라그라는 530년경 인도의 토후(土侯) 야쇼달만에게 패하여, 에프탈의 세력은 약해졌다.

남인도의 왕조[편집]

南-王朝

북인도에서 굽타 왕조가 성립되고, 쇠망했던 시대에, 남부인도(데칸과 그 남쪽의 타밀 지방)에서는, 안드라 왕국의 번영을 계승하는 드라비다계의 여러 왕국이 성쇠를 반복하고 있었다. 데칸의 바카타카 왕조, 찰루키아 왕조, 타밀 지방의 팔라바 왕조 등이 대표적인 왕조이다. 학문·예술을 보호하는 왕이 많이 나와 많은 불교 미술·힌두교 미술작품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