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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음악/서양음악가와 작품감상/이탈리아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구이도 다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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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do d'Arezzo(995경-1050경) 토스카나의 아레초 또는 그 근교 출신이며 베네딕투스파의 수도사가 되었으나 후에 아레초의 주교좌대성당(主敎座大聖堂)에서 음악을 가르쳤으며, 로마 교황에게도 초대되어 음악이론을 강의하였다. 만년은 아레초 부근의 아베라나의 수도원장을 지내고 있었다. 구이도는 성 요한 찬가의 각 시구(詩句) 첫째 음이 헥사코드(6음음계)의 음의 순으로 되어 있는 것을 이용하여 각개의 음절(우도, 레, 미, 파, 솔, 라)을 따서 계명창법(階名唱法)을 시작하였고, 또한 다른 헥사코드 사이의 바꾸어 읽기(變調)의 방법도 확립하여 계명창법과 변조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손바닥의 각 부분을 음이름으로 한 구이도의 손에 의한 교수법도 고안했다. 또 그 때까지 사용되고 있던 바(F)음의 빨간줄(赤線)과 다(C)음인 노란줄에 2줄의 까만줄을 더하여 4선보표를 만들어 음고를 보다 정확하게 나타내려고 하였다. 한편 구이도는 그의 저작 <미크롤로구스>에서 2성(二聲) 오르가눔의 작곡법을 상술하였다.

란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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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sco Landini(1325?-1397) 성을 란디노(Landino)라고도 하였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장님이 되었는데, 암흑세계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보존하고 있던 오르가넷토라고 하는 오르간을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러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전기(傳記)에 대해서는 그다지 확실하지 않으나 피렌체 근교의 피에솔레에서 태어나 피렌체를 중심으로 작곡가·연주가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 악기의 연주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피렌체 교회의 오르간 설계나 조율에도 손을 댔고, 또 류트와 프살테리움을 한데 합한 것 같은 악기를 발명하기도 했다(세레나 세레노룸이라고 이름했다). 그는 또한 베네치아나 북이탈리아의 스칼라가(家)의 궁정에도 간 듯하다. 유해(遺骸)는 피렌체의 산 로렌초 성당에 안장되었는데, 오르가넷토를 손에 든 란디니의 모습을 조각한 묘비가 세워져 있다. 란디니는 철학이나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가 작곡한 시는 거의 자작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4세기의 이탈리아는 이른바 아르스 노바의 시대로서, 북이탈리아의 몇몇 도시와 피렌체를 중심으로 세속음악의 꽃이 피었다. 란디니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곡은 마드리갈 11곡, 캇차 2곡, 발라타 114곡으로 모두 세속적인 2-3성의 성악곡(악기용의 성부도 있다)인데, 그것은 아르스 노바의 이탈리아 음악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며, 그는 진정 14세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되어 있다. 특히 프랑스 음악의 영향을 받아 다성적으로 작곡하게 된 발라트의 작곡에 뛰어나 그 음악은 페트라르카나 보카치오의 시대에 걸맞으며 싱싱하고 유려하다. 한편 '란디니마침(終止)'이라고 하는 마침꼴은 14세기에 널리 사용되고 있던 것이므로 그의 이름과 결부될 이유는 없다.

팔레스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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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1525경-1594) 성은 피에를루이지라고 하지만 보통 출신지인 로마 근교의 거리의 이름을 따서 팔레스트리나라고 부른다. 소년시절 고향의 거리인 산타가피터 대성당의 소년성가대에 들어가, 1537년에 로마의 산타마리아 마졸레 성당의 성가대에 참가하여 기초훈련을 받았다. 변성기(變聲期)에 다시 산타가피터로 돌아와서 오르간 주자 겸 노래교사가 되었다. 1551년, 교황청의 줄리아 예배당의 악장에 임명되었고, 곧 교황의 예배당가수가 되었다. 그러나 교황이 바뀌어 파울루스 4세가 되자 아내가 있는 팔레스트리나는 해고되었다(1555). 그리하여 그는 산 라테라노 성당 및 산타마리아 마졸레 성당 등에 근무했으나 1571년에는 다시 줄리아 예배당의 악장으로 초청되어 세상을 떠나는 해까지 이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1580년에 부인과 사별했고 한때 신부가 되었으나 곧 돈많은 미망인과 재혼하였고, 재정적 원조를 얻어 작품출판도 많이 하였다. 1586년 교황의 전속작곡가 칭호를 받은 팔레스트리나는 대음악가로 존경받다가 별세하였으며,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팔레스트리나는 약 105곡의 미사곡을 비롯하여 많은 모테토, 찬가 등의 종교음악 외에 마드리갈 등의 세속곡도 남겼다. 그의 작품은 거의 무반주의 성악곡이며 4-5성의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는 플랑드르 악파의 다성수법을 충분히 몸에 익히고 있으면서도 서정적인 표정을 잃지 않았고, 호모리즘풍의 양식도 채택하여 긴밀한 구성으로 맑고 깨끗한 음악을 만들었다. 그 종교음악은 트렌토의 공회의(1545-1564)에 의하여 지향된 반종교개혁의 정신에 따른 것으로 높이 평가되어 오늘날에 와서도 카톨릭 교회음악의 한 규범으로 하고 있다.

가브리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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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vanni Gabrieli(1557경-1612)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가브리엘리는, 역시 베네치아 출신의 음악가이며 산 마르코 대성당의 제1오르간 주자로 근무하였고 뛰어난 작곡가이기도 한 숙부 안드레아 가브리엘리(1510경-1586) 밑에서 음악교육을 받고 산 마르코 대성당의 제2오르간 주자의 지위를 거쳐, 숙부가 죽은 후 곧 제1오르간 주자로 임명되었다. 조반니 가브리엘리는 작곡가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알프스 이북으로부터도 하슬러(1564-1612), 쉬츠(1585-1672) 등 뛰어난 음악가들이 그의 문을 두드렸다. 가브리엘리의 작품으론 인토나치오네나 토카타 등의 오르간 음악, 성악, 기악 및 그 혼합으로 된 교회음악, 협주적인 마드리갈 등이 알려져 있으나 빌라르토(1480?-1562)나 안드레아 가브리엘리 등의 분할합창이나 협주적인 수법을 더욱 발전시켜서, 같은 무렵의 베네치아파의 회화에 알맞은 화려한 색채적인 음의 향연을 전개하고 바로크적인 표현에 일대 진전을 보이고 있다.

몬테베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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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udio Monteverdi(1567-1643) 성은 몬테베르데(Monteverde)로 쓰기도 한다. 북이탈리아의 크레모나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그 곳 대성당에서 악장으로 있던 인제니엘리(1545-1592)의 가르침을 받았다. 몬테베르디는 이미 1582년에 <3성의 성 칸치운클라집(集)>을 출판했고 이어 <종교 마드리갈집> <칸초네타집> <마드리갈집>을 출판했다. 1590년에 만토바의 곤자가가(家)에 가수 겸 비올 주자로 있었으며, 곧 악장이 되었다. 만토바로 가서도 마드리갈집을 차례로 출판했으나, 전부터 몬테베르디의 마드리갈에서 대담한 음을 쓰는 법에 반대하고 있던 알투우지(1540-1613)의 비판에 대하여 <마드리갈집 제5권>(1605)에서 '제2의 작법'을 고안해 내어 반론을 폈다. 거기서는 음의 사용법은 말의 정감의 표현으로 선택되어야 한다는 이념이 명백히 지적되고 있다. 1607년에 만토바에서 상연된 제1작의 오페라 <오르페오(오르페우스)>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어 1608년에도 곤자가가(家)의 결혼축전을 위해 <아리안나(아리아도네)>를 작곡하였다. 음악가로서 곤자가가(家)에 몸바치고 있던 몬테베르디도 1612년 군주가 별세하고 대가 바뀌자 해임되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해 1613년에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이 그를 악장으로 영접하여, 그후 베네치아의 교회음악과 오페라를 위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몬테베르디는 르네상스풍의 양식에서 출발했으면서도 말의 표현을 중요시하여, 그 때까지의 조화있는 음의 울림을 파기하는 방향으로 지향하여 보수적인 작곡가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는 생전에 마드리갈집을 8권 출판했으나 제6권(1614)에는 악기반주가 있는 것도 나타났으며 그후 이른바 콘체르타토 양식의 것으로 지향했다. 오페라에서는 피렌체의 카메라타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입각하였으나, 비극적인 자질을 지닌 음악가였던 몬테베르디는, 먼저 <오르페오>에서 표현의 폭을 크게 펼쳐 초기 오페라의 금자탑을 확립하였다. 그후 오페라 대부분은 없어졌으나 베네치아의 극장을 위하여 작곡한 만년의 <오디세우스의 조국귀환>(1641)이나 <폽페아의 대관(戴冠)>(1642)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오페라 창조의 경위도 있고 하여, 그 때까지의 오페라가 신화를 소재로 하고 있는 데 대하여 <폽페아>가 로마의 황제 네로를 다룬 역사극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프레스코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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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olamo Frescobaldi(1583-1643) 북이탈리아의 페를라라에서 루차스키(1545경-1607)에게 오르간을 배웠다고 한다. 1604년부터는 주로 로마에 머물렀고, 1608년에는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오르간 주자로 임명되어 여생을 이 지위에 머물렀다. 프레스코발디는 베네치아의 오르간 음악의 전통을 계승하여 토카타, 칸초네, 리체르카레 등의 분야에서 규모가 큰 표현을 구축하였고 또한 하프시코드의 음악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겨, 바로크풍의 건반악기 음악의 문을 열었다.

코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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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angelo Corelli(1653-1713) 북이탈리아의 푸지냐노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파엔차에서 한 신부로부터 음악의 기초를 배우고, 13세 때부터 당시 기악의 중심지였던 볼로냐에 가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코렐리는 이미 17세로 국제적으로도 유명하던 볼로냐의 아카데미아 필하모니카의 회원이 되었다. 그 뒤 프랑스로 가서 류리를 만났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그는 1675년에는 로마에 있는 성당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있었으며 1679년에는 로마에서 파스퀴니(1637-1710)의 오페라를 지휘하였다. 같은 해 독일을 여행했다고도 하지만 이것도 불명확하다. 1681년에 당시 로마에 거주하고 있던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에게 바친 작품 1의 트리오 소나타집을 출판하였다. 1689년에 후원자인 크리스티나 여왕이 승하한 뒤 코렐리는 추기경인 오토보니의 저택에서 악장과 바이올린 주자를 겸한 지위에 올랐고 그 뒤로는 추기경의 후대를 받아 마음놓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었다. 1706년 로마의 아카데미아 데리 아르카디에 들어가 알렉산드르 스카를라티(1660-1725) 등과도 교제했다. 그는 생전에 작품1에서 작품4까지 각각 12곡씩의 트리오 소나타집(集)과 작품5의 12곡의 바이올린 소나타집을 출판했고 사후 작품6이라 하여 역시 12곡의 콘체르토 그로소(합주협주곡)가 출판되었다. 이탈리아 작곡가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오페라나 칸타타의 작곡에 큰 비중을 두었던 당시로서는 코렐리의 작품구성은 진귀하다. 그는 소년시절을 보낸 볼로냐의 음악가들에 의하여 개척되고 있던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한 기악, 트리오 소나타, 콘체르토 그로소의 영역에서 수는 많지 않으나 한곡 한곡이 불멸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코렐리는 이러한 곡들의 내적 구성 면에서 교회 소나타와 실내 소나타 양쪽의 원리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의 음악은 현악기의 높은 포지션이나 중음주법(重音奏法) 등의 어려운 기교를 지양하여 기술을 완전히 내적 표현에 종속시키면서 균형잡힌 고아한 서정에 넘치는 양식을 만들어 놓았다. 코렐리는 또한 바이올린의 교사로서도 뛰어난 소미스(1686-1763), 제미니아니(1687-1762), 로카텔리(1695-1764) 등의 뛰어난 제자를 통해 그 가르침은 유럽에 퍼졌다.

라 폴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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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follia 작품5의 12. 에스파냐 기원의 폴리아라는 3박자 춤곡의 멜로디를 주제로 한 독주 바이올린과 통주저음을 위한 변주곡.

스카를라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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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ssandro Scarlatti(1660-1725)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서 태어나 소년시절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679년에 오페라 <꼭 닮은 사람>으로 로마에 등장하여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1685년경부터 나폴리의 왕실극장의 악장으로 그 곳에 정주하면서 잇달아 오페라를 작곡했다. 1703년에 산타마리아 마졸레 성당의 악장에 임명된 듯하며 이후 1808년까지 로마에 있었다. 그의 종교음악의 대부분은 이 무렵에 작곡되었고 또한 당시 로마에서는 오페라가 풍기문란 혐의로 탄압을 받아 번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칸타타를 많이 작곡하여 음악애호가인 귀족들의 요망에 답하였다. 1708년엔 다시 나폴리로 돌아와 그 뒤 1717-1722년에는 로마에서 오페라 창작과 상연에 임한 것 외에는 대체로 나폴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스카를라티는 오페라만도 약 115곡이나 작곡했다 하며 그 밖에 칸타타, 기악곡 등의 작품은 방대한 수에 달하고 있다. 그는 오페라 영역에서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세 부분으로 된 이탈리아풍 서곡의 형성을 확립하고 오페라에서 노래를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로 분류하고, 아리아로는 다 카포의 형식을 정착시킨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오페라는 피렌체의 카메라타나 몬테베르디(1567-1643) 등 오페라의 초기 작가들의 이념을 계승발전시켜 거기에 성악성(聲樂性)과 음악 면으로부터의 형식적 요구를 도입시켜 이른바 오페라 세리아의 전형을 이루어 놓았으나 동시에 종래 오페라의 퇴락 징조였는지도 모른다. 스카를라티에 계속되는 수세대의 나폴리의 오페라 작가가 유럽의 악단에 군림했기 때문에 그를 나폴리 악파의 아버지라고들 하지만 그의 음악형식이나 양식 면에서는 '기초를 다진' 면은 오히려 적은 것으로 생각된다. 스카를라티는 또 칸타타 등보다 더 훈련된 청중을 예상한 곡으로는 오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것 같은 반음계적 수법이라든가 대담한 조바꿈(轉調) 등을 사용하여, 당시의 음악적 표현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려고 힘썼다.

비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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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io Vivaldi(1678-1741)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의 바이올린 주자였던 조반니 바티스타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에게 음악의 초보를 배웠다. 15세로 신부(神父)가 되었으나, 본디 몸이 약하여 숨이 차서 미사를 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음악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비발디는 1703년부터 1740년에 걸쳐 대체로 베네치아의 여자고아원 겸 음악학교이던 피에타 고아원에 근무했으며 1716년에는 합주장(合奏長)이 되었고 뒤에는 합창장도 겸하였다. 이 학원의 학생들의 오케스트라는 당시 유럽에서도 명성을 떨쳤기 때문에 비발디는 마음껏 해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비발디는 그 동안에도 자작한 오페라를 상연하기 위하여 이탈리아 각지를 순회하기도 하고 빈이나 암스테르담으로 가기도 하였다. 1745년에 빈으로 간 비발디는 빈궁 속에 객사(客死)하여 그 곳 빈민묘지에 안치되었다. 이 때의 빈 방문 목적은 명확하지는 않으나 황제 카를 6세의 후원을 받으러 간 것으로 추측된다. 비발디의 이름은 그 후 아주 잊혀져 있었으나 대 바흐가 편곡한 작품이 계기가 되어 그 전모가 밝혀졌다. 그는 약 500곡이나 되는 기악작품, 약 40곡의 오페라 외에 모테토, 오라토리오, 칸타타 등을 작곡했다. 작곡은 처음에는 베네치아나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으나 대부분은 수고(手稿) 형태 외엔 남아 있지 않다. 비발디는 무엇보다 우선 토렐리(1658-1709), 아르비노니(1671-1750)들에 의하여 개발된 독주 콘체르토의 세계에서 안정된 양식을 확립시킨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 복수(複數)의 독주악기로 하는 콘체르토도 수없이 썼으나 이것은 대개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3악장으로 되었으며 전합주와 독주가 교대하는 리토르넬로 형식으로 했다.

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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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季 비발디 작곡, 작품8의 제1-4까지의 4곡. 각각 봄·여름·가을·겨울을 노래한 4편의 소네트가 지니는 시적 표현을 따라 작곡되었고 각 곡이 모두 3악장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작곡되어 있다. 표제음악이며 소네트의 말을 따라 작곡되어 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다소 불균형한 면도 있고 곡상에는 묘사적인 부분이 많다.

스카를라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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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enico Scarlatti(1685-1757) 알렉산드르 스카를라티를 아버지로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음악은 아버지에게 배운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이미 1701년에는 나폴리의 궁정예배당 오르간 주자로 임명되었다. 그 뒤로 그는 아버지와 같이 오페라 작가로 등장했으나 1708년 피렌체와 베네치아로 수업하러 갔다. 이 때 베네치아에서 독일의 헨델과 만나 오르간과 하프시코드의 경기를 하여 그 뒤부터 그와 친교를 맺었다. 1709년에 로마에 거주하고 있던 폴란드 황태후 마리아 카지미라에게 봉사했고 황태후의 소극장을 위하여 몇 편의 오페라를 작곡했지만 황태후가 로마를 떠난 후로는 포르투갈 대사의 악장을 거쳐 1715년 교황청의 줄리아 예배당의 악장이 됐다. 1719년 런던을 방문했고 다음해에 오페라 <나르키소(나르키소스)>를 상연했으나1721년에 포르투갈의 궁정악장이 되어 리스본으로 갔다. 그는 거기서 왕녀인 마리아 바르바라의 하프시코드의 교사로도 근무하였다. 한때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나 1729년 마리아 바르바라가 에스파냐 왕자와 결혼했을 때 그녀를 따라 마드리드로 갔다. 그리고 결국 마드리드에 정주하여 그 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스카를라티는 오페라·교회음악 등도 작곡했으나 그의 이름은 무엇보다도 약 555곡이나 되는 하프시코드곡이다. 이것들은 주로 마리아 바르바라를 위하여 작곡된 것으로 연습곡이라고 불렸으나 오늘날에는 소나타라고도 한다. 이들 소나타는 2부분형식으로 된 1악장으로 되어 있으나 화성구조나 복주제(複主題)의 징조도 보인 점 등 후의 고전파 소나타의 원형을 보이고 있는 면이 현저하며, 대체로 이것은 이미 로코코풍으로 되어 있으며 3도나 6도, 양손의 교차 등 후의 피아노 기법이 퍽 활발히 개척돼 있다.

타르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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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useppe Tartini(1692-1770) 저명한 바이올린 주자이며 작곡가이다. 아버지는 피렌체의 귀족 출신이며, 경제적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1709년 17세로 북이탈리아의 파도바 대학에 입학하여 법률학을 전공했으나 곧 음악과 펜싱에 열중하여, 특히 펜싱 명수로 이탈리아에서 유명해졌다. 1713년, 21세 때 엘리자베타 프레마초레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으나 이 일이 프레마초레의 보호자였던 유력한 추기경의 노여움을 사서 체포명령이 내렸기 때문에 파도바를 퇴거하여 각지를 방랑하다가, 중부 이탈리아 아시지에 주거를 정하고 바이올린과 작곡 공부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바이올린 주법을 연구했고 또한 유명한 바이올린 소나타 <악마의 트릴>을 작곡하는 등 현저한 진보를 보였다. 1715년 23세 때, 허락을 받고 부인이 기다리는 파도바로 돌아와 음악가로 활약하여 점점 명성을 떨쳤다. 한편 연찬을 거듭한 뒤 1721년 4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예배당의 수석 바이올린 주자가 되어 예배당 합주단·합창단을 지도하였다. 1728년 그 곳 바이올린 학교를 설립하여 바이올리니스트의 조직적인 양성에 나섰다. 교육활동을 하는 한편 이탈리아 각지를 연주여행했으며 그의 명기를 피로(披露)하였다. 1755년 63세 때는 간절한 요망으로 파리와 런던을 방문하여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중풍으로 1770년 2월 26일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작곡가로서의 타르티니는 이탈리아 바로크 최후의 바이올린 음악의 대가로서 중요하다. 그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형식이나 양식적인 면에서 새로운 맛은 보이지 않지만 우아한 멜로디와 간결한 화성에 독특하고 유화한 분위기가 있고 신선한 매력이 넘치고 있다. 교육자로서는 음악학교를 설립하여 후진지도에 임한 외에 <화성론> 등의 우수한 저서를 출판하여 후세에 영향을 미쳤다.

악마의 트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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惡魔-Trill 타르티니 작곡(1713). 그의 대표작이다. 아시지에서 새로운 바이올린 주법의 연구에 심혈을 다하고 있을 무렵 한밤의 꿈에 악마가 소나타를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 잠에서 깬 타르티니는 기억을 더듬어 그 소나타를 악보에 기록했는데 바로 그것이 <악마의 트릴>이다. 그 호칭은 최후의 제3악장에서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기 매우 어려운 트릴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꿈속에서 악마에게 배웠다 하여 작가 자신에 의하여 붙여진 것이다.

페르골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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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vanni Battista Pergolesi(1710-1736) 장중한 바로크 음악양식으로부터 명쾌한 고전파양식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활약한 단명한 천재적 작곡가이다. 중부 이탈리아 출신으로 소년시대에 현저한 재능을 보였기 때문에 영주의 경제적 원조를 얻어 나폴리에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웠다. 바이올린에 뛰어났으며 특히 그의 즉흥연주는 교사들이 감탄해 마지 않는 것이었다고 한다. 1731년 21세로 음악원을 졸업하였다. 오페라 및 종교음악의 작곡가로서 데뷔했으나 그 뒤 불과 5년간 작곡가로 활약한 데 지나지 않았다. 한동안 나폴리 귀족의 악장으로 일했으나 그 동안 나폴리의 오페라 극장에도 진출하여 1733년에 발표한 막간극(幕間劇) <마님이 된 하녀>의 성공으로 페르골레시의 이름은 곧 전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죽은 후 파리에서 상연된 <마님이 된 하녀>가 루소를 중심으로 이른바 '부퐁 논쟁'을 야기시킨 일은 유명하다. 1734년 2월, 24세의 젊은 나이로 나폴리시의 예배당 악장 대리에 취임했다. 그러나 1735년경부터 지병(持病)인 폐병이 악화되어 다음해 2월 의사의 권유로 전지요양을 떠났으나 3월 16일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풍은 장대한 구성력이 부족한 점이 있다 해도 멜로디의 매끄러움, 신선한 아름다움과 풍부한 화성의 뉘앙스, 그리고 섬세함으로 걸출하다. 특히 성악의 텍스처(書法)는 광채를 느낄 수 있다.

마님이 된 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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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女 페르골레시 작곡으로, 그의 일생일대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18세기 후반에 볼 수 있는 오페라 부파의 전성 계기를 만든 역사적 작품이다. 등장인물은 불과 세 사람이고 게다가 한 사람은 벙어리여서 전혀 노래를 하지 못한다. 오케스트라도 현악기만으로 된 소규모이다. 전부가 2막으로 되었다. 나폴리의 부호 우베르트는 하녀인 세르피나가 너무나 횡포를 부려, 결혼하여 세르피나를 내보내려고 결혼상대를 구해 오라고 세르피나에게 명령한다. 세르피나는 한 계략을 생각하여, 벙어리 하인 베스포네의 힘을 빌려 멋지게 우베르트의 부인으로 들어앉는다는 줄거리이다.

보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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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igi Boccherini(1743-1805) 첼로의 명수이며 작곡가이다. 작곡가로서는 실내악곡을 중심으로 교향곡, 협주곡 등의 기악곡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하이든'이라고 했다. 음악가인 아버지로부터 기초를 배워 곧 첼로의 명수로 성장한 보케리니는 친구인 바이올리니스트와 더불어 연주여행을 떠나 북이탈리아와 빈을 거쳐 1767년 파리에 도착, 다음해 연주와 작곡의 양 분야에서 파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보케리니의 나이 25세 때이다. 이와 같은 호평으로 에스파냐에 초청되어 1769년 마드리드로 옮겨 정주하였다. 에스파냐 황제 전속의 작곡가·연주가로서 활약했으나 1785년 황제가 별세한 뒤로는 점차로 잊혀져 궁핍한 가운데 1805년 5월 28일 타향 마드리드에서 62세로 일생을 마쳤다. 첼로의 명수였던 보케리니는 첼로의 연주기술을 높임과 동시에 협주곡이나 실내악곡에 있어서 첼로의 역할을 확대하고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첼로 협주곡 내림나장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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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lo 協奏曲變-長調 보케리니 작곡. 그의 대표작으로 하이든의 유명한 <첼로 협주곡 라장조>와 함께 18세기의 대표적인 첼로 협주곡으로 되어 있다. 첼로의 기교가 찬연하게 구사되어 있는 명곡이다. 다만 요즈음 널리 연주되고 있는 것은 보케리니의 오리지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유롭게 개정한 판(版)이 사용되고 있는 일이 많다.

피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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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olo Piccini(1728-1800) 오페라 작곡가. 오늘날 그의 오페라는 거의 상연되는 일이 없으나 18세기 후반에 파리에서 활약했고, 글루크의 대항적 존재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동일 대본으로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아>를 글루크와 경작(競作)하여 두 사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두 파로 갈려 이른바 '글루크 피치니 논쟁'을 일으킨 것은 유명하다. 만년은 프랑스 정부가 주는 연금을 받았고, 파리 음악원의 감독으로 후진지도에 힘썼다.

치마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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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enico Cimarosa(1749-1801) 오페라 작곡가. 18세기의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것을 로시니에게 전승(傳承)한 공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남다른 악재(樂才)를 보였으므로 나폴리의 음악원에 입학이 허락되어 여기서 이탈리아 여러 대가의 성악양식을 완전히 몸에 익혀 1772년, 22세로 음악원을 졸업하였다. 그 해에 발표한 오페라로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일약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국외로부터의 초빙이 있어 1787년 37세로 러시아의 여황제 에카테리나 2세의 궁정작곡가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 1791년 러시아에서 귀국하는 도중 오스트리아 황제의 초청으로 살리에리의 후임으로서 빈 궁정악장이 되었다. 여기서 걸작 오페라 부파 <비밀결혼>을 써서 창작활동의 정점에 달하였다. 1793년 나폴리로 돌아와 나폴리의 궁정악장에 취임하였다. 그 뒤 공화제혁명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감금됐다가 1800년 나폴리에서 추방되었다. 감금되었을 때 건강을 해친 것이 원인이 되어 다음해 1월 11일 베네치아에서 급사하였다. 너무 갑작스런 죽음으로 나폴리 왕에 의한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져 그 때문에 정부는 사인조사를 했어야 했다. 치마로자의 오페라는 풍부한 멜로디와 등장인물의 기지에 넘친 생생함에 매력이 있다. 그러나 성서의 깊이와 음악적 구성력에 다소 결점이 있어 그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그 작품은 상연되는 일이 적다.

파이지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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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vanni Paisiello(1740-1816) 치마로자, 페르골레시와 함께 이름난 18세기의 오페라 부파의 작곡가이다. 나폴리에서 활약하였으며 1776년 36세로 러시아의 여황제 에카테리나 2세에 초빙되어 궁정지휘자 및 이탈리아 오페라 감독이 되었다. 그동안 오페라 부파 <세비야의 이발사>를 작곡했는데, 이는 로시니에 의한 동명의 명작이 쓰일 때까지 절대적 인기를 얻었다. 1784년 나폴리로 돌아왔으며 뒤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초빙되어 한동안 예배당 악장으로 일했다. 그 오페라는 성격묘사의 교묘함과 오케스트라의 극적 용법으로 알려져 있다.

살리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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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io Salieri(1750-1825) 오페라 작곡가. 빈에서 활약했고, 글루크의 후임으로 있으면서 빈 궁정악장으로 일했다. 베토벤, 슈베르트, 후멜, 리스트의 작곡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모차르트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그 때문에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이는 사실무근이다. 그의 오페라는 글루크의 영향을 받아 극적 박력에 차있음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작품은 오페라 외에 미사, 오라토리오, 기악곡 등이 있다.

클레멘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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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zio Clementi(1752-1832)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 신동(神童)으로 9세에 오르가니스트 지위를 차지했고, 12세에 오라토리오와 미사 등 복잡한 큰 곡을 작곡하여 출생지 로마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4세에 영국에 건너가 더욱 연찬을 쌓아 21세에 런던에서 데뷔하여 명피아니스트의 이름을 날렸다. 1781년 29세 때 유럽 각지로 연주여행을 떠났을 때 빈에서 25세의 모차르트와 피아노 경연을 벌인 이야기는 유명하다. 모차르트는 클레멘티 연주를 "기계적이며 음악성이 없다"라고 평했으나 클레멘티측에서는 모차르트를 정당하게 평하였다고 한다. 이후 런던을 중심으로 활약하여 후진지도에도 힘을 써서 유능한 제자를 키워냈다. 클레멘티의 역사적 역할은 근대적인 피아노 연주기술을 확립한 점에 있다. 피아노 연습곡의 명저 <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슴>은 오늘날도 사용되고 있다. 또한 베토벤은 클레멘티의 피아노 소나타를 아껴 간결한 형식, 정신의 새로움 등 배울 점이 많다고 칭찬했다.

케루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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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igi Cherubini(1760-1842) 오페라와 종교음악 작곡가. 이탈리아에서 배운 뒤 영국·프랑스에 초빙되었고, 1788년 28세 때 파리에 정주했으며 프랑스인의 취미에 맞는 화려한 오페라를 작곡하여 인기를 모았다. 1795년 파리에 창설된 파리 음악원의 감독에 취임했고, 그 뒤 한동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음악감독으로도 있었으나 나폴레옹과 의견이 맞지 않아 퇴직하였다. 1822년 파리 음악원 원장이 되었다. 천재소년 리스트의 입학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1841년 노령 때문에 원장직을 사임, 그 동안 빈이나 런던을 방문하여 자기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대표작은 오페라 <메디아>(1797)와 <물긷기>(1800)로 베토벤은 케루비니의 오페라를 높이 평가했고 성악의 취급에 관하여 큰 영향을 받았다.

파가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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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colo Paganini(1782-1840) 초인적인 기교로 바이올린 연주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이다. 그의 입신(入神)의 기(技)가 청중을 열광시켜 19세기의 연주계에 명인거장 시대를 출현시킨 계기가 되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10대 초에, 이미 종전의 연주기법의 대부분을 마스터한 파가니니는 15세가 되자 하루 10시간 이상의 격심한 연습으로 혼자서 새로운 연주기법을 습득해 나갔다. 그의 노력이 결실하여 1799년 17세에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곧 명성과 부(富)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급속한 성공으로 자만에 빠진 소년 파가니니는 방탕과 도박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거액의 빚을 져서 결국 연주에 필요한 바이올린마저 잃게 되는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성에서 동거생활을 보냈으나 그동안 연주회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애인 살해죄로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사실은 이 기간에 건강 회복을 기도하면서 하모닉스나 중음주법, 스타카토 등의 새로운 주법을 개척하고 있었다. 1804년 22세 때 출생지 제노바로 돌아와 다음해부터 다시 연주활동을 개시하여 이전보다 더한 칭송을 받았다. 그 명성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누이동생에게 초대되어 보케리니의 출생지 룩카의 궁정 가극장에서 3년간의 지휘생활을 보냈다. 1808년 26세 때부터 1828년의 46세까지 20년간에 걸쳐 이탈리아 각지로 연주여행을 하였으며 종전의 바이올린 개념을 훨씬 초월한 입신(入神)의 기(技)를 펴냈고 청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묘기는 이탈리아 이외의 각지로 퍼져나가 파가니니의 이름은 온 유럽 음악애호가들의 입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1828년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국외 연주여행을 하였다. 3월 말 빈에서 있었던 연주회는 미증유의 대성공을 거둬, 파가니니의 이름을 팔아 상점마다 '파가니니 스타일'이라는 양복·모자·장갑·구두 등이 범람하였다. 다음해 1829년 베를린에서도 이러한 성공을 거둔 파가니니는 독일 각지를 순회한 끝에 폴란드로 갔고 또 1831년엔 파리, 이어 영국으로 건너가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박수로 환영을 받았다. 1832년 가을, 5년에 걸친 연주여행으로부터 귀국하여 북이탈리아의 팔마를 안주의 땅으로 정하였다. 만년은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왕복하면서 연주활동을 하는 한편 프랑스의 악보출판상에 자작의 작품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파가니니가 요구하는 인세가 너무 높아 출판은 진척이 안되었고, 결국 파가니니의 생전에 출판된 작품은 극히 적다. 더욱이 출판된 작품이 적은 것은 파가니니가 자기 연주기법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것과 관계가 있다. 1834년 1월 파가니니는 신진 작곡가로 세상의 주목을 끈 베를리오즈를 파리에서 만나 자신의 비올라를 위한 비올라 협주곡의 작곡을 의뢰했다. 완성된 작품은 파가니니의 기대만큼 비올라의 역할을 화려하게 다루지 않았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아 파가니니는 이를 <이탈리아의 하롤드>로 발표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무렵부터 파가니니의 건강은 좋지 않아 연주활동도 뜸해져 1840년 5월 27일 인후결핵으로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57세로 일생을 마쳤다. 작곡가로서의 파가니니는 오늘날에는 높이 평가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작품에서 그가 항상 사용한 중음주법, 프라지오레토,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극단적인 대비, 왼손으로 연주하는 피치카토 등은 바이올린의 표현력을 한층 빛나는 것으로 높였다. 대표작으로는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무반주 <24의 카프리치오>를 들 수가 있다. 파가니니의 초절적인 기교에 자극된 19세기의 작곡가들, 예컨대 리스트,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등은 파가니니의 멜로디를 차용하여 많은 피아노 난곡(難曲)을 작곡했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기교를 피아노로 전용하여 피아노의 새로운 표현을 개척해야겠다는 의욕이 환기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리어 이런 점에 파가니니의 작곡가로서의 역사적인 역할이 있었다 하겠다.

로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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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acchino Rossini(1792-1868) 베르디에 앞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양식적 완성으로 이끈 작곡가. 양친이 모두 음악가이다. 1806년 14세로 볼로냐 음악원에 들어가 18세인 1810년에 졸업했고 그해 오페라 부파 <약혼어음>이 베네치아에서 초연되어 일찍이 오페라 작곡가로서 주목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1829년의 최후의 오페라 <빌헬름 텔>까지 매년 많이 작곡한 해에는 4곡씩이나 오페라를 발표하여 급속히 인기를 높였다. 1810년부터 1829년까지 오페라가 1곡도 작곡되지 않은 해는 2년밖에 안 된다. 오페라 부파 <시금석>(1812)의 성공으로 병역이 면제된 로시니는 이미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1813)으로 성공을 한층 확실하게 만들었고, 1대의 걸작 <세비야의 이발사>(1816)로 오페라 사상 불후의 명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1816년 2월 20일에 초연된 <세비야의 이발사>는 이미 선배작곡가 파이지엘로로 된 동명의 명작이 있었기 때문에 파이지엘로 일파의 방해를 받아 실패로 끝났으나, 다음날 청중의 열렬한 박수를 받아 그 후 파이지엘로의 작품을 압도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로시니의 명성은 국외에도 퍼져 1822년 빈을, 다음해인 1823년에는 런던을 방문하여 선풍을 일으켰다. 빈에서 거장 베토벤을 면회했을 때 만년의 거장의 고독함을 보고 마음 아프게 생각하여 빈 유지들에게 베토벤의 대우개선에 대해 각별히 요망했을 정도이다. 1823년 베네치아에서 상연된 <세미라미데>는 평판이 좋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계기로 로시니는 고국 이탈리아를 떠나 파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파리에서는 이탈리아 극장의 음악감독에 취임하였고 동시에 프랑스인 취미에 맞는 오페라를 작곡하게 되어 실러의 원작으로 된 <빌헬름 텔>을 작곡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성공의 정점에서 로시니는 돌연 오페라 작곡을 중지하였다. 인기의 절정에 있던 그가 왜 오페라 집필을 중지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로 되어 있다. 1830년 38세 때부터 로시니는 때로 소품을 작곡할 정도였을 뿐, 과거와 같이 왕성한 창작력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만년의 대작인 <슬픔의 성모>(1842)에는 로시니의 뛰어난 드라마틱한 작곡법을 인정할 수 있다. 1836년 이탈리아로 귀국하였다가 1855년 다시 파리로 돌아와 그 곳에서 76세로 일생을 마쳤다. 로시니의 오페라, 특히 경묘(輕妙)한 오페라 부파는 무엇보다도 유창하고 생생한 멜로디가 특색이며 매력으로 넘쳐 있다. 등장인물의 성격묘사도 뛰어났고 음악적인 효과도 화려하여, 특히 흥분의 도를 높이는 수단으로서의 '로시니 글리산도'라고 하는 기법은 유명하다. 또 오케스트라의 사용법도 교묘하여 밝은 음빛깔을 살린 쾌활하고 원기에 찬 표현은 오늘날도 종종 연주되는 <비단 사다리>, <세비야의 이발사>, <세미라미데>, <빌헬름 텔> 등의 서곡에서 엿볼 수가 있다.

세비야의 이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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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villa-理髮師 로시니 작곡(1816). 불과 13일 만에 완성한 로시니의 특색이 최대한으로 발휘된 오페라 부파이다. 17세기 에스파냐의 세비야 마을. 그 곳의 영주 알마비바 백작은 방탕한 나머지 바르톨로가 후견하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 로지나에 반해 결혼하려고 한다. 그런데 바르톨로도 로지나와 결혼하려고 생각하므로 백작이 로지나에게 접근하는 것을 방해한다. 생각다 못한 백작은 재치있는 이발사 피가로에게 이 일의 해결을 부탁한다. 피가로는 바르톨로 몰래 바르톨로의 집에서 백작과 로지나를 만나게 하는 데 성공한다. 로지나는 백작부인이 되고 피가로는 백작의 하인이 되어 백작의 성으로 떠난다. 원작을 쓴 사람은 프랑스의 극작가 보마르셰. 한편 모차르트의 유명한 <피가로의 결혼>은 보마르셰가 쓴 희곡을 오페라로 한 것이다.

도니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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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etano Donizetti(1797-1848) 로시니와 동시대에 활약한 오페라 작곡가. 볼로냐 음악원에서 로시니의 후배이며, 처음에는 로시니의 모방에 그치고 있었으나, 로시니가 오페라 창작의 붓을 놓은 뒤부터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아버지의 의향에 반하여 음악가를 지망하였기 때문에 생활을 위해 군에 입대하였고, 군무의 틈을 타 오페라 작곡에 힘썼다. 1823년 25세로 제대, 오페라 작곡가로서 입신하여 이탈리아 각지에서 해마다 새 작품을 발표하여 점차 지위를 굳혔다. 로시니 이상으로 속필이며, 로시니가 <세비야의 이발사>를 쓰는 데 13일간이나 걸렸다니 정말 게으름쟁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830년대에 들어서 기법은 원숙하여 오페라 부파로는 <사랑의 묘약>(1832), <연대(聯隊)의 딸>(1840), <돈 파스콸레>(1843) 등을 내놓았고 한편 오페라 세리아로는 <루크레치아 보르지아>(1834), <루치아>(1835) 등을 남겼다. 빈이나 파리에서도 활약했지만 1845년경부터 신경성 마비로 고향인 베르가모로 돌아와 1848년 4월 8일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도니체티의 오페라는 명가수가 배출된 시대에 작곡되었기 때문에 성악의 기교를 과시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며 그것은 예컨대 <루치아>의 유명한 <광란의 장>에서 전형을 볼 수가 있다. 한편 <사랑의 묘약>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려 감미로운 멜로디의 창작에도 뛰어났다. 어쨌든 도니체티의 궁극적 목적은 가수의 아름다운 소리를 어떻게 발휘하느냐 하는 방법의 탐구에 있었다.

사랑의 묘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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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妙藥 도니체티 작곡(1832)으로 2주 만에 완성되었다.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을 무대로 펼쳐지는 연애이야기이다. 부잣집 딸 아디나는 농부 네모리노와 중사 베르코레로부터 구혼을 받는다. 행상인 약장수에게 값싼 포도주를 미약(媚藥)이라고 하여 속아 산 네모리노는 기분이 들떠 아디나에게 질투심을 일으켰고 그녀는 베르코레와 결혼할 마음을 먹는다. 아디나가 자기에게 반하지 않는다고 하여 약의 효용을 의심하는 네모리노를 약장사는 효능은 금방 안 나타난다고 속인다. 베르코레와 아디나의 결혼식날 본심으로는 네모리노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아디나는 결혼계약서에 서명하지 않는다. 마침 네모리노의 백부가 죽어 큰 돈이 네모리노에게 들어올 것을 안 동네아가씨들은 그를 좋아한다. 아디나는 네모리노한테 버림받았다고 비관하나 네모리노에게 위안을 받아 그의 본심을 알았고, 네모리노와 결혼하기로 한다. 이를 안 동네 사람들은 미약의 효능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다투어 미약 아닌 값싼 포도주를 사댄다.

루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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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a di Lammermoor 도니체티 작품(1835). 영국의 문호 월터 스콧의 <람메르무어의 새색시>로 된 오페라. 17세기의 스코틀랜드를 무대로 귀족의 세력 다툼으로 희생이 된 연인들의 비극을 묘사한 작품이다. 루치아는 선조대대의 원수인 당시의 영주 에드가르도와 사랑에 빠진다. 이를 안 루치아의 오빠 엔리코는 보신상 루치아를 무리하게 정부의 유력자와 결혼시킨다. 결혼식날 밤 발광한 루치아는 신랑을 찔러죽이고 연인 에드가르도를 찾으며 마침내 광사(狂死)한다. 루치아의 죽음을 들은 에드가르도도 슬픈 운명을 탄식하면서 스스로 가슴을 찔러 루치아의 뒤를 따른다.

벨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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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cenzo Bellini(1801-1835) 도니체티와 같은 시대에 활약한 오페라 작곡가. 1810년과 1820년대를 로시니의 시대라 하면 1830년대는 도니체티와 벨리니의 시대이다. 그리고 1840년대 후반부터 벨리니의 시대가 열린다. 벨리니는 시칠리아섬 출신으로 나폴리의 음악원에서 배웠고, 1827년 25세로 밀라노 스칼라극장에서 상연한 <해적>의 성공으로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이후 <몽유병의 여인>(1831), <노르마>(1831) 등의 명작을 발표한 뒤 파리로 가 파리의 청중을 위해 최후의 오페라 <청교도>(1855)를 작곡하여 큰 성공을 거둔 지 불과 8개월 뒤 파리에서 33세의 짧은 일생을 마쳤다. 파리 시대의 벨리니는 쇼팽과 친교가 있었고 연하의 쇼팽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확실히 두 사람의 음악에는 오페라와 피아노 음악의 상이점이 있다 해도 벨리니의 온아함과 섬세함, 취미의 고상한 점 등으로 상통되는 데가 있다. 벨리니의 오페라의 매력은 역시 선율에 있으나 도니체티보다 음과 말의 연결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단순히 소리를 위한 선율미에 그치지 않고 또 선율미도 한층 정서에 넘쳐 때때로 우수를 띤 점에 특색이 있다. 또한 오케스트라도 중요시되어 성악도 협력하여 극적 효과를 높여간다는 점, 바른 의미에서의 극음악 작곡의 이름에 합당한 것이다.

노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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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ma 벨리니 작곡(1831). 그의 대표작으로 극적 박력은 베르디 이전의 오페라에서는 드물게 보는 것이다. 기원전 1세기의 로마 지배하에 있는 갈리아 지방. 이 곳의 두루이드교도들은 로마의 지배에 적의를 품고 기회를 노려 반항운동을 일으킨다. 노르마는 두루이드교 최고의 수녀이면서 로마 총독과 관계를 맺어 두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최후에 노르마는 사적인 애정 때문에 신성한 법에 위배했고 신을 속인 것을 깨닫고 스스로 제물의 화장대에 오른다.

베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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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useppe Verdi(1813-1901) 이탈리아 오페라 사상 최대의 작곡가. 소리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을 밟아 오케스트라 및 연극적 효과를 이용하여 이탈리아 오페라에 이상적인 양식완성을 가져왔다. 공교롭게 바그너와 동년생이며, 알프스를 사이에 두고 남북에서 방법은 다르지만 이 두 사람의 거인은 '음악극'의 완성을 목표로 힘찬 그러나 고난의 길을 내디딘 것이다. 베르디는 북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1813년 10월 10일 태어났다. 아버지는 행상인 상대로 조그마한 여인숙 겸 잡화상을 경영하였다. 소년시절의 베르디에게는 이른바 천재소년다운 에피소드는 아무것도 전해져 있지 않다. 시골에서는 다소 그 음악적 재능이 눈에 띌 정도였다. 1832년 5월 18세 때 고향을 떠나 밀라노로 가서 밀라노 음악원의 입학시험을 보았으나 실패했다. 음악원의 판정은 첫째로 음악원의 입학자격 연령을 4세나 초과한 것, 둘째는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르디의 음악은 서투르고 소박하다 하였다. 결국 베르디는 밀라노에서 개인교수를 받아 작곡공부를 시작했다. 다음해 베르디에게 기회가 왔다. 밀라노 악우협회(樂友協會)가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연주했을 때 베르디는 대리지휘자 역할을 했는데 이 때의 역량이 인정되어 악우협회로부터 오페라 작곡을 의뢰받은 것이다. 이리하여 최초의 오페라 <산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가 작곡될 예정이었으나, 1834년에 베르디는 취직차 일단 귀향하였고 그리고 1836년 아버지 친구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이 동안에도 밀라노의 화려한 오페라 분위기를 잊을 수가 없어 1839년 처자를 데리고 밀라노로 이주하였다. 이 해 <산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가 밀라노 스칼라극장에서 초연되어 다소의 성공을 거뒀다. 26세의 일이었다. 유명한 악보 출판업자인 조반니리코르디가 이 오페라의 출판을 신청해 왔고, 스칼라 극장에서도 3편의 오페라의 작곡을 의뢰해 왔다. 전도가 양양하였으나 아들과 처를 차례로 잃어버리고, 더욱이 스칼라 극장이 오페라 부파를 작곡해 줄 것을 요구했기에 구상을 변경해서 <하루 만의 임금님>을 작곡했으나 무참히 실패하여 자신을 잃은 베르디는 한때 작곡을 단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친구들의 원조나 조언으로 베르디는 이 위기를 극복하여 1842년부터 1850년에 걸쳐 14곡의 오페라를 썼다. 이러한 작품 가운데에는 <제1회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1843), <에르나니>(1844), <잔 다르크>(1845), <레냐노의 전쟁>(1849) 등 애국적인 독립정신을 구가한 작품이 특히 뛰어났다. 당시의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나 프랑스의 압박하에 있어 완전한 독립국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물론 이탈리아 독립운동의 외침도 점차 높아졌으나 베르디의 오페라는 그러한 이탈리아인들의 기분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베르디는 오페라에 애국주의를 주입함으로써 오페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 시기의 베르디는 이탈리아인으로서 참으로 애국의 상징이었다.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국외로부터도 초청되어 런던이나 파리에서 자작을 상연하여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표적 작곡가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늘날 이 오페라들은 베르디의 대표작으로는 생각되고 있지 않다. 사실 19세기 중엽의 이탈리아인들을 열광시킨 것은 사실이나 베르디가 참으로 원숙된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모습을 보인 것은 1850년 이후의 일이다. 1850년 37세의 베르디가 40일 동안 단숨에 작곡해낸 <리골레토>는 다음해 3월 베네치아에서 초연되어 오페라 사상 드물게 보는 영광을 불러일으켰다. 베르디도 다소 자신을 가졌던 듯하며 특히 유명한 아리아 <여자의 마음>은 초연 전에 거리의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무대연습 때에도 가수에게 악보를 주지 않고 초연의 전야 겨우 악보가 주어졌다고 한다. 베르디의 생각대로 이 아리아는 1세를 풍미한 명가가 되었고 그의 명성은 더욱더 상승했다. <리골레토> 이후의 베르디는 그의 독특한 선율미와 극적 구성력을 마음껏 구사하여 여러 가지 인간감정, 등장인물을 정확히 묘사하여 여러 가지 걸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일트로바토레>(1853), <춘희>(1853), <돈 카를로스>(1867), <아이다>(1871), <오텔로>(1887), <팔스타프>(1893) 등이 그 주된 작품이다. 이와 같은 작품에서 전과 같은 애국주의는 후퇴하고 어떤 정황, 또는 환경에서의 '인간 그 자체'의 표현이 의도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인간성'을 오페라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아마 모차르트와 비견할 만한 최고봉이라 하겠다. <리골레토>, <춘희>, <아이다> 모두가 비극이나, 셰익스피어의 명작으로 된 <오텔로>는 비극 오페라의 최고봉이다. 셰익스피어가 쓴 인간성을 이만큼 훌륭히 오페라화할 수 있었던 작곡가는 아직까지 없다. 같은 셰익스피어로 된 <팔스타프>는 베르디의 유일한 희극이다. 여기에는 오페라 부파의 정신 승화, 고답적인 웃음의 교묘한 음악화가 보인다. 오페라 사상 이와 같은 불멸의 작품이 작곡된 시기에 베르디의 신변에도 잡다한 변화가 일어났다. 1859년 재혼하고 1861-1865년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국회의원이 되는 등 음악 이외의 일로 나날이 바빠졌다. 한편, 오페라 이외의 작품도 착수하였는데 최대 걸작은 이탈리아의 애국시인 만초니의 죽음을 애도하여 쓴 <레퀴엠>이다. 부와 명성에 둘러싸인 베르디는 밀라노의 호텔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1901년 1월 27일 87세의 일생을 마쳤다. 이탈리아 오페라 사상 우뚝선 이 거장, '소리'를 위하여 일생을 건 이 거장의 죽음을 슬퍼하여 장례식에는 20만이 넘는 대군중이 참가하였다고 한다.

리골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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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goletto 베르디 작곡(1851 초연).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의 희극 '일락의 왕'으로 된 비극. 인정(人情)의 기미(機微)를 그리면서 극적 긴박감을 북돋우는 데 부족함이 없다. 들을 만한 곡은 많으나 지루다의 아리아 <그리운 그 이름은>, 리골레토의 아리아 <악마를 보라, 도깨비를 보라>, 만토바 공작의 아리아 <여자의 마음> 등은 특히 유명하다. 주요 내용을 보면, 북이탈리아의 만토바 공작의 궁정. 만토바 공작은 여성을 정복함으로써 삶의 보람을 느끼고 있는 방탕아. 꼽추인 리골레토가 아름다운 첩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여자를 유괴해 오도록 명한다. 여자는 바로 리골레토가 공작의 눈에 띄지 않게 숨기고 있던 딸 질다였다. 그러나 질다는 학생으로 변장한 공작을 공작인 줄 모르고 사랑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안 리골레토는 복수를 맹세하여 자객인 스파라프칠에게 공작의 암살을 부탁한다. 그러나 공작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는 질다가 공작 대신 죽어 리골레토는 딸의 시체를 보고 기절한다.

라 트라비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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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Traviata 우리 나라에서는 '춘희(椿姬)'로 번역된다. 베르디 작곡(1853). 프랑스의 작가 소뒤마가 쓴 동명의 비극으로 된 오페라. 4주 만에 완성되었다. <리골레토>만큼의 긴박감은 없고 감상적인 성질을 지녔으나 감미로운 음악이어서 인기는 자못 높다. <축배의 노래>, 비올레타의 아리아 <아아 그대였던가>와 <꽃에서 꽃으로> 등이 유명하다. 춘희라고 하는 파리의 고급창부 비올레타는 프로방스 지방의 명문 출신의 순진한 청년 알프레도를 알아 생활을 같이하게 된다. 그러나 알프레도의 아버지의 간곡한 소망으로 사랑하는 알프레도의 곁을 떠난다. 진상을 모르는 알프레도는 비올레타가 변심한 줄 알고 그녀를 미워한다. 마침내 비올레타가 죽은 자리에서 알프레도는 모든 것을 알았고, 또 아버지도 비올레타의 진심을 인정하여 '딸아' 하고 부른다.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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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da 베르디 작곡(1871). 수에즈운하 개통기념축전의 일환으로 이집트 국왕의 의뢰로 작곡되어 카이로에서 초연된 비련의 이야기이다. 웅대·호장한 무대가 이 오페라의 볼 만한 것 중의 하나다. 발레나 코러스를 많이 넣은 이 오페라는 성악중심의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과 무대의 시각적 요소를 존중하는 프랑스·오페라 양식을 융합하여 지금까지 작곡된 베르디의 모든 작품을 능가한다. 이집트의 장군 라다메스는 에티오피아 정벌을 위해 군을 이끌고 출진한다. 이를 전송하는 군중 속에 아이다가 있다. 그녀는 에티오피아 왕의 딸로 볼모가 된 몸이나 라다메스를 사랑하며, 연인이 승리하면 아버지와 조국이 멸망하고, 아버지가 승리하면 연인은 죽는다라는 괴로운 입장에 놓여 있다. 라다메스는 승전하였고 에티오피아 왕을 포로로 잡아 개선을 하며 전공으로 왕녀 암네리스와의 결혼을 허락받는다. 그러나 아이다를 사랑하는 라다메스는 그 결혼을 좋아하지 않는다. 질투한 암네리스는 라다메스를 반역자로 체포한다. 재판 결과 돌 감옥에 생매장된 라다메스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곳에 숨어 있던 아이다가 나타나 그와 죽음을 같이한다.

바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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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io Bazzini(1818-1897) 바이올린 주자이며 작곡가이다. 파가니니에게 인정되어 주로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바이올린 주자로서 활약했고 만년에는 밀라노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원장이 되었다. 바이올린을 위한 많은 곡을 작곡하였으나 <요정(妖精)의 론도>는 지금도 수시로 연주된다.

보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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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rigo Boito(1842-1918) 작곡가인 동시에 뛰어난 대본작가이다. 베르디의 <오텔로>, <팔스타프>, 폰키엘리의 <조콘다> 등의 명작 대본작가로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작곡가로서는 바그너의 악극 영향을 받은 작품을 쓰고 있으나 괴테의 <파우스트>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 <메피스토펠레>가 대표작이다.

폰키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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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ilcare Ponchielli(1834-1886) 작곡가로서는 오페라 <조콘다> 하나만으로 지금까지 이름을 남겼다. 이 오페라 가운데의 관현악을 위한 <때의 춤>은 오페라에서 독립하여 자주 연주되고 있다. 오르간도 잘 연주하여, 이탈리아 각지의 대성당 오르가니스트·악장·음악원 교수로 일생을 보냈다.

토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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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sco Paolo Tosti(1846-1916) 가곡 작곡가. 19세기의 독일이나 프랑스에 비해 이탈리아에서는 가곡의 발전에 거의 볼 만한 것이 없었으나 토스티는 일생을 가곡작곡에 바쳐 서정적인 그러나 기품에 찬 가곡을 작곡했다. 대표작으로는 <세레나데>, <이상적 인물>, <꿈>, <4월> 등이 있다. 한편 한창 일할 나이의 30여 년을 영국에서 음악교육에 바쳐 그 공적으로 영국귀족이 되었다.

레온카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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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ggero Leoncavallo(1858-1919) 오페라 작곡가. 나폴리 출신이며 그 곳 음악원에서 배웠고, 18세에 졸업했다. 이후 부지런히 오페라 작곡을 하였다.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대성공에 자극되어 1890년 <광대>를 작사 작곡하였으며 이것이 1892년 5월 밀라노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어 일약 세계 오페라계에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광대> 이외의 작품은 어느 것도 인정받지 못하였다.

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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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카발로 작곡(1890).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함께 리즈모 오페라의 2대 명작이다. 일상생활을 제재로 하여 이를 사실적으로 표현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베리스모 오페라는, 마스카니, 레온카발로로 정점에 달했다. 이후 많은 베리스모 오페라가 작곡되었으나, 이 두 작품을 능가하는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시골을 돌아다니는 극단의 단장 카니오의 처에게 단원 토니오가 가까이하나 상대를 않는다. 이미 그녀에게는 젊은 정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의 관계를 안 토니오는 카니오에게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한다. 극이 시작하자 카니오는 현실과 극과의 관계가 서지 않는 심리상태에 빠져 드디어 무대 위에서 처를 죽여버린다. 놀라서 무대에 뛰어오르는 정부도 찔러 사람들의 소란 속에서 카니오는 망연히 "극은 끝났도다"라고 중얼댈 때 막이 내린다.

푸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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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acomo Puccini(1858-1924)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 이후 이탈리아가 낳은 최대의 오페라 작곡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보유하고 있다. 대대로 음악을 직업으로 하는 가계에서 태어났으나 소년시절은 특별한 음악적 재능을 보인 일도 없었고 학교성적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5세 때 아버지를 잃어 고생을 많이 하였다. 베르디의 <아이다>를 보고 감격하여 오페라 작곡가가 될 것을 결심하여 어머니와 집안의 도움을 받아 1880년 21세 때 바라던 밀라노 음악학원에 입학하여 폰키엘리와 그 밖의 스승에게 배웠다. 마스카니와 공동생활을 하면서 고학을 계속, 1883년 24세로 밀라노 음악원을 졸업하였다. 푸치니의 악재를 인정한 폰키엘리의 도움으로 졸업한 다음해 오페라 처녀작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다. 이 때문에 밀라노의 저명한 음악출판사 리콜디와 계약이 성립되어 후에 리콜디는 푸치니 작품 보급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제2의 작품은 작곡중에 어머니와 동생을 사별하는 불행으로 겨우 완성된 작품이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상연되었지만 완전 실패로 돌아갔다. 푸치니가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결정적으로 확립한 것은 아베 프레보의 원작에 따른 <마농레스코>이다. 1893년의 초연은 대성공이어서 이 한 작품으로 푸치니는 비약적인 진보를 보였다. 당시 34세로 여기까지의 행로는 일류 작곡가로서는 결코 빠르다고 할 수 없지만 그 창작의 기본적인 스타일을 확립하고부터의 향상은 참으로 눈부신 것이었다. 이리하여 푸치니는 곧 명작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명작시대는 1896년의 <라 보엠>에서 시작된다. 파리에서 생활하는 가난한 예술가 지망생들을 그린 이 오페라 속에 당시의 청중은 푸치니가 서민에 대해서 품고 있는 따뜻한 마음가짐을 알아차리고, 더욱이 그의 특유한 애수감을 띤 매력적인 선율미를 인정, 푸치니의 작품에 많은 기대를 갖게 되었다. 말하자면 베르디의 오페라가 많든 적든 정신적인 것을 청중들에게 요구하는 데 대해, 푸치니의 것은 한층 쉽게 작품 속으로 용해되는 오락적인 요소가 강하게 풍긴다. 베르디의 만년을 맞이하여 이탈리아의 청중은 푸치니에게서 베르디에 이어지는 오페라 명곡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라 보엠>에 이어 푸치니는 <토스카>(1900), <나비부인>(1904), <서부의 아가씨>(1910) 등의 대표작을 발표하였다. <토스카>와 <나비부인>의 초연은 불행히도 대실패였으나, 해가 갈수록 푸치니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어 각국의 가극장에서 다투어 상연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서부의 아가씨>는 진귀하게도 개척시대의 미국 서부에서 취재한 오페라로서, 미국에서 초연되었을 때는 호평을 받았으나 지금에 와서는 구성에 다소 난점이 있다 하여 상연되는 기회가 비교적 적다. 이들 오페라의 주역은 대부분 서민이며, 게다가 여주인공은 청중의 동정을 끌기 쉽도록 비운박행(悲運薄幸)한 인물로서 설정했다. 그뿐 아니라 비극의 여주인공에게는 서정적·감상적인 명멜로디의 많은 곡이 주어져 이런 것이 하나가 되어 푸치니의 인기를 뒷받침하고 있다. 1918년 60세를 목전에 두고 푸치니는 각각 1막으로 된 3부작의 오페라 <외투>, <수녀 안젤리카>, <지안니 스킷키>를 발표, 여전히 쇠퇴할 줄 모르는 필치를 보였다. 또 중국의 전설로 된 <투란도트>에 착수했으나 인후암 때문에 66세의 생일을 맞기 직전 1924년 11월 29일 수술 때문에 와 있던 브뤼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미완의 <투란도트>는 제자의 손에 의하여 완성되어 생전에 푸치니와 친교가 있던 명지휘자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라 보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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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oheme 푸치니 작곡(1896). 파리 학생가의 다락방이 무대. 제명인 보엠이란 방종한 예술가 기질을 말한다. 공동생활을 하고 있는 가운데 네 사람의 가난한 서생의 한 사람 인 시인 로돌포는 촛불을 빌리러 온 가난한 아가씨 미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미미가 폐병환자임을 안 로돌포는 친구인 화가 마르첼로와 그의 연인 무제타에게 가난 때문에 미미의 병을 고쳐주지 못함을 호소한다. 미미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물러난다. 수개월 후 빈사의 미미가 로돌포 등이 살고 있는 다락방에 와서 사랑하는 로돌포와 그 친구들에 싸여 조용히 숨을 거둔다. 미미가 부르는 <나의 이름은 미미>, <미미의 이별>, 무제타가 노래하는 <무제타의 왈츠>, 로돌포의 <차가운 손> 등은 특히 잘 알려져 있다.

토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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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sca 푸치니 작곡(1900). 1800년의 로마가 무대이다. 화가 카바라도시가 교회에서 성모상을 묘사하고 있는 곳에 정치범으로 체포되고 있던 친구 안젤로티가 탈옥하여 온다. 그를 은닉한 동안 카바라도시의 애인 토스카가 와서 침착하지 못한 카바라도시를 보고 마음이 들떠 있는 것이 아닌가 잘못 추측하여 질투한다. 거기에 안젤로티를 쫓는 경찰총감 스카르피아가 등장 토스카의 질투심을 선동하는 한편 카바라도시를 체포하여 고문한다. 뱃속이 음흉한 스카르피아는 전부터 마음을 두고 있던 토스카에게 몸을 허락하면 카바라도시를 석방하겠다고 제안한다. 토스카는 틈을 보아서 스카르피아를 죽여 카바라도시가 총살되는 장소로 달려갔으나 카바라도시는 총살되었고 게다가 스카르피아 살인범으로 토스카에게 추격이 임박해진다. 결국 토스카는 성에서 자살한다. 토스카의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카바라도시의 <오묘한 조화>, <별은 빛나고>는 유명한 아리아로 특히 인기가 있다.

나비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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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ama Butterfly 푸치니 작곡(1904).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를 무대로 한 슬픈 사랑의 이야기. 다른 오페라에서는 볼 수 없느 동양적 색채가 풍부한 명작이기 때문에,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푸치니의 오페라에서 상연횟수가 가장 많은 작품으로 되어 있다. 푸치니의 선율미는 가는 곳마다 효과적으로 나타나 있으나 그 중에서도 나비부인이 부르는 아리아 <어느 갠 날에>가 명(名)아리아로서 이름높다.

마스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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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tro Mascagni(1863-1945) 레온카발로와 함께 베리즈모 오페라의 대표적 작가이다. 빵집 아들로 태어나, 법률계로 진출시키려던 아버지의 의사에 반하여 음악에 친근, 드디어 초지를 관철하여 음악의 길에 들어섰다. 밀라노 음악원에서는 폰키엘리에게 사사하여 푸치니와 동문이 되었고 고학생으로 공동생활을 영위한 일도 있다. 그러나 지방순회의 오페라단에 가담하여 그 지휘자로 있으면서 오페라와 친해졌다. 1889년 로마의 손초노 음악출판사가 모집한 1막짜리 오페라 현상에 이러한 경험을 살려 작곡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출품하여 1등상을 획득했다. 이 오페라는 다음해인 1890년에 로마에서 초연되어 기록적인 대성공을 하여 당시 26세의 청년음악가 마스카니는 일약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스타 자리에 올랐다. 이탈리아 이외의 각국에서도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어 곧 마스카니의 명성은 세계적인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이후 작곡된 오페라는 어느 것도 큰 성공을 못 하였고, 겨우 <나의 벗 피리츠>가 알려진 데 불과하다. 만년은 불우하여 무솔리니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전재산이 몰수되었고 1945년 8월 2일 제2차세계대전 종결 직전에 로마에서 81세의 일생을 마쳤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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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valleria rusticana 마스카니 작곡(1889).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라 함은 <시골의 기사도>라고 해둘 정도의 뜻이다. 1막짜리 짧은 오페라이면서 심한 긴박감에 넘쳐 있으며 한편 유명한 <간주곡>에서 보듯이 서정적인 선율미도 풍부한 효과를 올리고 있다. 그 대조감이 강렬하다. 작품이 오페라로서는 예외적으로 짧기 때문에 같은 베리스모 오페라인 레온카발로의 <광대>와 함께 상연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시골 청년 투리두가 제대하여 돌아오자 입대 전의 애인 롤라는 이미 마찻집 알피오와 결혼하고 있었다. 순정의 처녀 산투차와 새로운 사랑 속에 살려고 하나 롤라를 잊을 수가 없었다. 산투차는 질투한 나머지 롤라와 투리두의 사이를 알피오에게 알린다. 알피오는 투리두에게 결투할 것을 요구하여 투리두를 죽이고 만다.

부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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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ruccio Benvenuto Busoni(1866-1924)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 역사적인 피아노 명수로서 다망한 연주활동을 했고 또한 저명한 교사로서 후진지도에 힘쓰는 한편 작곡도 했다. 그 작풍은 바흐나 모차르트의 정신에 현대인의 입장에서 접근해 간 것으로 매우 고전적이나 보통 작곡가로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칠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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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sco Cilea(1866-1950) 오페라 작곡가. 나폴리 음악원에서 배우고 졸업 후 이탈리아 각지의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주로 오페라 작곡에 주력했다. 대표작으로 오페라 <아를의 여인>(1897), <아드리아나·루크부르루>(1902)가 있다. 서정적 표현에 불안한 것이 있다.

볼프 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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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manno Wolf-Ferrari(1876-1948) 아버지는 독일사람, 어머니는 이탈리아 사람이다. 화가였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미술을 배웠으나 음악에 흥미를 나타내 1893년 17세 때 독일에 유학하여 작곡을 배웠다. 1899년 고향인 베네치아로 돌아와 작곡활동을 시작했다. 1900년 24세 때 최초의 오페라가 베네치아에서 상연되었고 이후 오페라 작곡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오페라 부파의 작곡을 특기로 했으나 오늘날에는 베리스모 오페라 작풍을 지닌 유일한 비극 오페라 <성모의 보석>(1911)이 도리어 유명하다. 이 오페라의 유명한 <간주곡>은 독특한 정서와 애감(哀感)을 가지며 마음에 스며드는 풍정(風情)이 있다.

레스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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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orino Respighi(1879-1936) 처음에 음악가이던 아버지에게 초보를 배우고 이어 고향의 볼로냐 음악원에서 공부하였다. 1900년 12월 21세의 레스피기는 비올라 주자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왕립극장에 취직하였다. 여기서 림스키코르사코프와 부루프를 알았으며 작곡에 대한 조언과 개인적인 교수를 받았다. 특히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영향은 컸으며, 후의 레스피기의 작풍, 특히 관현악법에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받게 되었다. 1910년, 일단 귀국했다가 다음해 베를린으로 가서 부루프에게 사사하였다. 그 뒤로 얼마 동안 연주활동을 계속하였으며 그 동안에 발표한 여러 작품으로 점차 작곡가로 인정받게 되었고 1913년 34세 때에는 로마에 있는 명문 산타체칠리아 음악원 작곡가 교수로 초빙되어 로마에 정주했으며 작곡가·지휘자·연주가로 다방면의 활동을 하여 점점 이탈리아 악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32년 53세 때 이탈리아 학사원회원이 되었다. 해외 연주여행도 횟수를 거듭하여, 20세기 전반의 이탈리아가 낳은 가장 뛰어난 작곡가로 내외에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유행성감기가 악화하여, 이것이 원인이 되어 심장병이 병발되어 1934년 4월 18일 로마에서 56세로 일생을 마쳤다. 레스피기는 오페라에 열중하는 작곡가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탈리아에서 놀랍게도 세계에 통용되는 기악곡을 남겼다. 특히 스승인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전수한 훌륭한 관현악법을 구사한 교향시 <로마의 분수>, <로마의 소나무>. <로마의 축제> 등의 3작품이 유명하다.

로마의 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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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噴水 레스피기 작곡(1917). 교향시. 로마에는 유명한 분수가 수없이 있는데, 레스피기는 그 중에서 4개를 골라 그것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새벽, 아침, 낮, 저녁 때의 인상을 음화(音畵)로 꾸민 작품이다.

로마의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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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 레스피기 작곡(1924). 45세 때 작품. 로마에 정주한 뒤 로마의 풍물은 레스피기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몇 세기에 걸쳐 살아 있으며 로마의 역사를 보아 온 노목이 <로마의 분수>에 이어 새로운 교향시의 제재로 뽑혔다. 로마의 4곳의 소나무가 묘사되고 있지만 여기서 레스피기가 의도한 것은 현실의 소나무를 회화적으로 묘사한 것은 아니다. 고대·중세에 세계를 지배한 로마에 대한 향수와 환상이 분위기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피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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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debrand Pizzetti(1880-1968) 출생지인 팔마 음악원에서 배운 뒤 1907년 모교의 작곡 교수, 다음해 피렌체 음악원의 화성법 교수로 전출, 초기 작품의 중요작을 차례로 발표했다. 1924년엔 밀라노 음악원 원장으로, 1939년엔 이탈리아 음악학사원회원으로 뽑혔다. 작품은 많으나 그 중심은 오페라이다. 대표작으로 <게라르드 수도사>(1927), <욜리오의 딸>(1954)이 있지만 그 작품은 이탈리아 이외에서는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말리피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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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an Francesco Malipiero(1882-1973) 현대 이탈리아 작곡계의 원로였으며 국제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음악원에서 배웠으며 작곡활동에 들어갔으나 1913년 31세 때 파리로 가서 거기서 근대 프랑스 음악의 활발한 정황을 목격하고는 이탈리아 음악의 부흥을 의도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각지의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방대한 양의 작품을 작곡하였다. 오페라나 발레 음악 등의 극장음악도 많지만 말리피에로의 본 영역은 기악곡이며 그레고리오 성가의 정신을 토대로 그것을 현대풍으로 소생시킴으로써 새로운 이탈리아 국민음악을 수립하려고 노력을 거듭했다.

카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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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redo Casella(1883-1947) 작곡가 이외에 피아니스트, 지휘자로도 알려져 있다. 양친 모두 음악가이며 어릴 적부터 엄한 교육을 받아 13세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였다.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1915년에 귀국하여 연주활동 및 창작활동을 했다. 초기 작품으로는 독일 후기낭만파의 영향이 보였으나 점차 투명한 이탈리아 고전의 전통을 바탕으로 한 현대풍의 작풍으로 전환해 갔다.

토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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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rico Toselli(1883-1926) 피아니스트이며 가곡작가이다. 많은 가곡을 발표했으며 이탈리아에서는 인기작곡가로 꼽히고 있다. 그 중의 한 곡 <탄식의 세레나데>가 세계적으로 유행하였기 때문에 토셀리의 이름도 널리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잔도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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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cardo Zandonai(1883-1944) 오페라 작곡가이며 마스카니에게 사사하였다. 유력한 악보출판사 리코르디의 사장에게 푸치니의 후계자가 될 만한 재능의 소유자로 인정되고 여러모로 편의를 받을 수 있는 행운을 얻어 그의 도움으로 1914년에 오페라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를 발표했는데 푸치니식의 작풍으로 이탈리아 국내에 큰 반응을 일으켰다. 1922년 <줄리엣과 로미오>를 발표했고 서정적인 작풍에 볼 만한 것이 있었으나 결국은 푸치니를 능가할 힘이 없었고 그의 명성도 점차 쇠퇴했다.

카스텔누오브테데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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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o Castelnuovo-Tedesco(1895-1968) 피렌체에서 태어나 피체티에게 배웠다. 피아노곡이나 가곡을 발표했고 일부에 그 섬세한 감수성을 높이 평가받고 있었으나 1926년 31세 때 발표한 오페라 <라만드라 골라>의 성공으로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유태계인 그는 1939년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한 해에 무솔리니의 압력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하여 미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모든 종류의 음악을 작곡하였으나 그의 작풍은 세련된 다채로움을 특색으로 한다.

달라피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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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igi Dallapiccola(1904-1975) 현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피렌체의 음악원에서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으며 졸업 후에는 피아니스트와 작곡가로 활동하였다. 1924년 20세 때 쇤베르크가 지휘한 <달의 피에로>를 듣고 충격을 받아 드디어 12음기법에 의한 작품을 쓰게 되었다. 1939년 35세 때 완성한 오페라 <야간비행>은 12음기법으로 된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 전곡이 완성된 합창곡 <포로의 노래>는 권력에 대한 혐오와 반항을 노래한 이색적인 합창곡이나 전시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권력에 대한 혐오는 점차로 고조되어 드디어 그 기분이 오페라 <포로>의 붓을 들게 하였다. 이 오페라는 종전 후의 1948년에 완성을 보았다. 전쟁 후 달라피콜라의 명성은 세계적인 것이 되었고 12음음악의 위대한 권위자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야간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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夜間飛行 달라피콜라 작곡(1939). 1930년경 야간비행을 처음 시작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항공회사 사무실을 무대로 위험이 따른 야간비행에 대결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갈등을 묘사한 심리 오페라이다.

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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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igi Nono(1924- ) 전후 대두한 젊은 세대를 이끌고 있는 매우 유능한 작곡가이다. 법률을 전공하여 학위를 받았지만 한편으로 말리피에로와 그 밖의 사람에게 작곡을 배워 음악가가 되었다. 맨 처음에는 12음기법의 작곡가로 독일에 알려졌고, 이어 이탈리아에서도 인정받게 되었다. 부인은 쇤베르크의 딸이다. 대표작으로는 <관현악 콤포지션 제1>(1951), <관현악 콤포지션 제2>(195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