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음악/서양음악가와 작품감상/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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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냉[편집]

Leonin(1150경) 파리의 노트르담 악파를 대표하는 최초의 거장으로서 레오니누스(Leoninus)라고도 한다. 12세기 중엽에 활약하였다고 생각되며 쿠스마켈에 의하면 "미사의 승계창(昇階唱), 즉 그라두알레와 성무일과(聖務日課), 즉 안티포날레를 위한 오르가눔의 대저술(大著術)을 낸 바 있다. 이것은 대(大) 페로탱 때까지 쓰인 것이다". 그리고 <오르가눔 대집성(大集成)>의 2성(二聲)의 오르가눔은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페로탱[편집]

Perotin(1150경) 역시 12세기에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활약한 노트르담 악파의 대표적 거장. 쿠스마켈은 그의 작품을 열거함에 있어 그가 레오냉의 <오르가눔 대집성>을 재편하였다고 한다. 이 악파의 오르가눔 가운데에서 4곡, 콘둑투스 가운데에서 4곡(이 가운데 1곡은 없어졌다)이 그의 작품이라고 하며 그 중 2곡은 4성부를 지닌다. 1197년 또는 1239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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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am de la Halle(1240경-1287) 중세 음유시인(吟遊詩人) 가운데 가장 대표적 존재의 한 사람이다. 그레고리오(單旋) 성가로 된 중세 교회음악에 대해 세속음악은 남프랑스의 트루바두르(11세기 말부터 14세기 초에 이르는)나 북프랑스의 트루베르(12세기 말부터 13세기)의 가요로 번성하였다. 단선성가(單旋聖歌)의 최성기가 6-11세기로, 9세기에는 교회다성악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이후 점차로 다성화(多聲化)가 현저해졌음에 대해 세속가요는 단선율을 계속하고 있다. 교회성악이 전적으로 라틴어를 사용했음에 반하여 세속가요는 그 지방의 말, 즉 트루바두르는 오크어(훗날의 프로방스어), 트루베르는 오일어(훗날의 프랑스어)를 썼다. 트루바두르나 트루베르도, 또 그들의 영향하에 독일에서 활약한 미네젱거도 시를 만들고 거기에 가락을 붙여 부른 것으로 그들 중세의 시인 겸 음악가를 흔히 음유시인(吟遊詩人)이라고 총칭한다. 그들은 주로 기사·귀족계급에 속하였으나 교양있는 시민층에서도 이윽고 뛰어난 음유시인이 나오게 되었다(아당 드 라 알은 후자의 예). 시의 주제는 기사도 정신을 고취하는 십자군 원정이나 궁정풍 연애, 그리고 성모 마리아 찬미, 교훈, 풍자 등 다채롭다. 시와 음악의 결부에는 현실적으로 양자를 분리시킬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기악의 반주가 있는 것도 있었던 듯하다. 트루바두르는 400명 이상, 트루베르는 200명 이상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있고 그 가운데에서도 유명한 사람은 기욤 다키테이느, 베르트랑 드 보른, 마르카브뤼, 랭보드 바케이라, 류델 죠프레, 베르나르 드 반타드른, 기로 드 보르네이유, 기로 리키에(이상 트루바두르), 티보 4세, 샤트랑 드 쿠시, 브론델 드 네슬, 모니오 달라스, 고티에 드 코왕시, 장 브르테르, 코란 뮤우제, 그리고 가장 탁월한 트루베르라고 하는 아당 드 라 알(이상은 트루베르)이다. 아당 드 라 알은 파리 북방의 아라스 태생으로, 아라스의 아당, 또는 꼽추 아당이라고도 불렸으며, 음유시인으로서 알트와 백작 로벨 2세 밑에 근무했으며 백작과 함께 나폴리로 가서 거기서 앙쥬공(公) 샤를의 궁전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이 곳에서 만년을 보낸 뒤 사망했는데 53곡의 가요가 그의 이름으로 남았으며 3성부의 론도 등 다성 작곡에도 수완을 발휘하였으나 특히 중요한 작품으로는 단선율로 작곡된 목가극 <로방과 마리옹의 장난>(1828경 나폴리에서 초연)일 것이다. 이는 기사와 양치기 딸의 로맨스에 양치기들의 장난을 곁들여 대화와 민요풍의 가요로 형성되며 후자가 자주 반복해서 노래된다. 이런 구성이 훗날 보드빌(나아가서는 오페라 코미크) 형태의 원천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역사상 주목할 만한 것이라 하겠다

비트리[편집]

Philippe de Vitry(1291-1361) 작곡가이며 이론가. 본래는 성직자로 1351년에는 모우의 주교(主敎)가 되었다. 약간의 모테토 작품과, 정량음악 및 대위법에 대한 이론적 저작이 있다. 후자를 수록한 이론서의 책명 '아르스 노바'에 유래되어 14세기의 다성음악(多聲音樂)에서의 새 경향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노트르담 악파로부터 13세기까지를 아르스 안티쿠아라고 한다.

마쇼[편집]

Guillaume de Machauet(1300/05-1377)작곡가이며 시인. 아르스 노바, 즉 14세기의 프랑스 음악에서의 대표적 거장. 그의 일생, 특히 그 가문이나 청년시대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1323년경 베이멘왕 장에게 종사하여 1340년까지 왕을 따라 유럽 각지를 순회하였다. 1337년에 랭스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수도회원(修道會員)이 되고 이어 차차 지위를 쌓아 사망할 때에는 그 대성당의 교회참사 회원이었다. 많은 시와 함께 음악작품으로는 레에 19, 콩플랭트 1, 샹송 르와이얄(단성) 1, 발라드 42, 론도 21, 비를레 33, 모테토 33(또는 24), 2중 호케투스 1, 그리고 4성의 미사 1곡을 남겼다. 이 미사곡은 통상문 전장(通常文全章)을 기욤이 다성텍스처(多聲書法)로 만든 최초의 작품으로 극히 중요시되고 있다. 당시의 성속(聖俗) 두 분야의 음악에 있어 그의 눈부신 업적이 남아 있다.

프레[편집]

Josquin des Pres(1449경-1521경) 15-16세기의 음악(르네상스 음악)에서의 일대계보를 이루는 악파(樂派)로서 흔히 네덜란드 악파라 불리던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오늘날에 와서는 15세기 전반부터 후반에 걸쳐 부르고뉴 공국(公國)에서 번영한 뒤파이, 반쇼와 등을 중심으로 하는 부르고뉴 악파와 그 뒤를 잇는 오케겜, 오브레히트에서 데 프레를 거쳐 라소에 이르는 플랑드르 악파(또는 프랑스 플랑드르 악파)로 크게 구별하여 생각되는 것이 보통이다. 부르고뉴 공국은 당시 프랑스 왕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왕과 거의 대립하듯이 위세를 다투고 있었다. 부르고뉴 공국의 판도는 본래는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 지방이었으나 공가(公家)의 세력이 신장함에 따라 프랑스 북부에서 지금의 벨기에까지 미쳤다. 그리고 백년전쟁으로 피폐한 프랑스를 능가하는 국력을 바탕으로 문화-음악 면에서 유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독자적인 존재가 되었으나 1477년에 샤를공(公)의 전사로 프랑스 왕국에 합병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부르고뉴 악파는 프랑스 음악의 역사를 대체적으로 광범한 범위를 생각하지 않는 한 그 권외(圈外)에 두어야 할 것이다. 하기야 플랑드르는 현 프랑스의 북부를 일부 포함하므로 오히려 플랑드르 악파까지 프랑스 음악의 역사와 관련시켜 생각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데 프레의 출생지가 피카르디 지방의 보르보왈이라는 설이 옳다면 그를 15-16세기에 활약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의 다성음악 작곡가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부르고뉴의 프랑스어 권내에 있는 지역에서 태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밀라노, 로마 등에서 활약한 뒤 일설에 의하면 1505년부터 1509년까지 파리에서 루이 12세의 교회악장을 지냈다고도 한다(라루스, <음악사전> 1957년판). 그 뒤는 플랑드르 지방으로 옮겨 막시밀리안 1세의 비호 아래 만년을 보내 콘데-쉬르 레스코(헤네고)에서 사망한 듯하다. 데 프레에게는 미사곡 20, 모테토 60, 샹송 외에 세속성악곡 60, 기악곡 10곡(곡수는 어느 것이나 대략으로 셈하여)을 남겼다. 초기의 기교적으로 복잡한 것에서 차차 자연스런 감정표현에 넘친 성숙한 것으로 그 작풍이 달라지나 전체적으로 고전적 절도(節度)를 지니면서 미사곡에서는 스승 오케겜으로부터 계승한 대위법의 완성을, 그리고 모테토에서는 라소에 비견할 상상력의 풍부함을, 샹송에서는 생기에 넘친 다채로운 표현을 보이기에 이른다. 가사내용을 적확하게 음악화하고 대조의 오묘함이 풍부하고 치밀하게 구성되면서 시적·회화적인 매력조차 엿보이게 하는 작풍을 제자 코크리코는 무지카 레세르바타의 말로 부르고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르네상스적인 새로운 음악이념을 가리킨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플랑드르 악파의 음악가들은 국제적인 활약이 많았으며, 그 가운데는 루아제 콩페르(1450경-1518), 앙투안 부류멜(1460경-1520경에서 1530사이), 앙투안 드 페방(1470경-1511말 또는 1512 초), 무통(1522 사망), 니콜 콩벨(1500경-1556경), 토마 크레키용(1557경 사망) 등 프랑스 또는 프랑스 플랑드르계의 대가가 많았다.

잔캥[편집]

Clement Janequin(1480경-1560경) 프랑스 샹송은 16세기에 들어오자 15세기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특질까지 나타내게 된다. 공베르, 크레키용, 클레멘스(16세기 전반 플랑드르 작곡가. 프랑스 샹송의 역사에는 오늘날의 벨기에에 해당하는 지방 출신인 플랑드르 음악가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서 를랑드 드 라수스(1532- 또는 1532-1594)는 뛰어난 샹송을 작곡했고 프랑스인의 그것보다 더욱 프랑스적이라고 한다) 등의 샹송은 오히려 모테토에 가까운 스타일을 보이고 있으나 1520년경 새로운 형태의 샹송이 나오기 시작하였고, 사람들은 그것을 파리풍의 샹송이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잔캥, 클로댕 드 세르미지(1490 직전-1562), 피엘 류엘, 통칭 상드랑(16세기의 파리 음악가) 등 파리에서 활약한 작곡가들이 새로운 형태를 개척하였기 때문이다. 그들 새로운 형태의 특색은 가사의 존중(시의 형태에 음악의 그것이 따르고 시어의 실러블에 음표가 대응하는), 간혹 투명한 에로티시즘을 넘치게 하는 섬세한 서정성, 명확한 리듬, 즐겨 쓰는 2박자계와 3박자계의 교체 같은 점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새로운 형태는 정서표현의 연구를 하는 한편 묘사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일이 적지 않다. 미사곡이나 모테토도 작곡하였으나 파리풍 샹송에 가장 다채로운 표현을 하였다는 잔캥은 묘사적 샹송의 대가였다. <파리 장사꾼의 소리>, <새노래>, <수다스런 여자들>, <마리니앙의 싸움> 등이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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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ude le Jeune(1528경-1600),

모뒤[편집]

Jacques Mauduit(1557-1627) 16세기 후반에 와서 프랑스 샹송은 기욤 코스트레(1531경-1606, 샤를 9세의 오르가니스트)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으며 한편, 인문주의자인 바이프의 운동에 협력한 음악가들의 손으로 새로운 전개를 보게 되었다. 즉 그들은 고대시의 운율(韻律)을 프랑스시, 나아가서는 프랑스시에 곡조를 붙인 프랑스 샹송에 이입(移入)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미 이탈리아의 영향도 있고 해서 샹송은 으뜸가락(主旋律)을 최상성부(最上聲部)에 둔 실러빅한 유절형식(有節形式)으로 되어 가고 있었으나 시어(詩語)의 실러블의 장단운율(長短韻律)을 대응하는 각 성부의 음표시가(音符時價)에 충실히 반영시키려 한 그들의 방식은 극히 화성적인 성격을 샹송에 부여하게 된다. 바이프 등의 시에 작곡을 했던 음악가로서는 잔캥, 라수스, 르 로와(1599 사망), 코스트레가 있고 특히 르 쥬류느와 모뒤가 바이프의 협력자로서 활약을 하였다. 또 한편 르 죈 등과 같은 스타일의 샹송을 작곡한 같은 시대의 작곡가로는 고스타뉴 듀 코로와(1549-1609)가 있다. 그리고 르 죈은 신교도(新敎徒)인 위그노 일파에 속하며, 만년에 앙리7세의 궁정작곡가가 되었으나 그보다도 앞서 위그노의 음악가로서 캘빈파를 위하여 작곡한 음악가로 클로드 구디멜(1500경-1572)이 있다.

륄리[편집]

Jean Baptiste Lully(1632-1687) 피렌체 출신인 작곡가. 1646년에 프랑스로 왔으며 이윽고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아 그 비호 아래 코메디 발레, 프랑스 오페라의 확립을 위하여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루이 14세의 베르사유에서는 처음에는 오직 바이올린 주자로 궁정 발레에 참여하는 한편 궁정의 오르간 주자들에게서 음악적 교양을 쌓았다. 그리고 궁정 발레 창작에 종사하기 시작하여 차츰 음악가로서의 지위를 높이고 1661년에는 왕궁의 음악총감독이 되어 프랑스로 귀화, 1662년에는 몰리에르와 교우(交友), 그 극에 음악을 붙임으로써 고전희극과 궁정발레의 결합인 새로운 장르―코메디 발레 발명의 협력자가 되었다. 한편 프랑스 국민 오페라의 창시자 피에르 페랑(1620-1675, 대본작자)과 로벨 칸벨(1628경-1677, 작곡가)의 재정적 파탄에 편승하여 오페라로 진출, 제1작 <카드모스와 헤르미오네>(1672) 이후 대본작자 키노와 함께 해마다 작품을 발표하였다. 원래는 이탈리아인이었으므로 오페라에서의 가사에 곡을 붙일 때 프랑스 고전극의 낭독법을 연구하여 프랑스어의 특질을 오히려 잘 파악한 레치타티보를 만들 수 있었다. 또 발레곡에서 사용한 자신의 고안에 의한 느림-빠름(-느림)의 서곡(프랑스풍 서곡)이나 프롤로그가 있는 5막의 구성도 합창과 발레의 중용(重用)과 함께 륄리 오페라를 특징짓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전체의 질서, 각 부분(요소) 사이의 균형에 대하여 철저한 배려를 했으며 그것은 륄리의 오페라에 고전주의적인 인상을 주게 되었다. 그리고 그 스타일이 후대에 계승되어 프랑스 오페라 특유의 것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다수의 발레 음악·오페라 외에 교회음악도 작곡하였다. 그리고 륄리의 주변에는 파스칼 코라스(1649-1709), 모랑 마레(1656-1728), 아니리 데마레(1662-1741) 등이 한 그룹을 이루어 '륄리스트'라 불리고 있다.

샤르팡티에[편집]

Marc-Antoine Charpentier(1636경-1704) 랄랑드와 비견되는 17세기 후반의 프랑스 종교음악가인 동시에 몰리에르나 코르네유 등과 협력을 하여 코메디 프랑세에즈를 위한 음악을 작곡하였고 오페라 <메데>(1693)로 갈채를 받았다. 이탈리아에서 카리시미에게 사사하였을 뿐이나 륄리의 사망 후 이탈리아풍 부활의 움직임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만년은 교육과 종교음악 활동에 전념하였으며 100곡이 넘는 모테토 외에 많은 종교음악이 있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힘찬 표현을 보이는 24곡의 <성스러운 이야기>는 카리시미의 오라토리오를 프랑스에 이입(移入)한 것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랄랑드[편집]

Michel-Richard de Lalande(1657-1726) 프랑스 베르사유 악파, 특히 교회음악 분야에서 작곡가, 오르간 주자로서 중요한 존재였다. 1683년, 왕실악장의 한 사람이 되었고, 이후 점차 루이 14세의 신임을 얻어 베르사유 궁내의 음악에 관한 여러 중책을 맡았다. 17세기의 프랑스 교회(종교)음악을 생각할 때 앙리 듀 몽(1610-1684), 륄리, 샤르팡티에, 랄랑드, 캉프라, 니콜 베르니에(1664-1734), 쿠프랭 등의 이름을 잊을 수는 없으며 랄랑드는 특히 베르사유 교회를 위한 약 70곡의 모테토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그는 약 20곡에 달하는 발레 음악을 비롯하여 세속적인 기악곡도 작곡하였다.

캉프라[편집]

Andre Campra(1660-1744) 남프랑스 에크스앙 프로방스에서 태어나 아를, 투르,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악장을 역임하는 등 처음에는 종교(교회)음악을 주로 하여 미사나 칸타타, 모테토를 작곡하였으나 1697년의 오페라 발레 <멋진 유럽>이 륄리 이후로 큰 성공을 거둔 뒤 20곡이 넘는 극장음악을 작곡하여 륄리와 함께 초기 프랑스 오페라의 대표작곡가로 불리었다. 그 음악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종합하였다는 평을 들으며 남부 프랑스 출신의 감성(感性)다운 활기에 가득찬 멜로디의 창의와 유연한 리듬, 대담한 화성을 보여 1710년 이후의 것은 오페라 코미크를 예고한다고도 한다. 만년의 모테토는 밝고도 장대하며 때로는 비극적인 심각성마저 자아내고 있다. 제자인 앙드레 데투슈(1672-1749)도 극장음악을 주로 작곡하였으며 그의 작품 <잇세>(1697)는 색다른 화성으로서 루이 14세로 하여금 "륄리가 죽은 후 이처럼 재미있는 오페라는 처음이다"라고까지 말하게 하였다고 한다.

쿠프랭[편집]

Francois Couperin(1668-1733) 대(大) 쿠프랭이라고도 한다.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에 걸쳐 파리에서 알려진 음악가의 가계(家系)인 쿠프랭 일족(一族) 가운데에서 최대존재라는 점과, 그의 백부(伯父) 역시 같은 이름 프랑수아이기에 구별하기 위하여 그렇게 부르며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쿠프랭가(家)는 루이, 프랑수아, 샤를(루이는 1626경-1661, 프랑수아는 1630경-1701, 샤를은 1638-1679)의 3형제가 장크 샹폴 드 샹포니엘(1602-1672, 프랑스 클라브생 음악의 창시자라고도 한다)에 의하여 파리에 초대받은 후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루이, 그리고 그가 죽은 후는 샤를이 생 제르베 성당의 오르간 주자로 있었으나 대(大) 쿠프랭은 샤를의 아들로 그도 역시 이 성당의 오르간 주자로 있었다(샤를이 죽은 후는 이 직책을 대행하고 있던 랄랑드에게서 1685년 내지 1686년에 이어받아 1723년에 조카인 니콜라스에게 양도했다). 1693년 콩쿠르 결과, 그를 부친과 함께 가르친 토므랑의 후임으로 왕궁 교회당의 4인과 오르가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혔다. 그 뒤 부르고뉴공에게 클라브생과 작곡을 가르친 것을 계기로 왕족·귀족의 음악교사가 되었고 이름 높은 루이 왕가의 신임도 두터웠으나 끝내 별로 높은 지위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그는 오르간 음악, 종교음악, 나아가서는 실내음악의 작곡가로서도 뛰어났으나 특히 그의 이름을 영원토록 한 것은 클라브생을 위한 작품군(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샹보니엘에서 루이 쿠프랭, 장앙리 당글베르(1628-1691), 니콜 르베그(1631-1702, 오르가니스트), 리자베트클로드 자케 드 라 게르(1664경-1729), 대(大) 쿠프랭, 루이 마르샹(1669-1732, 오르가니스트), 루이 니콜라스 크레랭보(1679-1749, 오르가니스트), 라모, 루이 클로드 다캉(1694-1772)으로 계속되는 베르사유 악파 클라브생 음악가의 빛나는 계보에서 대(大) 쿠프랭이야말로 뛰어난 거장임에 틀림없다. 그는 4곡에서 수십곡에 이르는 소곡을 모음곡으로 정리하여 오르돌이라 했다. 한곡 한곡의 각 소곡은 전통적인 춤곡적인 요소를 남기고는 있으나 문학적 내지 회화적인 표제를 지니며 암시적으로써 듣는 이의 상상력을 한층 활발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섬세한 울림과 우아한 꾸밈음(裝飾音)으로 장식된 유려한 멜로디는 이른바 로코코의 세련된 감각미로 넘쳐흐르나 밑바닥에는 때때로 깊은 우수가 간직되고 또한 기지(機智)와 풍자를 간직하고 있다. 더구나 항상 절도가 있는 억제가 오히려 감성의 풍요함을 돋보이게 한다. 억제와 고귀한 질서에 의한 애호(愛好)로 쿠프랭의 고전주의적인 성격은 뚜렷하며 그는 라모와 함께 프랑스 클라브생 음악을 절정으로 쌓아올렸으며 '이성(理性)과 감정의 약동 사이의 올바른 균형에 두어진 표정적인 감성'으로 바흐나 헨델과 같은 이국(異國)의 거장들에게도 널리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大) 쿠프랭의 클라브생곡은 1713, 1717, 1722, 1730년에 출판된 4권의 곡집에 수록되어 있는 240곡(27오르돌)에 덧붙여 1716-17년의 전주곡 6곡이 있다. 이 밖에도 모테토나 종교곡을 주로 하는 성악곡, 오르간을 위한 2개의 미사곡, 코렐리의 영향을 보이며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종합하려는 듯한 여러 가지 실내악곡 등, 어느 작품이나 모두 거장 대 쿠프랭의 이름에 손색이 없다고 하겠다.

라모[편집]

Jean Philippe Rameau(1683-1764) 프랑스 바로크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론가로, 오르간 주자로도 알려져 있다. 다종에서 오르간 주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운 것으로 생각된다. 18세에 밀라노에 단기간 체재하였으나 1702년 이후 크렐르몽페랑, 파리, 디종, 리용, 다시 크렐르몽페랑의 각지에서 교회 오르간 주자를 역임, 1723년에 파리에 나가 정주하다가 그 곳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그 때까지 그는 <클라브생 곡집 제1권>(1706)을 출판, 1722년에는 파리에서 유명한 <화성론>을 출판하였다. 파리에서 1723년에 생 베르망의 박람회를 위한 보드빌의 음악을 작곡한 이후로 극음악에 관심을 가져 1733년에 처음으로 그의 본격적인 오페라 <이포리트와 아리시>를 상연했다. 이어 1735년에는 오페라 발레 <우아한 인도>, 1737년에는 <카스토르와 폴뤽스>, 1739년에 <다르다누스>와 대작(大作)을 발표하였고, 그의 오페라 작가로서의 명성을 높여 1745년에는 '왕궁의 작곡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베르사유에서 초연했던 <플라테>는 4년 후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재연할 때도 크게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최초의 '오페라 코미크' <라루스 음악사전>이며, 명성은 확고부동한 것이 된 듯하다. <클라브생곡집 제2권>(1724) 외에 기악곡 및 성악곡의 작곡, 또는 이론적 저술도 병행하여 발표했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 오페라의 우열을 논한 '부퐁 논쟁'에서도 프랑스 음악을 옹호하는 등, 그의 활약은 눈부신 바 있었으나 만년의 오페라는 별로 성공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업적과 명성은 그를 귀족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1764). 이론가로서 라모는 가락이나 율동에 대한 화성의 우위를 주장하고 그 화성에 관하여 3도음정의 중복에 의한 화음구성법이나 화음의 기본형과 자리바꿈형(轉回型)이라는 관념, 기초저음에 근저를 두어야 한다는 화음연결의 법칙 등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분명히 근대기능화성법에의 길을 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논의는 당시의 합리주의적 사조를 반영하는 것이었는데, 라모 자신이 바로 당시의 사조를 담당한 유력한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예컨대 그의 클라브생곡에서 볼 수 있는 근대적이며 합리적인 화성 처리는 그의 이론의 실천이라는 점에 머무르지 않고 개성이 지닌 특질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오페라 작가인 라모에 있어서 "작곡가는 이론가와 별개의 사람이 아니다. (중략) 그러나 그 이론적인 주장을 작곡에 적용함에 있어서 고심한 흔적이나 노력의 자취를 추호도 엿볼 수 없다"(로오랑 시). 라모의 오페라 작법은 륄리를 계승, 발전시켜 이탈리아 오페라의 가락주의, 성악 중심주의를 배제하여 기악부분의 충실을 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글루크의 오페라 개혁이 배운 바가 적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부퐁 논쟁의 와중에서 프랑스를 옹호하는 입장을 지킨 그는 그 정당성을 현실의 창작에서도 입증해 보였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와 거의 같은 시대의 오페라 작가로는 미셀 팡놀 드 몬테클렐(1667-1737), 장 조제프 무레(1682-1738) 등이 있다. 부퐁 논쟁에서 라모가 대표하는 프랑스파를 공격한 이탈리아파의 가장 격렬한 논객이었던 장 자크 루소(1712-1778)도 절충적인 막간극 <시골 점장이>(1752)와 그 밖의 것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루소는 작곡가로서보다도 부퐁 논쟁이나 <음악사전>(1767) 등의 저작에서 미학자·이론가로서 그 존재의의가 중요하다.

르클레르[편집]

jean-Marie Leclair(1697-1764),

프랑수아[편집]

Francois Francoer(1698-1787)두 사람이 모두 같은 시기에 파리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에 속했던 바이올린 주자이며 작곡가이나 후자는 궁정음악가이기도 하여, 바이올린곡 외에 친구인 르벨(francois Rebel, 1701-1775)과 함께 오페라 극장에 관계하여 몇 개의 오페라도 상연했다. 그러나 바이올린 음악의 역사에는 전자가 보다 많이 공헌한 듯하다.

몽동빌[편집]

Jean Joseph Cassanea de Mondonville(1711-1772) 바이올린 주자이며 작곡가. 부퐁 논쟁에서는 프랑스파의 중요한 한 멤버로, 한창일 때 초연한 오페라 <티통과 오로르>(1753)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6곡의 오페라 외에 모테토, 오라토리오, 바이올린이나 클라브생을 위한 몇 개의 소나타 등이 있다. 그리고 거의 같은 무렵에 그와 랄랑드 캉프라를 모델로 하면서 주로 종교음악을 작곡한 주목할 만한 인물, 에스프리 브랑샬(1696-1770)의 이름을 여기에 말해 둔다.

필리도르[편집]

Francois-Andre Danican-philidor(1726-1795) 필리도르가(家)는 17, 18세기의 두 세기에 걸쳐 다수의 음악가를 배출한 가계이다. 1725년, 파리에 콩세르 스피리튀엘(공개연주회의 하나로 역사상 중요하다)을 창립한 앙느다니캉 필리도르도 같은 가계의 사람이나, 프랑수아 앙드레는 그의 동생으로 캉프라에게 배워 작곡가로서는 그 가문에서 가장 이름이 높았다. 1759년부터는 오페라 작곡가로 인기를 모으고 오페라 코미크의 소네트(短歌)가 곁든 희극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 분야에서 같은 때 활약한 작곡가로는 피에르 알렉상드르 몽시니(1729-1817)나 그레트리, 다레이라크 등이 있다.

그레트리[편집]

Andre Ernest Modeste Gretry(1741-1813) 벨기에 출신이나 프랑스에서 활약, 특히 오페라 코미크의 유행작곡가가 되었다. 그레트리는 프랑스 음악에 감각의 정묘함과 표현의 명쾌함을 가져왔다고도 하며 멜로디의 서정적인 노래와 생생하고 솔직한 표정으로 프랑스의 페르골레시라고도 한다.

메율[편집]

Etienne-Nicolas Mehul(1763-1817) 처음은 오르가니스트였으나 뒤에 글루크의 오페라에 감격, 그의 권유와 조언으로 오페라 창작에 전념하였다. 기품있는 멜로디와 힘찬 양식에 단정한 고전성을 보이는 그의 음악은 프랑스 대혁명시대의 가장 고귀한 음악가로서 평가를 받았다. 모두 30곡이 넘는 오페라와 발레곡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은 오페라 <조젭>(1807)이다.

부와엘디외[편집]

Francois-Adrien Boieldieu(1775-1834),

오베르[편집]

Esprit Auber(1782-1871),

에롤드[편집]

Louis-Goseph Ferdlinand Herold(1791-1833) 글루크의 개혁 오페라 이후 19세기 전반까지 프랑스에서는 전적으로 외국인 작곡가(케루비니, 로시니, 마이어베어 등)가 그랑 오페라에 이르는 오페라의 흐름을 지배했으나 오페라 코미크는 오히려 프랑스인 작곡가의 아성이 되고 거기에는 비록 깊이는 없다 해도 재기(才氣)에 넘쳐 생생하고 매력적인 작품을 낳았다. 표기(標記)한 세 음악가는 이러한 프랑스인 작곡가의 대표적 존재로서 부와엘디외의 <바그다드의 태수>(1800)나 특히 <백의의 부인>(1825)이 장기간 오페라 코미크의 범례(範例)가 되었고 오베르의 <프라 디아볼로>(1830)나 에롤드의 <잠파>(1831) 등으로 계승되어 구노의 <벼락 의사>에 이른다. 다만 오베르의 뛰어난 작품은 오페라극장 초연의 오페라 <포르티시의 벙어리 처녀>(1828). 그리고 부와엘디외의 제자 아돌프 아당(1803-1856)에게도 오페라 작품이 많으며 대표작은 발레곡 <지젤르>(1841)이다. 그들과 구노의 사이에 20여 곡의 오페라 코미크를 작곡한 앙브르와즈 토마(1811-1896)가 있으나 그는 <미뇽>(1866)이나 <햄릿>(1868)의 성공이나 공적(公的)인 영예(1851년 예술원회원, 1871년 파리 음악원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직업적인 기술의 숙달이라는 면에서만 평가되고 있다.

베를리오즈[편집]

Louis Hector Berlioz(1803-1869) 시인 테오필 고티에는 베를리오즈와 작가 위고, 화가 들라크루와 등 세 사람을 낭만파 예술의 상징인 삼위일체라고 불렀다. 1936년, 이브 보드리에나 메시앙 등은 인습적인 음악을 타파하고 서정성과 인간성을 되찾으려고 그룹 '젊은 프랑스'를 결성, '베를리오즈로 돌아가라'는 구호를 내세웠으나 원래 이 '젊은 프랑스'라는 것은 19세기 전반에 작가예술가들이 전개한 낭만파운동의 호칭이었다. 그리고 베를리오즈는 이 '젊은 프랑스' 음악에서 중심인물이다. 음악은 극적인 예술이어야 한다는 신조답게 베를리오즈의 일생은 극적인 파란에 찬 일생이었다. 도피느 지방의 오랜 가문 출신인 그는 그 지방의 소도시 라 코트 상탕드레에서 유지인 의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2월 11일). 17세에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한 그는 의학공부를 위하여 파리로 갔다. 그 때까지의 음악은 프라지오레트, 플루트, 기타를 아마추어로 습득한 데 불과하였으나 음악의 매력은 이미 그를 사로잡고 있어 파리에 온 그는 오페라를 보러 다니기에 열중하였다. 메윌, 살리에르, 니콜 다레이라크(1753-1809, 처음 법률을 배웠으나 후에 작곡가가 되어 극장음악, 특히 오페라 작곡에 전념하였다), 스폰티니, 특히 글루크에 감격한 나머지 자신도 작곡가가 되기 위해 장 프랑수아 르 쉬아르(1760-1837, 19세기 표제음악의 선구자)에 사사하고 의학을 포기했다. 그리하여 그는 미사곡을 작곡하고 연주회를 열었으나 이는 거액의 빚을 남기었을 뿐이었다(1825). 다음해 파리 음악원에 입학, 르 쉬외르의 작곡과 라이하(1770-1836, 체코 태생, 파리 음악원의 작곡법 교수)의 푸가 대위법을 배웠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로 한동안 학비 송금을 받지 못한 그는 합창단원이 되어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 무렵, 셰익스피어, 괴테, 베버, 베토벤에 열중하고 1827년에 우연히 영국극단의 셰익스피어극을 볼 기회가 생겨 주연여배우 콘스탄스 스미드슨을 사랑하게 된다. 무명의 음악청년과 인기여배우와의 사이는 절망적인 짝사랑에 틀림없었으나 베를리오즈는 유명해질 때까지 버티겠노라고 자작연주회를 꾀한다(1828년 5월). 그러나 보람도 없이 짝사랑은 끝이 나고, 고민한 끝에 거기서 <환상교향곡>(1830년 초연)의 구상이 움트기 시작한다. '환상'의 해는 '에르나니'(위고) 소동이나 7월혁명의 해에 해당하지만 베를리오즈에게는 칸타타 <사르다나발>로 네 번째의 도전을 하는 해였으며, 드디어 대망의 로마대상(賞)을 획득한 해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해에 그는 미인 피아니스트인 마리 모크와 약혼하여, 대상(大賞) 수상자의 권리이며 의무인 로마행(行)을 포기하려는 생각까지 했으나 그럴 수도 없고 해서 12월에 출발, 다음해 3월에 로마에 도착했다. 그런데 모크는 악기제조업자 프레이엘과 결혼하게 되어, 이 소식에 격앙한 베를리오즈는 복수를 위해 4월에 프랑스로 되돌아오는 도중 갑자기 몽롱한 정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게 되고 평정을 되찾았다는 기묘한 에피소드도 있다. 베를리오즈는 로마 체재를 1년 남짓으로 끝내고 있다. 이탈리아의 자연과 풍물은 그를 기쁘게 하였으나 음악은 혐오를 일으키게 할 뿐이었으며 더구나 수상자를 위한 메디시장(莊)의 생활이 고독감으로 그를 괴롭혔다. 또한 파리악단(樂壇) 소식은 의욕에 찬 그로 하여금 이 곳에 오래 머무르고 있기엔 견딜 수 없는 초조감을 느끼게 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이유 등으로 그는 마침내 1832년의 5월에 로마를 출발, 한동안 고향에 머문 뒤 11월이 되어 파리로 다시 나왔다. 파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 중의 하나는 지난 날 짝사랑으로 애태웠던 여배우 스미드슨의 전락한 모습이었다. 자세한 경위는 생략하거니와 그는 다시 그녀에게 정열의 불을 태워 마침내 1833년 10월에 그들은 결혼한다. 한편 파가니니나 리스트, 쇼팽 등과 사귀게 되어 '젊은 프랑스'의 멤버가 되고 그의 예술활동은 차차 본격화한다. 비록 생활비를 위해서라고는 하나 평론도 쓰면서 바쁜 나날이 계속된다. 1834년 6월 <이탈리아의 하롤드> 완성(11월 초연), 그해 8월에는 장남 루이가 탄생하였고 가을이 되자 베를리오즈는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의 작곡을 시작한다. 그러나 처의 빚 때문에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때때로 열었던 음악회도 고통을 덜어줄 만한 수입이 되지 못했으며, 늘 약간의 고료를 벌기 위한 문필생활에 쫓기다 보니 스케치는 끝냈어도 그것을 정리하여 곡으로 완성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런 까닭도 있고 해서 <벤베누토>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있을 때 그의 천재를 인정하게 된 대신(大臣) 드 가스파랑 백작의 후원으로 정부로부터 <레퀴엠>의 작곡 의뢰가 있어 1837년 6월에 이 곡을 완성했다. 그 상연은 시일의 차이가 있기는 했으나 그해 12월에 초연되어 처음으로 그에게 거장의 지위와 명성을 주었다. 그러나 다음해인 1838년에 겨우 <벤베누토>를 완성, 이를 9월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했으나 서곡을 빼고는 무참한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실의에 빠진 베를리오즈에게 용기를 준 것은 파가니니의 원조금 2만 프랑이었다. 그 동기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것이 베를리오즈를 기쁘게 하고 그의 경제에 도움이 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는 파가니니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극적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작곡, 헌정(獻呈)하였다(1839). 이 곡의 초연(11월)·재연은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경제 면에서는 아무런 수입도 작곡자에게는 주지 못한 모양이었다. 오히려 다음해인 1840년에 혁명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정부에서 위촉한 <찬송과 승리의 교향곡>의 작곡료 1만 프랑이 그의 생활에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정부는 1839년에 레지옹 도뇌르 5등훈장을 베를리오즈에게 수여하였다. 이 해는 또한 그가 파리 음악원 도서관의 주사보에 임명된 해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일은 순조로웠음에 반하여 가정에서 그는 아내와의 사이가 점점 악화되어 마침내 별거하게 된다. 완전히 무대와 절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의 아내는 잇달아 영광을 더하는 남편의 활약에 질투했으며, 이것이 별거의 원인이었다고도 한다. 1842년에는 작업적 면에서도 또다시 암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오래도록 그를 지지하고 후원했던 케루비니나 그가 음악평을 기고했던 신문인 데바지(紙)의 사주(社主) 베르탕, 그의 훌륭한 이해자였던 오를레앙 공작이 뒤를 이어 사망했던 것이다. 전해부터 그가 상연에 참여한 오페라극장의 <마탄의 사수>(베버)는 흥행성적이 부진하였으며 케루비니의 공석을 메우는 예술원회원 선거는 그를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파리에 거의 절망하고 1842년 12월, 독일로 연주여행을 떠났다. 이후 1867년의 러시아 연주여행까지 그는 독일, 오스트리아, 동유럽, 러시아, 런던 등에 자주 작품을 가지고 여행을 하였으며, 비록 1853년의 런던에서 열린 <벤베누토> 상연의 실패 같은 것이 있었다 해도 거의는 각지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파리에서는 잊혀지기 쉽던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동안 주요 작품으로는 서곡 <로마의 사육제>(1844), <프랑스 찬가>(1844), <파우스트의 겁벌>(1846), <햄릿 종막에의 장송행진곡>(1854),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어린시절>(1854), <테 데움>(1855), <12월 10일(랑페리알)>(1855), 오페라 <트로이 사람>(1858), 오페라 <베아트리스와 베네딕트>(1862) 등이 작곡되었다. <근대의 악기법과 관현악법, 그리고 그 저서의 <개정 증보판>, <독일·이탈리아 음악기행>, <베토벤·글루크·베버론>, <회상록> 등의 저서를 쓴 것도 이 시기였으며 오래도록 그의 생활을 지탱했던 데바지(紙)에서의 평론활동은 1863년 가을의 <진주잡이>(비제) 초연평(初演評)을 마지막으로 끝나고 있다. 그는 원래 평론활동을 진정으로 좋아서 했던 것은 아니었다. 신변에도 그간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한 일의 약간을 연대기(年代記)식으로 적어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가수 마리 레치오와의 동거는 1844년의 초여름이지만 관계는 그 이전의 1842년경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848년의 2월혁명은 그의 보호자였던 베르탕(앞서 나온 베르탕의 아들)을 정계(政界)에서 실각시켰으나 그가 <데바지>(紙)에서의 지위와 파리 음악원 도서관 주사보직을 잃지 않았던 것은 루이 브랑의 동생 샤를의 헌신적인 도움이었던 성싶다. 그해 7월에 부친이 사망. 1850년에는 런던의 필하모닉 협회를 따라 파리에 소시에테 필하모닉을 설립하여 회장 겸 수석지휘자가 되나 경제상의 운영난으로 이 협회는 다음해 해산되고 말았다. 1852년에는 오래도록 그를 지지해 오던 리스트에 의하여 바이마르에서 '베를리오즈 주간(週間)'이 설정되어 그해 11월에 그는 음악원 도서관장이 된다. 1854년에는 아내가 죽고 가을에 마리와 결혼, 1855년에 런던에서 바그너와 만났고, 1856년에는 대망의 예술원회원으로 추거(推擧)되었다. 1859년 프랑스 정부의 위촉으로 악기의 표준 피치를 정하는 위원회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이 위원회는 를 435사이클로 정하였다. 1860년에 바그너와 <데바지>(紙)에서 논쟁, 이후 대립은 결정적이 되어 양자의 친구인 리스트와도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한다. 같은 해에 그의 좋은 이해자였던 누이동생 아델이 사망. 1862년에는 두 번째 아내 마리의 갑작스런 사망. 1863년에 평론에서 손을 떼었음은 이미 말한 바이나 완성 후 상연의 기회를 열망했던 <트로이 사람>이 겨우 제2부 <카르타고의 트로이 사람>만이 리리크 극장에서 상연, 호평을 받았다. 제1부가 상연에서 제외된 것은 극장 형편에 비해 그 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64년 8월 레지옹 도뇌르 4등훈장을 받았다. 이리하여 차차 영예를 누리기 시작한 베를리오즈는 실상 고독과 공허한 상념으로 심각한 고민을 해왔었다. 셰익스피어를 애독하며 고독을 달랬으며 아파트에 은거한 채 나오지 않는 날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러한 만년의 처절한 고독의 모습은 훗날 로맹 롤랑이 쓴 <베를리오즈>에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1867년에는 아들 루이가 열병으로 아바나에서 사망, 그 소식은 그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같은 해 가을 초청을 받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먼길의 여행을 한 것도 이미 체력이 쇠진해진 그를 한걸음 더 죽음에 가까이 해주었다. 러시아에서는 대환영을 받고 감격하나 다음해 3월 파리에 돌아왔을 때, 그의 육체는 죽음을 가까이에 부르고 있었다. 남부 프랑스에서의 요양여행도 보람없이 1869년 3월 8일, 그는 파리에서 고난에 찬 극적 생애의 막을 내렸다. 3일 후 유해는 그의 <장송과 승리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군악대에 호송되어 몽마르트 묘지에 안장되었다. 베를리오즈는 음악사상에 고립된 존재였다고 한다. 확실히 고전주의적인 프랑스에서 철저하게 낭만주의적인 그의 음악은 고립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립이 프랑스 음악을 당시 유행한 이탈리아니즘이나 마이어베어의 절충주의에서 구원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그의 낭만주의는 새로운 착상이 풍부하고 탁월한 관현악법으로 장식된 전례가 없는 음향세계를 통하여 이른바 시각적인 환상을 그 음악 속에 넘쳐흐르게 하고 있다. 여기에 독일 낭만주의와는 성격이 다른 프랑스적인 그의 특질이 있다. 그는 <환상교향곡>으로 표제음악의 최초 페이지를 열었다고 하겠다. 여기서 고정악상(固定樂想)을 써서 꾀한 표현의 묘사성은 앞서 말한 시각성(視覺性)과 함께 프랑스적 특질이며, 동시에 음악을 극(劇)으로서 느꼈던 그의 개성과 깊이 결부된다. 그에게 있어서 표제음악의 본질은 바로 음악에서의 극에 지나지 않았으며 음악에서의 극이란 오페라라는 장르의 범위를 넘은 보다 본질적이며 초월적인 관념이었던 것이다. 그의 직접 후계자는 끝내 나오지 않았으나 그 영향은 널리 신독일 악파에까지 미치고 있다.

환상교향곡[편집]

幻想交響曲 베를리오즈가 작곡한 다장조 작품 14(1830). '어느 예술가의 일생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린 베를리오즈의 출세작이다. 베를리오즈는 여배우 스미드슨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실연하자 그 상처와 지옥의 고뇌에서 벗어나려고 작곡한, 말하자면 이는 청년 작곡가 베를리오즈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베를리오즈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병적인 관능과 강렬한 상상력을 지닌 한 청년 예술가가 광련(狂戀) 끝에 아편으로 음독자살을 꾀한다. 그런데 복용량이 적이 혼수상태에 빠져 기괴하기 이를 데 없는 환상을 본다―는 이야기이다. 꿈, 정열, 무도회, 전원풍경, 단두대에의 행진, 발푸르기스 밤의 악몽이라는 5악장으로 된 표제음악적인 구성을 가진다. 연인을 상징하는 기본주제(고정악상)가 각 악장에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는 것은 베를리오즈의 창안(創案)인 새로운 시도이다. 여러 가지 감정이나 극적 전개를 자유분방하게 묘사한 로맨티시즘의 색채가 짙은 새로운 형태의 교향곡이다.

로마의 사육제 서곡[편집]

Roma-謝肉祭序曲 베를리오즈 작곡 작품 9(1844).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의 제1막의 마지막에 나오는 사르타렐로의 멜로디에서 주제를 따서 작곡한 관현악곡의 서곡이다. 전체에 로마의 연중행사의 하나였던 사육제의 말할 수 없이 명랑한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기지와 색채에 풍부하고 발랄한 관현악법은 과연 베를리오즈의 특색을 충분히 느끼게 한다. 9분 가량의 소품.

구노[편집]

Charles Francois Gounod(1818-1893) 예술원회원인 구노는 프랑스를 2개의 위험, 즉 마이어베어의 절충주의와 로시니의 이탈리아니즘에서 구하였다고 한다. 혁신가다운 자세는 겉으로 나타나지 않으나 근대 프랑스 음악의 르네상스에 그는 선도자적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화가인 부친과 피아니스트인 모친 사이에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처음에 라이하에게 화성법이나 대위법의 기초를 배웠으며 그가 사망하자 파리 음악원의 입학이 허락되어 자크 프랑수아 알레비(1799-1862, 오페라 작곡가, 작곡교사로서 명성이 높았다), 베르튼, 르쉬외르에 사사, 1839년 로마 대상을 수상하고 이 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이탈리아에 체재, 이어 독일을 여행하여 팔레스트리나와 독일 고전과 낭만에 계몽되었다. 처음에는 종교음악의 작곡을 꾀하여 파리에 돌아온 후 교회 오르가니스트 및 합창장에 취임하는 한편 신학을 배우기도 하였으나 뒤에 오페라 창작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피레몽과 보시스>, <미레이유>, <로미오와 줄리엣> 또는 오페라 코미크로 <가짜 의사> 같은 성공작이 있으나 이 가운데에서 그의 대표작은 <파우스트>이다. 이것은 그의 오페라에서 제4작으로, 1859년에 초연되었으나 10년 후에는 발레 장면을 더하는 등 개작을 하여 처음보다 더한 환영을 받았다. 구노는 오페라의 성격을 대중이 특히 애호하는 그러한 것과 특별한 재능이 있는 예술가를 위한 것의 중간에 두었다고 평가된다. 오베르의 오페라 코미크와 글루크 비극을 중개하는 것(란돌미)이라고도 하겠다. 비제의 빛나는 극장적 재능에는 못미치지만 중용(中庸)을 지니고 절도 있는 표현으로 적절한 변화를 안배한 그는 이른바 프랑스 오페라 전통에 복귀했다고 할 수 있겠다. 프랑스 가곡이 훗날 보였던 더할 나위 없는 발전을 위해 그는 길잡이가 되었다고 하겠다.

오펜바흐[편집]

Jacques Offenbach(1819-1880) 제2제정시대의 대표적인 오페라 부파(오페레타) 작곡가. 독일인이었으나 14세에 파리로 와 음악원에서 첼로를 배운 뒤에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첼로 연주가로도 알려져 있으며 또한 극장(부프 파리장좌)의 경영자이기도 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천국과 지옥>, <아름다운 엘레느>, <호프만 이야기> 등이 있다.

프랑크[편집]

Cesar Auguste Franck(1822-1890) 벨기에 출신. 처음은 출생지인 리에즈 음악원에서 배워 1835년 파리 음악원에 입학. 피아노에서 <푸가와 그 밖의 것> 등으로 1등상을 받는 등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그를 피아노의 명수로 만들려고 한 부친은 로마상(賞) 콩쿠르에의 참가를 허락지 않아, 일단 벨기에로 돌아온 뒤 1844년에 재차 파리로 나와 정주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파리는 오페라 만능의 추세에 있었으며 그는 1845년 이후 교회 오르가니스트의 길을 택하여 1860년에는 생크로티르드 성당(1858년부터 악장이었다)의 주자가 되었다. 1872년에 파리 음악원의 오르간과 교수가 된 것은 연주상의 명기(名技)를 높이 평가받았기 때문이며 그는 교회의 오르간석에 앉아 있으면서 당시 일반적으로 관심이 적었던 바흐, 베토벤을 연구하는 등 꾸준히 실력을 기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기간의 남모르는 그의 노력은 만년에 이르러 작곡가로서의 천분을 풍족한 결실로 이끌었다고 하겠다. 즉 초기의 가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등은 아직 개성이 빈약하여 때로는 자칫하면 살롱풍의 요설(饒舌) 같은 위험을 범하기 쉬웠으며 그의 중기(中期)에는 미사곡, 오르간곡 외에 종교음악이 점차 충실함을 보이기 시작하였으나 리스트나 독일 낭만파의 영향에 바흐를 가미한 수법에 충분한 확신을 엿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오라토리오 <속죄(贖罪)>(1861-1872)를 비롯한 만년의 여러 작품은 온갖 장르에서 리스트나 바그너의 반음계적 화성과 바흐에게 배운 폴리포니, 그리고 베토벤에게 배운 전개 내지는 변주를 개성의 내부에서 굳게 결부시키고 있다. 말하자면 중기(中期)에서 발견되었던 한 방향을 확실한 토대 위에 확립시키고 원숙해짐을 꾀하는 일에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경우 교향곡이나 실내악곡에는 순환형식의 이름으로 불리는 한 수법이 다악장 구성을 주제적 및 논리적으로 연결짓는 것으로서 예리하게 추구(追求)되고 있다. 이리하여 프랑크는 독일음악에서 많은 것을 배워 프랑스 19세기 후반의 순수기악 부흥에 큰 추진력이 되었다. 그리고 일반이 그에 대한 몰이해를 마침내 개선하려 하고 있었을 때 불행하게도 마차에 치여 가슴을 다친 것이 원인이 되어 병상에 누워 몇 해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사망 후 그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 즉 뒤파르크, 댕디, 쇼송, 보르드, 알렉시스 드 카스티용(1838-1873), 알투르 코키알(1846-1910), 피엘 드 브레빌(1861-1949), 가브리엘 피에르네(1863-1937), 폴 피달르(1863-1931), 조제프 기 로파르(1864-1955), 기욤 루크(1870-1894) 등의 준재(俊才)들은 '프랑키스트'라고 하는 그룹을 스스로 형성하여 스승 프랑크의 정신을 지주(支柱)로 삼아 프랑스 근대음악에서 큰 세력을 이룩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또한 댕디의 '스콜라'를 통하여 현대에 이르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교향곡 D단조>(1888), <교향변주곡>(1885), <교향시> 3곡(1882, 1884, 1888), <피아노 5중주>(1879), <바이올린 소나타>(1886), <현악 4중주곡 D장조>(1889),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중찬곡(中贊曲)과 푸가>(1884), <전주곡-아리아와 끝곡>(1887), 오르간을 위한 <3장>(1878), <3개의 중찬곡>(1890), 오라토리오 <속죄> <지복(至福)>(1879), 가곡 <녹턴(夜想曲)>(1884), <행렬>(1888) 등(이상은 만년의 여러 작품 중에서 열거한 것. 작곡 연대는 완성한 때만을 표기했다)이 있다.

교향곡 D단조[편집]

交響曲 D短調 프랑크 작곡(1888). a단조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함께 가장 잘 연주되는 그의 대표작. 이 곡이 1889년에 파리에서 초연된 다음해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는 우수와 어두움이 느껴진다. 고전적인 형식을 답습한 3악장으로 되었으나 제1악장에 나오는 주제가 전악장을 일관하여 출몰하는 이른바 순환형식을 취하고 있다. 장엄한 오르간의 울림과도 흡사한 감정의 깊이에 이 곡의 특색이 있다.

랄로[편집]

Edouard Lalo(1823-1892) <에스파냐 교향곡>(1875 초연)으로 널리 알려진 작곡가. 에스파냐 출신 가계의 한 사람으로, 릴에서 태어나 그 곳의 음악원에서 배웠고 16세 때 파리로 나가 슬라브계의 피아노 주자 슈르호프에게 작곡법의 개인교수를 받았다. 현악 주자로 아르망고 현악 4중주단의 한 사람이었으나 점차로 작곡에 전념하여 확실하고 빈틈없는 솜씨에 덧붙여서 앞서 말한 <에스파냐 교향곡>이나 첼로 협주곡(1876), 오페라 <이스의 왕>(1878, 초연 1888), 발레곡 <나무우나>(1882) 등 정묘하고 색채감각에 넘친 관현악법이나 아카데미즘에 서서 자유롭게 생동하는 화성감 및 율동감이 청중을 매혹시켰다. 비평가 피에르 랄로(1866-1943)는 그의 아들. 앞서 말한 주요 작품 외 바이올린 협주곡 3, 피아노 협주곡, 교향곡, 랩소디(狂詩曲), 현악 4중주곡, 피아노 3중주곡 3, 바이올린 소나타, 피아노곡, 가곡 등이 있다.

생상스[편집]

Charles Camille Saint-Saens(1835-1921) 작곡가·피아니스트·오르간 주자·지휘자·음악회 기획자·비평가·교수. 그뿐 아니라 시도 쓰고 극작도 한 그는 음악가인 동시에 교양인이기도 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조숙한 천재성을 나타내어 10세에 피아노 공개연주회를 가졌을 정도이다. 13세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 작곡을 헨리 르벨(1807-1880)과 알레비, 오르간을 프랑수아 부노와(1794-1878)에게 사사하였다. 세속적인 영광을 평생토록 누려온 그에게 예외라 할 수 있는 좌절은 로마 대상(大賞)을 놓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때 이미 유능한 음악가로서 충분히 인정받고 있었으며 니델메이에 음악학교의 피아노 교수로 초빙되기도 했다. 1861-1865년 사이에 이 학교에서 그가 가르친 학생 가운데 포레, 앙드레 메사제(1853-1929, 지휘자·작곡가), 유진 지구(1844-1925, 작곡가 오르간 주자) 등이 있다. 이보다 앞서 1858년엔 파리 마들레느 교회의 오르간 주자가 되어 1877년까지 그 영예의 지위에 있었다. 그 사이 보불전쟁(普佛戰爭) 뒤인 1871년에 로망 뷔시느(1821-1899, 가수)와 국민음악협회를 창립하여 부회장으로서 프랑스 음악, 특히 기악창작의 진흥에 노력하였다(1886년에 은퇴). 다만 그는 열렬한 바그너 신봉자이면서 완고한 고전주의자·보수파로 프랑스의 젊은 세대의 혁신을 철저하게 거부해온 것은 약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생상스 자신의 창작에서도 고전주의적인 이상을 내세워 명쾌, 엄격, 절도, 우아를 덕으로 삼았으나 현실적으로는 다분히 절충적인 작품에 빠져 고전주의를 오로지 형식주의에 연관지었다. 프로다운 세련된 기교로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자신에의 비평이 빈약한 까닭도 있고 해서 걸출한 작품이 적다. 1881년에는 예술원회원으로 선출. 주요 작품은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1868, 초연 1877), <제3교향곡>(1886), 교향시 <옹파르의 물레>(1871), <파에통>(1873), <죽음의 무도>(1874), <동물의 사육제> 외에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첼로 협주곡> <첼로 소나타> <피아노 3중주곡> <장엄미사> 및 <레퀴엠> 등이 있다.

동물의 사육제[편집]

< > 動物-謝肉祭 생상스 작곡(1886). 13종류릐 동물을 희화적(戱畵的)으로 묘사한 경쾌한 음악이다. '코끼리'는 베를리오즈의 <요정의 춤> 속의 모티프를 저음악기로 연주하면서 느릿하고 둔중한 왈츠의 리듬으로 반주하고 있으며, <피아니스트>라는 악장에서는 서툴게 치는 피아노의 손가락 스케일 연습이라는 넌센스에 우스꽝스러운 것. 제13곡 <백조> 등은 단독으로 자주 연주되어 발레 음악으로서도 통속적인 것이 되어 있다.

들리브[편집]

Leo Delibes(1836-1891) 파리 음악원에서 아당 등에게 배워 1853년 테아트르 리릭의 반주자 및 교회 오르가니스트가 되었으나 이윽고 오페라 코미크나 오페레타, 발레 음악의 작곡가로서 유려한 작풍으로 널리 애호되고 알려졌다. 1881년에 음악원 작곡법 교수, 1884년에 예술원회원. 대표작으로는 발레곡 <코페리아>, <시르비아>, 오페라 <라크메> 외에 가곡 등이 있다. 한편 그와 거의 같은 세대의 극음악 작가로 에르네스트 레이에(1823-1909), 테오도르 뒤부와(1837-1924), 샤를마리 비도르(1845-1937) 등이 있다. 다만 뒤부와는 토마의 후임인 파리 음악원장으로 오히려 이론가·오르가니스트로 뛰어났으며 비도르도 오르가니스트로서 탁월, 오늘날 그 오르간곡은 중요시되고 있다.

비제[편집]

George Bizet(1838-1875) 비제의 이름은 부수음악 <아를의 여인>, 그리고 특히 오페라 <카르멘>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성악교사인 부친과 피아니스트인 모친 사이에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가정의 혜택받은 음악적 환경 아래에서 일찍부터 재능을 나타내어 파리 음악원(1848년 입학)에서는 피아노와 오르간의 1등상을 획득, 그리고 화성법과 푸가, 작곡법을 배워 1857년에는 로마 대상의 수상으로 졸업을 하는 화려한 성적을 올렸다. 재학 중 구노와 알레비(후에 그의 딸과 비제가 결혼한다)의 가르침을 받았음은 그의 음악에 양자로부터 받은 영향이 엿보인다는 사실과 전혀 관계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로마상을 수상하기 수개월 전에는 오펜바흐가 주재한 오페레타 <기적박사(奇蹟博士)> 현상모집에 응모하여 친구 샤를 루코크(1832-1918, 오페레타 작곡가, 주요 작품으로는 <잉고 부인의 딸>)와 제1위를 나누고 있다. 1860년 여름 로마에서 귀국한 이후로 극장음악에 주력을 기울이나 작곡가로 출발했을 때처럼 항상 일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카르멘>이나 <아를의 여인>만 해도 초연은 결코 열광적으로 환영받았던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카르멘>이 갈채를 받기 시작하였을 무렵은 그가 이미 심장병으로(목의 종양이라고도 함) 젊어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파리 근교의 부지발). 시인이며 철학자인 니체는 <카르멘>의 비제를 바그너로부터 해방자라고 하여 탄복한 바 있다. 실은 비제도 바그너의 지도동기 등에 배운 바가 많았으나 품성(稟性)의 차이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개성에 충실하였던 그 창작태도가 니체의 이른바 '늪(沼澤)의 분위기'에 물들지 않은 찬란하고 경쾌하며 직선적이고 상쾌한 '지중해적(地中海的)' 음악을 낳았던 것이다. 명쾌하며 때때로 민속적인 매혹을 자아내는 부드러운 멜로디, 약동적인 리듬, 때로는 '비단벌레처럼 녹색이나 자줏빛으로 반짝이는' 색채 풍부한 관현악법, 거기에 무대에서의 리얼리티에 대한 적확한 감각 같은 것을 비제 작품의 특질로 들 수 있겠다. 또한 그는 리스트를 놀라게 했을 정도로 피아노의 명수이기도 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진주잡이>(1862-1863), <페르트의 아름다운 딸>(1866), <자밀레>(1871), <카르멘>(1873-1874), 부수음악 <아를의 여인>(1872), 교향곡 (1855), 교향곡 <로마>(1860-1868), <작은 모음곡>(1872), 피아노 연탄모음곡 <아이의 유희>(1871), 가곡 약 50곡, 칸타타, 테 데움(1858) 등이 있다.

오페라 카르멘[편집]

Opera 비제 작곡(1875). 메리메의 소설을 소재로 한 연애비극. 자유분방한 집시의 여자 카르멘에 반한 기병(騎兵) 하사관 돈 호세는, 그녀를 위해 밀수단의 한패가 된다. 그러나 카르멘은 투우사 에스카밀리오에 이끌려 변심했으므로 격노한 호세는 그녀를 찔러 죽인다. 에스파냐를 배경으로 한 이국정취가 가득찬 이 오페라는 전주곡을 비롯하여 하바네라, 집시의 노래, 꽃의 노래, 투우사의 노래 등 극중에 뛰어난 곡이 많으므로 가곡이나 모음곡으로서도 알려져 있다. 간결하고 효과적인 관현악, 무대의 극적인 현실감 등 종전의 오페라를 혁신하여 프랑스의 국민오페라를 수립한 기념비적인 명작이다.

아를의 여인(모음곡)[편집]

비제의 작곡(1872). 도데의 희곡 <아를의 여인>의 부수음악으로 작곡한 것에서 후에 8곡만을 추려 연주회용의 제1·제2모음곡으로 하였다. 제1모음곡은 아를 지방의 행진곡이나 시골풍 미뉴에트 등, 전체에 소박한 서정과 밝음으로 가득찬 사랑스런 곡이며, 제2모음곡은 친구인 기로가 편곡한 것으로 전원적인 정취와 고풍의 전아함, 그리고 경쾌한 남부 프랑스 플랑드르 지방의 춤곡 등 그 아름다움은 제1모음곡에 못지 않다.

샤브리에[편집]

Emmanuel Chabrier(1841-1894) 바그너와 인상파 회화에 심취하고 활력에 넘치는 창작에 화성적 면에서의 창의(創意)를 보여 후세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당시의 혁신파. 산이 많은 고장인 오베르뉴 지방(프랑스 중부)의 앙베르(퓨이 드 돔)에서 태어난 샤브리에는 처음에 이 지방의 중심지인 클레르몽에서 일반교육을 받은 뒤 파리에서 법률을 배워 1861년에 내무성관리가 되었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피아노를 습득하여 25세에 화성법의 교수가 될 정도였으며 마침내 음악에 전념하기 위해 1879년에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미 1877년의 오페레타 <별>로 작곡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던 그는 라무르 교향악협회의 합창지휘자가 됨으로써(1881)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적인 음악가의 위치를 굳혔다고 할 수 있겠다. 바이로이트 순례에서 열렬한 바그너 신봉자가 되었으며 에스파냐 여행은 그에게 민속적 색채가 풍부한 소재를 제공하였다. 후자를 써서 작곡한 관현악곡 <에스파냐>는 1883년의 초연에서 갈채를 받았다. 바그너풍의 지도동기를 사용한 오페라 <그반돌리느>(1885)는 덴마크인의 야성적인 풍속을 묘사하여 거친 색채와 부드러운 감상(感傷)을 교묘하게 대조시켜 앙리3세를 주인공으로 한 오페라 <억지 임금님>(1887)과 함께 그의 이름을 높였다. 하기야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은 우아하고 서정적인 <프랑스 송가>(1890)라고도 한다. 그러나 <회화적 소품>(1881)이나 <변덕스러운 부레>(1891) 같은 피아노곡, 또는 가곡에도 버리기 아까운 곡들이 있다. 원래가 아마추어 출신으로 뒤늦게 작곡을 시작한 그로서는 전문가다운 기능의 부족이라는 결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드물게 보는 활발한 상상력의 소유자로 화성어법(和聲語法)의 갱신에 큰 구실을 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아카데믹한 수련으로 상상력에 제한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강렬한 리듬감각과 빛나는 색채감, 깊숙한 내부에 넘칠 듯한 활력이 가득찬 그것이 자유롭고 구애됨이 없는 유머를 발산시키거나 한편으로는 심약하고도 감상적인 몽상가의 일면을 지니기도 한다. 그를 프랑크 그룹에 접근시킨 이유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면일는지 모른다. 주요 작품으로는 앞서 말한 것 외에 성악곡으로 <슈라미의 여인>(1885), 관현악곡 <즐거운 행진곡>(1890), 2대의 피아노를 위한 <로맨틱한 왈츠>(1883) 등이 있다.

마스네[편집]

Jules Massenet(1842-1912)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에 이르는 오페라 창작 <라오르의 왕>(1876), <에로디야드>(1881), <마농>(1884), <르 시드>(1885), <에스클라르몽드>(1889), <베르테르>(1892), <타이스>(1897), <사포>(1897), <성모의 곡예사>(1902), <돈 키호테>(1910) 등으로 19세기 오페라의 총아로 불리기도 한다. 마스네의 오페라는 전적으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우아한 멜로디, 섬세하고 민감한 화성, 색채적인 관현악법을 구사하여 관능적인 매력에 가득차 있다. 깊은 맛은 빈약하나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감상(感傷)으로 '사랑'을 노래하여 때로는 파리 사람의 기호에 영합했다. 감각적인 세련과 색채적인 울림에서의 일락(逸樂)은 오페라뿐 아니라 가곡이라든가 기악곡에서도 대중을 매혹시켰다. 토마의 제자로 로마대상 수상자(1863)인 그는 모교인 파리 음악원의 작곡법 교수가 되어 샤르팡티에, 알프레드 브뤼노(1857-1934, 오페라 <꿈>은 졸라의 소설에 바탕을 두었으며 오페라에서의 자연주의를 확립시켰다고도 한다), 리나르도 안(1875-1947, 작곡가·비평가. 프루스트와 친하였다)들을 육성하였으며 널리 인기를 얻은 그 작품을 통하여 젊은 드뷔시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예술원회원이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앞서 말한 곡 외에 부수음악, 오라토리오, <헝가리 풍경>·<그림과 같은 풍경>·<알사스 풍경> 등의 관현악 모음곡이 있다.

포레[편집]

Gabriel Faure(1845-1924)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의 건물이 양쪽에 늘어서 생기없는 가로를 지나는 대신 포레는 향기높은 험한 길로 들어섰다. 그와 함께 우리들은 햇볕에 비쳐 물이 반짝이는 개울을 따라 거닐거나 녹음짙은 숲속을 가로지르며 끝없는 지평선을 바라보는 언덕의 비탈을 기어오르기도 한다"(샹피뉴르 <음악의 역사>). 포레는 에스파냐와의 국경에서 멀지 않은 남부 프랑스의 작은 마을 파미에서 태어나 남쪽의 포와에 가까운 몽고오지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 곳 사범학교의 교장으로 그의 부친이 임명되었기 때문이지만, 그 학교가 교사로 사용한 옛날의 수도원은 성당을 여전히 미사를 위해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어린 포레는 미사의 하르모니움의 주악에 열중하였다. 음악의 천분을 인정받은 포레는 파리의 고전 종교음악학교(통칭 니데르 메이에 학교)의 급비생이 되어 오르간, 피아노, 화성법, 작곡법 등의 폭 넓은 음악교육을 받았다(1854-1865). 그를 가르친 사람 가운데 생상스가 있다. 포레는 이 학교의 각 과목에서 1등을 하고, 졸업한 뒤 렌느의 성(聖) 소브르 성당을 시초로 몇몇 성당의 오르간 주자를 역임하였으며 이 직업의 마지막 경력은 파리 마들레느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였다. 한편으로 모교의 교수를 겸하면서 파리 음악원의 작곡법과 대위법 교수(1896), 그리고 1905년에는 음악원 원장(1920년까지), 1909년에는 예술원 회원, 1910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3등훈장 수훈자가 되는 등 점점 높은 지위에 올랐다. 작곡가로서는 1870년보다도 이전에 이미 최초의 가곡집을 발표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5월>, <토스카나의 세레나데>, <리디아>, <어부의 노래>, <꿈의 뒤에>, <호반에서> 등 지금도 애창되는 초기의 좋은 곡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널리 알려진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1876)도 역시 초기 대표작의 하나이다. 중기는 피아노곡을 많이 작곡한 시기로서―가곡으로는 제2, 제3의 가곡집에서부터 <사랑스런 노래>의 연대로서 대체로 1880년 이후 1907년경까지 포레의 스타일이 확립되고 기법이 원숙한 영역에 달한 시기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청춘의 감동과 소망'을 나타낸다고 콜트가 평한 바 있는 초기의 포레의 환희에 넘치는 젊음은 사라지고 점차 내성적인 뉘앙스가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베를렌의 시(1887년 <달빛> 이후)를 읽게 되고 대작 <레퀴엠>(1887-1888)의 작곡을 계기로 그 내성적인 통찰(洞察)과 세련된 관능의 일락(逸樂)은 점점 그 깊이를 더한다. 후기에는 <이브의 노래>(1907-1910)부터 <환상의 지평선>(1922)에 이르는 4개의 연작(連作) 가곡집과, <녹턴> 제9번(1908) 이후의 약간의 피아노곡 및 실내악곡, 오페라 <페넬로프>(1913)에 부수음악 <마스크와 벨거마스크>(1919)가 이에 속한다. 여기서 포레의 "이미 그 우아함과 애무를 잊었다. 적어도 일찍이 그것을 위해 가졌던 노력을 포기했다"고 어떤 평론가가 말하였거니와 한 마디로 말해 그는 수식에 지나지 않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성스럽고 단순함 속에서 준엄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부의 감동을 보이려 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예컨대 첼로 소나타 제1번(1918)의 끝곡과 같은 청춘의 기쁨과 삶의 행복이 소생하여 숨쉬고 있는 듯한 음악도 있다. 만년의 포레는 점점 악화하는 난청(難聽)에 뼈저린 절망을 하다가 1924년 11월,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죽기 얼마 전에 마지막 작품인 현악4중주곡(1924)을 들려주겠다는 것을 "나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라고 슬퍼하면서 거절하였다고, 그의 아들 필리프 포레 프레미에가 전하고 있다. 프랑스 예술가의 특유한 고전주의적 정신은 포레에게도 빈틈없이 확립되어 있었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서정가(抒情家)였다. 다만 "포레가 서정가라 해도 그것은 극히 소극적(E. 루터)"이었다. 그의 작품 중에서 그 수나 질에서 뛰어난 것은 가곡과 피아노곡이다. 특히 가곡은 때때로 프랑스의 가곡이 일찍이 이르지 못한 높이로 단숨에 끌어올렸다고도 하겠다. 근대가곡에서 프랑스의 영광은 드뷔시, 뒤파르크, 쇼송의 이름으로도 말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포레가 차지하는 위치도 그에 못지 않으며 부동(不動)하다는 것도 또한 확실하리라. 실내악곡은 비록 그 수는 많지 않으나 모두가 뛰어난 것이며 순수한 악기법적 면에서의 탐구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던 듯하여 무대음악이나 오케스트라곡의 관현악 편성을 때때로 제자에게 맡겨버릴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그의 무대음악이나 관현악곡은 아름다운 악상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으면서도 가곡, 피아노곡, 실내악곡에 필적할 중요성이 대체로 인정되지 못하고 있다. 후자의 탁월함을 낳은 순순한 서정성이 오페라나 교향적 작품의 대규모적인 전개에 적합하지 못한 성질의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실제로 교향적 작품은 수도 적고 극장을 위해서는 오페라보다도 부수음악을 쓰는 편을 그는 더 좋아한 듯하다. 종교(교회)음악에서는 앞서 말한 <레퀴엠>이 특히 뛰어난 작품이라 하겠다. 전통을 존중하며(허락된 범위 내에서 진취적이었던) 그의 조심성 있는 대담함은 이른바 혁명적인 것은 아니나 초기의 로맨티시즘을 억제하고 그 서법을 순화(純化)시켜서 스타일에 희유의 세련성을 부여한 포레의 의지와 노력은 감탄할 만하다. 그 의지와 노력이 그를 제1급의 거장, 프랑스 가곡의 확립자의 한 사람이며 또한 낭만파시대에서 근대로의 길을 개척한 인물로 만들었던 것이다. 프랑스 근대음악은 음악가이며 음악교육가였던 그에게 많은 것을 얻었다고 하겠다. 그것은 때때로 지적되는 가곡의 완성과 오랜 선법(旋法)에 유래하는 몇 가지 어법상(語法上)의 요소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후기 낭만파와 상징파시대를 같이 살면서"(E. 로베르) 프랑스적인 서정의 정수(精髓)를 파악하기에 이르렀던 심미정신이야말로 후세에 가장 귀중한 지침을 줬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의 제자에는 라벨, 샤를 쾨클랭(1867-1950), 슈미트 로제 뒤카스(1874-1954), 루이 오베르(1877- ) 같은 뛰어난 재능의 음악가들이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앞서 말한 것 외에 가곡으로 <이스파한의 들장미>, 베를렌의 시에 의한 <스프링>(1889), <5개의 가곡>(1890), <사랑스런 노래>(1891-1892), <감옥>(1900), 가곡집 <폐원>(레르베르크, 1915-1918), <신기루>(브리몽, 1919) 등이 있다. 피아노곡은 1863년부터 1921년에 걸친 즉흥곡 6, 뱃노래·<녹턴(夜想曲)> 각 13, 4손을 위한 모음곡 <도리>,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발라드>, <판타지아(幻想曲)> 등이 있으며, 실내악은 앞서 말한 것을 합쳐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 소나타, 피아노 4중주곡, 피아노 5중주곡 각 2, 피아노 3중주곡, 현악 4중주곡 각 1 등과 부수음악 <펠레아스와 멜리장드>(1898) 가 있다.

레퀴엠[편집]

requiem 포레 작곡, 작품48(1888). 레퀴엠이란 근대에 와서는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을 의미한다. 포레는 죽은 부친을 애도하는 뜻에서 작곡하여 1888년에 파리 마들렌 성당에서 초연하였으나 이 때에는 이미 모친도 사망한 뒤였다. 독창, 합창, 관현악 및 오르간을 위하여 쓰였으며 프랑스적인 섬세한 우아와 간소하고 엄숙함이 결정(結晶)된 감동적인 음악이다.

뒤파르크[편집]

Henri Duparc(1848-1933) 프랑크의 제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천재적인 음악가라고 한다. 그가 남긴 10여 곡의 가곡은 프랑스 가곡을 단숨에 독일가곡과 비견될 만한 것으로 올려놓았다. 파리 태생인 뒤파르크는 처음에 법률을 배웠으나 다른 누구보다도 빨리 프랑크에게 매혹되어 사사하였다. 댕디를 프랑크에게로 이끈 사람도 바로 그였다. 이리하여 1870년 전후에 이미 프랑크 아래에서 첼로 소나타나 그 밖의 몇몇 관현악곡, 피아노곡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들은 리스트의 교향시나 슈만의 피아노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나 훗날에 가서는 거의가 파기(破棄)되었다. 1872-1875년, 법률학에서 손을 떼고 작곡 공부에 전념하였다. 프랑크를 스승으로 받들었음은 물론이다. 다만 프랑크의 정신주의는 뒤파르크의 내부에 깊이 간직된 서정적 본성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약간이나마 왜곡시켰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바그너의 영향과 뒤파르크의 본성과의 행복한 합체가 후자의 서정적이며 더구나 극적인 스타일을 형성함에 있어 큰힘이 되었다고도 한다(M. 쿠퍼). 확실히 뒤파르크는 바그너에게도 깊이 매혹되었다. 최초의 가곡 <슬픈 노래>(1868)에 이미 바그너 화성법에의 동화(同化)를 볼 수 있음은 가끔 연구가들이 지적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가 애용한 이명동음적(異名同音的) 전환(轉換)이 바그너나 리스트풍의 감각에 바탕을 두고 있음에 반하여 프랑크류의 반음계적으로 움직이는 낮은음은 별로 쓰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뒤파르크에게도 교향시 <레노르>(1875)와 같은 작품이 있기는 하나 가곡의 뛰어남에 비하여 전혀 보잘 것이 없는 듯하다. 가곡은 1868년부터 1883년에 걸쳐 씌어진 13곡과 별도로 1870년의 5곡 등 모두 18곡이 있다(<라루스 음악사전>, 1957년판). 그러나 보통은 다음의 16곡이 입에 오르내린다. 즉 <슬픈 노래>, <탄식>, <갤롭>, <전쟁터가 된 나라에서>, <여행에의 유혹>, <파도와 종>, <엘레지(悲歌)>, <망아(忘我)>, <로즈몬드의 저택>, <피렌체의 세레나데>, <피디레>, <라멘트(哀歌)>, <전세(前世)>, <세레나데>, <미뇽의 로맨스>, <유언> 등이다. 이것들은 르콘드 드 리르, 테오필 고티에, 장 라오르, 보들레르 등의 시(詩)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뒤파르크의 가곡은 시구(詩句)의 처리에 있어 슈베르트의 발라드풍의 가곡, 피아노 부분, 그 중에서도 후주(後奏)에 관해서는 슈만의 가곡, 그리고 화성법과 관현악의 색채는 바그너의 영향이 보이지만, 물론 그런 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 프랑스시의 어감(語感)과 음악성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시에서 율동과 해조(諧調)와 억양을 택하고 거기서 말과 음악이 밀접하여 불가분의 협동을 이루어 세련된 뉘앙스 속에서 우수(憂愁)가 감도는 정감이나 이미지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이 협동이 때로는 어구(語句)와 음악의 형태상 자유로운 연관 위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포레와 일맥상통한 점이라 하겠다. 프랑스 가곡을 오늘의 지위에 끌어올린 4인의 작곡가 가운데에서 뒤파르크-포레라는 한 범주가, 쇼송-드뷔시의 그것과 구별되는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다. 뒤파르크가 가곡 외에는 소수의 작품을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파기해 버린 것이 자신에 대한 준엄한 비평의 결과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다만 그 당시 그의 심정은 어떤 상처를 입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1885년 이후, 신경증 때문이라고는 하나 뒤파르크는 재차 작곡을 하지 못하고 에스파냐에 가까운 몽 드 마르상에 은거하면서 비극적인 기나긴 불모의 후반생을 보냈다.

댕디[편집]

Vincent d'Indy(1851-1931) 프랑크의 수제자 가운데 한 사람. 독일음악의 강한 영향 아래 작곡가로 출발, 후에 점차 민족적인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국민음악협회(생상스 항목참조)의 서기를 거쳐 1890년, 프랑크가 죽자 그 뒤를 이어 회장이 되었다. 스승 프랑크의 정신을 전하고 그 원리에 따라 교육을 하려고 샤를 볼드(1863-1909, 프랑크 문하의 작곡가·교육자. 프랑스의 음악학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및 알렉상드르 기르만(1837-1911, 오르간 주자, 작곡가)과 협의하여 1896년에 스콜라 칸토룸을 개교, 원장이 되었으며 작곡법의 강좌도 담당하였다. 명저 <작곡법 강의>는 동교에서의 강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죽은 댕디는 아르데슈(남부 프랑스의 고원지방)의 오랜 귀족의 가계 출신으로 10대 초에 마르몽텔, 디에메, 라비냑과 같은 명교수에게 피아노, 화성법의 개인교수를 받았다. 보불전쟁(普佛戰爭) 때에는 보병 병장으로 참전하였고, 전후에는 파드르 관현악단에 소속하였으나 뒤파르크의 소개로 프랑크를 알게 되었고 파리 음악원에서 프랑크의 오르간 지도를 받기 위해 1873년에 입학하여 오르간뿐 아니라 작곡법에 관한 지도도 받았다. 그리하여 1875년에는 오르간 1등상을 받았다. 댕디의 음악활동은 광범위하여 앞서 말한 교회 오르간 주자 및 지휘자로도 활약하였으며 작품도 여러 분야에 걸쳐 많다. 젊었을 때 글루크, 베토벤, 베버에 심취, 그후 마이어베어, 특히 바그너에게 사로잡히기도 했다. 다만 "바그너의 모든 영웅을 혹사하는 대언장담의 히스테리"(드뷔시)를 경멸하고 오페라 창작에 바그너의 영향이 명백하면서도 크리스트교적인 사랑과 숭고한 단순함을 작품의 바탕에 두려고 노력하고 있다. 확고한 건축적 형태를 계속 추구했다는 점(특히 기악에서)은 후에 좋은 정신적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이는 베토벤에게 매혹된 그로서는 당연하다고 하겠다. 또 그레고리오 성가나 몬테베르디, 라모 등의 연구, 부활 상연 출판 등을 함과 동시에 민요에도 관심을 가져 민족적인 소재를 작곡에 사용―<프랑스 산(山)사람의 노래에 의한 교향곡>은 그 한 예―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제자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루셀이지만 그 밖에도 알베리 마냘(1865-1924)이나 민요를 소재로 사용하거나 또는 지방색을 추구했던 부르고 듀크드레(1840-1910), 두다 드 세브라크(1873-1921), 죠셉 칸트루브(1879-1955) 등도 알려져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발렌슈타인>을 위한 새 서곡(1873-1881), <프랑스 산사람의 노래에 의한 교향곡>(1886), 교향시 <이스타르>(1896), <제2교향곡> <제3교향곡>(1903-1918), <신의 여름날>(1905), <해변의 시>(1921), 극음악 <종의 노래>(1883), 오페라 <페르바알>(1897), 오페라 <이방인>(1901-1903), 오페라 <성 크리스토프 전설>(1915-1920) 등 각 분야에 이르고 있다.

프랑스 산사람의 노래에 의한 교향곡[편집]

Symphonie sur un c­hant montagnard fran ais 댕디 작곡, 작품25(1886). 일종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볼 수 있는 편성으로 작곡된 3악장의 민중성이 있는 음악. 자연을 사랑한 댕디는 해마다 여름이면 세반느 지방의 산장에서 지냈다. 거기서 목동의 노래나 산마을의 민요를 주제로 하여 작곡한 것이 이 교향곡이다. 제1악장의 제1주제가 이 곡을 일관하는 주요 주제이다. 소박한 전원적, 목가적인 풍정(風情)에 특색이 있다.

쇼송[편집]

Ernest Chausson(1855-1899) 역시 프랑크의 수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프랑스 근대가곡을 완성으로 이끈 공로자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법률을 배웠으나 25세 때 파리 음악원에서 마스네에게 작곡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파리 태생이면서도 매우 내성적이며 화려함을 싫어한 쇼송의 기질이 마스네의 도시풍이며 관능적인 작풍에 반발하여 그 해에 마스네의 문하에서 떠나 프랑크의 문하로 들어갔으며 거기서 그의 재능은 개화하였다. 그리고 1899년, 그의 별장이 있던 파리 교외의 리메에서 자전거사고로 세상을 뜨기까지 그는 충실한 프랑크의 제자로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몽상과 우수의 음악가였으며 또한 이상주의자였다. 그 이상주의는 역시 같은 이상주의자였던 프랑크의 그룹과 접근하고 또한 바그너에게 심취, 그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더욱 고무됨과 동시에 때때로 극단적인 면까지 보여 독특한 서정의 자연스러운 흐름마저 방해했던 성싶다. 섬세한 그의 음악서법이 때로는 너무나 복잡하게 내부에 침식한 사고(思考)로 중압감을 받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만학(晩學)도 큰 핸디캡이 되었을 것이며 또한 그는 경제적으로 풍족하여 작품을 서둘러 '팔' 필요는 없었으나 그것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시간을 그에게 충분히 확보케 해주는 반면, 경우에 따라서는 작품에 아마추어의 성격을 부여하고 아울러 공표되지 않은 채로 지나치게 손질을 하게 된다는 폐단마저 가져왔다. 그러나 그러한 결점을 면하게 되었을 때의 쇼송의 음악은 감미로운 멜로디와 우아한 관능 가운데 사람의 마음속에 파고드는 더할 나위 없는 시정(詩情)이 감돌고 있다. 그의 가곡이 드뷔시, 포레, 그리고 뒤파르크와 함께 프랑스 가곡의 완성에 기여했다고 하는 것도 <사랑과 바다의 시>(1882-1892), <벌새>(1882), <세레나데>(1887), <온실>(1893-1896), <끝없는 노래>(1898)와 같은 그의 아름다운 음악적 재질을 보이는 수작(秀作)이 가곡 작품에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가 청년시대의 드뷔시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앞서 말한 것을 포함한 다수의 가곡, <교향곡 내림B장조>(1890), 피아노와 바이올린과 현악 4중주를 위한 <협주곡>(1891),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시곡(詩曲)>(1896), 오페라 <아르튜 왕>(1903 초연) 등이 잘 알려져 있다.

드뷔시[편집]

Claude Achille Debussy "드뷔시는 모든 음악가로 하여금 화음의 감각을 되살아나게 했다. 형식에서의 베토벤, 대위법에서의 중요성은 바흐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이 아름다운 송사(頌辭)는 바르토크가 드뷔시에게 바친 것이다. 바르토크의 송사에는 그 자신의 음악관이 간직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이론(異論)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화음의 감각을 소생시켜 주었다는 점에서는 드뷔시의 공적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모차르트나 드뷔시와 같은 뛰어난 천재"라는 표현을 쓰는 미요도 드뷔시에게서 화성법의 세련됨을 엿볼 수 있다고 하였다. 더구나 근년에 와서 드뷔시가 리듬이나 형태의 영역에 미친 지대한 영향에 대해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드뷔시는 파리의 서북 약 15km에 위치한 상제르망 안 레이에서 1862년에 태어났다. 부친은 도자기 제조판매업을 했으나 영업이 부진하여 상점을 정리한 뒤 파리 내외를 전전한 끝에 1867년의 후반기에 파리에 정착하였다. 그런 만큼 늘 경제형편이 좋지 못하였다. 만약 백모(伯母)인 클레망티느가 피아노를 가르쳐 주지 않았더라면 드뷔시는 과연 음악가가 되었을는지도 의심스럽다. 부모는 아들을 선원으로 만들려고 했다고도 한다. 드뷔시가 백모의 후원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9세 전후라고 추정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로부터 피아노에 마음이 사로잡힌 소년의 천재성을 시인 베를렌의 장모 모테 드플뢰르비유, 즉 앙투아네트 플로르 모테 부인이 발견하고, 부인은 소년을 음악가로 만들 것을 부모에게 설득하여 자신이 직접 소년에게 피아노를 가르친다. 부인이 세간에서 말하듯이 쇼팽의 제자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우수한 교사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소년이 천재로 태어났다 해도 단시일의 교육으로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872년 가을, 드뷔시는 10세에 파리음악원의 라비냑의 솔페쥐 클라스와 마르몽텔의 피아노 클라스에 입학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드뷔시의 파리 음악원에서의 성적은 다음과 같다. 1876년, 솔페쥐의 클라스를 제1상패(賞牌)로 수료, 1877년에는 피아노로 2등상. 그러나 2년 후에도 1등상은 얻지 못한 채 수료한다. 1880년, 피아노 반주과를 1년 재적했음에도 불구하고 1등상으로 졸업. 1877-1880년 듀랑 문하에서의 화성법 공부는 '참된 화성법의 세련'을 언젠가는 나타낼 재능의 청춘에 아무런 상도 가져오지 않았다. 에르네스트 기로(1837-1892·뒤카, 제다르쥐, 뷔세르들도 가르쳤으며 <카르멘>의 레치타티보를 작곡. 박식한 작곡가이며 교사)의 작곡법 교실에서는 1882년에 '대위법과 퓨그'로 2등상을 받아 로마상 콩쿠르의 참가가 허락되었다. 그리고 칸타타 <탕아(蕩兒)>로 역시 이 콩쿠르에서 84년에 대상(大賞)을 받는다. 즉 파리 음악원학생으로 12년을 보낸 그는 피아노의 비르투 오소는 되지 못하였으나 작곡가가 되기 위한 빛나는 출발에는 성공한 셈이었다. 또한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남긴 음악원 시대의 일로는 바그너의 발견과 경도(傾倒), 차이코프스키의 보호자 드메크 부인의 피아니스트가 되어 프랑스 내외의 각지를 부인과 함께 순회하며 보로딘을 비롯한 러시아 음악을 알게 되었다는 점(1880-1882의 각 여름), 성악가 모로 상티 부인의 살롱에서 반주 피아니스트로 일하고(1880 이후) 바니에 부인과 친해졌다는 점 등을 들 수 있겠다. 바니에 부인은 법원의 건축관계 서기 아내로서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며 아마추어이면서도 노래에 뛰어나 드뷔시의 최초의 안스피라트리스(영감을 우러나게 해주는 여성)였다. 더구나 부처(夫妻)의 서가와 살롱에서 지난 날 정식으로 일반교양을 받은 적이 없는 그는 배운 바가 많았던 성싶다. 부처 딸의 추억담이나 <만돌린>을 포함한 최초기의 베를렌에 의한 여러 가곡이라든가 말라르메에 의한 <출현>(1884) 등이 바니에 부인에게 헌정된 것으로 보아 그렇게 짐작된다. 로마 대상(大賞)의 수상자는 프랑스 예술원이 로마에 가지고 있는 메디치장(莊)에서의 생활을 보증받고 창작에 전념할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 그러나 드뷔시는 대선배 베를리오즈와 같이 메디치장에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의무로 된 최소한의 2년을 마치자 지체없이 파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규정된 유학작품(앙보프 드 롬)마저 로마에서 완성한 것이 없을 정도로 메디치장(莊)에서는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곳에서 바니에 씨에게 보낸 편지는 동료인 비달이 지나친 과장으로 보았을 만큼 격렬하게 당시의 매일이 얼마나 견딜 수 없는 것이었는가를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편지의 어떤 부분에서 바그너를 배우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주장하고 있음은 그가 당시까지 열렬한 바그너파였던 만큼 매우 흥미있는 일을 생각하게 해준다. 로마에서 돌아온 드뷔시는 어법(語法)과 양식(樣式)을 발견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시도하면서 뼈저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전통의 낡은 먼지'를 지금이야말로 털어버릴 때라고 생각했던 만큼 그는 그 천재로써도 남모르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바니에 부인에게는 이끌리면서도 그 부르주아풍의 살롱에서 발이 뜸해지고 대신 상징파의 시인들과 어울리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상징파의 시인들은 '전통의 낡은 먼지'를 털어버리겠다는 점에서 말하자면 그의 동지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감정의 직역(直譯)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을 피해"(뒤카) 암시로 "하나의 심상(心狀)을 나타내기 위해 스스로 물상(物象)을 환기시키고 또는 이와 반대로 하나의 물상을 취하여 몇 차례씩이나 규명(究明)한 뒤 여기서 하나의 심상을 이탈시키려"(말라르메)하는 상징파의 시법(詩法)은 음악의 영역에서 드뷔시가 시도하려던 것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드뷔시는 즐겨 상징파의 시를 가곡으로 다루었으며 "그 음악은 보통의 음악방식으로서, 이와 같은 시의 영상환기적(影像喚起的)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노력은 시구(詩句)의 가장 먼 해조음(諧調音)을 기록하고 텍스트가 암시하는 모든 것을 파악하여 그것을 음악적 표현의 경지에까지 옮긴다는 점에 있는 듯이 생각된다. 그의 작곡의 대부분은 이리하여 상징의 상징인 셈이 되며 그러한 작품은 그 자체가 매우 풍부하며 설득력에 찬 말로 표현되고 있으므로 그 말은 때로는 그 자체의 안에 고유한 법칙을 지니고 있는 바의 새로운 말이 되고 그것이 주석(註釋)하는 시편(詩篇)의 말보다도 훨씬 이해하기 쉬운 말의 웅변으로까지 이르고 있을 정도이다"(뒤카, <음악평론집>). 물론 드뷔시는 그러한 음악에 단번에 이른 것은 아니다. 로마 체재 중에 작곡된 약간의 가곡을 포함하는 <작은 노래>(1886-1888. 후에 <잊혀진 작은 노래>로 개제. 베를렌의 6편의 시에 의함), <보들레르의 5개의 시>(1887-1889), <3개의 가곡>(베를렌의 시, 1891), <화려한 잔치·제1집>(베를렌의 시 3편에 의함, 1891), <서정적 산문>(작곡자의 시 4편에 의함. 1893)과 같은 가곡들이나 또는 D. G. 로제티의 시의 프랑스역으로 된 칸타타 <간택된 소녀>(1887-1888), 그리고 <2개의 아라베스크>(1888), <몽상>, <스티리풍 타란텔라(후에 춤곡으로 개제함)>, <베르가마스크 모음곡>(모두 1890)과 같은 피아노곡 등에 의하여 마스네라든가 샤브리에, 보로딘, 또는 쇼팽, 바그너 등의 영향을 점차로 여과(濾過)시키면서 그의 어법과 스타일은 형성되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현악4중주곡>(1892-1893)을 거쳐 말라르메의 장시에 붙인 관현악곡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1892-1894)으로 그것은 일단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드뷔시는 말라르메와 그의 '화요일의 모임'에 초대받은 단 하나의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러한 그가 말라르메의 걸작에서 잉태한 <전주곡>―그의 이른바 '말라르메 시의 텍스트 행간에 씌어진 장식'―에서 자기의 독특한 스타일(미학적 의미에서)을 확립하였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하겠다. 그러나 순수하게 음악기법의 면에서 고찰할 때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에는 리트 형식과 융합한 듯한 형태로 소나타 형식, 즉 고전파 이후의 악식 패턴이 남아 있다. 그런데 <녹턴(夜想曲)>(1897-1899)에서는 그러한 전통적인 주제적 구도에서 그는 극히 자유로워지고 있다(특히 제1곡 <구름>을 참조). 다른 말로 표현하면 베토벤적인 전개에 의해서 그것은 이미 탈피에 성공했다고 하겠다. 때때로 음악상의 인상파를 대표한다는 말을 듣는 드뷔시의 어법 내지 스타일은 앞서 나온 것에 덧붙여 무소르그스키의 본능적인 음악으로부터의 계발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 음악적으로는 기능적 조성의 선법성(旋法性)과 울림의 매혹이라는 두 가지 면에 대한 극복을 현저한 특색으로 하지만 전통적인 주제법에 기능적 조성과 불가분으로 조형(造型)되어 왔음을 생각하면 후자의 극복으로써 성립되는 드뷔시의 스타일을 이미 전통적인 주제법에 의존하지 않으려고 하기에 이른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녹턴>이 작곡된 것은 친구인 상징시인 피에르 루이스의 시 세편으로 된 명작 <빌리티스의 노래>(1897-1898)나 모음곡 <피아노를 위하여>(1896)와 거의 같은 시대, 그리고 작곡자에게 거장의 지위를 준 대작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의 작곡과 함께 시기적으로 겹치고 있다.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벨기에의 상징파 시인 마테를링크의 동명(同名) 희곡을 대본으로 하여 1893년부터 1902년에 이르는 약 10년의 세월을 거쳐 완성되었다. 좀처럼 초연의 가망이 보이지 않아 상연날을 기다리면서 손질을 하는 동안 10년이 흘렀다는 면도 있으나 사실 드뷔시가 온 힘을 기울인 노작(勞作)이며 바로 그러한 점에서 크게 성공한 걸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펠레아스>의 10년은 <현악 4중주 곡>,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에서 <펠레아스>에 이르는 10년이라 하여도 무방하며 이는 드뷔시의 어법 내지 양식이 확립되어 확인된 시기라고도 하겠다. <펠레아스>는 또한 지난날의 열렬한 바그너파였던 드뷔시가 1888, 1889년에 계속해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 다닌 끝에 시와 음악과 극에서 너무나도 세세하게 말하고 설명하는 바그너의 악극작법에 의문을 품고 그것을 추구하여 "모든 것을 반 정도의 표현에 그치는" 시(詩)로써 "그 꿈에 자기의 꿈을 이어 붙이기 위하여" 쓴 작품이다. "무엇이건 극의 템포를 느리게 해서는 안 된다. 말이 요구하지 않는 음악의 전개"는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였으며 이는 반(反) 바그너의 입장에 그가 섰음을 명백하게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은 드뷔시의 말). 즉 <펠레아스>는 형태 면에서 바그너를 회상시키는 점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어도 개성적인 충실면(充實面)에서는 '바그너를 초월하여' 쓰인 최초의 오페라이다. 그리고 드뷔시는 바그너의 음악에서 어떤 것은 그 뒤에도 애호하였으나 오페라에 대해서는 엄격한 비판을 하고 있었다. <펠레아스>는 드뷔시로 하여금 레지옹 도뇌르 5등훈장을 타게 했다. 그것을 그는 다만 양친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받았을 뿐 그러한 성공에 만족하려 하지 않았다. <펠레아스>에서 이른바 바그너를 초월했던 그는 이번에는 스스로가 <펠레아스>를 초월해야만 했었다. 이와 같은 쉽지 않은 과제에 답한 것이 <바다>(1903-1905)이며, 이 곡을 중심으로 하는 40대의 다산(多産)시기의 작품들은 걸작이었다. <바다>를 계기로 드뷔시의 창작자세에는 어떤 전환이라기보다 발전이 발견된다. 이는 <펠레아스>까지에 확립된 양식을 기반으로 하면서 전적으로 내적인 세계로만 향하고 있던 관심을 외부로 돌려 외계와의 접촉을 다하는 것이다. 피아노곡 <판화(版畵)>(1903)나 <환희의 섬>(1904)은 그러한 뜻에서 아직 과도적이나, <영상(影像) 제1집, 제2집>(1905, 1907)은 <바다>에 통한다. 그리고 피아노곡 <어린이들의 영역>(1906-1908)이나 <관현악을 위한 영상>(1 <지그> 1909-1912, 2 <이베리아> 1906-1908, 3 <봄의 론도> 1908-1909) 등에서는 그 관심이 인간의 삶으로 돌려진 듯하다. 그리고 <어린이들의 영역>은 사랑스런 딸 슈슈에게 헌정되고 있다. 슈슈는 드뷔시가 <펠레아스> 작곡 중에 결혼한 첫 부인과 헤어진 뒤, 1905년에 재혼한 부인 에마와의 사이에 태어난 외동딸이다. 드뷔시는 슈슈를 무척 귀여워하였으나, 그녀는 그가 죽은 후 1년 뒤에 요절하였다. <전주곡집 제1권>(1909-1910)이나 <비용의 발라드>(1910) 등을 고비로 하여―라 해도 그것은 가치의 문제가 전혀 아니며, 2개가 모두 그의 최상의 작품에 속하지만―드뷔시는 창작에서 또다시 새로운 국면을 나타내고 있다. "이미 획득한 스타일을 지배하고 일종의 금욕으로 그 예술의 정수(精髓)에 이르기 위해 모든 것을 골라 체에 거르는"(펠쇼) 것과 동시에 "만약 그가 보다 오래 생명의 불을 태울 수 있었다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어떤 전개를 보였을 것이다"(펠쇼)라고 생각게 할 만한 새로운 시도를 보였던 시기이다. 그러한 시도로서는 <성 세바스찬의 순교(殉敎)> 음악(1911), 발레곡 <유희>(1912),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집 제2권>(1910-1913), <12의 연습곡집>(1915), <백과 흑으로>(위와 같음), <말라르메의 3편의 시>(1913), <지금은 집이 없는 아이들의 성탄제>(1915), 그리고 바로 프랑스 고전기의 소나타 추억인 3개의 소나타(첼로와 피아노·1915, 플루트와 비올라와 하프·1915, 바이올린과 피아노·1916-1917) 등이 이어 작곡되었다. 이것을 만년(晩年)이라고 한다면 정말 풍요한 만년이나 사실은 병약한 몸과 제1차대전의 충격이 그를 특히 괴롭혔으며, 그리하여 1918년 3월 25일 밤 마침내 그는 암으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드뷔시는 "감수성과 형태(포름)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세계를 탐구하기 위해 삶을 바친"(드뷔시) 음악가이다. 그러나 결코 무비판적으로 새롭고 기이한 것만을 좇는 성격은 아니었다. 다만 역사상 굴지의 천재가 "자기로서는 절대적으로 소중한 개성"(드뷔시)의 진실과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주변의 여러 상황과 준엄한 대결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상황은 바그너 이후 낭만파가 여러 가지 뜻에서 좌절 직전에 있었다. 드뷔시는 '귀'를 대결의 주력으로 하여 많은 것을 새로 시작해야만 했다. 이리하여 그의 천재가 처음으로 이룩한 새로운 미(음악)이식의 층(層) 발견에 의한 비약이 생겨났다. 그것은 결정적이었다. 때문에 여류시인 라실드가 베를렌을 평하여 "그는 창을 열었다"라고 한 말이 그대로 드뷔시에게도 해당된다고 하겠다. 그는 열었다. 그 창은 19세기에서 20세기를 향하여 연 창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를 빼고는 20세기의 음악사를 말할 수 없다고 하겠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편집]

牧神-午後-前奏曲 드뷔시 작곡(1894). 프랑스 상징파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 <목신의 오후>에서 영감(靈感)을 얻어 그 기분이나 인상을 음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나른한 여름의 오후, 숲의 그늘에서 졸고 있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목인(牧人). 꿈속에서 부는 갈대피리, 물가에서 목욕하는 요정(妖精)의 아름다운 환영(幻影), 여신 비너스를 포옹하는 환상…드뷔시는 색채적인 악기의 사용법이나 농밀한 관능적 분위기의 표현에 새로운 시도를 더하여 절묘한 감각적인 미를 창조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인상파 음악의 한 전형으로서 통속곡으로까지 되었다.

3개의 녹턴[편집]

三個-nocturne 드뷔시 작곡(1899). 녹턴 또는 녹튀르노는 흔히 야상곡(夜想曲)이라고도 번역되나 이 말에서 느껴지는 인상과 빛·그늘과 같은 내용에서 제명을 지었다고 드뷔시는 말하고 있다. 제1곡 '구름'은 느릿하고 멜랑콜릭한 움직임으로 흘러 회색의 색채 속으로 사라진다. 제2곡 '축제'는 축제의 흥겨움과 분위기의 운동이며 춤추는 리듬이 강렬하게 퍼졌다 다시 조용해진다. 제3곡 '시레느'는 바다에 사는 요정의 목소리처럼 여성합창이 가사 없는 노래를 조용히 매혹적으로 들려주며 그 효과는 매우 훌륭하다. 섬세한 음빛깔의 감수성에 의하여 전적으로 독자적인 인상주의적 음악을 그는 창조하였던 것이다.

3개의 교향적 스케치 바다[편집]

三個-交響的 sketch- 드뷔시 작곡(1905). 드뷔시의 최대 관현악 작품이며 또 대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수시로 변하는 바다의 인상(印象)이나 분위기를 묘사한 음의 풍경화이다. '해상의 새벽부터 낮까지', '파도의 유희', '바람과 바다의 대화'의 3부분이 각기 관련성을 지니고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바다를 묘사하였다기보다는 그 순간의 인상이나 이미지를 음빛깔이나 뉘앙스로서 파악하려고 한 것이다.

뒤카[편집]

Paul Dukas(1865-1935) 뒤카는 엄격한 비판의식으로 일관한 고매한 작곡가이며 예리한 이해력을 갖춘 엄정한 비판가이다. 게다가 그러한 음악가로서의 자질에 덧붙여 넓고 풍부한 교양을 지닌 성실한 교사였다. 파리 음악원에서는 기로의 작곡법 교실에서 배웠으며 동문(同門)인 드뷔시와도 평생을 두고 친교(親交)를 맺었으나 같은 길을 걷지 않고 오히려 베토벤, 바그너를 모범으로 하여 프랑크나 댕디 음악의 건축적인 구성에 이끌렸다.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죽었다고는 하나 가계(家系)에는 스트라스부르인(人)의 피가 있다고 한다. 파리 음악원에서는 '대위법과 푸가'로 1등상을 받았으나 로마 대상 콩쿠르에서는 2등상에 그쳤다(1888). 1892년 <폴리우크트>를 위한 서곡을 작곡, 그 뒤 20년 동안에 십수 곡을 썼을 뿐인 과작으로 더구나 일반의 갈채를 받은 것은 교향시 <마술사의 제자>(1897)뿐이라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뒤카의 재능을 낮게 평가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과작은 그의 경우 자신에 대한 비판이 준열하였다는 증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판을 견뎌내고 남게 한 모든 작품은 어느 것이나 되풀이하며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마술사의 제자>는 프랑스가 낳은 교향시 가운데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의 하나라 하겠으며 확연히 구성된 스케르초가 서술묘사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마단조 피아노 소나타(1900)는 "고전적인 형태에 낭만적인 정신을 깃들여", "피아노의 영광을 위하여 구축된 가장 장대한 기념비로서 리스트의 소나타 곁에 모습을 나타낸"(N. 뒤푸르크) 걸작이다. 이에 비견되는 피아노곡이 <라모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간주곡 및 종곡>(1903)이다. 거장에 의하여 쓰인 거장을 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변주는 물론 눈앞의 변화를 시름없이 추구하는 손끝의 잔재주는 아니다. 마음의 깊이, 규모의 크기, 기본적인 조형의 확고함이라는 점에서 바로 베토벤에 육박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뒤카는 오히려 게르만적인 음악전통에 많이 의거하고 있으나 그 작품의 지적인 면에는 프랑스적인 기하학적 정신이 현저하며, 또한 동료인 드뷔시가 개발한 섬세한 감수성의 화원에서 꽃을 우러러, 자기 자신의 건축물에 그 아름다움과 향기를 옮기려는 시도도 하고 있다. 그러한 여러 가지를 개성의 내부에 융합시킨 그의 확고한 예술은 후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하기야 그의 영향이라면 파리 음악원과 에콜 노르말에서의 교직을 통해 끼친 것도 경시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는 죽음의 바로 직전에 브뤼노의 후임으로서 예술원회원에 선출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앞서 말한 작품 외에 교향곡 다장조(1896), 오페라 <아리안과 푸른 수염>(마테를링크의 시, 1907), 발레곡 <라 페리>(1912) 등이 있다.

교향시 마술사의 제자[편집]

交響詩 <魔術師-弟子> 뒤카 작곡(1897). 동명의 괴테 담시(발라드)를 스케르초풍의 스타일로 음시화(音詩化)한 곡. 마술사인 스승이 출타 중에 게으름뱅이 제자가 스승 흉내를 내어 비에 대고 주문을 왼다. 그랬더니 비는 무서운 속도로 양동이의 물을 나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멈추게 하는 주문을 잊었기 때문에 집안이 온통 물바다로 변하였고 스승이 돌아와서야 겨우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마술의 비가 물을 나르는 주제를 론도풍으로 몇 번이고 반복하여 그 때마다 새로운 변주를 더하면서 긴박해지는 정경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로테스크하고 유머러스한 이 음악은 관현악법의 교묘함과 함께 사람들에게 통속극으로서의 친근감을 준다.

사티[편집]

Alfred-Erikit Leslie Satie(1866-1926) 프랑스의 근대작곡가 가운데 으뜸가는 이재(異才). 노르망디인을 부친으로 하고 스코틀랜드인을 모친으로 하여 옹플루르에서 태어났다.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나 아카데믹한 교풍에 반발하여 몽마르에 살면서 문학서를 탐독하거나 삼류술집의 피아노를 치며 생활을 하였다. 이처럼 자유로운 나날을 보내는 한편 그는 그레고리오 성가와 중세에 이끌려 <오지브(Ogives, 尖弓形)>와 <사라반 드>, <3개의 그노시엔스>, <3개의 짐노페디> 등을 피아노를 위하여 작곡했다(1890 전후). 이처럼 단순한 형태와 그것에 익숙해지는 대담한 화음은 어법을 추구하던 드뷔시나 라벨을 기쁘게 하고 계발시켰다. 또한 사티의 반(反)바그너는 드뷔시의 음악에 공감(共感)함으로써 <별의 아들>(1891)과 같은 파로디를 낳았다. 그러나 드뷔시의 인상파(라고 불리는) 양식이 이윽고 승리를 거두자 사티는 그것에도 반발하기 시작한다. 그의 반골정신(反骨精神)을 나타내는 듯 <배(梨)모양을 한 3개의 곡>, <메마른 태아(胎兒)들>, <물컹물컹한 3개의 전주곡>과 같은 야릇한 제명은 드뷔시 등의 시적인 표제를 야유하기 위하여 당시의 피아노곡에 붙였다고 하나 음악의 실질은 실제로 풍자적이거나 해학에 차있지도 않다. 요컨대 이는 일종의 정책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1905년 기술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스콜라 칸토룸(댕디 항목 참조)에 입학, 루셀 아래에서 대위법과 퓨그를 배웠고 1908년에 졸업하였다. 제1차대전이 시작되자 병장으로 아르퀴유 지구의 경비병이 되었다. 그리고 1898년 이후 사망하기까지 이곳 주민으로 생활하였다. 1915년 콕토와 알게 되고 그의 대본으로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무용단을 위한 발레곡 <발라드>를 작곡, 피카소 등의 협력을 얻어 상연(1917), '큐비즘의 발레'로서 주목을 받았다. 이는 종전에 앞서 전후에 있어서의 반전전파현상(反戰前派現象)을 예고한 것이라고도 하겠다. 이러한 사티의 행동반경(行動半徑)은 그로 하여금 제1차대전의 전후파인 '6인조'보다 선배로서 숭앙받게 했으며 실제로 자신도 <소크라테스>(1920)로 전후(戰後)의 신고전주의를 크게 추진시키게 된다. 또 '가구(家具)의 존재와 같은 음악'을 주장하였으나 그것도 전후파의 미의식(美意識)의 부정(否定)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그 밖에 다다이즘극(劇) <메두사의 함정>이나 쉬르리얼리즘 발레 <금일휴연(今日休演)>에도 협력하고 있다. 최만년(最晩年)에 이르자 소오게, 데조르미에르 등이 그 주변에 모여 이른바 아르퀴유 악파를 이룩했다. 항상 그가 청년들의 공감을 얻고 있었다는 점은 그의 음악에 심각한 어떤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가 근대·현대음악의 예언적 존재였으며 그가 주변에 준 영향은 적지 않으나 그 작품이 바로 성공작 <소크라테스>의 객관성과 높은 밀도를 항상 구현하였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루셀[편집]

Albert Roussel(1869-1937) 작곡가. 음악의 구조 면에서는 프랑크의 사고방식에, 울림이나 선법(旋法)의 처리라는 면에서는 드뷔시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인상파적인 표현에 기울어지고 있을 때에도 "선묘(線描)했다"(R. 베르나르). 프랑크처럼 상당히 늦게 개성적인 양식을 확립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거기서는 그가 받아들인 서로 반대되는 영향을 훌륭하게 종합·소화시켜 규모가 크고 격조가 높은 고전적·전인적(全人的)이며 견고한 음악 건축을 자기 것으로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뜻에서 뒤카의 정신적인 후계자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869년 북프랑스의 투르쿠앙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부모를 잃어 숙부 밑에서 자랐다. 숙부는 그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게 하고 그는 음악의 천분(天分)의 편린(片鱗)을 보였다고 하지만 그가 걸은 길은 참으로 음악가가 걷는 그러한 길이 아니었다. 즉 그는 바다를 동경하여 해군사관학교를 졸업, 장교가 되어 동양으로 항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도 있고 하여 군에서 떠나 다시 어릴 적부터 사랑했던 음악에 전념할 결의를 굳혔다. 25세 때 다시 파리로 나와 지구(생상스 항목 참조)에게 사사하여 작곡법을 배웠다. 수년 후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 댕디의 작곡법 강의를 수강하였다(1898-1907). 그러나 이미 지구에 의하여 대위법 기술을 익히고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 당시는 벌써 작품이 출판되었을 정도의 루셀이었으므로 이례적으로 재학 중부터 대위법 강의를 위임받아 이후 12년에 걸쳐 재직하며 많은 작곡학생을 지도하기에 이르렀다(1902-1914). 이리하여 스콜라 내외에서 그가 가르친 학생 가운데에는 사티, 발레즈, 로랑 마뉴엘, 마르티느 등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동안 1908년에 결혼, 아내와 함께 1909년부터 1911년에 걸쳐 유럽 각지와 동양을 여행하였다. 동양에서는 인도음악에 접하여 흥미를 가졌고 그 선법을 연구하여 후에 그것을 자기 작품 속에 채택하기도 했다(오페라 발레 <파드마바티> 작품18, 1914-1918 등). 제1차대전이 발발하자 루셀은 이미 퇴역중이었으나 전선에 갈 것을 지원한다. 그가 무사히 근무를 마친 것은 음악사에 있어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그가 개성적인 성숙을 보인 것은 그 뒤의 작품부터였으기 때문이다. 루셀의 창작은 대략 다음과 같은 3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댕디, 프랑크 등의 영향이 짙은 제1기(예컨대 작품2의 바이올린 소나타, 1907-1908). 스콜라풍의 형식감이 인상파풍의 음향감과 행복한 결합을 보이는 제2기(교향곡 제1번 <숲의 시> 작품7, 1905-1907, 독창과 합창 및 관현악을 위한 <에보카시옹> 작품15, 1910-1912, 발레곡 <거미의 향연> 작품17, 1012 등). 그리고 앞서 말한 작품18과 작품22(교향시 <봄의 축제에>, 1920), 작품23(교향곡 제2번, 1919-1921) 정도를 과도기로 하여 인상파로부터 탈각하여 거장의 개성적인 성숙을 보이는 제3기(작품에 대하여서는 후술의 주요 작품 부분 참조). 제1기에서는 직접 영향을 받은 프랑크와 그 배후인 바그너 외의 독일음악의 영향도 엿볼 수 있겠다. 제2기는 말할 나위 없이 드뷔시의 영향. 그러나 그러한 시기에서도 확연한 형태와 선적(線的)인 사고(思考)와 생명력에 찬 리듬에의 개성적인 추구가 두드러져 있다. 제3기에 이르러 그의 근저에 있는 고전적인 의사가 바흐, 베토벤에의 회상을 때로는 간직하면서 확신으로써 확립되나 그러한 자세는 그가 음악의 새로운 지평(地平)을 추구하여 이국풍의 선법이나 다조(多調) 내지 무조적(無調的)인 음의 처리를 채택한 것에의 방해가 되지는 않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그에게서 태어난 제3교향곡·작품42(1929-1930)를 정점으로 하는 탁월한 작품군(作品群)이 당시의 프랑스에 교향곡이나 실내악곡에 대한 경의에 찬 관심을 소생시키는 대추진력이 되었던 것이다. 또 <바카느와 아리안느(디오니소스와 아리아도네)> 작품43(1930)이나 <아이네아스> 작품54(1935)와 같은 발레곡은 리듬이 뛰어난 역할을 하는 그의 어법(語法)과 그 찬연한 관현악법으로 유감없이 나타낸 풍부하고 힘찬 수작이라 하겠다. 그런 것들은 제3기의 교향곡, 모음곡, 협주곡과 함께 루셀의 최량 작품에 속한다. 루셀은 만년에 와서는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력은 더욱 왕성해지는 듯했다. 그는 1937년 8월 23일, 루아앵에서 사망하였으며 그가 죽은 해에도 현악 3중주곡을 작곡하고 있다. 더구나 이 곡은 "프랑스 실내악곡의 가장 걸출된 작품의 하나"(뒤푸르크)로 높이 평가되는 명작이다. 그의 이지적이며 남성적인 작풍은 프랑스 음악이 그 세련된 섬세함에서만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는 우리 나라에서는 별로 친근감을 주지 못하고 있으나, 그의 음악은 말할 나위도 없이 훨씬 더 알려져야만 할 우수한 프랑스의 작곡가의 한 사람인 것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앞서 말한 것 외에 모음곡 바장조 작품33(1926), 피아노 협주곡 작품37(1927), <시편 80번> 작품37(1928), 관현악을 위한 소모음곡 작품39(1929), 플루트 3중주곡 작품40(1929), 현악 4중주곡 작품45(1931-1932),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과 푸가(바흐에 헌정함)> 작품46(1932-1934), 교향곡 제4번 작품53(1934), 첼로 협주곡 작품57(1936), 그 밖의 가곡 피아노곡에도 좋은 곡이 있다.

라벨[편집]

Maurice Joseph Ravel(1875-1937) 작곡가. 프랑크, 구노의 세대, 나아가서는 포레, 드뷔시의 시대를 계승한 이른바 프랑스 제3세대의 대표적인 존재. 사티나 드뷔시에게서 화성이나 형식면의 영향을 받으면서 파리 음악원에서 배운 포레, 제달지 등의 전통적인 교육이 평생을 두고 강하게 지배하였다. 그리고 고전주의적인 균형을 이상으로 하여 프랑스 고전주의의 전통과 에스프리를 갱신하였다. <하바네라>, <서거한 왕녀를 위한 파바느>, 3막희극 <에스파냐의 때>, <볼레로> 등 에스파냐의 소재, 형식, 정서를 반영한 작품으로 성공한 것은 그가 태어난 곳이 에스파냐 국경에서 겨우 2km 정도인 피레네산지(山地)였다는 점도 관계가 있겠다. 완벽하게 연마한 듯한 피아노곡 <거울>, <밤의 가스파르>, <쿠프랭의 무덤>, <피아노 협주곡>(2곡) 등은 모두 프랑스 로코코나 스카를라티의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세계와 순수하고 고아(高雅) 명석하면서도 숙달된 뛰어난 기법이 결부된 라벨의 독특한 것이라 하겠다. 관현악법에서는 베를리오즈,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능가하는 다채롭고 화려한 효과를 지니며 <마 메르 르아>, <다프니스와 클로에>, 거기에 자작 <쿠프랭의 무덤>과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편곡 등으로 그 하나의 정점을 보였다. 그의 음악을 이상주의 음악이라고도 하나 그것은 초기에 한정되며 오히려 라틴적 고전주의적 전통과 결부되어 있다.

무용모음곡 다프니스와 클로에[편집]

舞踊組曲 Daphnis et chloe라벨 작곡(1912). 양치기인 다프니스와 아름다운 처녀 클로에의 목가적인 연애를 이야기하는 그리스 전설을 무용화한 것.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에 의하여 초연되어 오늘날에도 발레의 중요 레퍼토리의 하나가 되어 있다. 라벨은 이 가운데서 6곡을 골라 제1, 제2모음곡을 만들고 연주회용으로 편곡하였다. 뚜어난 관현악의 효과, 매력적인 드라마의 성격 등으로 자주 연주되고 있다. 특히 제2모음곡(새벽·무언극·모든 사람의 춤)이 우수하다.

마 메르 르와[편집]

Ma m re l'oye 라벨 작곡(1912). 곡명은 영어로 말하면 '마더 구스'이며, 흔히 알려져 있는 유명한 동화이다. 라벨은 이것을 제재로 하여 어린이용의 즐거운 피아노 연탄곡집(連彈曲集)을 작곡, 이것을 다시 발레곡으로서 관현악으로 편곡하였다. <잠자는 숲의 미녀 파바느>, <난쟁이>, <파고다의 여왕>, <미녀와 야수의 대화>, <요정의 나라> 등 5곡으로 되어 있다. 경묘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환상미가 돋보이는 즐거운 곡이다.

쿠프랭의 무덤[편집]

Le tombeau de Couperin 라벨 작곡(1914). 처음에는 피아노 독주곡으로 작곡되었으나 후에 관현악 모음곡으로 편곡되었다. '무덤'이란 숭배하는 과거의 작곡가에게 바치는 작품에 붙이는 제명이다. 이것은 17, 18세기의 피아노 음악의 거장 쿠프랭을 기념한 작품이다. 전주곡, 푸가, 포를라느, 미뉴에트, 리고동, 토카타 등 6곡으로 되어 있다. 아아케이크한 아름다움과 목가적인 정취, 거기에 우아한 표정으로 가득찬 음악이다.

오네게르[편집]

Arthur Honegger(1892-1955) 작곡가. 스위스인을 양친으로 북프랑스 르아브르서 태어났다. 스위스의 작곡가이지만 파리 음악원에서 댕디에게 작곡을 배운 이후로 줄곧 파리에서 활약. 제1차대전 후의 '프랑스 6인조'(그 밖의 사람은 미요, 오리크, 프랑크, 뒤레, 타유페르) 멤버의 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프랑스 악단의 중요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작품은 프랑스 음악의 명쾌함과 독일음악의 중후한 음의 구축성을 아울러 지녔다. 바흐의 오라토리오 정신을 이어받은 교향적 시편 <다윗왕>, 기계시대를 반영한 듯한 기관차의 다이내믹한 리듬운동을 표현한 <파시피크231>이나 <럭비> 등 초기의 작품에도 이 두 개의 요소가 명백하다. 클로델의 대본에 의한 극음악 <화형대의 잔 다르크>는 거대한 음악적 벽화풍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만년은 건강이 좋지 않아 교향곡 제5에는 염세적(厭世的)인 고민으로 가득 차 있다.

교향적 무브망 파시피크 231[편집]

오네게르 작곡(1923). 당시 가장 신형이던 파시피크 231형 기관차가 증기를 뿜으면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여 점점 스피드를 내어 시속 120km로 매진하는 다이내믹한 움직임을 묘사한 것이다. 후에 오네게르는 기관차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리듬운동의 표현을, 바흐의 코랄 변주곡의 형식을 염두에 두고 작곡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 관현악 작품에는 분명히 강철이 지닌 싸늘하고 둔중한 느낌과 다이내믹한 스피드감이 있다. 기계시대의 미와 스피드 감각을 반영한 선구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미요[편집]

Darius Milhaud(1892-1974) 작곡가. '프랑스 6인조' 멤버의 한 사람. 자신을 '프로방스 출신 유태교도인 프랑스 사람'이라고 자기의 이원적(二元的) 성격을 말하고 있으며, 음악적으로는 한편으로 복조(複調)와 다조(多調)로 안어울림음이 많은폴리포닉하고 복잡한 음악을 썼고 다른 한편으로 지중해적인 맑고, 명랑한 릴리시즘에 찬 작품들을 작곡하였다. 초기의 <플로테>, <코에포르>나 오페라 <콜룸부스> 등은 전자에, <프로방스 모음곡>, <프랑스 모음곡>, 2대 피아노의 <스칼라무슈> 등은 후자에 속한다. 여하튼 대단한 속필(速筆)이어서 600곡에 가까운 작품을 썼고 그 작풍도 폭이 넓다. 제1차대전 중엔 시인대사(詩人大使) 클로델의 비서로 브라질에 체재하였으며 제2차대전 중에는 미국에 망명, 교직에 있었으며, 그 후로는 거의 정기적으로 도미(渡美)하고 있다. <브라질의 회상>, 오페라 <막시밀리언>, <볼리버>, 발레곡 <지붕 위의 황소> 등은 남미의 소산이며 재즈를 채택한 발레 <세계의 창조>, <켄터키 모음곡>, <뉴욕의 프랑스인> 등은 후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오페라 16, 발레 15, 교향곡 16, 협주곡 34, 현악 4중주곡 18곡 외에 실내곡, 가곡, 극음악, 영화음악 등 방대한 양에 이른다. 이런 대담함과 텍스처나 어조(語調)의 솔직함, 풍부한 멜로디, 매력있는 서정성과 같은 다채로운 표현으로 오늘날에 와서는 프랑스 작곡계의 대가적인 존재로 되어 있다.

발레곡 세계의 창조[편집]

ballet曲 <世界-創造> 미요 작곡(1923). 스웨덴 무용단이 상연한 니그로 발레를 위하여 작곡한 매력적인 음악. 19명의 소편성이나 재즈를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시인 산드라르스의 대본, 화가 레제의 장치와 함께 주술적(呪術的)·원시적인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음악도 서곡에서 색소폰이 관능적인 음빛깔로 멜랑콜릭한 멜로디를 취주하며 이윽고 재즈풍의 생생한 필링이 풍부하게 퍼져나갔다.

풀랑크[편집]

Francis Poulenc(1899-1963) 작곡가, 피아니스트. '프랑스 6인조' 가운데에서는 가장 토박이인 파리장이며 어릴 적부터 모차르트와 드뷔시를 열렬히 사랑하였다고 한다. 초기의 작풍 등은 특히 이 영향이 현저하며 또한 스트라빈스키나 사티의 영향도 엿보인다. <세 개의 무궁동, Trois Mouvements Perp tuels>이나 가곡 <동물시집>, 피아노와 18악기의 <오바드>, 발레 <암사슴> 등 어느 것이나 신선한 감각과 간결하고 사랑스런 매력에 넘친 초기의 대표작이다. 1930-1940년대에 걸쳐서는 많은 가곡을 작곡하여 <미사곡>, <가면무도회>, <인간의 모습>, <스타바트 마테르> 등의 좋은 작품을 낳았다. 제2차대전 후 아폴리네르에 의한 <테레지아스의 유방(乳房)>, 베르나노스에 의한 <카르멜회 수녀의 대화>, 콕토에 의한 <인간의 목소리> 등 3개의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드뷔시 이후의 프랑스에 우수한 오페라 작품이 나왔다고 평가되었다.

졸리베[편집]

Andre Jolivet(1905-1974) '젊은 프랑스'의 멤버로서 그도 메시앙과 함께 신비적인 경향을 가진다. 그러나 그의 경우는 이교적, 원시적, 주술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한때 전위음악의 시조라고도 하는 에드거 바레즈에게 사사하여 그에게서 음향역학적인 새로운 음소재에 의한 창조, 리듬의 새로운 의미 등의 영향을 받았다. 전자악기 옹드마르트노를 위한 협주곡이나 피아노 모음곡 <마나>, 플루트곡 <5개의 주문(呪文)> 등 자연배음렬의 음을 혼용하여 거기에 우주적인 신비스런 음향의 밀도가 높은 공간을 만들었다. 아프리카, 베트남, 폴리네시아 등 민족음악의 원색적인 색채와 복잡하게 얽히는 강렬한 리듬음군(音群)의 충격적인 작품 <피아노 협주곡>은 초연시 청중의 격렬한 반대를 받아 화제가 되었다. 8개의 협주곡, 4개의 교향곡, 발레 음악 외에 각종 작품의 양도 많다.

메시앙[편집]

Olivier Messiaen(1908- ) 작곡가. 오늘날 프랑스 작곡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빛나는 특이한 존재이다. '프랑스 6인조'의 다음 세대의 주장을 제시하여 졸리베, 르쉬르(Daniel Lesur), 보드리에(Yves Baudrier) 등과 1936년에 '젊은 프랑스'라고 하는 그룹을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모더니즘(近代主義)이나 비개성화(非個性化)에 반항하여 정신적인 강력함과 인간의 '살아있는 음악'의 성실한 차조를 기치(旗幟)로 하였다. 그는 가톨릭의 신비주의적 경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색채적이며 로맨틱하게 움직이는 비전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승천>, <종말(終末)을 위한 4중주곡>, 장대한 피아노곡집 <아기 예수를 보는 20개의 눈동자>, <아멘의 환상>, <살아계신 하느님의 3개의 소전례곡> 등 어느 것이나 신학적인 곡명의 작품을 썼고 독자적인 선법을 바탕으로 한 화음이나 인도 및 그리스의 음악연구에 유래한 복잡한 리듬작법으로 유려한 음의 무지개의 환혹(幻惑)을 전개한다. 10악장으로 된 방대한 관현악곡 <투랑갈릴라 교향곡>이나 혼성합창 <5개의 루샹>은 그 집대성기(集大成期)의 대표작이다. 한편, 1942년 이후 모교 파리 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동양 음악이 지니는 흥미로운 문제 등을 분석하거나 현대음악의 새로운 실험을 꾀하는 등 독특한 연구를 하였다. 그 때문에 이 교실에서는 이미 불레즈, 모리스 르 르, 니구, 크세나키스 등 현대 프랑스의 젊은 전위작곡가를 비롯하여 각국의 우수한 많은 실험적 작곡가를 배출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전후의 젊은 실험적인 작곡가들을 실제로 키운 사람이기도 하며 또한 겸허한 지도자로서 항상 음양으로 현대음악의 전개에 영향을 주어 왔다. 1949년 이후에는 작풍에 변화가 나타나 리듬 세리(음가를 12음 음악의 음렬기법과 같이 다룬다)의 시도를 철저한 방향으로 추진시킨다. 피아노곡 <눔 리토믹>, <음가와 음의 강약의 모드>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방법은 뮤지크 세리엘(음렬기법의 음악)에 대한 조직화의 선구가 되기도 하였고 슈톡하우전, 불레즈 등 전후 세대의 젊은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새의 소리를 채보하여 새의 리듬만을 소재로 하여 작곡한 플루트와 피아노의 <검은 방울새>, 관현악곡 <깨어난 새들>, <이국(異國)의 새들>, 피아노의 대작 <조류도보(鳥類圖譜)> 등이 있다. 이것은 그 뒤의 관현악곡 <크로노크로미=시간의 색채>에도 보이지만 <7개의 단가(短歌)>,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다리도다> 등에서처럼 점차 자연과의 교감을 시도하면서 거기에 풍려하고 농밀한 우주적 교감의 음세계를 펼치려고 하는 듯하다.

투랑갈릴라 교향곡[편집]

Turangalila 交響曲 메시앙 작곡(1948). 크세비키 재단의 위촉으로 2년 반에 걸쳐 작곡한 거대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전 10악장(약 1시간 20분)의 대곡으로 번스타인 지휘로 보스턴 교향악단에 의하여 초연되었다. 투랑갈릴라는 인도말로 사랑의 노래를 뜻한다. 풍려한 음으로 가득찬 낭만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이나 거기에는 일락적(逸樂的), 관능적인 신비스런 에로스의 주문(呪文)을 듣는 듯한 감이 있다. 한편, 인도의 리듬이나 새의 노랫소리 등도 쓰여 리듬 세리의 최초의 징후(徵候)가 보이는 등 실험적이면서도 풍요한 색채의 환상을 펼치는 매력적인 음악이다.

크세나키스[편집]

Iannis Xenakis(1922- ) 작곡가· 건축가. 그리스인이었으나 1946년 이후 파리에서 활약하였다. 오늘날에 와서는 불레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프랑스 작곡계의 젊은 대표적 존재. 통계역학이나 수학적인 추계학적 이론과 법칙을 음악에 적용시켜 작곡하고 있다. 관현악곡 <피토프라크타>를 비롯하여, 마르코프 이론을 사용한 <아코리프시스>, 게임의 이론에 의한 2개의 오케스트라와 2인의 지휘자를 위한 <전술(戰術)>, 그리고 컴퓨터를 사용해서 작곡한 <현악 4중주곡>, <에온타> 등 모두가 다수의 음군(音群)을 기체운동이나 기체분자의 운동속도분포와 동일하게 간주하여 수학이론을 응용해서 구성한 것이다. 그 음향 에너지가 치열하게 유동하는 음공간은 참으로 독자적인 것이라 하겠다. 또한 실험적인 건축가로서도 저명하며 르코르뷔제 아래에서 몇 개의 뛰어난 건축설계를 한 바도 있다. 1958년의 브뤼셀 만국박람회에서의 필립스관의 이색적인 건축은 특히 문제가 되었다.

불레즈[편집]

Pierre Boulez(1925- ) 작곡가이며 지휘자. 제2차대전 후의 프랑스 작곡계의 젊은 대표적 존재이다. 파리 음악원에서 메시앙의 문하가 되어 후에 12음음악의 사도인 레보비츠에게도 사사, 12음적인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1946년 이후 유명한 연극가 장 루이 바로와 마들레느 루노가 주재(主宰)하는 극단의 음악감독이 되었으며 두 사람의 원조로 전위음악의 연주회 시리즈인 '도메느 뮤지컬'을 파리에 조직하였다. 루네 샬의 시를 바탕으로 한 <물의 태양>, 2대의 피아노의 <구조(構造)>, 독창과 실내악의 <말트 상 메토르> 등으로 그의 유니크한 개성과 대담한 방법이 관심을 끌었다. 그의 작풍은 드뷔시, 베베른, 메시앙 등의 어법을 채택하여 정묘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새로운 구조로 발전시키고 있다. 음의 각 요소를 숫자적인 조작을 구사하여 세리엘하게 다룬 경우가 많다. 극단적으로 빠른 템포라든가 강약의 대비(對比), 열띤 폭발적인 부분, 천재적인 음빛깔 등 모두가 그의 독특한 매력으로 되었다. 두 무리(群)의 오케스트라와 전자음, 대사(臺辭)를 읊는 사람을 위한 <가능성에의 시>(마쇼의 시)나 관현악곡 <두블> 이후는 지휘자 활동이 더 두드러지며 과작인 작품활동이 한층 과작이 되었다.

셰페르[편집]

Pierre Schaeffer(1910- ? ) 작곡가·기사. 제2차대전 중 프랑스 방송국 내에 실험 스튜디오를 설립하여 시인들을 중심으로 실험적인 방송시극 등을 시도케 하였다. 1948년에는 소음(騷音)을 몽타주하여 음악을 구성하는 뮤지크 콩크레트(具體音樂)를 창안. 이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음을 녹음해 이것을 녹음기계의 기능을 이용하여 여러 모로 변형시켜 하나의 작품으로 구성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레코드의 원반에 녹음하였으나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자공학의 놀라운 발달로 생겨난 자기녹음(磁氣錄音) 테이프를 사용, 어떤 음이건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게 하였다. <한 남자를 위한 교향곡>(1948-1952)은 초기의 대표작으로 한 남자가 내는 여러 가지 음과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음을 소재로 하여 구성한 것이다. 그 밖의 <비극의 에튀드>, <철도의 에튀드> 등도 초기의 흥미깊은 작품이다. 1950년부터는 메시앙의 제자 피에르 앙리가 그에게 협력하여 '실험음악 스튜디오'를 조직하여 메시앙, 졸리베, 미요, 불레즈 등에게도 여기서 뮤지크 콩크레트 작품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이 스튜디오에서는 이미 몇몇의 젊은 작곡가들이 배출되었으며 그들은 뮤지크 콩크레트의 새로운 방향을 개척하고 있다. 미셜 필리포(1925- ), 뤼크 페라리(1929- ), 프랑수아 베르나르 마세(1935- )와 같은 사람들이다. 뮤지크 콩크레트는 처음에는 시끄런 소리(騷音), 현실음만을 소재로 한정시켜 오브제 소노르(음향을 물체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의 의식으로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같은 방법으로 녹음테이프에 인공적으로 만든 전자음을 구성하는 독일 전자음악과는 전적으로 대립하는 음악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근년에 이르러서는 서로 영향을 주어 가면서 소재도 상당히 섞어가며 쓰이게 되어 그 구별이 없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 양자를 총괄하여 테이프 음악, 또는 전자음악이라고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