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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음악/서양의 경음악가/라 틴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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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uel Ponce(1882-1948) 명작 <작은 별(Estrelli-ta)>로 널리 알려진 멕시코의 작곡가로서, 클래식의 소품(小品)도 많다. 사카테카스주의 프레스니요시에서 태어났다. 본업은 오르간 주자였으나 멕시코 민요 가운데에서 아름다운 멜로디를 발굴, 기타곡 등으로 편곡하여 소개했으며 1948년 멕시코시티에서 사망하였다.

에르난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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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fael Hernandes(1893경-1965) 라틴아메리카가 낳은 최대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서 푸에르토리코의 아과디야 출신인 흑인. 젊어서 뉴욕에 나와 1926년에 트리오 보린켄, 1934년 여름에는 퀸텐 빅토리아(이 그룹은 후에 인원이 늘어 그루포 빅토리아라 불렀다)를 결성하는 등 미국에서의 라틴음악 보급에 앞장섰다. 1930년대 룸바가 유행을 하자 그 풍조에 편승, 그의 작품 <카치타>와 <룸바 탐바>가 히트 그도 악단을 이끌고 룸바의 연주를 하였으며 그 후 고향 푸에르토리코에 돌아와 작곡활동에 전념하였다. <라멘트 보린카노>, <수정(水晶)의 종(鐘)>, <엘 쿤반첼로> 등 수많은 명작을 남기고 1965년 12월 72세로 사망하였다.

레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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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esto Lecuona(1896-1963) 쿠바의 바나바코아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피아노의 솜씨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였다. 15세로 아바나의 콘세르과트알을 졸업,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활약하는 한편 파퓰러 음악도 다루어 1932년에 레코나 쿠번 보이즈라는 악단을 만들어 때마침 일고 있던 룸바 붐에 기대를 걸고 유럽으로 가려 하였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신병으로 갈 수 없어 알만도 오레피체를 대리의 리더로 프랑스에 가게 하여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에 룸바를 보급시키는 등의 공적을 쌓았다. 그리고 이 레코나 쿠번 보이즈라는 이름의 악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형태를 바꾸어 건재하고 있다. 레코나 자신은 1943년에 카네기 홀에서 리사이틀을 여는 등 클래식 피아니스트, 작곡가로서 활동을 계속함과 동시에 <말라게냐>, <한들바람과 나>, <시보네>, <마리아라 오> 등 파퓰러의 분야에도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1963년 대서양상의 카나리아 제도(諸島)에서 병사하였다. 그의 조카딸 말가리타 레코나도 작곡가로서 활동하여 <바바르>, <타부> 등의 명작을 남겼다.

쿠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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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avier Cugat(1900- ? ) 라틴계 댄스음악의 보급에 공적이 컸던 밴드 리더. 에스파냐에서 태어나 어릴 때에 부모와 함께 쿠바의 아바나로 이주,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을 다루었다. 그 후 카루소의 인정을 받아 그의 반주 오케스트라의 한 사람이 되어 도미하였다. 그러나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성공하지 못하고 신문의 만화가가 되기도 하였으나 1930년에 당시의 룸바 붐에 편승, 스스로 악단을 조직하여 2년 후에는 월도프 아스트리아 호텔의 전속 밴드가 되었으며 또한 NBC 방송에 레귤러 프로를 갖게 됨으로써 인기가 급상승하여 '룸바의 왕'이라는 애칭으로 그 이름을 널리 떨쳤다. <마이 쇼어>, <마이애미 비치 룸바>, <삼바 브라질> 등이 히트곡이며 영화 출연도 많이 하였다. 쿠가트 악단의 연주는 어디까지나 미국인도 춤을 추기 쉽게 한다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삼으며 라틴 음악의 본질적인 모습을 전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룸바나 삼바를 대중에게 보급시켰다는 점은 하나의 공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악단에선 카를로스 라미레스, 보비 카포, 다니엘 산토스, 티토 로도리게스, 데시 알나스, 미게리토 바르데스 등 수많은 스타가 배출되었음을 보아도 쿠가트의 선구적인 역할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다.

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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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ustin Lara(1900- ? ) 멕시코의 작곡가 가운데에서 그 질이나 양에서 최고의 존재이다. 작품의 수는 1천 곡이 넘는다. 베라크르스주의 트라코탈판에서 태어났다. 젊어서부터 멕시코 혁명에 참가, 이후로 방랑의 생활을 보낸 열정적인 성격의 소유자. 나이트 클럽의 피아니스트를 시초로 음악가들과 어울려 1932년 <그라나다>를 발표하여 작곡가로서 인정받았다. 그 후 <소라멘테 우나 베스>, <남국의 밤>, <카리브의 기도>, <마리아 보니타> 등의 명작을 남겼다. 때로는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직접 노래 부르기도 하며 악단을 지휘하기도 했다.

바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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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 Barroso(1903-1963) 브라질을 대표하는 작곡가. 미나스 제라이스주 우바에서 태어났으며 1920년 리오로 나와 피아니스트로서 극장 등에서 일하면서 작곡을 계속하였다. 1944년 도미하여 월트 디즈니의 인정을 받아 <삼바 브라질>, <바이아> 등의 작품을 디즈니영화에 제공, 이 두 곡이 미국에서 호평을 받자 바로조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만년은 보사 노바의 곡에서도 좋은 작품이 나왔으며 1963년에 병사하였다. 브라질의 향토색을 지니면서 음악적으로 격조 높은 곡을 만든 보기 드문 작곡가였다.

카르데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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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ty Cardenas(1905-1932) 멕시코에서 라디오 방송이나 레코드가 보급된 초기에 인기가수의 개척자적인 존재로서 활약한 작곡가로서의 업적이 크다. 유카탄주 태생으로서 젊을 때부터 기타를 연주하면서 노래하였으나, 1927년에 멕시코시티에 진출, 새로운 감각으로 멕시코의 노래를 불러 순식간에 인기를 획득하였으나 애석하게도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작곡가로서 그가 남긴 작품에는 <마야브의 나그네>, <눈카>, <태양의 빛> 등이 있다.

유판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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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ahualpa Yupanqui(1908- ? ) 아르헨티나가 낳은 위대한 향토 예술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북부의 투쿠만으로 이주하였다. 처음 바이올린, 다음에는 기타를 교사에게 정식으로 배웠다. 발표한 작품 <인디오의 길>로 명성을 획득하였다. 기타의 즉흥연주 및 민요가수로 활약하는 한편 <투쿠만의 달>, <우차(牛車)에 흔들리며>, <포르테스에로의 추억> 등의 명곡을 만들과 또 소설 <인디오의 길> 외에 시집 등 저작이 많다. 유판키는 전통적인 민요를 그대로 계승하는 사람이 아니라 민요의 정서를 소화, 승화시켜서 자신의 독특한 예술로 완성, 그 가사에는 깊은 인생관이 깃들고 있다. 참고로 그는 왼손잡이로서 기타를 반대로 들었다.

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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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mundo Ros(1910- ? ) 라틴 댄스음악의 왕자라면 전전(戰前)엔 쿠가트, 전후(戰後)는 로스의 이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영국에서 활약하였으며 그 레코드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남미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서 태어났다. 육군 사관학교의 군악대에서 북을 치는 동안 타악기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어 국립 교향악단의 팀파니 주자를 거쳐 영국의 왕립 아카데미에 유학, 졸업 후에는 생활을 위하여 재즈 드러머가 되었다. 1944년, 자기의 라틴 밴드를 조직하여 스마트한 연주로 인기를 획득하였다. 모든 라틴 리듬을 알기 쉽게 다루어 친근감을 주는 연주로서 널리 알려진 최고의 직업적 음악가이다.

모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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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o Morales(1911-1964) 푸에르토리코 섬 출신의 밴드 리더로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푸에르토리코의 산후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밴드 리더였기 때문에 노로도 어려서부터 음악을 즐겼으며 각종 악기를 마스터하였다. 15세 때 부친이 사망하자 리더가 되었다. 1935년에 도미, 1939년에는 자기 악단을 조직하였으며 1950년대 이후는 풀 밴드보다도 자신의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캄보의 형태로 연주를 계속하였다. 그는 <오지에 네그라>, <빔 밤 붐> 등의 곡을 만든 작곡가이기도 하다. 1964년에 사망하였으며 또한 그의 동생 이지 모랄레스는 쿠가트 악단에서 활약한 일도 있는 플루트의 명수이다.

네그레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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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rge Negrete(1911-1953) 멕시코 음악사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수이다. 과나후아토에서 태어나서 처음에는 육군에 들어갔으나 뛰어난 목소리를 살려 오페라 가수가 되어 25세경 뉴욕으로 가서 파퓰러 송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약 5년간 미국에 머무른 뒤 멕시코에 돌아와서는 영화배우로서의 인기가 높았다. 그 후 195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하기까지 배우로서나 가수로서 최고의 인기를 획득, 유지하였다. 오페라를 했던 만큼 네그레테의 목소리는 낭랑하게 울려퍼지는 아름다운 목청이었으며, 그 노래솜씨는 기교를 부린다기보다 오히려 마음 내키는 대로 여유있게 부른다는 스케일이 큰 가수로서, 멕시코 민중의 감정을 선이 굵은 터치로 묘사하여 구티 카르데나스가 개척한 멕시코의 대중가곡의 길을 크게 발전시켰다.

마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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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hito(1912- ? ) 본명은 라우르 그리지오. 미국에서 최고의 쿠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활약한 밴드 리더 겸 가수이다. 미국 플로리다주 탐파에서 쿠바인 양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얼마 후에는 아바나로 돌아가 그 곳에서 자라났다. 가수로서의 활약이 시작된 후 곧 도미(1936년경), 여러 악단에서 노래를 부른 뒤 1941년에 자신의 악단을 결성하였다. 재즈의 감각을 적당히 가미한 아프로 쿠번(afro cuban) 스타일의 연주로 인기가 높았다. 그리고 누이동생 그라셸라 페레스도 마치토의 악단에서 노래를 불렀다. 마치토의 악단은 언제나 박력 있는 최량의 쿠바 음악을 연주하며 약 25년 동안 높은 수준을 유지해 왔음은 칭찬받아 마땅할 것이다.

발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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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guelito Vald s(1914- ? ) 쿠바가 낳은 위대한 가수. 아바나에서 태어났다. 학생시절에는 아마추어 복서였으나 1938년경, 아바나 최대의 도박장 카시노 데 라 프라자에 가수로서 데뷔하였다. 1940년에 쿠가토의 초빙으로 도미하여 그의 악단 전속가수가 되어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출연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 후 쿠바 노래의 왕자로서 활약을 계속하여 특히 <바바르>의 솜씨가 뛰어나 '미스터 바바르'라는 애칭을 듣기도 하였다. 정열적인 창법과 절묘한 리듬감에 놀라운 박력이 있어 명실공히 쿠바 가수의 최고봉이라 하겠다.

카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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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ival Caymmi(1914- ? ) 바로조와 함께 브라질을 대표하는 작곡가이며 멋진 가수이기도 하다. 브라질 동북부의 바이아(살바도르)시에 가까운 어촌 마라칸가랴에서 태어나 온갖 직업을 전전하면서 방랑했다. 24세 때 리오에서 대스타 카르멘 미란다가 그의 노래를 들을 기회가 있어 그 가운데의 1곡을 미란다가 레코딩하여 히트시킴으로써 작곡가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카이미의 작품은 삼바에서 민요풍의 것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으며 특히 자작(自作)하여 스스로 부른 <바다의 노래>는 뛰어난 작품으로 정평이 있다. 그의 즉흥의 기타 연주는 휴머니즘의 향기가 높다는 점에서 유판키와 비할 수 있다고 하겠다.

메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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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guel Aceves Mejia(1915- ? ) 멕시코에서 가장 인기가 높던 가수의 한 사람. 추와와주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엔지니어에 뜻을 두었으나 지방 방송국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한동안은 로스앤젤레스에 있은 뒤 1940년에 멕시코시티에 진출, 1948년 솔로 가수로서 칸시온 란첼라(멕시코의 유행가요. 민요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 많다)를 전문으로 부르기 시작하여 급속하게 성공, 이 분야에서의 제일인자가 되었다. 풍부한 기교를 구사하여 대중의 마음에 호소하는 '흐느낌'의 창법을 훌륭하게 전개하여 그 인기가 매우 높았다.

알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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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urindo Almeida(1917- ? ) 브라질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약을 한 기타 주자. 클래식, 재즈, 파퓰러 등으로 그 활동범위는 매우 넓으며 그 재능 또한 놀라운 사람이다. 상파울루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에서 활약한 뒤 1947년에 도미, 서해안에서 활약을 계속, 처음은 스탠 캔턴 악단과 공연하여 당시의 최전위(最前衛) 재즈 운동에 참가하여 이름을 떨치고, 그 뒤에도 재즈계와 접촉하면서 기타와 류트를 연주하고 클래식 음악에 관계하거나 영화음악의 작곡을 하는 등 상당히 상업적인 레코드까지 취입하였다.

산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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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Santos(생몰연도 불명)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가수 가운데에서 그 활약이 가장 많으며 인기 또한 높다. 뿐만 아니라 그 실력을 보아도 과연 라틴 음악계에서 톱 싱어의 한 사람이라 하겠다. 푸에르토리코 섬 상투르세시(市)에서 태어난 그는 13세 때 뉴욕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생활을 하다가 1940년경에 감미로운 목소리가 인정받아 페드로 프로레스(푸에르토리코 출신의 대작곡가)의 퀸텟 멤버의 한 사람이 되어 인기를 얻었다. 그 후 한동안을 쿠바의 라 소노라 마탄세라의 전속가수가 된 후 1942년에 쿠가토 악단의 전속가수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군에 입대하였으며, 전후(戰後)에는 멕시코를 중심으로 각지를 순회공연하면서 노래부르고, 컬럼비아, 베네수엘라 등에서도 가장 인기 높은 가수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볼레로가 장기이며 독특한 억양과 리듬감이 뛰어나 그의 창법에는 참된 카리브해의 뉘앙스를 느낄 수 있다.

오파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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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co O'Farrill(1921- ) 쿠바 출신의 작곡가이며 편곡자 및 밴드 리더. 특히 그의 편곡은 라틴음악계에서 최고의 존재라 하겠다. 아바나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 사관학교에 유학, 군악대에서 나팔을 부는 동안 전문 음악가가 되었다. 트럼페터로서 레네 투제 등의 악단에 참가, 1945년에 유럽으로 간 뒤부터는 미국에서 작곡 및 편곡을 배워 마치토 등의 라틴 밴드 외에 재즈의 악단에도 편곡을 제공하였다. 1953년에는 뉴욕에서 자기 악단을 조직하였고 1957년에는 멕시코로 옮겨 악단 연주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966년에 다시 미국으로 거주를 옮겨 카운트 베이시 악단의 편곡자가 되었으며 라틴음악의 하모니 이론을 발전시킨 공적은 크다고 하겠다.

산타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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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o Santamaria(1922- ) 쿠바 출신의 흑인 타악기 연주가로서 라틴 록의 중심인물. 4월 7일, 아바나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바이올린을 배웠으나 콩가, 봉고와 같은 타악기로 전향하였다. 제2차대전 직후에 미국으로 가서, 페레스 프라드 악단에 3년, 티트 프엔테 악단에 7년, 재즈의 칼 제이더 악단에 3년 있은 뒤 1961년에 자기 악단을 조직하였다. 마침 파창가(pachanga)의 유행시기였으므로 그도 처음에는 파창가 전문의 밴드를 만들었으나 아프로 쿠번 음악과 리듬 앤 블루스와의 결합을 목표로 새로운 음악을 시도하는 사이, 1963년에 <워터 멜론 맨>을 히트시켜 라틴록 유행의 기초를 굳혔다. 그 자신은 결코 상업적 성공만을 노리는 사람이 아니며 훌륭한 쿠바 음악의 필링을 지닌 연주를 들려주었다.

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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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iz Bonfa(1922- ) 브라질의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보사노바의 유행에 편승하여 인기를 획득하였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탄생. 부친도 기타리스트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기타를 배우기 시작하여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인기를 얻었다. 1957에 도미, 1959년에 브라질로 돌아왔으며 1962년에는 유럽을 여행, 후에는 뉴욕에 거주하였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영화 <검은 오르페>의 음악을 조빈과 분담, 작곡하였기 때문이며 그 직후 보사노바가 미국에서도 유행하였기 때문에 연주가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원래가 클래식 기타리스트였으므로 정확하고 아름다운 연주에 정평이 있으며 작곡가로서나 연주가로서도 로맨티시즘의 색조(色調)가 짙다고 하겠다. 부인 마리아 트레이드는 가수이다.

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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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aso P rez Prado(1922- ) '맘보 왕'으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쿠바 출신의 밴드 리더 겸 피아니스트로서 활동하였다. 쿠바의 항구도시 마탄사스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피아노를 쳤으며 16세로 밴드 리더가 되었다. 1940년경부터 아바나로 진출, 카시노 데 라 프라자의 피아니스트가 되었으며, 그 무렵에 신진 음악가들 사이에서 시도되고 있던 새로운 음악(맘보)의 형성에 참가하였다. 1947년에는 멕시코로 갔으며 여기에서 <엘 맘보>, <맘보 제5번> 등을 취입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에도 잇따라 새로운 아이디어와 리듬을 발표했으며 <세레소 로사> 등 많은 히트곡을 내었다. 전후 라틴음악의 출발점이 되었던 맘보의 기초를 다진 사람으로서 그 역사적 역할은 크다고 하겠다.

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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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ardo Fal (1923- ) 유판키와 함께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아르헨티나의 민요 예술가. 아르헨티나 북부 살타주(州)에서 터키계 이민의 아들로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기타를 다뤘으며, 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나와 정식으로 기타를 공부했다. 30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자작인 <칸데라리아의 삼바>로 인정을 받았으며 유럽 및 구소련 등에 연주여행을 하여 호평을 받았다. 테크닉은 유판키보다 우수하며 클래식 기타의 감각을 크게 채택, 포르크로레를 연주, 또는 노래 하였다.

푸엔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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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o Puente(1925- ) 푸에르토리코인을 양친으로 뉴욕에서 출생하였다. 프피캄보 악단의 타악기 주자를 시초로 노로 모라레스, 마치토 등 일류 밴드에서 활약하였으며 1940년에 한때 독립하였으나 오래 계속되지 않고 1949년에 본격적으로 자기 밴드를 만들어냈다. 그는 팀발의 주자로서도 뛰어나며 '팀발의 왕'이라고 자칭하기도 하여 화려한 연주로 성공하였다. 그 밖에도 비브라폰이나 알토 색소폰도 연주하였다. 그의 악단은 마치토와 비견할 만큼 박력이 있어 미국에서 활약한 라틴 밴드로서는 일류라고도 하겠다.

히메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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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 Alfredo Jimenez(생몰연도 불명) 멕시코 과나후아토주(州) 도로레스 이다르고 출신. 일찍부터 음악가에 뜻을 두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8년이라는 오랜 고투 끝인 1951년에 겨우 자작의 <나>를 취입할 기회를 얻었으며 이 곡의 히트로 데뷔하였다. 그 후 <그 여자>, <말에 탄 사람> 등 다수의 명곡과 히트곡을 만들었다. 칸시온 란체리라고 불리는 멕시코조(調) 가요는 오늘날 멕시코의 대중음악에서 주류를 이루며 가수인 아세베스 메히아와 작곡가인 히메네스야말로 칸시온 란체라를 지탱하는 두 기둥으로 볼 수 있다.

조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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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io Carlos Jobin(1927- ) 보사노바를 만들어낸 중심인물로서, 현재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작곡가의 한 사람. 노래, 피아노, 기타 등으로 레코드에 등장하고 있다. 태생은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어릴 때부터 교사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1955년에 이미 새로운 경향을 나타낸 곡을 발표하여 일부에서 각광을 받은 바 있으며, 1958년경에는 현재 보사노바라고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삼바를 완성, <데자피나도>, <원 노트 삼바>, <이파네마의 아가씨> 등의 명곡을 내놓았다. 또한 1959년에 공개된 영화 <검은 오르페>의 주제곡을 루이스 본파와 분담하여 작곡하기도 하였다. 조빈의 작품은 모두가 현대적인 지성미에 넘쳐흐르며 그가 장차 라틴음악에서 중심적인 역학을 다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솔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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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vier Solis(1931-1966) 아세베스 메히아의 다음 세대를 대표하는 멕시코의 인기 가수였으나 아깝게도 젊어서 세상을 떠났다. 멕시코 북단의 소노라주(州) 노가레스시(市)에서 태어나 1939년에 멕시코시티로 이주, 젊을 때는 권투를 했다. 아마추어 노래자랑 콩쿠르에 우승한 것을 계기로 볼레로를 노래 불렀으나 칸시온 란체라로 전향, 프리트 로도리게스의 인정을 받아 레코드 취입의 기회를 얻었다. 두 번째의 레코드가 1960년에 크게 히트, 칸시온 란체라의 감각으로 볼레로를 부르는 이른바 볼레로 란체로라는 새로운 음악의 왕자적 존재로서 인기가 급승하였으나 1966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남성적이며 호방한 창법은 멕시코의 새로운 우상으로서 기대가 많았던 만큼 그의 죽음은 더욱 애석한 느낌을 금할 수 없다.

힐베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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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o Gilberto(1931- ) 조빈에 협력하여 보사노바를 완성시킨 공로자로서 보사노바 가수의 최고봉. 바이아 출신으로서 부친은 아마추어 음악가. 학생 때부터 친구와 기타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즐겼으나 16세쯤 되자 프로 음악가가 되기로 결의하여 20세 때 리오에 나왔다. 여기서 조빈의 인정을 받아 1958년에 조빈의 협력으로 비로소 레코드를 취입, 이 곡이 힐베르토의 출세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사노바의 히트 제1호가 되었다. 계속하여 <데자피나도>, <원 노트 삼바> 등 조빈의 명곡을 거의 그가 독창하였다. 힐베르토와 같은 델리킷한 감각을 지닌 가수의 협력이 있음으로써 조빈은 비로소 보사노바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의 전 부인 아스톨드 힐베르토도 가수로서 인기가 매우 높았다.

갈라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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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ona Galarza(생몰연도 불명)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여성 포클로르(folklore) 가수. 코리엔테스주의 코리엔테스시에 태어나 1955년에 데뷔하여 1957년에는 영화에 출연해 주제가를 불렀다. 레코드의 첫 취입은 그 다음 해에 하였다. 1960년경에는 인기가수로서 각광을 받았다. 갈라르사는 이른바 리토라레냐와 파라과이의 노래밖에 부르지 않는 특이한 존재이나 그녀의 출연과 리토라레냐의 유행이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에 각각이 서로 어울려 급속한 성공을 거두었다. 나이브한 여자다움이 노래의 마디마디에 감도는 호감가는 가수이다.

멘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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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gio Mendes(1941- ) 보사노바에 모던 재즈와 고고의 감각을 믹스시켜 새로운 비트 뮤직을 만들어낸 브라질의 음악가. 브라질 리오의 위성도시 니테로이에서 태어나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은 뒤 피아니스트로서 일하기 시작하였다. 1962년에 보사 리오 세크스테토의 리더로서 도미, 본고장 재즈맨과 공연할 기회를 얻어 모던 재즈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1963년에는 유럽을 방문, 이 해 11월부터 캘리포니아에 주거를 정하여, 얼마 후 브라질 65라는 그룹을 만들어 보사노바를 중심으로 연주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브라질 66이라는 보다 팝스적인 그룹을 편성하여 <마슈 케 나다>의 히트로 유명해졌다. 멘데스 자신은 훌륭한 센스를 지닌 피아니스트였으나 브라질 66의 방향은 그의 피아노를 강조하지 않고 미국인 여성을 중심으로 비틀스적 감각을 도입한 듣기 쉬운 라틴 록풍의 연주로 상업적으로도 성공하였다.

미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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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is Miguel(1970- ) 멕시코 출생. 화련한 볼레로 리듬을 전세계적으로 알렸다. 1982년 첫 솔로앨범 1+1=2 Enamorados를 발표하여 단번에 스타덤에 오른 그는 연이어 공개한 2집 Directo Al Corazon으로 라틴 차트를 석권하였다. 1984년 4집 Palabra De Honor을 공개하여 유럽차트에서 호평을 받았다. 수록곡 중 시나 이스턴과 듀엣으로 노래한 는 그해 그래미상을 받는 영광을 안았다. 1990년 7집 20 Anos를 발표하여 자넷 잭슨과 리사 키이스가 하모니 보컬을 선사한 가 히트했는데, 마티카 등 역량있는 뮤지션들이 참여하여 눈길을 모았다. 1992년에는 볼레로 리듬이 가득한 사랑의 노래들을 담은 8집 Romance를 발표했다.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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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치 바르가스 데 테칼리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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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chi Vargas de Tecalitlan 멕시코에서 으뜸가는 마리아치(바이올린, 각종 기타, 트럼펫 등으로 편성된 향토악단). 1850년경, 하리스코주 테칼리틀란에서 바르가스가 만들었던 향토음악의 연주단체를 바탕으로 그의 아들 가스팔 바르가스가 1898년에 4인편성의 그룹을 결성, 마리아치 바르가스라고 불렀다. 그 후 인원을 증가시켜 1932년에는 가스파르의 아들 시르베느토레 바르가스가 리더의 지위를 계승함과 동시에 멤버를 보충하여 구아다라하라, 멕시코시티 등의 대도시에 진출하였다. 마리아치의 왕자로서 으뜸갔다. 바이올린족(族), 트럼펫족, 기타족 등으로 이루어진 현대의 마리아치의 형태를 정리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었으며, 아세베스 메히아를 비롯하여 일류 가수들의 반주를 담당하는 등 마리아치 바르가스가 수행한 역할은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라 소노라 마탄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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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Sonora Matancera 멕시코 향토음악의 오르케스타 티피카를 대표하는 것이 마리아치 바르가스라면 쿠바 음악에서 그것에 해당되는 것은 라 소노라 마탄세라일 것이다. 1924년 쿠바의 마탄사스시에서 결성된 악단이며 그 이름은 '마탄사스의 뛰어난 음'이라는 뜻이다. 본격적인 쿠바 음악을 연주하는 가장 권위있는 그룹으로서 오랫동안 인정되어 왔다. 로헤리오 마르티네스이다. 악기편성은 2개의 트럼펫·피아노·기타·베이스 각종 라틴 타악기의 형태이며 멤버는 9인. 거기에 항상 전속가수가 있으며 다니엘 산토스, 세리아 쿠르스 같은 대가수가 이 악단의 전속이었다.

트리오 마타모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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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o Matamoros 쿠바의 트리오이나 라틴 트리오의 초창기적 존재로서 소박하고 담백한 창법 속에 원숙한 뉘앙스가 깃들여 있다. 쿠바의 동쪽 끝, 산티아고 데 쿠바의 라 로마라고 불리는 빈민가에서 1927년의 축제일에 미게르 마타모로스, 시로 로도리게스, 라파엘 쿠에이트의 3인이 함께 부른 것이 그 시초로서 그 후 40년 동안 같은 멤버로만 노래를 부른 놀랄 정도로 긴 수명의 트리오이다. 리더인 마타모로스는 기타리스트이며, 작곡가로서도 일류이다. <검은 눈물> 등 그의 명작의 대부분이 이 트리오의 노래로 소개되었다.

트리오 타리아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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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o Tariacuri 멕시코의 트리오 가운데서도 역사가 가장 오랜 것의 하나. 미초아칸주(州)의 멘도사 일가(一家)로 이루어졌으며 1928년에 노르베르토, 헤로니모, 호안의 세 사람이 함께 노래부르기 시작하여 1933년에 트리오 타리아쿠리로 이름지었다. 1939년경에 멕시코시티로 진출, 1948년에 <라조로나>로 크게 히트하였다. 1957년, 톱 싱어였던 호안 멘도사가 독립하여 솔로이스트가 되었으며 그 후 멤버가 자주 바뀌었다. 호안이 있을 때의 이 트리오는 메리하리가 강한 드라마틱한 창법을 특징으로 하며 한때 그 이름을 크게 떨쳤다.

트리오 칼라베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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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o Calaveras 멕시코의 트리오 명문으로서 일찍이 이 나라의 민요를 널리 외국에 소개한 공이 있다. 결성은 1937년, 혹은 1938년이며 오리지널 멤버는 라우르 프라도, 미겔 베르메호, 기젤르모 베르메호의 3인이다. 아르헨티나·미국·유럽 등으로 널리 순회공연을 다녔으며 네그레테와 자주 동행하였다. 멕시코 민요를 감미로운 감각으로 부르며 현대의 가요조(歌謠調) 민요의 선구를 이룬 존재이다.

로스 에르마노스 아발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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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 Hermanos Abalos 아르헨티나 포클로르(folklore)의 명문.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주(州)의 나폴레옹 아발로스는 민요의 연구가로서, 그 아들들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쳤다. 이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나온 아들들은 1943년 다섯 형제가 힘을 합쳐 포클로르의 연주 그룹을 결성, 연주활동 외에 조사연구와 창작에도 힘을 기울여 아르헨티나 민요의 부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1년 이후, 미국을 비롯한 각국으로 해외 연주여행을 다니기도 하였다. 소박하면서도 격조가 높은 포클로르를 연주한 아발로스 형제는 정통적인 아르헨티나 민요의 전승자로서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트리오 로스 판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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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o Los Panchos 라틴 트리오 가운데에서 최대의 인기 연예인. 알프레드 힐, 추초 나바로, 에르난도 아비레스의 세 사람으로 1944년에 뉴욕에서 결성되어 볼레로를 주요한 레퍼토리로 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951년에 아비레스가 탈퇴, 얼마 후에는 라우르 쇼 모레노가 톱 보이스를 담당하였으나 다음 해 프리토 로도리게스가 대신하여 판초스의 황금시대를 쌓았다. 1956년부터 1958까지 아비레스가 다시 복귀하여 톱을 맡은 뒤 조니 아르비노가 교체, 줄곧 활동을 계속한 후 1966년에 아르비노가 독립하여 엔리케 카세레스가 그 후임자가 되었다. 판초스의 멤버 가운데에서 끝까지 있던 히르와 나바로의 두 사람은 멕시코인이었으나 아비레스, 로도리게스, 아르비노와 같은 역대 톱 보이스는 푸에르토리코인이며 라우르 쇼가 볼리비아인으로 최신 멤버의 카세레스를 맞아 비로소 멕시코인만으로 구성된 트리오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 트리오가 순수하게 멕시코적인 색채를 내세우는 것을 피하여 국제적 감각을 지닌 라틴 트리오의 길을 걸어왔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판초스가 성공한 하나의 원인이 된 것이다. 그들의 국제성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요소로서는 레퍼토리가 매우 넓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즉 라틴 아메리카의 모든 나라의 노래를 다루어 보다 친근성을 주는 음악으로서 승화시켰던 것이다.

트리오 로스 파라과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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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o Los Paraguayos 파라과이의 음악을 유럽 및 미국에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공적이 큰 그룹이다. 이 나라 출신의 명가수 루이스 알베르토 델 파라나를 중심으로 아르파의 디구노 가르시아, 기타와 노래의 아구스틴 바르보사의 세 사람에 의해서 1945년에 결성되어 1954년에 유럽으로 갔다. 여기서도 대성공을 거둔 뒤 트리오는 해산하고 세 사람은 각각 그룹을 만들었으며 델파라나는 트리오 로스 파라과요스의 이름을 계승하였다. 그를 중심으로 하는 새 그룹은 해외 연주여행 등으로 활약을 계속하였다. 그래서 트리오의 이름을 '로스 파라과요스'라고만 부른다. 파라과이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유럽에 소개한 공적은 크다고 하겠으며 그들의 뒤를 잇는 많은 파라과이의 음악가들이 유럽 등지에서 활약하고 있다.

로스 찰찰레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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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 Chalchaleros 아르헨티나의 포클로르를 노래하는 4인조의 코러스 그룹. 1948년에 살타주(州)의 젊은이들, 즉 호안·카를로스·사라비아 등 4명으로 결성, 신감각에 의한 포클로르를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삼바를 주제로 한 레퍼토리를 아름다운 하모니로 노래하는 찰찰레로스는 1953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진출, 곧이어 폭발적인 인기를 획득하여, 그 이후의 포클로르계(界)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쳤다.

로스 트레스 디아만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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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 Tres Diamantes 멕시코 보컬 트리오의 새 방향을 수립하여 후배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그룹. 1950년 전후(명확한 연대는 불명)로 활동하였으며 멤버는 발족 이후 엔리케 케사다, 구스타보 프라도, 사우로 세다노의 세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이 결성 직후부터 잇달아 히트 레코드를 내어 멕시코의 독특한 현대적 가곡으로서의 볼레로 창법을 확립시켰다. 톱 보이스의 케사다는 보기 드문 투명한 미성(美聲)을 지니며 레킨토의 세다노는 탁월한 기교와 예민한 음악적 감각이 넘쳐흐르고, 이러한 재능을 종합하는 구실을 맡는 프라도는 착실한 리듬감과 뛰어난 멕시코적 필링을 갖추어 이 세 사람은 이상적인 콤비네이션이라 하겠다. 이들은 멕시코의 수많은 트리오 가운데에서도 명실공히 최고의 존재이다.

로스 트레스 아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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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 Tres Ases 디아만테스가 개척한 모던 볼레로 코러스의 길을 더욱 발전시켜 1950년대 후반에 멕시코 음악계에 군림한 트리오. 결성은 1952년경이며 오리지널 멤버는 호안 네리, 마르코 안토니오 무니스, 에크톨 곤사레스이다. 현대적인 화음처리와 바리톤(무니스)이 솔로를 담당한다는 이색적인 방법으로 멕시코의 볼레로에 새 기운(機運)을 촉진시켰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멤버가 잇달아 교체하고 인기나 실력이 모두 하락했음은 애석한 일이다.

로스 인디오스 타바하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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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 Indios Tabajaras 브라질 출신의 기타 듀엣. 무드풍 연주로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브라질 동북단, 세아라주 원주민의 추장 아들 무사페레와 에란디의 형제가 이 지방에 온 탐험대가 버리고 간 부서진 기타를 주워 만져본 것이 시초가 되어 점점 기타의 매력에 사로잡혀 1950년경부터 프로의 기타 연주가가 되었다고 한다. 1957년에 뉴욕으로 나와 레코드를 취입하였으며 그 가운데 한 곡인 <마리아 에레나>가 1963년 가을에 갑자기 히트하기 시작하여 두 사람은 유명해졌다. 그 후로는 주로 무드 기타의 레코드를 많이 녹음하였다.

로스 칸토레스 데 퀼랴 우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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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 Cantores de Quilla Huasi 찰찰레로스에 이어서 아르헨티나 포클로르의 현대화를 추진해 왔던 4인 편성 그룹. 1954년에 결성되어 찰찰레로스 계통의 세련된 앙상블 가운데 적당한 야성미를 가미시킨 연창(演唱)으로 착실하게 인기를 획득해 왔으나 1962년 이후는 멤버가 바뀌어 그 방향도 약간 상업적인 경향을 제시하고 하였다.

로스 마추캄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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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 Machucambos 유럽에서 활약하는 라틴 보컬 그룹의 넘버 원. 에스파냐 사람인 라파엘 가요소, 이탈리아의 로마노자노티의 두 남성에 중미 코스타리카 출신의 프리아 코르테스라는 여성 가수 하나를 곁들인 세 사람으로, 1958-1959년경에 결성되어 첫 음반이 디스크 대상(大賞)을 획득하였으며 <페피토>를 히트시킴으로써 유명해졌다. 이후, 파리를 중심으로 의욕적인 활약을 계속하였으며 레퍼토리도 볼레로나 차차차에서 보사노바, 나아가서는 소박한 포클로르까지 크게 확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