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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음악/서양의 경음악가/포크송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리드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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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dbelly(1880경-1949) 본명은 휴디 레드베터(Huddie Ledbetter)로, 흑인의 민요가수. 그가 알고 있던 무수한 민요는 후에 민요가수들의 중요한 레퍼토리가 되었다. 태어난 해는 확실치 출생지는 루이지애나주의 서부 농촌. 1933년에 민요 연구가 아란 로마크스가 형무소의 민요를 조사하러 왔을 때 노래를 잘 부르는 수인(囚人) 리드벨리를 발견, 그를 석방토록 하여 뉴욕에 데리고 왔으며, 그 이후로 그는 민요가수로서 활약하였다. 그가 세상에 전한 노래로는 <굿나잇 아이 린>, <코튼 필즈>, <로크 아일랜드선(線)> 등이 있으며, 그가 애용한 12현 기타는 훗날 포크송에서 빠뜨릴 수 없는 악기가 되었다.

브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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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Bill Broonzy(1893-1958) 흑인 블루스 가수. 박력적인 노래와 기타로 1940년대부터 1950년대 전반에 걸쳐 활약하였으며, 특히 유럽에 열렬한 팬이 많았다. 미시시피주에서 태어나 아칸소주에서 자랐으며, 1920년대가 끝날 무렵부터 레코드 분야에 등장하였다. 1940년대에는 하모니카, 피아노, 베이스, 드럼 등의 반주로 새로운 경향의 블루스를 잇달아 취입하여 블루스의 세계를 석권하였다. 1950년대에 들어와서는 유럽을 자주 방문, 절찬을 받았으나 경제적으로는 늘 빈곤하여 1958년 시카고에서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아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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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rence Tom Ashley(1895-1967) 남부 애팔래치아 산악지방의 전통적인 스타일로 부르는 민요가수. 노령에도 불구하고 노래를 계속하였으며, 그 담박한 맛으로 민요 애호가의 인기가 높았다. 악기는 밴조와 기타. 테네시주의 브리스토우에서 태어나, 1911년에 지방 순회중인 메디신 쇼에 참가, 1925년에는 캐롤라이나 터 힐즈라는 그룹을 만들어 실연(實演) 및 레코드 취입으로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40년대에 들어서자 차차 인기가 하락, 한때는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으나, 1960년에 랠프 린슬러에게 재발견되어 민요가수로서 다시 경력을 쌓다가 1967년에 사망하였다.

아이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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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rl Ives(1909-1995) 윤택있는 미성(美聲)과 정돈된 창법을 특징으로 한 뛰어난 민요가수. 악기는 기타를 다루었으며, 배우로서도 활약하였다. 일리노이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머니의 지도로 어릴 적부터 민요를 불렀으며,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방랑생활을 보낸 뒤 1940년에 라디오쇼로 성공하였다. 2년의 병역을 마치고 무대배우 및 민요가수로서 착실히 기반을 굳혔다. 레코드의 취입도 많으며, 수많은 민요가수 가운데서도 민요를 아름답게 불렀다는 점에서 그를 앞서는 가수는 없다고 하겠다.

잭슨(마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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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halia Jackson(1911-1972) 가스펠송(북미의 니그로 사이에 생겨난 새로운 종교음악)의 여왕으로 불렸던 흑인가수. 현대의 감각, 재즈의 비트를 지닌 흑인영가에 관해서는 제1인자였다.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나 신앙이 두터운 집안에서 자란 그는 흑인 종교음악의 가수로서 성장하였다. 16세 때 시카고에 나와 차차 인정받게 되었다. 1940년대 후반에는 가스펠송으로 최고의 인기가수가 되어, 이후 줄곧 그 지위를 지켜왔다. 흑인 표현으로 신앙을 노래하는 마할리아의 노래는 종교를 초월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감동케 하였다.

홉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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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ghtnin' Sam Hopkins(1912- ? ) 현역 블루스 가수의 최고봉. 흑인인 그의 허스키한 노래나 낮게 울리는 기타는 블루스에 독특한 어둡고 음울한 아름다움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였다. 텍사스 동부의 농촌에서 태어나, 젊을 때부터 선배 블루스 가수들과 접할 기회를 얻어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1946년에 캘리포니아로 나와 레코딩의 기회를 얻었다. 그 후 텍사스주의 휴스턴을 중심으로 노래와 육체노동의 두 가지 일을 해왔다. 그런 뒤 1960년경부터 블루스의 붐이 일자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많은 음반을 취입, 무대에서도 활동을 계속하였다.

거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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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dy Guthrie(1912-1967) 현대 포크송 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며, 모든 포크 싱어의 존경을 받았다. 훌륭한 작곡가이며 가수일 뿐만 아니라 기타·만돌린·하모니카 등의 악기도 능란하게 다루는 연주가. 오클라호마주의 한 시골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민요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나, 어릴 때 가정에 불행이 겹쳐 13세로 방랑생활을 해야만 했다. 1930년대가 되어서는 가수로서의 일도 조금씩은 있었으나, 여전히 방랑생활은 계속되었다. 1943년에 자서전을 저술하였으며, 1940년대 말경부터는 신경계통의 질환을 앓아 1955년에 입원한 뒤부터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1967년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작품은 1,000곡을 넘으며, 주요한 것으로는 <나의 조 국>, <수확의 목장>, <900마일> 등이 있다. 그 대부분은 옛 민요의 멜로디에 새로운 가사를 단 것이며, 그 가사에는 항상 민중의 생활감정이 깃들이고 있다. 이러한 그의 민요 개작(改作)의 방법은 훗날 포크 라이터의 지침이 되어, 그가 음악활동을 그만둔 후에도 그의 영향은 포크 송의 분야에 널리 미쳤다.

프로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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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 Proffitt(1913-1965) 남부 애팔래치아 산악지방의 트래디셔널 싱어. 밴조 주자. 출신지는 테네시주로서, 후에 북 캐롤라이나주로 이주, 목수와 담배 경작을 겸업으로 하면서 조상 전래의 민요를 지켰다. 특히 1938년에 민요 연구가 프랭크 워너에게 <톰 두리>를 가르쳐, 훗날 이 곡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그와 함께 프로피트도 유명해졌다.

휴스턴(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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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sco Houston(1918-1961) 우디 거스리의 친구로서 함께 방랑생활을 한 민요가수. 그 풍부한 윤택을 지닌 목소리와 성실한 노래솜씨는 민요만이 지니는 독특한 뉘앙스로 넘쳐 있다. 악기는 기타. 델라웨어주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부터 방랑생활을 계속한 참다운 방랑가수. 1961년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누이의 집에서 암으로 사망하였다.

시거(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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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 Seeger(1919- ? ) 거스리가 병으로 쓰러진 뒤 명실공히 포크 송의 분야에서 정신적 지도자의 구실을 한 사람이 시거이다. 가수이면서 밴조와 12현 기타 주자이며 작사·작곡가로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저술가로서의 폭넓은 활약은 눈부신 바가 있다. 뉴욕주에서 태어났으며 양친이 모두 음악가인 그는 고교시절, 민요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하버드 대학을 1년 다니고는 중퇴, 방랑생활을 시작하면서 거스리, 휴스턴, 아이브스, 레드벨리 등과 친교를 맺어 영향을 받았다. 제2차세계대전에 종군한 그는 종전 후 뉴욕에서 민요 보급운동을 정력적으로 전개, 1948년에 위버스를 결성하여 현대민요 융성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10년 후에는 위버스를 떠나 단독으로 각지의 콘서트에 출연하는 등 그 활약은 놀랄 만하다. 작곡가로서의 시거는 <꽃은 어디로 갔나>, <해머를 가지면>, <턴 턴 턴> 외에 수많은 명작이 있다. 연주가로서의 그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취입한 음악가이며, 청중을 매혹시키고 창화(唱和)시키는 교묘함에도 정평이 있다. 또한 진보적인 사상과 고결한 인격으로 후배 포크 싱어의 신뢰와 경애를 받았다.

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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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Ritchie(1922- ) 본격적인 전통파 여성 민요가수로서 당시 활약이 가장 왕성한 가수의 하나. 민속악기 마운틴 덜시머의 대표적인 연주가이며 또한 기타도 다루었다. 켄터키의 페리에 사는 유명한 민요의 집안인 리치 패밀리의 막내딸로 태어난 그녀는 컴벌랜드 컬리지 및 켄터키 대학을 졸업하였다. 한때 교편을 잡은 적도 있는 재원으로 선조 전래의 소박한 민요의 노래솜씨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녀의 노래는 소박할 뿐만 아니라 도시의 속진(俗塵)에 오염되지 않은 투명함과 향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또한 큰 매력으로 손꼽히고 있다.

와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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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 Watson(1923- ) 장님이면서 기타, 12현 기타, 밴조, 하모니카의 명수로 유명하다. 특히 기타에 관한 한 최고의 연주가라 하겠다. 북캐롤라이나주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앞을 볼 수 없었으나 레코드를 듣고 선배들의 테크닉을 익힐 정도의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17세 때부터는 직업적인 음악가가 되어, 지방을 다니면서 활약하였으며, 1960년에 랠프 린슬러에게 발견되어 클라렌스 아슐리와 함께 널리 소개되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기타 연주는 아무리 어려운 테크닉을 구사할 때에도 충분한 여유를 보여 원숙한 음악성을 느끼게 한다. 노래에는 소박한 뉘앙스가 있어, 가장 결점이 작은 민요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벨라폰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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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ry Belafonte(1927- ) 파퓰러송의 감각을 대폭적으로 채택한 현대적인 흑인 민요가수. 뉴욕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의 몇 해 동안을 자메이카섬에서 보낸 일이 있는 그는 해군에서 2년의 병역을 마친 뒤 뉴욕에서 연극의 연구생이 되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가수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아 1949년에 데뷔하였다. 처음에는 재즈나 파퓰러 송을 불렀으나 1951년에 포크 싱어로서 재출발하였다. 뮤지컬이나 영화에도 출연하였으며 1956-1957년경부터 칼립소의 유행과 함께 스타가 되었다. 폭넓은 레퍼토리와 박력있는 설득력, 그리고 공민운동(公民運動)에도 열성이 대단한 그의 믿음직한 인간성이 높은 인기를 계속 유지하였다.

오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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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ous Odetta(1930- ) 새로운 스타일의 흑인 가수 가운데에서, 남성측을 벨라폰테가 대표한다면, 여성측의 제1인자가 오데타라고 하겠으며, 그녀의 높은 격조는 벨라폰테를 능가하는 위대한 예술가이다. 앨라배마주에서 태어나 어릴 때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학생시절에는 클래식의 성악을 배웠으나, 민요의 매력에 이끌려서 기타를 독습, 1952년에 포크 송 전문의 다방에 데뷔하였다. 이윽고 동부로 진출하여 벨라폰테의 후원 등으로 급속하게 성공, 1960년에는 카네기홀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다. 성악의 기초훈련을 쌓은 만큼 폭넓은 표현력을 지니며, 스테이지 매너의 성실성 등 청중을 감동시키는 가수이다.

마케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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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iam Makeba(1932- )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여성가수. 같은 흑인이라 해도 완전히 계산된 연출로 노래하는 벨라폰테, 예술로 승화시킨 오데타와는 달리 샘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는 노래의 서정성을 그대로 청중에게 드러내는 꾸밈없는 매력이 마케바에게는 있다고 하겠다. 또한 그 천부의 재능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심오한 깊이를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도 독특한 가수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근방에서 태어난 그녀는 남아프리카 일대에서 가수로 활약한 뒤 1959년에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진출, 벨라폰테 등의 도움으로 예능계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아프리카 출신의 진귀함 등이 인기를 높이는 시초가 된 듯했으나, 후에는 가수로서의 실력도 높이 평가되었다.

시거(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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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ke Seeger(1933- ) 피트 시거의 이복동생이나, 밴조 및 기타 연주로는 형을 능가하는 역량을 가졌다. 처음에는 클래식 기타를 배웠으나 18세 때에 포크 뮤직으로 전향, 존 코웬, 톱 페일리와 함께 뉴 로스트 시티 럼블러즈를 결성하여, 새로운 스타일의 마운틴 뮤직 연구에 힘썼다.

시거(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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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ggy Seeger(1935- ) 피트의 이복 누이동생이자 마이크의 친누이동생. 시거 형제 가운데 가장 소박한 애팔래치아 민요의 스타일로 노래하며 밴조를 연주하였다. 1935년 6월 17일에 태어나, 형들의 감화로 민요에 흥미를 갖고 국회도서관의 민요 자료실에 있는 옛 레코드를 연구하였다. 1957년에 영국 최고의 민요가수 이와 매콜과 결혼하였다. 그녀만큼 도시에서 자랐으면서도 소박한 민요의 맛을 터득한 사람도 흔치 않으며, 진 리치와 함께 여류 포크의 최고봉으로 손꼽혔다.

팩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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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 Paxton(1938- ) 젊은 사회파(社會派) 포크 라이터로서의 명성을 떨치었으며, 노래와 기타 실력도 상당하다. 시카고에서 태어나 오클라호마에서 자랐으며, 대학시절에 포크 송의 매력에 이끌려 이 길로 뛰어들었다. 1960년에 뉴욕으로 가서 포크 싱어 및 라이터로서 활약하기 시작하여 <램블링 보이>, <학교에서 뭘 배웠지>, <마지막 생각> 등의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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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dy West(1939- ) 미국 애팔래치아 산악지방 출신의 여성 민요가수로서, 진 리치의 뒤를 잇는 가수로서 밴조를 연주하였다. 조지아주 북서부에서 시인 돈 웨스트의 딸로 태어나, 컬럼비아 대학에서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았으며, 빈틈없는 본격적 민요가수로서 전통적인 민요의 창법을 지켰다. 민요곡을 바탕으로 그녀가 만든 <5백마일>이 많은 포크 가수나 그룹의 레퍼토리로 다루어짐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콜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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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dy Collins(1939- ) 존 바에즈와 함께 인기를 서로 다투는 여성 포크 가수. 단단한 기초를 바탕으로 한 창법과 딕션의 훌륭함, 또는 예민한 음감(音感) 등이 바에즈와 비견될 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으며, 기타에도 능숙한 솜씨를 보였다.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태어나,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배운 뒤 민요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였다. 1959년에 직업적인 가수가 되어 차분한 알토의 목소리와 민요에 대한 지적인 해석으로 인텔리 포크 팬 사이에 확고한 인기를 굳혔다.

오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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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 Ochs(1940- ) 톤 팩스턴과 함께 1960년대 촉망받았던 신진 포크 라이터. 가수 겸 기타리스트로서도 그 활약이 눈부셨다. 텍사스주 엘 파소에서 태어나 부친의 근무관계로 각지를 전전하면서 자랐다. 그 후 오하이오 대학에서 신문학을 전공한 뒤 포크 송 분야에 관여하였다. 원래 저널리스트 지망이었던 만큼 시사적 감각에 넘치는 풍자적인 노래를 만들었다. <포어튠>, <나뭇잎의 언덕> 등의 작품이 있다.

바에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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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n Baez(1941- ) 포크 분야에서는 최고의 인기가수. 맑은 소프라노로 부르는 청순미는 듣는 이를 매혹케 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타 솜씨 또한 훌륭하여 인기가 높았다. 뉴욕시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멕시코 태생의 물리학자, 모친은 영국계이다. 고교를 졸업한 직후에 포크 팬이 많은 스턴으로 이주, 그녀 자신도 포크 송의 팬이 되어 다방 등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1959년 제1회 뉴포트 민요제에 즉흥 출연하여 갈채를 받아 유명해졌다. 명성에 구애받지 않는 생활태도와 사회문제에 대한 적극적 관심의 표명 등이 오히려 바에즈의 인기에 박차를 가하여 학생들의 우상 같은 존재로 되었다.

딜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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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b Dylan(1941- ) 미네소타주 둘루스에서 태어나, 10세 때부터 가출을 되풀이하는 등 정신적인 방황이 잇달았으나, 그 때부터 기타를 연주하고 흑인의 블루스에 흥미를 갖기도 하였다. 미네소타 대학을 반년으로 중퇴한 후부터는 본격적인 방랑생활이 시작되었으며, 이윽고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에 정주하였다. 1962년경에 포크송의 라이터·싱어로서 인정받기 시작하여, 1963년 뉴포트 민요제에서는 완전히 스타가 되었다. 이 시기의 그는 <바람에 날려>, <전쟁의 왕초> 등으로 대표되는 프로테스트송의 작사가이며 또한 가수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그가 프로테스트를 버리고 록의 비트와 전기 기타를 도입, 이른바 포크록으로 전향한 것은 1965년의 일이었다. 그 이후는 비틀스와 함께 새로운 팝 뮤직을 주도하는 존재로서 그 인기는 상승일로를 달렸다. 이처럼 그는 중도에서 진로를 바꾼 듯이 보이나, 그 밑바닥에 깔린 기성질서에의 반역성과 자기 감각에 대한 충실성이 일관된 그의 본질이라 하겠다.

세인트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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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ffy Saintemarie(1943- ) 순수한 인디언 여성으로, 포크송 분야에서 가장 귀중한 개성의 소유자로서 주목을 끄는 가수이다. 기타 외에도 민속악기인 마우스 보우를 연주하였다. 쿠리족(族)의 인디언 출신이며, 어려서 고아가 되어 다른 종족 인디언 부부의 양녀가 되어 매사추세츠주에서 자랐다.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을 특대생으로 졸업한 뒤로는 포크송 세계로 들어갔다. 그녀의 1963년의 작품 <유니버설 솔저>가 도노반의 레코드로 히트하였다. 그 무렵부터 작곡가 및 가수로서 이름을 떨쳐 인기가 급상승하였다.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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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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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eavers 피트 시거, 리 헤이즈, 프레드 헬러먼(이상은 남성), 로니 길버트 등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며, 다음 해에 정식으로 발족, 1950년에 <굿나잇 아이린>의 히트로 유명해졌다. 매커디 선풍의 영향으로 한때 활동이 정체되었으나 1955년 말에 재기, 포크 리바이벌의 계기를 만들었다. 1958년에 시거가 탈퇴, 그 후임자는 에릭 달링으로부터 프랭크 해밀턴, 버니 크라우즈로 바뀌어 1963년에 해산하였다. 창법은 매우 소박하고 자연스러우나 높은 휴머니즘의 정신이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왔다.

타리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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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arriers 위버스의 뒤를 이어 나타나, 보다 더 팝스적인 감각을 강조하여 킹스턴 트리오 등의 선구적 존재가 된 그룹. 에릭 달링, 보브 케어리(흑인), 알란 아칸의 트리오로서 1956년경에 발족, <바나나 보트 송>으로 크게 성공을 하였다. 1958년에 달링이 탈퇴한 후부터는 자주 멤버가 바뀌어 클라렌스 쿠퍼(흑인), 엘릭 와이즈버그, 마셜 브리크맨, 알디너 등이 출입하여, 때로는 셋이 되기도 하고 넷이 되기도 하였다. 1965년 말에 해산하였다.

킹스턴 트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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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ngston Trio 팝 포크 붐과 학생 출신 포크 그룹이 배출되는 계기를 이룬 남성 트리오. 데이브 가드, 보브 셰인, 닉 레이놀즈에 의해 1957년에 발족하였다. 다음해 <톰 두리>의 대히트로 인기를 획득하였다.

브러더스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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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rothers Four 킹스턴에 이어 출현한 학생 그룹. 포크의 팝화(化)를 더욱 발전시켰다고 하겠다. 마이크 커클랜드, 딕 포리, 존 페인, 보브 프릭의 넷이며, 1958년에 결성된 이후로 멤버는 달라지지 않았다. 1960년에 <그린 필즈>의 히트로 각광을 받은 이후 감미로운 사운드와 청결감으로 많은 팬을 매혹시켰다.

미첼 트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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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itchell Trio 충실한 가창력과 예리한 사회 비판성으로 높이 평가받은 남성 트리오. 역시 학생 출신이다. 차드 미첼, 마이크 코브랙, 마이크 퓨의 셋이 1959년에 발족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조 프레이지어가 퓨와 교체, 벨라폰테와의 공연이나 텔레비전 쇼 출연 등으로 그 실력이 널리 인정되어 왔다. 1965년에는 미첼이 독립, 대신 존 덴버가 들어왔으나, 그 후에도 줄곧 미첼 트리오의 이름으로 활약하였다.

이언과 실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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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n Tyson and Sylvia Fricker 캐나다 출신의 부부 듀엣. 약간 싸늘함을 느끼게 할 정도의 투명함과 청순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솔로 가수로서, 캐나다에서 활약하던 이언이 1960년에 실비어와 콤비가 되어 차차 활동의 폭을 미국까지 넓혔다. 1964년에 결혼한 이들 두 사람은 모두 가수이면서도 작곡가로서의 재능이 놀라운 인기 듀엣이다.

피터, 폴, 앤 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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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Yarrow, Paul Stookey and Mary Travers PPM의 약칭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포크 코러스 최고 인기팀. 1961년에 처음으로 만난 셋이 다음 해에 트리오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데뷔곡 <레몬 트리>의 히트로 인기를 굳혀 계속 걸작 레코드를 내어 톱에 올라섰다. 세 사람이 모두 높은 예술적 감각을 지녔으며, 도시적·현대적인 아름다움으로 넘친 코러스와 기교적인 기타 반주(피터와 폴에 의한)는 포크 팬에게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뉴 크리스티 민스트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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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Christy Minstrels 포크의 분야에서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는 대편성의 혼성 팝 포크 그룹. 1961년에 남성 8명, 여성 2명, 합계 10명이 레코드를 녹음, 그 호평에 부응하여 다음해에 레귤러 그룹으로서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최초의 리더는 랜디 스파크스였으나, 1964년에 아트 포텔과 교체하였다. 멤버가 자주 바뀌는 것으로도 유명하며, 인원수도 남자 7명, 여자 2명의 9명으로 줄었으나 실력은 저하되지 않았다. 1965년경부터 산 레모 음악제에 출연하는 등 팝화(化)의 방향으로 강력하게 추진시켰다/ 다수 인원의 멤버를 살린 다채로운 편곡과 연출의 교묘함으로 즐기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최고의 그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