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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시사/정치와 생활/근대정치의 전개/시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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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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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民革命

시민혁명이란 서구봉건사회 최후의 권력형태인 절대주의(絶對主義) 권력을 타도하기 위해 일어났던 혁명을 말한다.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 내지 근대민족(국민)국가로의 역사적 이행기에 일어났던 이 혁명은 주로 시민계급(bourgeoisie)에 의하여 수행되었으므로 시민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고도 부른다. 영국의 청교도혁명(1640-60년)과 명예혁명(1688년), 미국의 독립혁명(1775-83년),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1789-99년)은 그 전형적인 예들이다.

그러면 시민혁명의 발생원인인 절대주의의 모순과 시민혁명의 결과를 살펴보자.

절대주의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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絶對主義-本質

중세 봉건사회에서 근대 자본주의사회에로의 과도기에 출현한 절대주의체제는 봉건세력과 시민세력과의 균형위에 선 것으로, 그런 점에 있어서 절대주의체제는 중세적 측명과 근대적 측면을 아울러 가진다.

절대주의체제는 대개 군주정(君主政)을 채택하고 있었던 만큼 그것은 흔히 절대왕정(absolute monarchy)이라 불리운다. 절대왕정은 여전히 토지의 영유관계(領有關係)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므로 절대군주는 토지귀족(土地貴族)과 교회(가톨릭 교회는 방대한 토지를 교회령으로 보유하고 있었다)를 자기에게 종속시키면서 이와 결탁하고, 동시에 왕권에 의한 전국지배를 유지·강화하기 위하여 시민계급의 지지를 얻으려고 애썼다.

그 결과 중앙집권화=봉건적 지방분권체제의 타파와 주권의 일원화=정권(政權)과 교권(敎權)의 이원적 권력구조의 극복이라는 면에서는 절대군주는 통일적 국내시장 형성을 통해 시민적 발전을 촉진하여 봉건세력을 약화시켰으므로, 이 점에 있어서 절대군주국가는 근대국가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반면에 절대군주는 일개의 봉건영주로서 전국적 규모로 재편성된 봉건사회의 정점에 서는 것이므로 절대군주국가는 중세적 봉건체제의 연장·연속면을 가진다. 요컨대 절대주의체제는 중세와 근대라는 모순되고 충돌되는 두 국면을 아울러 가지는 과도기적인 국가형태였다.

절대주의의 모순과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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絶對主義-矛盾-崩壞

절대군주국가는 한편으로는 봉건군주 권력의 자기확대(自己擴大)로서 생겨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발흥하는 상업시민(商業市民)의 통일적 국내시장 형성의 요망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의 배후에는 문예부흥을 통해 싹터 온 민족의식(民族意識)의 성장이 군주의 국가통일을 지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실 절대군주국가로 발족한 근대국가는 무엇보다도 근대민족(국민)국가라고 불러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이처럼 민족의식을 근저에 가지고 또한 상업시민 내지 시민계급의 이익을 고려에 넣고 형성된 근대민족국가는 얼마 안 가서 타국과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전쟁, 그중에도 특히 신대륙의 상업이권을 둘러싼 쟁패전(爭覇戰)이 빈발하게 되자, 각국은 한결같이 국내통일을 강화하고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에 부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국내통일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유능한 관료단(官僚團)으로 하여금 행정기구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고, 군비를 확충하기 위해서는 그 유력한 요원인 자영농민(自營農民)을 창출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관료제도와 군비를 유치·강화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요청되었다. 이 때문에 적극적으로 시민계급을 원조하여 국외로부터 금·은·재화(財貨)를 획득시키고, 또한 국내의 생산업을 진흥시키는 일이 중요했다. 경제사상 중상주의시대(重商主義時代)라 불리우는 시기는 이리해서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절대군주국가의 정치는 어떠했는가? 그것은 매우 전제주의적이었다. 거기서는 군주의 의지가 곧 법이며, 군주의 권력행사는 무제한한 것이었다. 더구나 종교개혁(宗敎改革)으로 인한 국가와 교회의 밀접한 결합은 군주의 권력을 세속적인 세계뿐 아니라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미치게 하였다. 이제 군주는 신권설(divine rights of kings)의 이론적 무기를 휘두르며 국내의 이단자(異端者)에게 임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절대왕정의 무제한한 권력은 비이성적인 신앙에 눌리어 자기억제를 모르는 비윤리적인 폭력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절대왕정의 이러한 권력지배는 물론 그대로 방치(放置)될 리는 없었다. 프로테스탄트인 근대시민계급, 그중에도 특히 칼뱅 교도는 유력한 이론과 실천을 가지고 이에 대항하게 되었다. 절대주의의 전개에 따라서 절대왕정에 기생하던 시민층 중에는 축적된 자본을 공업에 투하함으로써 점차 산업자본가로 전환하는 자가 생겨났다. 그 대부분이 칼뱅 교도들이었던 이들 산업자본가는 종교적 자유를 외치는 반면에, 절대주의적 산업통제에 반대하고 상공업에 있어서의 자유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원래 절대주의의 국가권력의 증강은 재정력(財政力) 위에 이루어진 것인데, 재정력의 증대는 국민경제의 발달과 근대시민의 활동에 의거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절대주의의 재정경제적 구조는 마침내 그 실질적 권력기반인 시민계급의 권리의식을 조성케 하여 국권(國權)의 사권화(私權化)를 부정케 하였다. 대개 절대주의 권력의 본질은 봉건적 사회·경제관계에 의거한 정치권력이었으므로 처음에는 시민계급을 비호(庇護)했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도리어 시민계급을 억압하게 되었고, 또한 처음에는 지지했던 농민계급도 구귀족에 대한 봉건지대(封建地代) 이외에 새로 군주에 조세(租稅)를 바침으로써 더 한층 생활의 궁핍화에 허덕이게 되어 시민계급의 정치운동에 호응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시민혁명이 일어나 봉건잔재적인 요소가 불식(拂拭)되게 되었고, 근대적인 민주·민족국가가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민혁명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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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民革命-結果

시민혁명이란 요컨대 이미 형성되고 있던 사회경제관계에 정치권력을 일치시키는 과정이거니와, 이미 바꾸어진 현실적 기반에 상응하는 계몽주의(啓蒙主義)라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그들 시민계급은 국민주권(國民主權)과 기본적 인권이란 2대 원칙을 높이 들고 절대주의의 국가권력을 타도했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지금까지 국가권력에 부착되고 있던 전근대성을 불식했던가.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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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族主義

시민혁명은 절대군주국가내의 복잡기괴한 장벽을 일시에 타파하여 진정한 국민적 통일을 이룩했다. 하기는 절대주의가 중앙집권화를 크게 촉진한 것은 사실이나, 가장 정력적이었던 프랑스에 있어서까지도 대혁명 전에 명확한 국경선조차 확정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군왕 사이에 판역(版域)이 서로 교착(交錯)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한편 지방제도를 보더라도 국왕의 직할지와 지방 등족회의(等族會議)의 관할지 등으로 나누어져 있어 전연 통일을 이룩하지 못했고, 또한 군왕의 혈연관계, 귀족의 국제적 계급성 등으로 이른바 '국민이 조직되지 못하고 여러 갈래로 흩어진 집합체'에 불과했다. 이러한 프랑스를 대내외적으로 공고하게 조직된 통일 프랑스로 탈피시킨 것은 실로 대혁명이었다. 근대적 민족주의는 프랑스 혁명의 아들이라고 하는 소이(所以)는 바로 여기에 있다. 혁명 프랑스의 민족주의는 마침내 혁명전쟁과 나폴레옹전쟁을 통해 전 유럽제국에서 근대 민족주의를 촉발·육성했다. 이리하여 국제정치에 있어서는 배타적 민족(국민)국가가 완성되어 자국(自國)의 번영과 영광과 위대성만을 현실정책으로 삼아, 후진지역에 방대한 식민지 내지 반식민지를 획득함으로서써국가적 이기심을 충족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근대적 민족국가는 당시 유럽에 있어서 세력균형(勢力均衡)에 의한 일종의 국제협조를 이룩하고 있었다. 이것을 근대국가체계(modern state system)라 일컫지만 그 전제는 영국의 압도적인 세력과 근대민족국가간의 흥정의 대상이 되었던 식민지·반식민지의 존재였다. 그러나 독일 통일을 계기로 하여 팩스 브리태니커(Pax Britannica)를 위협하게 되고, 더욱이 후진지역에서 민족주의의 개화와 결실을 보게 되자, 근대국가체계는 근저에서 동요되어 동란의 세계로 돌입하게 된다.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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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主主義

시민혁명은 신권설(神權說)을 배경으로 하는 군주주권을 타도하고 국민주권을 수립했다. 즉 국권의 군주적 사권화(私權化)를 철저히 배격함으로써 국내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승리를 이룩하였다. 찰스 1세와 루이 16세의 운명은 절대군주의 자의(恣意)와 전횡에 대한 중대한 경고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그 후 왕정이 복고되어 국민주권은 군주주권과 타협하기도 교체하기도 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칙은 주권재군(主權在君)의 원리를 일보 일보 몰아가서, 마침내 1917-18년에는 로마노프·합스부르크·호엔촐레른 3왕조의 붕괴로 국민주권은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주권을 보유하는 국민의 범위의 문제이다. 자코뱅 당(黨)은 확실히 국민의 범위를 문자 그대로 전 국민에까지 확대시켰지만, 그 후 2월혁명에 이르는 60년간의 역사는 국민의 범위가 부르주아지로 축소되기도 하고 재확장되기도 하여 신축을 되풀이하는 과정이었다. 영·프·독·일 등의 국가에서도 선거권(選擧權)이 완전히 보통·평등하게 되기에는 장구한 시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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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主義

시민혁명은 기본적 인권의 확보를 통해 자유주의의 터전을 닦았다. 즉 정치면에 있어서 국민주권의 원칙을 수립함으로서 절대군주의 자의와 전횡을 배제할 수는 있었으나, 한편 주권자인 국민의 자의와 전횡이라는 새로운 위험이 생겨났으므로, 이에 국민은 국민주권과 더불어 기본적 인권을 확보해야만 했다. 기본적 인권은 이른바 천부불가양(天賦不可讓)의 기본적 인권이라는 계열 이외에 봉건계약에 연유하는 신민(臣民)의 역사적 권리라는 별개의 흐름이 있다. 귀족과 도시의 봉건적 특권, 특히 대헌장(Magna Carta)에서 권리장전(Bill of Rights)로 연속적으로 발전한 영국에서는 후자의 역사적 권리가 자유주의의 주류가 되고, 봉건적 특권의 흐름이 단절된 프랑스에서는 전자의 천부인권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 두 조류는 19세기 중에 합류·보완되어 어떤 형태이건간에 국민의 기본권을 헌법에 규정하는 것이 근대국가의 불가결의 조건으로 되었다. 물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한다는 근대자유주의국가의 전제는 외전내란(外戰內亂)에 있어서는 위태롭게 되므로, 국제평화와 성내평화(城內平和)야말로 근대국가의 자유주의에 대한 대전제로 되는 것이었다.

한편 시민혁명의 승리는 다름아닌 신흥자본가계급의 승리였으므로 경제면에 있어서는 이른바 애덤 스미스의 예정조화론에 입각하는 자유방임주의(自由放任主義)로 내달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자본주의체제가 확립되었지만 이것은 생산력의 증강에 크게 이바지하면서도 그 진행에 따라 국내적으로는 사회적 동질성을 파괴하여 계급대립을 격화시키고, 경제력의 횡포가 드디어 정치적 권리를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민족주의와 결탁하여 제국주의로 나가게 하고, 마침내는 고이윤(高利潤)의 확보를 위하여 후진지역에 자본수출을 실시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정치적으로 지배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이에 배타적이며 단일민족적이던 근대국가의 경제기반이 그 자체 속에 이질적이며 비단일민족적인 요소를 구조적으로 내포하게 되어 자기 모순을 피치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근대국가가 본질상 배타적 군사국가의 요소를 지양(止揚)할 수 없는 데서 국제긴장의 격화에 따라 식민지 인구의 필요, 전략지대(戰略地帶)의 설정, 전시생산의 후보지로서의 식민지의 가치가 중요시되어 불가불 식민지의 산업화를 가져와 그 결과로 토착민의 민족의식을 육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민혁명과 근대국가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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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民革命-近代國家-成立

시민혁명으로 인하여 안으로는 민주주의를, 그리고 밖으로는 배타적인 국민국가를 완성하거니와, 민족주의·민주주의·자본주의라는 근대국가의 형성제력(形成諸力)의 균형에 의한 근대국가체계를 이룩함으로써 19세기의 번영과 평화를 누리지만, 근대국가를 변질시키는 제 요인의 성장으로 양차 대전을 전후하여 그 변질과정이 급속히 진행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사회의 발전에는 다양한 길이 있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도 시간적으로는 발전조건에 좌우되어 지속(遲速)의 차가 있을 뿐더러 그 성격도 다르다. 사실 절대주의확립의 시기와 성격에 따라 시민혁명의 양상도 크게 달랐으며, 더구나 시민혁명이 유산(流産)되고 만 후진제국에서는 선진제국에 대항하기 위하여 왜곡된 형태로나마 위로부터의 국민적 통일이 강행되어, 여기에 신절대주의(新絶對主義)라고 할 일종의 독특한 국가권력이 생겨났다.

이탈리아·독일·일본이 그러한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라들에 있어서도 국민의 권리를 전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어 각종 엄중한 제한은 가하면서도 흠정헌법(欽定憲法) 속에 국민의 권리에 대하여 명색뿐일 망정 다소 자유주의적인 요소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본래의 근대국가를 정상적인 것이고 신절대주의국가는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기계적으로 대립시켜, 후자를 의회주의화하여 전자의 형태로 접근만 시킨다면 만사는 해결된다는 식의 서구민주주의적 편견에 무정견(無定見)하게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서구민주주의는 독특한 서구식 기반과 조건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즉 민주주의 체제의 기본조건은 생활수준의 향상이었다. 극도의 빈곤 속에서는 민주주의의 관념조차 찾아 볼 길이 없다. 서구의 민주주의는 서구적 번영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서구의 민주주의 정치제도는 비민주주의적 식민지정책에 의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역사적·사회적 조건에 따라 적응될 정치제도도 다르며 결국은 주체성의 문제라 하겠다.

시민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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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民階級

부르주아지(bourgeoisie)의 역어(譯語)로서 보통 중산계급(中産階級)과 동의어(同義語)로 사용되나 중산계급은 경제적 측면을, 시민계급은 정치적 측면을 강조한다. 즉전자는 근대자본주의의 담당자로서, 후자는 근대민주주의의 추진자로서 파악된다.

부르주아란 원래 도시민(都市民)을 말하며, 귀족·성직자 등의 특권신분은 아니나 일정한 권리와 보호가 인정된 '자치도시(自治都市)'의 정규 구성원을 가리킨다. 그 후 17-8세기에 이르자 도시민은 경제활동을 통해 점차 유력하게 되고, 인구도 증가해 제1신분(성직자)와 제2신분(귀족)에 대항하는 '제3신분'으로서 권리요규의 주체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시민혁명)'이라 불리고, 혁명 후의 사회가 '부르주아 사회(시민사회)'라고 불리우는 것은 도시민을 중심으로 한 제3신분의 정치적 승리가 얻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시민의 경제활동 속에서 점차 자본주의가 성장한 것도 사실이며, 이 경제적 이해를 공통으로 하는 집단이 '부르주아지'로 불리우게 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이다. 특히 사회주의자에 의해서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대립개념(對立槪念)으로서 사용되게 됨에 따라 이 용법이 일반화되었다. 이 경우에는 부르주아란 시민보다는 자본가, 따라서 부르주아지란 시민계급보다는 자본가계급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제왕신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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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王神權說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theory of divine right of kings)이라고도 한다. 17세기의 절대군주에 의해 신봉되고 군주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정치이론. 이 이론의 요지는 ① 대관시(戴冠時)에 교회의 장(長)에 의해 기름이 부어지기 때문에 신성하며, 따라서 군주에 대해 해를 끼치거나 반대음모를 꾸미거나 하는 일은 불경(不敬)이며 모독이다. ② 군주는 일국의 어버이이므로 국민에 대해 가부(家父)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③ 군주권은 절대·독재적이며 다만 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니고, 국민은 군주에 대해 왕의 개심(改心)을 신에 기도할 수 있을 따름이다. ④ 군주는 지상에 있어서의 신의 영상(映像)이므로 인간으로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군주 속에 전국민이 구상화(具象化)되어 있다고 했다. 루이 14세의 '짐은 국가다'라는 말은 이를 단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팍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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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x Britannica

여기서 '팍스'란 군사적 및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을 압도적으로 능가하는 한 나라의 존재에 의해서 평화가 유지되는 상황을 말한다. 그리하여 7개의 바다를 지배하는 해군력과 경제력을 가진 영국이 유럽의 균형결정력(balancer)으로서의 기능을 다한 시기(1815-1914)는 팩스 브리태니커(영국의 평화)라 불리운다.

성내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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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內平和

공통의 적을 앞에 두고 내부적인 항쟁·대립을 중지하는 것. 중세의 성벽(城壁)을 중심으로 하는 전쟁형태에서 이 말이 나왔다.

역사적으로 저명한 예는 독일사회민주당에 의한 제1차대전의 군사예산 찬성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각국 사회주의 정당의 전쟁협력(戰爭協力)이다.

<車 基 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