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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시사/정치와 생활/근대정치의 전개/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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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각성에 의한 상승하는 기대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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偉大-覺醒-上昇-期待-革命

지금까지 세계무대에서 주역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피동적 수난자(受難者)로서의 아시아 신생국들이 당면한 20세기 후반기의 핵심적인 현상은 그들의 자조와 자립을 위한 민족의식의 고조와 자립경제의 확립 및 지역협력의 촉진에 대한 '위대한 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 신생국들의 이러한 '위대한 각성'은 근대화로의 희망과 기대가 간직된 '상승하는 기대의 혁명'을 일으키게 하였다. '위대한 각성'에 의한 아시아 지역의 '상승하는 기대의 혁명'은 빈곤과 낙후성에 대한 숙명론적인 체념을 탈피하여 소유욕에 대한 동양의 금욕주의(禁慾主義) 철학을 버리고 서양의 현실주의적 철학을 받아들여야 함을 절감한 경제적 측면에서뿐만이 아니라, 민족의식의 고조라는 민족주의적 측면에서나 탈(脫)이데올로기적 다극화(多極化) 세계질서 속에서 자조와 자주를 위한 지역협력적 측면에서도 격렬하게 일어나, 현대의 아시아는 커다란 격동을 겪고 있는 현실이다.

아시아 내셔널리즘에 대한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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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 nationalism-覺醒

2차대전 전까지의 아시아의 내셔널리즘은 서구의 영향으로 등장하였고, 2차대전 이후의 내셔널리즘은 서구에 대한 반항의 소산이었다고 할수 있다. 19세기까지의 아시아는 세계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무(無)역사적인 전근대적 정치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으나, 19세기부터는 서구의 영향으로 점차 각성하기 시작하여 역사적 생명이 있는 근대화 지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서구의 자극으로 촉진된 역사적 근대화에 대한 아시아의 각성은 아시아 내셔널리즘의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2차대전 전까지의 초기 아시아 내셔널리즘의 각성은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帝國主義的)·식민주의적 지배를 받고 있던 피동적 자세에서 세계사에서 독립적인 행세를 할 수 있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자세를 간직하도록 재촉하였다. 그러므로 2차대전 이후의 아시아 내셔널리즘은 의당 근대 서구열강이 아시아에 준 강압적이고 파괴적인 충격에 대한 하나의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응답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날 아시아 혁명의 소산은 ① 서구 열강의 정치적 지배에 대한 반항, ② 민중의 사회적·경제적 반항, ③ 인종적 반항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아시아의 혁명은 아시아 내셔널리즘에 대한 각성의 소산이었다고 요약할 수도 있는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아시아 내셔널리즘의 전개는 각성의 단계에서 개별적 내셔널리즘의 단계를 거쳐, 이제는 국제화된 아시아 내셔널리즘 단계에까지 접어들게 되었다. 현재 아시아는 세계사 속에서 피동적인 객체(客體)로서가 아니라 능동적인 주체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55년 4월에 개최되었던 아시아·아프리카 신생국들의 반둥회의는 참으로 아시아 내셔널리즘의 국제정치적 주체성 확립의 커다란 징표(徵表)가 아닐 수 없다.

아시아 내셔널리즘은 일반적으로 스스로의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노력이 대단하다. 2차대전 직후인 독립 초기에는 서양에 대한 반항에서 비롯되는 국민통합(國民統合)이라는 정치적 측면이 두드러졌으나, 그 이후에는 정치문제보다 만성적인 빈곤문제가 더 절실하게 되어 근대화 지향에서 경제를 정치보다 우위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자각적이고 자주적인 경제동력(經濟動力)의 개발문제가 자못 중요시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자각적이고 자주적인 경제동력의 개발은 외부세계와 연관 없이는 불가능한 시대이기 때문에, 현대의 아시아 내셔널리즘도 폐쇄적이고 고립적(孤立的)일 수는 없고, 주체적이면서도 외부세계와 연관되는 '내셔널리즘의 국제화'라는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내셔널리즘의 국제화'와 더불어 '내셔널리즘의 집단화(集團化)'도 현재 아시아 내셔널리즘의 특색이다. 현재 유엔에서 아시아 각국은 그들의 개별적인 내셔널리즘의 전개보다 '내셔널리즘의 집단화'를 전개함으로써 그들의 건전화를 도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현대에 있어서의 아시아는 '내셔널리즘의 국제화(國際化)'와 '내셔널리즘의 집단화'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립경제에 대한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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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立經濟-覺醒

전후 아시아의 내셔널리즘은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열의와 의욕이 원동력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전후 타율적으로 획득한 정치적 독립을 국민국가의 형성으로까지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빈곤으로부터의 탈피라는 일이 급선무였다. 따라서 아시아 신생국가들의 자립경제에 대한 의지는 매우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전후 아시아의 신생국들은 대체로 생산요소의 불균형적 편재(偏在)와 일인당 소득의 저수준(低水準)과 자본부족 및 기술부족 등으로 생존선상(生存線上)의 생활을 강요당하게 되자, 그들은 그들의 경제가 이상세계로 급속하고 폭발적으로 진전되기만을 바라게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조하고 자립할 수 있는 유리한 국가정책으로 각기 신생국의 조건과 합리주의에 알맞는 가치전제(價値前提)에 입각한 목적의식적인 계발계획화를 채택하려고 노력하였다. 따라서 아시아의 신생국 지도자들은 선진국에서 전승(傳承)된 경제이론을 그대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선진국 이론을 신생국 자신의 문제와 이해에 적합하게 개조하려고 노력하였다.

선진국가는 다른 신생국 자신의 상이한 합리화 요구에 상응하는 국가정책이나 국가체제의 합리적 방법은 신생국에 알맞는 가치전제에 입각하지 않고는 효율을 거두기 어렵다. '위대한 각성'으로 신생국에 작용하였던 가치전제는 군나 뮈르달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근대화이념(近代化理念)'이 자못 중요하였다. 그러므로 강력한 발전에의 의지를 재촉한 아시아의 각성이 헛되지 않으려면 신생국 자신에 알맞는 '근대화이념'의 정립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자립(經濟自立)에 대한 강력한 의지는 당연히 그것을 위한 목표를 수립하고, 그 목표를 위한 효율적인 정책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 아시아 신생국들이 직면한 긴요한 몇 가지의 대응책을 요약하면, ① 인구증가율의 둔화, ② 농업생산의 근대화, ③ 가능한 한 최대한의 공업의 자립, ④ 제도의 합리적 개혁, ⑤ 외국 자본과 기술의 도입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외국자본과 기술의 도입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생국에 알맞는 가치전제인 '근대화이념'을 바탕으로 했을 때에는 가치있는 것이나, 그렇지 못할 때는 '신판(新版) 예속화'의 함정에 빠지고 말 것이다.

지역협력에 대한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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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域協力-覺醒

현재 아시아의 신생국들은 아시아 내셔널리즘의 '국제화'나 '집단화'의 조류 속에서 그들의 경제자립을 위해 선진국과의 협력은 물론 그에 못지않게 신생국간의 지역협력의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지역협력에 대한 각성은 내셔널리즘이나 경제자립에 못지않는 '아시아의 위대한 각성'이다.

사실 아시아 신생국들은 ① 미국·소련·중공 및 일본의 4강구조(四强構造) 속에서 야기될 법한 힘의 공백(空白), 지배에 대한 의구, 거래에 의한 희생을 염려하여, ② 강대국들의 현실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냉엄한 탈(脫)이데올로기적 국제정치 게임에 대처하기 위하여, ③ 정치적 이념의 추구보다는 경제개발이 급선무라는 현실적 요청에 따라 비유기적(非有機的)이고 비협력적인 유동국가(流動國家)로서는 견딜 수 없게 되어, 자조와 자주를 위한 자구책(自救策)으로서 지역협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아시아의 지역협력기구는 그 수도 많고 범위도 광범하다. 아시아의 지역협력기구는 편의상, ① 유엔 산하의 지역협력기구, ② 동남아시아의 지역협력기구, ③ 범(汎)아시아 지역협력기구의 세 가지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유엔 산하의 협력기구로서는 ESCAP, UNCTAD, UNESCO, UNDP(유엔 개발계획), UNIDO(유엔 공업개발기구), ICAO(국제민간항공기구), ITU(국제전신통신연합), FAO(유엔 식량농업기구), ILO(국제노동기구) 아시아 지역회의, UPU(만국우편연합) 아시아·오세아니아 주 우편연합, WMO(세계기상기구) 제2지구(아시아) 협회 등이 있다.

둘째, 동남아협력기구로서는 ASEAN(동남아국가연합),SEAMEC(동남아문교장관기구), SEACEN(동남아중앙은행 동계회의), RCD(지역협력개발기구) 등이 있다.

셋째, 범아시아 협력기구로서는 ASPAC, APO(아시아 생산성기구), ADB(아시아 개발은행), EROPA(행정에 관한 아시아 극동 지역기구), ASCA(아시아 과학협력연합), SEANZA(아시아·오세아니아 주 중앙은행회의) 등이 있다. 이러한 범아시아 지역협력기구는 한국이 주도하는 ASPAC과 주로 미국과 일본의 출자(出資)에 의해서 운영되는 ADB를 제외하고는 대개가 일본의 주도하에 있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동남아지역협력기구를 제외하고는 아시아의 지역협력기구는 거의 모두가 유엔 산하가 아니면 일본의 주도하에 운영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여 동남아제국은 그들의 자조와 자주를 위해 ASEAN을 주축으로 지역협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한국도 ASPAC을 주축으로 아시아 지역협력에 대한 전력투구(全力投球)로서 자주와 자조를 기했으나, 1973년 이후 기능이 정지되었다.

앞으로 한국이 주체적이고도 효율적인 아시아의 지역협력을 달성하려면 먼저 그들 자체만의 협력태세를 착실히 굳혀 나가고 있는 동남아협력기구(東南亞協力機構)들과, 그중에서도 특히 ASEAN과 깊은 연관을 맺지 않으면 안 된다. 1971년 말경부터 아시아 지역협력의 대강으로 ASPAC을 ASEAN과 착실히 연결시키려 했지만 국제정세의 변화로 사실상 해체되었다.

아시아의 위대한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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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偉大-覺醒

내셔널리즘과 자립경제와 지역협력에 대한 각성으로 인한 아시아 신생국들의 '상승(上昇)하는 기대의 혁명'은 현실적으로는 어려움이 너무도 많아서 줄곧 시행착오(試行錯誤)의 과정을 겪어 왔다. 오랜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아시아의 신생국들은 이념이나 교리에 대한 맹목화보다 세속적·실용적·경험적 태도나 정책이 보다 바람직하다는 '역사적 교훈'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교훈은 실리추구(實利追求)만을 일삼는 비정(非情)한 강대국들의 탈이데올로기적 경향이 보다 두드러지기 시작한 60년대 말부터는 더욱 절실한 것으로 되었다.

이제 한국도 우리의 자주적인 실리를 위해서 세속적이고 실용적이고 경험적인 원칙에 따른 국제관계 개선의 다변적(多變的)인 창구의 개설을 적극적으로 배려할 때가 온 것이다.

다변적 창구의 개설을 필요로 하는 개방성이나 세속적·경험적 태도나 원칙이란 바로 민주주의의 실천원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시아의 각성'에 의한 '상승하는 기대의 혁명'의 성공가능성은 아시아 신생국들의 민주화(民主化)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행착오를 극복하여 줄 수 있는 '피드백(feedback)장치'는 현실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독재주의나 전체주의국가에서는 있을 수도 또는 있은 적도 없었고, 오직 민주주의국가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민족해방운동과 흑인의 민족적 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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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rica 民族解放運動-黑人-民族的自覺

20세기 중엽까지만 하더라도 아프리카 대륙은 사람들의 화제에 오르내릴 만한 어떤 정치적 기대(政治的期待)를 걸 여지조차 없는 망각의 '암흑대륙'이었다. 이 '역사없는 대륙'에도 제2차대전을 계기로 '검은 민족주의'의 열풍이 불어닥쳐 '사슬을 끊는 아프리카'의 프로메테우스적 저항과 위대한 민족적 자각이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아프리카는 역사적 전환점(轉換點)에 서게 되었던 것이나, 같은 '제3세계'에 속하는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보다 지정학(地政學)적인 문제·인종문제·복수사회(複數社會)문제 등으로 훨씬 어렵고 착잡한 국면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아프리카라고 하지만 북위 20도선을 경계로 하여 북아프리카(사하라 사막 이북)와 '사하라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사회'(African South Society of the Sahara)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북아프리카는 지중해 수역에 접한 관계로 일찍부터 유럽 문화와 회교문명(回敎文明)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 아랍세계와 밀접되어 있기에 아라비즘(Arabism)의 감화는 뚜렷하다. 이에 반해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엄밀한 의미의 아프리카)는 전형적인 '아프리카의 분할(分割)'하에 제국주의적 지배형태를 취하였고, '다인종사회(多人種社會:multiracial society)'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아프리카는 현대세계의 '모순(矛盾)의 초점(焦點), 모순의 집중지역'이라고 할 만큼 식민지주의 세력과 민족해방운동, 제국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 제국주의세력 상호간 또는 사회주의세력 상호간의 여러 모순이 첨예화하여 격렬한 대립·투쟁이 전개되고 있으나 민족해방운동과 독립투쟁은 계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상호몰교섭(相互沒交涉) 상태로 연대의식을 갖지 않았던 원주민들이 그들이 처한 운명의 공통성을 자각하여 상호의존성을 극도로 높여 갔다. 1948년 1월의 '전서아프리카 국민회의(All West African National Congress)', 1955년 4월의 '아시아·아프리카 회의(Asian-African Conference)', 1958년 4월의 '아프리카 제국회의(African States Conference)' 등을 시작으로 부족(部族)과 지역간의 제약을 벗어난 광범한 연대성 강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신식민지주의 반대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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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植民地主義反對鬪爭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아프리카의 독립국은 그 정치적 입장은 어쨌든지 라이베리아·에티오피아·남아프리카 연방·이집트의 4개국에 불과했다. 1884년 11월에서 1885년 2월까지 계속되었던 '베를린 회의'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아프리카 분할의 정점을 이루었다. 독일·벨기에·영국·프랑스·포르투갈 등이 아프리카의 자연지리적·역사적·사회적 조건을 무시한 식민지 분할을 단행, 제국주의적 수탈과 지배를 자행했던 것이다.

전후 서구식민제국(西歐植民帝國)의 지배와 탄압에 저항을 계속, 1960년을 '아프리카의 해'라고 할 만큼 식민지 종속국가들이 잇달아 독립을 쟁취하였고, 국제 외교무대에도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치열한 민족해방운동 앞에 몰려난 구식민국가들은 정책을 전환, 구식민지에서의 지배를 새로운 형태와 방법을 통해 지속하려 하였다. 이같은 식민지 정책의 변화에 아프리카의 민족해방운동은 민감하게 대처하여 1960년 1월 튀니지에서 개최된 제2차 아프리카 인민회의에서는 이 새로운 정책을 '신식민지주의(Neo-Colonialism)'라 부르고 신식민지주의를 민족해방운동의 주요 투쟁목표로 인식하게 되었다. "신식민지주의란 제국주의의 새로운 형태이고 신생국의 독립을 형식적으로 승인하면서 정치적·사회적·군사적·기술적으로 간접적이고 교묘한 지배형태에 의하여 이들 나라를 희생물로 삼는, 새로운 독립을 획득하였거나 독립을 획득하려는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최대의 위협"이라고 정의하였다.

신식민지주의는 무력 대신에 '원조와 지원'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죄와 고통으로 가득 찬 과거, 그 좋은 면도 나쁜 면도 잊어버리고 아프리카 인과 식민지주의간의 관계에 새로운 장(章)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아프리카 인들은 신식민주의에 내포된 위험성을 경계하고 이를 반대하였다.

아프리카 내셔널리즘과 팬 아프리카니즘의 선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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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rica Nationalism-pan Africanism-旋風

아프리카 내셔널리즘이란 '열대(熱帶)아프리카(Tropical Africa)'의 민족주의를 말하며, 이는 식민지 제국주의의 태내(胎內)에서 태어난 식민지 민족주의(Colonial Nationalism)임이 그 기본적 성격이다. 아프리카의 내셔널리즘은 인도나 중국의 그것과 달랐는데 그 이유는 아프리카라는 것이 미래를 향하여 계획된 이념(理念)으로서만 존재할 뿐, 역사적인 현실로서 존재한 일이 없었던 까닭이며, 이 때문에 혈연관계나 분리주의자(分離主義者)의 종교운동이 내셔널리스트 조직의 선구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45년 10월 제5차 '팬 아프리카 회의(Pan-African Congress)' 이후 비로소 민족주의운동은 아프리카 내셔널리스트의 수중에 들어갔고 아프리카 인의 내셔널리즘이 본궤도에 올랐다. "팬 아프리카니즘은 한편에 있어서 이데올로기로서의 코뮤니즘에 대치되는 것이고 다른 편에 있어선 부족주의에 대신되는 것을 부인한다. 그것은 백인의 인종주의와 흑인의 쇼비니즘을 다같이 거부한다"는 것이었는데, 이의 이론가는 황금해안(黃金海岸)의 엥크루마(Kwame Nkrumah)였다. 1947년 미국에서 돌아와 서아프리카의 영·프·벨기에·포르투갈·에스파냐 식민지를 해방하기 위하여 민족통일전선 조직을 발표한 일이든가, 서아프리카 연방(West African Federation)을 요구한 것이 내셔널리즘 운동이었다.

서아프리카의 아프리카 인만의 지역에서의 내셔널리즘과는 달리 동아프리카·중앙아프리카·남아프리카 연방의 다인종사회에서의 내셔널리즘은 계급투쟁의 성격을 한층 뚜렷이 띠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영령(英領) 동아프리카의 케냐의 '마우 마우(Mau Mau)' 단의 과격한 운동이었다.

사하라 이남의 내셔널리즘도 이같이 긴밀한 연대성을 갖지 못하였는데 사하라 사막에 의하여 남북으로 양분된 남북아프리카의 내셔널리즘간에 확고한 공통적 존립기반(存立基盤)이 존재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제외한 아프리카 신생국들은 국내 건설정책과 외교정책의 공통성 때문에 대립과 그룹화를 거듭하면서도 전 아프리카적인 통합의 방향으로 전진한 데 뚜렷한 특색을 나타냈다. 이 운동은 1963년 5월 21일-26일에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렸던 전 아프리카 수뇌회의에서 조인된 '아프리카 통일기구 헌장(憲章)'에 의하여 '아프리카 통일기구(Organization of African Unity)'가 성립됨으로써 결실되었다. 이 OAU의 목적은 남아공화국의 인종격리정책 반대, 식민지하에 있는 아프리카 인의 해방투쟁 원조, 비동맹중립주의(非同盟中立主義) 견지 등이다.

아프리카 대륙 외의 국가와 관련이 있는 '아랍 연맹'과 '영연방(英聯邦)'과도 유대를 갖고 있는 OAU는 아프리카 국가간의 블럭적 대립과 부족주의적 세분화(細分化) 경향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다.

경제개발에 대한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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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濟開發-對-覺醒

아프리카 내셔널리즘이 안고 있는 문제는 국내의 근대화적 조건이 아직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채 민족국가로서의 독립을 성취하였다는 데 있다. 근대 내셔널리즘의 형성은 근대화의 2개 요소로서의 '정치적 데모크라시'와 '경제적 인더스트리얼리즘'의 조화적인 협동을 통하여서만 자기완성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아프리카에 있어선 내부적인 성장에 관련된 조건은 거의 준비되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아프리카는 외부의 지원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아프리카인의 생활향상과 경제개발을 위한 자본과 기술인 것이다.

이프리카 국가들은 외부로부터의 경제·기술원조에 크게 의존하고 이를 바탕으로 장기 개발계획을 작성, 그 실현에 노력하고 있다. 아프리카에 대한 주된 경제·기술원조 공여국은 영·프·미·소·중국·동독 등이고 또 세계은행·유엔 관련기관·EC(EEC) 그리고 민간투자도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식민지지배라는 과거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선진공업국으로부터의 경제원조는 피수탈국(被收奪國)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라는 이론을 내세우는가 하면 이들 원조를 신식민주의라고 비난·경계하면서 '부대조건(附帶條件) 없는 원조'를 요구하기도 한다. '아프리카 통일기구' 결성에 의하여 전 아프리카적인 규모로 정치문제를 해결하려 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유엔의 아프리카 경제위원회(ECA)에 의하여 전 아프리카적인 경제협력과 조정을 꾀하고 있다. 이외에도 아프리카 기술협력위원회(CCTA)·국제노동기구(ILO)·아프리카 지역기구·아프리카 개발은행(African Development Bank) 등이 아프리카의 개발계획에 자금·기술면에서 지원하고 있다.

ECA 제국은 ESCAP 제국보다 상호 협력과 조정에 의한 개발에서 더 유리한 조건에 있고, 또 공통적으로 아프리카 형 사회주의를 건설이념으로 하고 있는 데 아프리카 경제의 특징이 있다.

반식민지 민족해방·통합운동을 통한 '아프리카의 각성'은 앞으로 원조·지원의 명분 밑에 교묘히 파고드는 동·서 강대국들의 침투공작 그리고 자국의 철권적 '군사독재'와 강권적 ' 일당사회주의 체제'의 지배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하겠다.

라틴 아메리카의 민족해방운동과 민족주의의 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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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tin America-民族解放運動-民族主義-高潮

라틴 아메리카 제국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영·프·서독 및 소련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노컬처의 경제 구조와 대지주적 토지소유(大地主的土地所有)의 사회·경제구조를 취하고 있기에 정치적 민주화(民主化)와 경제적 자립화가 저해받거나 끊임없이 위협당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 정국(政局)은 군사 쿠데타의 독재정치, 역(逆)쿠데타의 악순환 속에 있고 이런 정치변동이 상층계급의 권력쟁탈에 시종하여 민주정치의 기반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는 데 그 특성이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정국불안과 정변(政變)이 외부세력의 간섭과 개입에 많은 영향을 받고 또 일반 국민의 지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기 일쑤이기에 그 결과 ① 민족주의의 고조, ② 노동운동과 농민투쟁의 격화, ③ 폭력적·유혈적(流血的)인 극한투쟁 등을 낳게 된다.

이리하여 ① 냉전구조(冷戰構造)하에서 라틴 아메리카는 미국의 정책을 지지하는 반공집단(反共集團)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고, 미국은 '미주기구'(美洲機構:OAS)를 통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반공체제 강화, 공산주의운동 봉쇄를 유지하였다. 과테말라에서의 아르벤스(Arbenz)의 좌익정권 타도가 그 단적인 예다. 미국의 지나친 영향력 행사는 라틴 아메리카의 민족감정을 상하게 하였고 이 때문에 미국에 대한 반감의 저류가 짙게 깔려 있다.

② 지배계급인 대지주 및 자본가들의 농목업(農牧業) 및 노동에 종사하는 일반근로대중의 계층간 및 빈부의 격차 때문에 노동운동·농민투쟁이 빈발하였다. 노동운동과 농민투쟁이 이 지역의 민족해방운동의 중추(中樞)를 이루고 있는 데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③ 점진적인 개량(改良)이 아니라 과격한 쿠데타의 혁명과 반혁명이 반복되는데, 이는 구기층세력과 신흥세력 또는 그 세력 자체의 갈등이기도 하나, 그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의 지나치고 직접적인 간섭에 대한 반발(이것이 사회주의·좌파 대두의 직접적인 원인이다)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역공작음모 및 내정간섭에 있다. 칠레·니카라과 등 좌파 정권의 붕괴는 그를 명백히 입증하고 있으며, 극단적인 경우가 미국의 파나마·그레나다·쿠바 침공이다.

자립경제에의 열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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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立經濟-熱望

라틴 아메리카는 전자본주의적(前資本主義的)를 가지면서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비하며 자본주의적 제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는 면이 있으나 대부분의 나라들은 여전히 농축산물(農畜産物)과 광산자원의 원료수출국이다. 더욱이 그 품목이 국제시장의 변동에 좌우되기 쉬우며, 최근 외국자본의 도입과 공업화를 서두는 경향이 있으나, 자본·기술의 부족과 낙후성 때문에 종속성(從屬性)을 탈피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구조의 취약성은 식민지적인 단작생산물(單作生産物)에 의존하는 모노컬처 체제와 전체적으로 인구의 5% 미만이 토지의 70%를 소유하고 있는 데서 나타나는 빈부의 격차와 '은폐된 외자(外資)의 침입형태'라고 비난받는 외국자본의 도입기관 역할을 하는 국가자본주의의 존재라고 한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수출품의 가격 안정, 무역량 확대, 세계시장에의 종속거부를 목적으로 역내무역(域內貿易)의 촉진과 통합화를 통하여 자립경제 발전을 기하고자 한다.

그와 같은 노력은 1959년 발족된 '중남미공동시장(CACM)'이 61년에 '중남미자유무역연합(LAFTA)'으로 확대, 81년 '중남미통합연합(LAIA)'으로 개편되어 역내 경제개발 촉진·생활수준 향상을 위한 무역장벽 철폐로 발전하고 있다.

60년대를 고비로 A.A 권에서는 반제·반식민지주의·민족해방운동 등의 정치투쟁에서 경제 건설과 근대화에로 역점을 바꾸게 되었으며 라틴 아메리카도 예외는 아니다. "21세기는 제3세계의 시대이다"라는 기대의 실현 여부는 제3세계에 속하는 이 지역 지도자와 일반 민중들의 투철한 역사의식과 주체적인 실천에 달려 있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