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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원리〕[편집]

社會主義〔原理〕

17-18세기의 계몽사상이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인간은 그 안에 있는 이성(理性)에 의하여 이성적 존재자로서 모두 평등하다고 했다. 이 철학적 사상을 현실화하려고 했던 것이 프랑스 혁명이며 거기에서는 '인간은 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지도원리(指導原理)를 내걸었다. 그러나 여기에 있어서의 평등사상은 주로 정치·법률관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평등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서 경제적·물질적 생활에 있어서의 평등은 문제되지 않았다. 19세기가 되자 정치·법률상의 평등의 권리와 경제생활에 있어서의 불평등이라는 모순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게 되었고 큰 사회문제로 되었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의 발전과 기계·기술의 급격한 진보는 산업혁명을 가져왔고, 산업과 경제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켰기 때문이다.

인간은 종래 노동을 자기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했으나 산업혁명 이후, 노동은 그 주체자로부터 빼앗겨 산업조직 안으로 흡수하게 되었다. 거대한 산업조직은 적수공권의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것이다. 노동은 자본가의 이윤확대라는 목적에 사용되는 상품으로서 팔려진다. 정치적·법률적으로는 평등한 권리가 약속되었다 하더라도 무산노동자(無産勞動者)는

경제적으로 자본가에게 속박되고 그것에 종속하는 존재에로 전환(轉換)된다. 자본가와 노동자와의 이해관계의 불일치와 또한 계급적 대립은 계몽사상적 평등주의만으로는 해결이 곤란하고, 사회·경제조직의 변혁 없이는 정치적·법률적인 평등이나 물질적 경제생활의 평등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고방식이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 사상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란 일반적으로 산업혁명 이후의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 생겨난 모순·대립을 극복하려는 사상 및 실천운동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실은 엄밀하게 사회주의를 정의(定議)하기란 극히 어렵다. 1892년에 프랑스의 주간지(週刊誌) 『피가로(Le Figaro)』는 사회주의의 정의로서 600가지 이상을 들었고, 영국에서는 1924년에 던 그리피스(Dunn Griffith)가 저서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에서 263개의 정의를 나열하였다고 한다. 사회주의의 정의의 곤란성을 여실히 나타냈다 하겠다.

그리고 근래에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국민생활의 대폭적인 향상으로 말미암아 사회주의의 정의는 더욱더 혼란하여졌다. 예를 들면 어떤 사회주의자는 최근 마르크스의 『신성가족(神聖家族)』을 예로 하여 "사회주의란 어떻게 있어야 할 하나의 상태가 아니고, 또 그것은 도달해야 할 하나의 목표도 아니다. 사회주의란 현실을 변혁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한 실천운동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여기까지 해석의 폭을 넓히면 현상긍정(現狀肯定) 이외의 것은 모두 사회주의라는 결과가 된다. 이렇듯 사회주의의 정의가 확대되면 사회주의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나, 여기서는 왜 이와 같이 확대해석되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겠다.

처음에는 물질적·경제적 불평등에서 노동자를 해방시키고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 사회주의였으나 오늘날의 노동자는 이미 '무산(無産)'이 아니며 잃은 것을 소유하게끔 되면 이들에겐 물질적 부(富)의 평등화만을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만으로 매력(魅力)을 끌 수 없게 되었다. 공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생겨난 소외(疏外)·공해(公害)·인구의 과밀(過密)·과소(過疎) 등 새로운 사회문제에의 도전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자에게도 불가피한 과제가 된다. 그러나 이 현대의 과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면 해결될 수 없는 것은 아니고 모든 개량주의(改良主義)가 도전할 수 있는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융통성을 잃은 교조적(敎條的)인 사회주의로서는 현대의 과제에 대응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 시시각각 변화되어 가는 새시대에 사는 청년층의 탈사회주의화(脫社會主義化)가 생기게 된다.

현상을 변혁하는 것이 사회주의라고 하는 주장의 배경에는 사회경제상황의 변동과 그 속에서 탈사회주의화하려는 현대인을 탈환하려는 노력이 엿보이나 그것을 크게 주장하면 할수록 사회주의의 정의는 애매하게 되어 간다. 이렇게 하여 현대는 사회주의의 의미·내용이 재검토될 단계에 와 있으나 다시 한번 사회주의를 한정적(限定的)인 의미에서 포착하기 위해서 먼저 사회주의의 어원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사회주의의 어원[편집]

社會主義-語源

인간평등의 이상사회를 실현하려는 생각은 산업혁명 이후의 것이 아니고 중세에도 고대에도 있었기에, 그런 의미에선 사회주의의 생각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오래다. 사회주의라는 말이 생겨난 것은 182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쳐 영국 및 프랑스에서였다. 그것은 영국에서는 캐피털리즘(자본주의)에 대한 소셜리즘(사회주의)이라 불리었고, 프랑스에서는 앵피비뒤얼리슴(개인주의)에 대한 의미에서 소시얼리슴이란 말이 사용되었다.

이 경우, 자본주의나 개인주의 사회라는 것은 경제적 결정이 개인에게 맡겨져 있었고 전체로서의 무질서한 사회였음에 반해 사회주의 사회는 경제적 결정이 집단적으로 행해지고 혹은 집단적 통제하에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무질서하고 방임(放任)되는 경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온갖 사회주의 주장 속의 일치점으로서 인정되었으나 그것은 경제적 부(富)의 평등의 실현이라는 목적에서였다. 여기에서 나아가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사회를 타파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일치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회주의라는 말을 정의할 때에 가장 많은 사상가에게 공통되고 있는 것은 경제적인 평등, 사회적인 평등을 실현하기 위하여 경제질서에 사회적 통제를 가하고자 하는 사상·운동 및 그렇게 하여 실현된 사회라는 것이다. 이 경우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주장하는 사회주의도 있으며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사회주의도 있다.

공상적 사회주의[편집]

空想的社會主義

엥겔스가 『반(反) 뒤 링론(論)』에서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 특히 생 시몽(Saint Simon), 푸리에(Francois Marie Charles Fourier), 로버트 오언(Robert Owen)으로 대표되는 19세기 초기의 사회주의를 일컬어 사용한 말이 공상적 사회주의(Utopian Socialism)이다.

(1) 그들은 현존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해악(害惡)과 허위에 날카로운 비판의 눈을 돌려 이상사회를 구상한 것이나 완전무결한 이상사회를 일거(一擧)에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데에 공상적이라는 제1의 원인이 있다.

(2) 부르주아의 낭비나 비생산적 성격을 비판하고 있으나 그 지배계급에 인도심(人道心), 박애심(博愛心)이 되살아나면 이상사회로의 유도자(誘導者)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노동자계급은 새사회 건설에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3) 이상사회는 현존하는 해악에 충만된 자본주의사회 위에 그것에 대체되어 건설되는 것은 아니고, 해악에서 떨어진 자본주의의 밖에 건설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공상적 사회주의에는 확실히 '공상적'인 점도 있으나 그 풍부한 비전에서 마르크스도 엥겔스도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한편 마르크스

주의는 스스로 '과학적'이라고 자칭하나 거기에는 다분히 '공상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다음에 엥겔스가 명명(命名)한 '3대 공상가'의 사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로버트 오언(1771-1858) ―― 영국 마구상(馬具商)의 아들로 소학교를 마치고 상점의 심부름꾼이 되었다. 그 후에 방적공장을 사서 그 경영에 열중했다. 그는 『성격형성론』(1812)을 썼고 이 책에서 인간의 성격은 환경의 산물이므로 환경을 개선(改善)함으로써 어떠한 인간의 성격도 자유자재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상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노동시간의 단축, 노동자의 생활개선, 환경정비, 복리시설의 충실, 아동노동의 배제를 꾀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또 1825년에서 28년까지 미국에 건너가 '뉴하모니(New Harmony) 평등촌(平等村)'이라는 것을 건설하였으나 실패하고 귀국했다. 1832년에는 생산과 소비간의 중간착취를 배제하려는 목적에서 '형평노동교환소(衡平勞動交換所)'를 개설하였다. 노동조합운동에도 헌신하여 사회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생 시몽(1760-1825) ―― 샤를 대제(大帝)의 혈통을 이었다는 프랑스 명문귀족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자유를 위한 싸움'인 미국독립전쟁에 참가하였고 프랑스 혁명 초기에는 이를 열렬히 지지하였다. 뒤에 그는 인류구제를 위하여 구세주적 정열(救世主的情熱)을 가지고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것은 '일하는 자'와 '게으른 자'와의 대립으로 보고 생산계급이야말로 정치적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래사회의 구상에 대해서는 노동과학 즉 산업가와 학자에 의하여 조직되어야 한다고 하였고, 새사회의 목적은 생활에 유용한 것을 생산하는 것이며, 바꾸어 말하면 사람에 의한 사람의 착취(搾取) 대신에 단결에 의하여 지구를 개발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샤를 푸리에(1772-1837) ―― 프랑스 중류층 가문 출신이다. 혁명에 의하여 재산을 잃은 그는 자본주의의 결함을 몸을 통해 체험했다. 낮에는 장사를 하고 밤에는 사회개조를 위한 연구와 사색에 열중했다. 그의 이상사회는 '팔랑주(Phalange:共同組合社會)'라고 일컬어졌다. 거기서는 "우애(友愛)만으로 결합된 자발적 연합이고 공동경작·공동가사·공동생활을 목표로 하여 경찰·군대·사법관도 무용하다"라고 하였다.

이 팔랑주가 연합체를 형성하고 전 세계도 팔랑주의 연맹에 의하여 조직된다고 하였다.

리카도파 사회주의 ―― 공상적 사회주의와 마르크스 사회주의를 연결하는 것인데 이 파는 19세기 초기의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의 노동가치설(勞動價値說)에 의해 부의 원천은 노동에 있다고 하고, 노동에 기초하지 않은 재산, 즉 불로소득을 부정함으로써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또 오언 등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일컫는다.

공산주의[편집]

共産主義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생산물을 평등하게 소비하자고 하는 것이 공산주의(Communism)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공산주의의 실천과 사상은 오래 전부터 존재하였다. 원시기독교(原始基督敎)의 교도들은 종교적인 계율(戒律)하에 공산주의적 생활을 영위하였고, 플라톤(Platon, 기원전 429-347년경:그리스의 철학자)은 『국가』에서 치자계급(治者階級)의 교육과 훈련을 위해서 이 계급에 속하는 자는 자기의 재산·가족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공동숙사에서 기거하며 사유의식(私有意識)을 없앤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토마스 모어는 1516년에 『유토피아』를 썼는데 거기에서도 사유는 인정하지 않고 모든 집은 10년 만에 교환된다고 하는 공유와 평등의 이상사회를 그렸다.

공산주의가 이상사회를 양심적으로 추구하는 사상에서 사회적 변혁을 요구하는 실천적인 사상과 행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모한 것은 1848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집필된 『공산당선언』 이후이다. 공산주의는 여기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을 위한 혁명사상과 실천행동이 되었다.

마르크스주의[편집]

Marx主義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하여 1840년대로부터 70년대에 걸쳐 확립된 사회주의의 체계를 말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그 이전의 사회주의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에 대하여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종래의 사회주의도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생산방법과 그 결과를 비판하기는 했으나 그것을 설명할 수가 없었고, 따라서 그것을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다만 그것은 나쁜 것으로 오로지 비난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이들 사회주의자가 자본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로 결부되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착취를 통렬히 비난하면 할수록 착취는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 그것은 어떻게 하여 발생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명료하게 설명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었다"(『공상에서 과학에로』). 그러기에 자본주의적 생산방법에 대하여 한편에서는 그 역사적 연관을 나타내고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 필연성을, 따라서 또 그 몰락의 필연성을 나타내는 것이 필요하며 나아가 또 다른 편에서는 어디까지나 정체를 보이지 않는 그 내부의 성질을 폭로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이것을 수행하였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다고 엥겔스는 말한다.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적'이라고 하는 이론적 무기는 유물사관과 잉여가치설에 있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경제적·유물적 성격에 착안하여 고유의 철학인 유물사관을 구성하였다. 그 정식(定式)은 『경제학비판』의 서문 속에 간명(簡明)하게 씌어 있으나 그 포인트는 ① 인간의 사회생활은 부동(不動)의 것이 아니라 늘 유동(流動)하고 있고 그것은 역사와 함께 생성·발전하고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새로운 것과 대체되어 간다는 인식이다. ② 사회변동의 원동력은 인간의 머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양식의 변동 속에 있다. 환언하면 인간의 관념이 아니라 그 시대 및 사회의 경제 속에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제2의 무기는 '잉여가치'의 이론이다. 이것에 의하면 인간의 노동은 노동력이라고 불리우는 일종의 상품인 것이나, 그것은 가격으로서 받아들이는 가치의 양과 노동력이 고용주에 의하여 사용되는 데서 생기는 가치의 양과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10시간 일을 해도 임금으로 받는 액수는 8시간 노동으로 노동자가 생산하는 생산물의 가치에 해당하는 것뿐이고 나머지 2시간의 노동이 만들어 내는 가치는 고용주에게 착취된다. 이 잉여노동에서 생겨나는 것을 잉여가치라고 한다.

자본주의 붕괴의 필연성은 이 잉여가치의 생성 가운데에 있다. 즉 자본은 노동자의 생산노동을 반복하여 가는 데 따라 방대한 잉여가치를 축적하고, 이것을 자본에 전화하여 더욱더 거대자본으로 되어 간다. 이렇게 하여 생산물은 방대한 수량으로 되어 가는 것이나 이것을 구매하는 측의 노동자는 저임금(低賃金)에 의하여 구매력을 제약당하고 있기 때문에 생산물을 소비할 수가 없다는 모순이 생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그 내부에서 붕괴되지 않을 수 없다고 마르크스주의에선 말한다. 또 생산력의 발전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 낸 생산물을 손에 넣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욱 더 궁핍화하여 가는 노동자가 자본가에 대한 반발과 저항을 강화시켜 여기에서 계급투쟁이 일어나며 자본주의는 이 의미에서도 붕괴한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사상[편집]

Marx主義-政治思想

유물사관의 입장에서 본다면 국가는 정치·법률·도덕·종교·미술·철학과 같이, 사회의 경제적 구조 위에 서는 '상부구조'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에 의하면 사회는 생산에 있어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하여 노동을 착취하는 계급과 착취당하는 계급으로 분화(分化)되고 이 두 계급은 대립·투쟁한다. 이렇게 하여 국가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권력기관이며 법률은 국가의 이름에 있어 지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권력기관이며 법률은 국가의 이름에 있어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공산당선언』은 이 계급 투쟁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개괄한다. "종래의 모든 사회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領主)와 농노(農奴), 장인(匠人)과 직인(職人), ― 요컨대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항상 대립하여 어느 때는 은연(隱然)히, 어느 때는 공공연히 부단한 투쟁을 하며, 그 투쟁은 전 사회의 혁명적 개조나 아니면 투쟁하는 계급의 공통적 몰락으로 끝났다"라고 주장하였다.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계급투쟁으로 나타나는데 이 투쟁은 노동자혁명에 의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로 끝난다고 주장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이 되나(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여기서 계급대립의 최후의 사회인 자본제사회를 붕괴시켜서 전 사회는 착취와 억압에서 해방된다고 하는 것이다.

수정주의[편집]

修正主義

19세기 중엽에 있어서의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이론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있어서의 영국경제의 순조로운 발전, 그것에 대응하는 노동조합의 조직화와 임금의 상승, 보통선거제도 도입에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효력을 상실하여 갔다. 1890년대에 이르자 엥겔스는 『영국에 있어서의 노동자계급의 상태』(1845)에서 혁명은 눈 앞에 박두하였다고 한 예언은 잘못되었다고 자기비판하였다. 또 서구에 있어서는 혁명주의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고도 고백하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걸쳐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하는 운동이 나타났다. 이것을 수정주의라고 한다. 이의 주창자는 독일 사회민주당 내의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 이론가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1890-1932)이었다. 그는 1899년에 『사회주의의 여러 전제(前提)와 사회민주주의의 여러 임무』를 썼다. 그 제2장에서 마르크스가 폭력과 권력과의 전능(全能)을 과신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제3장에서는 『자본론』에서 주장된 중소상공업의 몰락, 프롤레타리아의 곤궁(困窮), 자본주의의 붕괴에 관한 이론은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論證)하였다. 그의 주장은 당대회에서 부결되고 수정주의라고 비난받고 노동운동에의 배신이라 규탄당했으나 당의 대세는 점차로 베른슈타인이 주장한 방향으로 움직여 갔다.

레닌주의[편집]

Lenin主義

제1차대전이 발발하였을 때 레닌(Lenin, 1870-1924)은 스위스에 망명 중이었다. 그는 전쟁 말기인 1917년에 독일군의 도움으로, 독일을 경유하여 케렌스키(Aleksandr Feodorovich Kerenski, 1881-1967:前 러시아 수상, 미국망명 중 사망)가 혁명을 일으킨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케렌스키 내각을 11월혁명으로 타도하여 소비에트 정권의 수상이 되었다. 레닌주의란 그의 러시아 혁명 및 세계혁명에 대한 사상체계이다.

19세기 중엽에 러시아에서는 농노제와 대결하는 근대사상이 싹텄다. 그것은 문학자나 예술가였던 푸슈킨·고골리·레르몬토프·벨린스키·게르첸 등에 의하여 제창되었다. 그들의 사상은 러시아에 있어서의 혁명사상의 맹아(萌芽)가 되었다. 농노제 붕괴 후, 러시아의 혁명운동에 담당자가 된 것은 나로드니키(Narodniki)였다. 나로드니키라고 불린 것은 급진적인 젊은 인텔리겐치아가 농민을 궐기시키기 위하여 '인민 속으로' (브 나로드:V narod) 들어간 데 기인한다. 러시아 농민의 역사적·세계적 사명과 러시아 고유의 농촌공산체를 믿는다는 나로드니키는 러시아의 혁명운동에 자극을 주었으나 그것만으로는 혁명이 불가능하였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레닌이 나로드니키의 사상이나 전술을 철저히 비판한 것은 1894년이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제2차대회는 1903년에 개최되었으나 조직문제 때문에 레닌를 중심으로 하는 다수파(볼셰비키:Bolsheviki)와 마르토프(Julij Osipovich Martov, 1873-1923)을 중심으로 한 소수파(멘셰비키:Mensheviki)로 분열되었다. 이후 레닌파를 볼셰비키, 다른 파를 멘셰비키로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조직문제란 멘셰비키가 문호를 개방하여 광범한 당원을 획득하자고 한 데 반해 볼셰비키는 의식이 낮은 광범한 당원을 갖고 있는 당에서는 관헌(官憲)과의 싸움에 이길 수가 없으므로 숙련(熟練)된 소수정예의 직업적 혁명가에 의한 중앙집권적인 당조직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에 소수정예(小數精銳)의 혁명가에 의한 폭력혁명과 혁명당에 의한 중앙집권적인 독재정치의 이론을 첨가하였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의 국가론(國家論)을 전개해 가는 과정에서 폭력혁명 이외에는 길이 없다는 것을 『국가와 혁명』(1917)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만일 국가가 계급대립의 비화해성(非和解性)의 산물이라면, 또 국가가 사회위에 서서 '사회에 대하여 점점 외적(外的)인 것으로 되어 가는' 권력이라면, 분명히 피압박계급의 해방은 폭력혁명 없이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지배계급에 의하여 만들어졌고 이 소외(疏外)를 체현하고 있는 국가권력기관을 파괴하는 일 없이는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했다. 모든 프롤레타리아트는 '역관계(力關係)의 변화'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타도를 위하여, 그리고 부르주아 의회제도의 파괴를 위하여, 그리고 노동자·군인대표 소비에트의 공화제를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를 위한 투쟁에 있어서 우리들과 행동을 함께 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1917년 10월 3일 중앙위원회는 무장봉기를 제안한 레닌 안(案)을 결정, 10월 24일 봉기는 수행되었으며 케렌스키 내각은 25일 아침에 타도되었다.

혁명 후 정권의 성격에 대해 레닌은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이론을 보다 명확히 하였다. 그 이론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보통의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은 아직 계급의식에 눈뜨지 않고 있다. 이러한 때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지라고 하는 것이 있고, 그것이 절대 과오를 범하지 않는 바른 의지라면 각성(覺醒)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신하여 계급의지를 가장 자각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공산당이 혁명을 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혁명 후에는 선거권을 계급의식이 낮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줄 것 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지를 자각한 공산당이 독재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산당의 독재는 비록 소수의 간부(幹部)에 의한 독재일지라도 레닌의 이론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되는 것이니 즉 민주주의에 부응하는 것으로서 정당화된다고 하며, 또 이러한 독재는 절대로 바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하나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에 추가시킨 이론은 『제국주의론』이다. 레닌은 홉슨(John Atkins Hobson, 1858-1940:영국의 경제학자)과 힐퍼딩(Rudolf Hilferding, 1877-1943:오스트리아의 마르크스 경제학자)의 이론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본주의 국가군들 사이에서 '자본주의의 발전불균등(發展不均等)의 법칙'이라는 독자적 이론을 구축하였다.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① 선진 자본주의국에 있어서 독점이 강화되어 금융과두지배(金融寡頭支配)가 확립된다. ② 독점과 금융과두지배를 확립한 고도 자본주의국가는 식민지·종속국(從屬國)에 대하여 자본을 수출하여 거기에 있는 민중을 착취한다. ③ 자본주의국은 자기의 세력권을 확대하기 위하여 세계의 재분할(再分割)을 목표로 하고 이러한 가운데서 자본주의의 발전불균등에 바탕을 둔 후진 자본주의국이 선진 자본주의국을 앞지르게 되어 제국주의 전쟁이 발발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주의[편집]

Stalin主義

1924년 레닌이 죽고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 1879-1953)이 소련공산당 서기장(書記長)으로 되었다. 그는 1930년에는 완전히 독재권을 확립했으나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이론에 의하여 정당화됐다. 러시아 혁명 직후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0-1919:독일의 여성혁명가)는 보통선거·언론·집회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한줌밖에 안 되는 정치가의 독재로 된다고 비판하였으나 소련의 경우 이 말이 적중하였다. 즉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사실은 스탈린의 독재로 된다고 스탈린의 절대적인 개인숭배가 강요되어서 로자의 예측을 더욱 명중시켰다.

스탈린은 러시아 한 나라만의 사회주의 즉 '일국 사회주의(一國社會主義)'건설을 목표하였고, 그 때문에 잇달은 5개년계획으로 공업화, 집단농장, 국영농장화를 진행시켜 갔다. 이 사실이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에의 공헌이라고 주장되기도 했으나, 그 이전에 레닌조차 러시아 혁명의 유럽에의 확대를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혁명의 세계적 확대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결국 일국사회주의론은 그 이외의 방법은 있을 수 없었다고 하는 사후확인(事後確認)이다. 그런데 이 사이에 진행된 5개년계획에 의하여 러시아의 공업화를 추진한 것은 사실이나 그 저변에는 인구의 8할까지가 전근대적 농민이라고 하는 2중, 3중의 경제구조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국민의 소비생활은 희생되고 저하되었으며 기아(飢餓)로 죽은 사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또 일국사회주의를 채택하게 된 후 제3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이라고도 한다. 혁명 후 레닌의 지시에 의하여 결성됨)은 그것이 내건 '노동자의 조국 소련을 지키라'는 슬로건에 의하여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국제정치에 있어서 소련을 옹호하는 기관으로 바꾸어지고 말았다.

스탈린의 이론은 그 비일관성(非一貫性)에 특색이 있다. 예를 들면 나치스가 정권을 장악하자 그 때까지 사회파시스트라고 비난·공격하던 사회민주주의자와 인민전선을 결성하고 나치스에 대항하다가 어느 사이에 나치스와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영불(英佛)과 나치스가 전쟁을 시작하자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일컬어 영불 국내에서 반전운동(反戰運動)을 지도하고 나치스가 소련을 공격하자 반(反)나치 운동을 일으킨다는 식으로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티토주의[편집]

Tito主義

스탈린적 간섭에 최초로 저항한 사람은 2차대전 종전 후 자력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한 유고슬라비아의 티토(Tito, 1892-1980)이다. 사회주의국 성립과정으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으로부터도 자기 나라를 방위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소련의 팽창주의적 간섭을 극력 배격하였다. 코민포름(Comminform)은 1948년에 유고슬라비아를 제명하였으며, 그 결과 소련권의 국가들은 유고슬라비아를 군사적으로 포위하고, 경제적으로 봉쇄하여 티토 체제의 파괴공작에 힘을 기울였다. 유고슬라비아는 코민포름에서 추방되었을 때 수정주의라고 비난받았으나, 중국공산당의 견해에 의하면 1958년의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제7차 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에는 현대수정주의가 체계화되어 있다고 한다. 유고슬라비아는 자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하여 서구진영(西歐陣營)과 우호관계를 맺고, 동서 양진영간에 있으면서 평화공존(平和共存)을 추진하고 유고슬라비아의 독자성을 유지한다는 방침(方針), 즉 티토 주의를 채택하였다.

국내에서는 국가계획의 범위에서 노동자집단에 의한 국영기업의 자치관리, 당과 국가의 분리, 권력의 분산화 정책을 취하고 국제적으로는 동서군사블록의 해소, 비동맹중립외교를 제창하여 독자적 길에 따라 공산주의사회의 실현을 목표로 삼는다는 것이다.

스탈린 비판 이후[편집]

Stalin 批判以後

흐루시초프(Khrushchev, 1894-1971)의 '스탈린 비판' 이후 공산주의 진영 내부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교의(敎義)에 관한 해석이 다양화되었다. 보통선거와 의회정치가 발달하고 노동조합운동이 착실하게 성과를 거두고 선진공업국에 있어서 민주적인 여러 권리의 확대로 인하여 노동자의 생활은 확실히 상승하였다. 이와 같이 사회구조의 변화와 대중의 권리 및 실생활의 향상에 의하여 혁명에 의하지 않고는 노동자는 쇠사슬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이데올로기는 사실과 맞지 않게 되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에 포함되고 있는, 인간을 빈곤에서 해방시킨다는 정신을 살리면서 민주주의적 여러 권리를 확대하여 자본주의를 변혁시켜간다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이것이 '구조개혁론(構造改革論)'이다. 마르크스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을 수정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해석의 다양화 속에서 '신좌익(新左翼)'도 생겨났다. 그것은 스탈린적 개인숭배에 기초한 권위주의적 지배나 체제의 내부에 들어간 공산당을 배제하면서 코뮤니즘에 의하여 인간을 회복한다는 사상이다. 프랑스에서는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철학자·작가)등이 알제리 전쟁 중에 보신술(保身術)에 급급하였던 공산당을 비판하여 신좌익의 결성을 촉구하였다.

미국의 학자 마르쿠제(H. Marcuse, 1898- )의 다음과 같은 이론도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인간회복을 목표로 한 이론이다. 즉 공업화 사회에서는 인간은 도피처를 상실한 1차원적인 세계에 갇혀 있다. 도피처를 없애는 원흉(元兇)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그것은 오늘날의 산업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기술혁신에 의한 생산성의 향상이고 그것과 동시에 발달한 관리기술(管理技術)이다. 기술혁신과 관리기술의 두 가지는 인간의 체제변혁의 정신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완전히 체제를 유지하는 기구 속에 교묘히 흡수해 버린다. 따라서 그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노동운동도 체제를 변혁할 만한 에네르기를 가질 수가 없고 그것은 무력한 것으로 되어 체제를 유지하는 측에 붙어 버리고 만다. 이러한 1차적 형태로 관리되고 있는 사회 속에서는 자기 소외의 심화(深化)만이 진행되어 간다고 하는 이론이다.

오늘날 마르쿠제의 이론은 사르트르의 이론과 같이 세계의 학생운동가들에 의해 지지받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선진공업국가에 있어서의 신좌익은 일부의 지식인과 학생 그리고 공산당에 싫증을 느낀 소수자의 그룹에 불과하다.

선진공업국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의 사회혁명이론이 그 유효성을 상실해 갈 때, 악덕·빈곤·퇴폐에 충만된 후진국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에 내재하는 분노나 항의의 혁명성이 갖가지로 변질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주변에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면이 있다. 쿠바에 있어서 인민사회당(人民社會黨:공산당)은 혁명을 위한 무장투쟁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한 채 스스로 혁명의 정황(情況)을 낳을 노력을 하지 않았다. 카스트로(Fidel Castro, 1926- )는 비마르크스주의자였으나 쿠바가 갖고 있는 체제의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혁명에로 궐기했다. 오늘날 카스트로는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라 칭하고, 인민사회당이 갖고 있는 조직력을 동원하고 또 소련의 원조를 구하기 위하여 인민사회당과 협력하고 있다.

마오쩌둥주의[편집]

毛澤東主義

마르크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를 기본으로 삼은 혁명론이었으나 모택동(1893-1976)은 농민을 혁명의 주력군으로 한 혁명이론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모택동의 마르크스주의에 부가(附加)한 제1의 특색이 있다. 중국혁명은 농민의 토지투쟁에 의한 반봉건투쟁을 수반한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 투쟁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한다. 이것은 중국사회의 후진성을 분석한 데서 끌어낸 중국 특유의 혁명이론이다. 모택동은 또 중일전쟁에 대해서 항일민족통일전선(抗日民族統一戰線)을 주장하여 국민당이나 민족부르주아지와도 제휴하여 일본에 저항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산당과 적위군(赤衛軍)의 독자성을 유지한 위에서 전쟁의 과정을 통해 지주·매판관료(買辦官僚)·제국주의 국가간의 분열을 꾀하는 전략·전술이었다.

마르크스와 레닌은 혁명 후의 정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여야 한다고 주장한 데 반해 모택동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도자로 하면서 민족 부르주아지를 포함시킨 민주주의적 여러 계급에 의한 인민민주 독재제(獨裁制)를 제창하였다. 이것을 신민주주의혁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민족 부르주아지는 중국의 공업화를 위해 이용되는 데 불과하고 정치권력을 움직이는 것이 아님은 말할 나위도 없다.

신민주주의[편집]

新民主主義

이것은 1940년 1월에 모택동에 의하여 발표된 『신민주주의론』에서 전개된 이론이다.

그것에 의하면 중국의 반봉건(半封建)·반식민지 국가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1단계로서 반봉건을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인 것이다. 이 혁명은 식민지해방투쟁에로 연속되는 것이고, 그 점에서 제국주의 국가에의 공격에 총부리가 겨누어져야 하는 것이며, 혁명은 프롤레타리아에 의하여 지도되고 사회주의에의 과도적인 권력형태인 신민주의국가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완성과 민족의 독립을 목표로 삼는 점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식민지·종속국의 혁명을 민족해방 민주혁명이라고 규정한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에 공헌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이 이론을 1940년 4월에 당의 테제로서 채용하고,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자 헌법에 있어서 이 이론을 구체화하였다.

무정부주의(아나키즘)[편집]

無政府主義(Anarchism)

경제적으로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정치적으로는 정치권력을 부정함으로써 이상사회가 도래한다는 사상이 무정부주의이다. 무정부주의는 자유의 강렬한 요구에서 생겨난다. 이 경우의 자유란 자기의 자발성·주체성(소위 자유주의)과 자연의 필연성(마르크스주의적 자유)에의 복종만이 아니라 "타인이 자유롭지 않으면 자기도 역시 자유일 수가 없다는 연대성(連帶性)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한다. 이러한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 사유재산제도요 정치권력이며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권위주의이고 또 종교이기도 하기에 이것들을 모두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무정부주의사상은 그리스 이래 존재하는 것이고 고드윈(William Godwin, 1756-1836:영국의 무정부주의자),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 1809-65:프랑스의 무정부주의자·전형적인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자), 바쿠닌(Mikhail Aleksandrovich Bakunin, 1814-76:러시아의 集散主義的 무정부의자), 크로포트킨(Kropotkin, 1842-1921:러시아의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자),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y, 1828-1910:러시아의 문호·인도주의적 입장의 무정부주의자) 등이 유명하며 우리나라에선 독립운동가 박열(朴烈 1902-?) 등이 무정부주의 신봉자였다.

무정부주의의 실현은 곤란한 것이나 인간의 완전한 자유를 희구하는 무정부주의사상은 인간해방사상의 원점으로서 영구히 살아남을 일면을 갖고 있다 하겠다.

생디칼리슴[편집]

Syndicalisme

생디칼리슴은 19세기말에 라틴계 여러 나라에서 노동자의 경제적 이익을 자신의 힘으로 옹호하려는 노동조합운동과 그 이론으로서 등장했다. 그것은 의회정치에 반대하고 국가를 부정하여 노동조합의 파업에 의하여 사회주의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생디칼리슴은 무엇보다도 실행(實行)하려는 데 역점을 두었고, 이론 따위는 별로 대수로운 것이 아니라고 지식계급의 이론적인 지도를 경멸한다. 바쿠닌의 영향을 받아서 국가를 부정하고 프루동에게 영향받아서, 미래사회는 노동자의 지방적인 단체에 기초를 둔 산업적 또는 사회적 그룹에 의해 운영된다고 하며,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이론에 영향을 받아 부단한 제너럴스트라이크란 직접행동에 의하여 자본가나 국가를 쇠약하게 하고 붕괴시킨다는 것이다. 이같은 혁명적인 생디칼리슴을 아나코 생디칼리슴이라고도 한다. 제1차대전으로 생디칼리슴 운동은 파산(破産)하였으나 영국의 길드 사회주의, 미국의 IWW(The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등은 이 생디칼리슴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길드 사회주의[편집]

Guild Socialism

제1차대전의 전후를 통하여 영국에서 일어난 유력한 사회주의의 사상과 운동. 그것은 생디칼리슴의 영향을 받아서 S. G. 홉슨(Hobson)이나 G. D. H. 콜(Cole) 등이 대표적 이론가들이다. 이윤추구를 위하여 자본제사회에서 사용되고 있는 노동자의 인간성을 회복하고 그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산업을 통제·관리하는 일대공동체(National Guild:전국적 연합의회)에서 사회를 개혁하려는 것이 콜의 주장이다.

트로츠키즘[편집]

Trotskism

오늘날 트로츠키즘이란 기성의 공산당에서 극좌파에 대해 행하는 비난의 말로 되고 있다. 그러나 트로츠키(Trotskii, 1877-1940)가 제창한 사회개조사상은 '영구혁명론(永久革命論:Permanant Revolution)'을 중심으로 하여 레닌·스탈린 주의에 대항하는 것이다. 영구혁명론에서 말하고 있는 트로츠키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에 있어서 혁명은 부르주아지가 미발달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정권을 잡지 않으면 부르주아 혁명조차 달성할 수 없다. 더구나 부르주아혁명은 신속히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혁명에로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나 농민이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켜 갈 수가 없는데, 그것은 서구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유발하고 그 원조를 받지 않으면 성공의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러시아에 있어서의 혁명의 곤란성을 지적하고 있으나 러시아 혁명을 유럽에 있어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존시킨 점에 결함이 있었다.

민주사회주의[편집]

民主社會主義

오늘날 민주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함께 현대 사회주의의 2대 조류(潮流)의 하나이다. 민주사회주의를 논하는 경우에는 무엇보다 먼저 영국의 사회주의를 들게 되는데 영국 이외의 나라에서도 사회주의운동의 체험과 이성적(理性的) 선택에 의하여 민주사회주의에 도달한 경우가 많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바 컸으나 베른슈타인의 수정에 의하여 마르크스주의에서의 탈출 제1보를 내디뎠다. 제2차대전 전후의 세계적 격동기 속에서 사회민주당원간에는 나치스에 추방되어 스웨덴이나 영국에 망명한 이들도 많았다. 망명지에서 그들은 민주주의와 자유에 기초를 둔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사회주의의 체험을 했다. 그들은 또 나치스와 함께 소련의 전체 사회가 얼마나 인류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것인가를 알고서 그들이 사상을 점차로 고쳐 나갔다. 지금까지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에 의하여 자유나 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데모크라시라고 비난하여 왔으나, 이 자유와 민주주의야말로 사회주의자가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임을 알았다. 1959년 11월 바트 고데스베르그(Bad Godesberg)의 사회민주당대회에서 그들은 국방과 사유제와 자유경제를 인정하여 완전히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고 영국의 사회주의와 같이 데모크라시에 기초를 둔 사회주의를 채택하였다. 사회민주주의에서 민주사회주의에로의 방향전환이다. 이때 채용된 강령 속에는 "일찍이 지배계급의 순전한 착취대상에 불과했던 것이, 지금에는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 국가시민으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사회민주당은 노동자계급의 정당에서 국민의 정당으로 되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렇게 하여 민주사회주의의 정당은 계급정당의 입장이 아니라 국민정당의 입장을 취한다.

페이비언주의[편집]

Fabianism主義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자본제사회로 돌입한 나라이다. 그러므로 자본제사회가 만들어 내는 폐해를 가장 빨리 알아차리고 그 배제에 부심(腐心)하였다. 영국의 사회주의는 이 폐해 제거의 방법으로서 혁명방식을 취하지 않고 점진주의적(漸進主義的)인 개량방식을 채용하였다.

영국 사회주의사상의 모체는 페이비언 협회인데 그것은 1884년 결성되었다. 페이비언 협회란 한니발 장군을 격파한 로마 용장(勇將) 페이비우스에서 딴 이름이다. 승부를 단번에 내리는 위험을 피하고서 시간이 걸릴지라도 한 걸음 한 걸음 확실하게 '척지(尺地), 촌토(寸土)'를 손에 넣어간다는 페이비우스의 방법을 페이비언 협회가 사회개혁의 방식으로 채용하려 한 것이다. 페이비언 협회의 사상을 개괄하여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자본제사회는 폐해와 함께 그것에의 대항세력을 낳는다. 노동자를 착취하는 제도 속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확대시키는 노동조합이나 공장법(工場法)을 용인하고 한편에서는 대중의 궁핍화를 방치한 채 다른 편에서 구빈법(救貧法)을 만든다는 것이 자본제사회이다. 거기에서는 폐해에의 대항책은 전혀 무계획·무질서하나 페이비언 사회주의에서는 이것을 체계적으로 행함으로써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개혁은 힘으로 밀어제치는 것이 아니라 의회정치를 통하여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페이비언 협회의 초기에 있어 유명한 사람은 극작가 버나드 쇼(Bernard Shaw, 1856-1950), 노동문제를 연구한 시드니 웹(Sidney Webb, 1859-1947)과 그의 처 비어트리스 웹(Beatrice Webb, 1858-1943) 등이다.

민주사회주의의 특색[편집]

民主社會主義-特色

① 첫째로 계급투쟁을 주장하지 않고 인류의 우애정신(友愛精神)을 역설한다. 이것은 1923년의 영국노동당대회에서 시드니 웹이 연설한 속에 간결하고 힘차게 나타나 있다. 그것은 "우리들은 우애의 정신 없이는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영국 사회주의의 창시자는 칼 마르크스가 아니라 로버트 오언임을 우리는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로버트 오언은 계급 투쟁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인류동포의 신조(信條)-인류동포의 희망과 신앙, 그것이 사는 사실을 주장하였다"라는 것이다. ② 민주사회주의의 철학은 인격주의(人格主義) 또는 이상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즉 계급투쟁과 유물주의(唯物主義)의 입장을 부정하고 인간능력의 완전한 개발과 인격의 완전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를 성립시킨다는 것이다. ③ 정치적 입장으로서는 국민정당임을 주장하고, ④ 개혁의 방법으로는 혁명주의에 의하지 않고 의회제 민주정치에 의하여 점진적으로 개량을 축적해 간다고 한다. ⑤ 경제적으로는 모든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입장은 취하지 않고 계획화 속에서 경제상 자유를 살리는 혼합경제의 입장을 취한다.

민주사회주의의 원류(原流)는 페이비언 협회와 거기서 생긴 사상을 실천하고 있는 영국노동당에서 구할 수 있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그것은 자본제사회의 폐해를 극복하고 좌우 전체주의의 비인간성도 극복하는 새로운 사회주의로서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은 1951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모인 비공산주의적 사회주의 정당의 대표자가 '민주사회주의의 목표와 임무'라는 선언을 채택하면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창설함으로써 하나의 시대를 이루게 되었다. 이 선언으로 비로소 민주사회주의라는 용어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 미련을 느끼면서도 마르크스

주의에까지 파고들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입장을 취하나 민주사회주의는 그 선언 속에서 공산주의를 사회주의의 사상을 완전히 왜곡해 버린 사이비 사회주의라고 비난한다. 민주주의가 없는 곳에 사회주의는 없다고도 말하고,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존중할 것을 역설한 것은 역사적 경험 속에서 민주주의가 없는 사회주의 악마성에 대해서 배웠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편집]

社會民主主義

제1차 세계대전 전의 마르크스주의를 지도원리로 한 독일 사회민주당,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등이 제창하고 있던 사회주의를 사회민주주의라고 불렀다. 러시아 혁명 후 볼셰비키가 지도하는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이 성립한 후 동 조직이 주장하는 폭력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이론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장에서, 비(非)마르크스주의인 페이비언 주의까지가 사회민주주의라고 불리었다. 페이비언 주의는 뒤에 민주사회주의로 불리게 되었고 사회민주주의와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계급투쟁이론과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대중정당에 의하여 혁명을 달성하려는 사회민주주의는 점차로 국민·대중의 지도를 상실해 왔다는 세계적 경험 속에서 그 모습이 사라져 가고 있다. 예를 들면 일찍이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세계적 대표정당이었던 독일 사회민주당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도 다같이 2차대전 이후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론을 완전히 버리고 의회제 민주주의를 지키는 민주사회주의의 정당으로 탈피(脫皮)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