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시사/정치와 생활/정치의 이데올로기/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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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편집]

Fascism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를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파시즘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결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서독의 유명한 파시즘 연구가 에른스트 노르테는 파시즘을 유럽적인 현상으로 이해하고 양대전간의 시기, 즉 1919년-1939년이라는 기간의 특유한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이 입장에서 본다면 유럽 이외의 현상인 일본의 군부(軍部) 파시즘도 아르헨티나의 페론 주의도 문제가 되지 않고, 또 네오 파시즘 운동이나 네오 나치즘 운동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대중사회이론이나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 선 파시즘론에서는 현대사회의 모든 반동적 독재정치운동은 파시즘 운동이라고 인정한다. 여기에서는 우선 극히 일반적인 의미에서 흔히 '파시즘'이라고 불리는 정치세력에 대해 고찰한다.

파시즘의 원리(이탈리아)[편집]

Fascism-原理(Italy)

이탈리아 파시즘은 이론을 중요시하지 않고 이론도 시종 일관된 것이 아니다. 그 중심사상은 반마르크스주의와 반자유주의로 개인주의를 부정하고 지도자와 파시스트당의 지도자가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일반국민에게 요구되었다. 파시스트당 자신은 엄격한 군대식 규율에 입각한 조직으로서 국민의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을 지배하는 권능을 갖고 있고, 개인의 자기희생과 헌신의 정신을 갖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의 테두리를 벗어난 개인이나 자생조직의 존재는 인정되지 않는다. 투쟁과 전쟁은 각개인에게 있어서의 의무이고 그리스도 교보다 파시스트당이 존귀(尊貴)하다고 주장되었다. 거기에서는 고대 로마 제국의 이념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국가라는 것은 영토적 규정(規定)도 군사적 규정도 경제적 규정도 아니다. 그것은 정신적·도덕적인 개념이라고 주장되었다.

파시스트 국가의 특징은 일종의 조합주의(組合主義)로, 조합은 종업원과 기업주에 의해 각각 별도로 조직되어 각조합이 또 직업별로 조직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전역과 각지방마다에 기업주조합과 종업원조합의 연합체가 만들어져 있어서, 이것이 경제의 자주적인 관리를 행하고 또 자급자족경제(自給自足經濟)의 건설과 사회적 정의(正義) 실현에 노력하도록 되어 있었다. 파시스트당 밑에 민병(民兵)이 만들어졌고 그들은 검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청년조직으로서는 8세에서 14세까지의 남녀가 바리라에, 14세에서 18세까지의 남녀가 전위(前衛)에 조직되어 있었다. 요컨대 파시스트 국가는 군사적 성격이 강하고, 청년·민중조직은 군사적이고, 경제도 자급자족체제의 달성과 국방산업의 육성에 특히 주력하였다. 다만 나치스 독일과는 달라서 외국무역이나 대공업(大工業)에 대하여 개인의 독창성이 상당히 인정되었으며, 이데올로기적으로 반교회주의(反敎會主義)는 강렬하지 않았고, 인종론에 기초한 전체주의적인 세계관은 갖고 있지 않고, 반유태주의(反猶太主義)도 강하지는 않았다. 또 나치스의 노동전선에 비하면 파시스트의 조합조직은 자본가조합과 노동자조합과의 혼성세대(混成世帶)로서의 성격을 남기고 있었다.

나치즘의 원리(독일)[편집]

Nazism-原理(獨逸)

독일 나치즘의 중심적 이론(理論)은 사회다원주의와 인종론이다. 나치스류(流)의 '사회다원주의'에 의하면 자연계에서는 항상 강자가 약자를 정복하여 멸망시켜 가고 있다. 약자를 정복하고 제거함으로써 강자는 점점 더 강하고 건강해져 간다. 독일민족은 유럽에 있어서의 광대한 생존권을 기초로 하여 지도적 대국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족이 성장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생존권을 확정해 갈 필요가 있고, 인구증가에 알맞는 만큼의 영토확장 정책을 취해 온 민족만이 오늘날까지 번영할 수가 있었다. 이상이 사회다원주의에 기초한 '생존권사상(生存圈思想)'이다.

나치스 이데올로기의 제2의 특징은 '인종론'이다. 히틀러에 의하면 인류의 인종이나 민족은 평등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우열(優劣)을 갖고 있다고 한다. 열등한 인종(유태인 등)에 대해서는 여하히 환경을 개선해 주어도, 교육을 실시해도 그들의 사악(邪惡)한 성격을 고칠 수는 없다. 그들은 부패한 환경 속에 살기를 원하고 자기 주위를 부패시키고 만다. 그들은 전염병균과 같은 해악을 뿌리기 때문에 열등한 민족과 우수한 민족과의 공존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유태인은 격리하든가 절멸(絶滅)시키든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태인 이외의 열등민족, 예컨대 슬라브 인도 추방하든가 아니면 무권리(無權利)의 노예로서 독일인에게 봉사시키든가의 방법만이 있다고 했다. 모든 민족 가운데서도 가장 고급인 것이 게르만 민족이고, 그것에 다음가는 것이 라틴 민족, 그 밑에 슬라브 민족, 다시 그 밑에 각종의 유색인종(有色人種), 최하위가 유태인과 집시(Gipsy)라고 나치스는 주장하였다.

나치스의 제3의 중심사상은 '민족공동체론(民族共同體論)'이다. 서로 투쟁하는 계급의 존재나 개인적 자유를 존중하는 비판적인 개인의 존재를 나치스는 인정할 수 없다. 그들은 전통과 피의 감정을 존중하는 민족공동체를 동경한다. 민족이야말로 세계에 있어서의 유일의 긴밀한 유기체이고, 그 때문에 필요하다면 개인의 자유 따위는 희생해야 한다. 산 유기체로서의 민족공동체의 내부에서 개개의 시민은 전체 속의 일개 세포로서만 취급된다.

자유·평등·우애라는 서유럽류(類)의 계몽사상에 대항하여, 그들은 인종·피·토지 및 가부장적 권위(家父長的權威)라는 신앙을 내세운다. 이와같은 민족공동체의 내부에서는 우수한 민족은 열등민족의 혈액(血液)이 혼합되지 않도록 인종적인 순결함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며, 외부로부터의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을 차단하여 외래사상·외래의 피, 외래자본을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우수민족은 어떤 이상적인 목표를 향해 한 사람의 지도자 밑에서 공동보조를 취하면서 전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치스의 제4의 중심사상은 '지도자 원리(指導者原理)'이다. 민족에게 우열이 있는 것과 같이 개인에게도 우열이 있다. 우수한 두뇌를 가진 지도자가 자기가 속한 민족을 지도하여야 하며, 민주주의적인 다수결을 배제하고 우수한 인물에게 민족의 지도를 위임하여야 한다. 지도는 늘 하부(下部)에 대한 권위와 상부에 대한 책임이라는 형태로 행해져야 하며, 나치스 지도자에 의한 독일국가의 무제한의 지배가 승인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히틀러(Adolf Hitler, 1899-1945) 이하는 정치적 독재지배를 행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무조건적 지배를 강행하였다. 다만 주의할 것은 이와 같은 주장이 나치스에만 특유한 것은 아니었다. 독일보수파(保守派) 일반만이 아니라 독일국민의 다수도 마음 속으로는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강하게 반대하고 있지 않았다. 독일군부와 관료·대자본가·대토지소유자 등의 보수세력 외에 언론계·교육계·교회·각종 압력단체·정당·노동 등의 일반구성원에게 있어서도 이상과 같은 사고방식이 결코 드문 것이 아니었음을 알지 않으면 나치스 사상이 갖고 있던 깊고 넓은 국민적 기반은 간과(看過)하게 되고 만다.

다음으로 나치스에 의한 통치와 전통적 귄위주의에 의한 통치와의 차이는, 전통적 권위주의는 대중운동이나 대중 조직을 싫어하고 대중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고 전통적 지배계급의 권력독점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에 반하여 파시즘은 중산계급(中産階級)·청년·하층계급을 정치운동에 끌어 들여 그들을 조직하고, 근대민주주의적인 정치기구를 이용하면서 대중의 적극적인 지지를 배경으로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다.

파시즘은 종종 전통적 반동세력을 밀어제치고 정권을 장악하려고 한다. 그들은 그 때문에 사이비 혁명적 슬로건을 주장하고 사회주의 정당을 능가할 정도의 사회정책 실시를 요구한다. 더욱이 '인종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층계급의 생활을 개선하고 부인과 소년을 보호하는 것은 인종을 개량하고 번식시키기 위한 불가결의 조건이기 때문에 그들의 사회정책에 대한 요구가 또 엉터리에 그친 것만은 아닌 것도 사실이다.

파시즘과 전통적 권위주의와의 사이엔 이와 같은 차이가 있으나, 양자는 커다란 의미에서는 공통의 지반(地盤) 위에 서 있다. 즉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화를 부정하고 특히 노동운동을 파괴하고, 국가의 권위를 주장하며, 군부를 중심으로 독재적 정치를 확립하고, 통제경제(統制經制)와 준전시 경제체제를 건설하며, 대외 팽창정책(對外膨脹政策)을 취하여 대제국을 건설한다는 등의 목적이 공통되어 있다. 요컨대 파시즘은 새로운 효과적인 보수적 대중운동이고, 전통적 보수세력은 파시스트와 결탁하여 사회 혁명의 방지에 노력하는 것이나, 많은 경우 전통적 세력은 파시스트에게 권력의 자리를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파시즘이 농업을 중시하고 '피와 토지'의 사상을 주장하는 것은 농업에 있어서의 자급자족주의에 기초하는 것만이 아니라 민족의 순결이라는 견지에서 대도시(大都市)에 있어서의 부패 혼혈(混血)을 피하고 민족의 전통을 중시하는 의미에서 농촌을 중요시한 것이다. 더욱이 현실의 농촌은 급속히 기계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농본주의(農本主義)는 일종의 로맨티시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긴 하다.

나의 투쟁[편집]

히틀러의 주저(主著)인 『나의 투쟁(Mein Kampf)』은 나치스의 경전(經典)이었다. 1924년에 옥중에서 구술필기(口述筆記)시켜, 25년에서 27년에 걸쳐 2권으로 출판되었다. 히틀러의 전반세(前半世)와 초기의 정치투쟁을 구술하면서 그의 세계관, 정치강령(政治綱領)을 기술한 것인데 1943년판(版)을 합쳐서 948만 부가 출판되었다. 나치스 운동의 경전으로서 존중되고 각국어로 번역되어서 세계에 보급하였으나 내용은 별로 읽혀지지 않았고 나치스 간부 가운데서조차 통독한 자가 거의 없다. 그리고 경전으로서의 불변성(不變性)을 유지하기 위하여 내용에 대해서는 눈에 뜨이지 않는 자구의 개변(改變)은 별도로 하고 후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화를 가하지 않았다.

나치스의 근본목표를 독일민족에 의한 유럽 지배에 두고, 그 때문에 동유럽을 정복하여 독일민족의 대제국을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대제국의 내부에서는 독일민족을 위한 농지(農地)를 확보하고, 그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유태인은 추방하고 전멸시켜야 하며, 슬라브 인의 대부분도 그 원주지(原住地)에서 추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대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외교상으로는 영국 및 이탈리아와 동맹(同盟)하고 프랑스와 소련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 책 속에서 주장되고 있는 히틀러의 자전적(自專的) 부분이나 초기 나치스 운동의 실정에 대한 부분은 상당히 왜곡되어 있으므로 충분한 주의를 갖고 읽을 필요가 있다. 다만 그의 주요사상은 이 책 속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20세기의 신화[편집]

나치스의 이론적 지도자 앨프레트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 1893-1946)가 1930년에 출판한 것으로서 3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 「가치의 투쟁」에서는 북방적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을 증명함에 기초를 두고 있다. 세계사에 있어서의 아리안 여러 민족과 혼혈 잡종인종이나 유태인과의 교섭을 기술하면서 아리안 민족이 명예와 자유라는 뛰어난 특징을 갖고 있었음을 말하고, 또 가톨릭 교회 및 어떤 의미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배척하고 있다. 그리고 인도주의(人道主義), 세계주의, 평화주의, 민주주의, 마르크스주의, 기타 피와 인종을 경시하는 사상경향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제2편 「게르만 예술의 본질」을 고딕 예술이라 주장하고 게르만 예술에서의 인종적인 미의 이상을 외치고 있다. 또 괴테, 베토벤을 찬양하고 바그너의 가극을 특히 찬미한다. 예술은 종교 그 자체이고 또 독일인은 자기의 의지에 의하여 건전화(健全化)되어 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제3편 「오게 될 나라」에선 제3제국의 사회관·국가관·경제관·식민지정책·부인관(婦人觀)·교회관·교육관을 설명한다. 부인의 해방은 극력 배척되고, 경제문제에 대하여서는 유태적인 세계금융자본이 공격되고, 독일민족주의적인 독일교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 피와 민족이라는 자각에 의하여 독일민족이 단결하여 독일의 새로운 미래를 형성하는 것이 요구된다. 요컨대 '피의 신화'·'피의 종교'라는 인종적인 비합리주의가 주장되고 있다.

파시즘의 역사[편집]

Fascism-歷史

이탈리아[편집]

Italy

파시즘은 이탈리아 말 파쇼(fascio:다발의 뜻. 이것이 결속·단결의 뜻으로 轉化)에서 유래한다.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가 '전투자 파쇼'를 1919년에 조직하고 이것을 1921년에 '파시스트당(黨)'으로 개명한 데서 파시즘이란 말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당시 이탈리아 사회는 중부와 남부에 봉건적(封建的) 대지주가 많았고, 농민의 과반수는 문맹으로 그 지위도 낮았다. 정치상으로는 보스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근대적 정당조직도 민주적 의회제도도 발달하지 않았고, 사회주의 운동도 무정부주의적 경향이 강했다. 근대공업의 자원도 부족하여 공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제1차대전 때는 영국·프랑스측에 서서 싸웠으나 파리 평화회의에서는 기대한 것만큼의 영토를 획득하지 못했다. 전후의 혼란상태에서 약점이 많은 국가는 근저(根底)로부터 동요하여 곧 사회 혁명이 일어날 형세였다. 그러나 왕당파(王黨派)도 자유주의자도 사회당도 안정된 정부를 조직할 수 없었기에 무솔리니를 중심으로 한 파시스트당이 성장하였다.

자본가·군부·귀족이 당의 후원자로 되고 제대군인과 도시 및 농촌이 중산계급이 대중적으로 운동에 유입되었다. 파시스트당은 처음에는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강조하였으나 곧 국가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되고, 1920년 가을 사회주의 노동자에 의한 북이탈리아의 공장 점령이 실패한 이래 파시스트는 사회주의조직에 대하여 폭력을 행사하여, 사회당이 우세한 각도시의 시의회(市議會)나 시청을 공격·점령하였다. 21년 후반 이후 군부·경찰·관리의 지지를 얻은 그들의 폭력은 대규모의 것이었고, 22년에는 국내가 거의 내란상태(內亂狀態)로 되었다. 그리하여 22년 10월 29일 드디어 정권을 획득한 것이다. 즉 이탈리아의 국가 권위의 위기와 사회 혁명의 위험을 극복하기 위하여 상층계급이 파시스트당에 정권을 물려 준것이다.

파시즘에는 정치적 프로그램이 없었다. 종교적 권위를 갖는 무솔리니라는 지도자 밑에 사회주의운동으로부터 조직과 운동방법을 배워서 군사적 조직으로서의 파시스트 사병단(私兵團) 즉 민병을 이용하여 운동을 성장시켜 형식상은 당시의 권력자나 낡은 제도에 반대하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불만을 품은 지방적 정당이나 민주적·중산 계급적 여러 정당은 지지자의 거의 대부분을 빼았겼다. 이외에 새로 선거권을 얻은 청년층, 종래는 기권하고 있던 정치적 무관심층이 나치스에 투표했다.

세계경제공황 아래의 혼란은 나치스가 증대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나 나치스를 증강케 한 최대의 원인은 독일의 정치경제력이 회복하여 이제야 대국으로서의 실력을 갖추었는데도 독일의 국제적 지위가 여전히 극히 비참하였다는 사실이다. 독일국민의 3분의 1은 나치스에 희망을 걸고 독일군부와 대자본가, 대지주와 압력단체도 히틀러에 의한 독재정권의 수립을 희망했다. 공산 혁명이 지금 당장 폭발한다고 생각한 유력자는 없었으나, 온건파가 세력을 잃은 이상 나치스나 공

에스파냐[편집]

Spain

에스파냐는 이탈리아 이상의 후진국이고 대토지 소유자와 교회 등의 봉건적 세력이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과 근대적 노동자 사이에는 절대적인 대립이 있어서 민주적인 타협은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대립 상태하에서는 정부는 약체로 될 수밖에 없었고 유력한 정치세력은 의회 밖에 존재하였다. 예를 들면 무정부주의적 노동운동, 장교단(將校團) 등이다. 이 위에 카탈루냐 지방의 자치운동(自治運動)도 국가의 통일을 위협하고 있었다. 결국 사회주의적인 정권이 수립되든가 아니면 가톨릭적·군부적 독재가 성립되는가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프리모 데 리벨라(1870-1930, 에스파냐의 군인)는 1923년에서 30년까지 일종의 국왕독재정권을, 24년에는 이탈리아류(流)의 정부·여당을 만들었으나 이것은 지지자가 적어 별 힘을 갖지 못했다.

31년에는 공화국이 이루어졌으나 좌우익의 대립으로 정권이안정되지 않고, 36년에는 인민전선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군부·대지주·대자본가·교회가 이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파의 주력은 곧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 장군이 되어 가톨릭적 보수왕당파를 중심으로 하여 팔랑헤당에 입각하여 일당독재를 행하였다. 독일·이탈리아의 대규모적인 군사원조를 받아서 1939년 3월 말에 전국을 정복한 프랑코는 그 자신이 팔랑헤당의 당수가 되고, 당을 국가정당으로 변질시켰다. 그러나 국가의 중심기구는 당과 관계없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30여 년에 걸친 프랑코 독재정치도 그의 사망과 함께 끝나고 왕위 계승법에 따라 즉위한 카를로스 국왕은 사회·정치 전반에 걸쳐 자유화를 실시할 것을 선언했다. 이후 에스파냐는 민주화 일로를 걷고 있다.

포르투갈[편집]

Portugal

포르투갈의 살라자르(Salazar, 1889-1970) 독재정치(1932년 이후)도 에스파냐와 같은 성격의 것이고, 살라자르는 헌법을 유지한 채로 독재권력을 제도화하여 단일정당을 결성하고, 민병제를 만들고, 청년을 조직하는 등 이탈리아 파시스트를 본딴 지배를 해왔으나 그것보다 훨씬 온화한 형식에서 권력을 유지하였다.

1968년 9월 살라자르는 건강 때문에 사임하고 카에타노 수상이 집권했으나 1974년 쿠데타로 40년 독재가 무너졌다.

동중구제국[편집]

東中歐諸國

1920년에서 30년대에 걸쳐서 발칸 여러 나라, 폴란드·루마니아·헝가리·유고 및 그리스 등을 비롯하여 동중구 대부분의 나라가 민주정치를 버리고 독재정치로 달음질쳤다. 그중에서 비교적 개명적(開明的)이고 효과적인 독재가 행해진 곳은 터키이다.

나치스[편집]

Nazis

나치스란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당의 약칭.

독일노동자당(1919년 1월 결성)이 1920년 2월에 당25개조 강령을 공포한 뒤 개명한 것이다. 사회주의적 강령과 국가주의적 강령을 결합한 점에서는 이탈리아 파시즘과 같은 형식을 취했으나 과거의 지배세력과 대립한다는 의사혁명적(擬似革命的)인 외견은 이탈리아보다도 더욱 분명하였다. 초기 나치즘은 실제로는 바이에른 왕당파와 협력하는 보수세력이고 돌격대(突擊隊:SA)는 분명히 바이에른 군부의 후원을 받은 준군사단체(準軍事團體)였다.

나치스와 바이에른 왕당파 및 군부의 목적은 대체로 일치되어 히틀러는 1923년 11월 8일부터 9일에 걸쳐 폭동을 일으켜 바이에른 왕당파와 군부의 지지를 얻어 베를린에 진격하여 국민적 독재정권을 세우려고 기도하였으나, 군부의 중추분자(中樞分子)의 분명한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그는 체포되어 1년 남짓 감옥에 있게 되었고, 출옥 후 당을 재건하여 독일의 국민적 전통과 독일국가주의에 합치한 대중운동을 전개하고, 특히 사회주의적 슬로건을 강조하여 현상에 불만을 가진 일반국민층 즉 청년층과 부인층, 실업자·수공업자·중소기업자·중소기업노동자·봉급생활자와 관리, 특히 가톨릭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방의 중소농민, 기타 사회주의조직에도 종래의 전통적인 제 정당에 만족하지 않는 국민층을 널리 조직하였다.

공산당·사회민주당·가톨릭 중앙당(中央黨)·독일국가인민당(保守帝政派)만이 나치스에 의해 지지자들을 크게 빼았기지 않았으나 기타의 지방적 정당이나 민주적·중산 계급적 여러 정당은 지지자의 거의 대부분을 빼았겼다. 이외에 새로 선거권을 얻은 청년층, 종래는 기권하고 있던 정치적 무관심층이 나치스에 투표했다.

세계경제공황 아래의 혼란은 나치스가 증대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나 나치스를 증강케 한 최대의 원인은 독일의 정치경제력이 회복하여 이제야 대국으로서의 실력을 갖추었는데도 독일의 국제적 지위가 여전히 극히 비참하였다는 사실이다. 독일국민의 3분의 1은 나치스에 희망을 걸고 독일군부와 대자본가, 대지주와 압력단체도 히틀러에 의한 독재정권의 수립을 희망했다. 공산 혁명이 지금 당장 폭발한다고 생각한 유력자는 없었으나, 온건파가 세력을 잃은 이상 나치스나 공산당의 지지를 구하지 않으면 당시의 국정(國政)은 합법적으로 운영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33년 1월 30일 수상에 임명된 히틀러는 처음에 보수제정파와 군부세력과의 연립정권(聯立政權)을 만들고, 관료와 대자본가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서 농업상의 자급자족제, 준전시 경제체제를 추진하고, 군비의 대확장과 군수공업의 육성에 성공하였다.

1934년 6월 말에는 대중조직인 돌격대의 간부를 숙청하여 돌격대를 스포츠 단체와 군사예비교육조직으로 개편하고 친위대(親衛隊:약칭SS)라는 비밀경찰과 정보를 위한 조직에 의해 국내를 감시하고 통치하였다. 그리하여 엄격한 독재정치를 이룩하여 사회주의자나 민주주의자 그리고 유태인 등은 강제수용소에 수용해 학대하였다. 이 수용소는 나치스 권력의 상징이 되기에 이르렀다.

1935년 3월에 베르사유 조약에 의한 군비제한조항(軍備制限條項)을 폐기하고 동년 6월에는 영독(英獨) 해군협정에 의하여 독일의 해군력을 비약적으로 증강시킬 것을 영국에 승인시켜, 36년 3월에는 라인란트를 재무장하였다. 이러한 눈부신 외교적 성공에 의하여 히틀러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열광적인 숭배로 변하여 반히틀러 운동은 지지자를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나치스 정권의 근본 목적은, 우랄 산맥에 이르기까지 독일의 지배하에 두고, 동유럽의 슬라브 인을 추방하여 그 자리에 약 1억의 게르만 민족을 이주시키고 그 지방을 게르만 민족의 새로운 향토로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소련·폴란드를 비롯하여 동유럽 각지의 독립국을 멸망시키지 않으면 안 되고, 독일과 유럽의 패권(覇權)을 다투는 프랑스도 굴복시켜서 독일에 종속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영국도 유럽에서 배제하여 독일에 대해 위험하지 않은 해상국가(海上國家)로 전락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목적 아래 제2차대전은 히틀러에 의해 도발된 것이다.

저항운동[편집]

抵抗運動

나치스가 정권을 획득하였을 때에 독일의 지배세력은 이것을 환영하든가 아니면 방관적인 태도를 취했다. 처음부터 분명히 저항한 것은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었다. 그러나 반히틀러파 상호간에 대립이 있었고, 국민의 히틀러에 대한 지지가 가속도적으로 증대하였기에, 초기의 반히틀러 운동은 1935년 말에서 다음해에 걸쳐 거의 전멸상태가 되었고 반나치스 망명자들은 독일에 지반을 갖지 못한 존재가 되었다.

1937년 중에 독일의 전쟁준비 체제가 명백하게 되자 재계(財界)의 지도자 샤히트(Horace Greenly Hjalmar Schacht, 1877-1970)나 보수제정파의 일부 간부들은 히틀러에 추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보수제정파 관료나 군인들은 여전히 나치스 국가에 충성을 다해서 강대한 독일을 건설하고 싶다고 진지하게 생각하였다.

제2차대전이 시작되기까지는 저항운동은 극소수의 보수적 요인(要人)이 행하는 운동에 지나지 않았다. 이 운동이 대규모화 된 것은 1940년 여름 이후 즉 폴란드와 프랑스가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와서 보수제정파의 목표였던 독일의 유럽 제패가 실현되었을 때부터이다.

보수파로서는 이 이상 전쟁을 계속할 필요가 없었기에 화평을 바라게 되었으나, 히틀러로서는 소련을 정복하지 않으면 나치스의 대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외교관·관료·군부 등의 간부 상당수가 히틀러에 저항하는 태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신구교회(新舊敎會)의 간부로서 나치스에 의한 교회지배를 좋게 생각하지 않는 이, 양심적 자유주의자 등이 사회민주당과 공산당계의 지하운동(地下運動)과 연락을 취하기에 이르렀다. 운동의 중심은 전육군참모총장 베크(Ludwig Beck, 1890-1944)였으나 공산당계의 지하운동과 그들의 연락은 최후까지 거의 없었다.

사회민주당계 조직과 보수파와는 여러 면에서 결부되었다. 독일군의 전황(戰況) 악화와 함께 저항운동도 확대되어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暗殺)사건이 일어났다. 히틀러는 폭탄이 소량이었기에 생명을 건졌고, 쿠데타는 베를린과 파리에서 군부에 의하여 일으켜졌으나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했기에 실패하고 말았다. 일반 민중이나 군인은 전쟁 말기에 이르기까지 히틀러의 명령에 충실히 복종하고 있었다.

보수파의 저항운동은 나치스와 정책상에는 차이가 있었으나 사상의 대강(大綱)에 있어서는 공통의 지반에 서는 점이 많았다. 오늘날의 서독에서 저항운동파는 정식으로는 찬미되고 있으나, 서독 보수파는 이 파의 행동을 국가에 대한 반역행위로 보고 있다.

기타 유럽 여러 나라에 있어서의 저항운동은 나라에 따라 성격이 다르다.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에서는 공산당계와 보수계의 저항운동이 상호경쟁하면서 협력하였으나, 발칸 반도·그리스에서는 저항운동의 양파가 격렬한 대립·투쟁을 계속했다. 덴마크·노르웨이·네덜란드의 저항운동도 활발했으나, 이 운동의 중심사상은 프로테스탄트 정신이었다. 소련·폴란드·체코 등에서는 나치스의 점령지(占領地)정책이 너무나 가혹하였기 때문에 나치스에 협력할 보수파조차도 저항운동에 참가하였다.

일본의 파시즘[편집]

日本-Fascism

일본의 파쇼 운동은 기다이키(北一輝. 1883-1937:국가사회주의자)의 『일본개조법안대강(日本改造法案大綱)』(1916)에서 비롯된다.

기성 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정당정치가나 중신세력(重臣勢力)은 농촌의 궁핍을 구제할 수가 없었고, 전국을 뒤덮은 민주주의적·사회주의적 대중운동에 대항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경제공황 하의 국민의 불만을 흡수하여 대외진출을 행하는 것이 일본 파시즘의 목적으로 기다이키 등은 대아시아 주의를 주장하고 일본에 의한 아시아 지배를 특히 중국 지배를 요구하고 있었다.

내정상으로는 곤도세이쿄(1868-1937:역사·사회학자)가 농본주의를 주장하여 가족주의적인 농촌자치사회를 역설하였고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 1886-1957:국가주의자) 등은 정당정치의 부패와 자본가의 폭리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농지개혁(農地改革)에 의하여 반(半)봉건적 농촌의 변혁을 행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고, 천황(天皇)을 중심으로 하는 전제적(專制的) 지배체제의 근본적 민주화도 꾀하지 않았다. 대중조직의 결성과 대중운동을 거부하는 그들은 군부를 정치활동의 주체로 하려고 하였다.

군부 청년장교와 농촌 청년이 운동의 지지자가 되었으나 군부 청년장교의 내부에서는 통제파(統制派:합법수단에 의한 패권확립파)와 황도파(쿠데타 등의 직접행동에 의한 국내개조파)의 대립이 격화하여 1936년 2월 26일에서 29일에 이르는 황도파 청년장교들의 반란이 일어났다(2·26사건). 반란은 평정되고 군부는 통제파의 수중에 돌아갔으나 통제파는 중신·관료·재계 등의 기성세력과 결탁하여 총력전 체제를 세우려고 하였다. 결국 통제파를 중심으로 하는 총력전 체제가 진척되어 육군성과 참모본부 등이 일본국정의 중추로 되기에 이르렀다.

1937년 7월 일본은 통제파의 지도하에 중일전쟁에 돌입하였고, 국내에서는 국가총동원법과 통제경제가 행해졌다. 40년 6월, 고노에(1891-1945)는 신체제운동을 전개하여 제 정당은 속속 해체되고 동년 10월에는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라는 거국일치의 정치조직이 형성되었다. 이 조직은 대중조직도 국민조직도 아닌 정부에 대한 단순한 협력기관에는 불과하였고, 동년 11월에는 노동조합에 대체되는 조직으로서 대일본산업보국회(大日本産業報國會)가 결성되었으나, 이것도 노동자의 자발적 활동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관제조직(官製組織)이었다.

일본의 파시즘은 에스파냐나 포르투갈류의 권위주의적 독재였다고 할 수 있겠다. 41년 12월 8일에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났으나, 군부독재체제를 더욱 강화시키고, 대정익찬회·산업보국회 이외에 상업보국회·농업보국연맹·해운보국회·대일본부인회·대일본청소년단·문학보국회·언론보국회 등의 관료통제조직이 만들어져서 국민생활이 규제되었다.

그러나 국민은 군부독재하에 영미에 대한 전쟁에는 일단 협력했고, '일본의 중국 지배에 의한 국민생활의 향상'이라는 정책에 찬성하는 자가 많았고, 총력전 체제에 의한 국민총고용(國民總雇傭)이라는 현실이 국민 사이의 불만의 축적을 방지하는 작용을 하기도 했다. 군부독재는 천황제라는 기존세력을 전면적으로 계승하는 형식을 취하고, 천황독재라는 외형을 취했기 때문에 일반국민은 이것을 명치일본(明治日本)의 발전의 귀결이라고 생각하였고, 지배세력의 대부분도 이것을 지지하였다.

구지배세력과 군부독재세력과는 독일의 경우와 같이 큰 의미에서는 공통의 기반에 입각하고 있었다.

처음엔 저항운동이 없는 것 같았으나 전쟁 말기에 이르러 정치·경제상의 파탄이 명백하게 되었을 때에 지배세력 내부의 개명적 보수파(官僚·重臣)가 군부에 반항하여 영미측의 무조건항복 요구를 승인하여 전쟁을 그치게 하여 사회적 변혁을 방지했다. 전후 일본의 지배권력은 이 개명적 보수파의 손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