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고려-조선의 문학/조선 후기 문학/조선 후기의 문학〔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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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後期-文學 〔槪說〕임진왜란 이후부터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에 이르는 약 300년간의 문학은 조선 후기의 문학에 속한다. 선조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일찍이 없었던 큰 전쟁이었고 7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니 국민들의 정신적 또는 물질적 피해는 극히 큰 바가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끝나고 얼마 안 되어 인조 때에 또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나 두 번이나 전쟁을 겪었으니 이 양란으로 말미암아 국토는 황폐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그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러한 비상시국을 수습 못하는 귀족 양반들의 무력함을 절감한 평민들은 마침내 자기 스스로의 힘을 깨닫게 되었으니 평민들의 자각이 일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었다. 따라서 평민들의 자각심은 문학에까지 그 영향을 주어 평민문학이 대두되고 또 발흥하게 되었다.

임·병 양란을 치르고 난 숙종시대는 전대(前代)의 화려한 문학을 계승하여 후대의 문학을 일으키게 한 과도기였다. 숙종 이전까지는 한국문학은 일종의 한문학의 여기(餘技)로 생각하던 것이 숙종 이후는 그러한 여기문학의 몰락시대를 이루어 시가 방면만 보더라도 김성기(金聖器), 김유기(金裕器), 주의식(朱義植), 이정보(李鼎輔), 남구만(南九萬), 박태보(朴泰輔) 등 기타 수많은 작가들이 쏟아져 나와 작품을 내었다.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가인들이 배출되었을 뿐 아니라, 양란을 계기로 유연히 일어난 평민의식이 높아짐에 따라 평민문학이 줄기차게 일어남과 아울러, 지난날의 시가 작품의 전체적인 수집과 정리를 하는 가집 편찬 사업이 또한 줄기차게 일게 되었다. 평민 출신이며 뛰어난 가객(歌客)인 김천택(金天澤)은 영조 3년에 유명한 <청구영언(靑丘永言)>을 엮어 내었고, 영조 39년에는 김수장(金壽長)이 엮은 <해동가요(海東歌謠)>가 나왔으며, 고종 13년에는 박효관(朴孝寬)과 안민영(安玟英)이 편찬한 <가곡원류(歌曲源流)>가 나왔으며, <고금가곡(古今歌曲)> <동가선(東歌選)> <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 등 많은 가집들이 세상에 나타났다.

임·병 양란이야말로 조선의 양대 병란이었으니, 이에 관련하여 무부(武夫)의 기개가(氣槪歌)나 또는 적침에 대한 원한을 읊은 시조가 많이 나와 민족정기에 불타는 마음을 나타낸 작품들이 있다. 일례를 들면 임란 때 왜군을 물리친 용장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한산(閑山)섬의 시조는 그 애끓는 심회를 토로하였고, 병자호란을 당하여 강화도에 피란했던 왕세자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인질로 선양(瀋陽)에 끌려갈 때 부른 청석령(靑石嶺)의 노래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 운운한 시조는 처량하기도 하다. 이뿐 아니라 당쟁이 심한 조선 사회에서 그 희생이 되기를 두려워하여 관계(官界)를 벗어나 농촌에 돌아가 강호(江湖)에 묻혀 살려는 은일적·도피적 사상이 반영되어 있는 강호 한정가(閑情歌)가 조선 후기에 많이 보였고,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나 <산중신곡> 같은 시가는 자연시인으로서의 그의 풍모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에 대하여 평민들의 시조는 향략적·취락적(醉樂的)·연정적인 노래가 많으며, 근세에 와서는 작자 미상의 평민들이 읊었다고 생각되는 사설시조가 많음이 그 특색이라 하겠다.

다음 가사문학에서는 조선 전기에 속할 수 있는 송강(松江) 정철(鄭澈) 같은 가사의 최고봉을 이어 후기에서는 송강과 가사문학의 쌍벽이라고 할 수 있는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가 나타났으니, 임란 때 읊은 <태평사(太平詞)> <선상탄(船上嘆)>을 비롯하여 <누항사(陋巷詞)> <사제곡(莎堤曲)> <독락당(獨樂堂)> <영남가(嶺南歌)> <노계가(蘆溪歌)> 등 7편의 가사가 전하고 있다. 이 밖에 조선 후기의 가사로 유명한 것은 영조 때 김인겸(金仁謙)이 지은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고종 때 홍순학(洪淳學)이 지은 <연행가(燕行歌)>, 철종 때 김진형(金鎭衡)의 <북천가(北遷歌)> 등 장편의 가사가 있고, 기타 유명·무명작가의 가사들이 많으며 영남 부녀들이 주로 지었다는 이른바 내방가사(內房歌辭)가 허다하게 전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시가문학뿐 아니라 소설문학도 발연(勃然)히 일어났다. 임·병 양란을 치른 후에 신문예가 발흥되었을 뿐 아니라 한글로 기록된 소설도 나왔지만 아직까지도 한문으로 기록된 소설이 많아서 그러한 문학은 특수계급의 문학이었지 일반 대중문학은 되지 못하였다. 그러던 것이 평민계급들의 자아(自我)에 눈뜬 문예운동이 한글과 함께 시작되어 소설문학은 일반 서민계급과 발전을 같이하게 되었다.

숙종시대는 우리의 소설문학이 발흥한 시대였으니, 그 원인의 또 하나는 이웃나라 중국이 소설문학의 가장 찬란하던 명말(明末)에서 청초(淸初)에 걸쳐 있어 그 영향도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많은 소설들은 일반 대중이 애독하였을 뿐 아니라, 대부분은 우리말로 번역 또는 번안되어 자연스럽게 우리의 소설문학을 자극하였고, 한글 자체에서도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완전히 보편화되어 소설 발달에 절호의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숙종시대는 시가 방면의 발전도 볼 수 있으나, 고대소설의 발달사적 단계는 숙종 시대를 중심으로 최고봉을 이루었으니, 우리 문학은 우리말로 써야 한다는 국어 존중론자인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같은 이가 나와 소설로서 우수한 <구운몽(九雲夢)>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등을 제작하였던 것이다. 선(宣)·인(人) 간에 배태된 한글로 된 소설문학이 이 때에 와서 전성함에 따라 임·병 양란을 겪은 선민(先民)들은 <임진 록>을 위시한 <유충렬전> <조웅전> 등 군담소설을 즐겨 썼고,

<구운몽>이 나온 뒤로는 <옥루몽(玉樓夢)> <옥련몽(玉蓮夢)> 등 몽자류 소설이 나오게 되었고, 또다시 <토끼전> <두껍전> <콩쥐 밭쥐> <흥부전> <심청전> 등 동화·전설 등 설화를 소설화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다음 영(英)·정(正)시대로 내려오면서 조선의 문화는 더욱 견실하여졌고, 근세에서 가장 특색이 있는 시대이니 일종의 문예부흥적 기운(氣運)이 농후하였다. 구문화(舊文化)의 정화(精華)를 재현함은 물론이요 서구문화의 도래로 학계와 사상계가 다채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조선의 문예는 세종시대에 싹이 터서 숙종시대에 꽃이 피고 영·정시대에 열매를 맺고 떨어졌다 하겠다. 영·정시대는 청조(淸朝) 문화 절정기인 강희(康熙)·건륭(乾隆)의 한창 문화가 고도로 발달하여 가던 시기였으므로 그 자극과 영향을 받았음인지 조선학자는 문화의식을 예민하게 감수(感受)하여 자아에 대한 반성과 인식이 깊어졌다.

당시의 학계를 개관하면 아직도 공리공론의 이학(理學)을 되풀이하는 파가 있었지만 일부 학자간에는 안으로 이익(李瀷) 일파의 학풍과 밖으로 청조 고증학의 영향을 입어 실용 실사(實事)를 주장하는 실학파(實學派)가 나타나 단조롭던 당시 학계의 적막을 깨치게 하였다. 곧 양란 이후로 자아(自我)라는 사상이 선명해지면서 한국의 본질을 알고 실제를 밝히려는 경향이 날로 깊어져 가다가 영·정 양조 시대에 이르러서 드디어 학풍이 일변되고 만 것이다. 효종(孝宗)·현종(顯宗) 때에 유형원(柳馨遠)은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저술하여 고대의 사실에 증거한 한국 경제의 개조책을 논하였고, 그 뒤를 이어 숙종·영조 때에는 전술한 바 이익이 나타나 실증 실용의 학(學)을 창도하여 실용적 내성적(內省的)인 한국 연구의 조수(潮水)가 넘쳐 흐르게 되었다. 따라서 우선 중국을 배우자고 주장하는 박지원(朴趾源), 홍대용(洪大容),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같은 북학론자(北學論者)들이 나와 <북학의(北學議)>라는 논조를 내어 북으로 청조의 문물을 배워야 하겠다는 취지를 강조하였다.

이리하여 연암(燕巖) 박지원은 <양반전> <호질(虎叱)>, <허생전(許生傳)> 등 소설 10여 편을 써서 실학을 강조하고 당시 양반들의 위선적인 생활을 풍자 폭로하는 작품들을 만들어 내었다.

고대소설 중 최고 걸작이라고 치는 <춘향전>도 영조시대에 제작된 것이며, 또 널리 알려져 있는 <장화홍련전> <정을선전(鄭乙善傳)> 같은 계모형 소설이나 <진대방전(陳大方傳)> <박문수전(朴文秀傳)> 같은 공안류(公案類) 소설도, 고대소설의 거의 대부분이 작자 연대 미상이라, 확실한 것은 단정짓기 어렵지만 이 모든 소설들이 대개 조선 후기의 소작이라고 할 것이다. 조선시대 소설은 <춘향전>의 출현을 절정으로 하여 그 다음은 쇠퇴의 일로를 걸었으니, <숙향전(淑香傳)>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 등 많은 춘향전 아류(亞流)의 소설들이 산출되었으나 이제는 창작의 여력은 차차 없어지고 기성소설들의 창극화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순조(1801) 이후에 들어와서는 조선왕조 누백년(累百年)의 경륜도 이미 황혼기에 들어섰으니 태조 건국 이래 국시(國是)로 삼던 유교도 이제 와서는 폐단이 노골화하였고, 오랜 당파싸움에 지친 정객들은 벼슬하기에만 악착스럽고 무력하기 짝이 없고,정치는 부패하여 인심은 극도로 불안에 빠지고 불원(不遠) 망국의 종소리가 들려오게 되었다. 이러한 쇠퇴기의 소설 창작은 고대의 것을 되풀이함에 지나지 않고, 약간 특색이 있는 것으로는 역사소설인 <금산사 몽유록(金山寺夢遊錄)>, 가곡 절반인 <채봉감별곡(彩鳳感別曲)>, 희곡적인 체재를 가진 <배비장전(裵裨將 傳)> 등 몇몇 소설이 있을 뿐, 조선 말기의 외래 문화의 세례를 전기(轉機)로 하여 갑오경장의 신기운(新機運)을 맞이하게 되고 개화사상과 함께 신문예 운동이 일어나 모든 문화의 혁명을 보게 되고, 신문학의 단계로 옮아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