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삼국-통일신라의 문학/통일신라시대 문학/향가문학
향가
[편집]鄕歌
향가란 '고향의 노래' 또는 우리의 '고유한 노래'의 뜻으로, 신라 초기로부터 고려 초 사이에 제작된 향찰식 문자로 표기된 시가를 말한다. 향가의 명칭에 대해서는 '신라시대의 조선 고유의 노래', '국풍(國風)의 뜻' '국가(國歌)의 뜻' 등 학자마다 구구하며, '향가'란 말 대신 '사뇌가(詞腦歌)'라 쓰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학설도 있다.
이 '사뇌가'는 광의로 보면 일체 '동방 고유의 노래'를 의미하나, 협의로 보면 곧 '신라의 가요'이니 '사뇌'는 원의(原義)·전의(轉義)의 수종의 뜻이 있으나 요컨대 '신라'와 동의어로서 본래 나인(羅人)이 '思內樂'·'辛熱樂'·'詞腦歌'라 운위하였음은 곧 자국의 가악을 의미함이었다. 그러므로 '사뇌가'는 실제적으로 유리왕대의 '신열악(辛熱樂)'으로 호칭된 <도솔가>가 그 남상(濫觴)이요, 역대의 '사내·詩腦' 등이 모두 그것이나, 현존 사뇌가로는 오직 25수에 불과하니 여간 섭섭한 것이 아니다.
또한 "향가의 대표적 장르는 사뇌가적 장르라 부름이 마땅하다"는 등 이론(異論)이 많은데, 향가란 본래 중국 시가에 대한 우리나라 고유의 노래를 지칭함과 함께 그것이 <도솔가>나 '사뇌가'를 포함하는 신라의 노래로 파악된다. 따라서 '향가'라는
광범위한 명칭 속에는 신라·백제·고구려의 가요가 있을 것이며, 지역에 따라서 민요, 제천의식에서 부르는 무가(巫歌) 같은 것은 구비문학으로 존재하여 이도 향가에 속할 수 있겠으나, 보통 현재 향가라 하면 신라의 노래를 말한다. 협의의 향가는 사뇌라 하여 신라의 삼국통일 무렵부터 고려 초에 이르는 동안에 창작된 서정가요를 말한다. 현재 그 가사가 남아 있는 것은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가 전한다.
사뇌가
[편집]詞腦歌
'詞腦'는 '思腦·詩腦·辛熱' 등과 함께 음만 따서 쓴 것인데, '동쪽 들' 또 '동쪽 땅'을 의미하기도 하고, '새 시대' '새 세대', 또 정악(正樂)에 대한 향악이란 뜻으로의 '시나위'라는 설도 있어 이설이 많다. 그러나 '새냇 노래'로서의 '사뇌가'를 쓰던 것은 신라의 향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詞腦'란 말이 처음 문헌에 나타나기는 <균여전>에 "師之外學 閑於詞腦 依普賢十種願王 著歌十一章" "其序云夫詞腦者 世人戱樂之具", 또는 그 뒤에 나온 <삼국유사> 권2 유리왕조에 "始作兜率歌 有嗟辭腦格"이라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사뇌가는 협의의 향가로 신라의 노래를 말한다. 사뇌가는 처음 민요의 태내(胎內)에서 이루어져 뒤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교적인 시가로 정립되었다.
개관
[편집](槪觀) 현존하고 있는 향가는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로 이를 간략히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표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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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
[편집]形態
지금까지 향가라 하면 6세기 말의 <서동요(薯童謠)>에서 10세기 중엽 균여대사의 <보현십원가>에 이르기까지 약 4세기 동안에 이루어진 도합 25수이다. 그 형식을 보면, (1) 사구체(四句體) 4수, (2) 팔구체(八句體) 2수, (3) 십구체(十句體) 19수로 분류된다. ① 사구(四句)로 된 사구체가에는 <서동요(薯童謠)>와 <풍요(風謠)> <헌화가(獻花歌)> <도솔가>가 있다. 이 노래들은 향가시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민요와 1세기 경의 <황조가> <구지가>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도솔가>를 제외하고는 <서동요>와 <풍요>를 <삼국유사>에 '동요'·'풍요'라 한 것이라든지 그 내용과 형식이 모두 민요적인 것으로, 당초에 향가 민요에서 정착된 것임을 보여 준다. ② 전후절(前後節)의 차별 없이 팔구로 된 팔구체가에는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처용가> 등의 2수로 사구체의 발전된 형태라 할 수 있다. ③ 전후 양절을 나누어 전절 팔구에 후절 이구, 도합 10구로 된 십구체가에는 19수가 속해 향가의 대표적 형식을 이루었다. 이렇게 향가의 형식은 6-7세기에 나오는 4구체 형식이 다시 가지가 붙고, 4구의 배수인 8구에 다시 가지가 붙어 10구체로 발전한 것이라 믿어진다. 그러나 앞선 시대의 노래 <혜성가>에 이미 형식적 완성이 보여지므로 향가의 형식에는 중국 한시의 영향이 작용한 듯하다. 향가의 종장(終章) 2구 초에는 반드시 '아으(阿也)'의 영탄구가 붙어 특색을 이루고, 이 형태적 유물은 시조의 종장 첫구에 투영되어 있다. 향가와 시조·가사는 형식적으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향가의 작가
[편집]鄕歌-作家
향가의 작가로 오늘날 그 이름을 전하는 사람은 득오곡(得烏谷)·충담사(忠談師)·처용랑(處容郞)·희명(希明)·광덕(廣德)·월명사(月明師)·융천사(融天師)·신충(信忠)·영재(永才)·균여대사(均如大師) 등, 모두 당시의 이름난 고승(高僧) 또는 화랑이다. 현존 향가의 내용은 불교적인 것이 18수, 군신관계 2수, 붕우(朋友)관계 2수, 기타 3수로 불교적인 것이 압도적이며, 작가별로 승려 18, 화랑 3, 여류 1, 민요 2, 무명이 1로 향가의 작가는 승려와 화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기리(漢岐里)의 여인 희명(希明)과 같은 부인작가도 있기는 하나 그 내용으로 보아 이들은 대개 독실한 불교신도이거나 직접 절간에 기거하는 사비(寺婢)였으리라 추측된다. 향가의 작가가 이처럼 승려가 대부분임을 볼 때, 비록 실전(失傳)되었으나 향가의 대가였다고 추측되는 능준대사(能俊大師)·대구화상 등이 향가집 <삼대목>의 편찬사업에 협력했거나 영향을 주었으리라 추측된다. 향가의 주류를 이룬 대표적인 작가가 승려와 화랑인 까닭에 그 내용도 불교적인 것이 압도적으로 많아 성격상 불교문학으로서의 향가가 존재하게 되었다. 즉 향가의 전형적인 형식은 10구체로 그 대표적인 작가는 승려·화랑이며, 지배적인 내용은 불교적인 것이라고 집약할 수 있다. 또 향가의 내용에서 얻을 수 있는 향가체의 기능은 현세에서 신라 귀족들의 호사스러운 향락을 내세에까지 연장하고자 하는 데 있었으므로 귀족문학의 대표적인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신라문화는 불교문화를 주축(主軸)으로 삼고 있었던 만큼 향가문학은 불교문학의 한 정상(頂上)을 이루었고, 향가문학의 끝을 장식하는 균여대사는 난숙한 향가의 수사와 기교를 계승하여 불교적인 찬가로 사용했다. 향가는 민요적인 것에서 구비로 전승된 것이 정착된 단계에 있는 것으로 개인 작가의 손에 의해 우수한 문학유산을 창조한 것이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향가 작품으로는 민요의 정착인 <서동요>를 비롯하여 6세기경의 <혜성가>, 민요의 정착인 <풍요>, 7세기 말 광덕(廣德)의 <원왕생가>, 득오의 <모죽지랑가>, 8세기경 견우노인의 <헌화가(獻花歌)>, 신충의 <원가(怨歌)>, 충담사(忠談師)의 <안민가>와 <찬기파랑가>, 희명(希明)의 <천수대비가>, 영재(永才)의 <우적가(遇賊歌)> 등이 이른바 사뇌가 형성 시대에 위치하는 향가이니, 9세기 말의 <처용가>와 아울러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어 고문학과 고어(古語)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가사 부전의 향가
[편집]歌詞不傳-鄕歌
현존하고 있는 향가는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 도합 25수밖에 없으나, 몇 개의 문헌에 그 이름과 대의(大意)만이 전하는 향가가 몇 수 있었음을 밝혀 둔다.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이 지었다는 <앵무가>를 비롯하여 국선(國仙) 화랑의 작이라는 <현금포곡(玄琴抱曲)> <대도곡(大道曲)> <문군곡> 등과 <양산가>가 있었다 하나 모두 전하지 않는다. 그 밖에 <해가(海歌)> <태평가>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 <신회작가(神會作歌)> <동경곡(東京曲)> <회소곡> <회악> <신열악> <돌아악(突阿樂)> <지아악(枝兒樂)> <사내악(思內樂)> <우식곡(憂息曲)> <대악> <간인(竿引)> <미지악(美知樂)> <도령가(徒領歌)> <날현인(捺絃引)>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 <내지(內知)> <백실(白實)> <덕사내(德思內)> <석남사내도(石南思內道)> <사중(祀中)> <치술령곡> <달도가> <번화곡(繁花曲)> <이견대가(利見臺歌)> 등의 이름과 그 대의만이 전할 뿐이다. <고려사>지(志) 권24 악조(樂條)에 "속악인 즉 상스러운 말이 많아 심한 것은 다만 그 노래 이름과 지은 뜻을 적었다 (俗樂則語多鄙俚 其甚者 但記其歌名與作歌之意)"라 하여 귀중한 문학유산인 노래의 가사들이 모두 삭제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많은 향가가 제작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으나 불행히도 표기문자의 제약과 사대사상(事大思想)의 풍조 탓으로 귀중한 문화재를 대량 소실하여 그 모습을 찾아볼 길이 없다.
백제 무왕
[편집]百濟武王 ( ? -641)
백제 제30대 왕(재위 600-641). 이름은 장(璋), 별명은 서동(薯童). 법왕(法王)의 아들. 신라의 변경을 자주 공략했고,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조공하여 여러 번 도움을 청했다. 당나라가 일어나자 친당정책으로 624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고, 당의 고조(高祖)로부터 대방군왕 백제왕(帶方郡王 百濟王)에 책봉되었다. 627년에 군사를 일으켜 신라에게 잃었던 땅을 되찾으려 했으나 당나라의 권유로 중지했고, 승 관륵(觀勒)을 일본에 보내어 천문·지리·역본(歷本) 등의 서적과 불교를 전했다. 634년에는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궁성 남쪽에 연못을 파서 유흥지로 삼는 등 유흥과 사치를 즐겼다. <삼국유사>에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의 로맨스를 동요로 퍼뜨린 향가 <서동요>의 작가라 한다.
서동요(薯童謠)
[편집]신라 진평왕(眞平王)대(599 이전)에 이루어진 동요. 백제 무왕(武王)이 소년시절에 지어 아이들에게 널리 부르게 했다 하며 향가 중의 가장 오랜 형태로 그 형식은 4구체이다. 이 작품의 유래가 <삼국유사> 권2 무왕조(武王條)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백제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 일찍이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연못의 용(龍)과 정을 맺어 그를 낳았다. 아명(兒名)은 서동(薯童). 그 도량이 비상하고 항상 서여(=마)를 캐어 팔아서 생계로 삼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아명을 그리 부른 것이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더벅머리를 깎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주며 자신을 따르게 했다. 드디어 노래 하나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선화공주님은 남 그즈기(몰래) 열어(嫁) 두고 서동방(님)을 밤에 몰(몰래) 안고 가다 (善花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之夜矣 卯乙抱遣去如).
이 동요는 서울에 퍼져 대궐에까지 스며들어 갔고, 백관(百官)들이 크게 간(諫)하여 공주를 멀리 귀양보내게 되었다. 떠날 때 왕후(王后)는 그 딸에게 순금 한 말을 주었다. 공주가 귀양길에 오를 때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맞이하여 시위(侍衛)해 가겠노라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지도 모르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며 정을 나누었다. 그 후에야 서동이란 것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와서 공주는 어머니가 준 금을 내놓으며 장차 생계를 꾀하려 하니 이 때 서동은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했다. 공주는 이것이 황금이니 가히 백 년을 넉넉히 살 수 있을 것이라 하자 서동은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파던 땅엔 이런 것이 흙과 같이 쌓였다 하니 공주는 크게 놀라며 그것은 천하의 지보(至寶)이니 그 보물을 부모님이 계신 궁궐에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고 했다. 서동이 좋다 하며 금덩이를 모아 구릉(丘陵)과 같이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 금 수송의 방책을 물었다. 법사는 내 신력(神力)으로 옮기리라 하니, 공주가 편지와 함께 금덩이를 절간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옮겨 놓았다. 신라의 진평왕은 그 신이(神異)함에 더욱 존경하고, 항상 편지를 보내어 문안을 물었다. 서동은 이런 일로써 민심을 얻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 <서동요>는 서동이라는 개인의 창작으로 당시 아동들에게 불린 동요이기는 하나 전대에 그러한 형식의 민요가 널리 불려 이것이 4구체의 향가로 정착된 것으로 추측된다.
혜성가(慧星歌)
[편집]10구체로 된 신라 향가.신라 때 융천사(融天師)라는 승려가 지었다 하며 신라 향가로는 가장 오래된 작품의 하나이다. 진평왕 때 국선(國仙) 화랑 세 사람과 풍악(楓岳=지금의 금강산)으로 놀이를 가려고 하는데, 별안간 혜성(彗星)이 나타나므로 융천사가 이 노래를 지어 불러 성괴(星怪)를 물리치고 침범했던 왜병(倭兵)도 물러나게 했다 한다. <삼국유사> 권5 융천사 혜성가조에 다음과 같이 그 가사가 기록되어 있다.
"예로부터 동해변 건달파들이 노는 성을 보고서 왜군이 왔다고 봉화를 올리던(이런 착각의) 해변이 있도다. 세 화랑들의 관산행차(산구경)를 보옵심을 듣고, 달도 이미 훤츨히 밝혀 주고 있는데 길을 쓰는 별(안내별)을 바라보고 혜성이라 말한 사람이 있다. (후구) 아흐 달이 아래에 떠갔도다(달도 없는데) 어이유 무슨 혜성이 있을고(舊理東尸汀 叱乾達婆矣遊鳥隱城叱良望良古 倭理叱軍置來叱多 烽燒邪隱邊也藪耶 三花矣岳音見賜鳥尸聞古 月置八切爾數於將來 尸波衣道尸掃尸星利望良古 彗星也白反也人是有叱多 後句, 達阿羅浮去伊叱等邪 此也友物北所音叱彗叱只有叱故)."
풍요(風謠)
[편집]4구체로 된 신라 향가.선덕여왕(善德女王) 때에 양지(良志)라는 중이 영묘사(靈廟寺)에 장육존상(丈六尊像)이라는 불상을 만드는데, 성중(城中) 사람들이 그 역사(役事)에 쓰는 진흙을 나르면서 불렀다는 노래이다. <삼국유사> 권4 양지사석조(良志使錫條)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전하고 있다.
"왔소이다 왔소이다 왔소이다 왔소이다 애끓이 애끓이 님자여 공덕 닦으러 왔소이다 (來如來如來如來如 哀反多羅 哀反多矣徒良 功德修叱如良來如)."
이 <풍요>는 신라 때 유행하여 고려 때까지 불려진 노동요(勞動謠)의 일종인 민요라 추측되며, 그 형식도 동요인 <서동요>와 함께 당시의 일반 시가보다 옛 형태를 지녔을 것이다. 특히 이 노래는 어떤 말의 율동이 '하야시'가 되어서 전체를 지배한 것 같으며, 고대 시가의 발생상태를 추측케 한다.
원왕생가(願往生歌)
[편집]10구체 형식의 신라 향가.과거의 통설로는 문무왕 때 승려 광덕(廣德)의 아내가 지은 것이라 했으나, 광덕의 작이 옳다. 광덕이 자기의 불교적 신념을 달에 비겨 부른 신앙요(信仰謠)로 <삼국유사> 권5 광덕 엄장조(廣德嚴莊條)에 그 설화와 노래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문무왕 때 사문명(沙門名)으로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란 두 사람이 서로 친하여 밤낮으로 약속하되 먼저 죽게 되면 모름지기 서로 고(告)하자고 했다. 광덕은 분황사(芬皇寺) 서리(西里)에 은거하여 신 삼는 것을 업으로 삼으며 처자를 거느리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庵子)를 짓고 농사를 크게 지었다. 하루는 석양 놀이 질 무렵 나무 그늘이 고요히 저무는데 창밖에서 소리가 나며 고하기를 '나는 이미 서쪽으로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나를 따라오라' 하는 것이었다.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 보니 구름 밖에 천악(天樂) 소리가 나고, 광명이 땅에 깃들여 있었다. 이튿날 그 집을 찾아가니 과연 광덕이 죽었다. 이에 그 처와 함께 시체를 장사 지낸 후 그 처에게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떠하냐' 함에 그 처가 승낙하여 드디어 머무르게 되었다. 밤에 정을 통하려 하니 여인이 말리며 '스님은 정토(淨土)를 바라보면서 마치 고기를 나무에서 구하려 한다'고 했다. 엄장이 놀라고 괴이해서 묻기를 '광덕이 이미 없는데 난들 또 상관있겠는가' 하니 여인이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나와 10년이나 함께 살았으나 아직 하룻저녁도 동침을 한 적이 없거늘 하물며 더러운 짓을 하리요. 오직 밤마다 몸을 깨끗하게 하고 정좌(正坐)하여 한소리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외고, 혹은 16관(觀)을 지어 관이 이미 무르익어 명월이 창에 비치면 그 빛에 정좌하였다. 그 정성이 이같으니 비록 서방 정토(西方淨土)로 가지 않고자 한들 어디로 가리요. 대개 천리를 가는 자는 그 첫걸음으로써 알 수 있나니 지금 사(師)의 행동(觀)은 동쪽으로 간다 할 지언정 서쪽으로는 갈 수 없다'고 했다.
엄장은 이에 부끄러워 물러가 곧 원효법사(元曉法師)에게로 가서 진요(津要=왕생의 중요한 방법)를 간곡히 말하니 원효가 <삽관법>을 지어 말하여 엄장이 그제야 몸을 깨끗이 하고 뉘우쳐 자책하며 일심으로 관(觀)을 닦아 또한 서승(西昇)하였다. <삽관법>은 원효법사 본전(本傳)과 <해동승전(海東僧傳)> 중에 있다. 그 부인은 분황사의 종으로 대개 19응신(應身)의 하나다. 일찍이 이런 노래가 있다.
달아 이제 서방(西方)까지 가시나이까 무량수불(無量壽佛) 앞에 말씀 아뢰다가 맹세 깊으신 존(尊)을 우러러 두 손 모아 사뢰기를 원왕생(願往生) 원왕생을 그리는 사람이 있다고 사뢰고 사뢰주소서. 아아, 이 몸 버려두고 사십팔대원(四八大願)을 다 성취하실까(月下伊底亦 西方念丁去賜里遣無量壽佛前乃 惱叱古音 多可支白遣賜立 誓音深史隱尊衣希仰支 兩手集刀花乎白良願往生願往生 慕人有如白遣賜立 阿邪此身遺也置遣 四十八大願成遣賜去).
모죽지랑가 (慕竹旨郞歌)
[편집]신라 제32대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2) 때 화랑도인 득오(得烏)가 화랑 죽지랑(竹旨郞)을 사모하여 부른 노래. 8구체의 향가로 죽지랑이 죽은 뒤에 조상하는 만가(挽歌)인 듯하다. <삼국유사> 권2 효소왕대 죽지랑조에 이 노래가 불려진 배경과 가사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제32대 효소왕 때에 죽만랑(竹曼郞)의 무리에 득오(得烏=혹은 谷이라 함) 급간(級干=신라 관등의 제9위)이 있어 화랑도 명부에 올라 날마다 나아가 봉사하더니, 한 열흘 동안 보이지 않았다. 낭이 그 어머니를 찾아 아들이 어디 있는가를 물으니, 어머니가 말하되 "당전(幢典) 모량(牟梁)의 익선아간(益宣阿干)께서 내 자식으로 부산성(富山城) 창직(倉直)으로 임명했으므로 급히 달려가노라고 남에게 고하지도 못하였노라" 하니, "낭은 자제가 만일 사사(私事)로서 갔다면 찾아볼 필요가 없지만, 공사(公事)로 갔다니 응당 가서 대접하리라" 하고, 설병(舌餠) 한 합과 술 한 병을 가지고 노복을 거느리고 가매 낭(郎)의 무리 137인도 위의(威儀)를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가 어디 있냐고 물으니, 가로되 지금 익선의 밭에서 예(例)에 따라 부역하고 있다고 했다. 낭이 밭으로 찾아가서 가지고 온 술과 떡을 먹이고 익선에게 휴가를 얻어 같이 돌아가도록 청했으나 익선이 굳게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 사리(使吏) 간진(侃珍)이 추화군(推火郡) 능절(能節)의 조(租=地代) 30석을 거두어 성중에 수송하다가 낭의 중사(重士)의 풍(風)을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어둡고 변통성이 없음을 더럽게 여겨 가지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요청했으나 그래도 허락치 않으므로 또 진절 사지(舍知)의 기마안구(騎馬鞍具)를 주니 그제야 허락하였다. 조정의 화주(花主)가 이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익선을 잡아다 그 더럽고 추한 것을 씻어 주려 하니, 익선이 도망하여 숨거늘, 그의 큰아들을 대신 잡아갔다. 마침 그 때는 중동극한(仲冬極寒)의 날이라 성안 못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얼어붙어 죽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명령하기를 모량리(牟梁里)인으로 벼슬하는 자를 모두 몰아내고 다시는 관공서에 접하지 못하게 하고 흑의(黑衣=僧衣)를 못 입게 하며, 만일 중이 된다고 해도 절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사상(史上) 간진의 자손을 올려 평정호손(枰定戶孫)을 삼고 표창했다.
이때 원측법사(圓測法師)는 해동의 고승이로되 모량리인이기 때문에 승직(僧職)을 주지 않았다. 처음에 술종공(述宗公)이 삭주(朔州) 도독사(都督使)가 되어 다스릴 곳으로 가게 되었는데, 당시 삼한(三韓=東方)에 병란이 있어 기병(騎兵) 3천으로 호송했다. 일행이 죽지령(竹旨嶺)에 이르니 한 거사(居士)가 길을 닦고 있었는데, 공이 보고 탄미(嘆美)하니 거사 또한 공의 위세가 매우 성(盛)함을 좋다고 하여 서로 마음에 감동하였다. 공이 주리(州里)에 닿은 지 한 달이 지나서 꿈에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아내 또한 똑같은 꿈을 꾸었다. 더욱 괴상히 여겨 이튿날 사람을 보내어 거사의 안부를 물으니, 그 곳 사람의 말이 "거사가 죽은 지 며칠이 되었다" 했다. 사자(使者)가 돌아와 거사의 죽음을 알리니, 꿈만 같은 날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아마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것이다" 하고 다시 군사를 보내어 영상북봉(嶺上北峰)에 장사 지내고 돌로 미륵을 만들어 무덤 앞에 세웠다.
아내는 과연 꿈꾼 날부터 임신하여 아이를 낳으매 이름을 죽지(竹旨)라 지었다. 그 아이가 자라서 벼슬에 나아가 유신 공(庾信公)과 더불어 부사(副師)가 되어 삼한을 통일하고, 진덕·태종·문무·신문(神文)의 4대에 걸쳐 대신이 되어 나라를 안정케 했다. 처음에 득오곡이 죽만랑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었으니 이러하다.
지난 봄을 그리워하매 모든 것이 애닯도다. 아담하신 모습에 주름살 지시니, 눈 돌이킬 사이에 만나옵기 지(作)오리. 낭이여 그리운 마음의 가는 길, 쑥구렁에 잘 밤이 있으리(去隱春皆理米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兒史年數就音墮支行齊 目煙廻於尸七史伊衣 逢烏支惡知作乎下是 郞也慕理尸心未 行乎尸道尸 蓬次叱淃中宿尸 夜音有叱下是)."
헌화가(獻花歌)·해가(海歌)
[편집]4구체로 된 신라 향가의 하나.
헌화가는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때 강릉 태수(江陵太守) 순정공의 부인 수로부인에게 철쭉꽃을 꺾어 바친 견우노옹(牽牛老翁)의 작이다. <삼국유사> 권2 수로부인조에 그 설화와 노래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덕왕대에 순정공(純貞公)이 강릉(江陵=고려 때는 명주) 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바닷가에서 점심을 하고 있었는데, 곁에 석벽이 병풍처럼 바다를 둘러 있었다. 그 높이가 천장(千丈)이나 되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만개(滿開)해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水路)가 이를 보고 좌우에게 "누가 저 꽃을 꺾어 오겠느냐" 하니 종자들이 대답하되 인적이 이르지 못하는 곳이라 하여 모두 응치 않았다. 이 때 한 늙은이가 암소를 끌고 지나가다 부인의 말을 듣고 꽃을 꺾어, 또한 노래를 지어 바쳤는데, 그 늙은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후 순행(順行) 2일에 또 임해정(臨海亭)이란 데서 점심을 먹던 차 해룡(海龍)이 갑자기 나타나 부인을 끌고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공이 허둥지둥 발을 굴렀으나 계책이 없었다. 또 한 노인이 있어 고하되 '옛말에 여러 입(口)은 쇠도 녹인다 하니 이제 바닷속의 물건인들 어찌 여러 입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랴. 경내(境內)의 백성을 모아서 노래를 지어 부르며 막대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찾을 수 있으리라'했다. 공이 그 말대로 했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나와 도로 바치었다. 공이 부인에게 해중의 일을 물으니 부인의 말이 '칠보(七寶)로 꾸민 궁전에 음식이 맛있고 향기롭고 깨끗하며 인간의 요리가 아니라'고 하였다. 부인의 옷에서는 세상에서 일찍이 맡아 보지 못한 이향(異香)이 풍기었다. 원래 수로부인은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매양 깊은 산과 큰 못을 지날 때마다 가끔 신물(神物)에게 붙들림을 당하였다. 그 때 여러 사람이 부르던 노래를 <해가(海歌)>라 하며 그 <해가(海歌)>에는,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남의 부녀를 뺏앗아간 죄는 그지 없으니, 네 만일 거역하여 내놓지 않으면 그물을 드려 잡아 구워 먹으리(龜乎龜乎出水路 掠人婦女罪何極 汝若悖逆不出獻 入網捕燔之喫)라 하였고, 노인의 <헌화가>에는,
(꽃물든) 붉은 바위 갓에
잡은 손 암소 놓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신충
[편집]信忠 (생몰연대 미상)
신라 때 대신.효성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바둑을 두며 장차 자신을 중용(重用)하여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즉위 후에 이행치 않자 <원가(怨歌)>를 지었다 함. 이 향가로 인해 잘못을 뉘우친 왕으로부터 벼슬을 받게 되었으며, 739년(효성왕 3) 이찬(伊飡)으로 중시(中侍)가 되고, 757년(경덕왕 16) 상대등(上大等)에 올랐다. 763년(경덕왕 22)에 은퇴, 중이 되어 단속사(斷俗寺)를 짓고 효성왕의 명복을 빌었다.
원가 (怨歌)
[편집]10구체로 된 신라 향가의 하나. 신라 제34대 효성왕(孝成王, 재위 737-742) 원년에 화랑 신충이 지었다 함. 이름으로 <궁정백(宮庭泊)> <백수가(栢樹歌)> 또는 <원수가(怨樹歌)>라고도 함. <삼국유사> 권5 신충 괘관(信忠掛冠)조에 다음과 같이 유래와 노래를 전한다.
"효성왕이 아직 왕이 되기 전에 어진 선비 신충(信忠)과 더불어 궁정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어느날 신충에게 이르기를 '후일에 내가 만일 그대를 잊게 되면 이 백수(栢樹=잣나무)와 같으리라' 함에, 신충이 일어나 절하였다. 몇 달 후 왕위에 올라 공신에게 상을 주되 신충을 잊고 차례에 넣지 않았다. 신충이 원망하여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이니 나무가 갑자기 말라 버렸다. 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살피게 하매 노래를 얻어 바쳤다. 왕이 크게 놀라 '만사를 손아귀에 잡고 거의 그를 잊을 뻔했다' 하고 곧 그를 불러 작록(爵祿)을 주니 백수가 소생했다. 그 노래에,
무릇 잣이 가을에 아니 울어(시들어) 떨어지매 그대 어이 니저시랴 말씀하신 우러러 뵙던 낯이 계시온데, 달그림자 옛 못에 가는 물결을 원망하듯 모래를 바라보니 세상도 야속한 즈음이여(뒷구는 없어짐) (物叱好支栢史 秋察尸不冬爾屋支墮米 汝於多支 行齋敎因隱 仰頓隱面矣改衣賜乎隱冬矣也 月羅理影支古理因淵之叱 行尸浪 阿叱沙矣支如支 兒史沙叱望阿乃 世理都 之叱逸烏隱第也 後句亡)라 했다." 이로써 총애가 양조(兩朝)에 두터웠다. 경덕왕(景德王) 22년 계묘(癸卯)에 충이 두 벗과 서로 약속하여 벼슬을 버리고 남악(南岳=지리산)에 들어갔다. 다시 불러도 나오지 않고, 머리를 떨고 중이 되어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세우고, 거기에 살며 일생을 마쳤는데 대왕의 복을 빌고자 원하므로 왕이 허락하였다.
월명사
[편집]月明師 (생몰연대 미상)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의 승려.
760년(경덕왕 19) 4월에 두 개의 해가 십여 일 동안 함께 뜨자 왕의 부름을 받고 이 일괴(日怪)를 없애기 위해 향가인 <도솔가>를 지어 읊으니 괴변이 없어졌다 함. 월명이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으면서 달 밝은 밤에 피리를 불며 문앞 큰 길로 다녔다. 그때마다 달이 그를 위해 길을 밝혔으므로 그 길을 월명리(月明里)라 하고, 그의 이름도 월명이라 했다 한다. 그는 또 자기의 죽은 누이를 위해 추도(追悼)의 노래인 향가 <제망매가>를 지었다.
도솔가 (兜率歌)
[편집]'兜率'은 원래 범어(梵語) tusita의 음역(音譯)으로 지족(知足)·묘족(妙足) 등으로 의역(意譯)되며,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사는 하늘이라는 뜻. 도솔가에는 신라 유리왕(儒理王) 5년에 지은 정형시(定型試)로서의 <도솔가>와 신라 향가로서의 월명 도솔가(月明兜率歌)가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것을 말함. 일명 <산화가(散花歌)>라고도 함.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때의 승려 월명사가 지은 향가로 형식은 4구체이다.
<삼국유사> 권5 월명사 도솔가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덕왕 19년 경자(庚子) 4월 1일에 해 둘이 나란히 나타나 열흘 동안이나 없어지지 않았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연승(緣僧)을 청하여 산화공덕가(散花功德歌)를 짓게 하면 재앙을 물리치리라 하였다. 이에 조원전(朝元殿)에 깨끗한 단(壇)을 베풀고 청양루(靑陽樓)에 행행(幸行)하여 연승을 기다렸다. 때에 월명사가 길두덩 남쪽 길을 가므로 왕이 사자를 보내 단을 열고 기도문을 지으라 했다. 월명이 아뢰기를 '신 승(僧)은 국선(國仙)의 무리에 속하여 단지 향가를 알 뿐이요, 범성(梵聲)에는 익숙치 못하다' 하니 왕은 '이미 연승으로 뽑혔으니 향가도 좋다'고 하였다. 이에 월명이 도솔가를 지어 바쳤다. 그 가사에,
오늘 여기 산화가를 부르니 뿌려지는 꽃아 너는 곧은 마음에 명을 심부름하여 미륵좌주를 뫼셔라(今日此矣散花唱良巴寶白乎隱花良汝隱 直等隱心音矣命叱使以惡只 彌勒座主陪立羅良) 했다.
그 해석에 이르기를 용루(龍樓)에 오늘, 산화가를 불러 푸른 구름에 한 조각 꽃을 보내니 은중(殷重)한 직심(直心)의 부리는 바 되어 멀리 도솔의 대선가(家)를 맞이하라 했다. 지금 흔히 이를 산화가(散花歌)라고 하나 잘못이고, 의당 도솔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산화가는 따로 있으나 글이 많아 싣지 아니한다."
제망매가 (祭亡妹歌)
[편집]10구체로 된 신라 향가의 하나이다. 경덕왕 때 승려 월명사가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 재(齋)를 올리면서 지었다는 노래. 그 내용 역시 상대적인 신탁(神托)을 노래한 불찬(佛讚)이며, 미타신앙(彌陀信仰)에 관한 노래다. <도솔가>와 함께 <삼국유사> 권5 월명사 도솔가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월명이 일찍이 죽은 누이동생을 위하여 재(齋)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제사지냈는데 갑자기 광풍(狂風)이 일어 지전(紙錢)을 날려 서쪽으로 향하여 없어졌다. 그 향가는 다음과 같다.
죽살이의 길이 여기 있으매 두려워 나는 간다는 말도 못이르고 가는 것이구나,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같이 같은 가지에 나 가지고 가는 곳 모르는가 아아, 미타찰에서 만나볼 나인가 도닦으며 기다릴 거나. 월명이 항상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어 피리를 잘 불었다. 일찍이 달 밝은 밤에 피리를 불며 문앞 큰 길을 지나니 달이 가기를 멈추었다 하여 그 길을 월명리라 하였고 법사(法師)도 또한 이로써 이름이 알려졌다. 사(師)는 곧 능준대사(能俊大師)의 문인(門人)이다. 신라 사람이 향가를 숭상한 자 많았으니 대개 시송(詩頌)과 같은 유(類)다. 그러므로 자주 능히 천지귀신(天地鬼神)을 감동시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찬(讚)하노니, 바람은 지전(紙錢)을 불어 저 세상에 가는 누이의 노자(路資)를 삼고 부는 피리는 명월(明月)을 움직여 항아(姮娥)를 살게 하도다. 도솔이 하늘에 연(連)하여 멀다고 하지 마라. 만덕화(萬德花) 한 곡조 노래로 맞았으니."
충담사
[편집]忠談師 (생몰연대 미상)
신라 경덕왕 때의 중·향가 작가.
경덕왕의 부름을 받고 귀정문(歸正門) 누각에서 왕을 맞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미륵세존에게 드리던 차를 끓여 왕에게 권하고 왕명을 받아 향가인 <안민가>를 지었다. 그가 지은 향가 작품인 <찬기파랑가>와 함께 <삼국유사>에 실려 전한다.
찬기파랑가 (讚耆婆郞歌)
[편집]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 충담사가 지은 10구체의 향가. 기파랑(耆婆郞)이라는 화랑을 찬양한 노래로 <삼국유사>권 2 찬기파랑조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헤치고 나타난 달이 흰구름 좇아 떠나가는 어디에, 새파란 냇물 속에 기랑(耆郞)의 모습 잠겼세라. 거세인 여울 조약돌에(깨끗이 묵중히) 낭의 지니신 마음 갓(際)을 좇으리. 아아, 잣가지처럼 높아 찬 서리 모를 화반이여."
안민가(安民歌)
[편집]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 충담사가 지은 10구체 형식의 향가. 그 내용은 충담사가 경덕왕의 요청으로, 군(君)·신(臣)·민(民)의 조화된 치국 안민(治國安民)의 도리를 읊은 노래이다. <삼국유사> 권2 경덕왕 충담사조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당에서 보낸) 덕경(德經)을 대왕이 예를 갖추어 받았다. 왕이 어국(御國)한 지 24년에 오악(五岳) 삼산(三山)의 신들이 가끔 전정(殿庭)에 현시(現侍)했다. 3월 3일에 왕이 귀정문 누상(樓上)에 듭시어 좌우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길에서 한 사람 영복(榮服)의 승려를 데려올 수 있겠느냐'하였다. 이때 마침 위의가 깨끗한 대덕(大德=고승)이 있어 길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좌우가 바라보고 데리고 와서 보이니 왕은 '내가 말하는 영승이 아니라'하고 도로 보냈다. 다시 한 중이 있어 승의를 입고 앵통(櫻筒)을 지고 남쪽으로 오는지라 왕이 기뻐하여 누상으로 영접하고 그의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만이 가득했다. 왕이 '그대는 누구인가' 물으니 승은 '충담이외다' 했다. '어디서 오느냐'고 물으니 승은 '매양 3월 3일과 9월 9일에는 차(茶)를 달여서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에게 드리는데, 오늘도 드리고 오는 중입니다'하였다.
왕이 '나에게도 차 한 그릇을 주겠느냐'하니 중이 차를 달여 올렸다. 차의 맛이 이상하고 그릇 속에서 이향(異香)이 풍기었다. 왕은 '내가 들으니 그대의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가 그 뜻이 매우 높다 하니 과연 그러하냐'고 하자 승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왕이 '그러면 나를 위해 안민가(安民歌)를 지으라'했다. 충담이 곧 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치니 왕이 아름다이 여겨 왕사(王師)를 봉하자, 충담이 재배하고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그의 안민가는 이러했다.
임금은 아비요 신하는 사랑스런 어미시라. 백성을 어린아이로 여기시니 백성이 은혜를 알지어다. 꾸물꾸물 사는 물생(物生)들 이를 먹여 다스리니,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소냐, 나라를 지닐 줄 알지로다. (후구)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라면 나라는 태평하리이다."
천수대비가(千手大悲歌)
[편집]신라 경덕왕 때 희명(希明)이라는 여인이 지었다는 향가.
일명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 또는 <맹아득안가(盲兒得眼歌)>라고도 하며, 형식은 10구체이다. <삼국유사> 권3 분황사 천수대비(芬皇寺千手大悲)조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경덕왕대에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여자 희명(希明)의 아들이 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어느 날 그 어머니가 아들을 안고 분황사 좌전 북벽화(左殿北壁畵)의 천수대비 앞에 가서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었더니 마침내 눈을 떴다. 그 노래는 가로되,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비삽나이다. 천 개 손 천 개 눈을 가지셨사오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어 둘 없는 나에게 주시옵시라. 아아 나에게 주시옵시사. 나에게 주시면 자비가 클 것이로이다"라고 했다.
찬하노니, 죽마 타고 파피리 불며 백진(陌塵)에 놀다가 하루 아침 멀쩡한 두 눈을 멀었습네. 그대의 어진 눈을 주신 바 없으시면, 헛되이 봄 양화(楊花)를 얼마나 보내리."
우적가(遇賊歌)
[편집]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 때의 승려 영재(永才)가 지은 향가.
형식은 10구체. 중 영재가 지리산에서 도둑을 만나 이 노래를 불러 회개시켰다는 설도(說道)의 노래. <삼국유사> 권5 영재우적(永才遇賊)조에 이렇게 전한다.
"승(僧) 영재는 천성이 골계(滑稽)하여 재물에 매이지 않고 향가를 잘하였다. 만년에 장차 남악(南岳)에 은거하려고 하여 대현령(大峴嶺)에 이르렀을 때 도적 60여 인과 마주쳤다. (도적이) 해를 끼치려 할 때 재(才)는 그 칼날 앞에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고 화기롭게 대하였다. 적이 이상히 생각하여 그 이름을 물으니 영재라 대답했다. 도적이 평소에 그 이름을 들은지라 (그에게) 명하여 노래를 짓게 하니 그 가사는 이러하다.
제 마음에 모든 모습을 헤이지 못하는 날, 멀리 ○○지나 이제 숨어서 지나고 있다. 오직 그르친 파계승을 두려워할 모습에 또 돌아가노니, 이 적화를 사 겪으며 말하지도 못하겠거니, 아아 오직 점잖은 선(善)함은 어디 높직이 두었더냐(自矣心米 兒史毛達只將來呑隱日 遠鳥逸○○過出知遣 今呑藪未去遣省如 但非乎隱焉破○主次弗○史內於都還於尸朗也 此兵物叱沙過乎護好尸曰沙也內乎呑尼 阿耶 唯只伊吾音之叱恨隱▩陵隱安支尙宅都乎隱以多)."
도적이 그 뜻에 감동하여 비단 두 끝을 그에게 주니 영재는 웃고 사례하며 '재회(財賄)가 지옥에 가는 근본임을 알아 장차 궁산(窮山)에 숨어 일생을 보내려고 하거든 어찌 감히 이것을 받으리요' 하고 땅에 던졌다. 도적이 또 그 말에 감동되어 모두 칼과 창을 버리고 머리를 깎고 그의 도제(徒弟)가 되어 같이 지리산에 숨어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영재의 나이 90이니 원성대왕(元聖大王) 때였다. 찬하오니, 지팡이를 짚고 산에 돌아가니 그 뜻은 더욱 깊어, 비단이나 구슬인들 어찌 그 마음을 다스리리. 도적의 군자(君子)가 서로 선물을 하였으나 지옥에 갈 촌금(寸金)의 뿌리도 없느니."
처용
[편집]處容(생몰연대 미상)
신라 헌강왕 때의 화랑·기인(奇人)이다.
879년(헌강왕 5) 국동(國東)의 주군(州郡)을 순행하다가 개운포(開雲浦)에 이른 신라 헌강왕 앞에 동해 용왕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타나 노래와 춤을 추었다. 그 아들 가운데 처용이 왕을 따라 경주에 가서 급간(級干)이 되어 거리에서 가무(歌舞)를 했다. 어느날 자기 아내가 역신(疫神)과 동침하는 것을 보았으나 화를 내지 않고, 향가인 <처용가>를 불러 역신의 마음을 뉘우치게 했다. 이로부터 백성들이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 역신을 쫓았다 한다. <악부(樂府)>에 그의 춤이 전하는데, 상염무(想髥舞)라고도 한다.
처용가(處容歌)
[편집]신라 헌강왕(憲康王) 5년(879)에 화랑인 처용랑(處容郞)이 지은 향가. 그 형식은 8구체. 처용이 역신을 몰며 부른 무가(巫歌)로 축사(逐邪)의 노래이다. 그 내용은 역신이 처용이 출타한 사이 그의 아내를 침범하여 동침하는 것을 보고 부른 노래로 <삼국유사> 권 2 처용랑조에 노래의 유래와 가사가 실려 있다.
"제49대 헌강왕대에 서울로부터 해내(海內)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이었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으며, 풍악과 노래가 거리에 끊이지 않고 풍우(風雨)는 사철 순조로웠다. 이에 대왕이 개운포(開雲浦=지금의 울산)에 나가 놀다가 장차 돌아올 새, 낮에 물가에서 쉬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잃을 정도였다. 괴상히 여겨 좌우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되, 이것은 동해용(東海龍)의 조화(造化)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 것이라 하였다.
이에 해당 관원에게 명하여, 이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했다. 왕령(王令)이 이미 내림에 구름이 개이고 안개가 흩어졌다. 그래서 개운포(開雲浦)라 이름지었는데, 동해용(東海龍)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서 덕(德)을 찬양하여 춤을 추며 주악(奏樂)을 바쳤다. 그 중 한 아들은 임금을 따라 서울에 와서 정사(政事)를 돕게 되었는데 이름을 처용이라 했다. 왕이 미녀로써 아내를 삼게 하여 그를 머물게 하고 또 급간(級干)의 직을 주었다. 그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이 흠모하고 사람으로 변해 밤에 그 집에 가서 몰래 동침하였다. 처용이 밖에서 집에 돌아와 자리에 두 사람이 누워 있음을 보고, 이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 물러나게 했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동경 밝은 달에 밤드러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러라. 둘은 내해거니와 둘은 뉘해언고. 본래 내해다마는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그 때에 역신이 모양을 나타내 앞에 꿇어앉아 '내가 공(公)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잘못을 범했는데, 공이 노하지 않으시니 감격하여 아름다이 여기는 바다. 이제 이후로는 맹세코 공의 모습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노라' 했다. 이런 일로서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문에 붙여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경사를 맞아들였다. 왕이 서울에 돌아온 뒤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승지(勝地)를 택해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망해사(望海寺) 또는 신방사(新房寺)라고 했으니 곧 용을 위해 세운 것이다."
앵무가(鸚鵡歌)
[편집]신라 제42대 흥덕왕(재위 826-836) 원년(826)경에 왕이 지은 노래.
그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 권10 흥덕왕조에,
"12월에 왕비 장화부인이 돌아가므로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추봉했다. 그러나 왕은 비의 생각을 잊지 못해 즐거워하지 않으므로 군신들은 상소하여 비를 맞을 것을 청하니 왕은 말하기를 '한 쌍의 새가 짝을 잃는다 하더라도 슬퍼하는데 항차 사람으로서랴. 좋은 배필을 잃었으나 어찌 그 마음을 참지 못하고 다시 아내를 맞을까 보냐' 하고 드디어 그 말을 좇지 아니하고 또한 여자를 대하여 친근하게 하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흥덕왕이 왕비를 잃은 슬픔을 노래로 지었으리라 추측된다.
<삼국유사> 권2 흥덕왕조에 "왕이 즉위한 지 얼마 후에 어떤 사람이 당나라로 사신을 갔다 올 때 앵무 한 쌍을 가져왔다. 그런데 암놈이 죽고 수놈만 남아 슬피 우는지라 왕이 거울을 앞에 걸게 했더니 거울을 보고는 제 짝인 줄 알고 거울을 쪼다가 죽었다. 왕이 이를 슬피 여겨 노래를 지었다(卽位未幾有人奉使於唐 將鸚鵡一雙而至不久雌死 而孤雄哀嗚不己 王使入掛鏡於前 鳥見鏡 中影 擬其得偶 乃啄其鏡而知其影 乃哀嗚而死 王作歌云)."
원효
[편집]元曉 (617-685)
신라의 승려. 성은 설(薛), 원효는 법명(法名), 아명은 서당(誓幢), 신당(新幢). 설총(薛聰)의 부(父). 648년(진덕여왕 2) 황룡사(皇龍寺)에서 중이 되어 각종 불전(佛典)을 섭렵하며 수도에 정진했다. 집을 불문에 희사하고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고 자기가 난 자리에 사라사(沙羅寺)를 세웠다. 650년(진덕여왕 4년)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으나 고구려 군사에게 잡혀 실패, 661(문무왕 1년) 다시 의상과 함께 당에 구법(求法)하러 가다가 당항성(唐項成=南陽 부근) 한 고총(古塚)에서 밤중에 마신 물이 해골에 괸 물임을 알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으며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다고 대오(大悟)하고 돌아왔다. 분황사에 있으면서 그의 독특한 통불교(通佛敎)를 제창하며 불교 보급에 힘썼다.
그는 또 여자를 구하는 노래를 지어, 이것이 태종무열왕에게 알려지는 바 되고, 요석공주(瑤石公主)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설총을 낳았다. 파계(破戒)한 후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복성거사(卜性居士)로 자칭, <무애(無▩)>라는 노래를 부르며 세속의 일에 초연한 생활을 즐겼다.
당나라로 부터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 들어오자 당시의 왕과 고승(高僧)들 앞에서 <금강삼매경>을 풀이하여 존경을 받으며 만년에는 절에 파묻혀 참선과 저술에 진력, 불교사상의 종합과 실천에 노력한 정토교(淨土敎)의 선구자로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교리를 실천했다. 한국 불교사상 위대한 고승의 한 사람으로 추앙된다.
무애가(無▩歌
[편집]신라의 가요. 태종무열왕 때 원효가 지어 불렀다는 노래. 그가 파계하여 속인이 되었을 때 <화엄경(華嚴經)>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人, 一道出生死)'의 가르침에 따라 부른 노래라 하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현금포곡(玄琴抱曲)
[편집]신라 가요.신라 경문왕(景文王) 때 화랑 격원랑(激元郞) 등이 지음. 그들이 금란사(金蘭寺)에서 놀다가 은근히 나라를 위해서 일할 뜻을 읊은 가요라 한다. 그 가사는 전하지 않고, 유래만 <삼국유사> 권2 경문왕조에 전한다.
망국애가(亡國哀歌)
[편집]신라의 가요.경순왕(敬順王) 때 아간(阿干) 신회(神會)가 지었다 한다. 신라가 고려에게 망하자 신라 서울의 쓸쓸함을 보고 이를 슬퍼해 불렀다는 노래로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목주가(木州歌)
[편집]신라의 가요.지금의 충청도 천안(天安)에 사는 어느 효녀가 지었다 한다. 노래는 전하지 않고, 지어진 유래만 <고려사> 권71에 전한다. 유래는 목주에 한 효녀가 있었는데 그녀는 아버지와 계모를 효도로써 섬기었다. 그러나 계모는 그녀를 모함했고, 집에서 쫓겨난 그녀는 어느 석굴 속에 사는 할멈의 구원을 받아 그 며느리가 되어 열심히 일을 한 끝에 부자가 되었다.
후에 부모가 재산을 탕진하고 고생한다는 소문을 듣고 모셔다가 섬기었으나 역시 미움을 받았으므로 그 애틋한 심정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라 한다.
번화곡(繁花曲)
[편집]신라의 가요. 경애왕(景哀王) 때 김위응(金魏膺, ? -927)이 지었다 한다. 왕이 포석정(鮑石亭) 잔치 때에 두 미인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다. 하지만 가사는 전하지 않고 <증보 문헌비고> 권106에 한역가가 전해져 온다. "祇園 實際兮 二寺東 兩松相依兮羅中 回首一望兮花滿塢 細霧輕雲兮竝濃(기원에 실제 두 절의 동쪽에 두 그루 소나무는 겨우살이 속에 의지했다. 머리를 돌려 바라보니 꽃은 언덕에 가득찼는데 가는 안개 가벼운 구름은 다 같이 몽롱하구나)."
방등산곡(方登山曲)
[편집]신라의 가요. 신라 말 장일현(長日縣=옛 백제 땅)의 어떤 여인이 지었다 한다. 신라 말 온 세상이 어지러운 틈을 타 도둑들이 성행. 나주(羅州) 속현(屬縣)인 장성(長城) 방등산에 진을 치고 양갓집 부녀자들을 약탈해 가자, 그 속에 있던 장일현의 여인이 남편이 구하러 오지 않음을 풍자해서 부른 것. 가사는 전해 오지 않고 노래의 유래가 <고려사> 권71에 전한다.
삼대목(三代目)
[편집]신라의 향가집. 제 51대 진성여왕 2년(388) 각간 위홍(角干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이 왕명을 받아 향가를 수집하여 엮은 책. 우리나라 문학사상 최초의 가집으로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여기서 '三代'는 아마 박(朴)·석(昔)·김(金) 3대를 가르치는 듯싶고, '目'은 3대의 전면적인 사조가 향가에 의존되어 있어서 만인(萬人)의 눈이 됨을 가르치는 듯싶으며, 혹은 경문왕(景文王)·헌강왕(憲康王)·정강왕(定康王)을 이른다고 한다.
<삼국사기> 권11 진성왕 2년 조에 "왕이 각간 위홍으로 통하다가 이에 이르러 항상 안에 들어 용사(用事)를 하였다. 인하여 대구화상으로 더불어 향가를 수집하게 하였으니 이를 삼대목이라 한다(王素與角干魏弘通 至是 常入內用事 仍命與大矩和尙修集鄕歌 謂之三代目云)"고 기록되었다. <삼대목>의 '三代'는 <삼국사기> 권12 경순왕 9년조에 "국인이 시조로부터 이에 이름을 나누어 삼대라 하였는 바, 처음으로부터 진덕까지 28왕을 상대(上代)라 하고, 무열로부터 혜공까지 8왕을 중대(中代)라 하고, 선덕으로부터 경순까지 20왕을 하대(下代)라 했다(國人自始祖至此分爲三代 自初至眞德 二八王 謂之上代 自武烈至惠恭八王 謂之中代 自宣德至 敬順二十王 謂之下代云)." 했으니, 진성왕 때는 선덕왕 이후인지라 3대라 했을 것이고, 또 <삼국사기> 권47에 "3대 화랑이 무려 3백 인이라" 한 것으로 보아 <삼대목>은 3대 향가집의 명목(名目)이란 뜻일 것이다.
대구화상
[편집]大矩和尙 (생몰연대 미상)
신라 때의 대신. 제51대 진성여왕 2년(888)에 왕명을 받고 각간 위홍과 함께 향가집 <삼대목>을 엮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위홍
[편집]魏弘 ( ? -888)
신라 때의 대신. 875년(헌강왕 1년) 이찬(伊飡)으로서 상대등(上大等)이 되고, 진성여왕 때 각간(角干)이 되어 여왕과 간통하여 조정을 문란케 했다. 왕명으로 대구화상과 함께 향가집 <삼대목>을 편찬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대왕(大王)에 추봉(追封)했는데 시호는 혜성(惠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