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아시아 문학/중국 문학/원·명·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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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원·명·청시대의 문학[편집]

근세문학의 특색은 민중문학인 원의 희곡과 명·청의 구어(口語)소설에 의해서 대표된다.

시대의 추세[편집]

時代-趨勢

송대에서 확립된 주자학(朱子學)은, 천하의 사물에는 당연한 이치와 함께 필연적인 소이(所以)의 이치가 있으며, 인륜(人倫)관계도 자연적일 뿐 인위적이 아니라고 했다. 따라서 군신·부자, 그 밖의 모든 상하관계는 인간의 작위(作爲)가 아니라 자연의 천리이며, 권위적 질서는 무조건으로 승인되는 것으로 보고 유가(儒家)인 맹자의 혁명사상도 퇴색시켜 버렸다. 이것이 원·명·청을 통해서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통적 권위사상이 되어, 명대에 이르러 이를 이어받아 양명학(陽明學)이 일어났다.

양명학의 양지(良知)의 설은 권위를 자기의 내면에 구축하는 일이며, 그 내면 구축은 눈앞에 주어진, 체제측의 조건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우파(右派)는 권위주의의 지주(支柱)가 되었으나, 그 전제를 부정한 왕간(王艮, 1483-1541) 등 태주학파(太州學派)는 반대로 인욕(人欲)도 자연으로 보고 인욕을 긍정한다는 귀납(歸納)에까지 사상적으로 도달했다. 따라서 농민·수공업자·상인을 끌어들였으며, 양명학 좌파(左派)인 이탁오(李卓吾)는 한걸음 더 나가 자유주의적인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였다. 견식(見識)에 있어서 남녀는 평등하다고 했고, 또한 <서상기(西廂記)> <수호전(水滸傳)>에 대한 유교윤리 면에서의 비난을 부정하고, 도덕적 견지에 따른 문학평가와 절연(絶緣)된 문학관을 수립했다.

이와 같은 전투적인 권위 부정과는 별도로, 주자학적 권위주의를 회피하고 입체성(立體性)을 수호하려는 사람도 있어 남북조시대의 일민(逸民)에 해당하는 문인·산인(山人=은거하는 사람)도 출현했다. 명말 청초(明末淸初)의 황종희(黃宗羲, 1610-1695)는 1성(姓)을 위해서 조민만성(兆民萬姓)을 희생시키는 무도한 군주를 부정하는 혁명의 입장을 시인했고, 또한 무력한 여성의 입장에 대한 동정적 이해를 깊이 한 유정섭(兪正燮) 등도 나타났다.

원·명·청을 통해서 견고해진 체제유지의 사상은 전래의 지주계층의 이익을 토대로 한 현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이며, 한편 그것을 동요시킨 반체제의 사상은 신흥 상공업자의 이익에 대한 민감한 대응이었다. 청조 말기에는 유럽의 침략과 직면하게 되어 아편전쟁·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이 일어나 유교의 권위주의 체계에 충격을 가하여 공공연히 비판이 가해지게 되었다. 강유위(康有爲, 1858-1927) 등의 청말 공양학파(公羊學派)가 그것으로서, '변법유신(變法維新)'을 주장하고 '중체서용(中體西用)'을 표방하는 대지주 관료의 양무파(洋務派)와 대립하여 주도권 싸움을 계속했으며, 한편 장태염(章太炎) 등의 혁명사상이 힘을 얻게 되어 쑨원(孫文, 1886-1925) 등의 혁명운동이 청조 정부와 대결하게 되었다.

희곡[편집]

戱曲

이민족(異民族)이 한민족을 지배했던 원(元)에서는 종래의 지식계급의 등용문이었던 과거제도가 폐지되어 출세의 길이 막혔기 때문에, 재능 표현의 분야를 송·금 이래의 민중예술인 잡극(雜劇=院本)이나 제궁조(諸宮調)에서 찾았다. 시문(詩文)이 쇠퇴하고 희곡이 성행한 것은 동작이 간단하고 상징적인 것이며, 곡에 맞춘 가사를 듣는 희곡이 한자(漢字)문화에 생소한 이민족 지배자의 기호(嗜好)와 합치되었다는 점을 무시 못할 것이다.

초기에는 희곡작가의 사회적인 지위가 낮았다. 따라서 관한경(關漢卿) 등은 건강한 시민의 입김을 전하고 있었으며 후기에는 체제가 정비되고 시문에 대신하는 예술로서의 지위도 차지하게 되어 고명(高明, 1305-1380)과 같은 진사 출신자가 작가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여기서 원곡(元曲)의 대표작 중 하나인 그의 <비파기(琵琶記)>를 보면, 비파기의 모체인 남송의 희문(戱文)<조정녀(趙貞女)>에서는 향리에서 양친을 섬기는 아내를 버리고 출세하자 명문의 딸과 결혼한 사나이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줄거리였던 것을, 남편을 찾아온 전처와 후처가 만나서 1부 2처가 단란하게 산다고 개변시키고 있다. 불만이 쌓여서 체제 비난으로 향하는 싹이 사전에 꺾여 버리는 형태로 변하였고, 시골과 도시, 기근의 비참과 재상(宰相)의 영화 같은 장면 대조의 기교에 힘을 넣게 된다.

명대(明代)가 되자 태조의 손자 주헌왕(周憲王)이 많은 작품의 작자로서 등장하고, 또한 서위(徐渭, 1521-1593)는 음률에 맞지 않는 가사를 만들어서 '천하 사람들의 목을 자르더라도' 결코 바꾸지 않는다고 호언하고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보다 읽는 희곡으로 변모시켜 시문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치되는 세력을 보이게 된다.

소설[편집]

小說

송·원 이래 무명작가에 의해서 전해져 내려온 설화(說話)가 명의 만력 연대(萬曆年代)쯤을 경계로 창작으로 이행되어 듣는 소설에서 읽는 소설로 변모되었다. <금병매(金甁梅)>는 신흥 상업자본가가 보다 자본의 효율을 올리기 위해서 관료를 지향하고 재래의 지주계급이 이익 유지를 위하여 만들어 낸 보수적 덕목에 흡수되어 맥이 빠져 버리는 경과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경향은 청대에 와서 문인·작자가 배출되자, 종래의 글을 대신해서 도덕을 주장하는 표현형식이 되었고, 자연경제(自然經濟) 속에 남겨진 민중은 '탄사(彈詞)' '평서(評書)' 따위의 이야기 문예에 몰두하게 되었다.

시문[편집]

時文

사대부(士大夫) 계급의 필수 교양이었던 시문은 역시 시대의 조류에 민감하여 현체제의 결함을 통감, 이상사회에의 복귀를 지향하는 고문사파(古文辭派)와 현상을 시인하면서 자기 표현을 확립시키려는 성령파(性靈派)로 분열되었다.

고문사파의 '전후칠자(前後七子)'가 나온 가정 연간(嘉靖年間)은 중국 자본주의의 맹아기(萌芽期)에 해당되며, 자연경제의 기반이 붕괴되기 시작하여 종래의 가치관의 전도(轉倒)를 촉구하는 기운이 일기 시작한 시기라고 하겠다. 그들은 이러한 변화를 대략 짐작하여 경종을 울렸다고 할 수 있겠다. 당·송 고문운동이 그러했듯이, 이것은 반복되어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청말의 동성파(桐城派)도 이 흐름에 따른 것이다.

한편 만력 연간에 나타난 원굉도(袁宏道) 등의 공안파(公安派)는 거기에 반대하여 개성의 자유로운 표현을 주장하여 후의 경릉파(竟陵派)·성령파와 함께 현상긍정파(現狀肯定派)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 대립은 이미 문학적 생명이 쇠퇴한 시문을 회복할 힘을 갖지 못하였고,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당·송 시문의 영예를 계승하지 못하고 현대 구어시(口語詩)에 자리를 물려 주게 된다.

문학적 특징[편집]

文學的特徵

이 시기의 문학을 특징짓는 배경의 첫째는 자본주의의 맹아에 수반된 시민층의 성장에 있다고 하겠다. 동시에 이것을 둘러싼 사회의 큰 테두리로서의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봉건체제는, 최후의 70년 동안을 제외하고는 계속하여 더욱 완성되고 중앙집권의 경향을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이것을 반영하여 이 시기의 문학적 특징의 첫째는 희곡·소설 등 통속적 시민문학의 등장에서 볼 수 있는데, 시문은 계속 문학의 정통의 자리를 차지하여 시민문학의 방향과 복고의 경향과의 균형점을 좇아 원·명·청 각국의 독자적 전개를 보였다. 그러나 제재(題材)도 표현의 확대변화에 한정되어 형식이나 사상적 내용이 모두 전시대까지의 큰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하고 전시대의 어느 것을 모방하는 테두리 속에 머물러서 전체적으로 복고적인 경향을 특징으로 하게 되었다.

원대(元代)의 몽고인의 한문화(漢文化) 멸시는 전대의 정치·문학·일체의 이념을 무너뜨리고 원시(元詩)에 비정치적 색채를 부여하고, 우집(虞集)을 대표로 하는 작가는 전체적으로 당시(唐詩)에 접근하나 그 중후성을 잃고 섬려(纖麗)에 흐른다. 그것은 또한 강남의 시민문화의 번성과 결부되어 양유정(楊維楨, 1296-1370) 등의 문인을 낳고, 원말 명초의 고계(高啓)에 이르러 하나의 정점을 형성했다.

그들로 비롯된 의고(擬古)의 풍조는 작자층이 시민계급으로 확대됨을 배경으로 명의 중기 '전후칠자(前後七子)' 등의 '격조설(格調說)'이 되어 일세를 풍미하였고 동시에 원의 풍조를 고쳐서 '문은 진한(秦漢), 시는 성당(盛唐)'의 강렬·중후(重厚)한 복원을 지향하게 되었다.

시민층의 발흥으로 이러한 지배층의 문학이념이 확대·평이화(平易化)하는 한편, 다른 면에서는 새로운 사상의 싹을 길러서 명 말기 양명학 좌파에 이르러 거의 봉건유교의 테두리를 무너뜨리려고 했다. 시문에서의 표현이었던 공안파·경릉파는 '성령설(聖靈說)'을 주창하여 개성을 중시하고, 의고파의 형식 모방을 공격하여 문단의 기풍 또한 일전(一轉)했으나, 전통의 테두리 그 자체에 도전하는 사상성은 폐기되고, 반속적(反俗的) 문인 취미를 지향하여 정점에 장대(張岱, 1597-1689) 등의 산문을 탄생시키는 데 그쳤다.

명말 청초는 이 신사상(新思想)의 여파와 애국 저항문학이 활기를 보이지만 청왕조의 탄압과 회유로 지식인은 체제의 테두리 안에서 농락당하고 시문은 다시 더욱 복고로 향하게 되었다.

즉 시는 전겸익(錢謙益)을 계승한 왕사정(王士禎, 1634-1711)이 '신운설(神韻說)'을 주창하여, 정치를 떠난 섬세한 정취(情趣)를 추구함으로써 청조 일대의 시풍을 개척했고, 중기에는 '온유돈후(溫柔敦厚)'를 주창한 심덕잠(沈德潛, 1673-1769)과 이에 대한 성령파의 원매(袁枚) 등이 출현했다. 문(文)은 명대에 신풍(新風)을 일으킨 당순지(唐順之), 귀유광(歸有光, 1506-1571)의 당·송파의 고문을 계승하여 청초에 위희(魏禧), 후방역(候方域, 1618-1654) 등이 나와서 동성파(桐城派)와 연결되었다. 변문(騈文)이나 사(詞)도 부활하여 한마디로 청대는 모든 전통문학의 화려한 부흥기를 맞으며, 동시에 가경(嘉慶) 이후는 그 최종적 붕괴와 더불어 서구 근대 세력에 대한 저항과 그것을 수용하는 근대문학 전사(前史)가 된다.

고계[편집]

高啓 (1336-1374)

자는 계적(季迪), 호는 청구자(靑邱子). 강남의 문화 중심지 쑤저우(蘇州)의 시민으로 지냈고, 장사성(張士誠)의 정권하에서 시재(詩才)로 이름을 날렸다. 장사성이 난징의 주원장(朱元璋=明太祖)에 패하여 쑤저우가 함락(1367)된 다음 난징에 초빙되어 <원사(元史)>의 편찬에 종사하였고, 이어 급속도로 인정을 받아 호부시랑(戶部侍郞)에 승진하나 갑자기 사직하고 귀향한다. 후에 태조의 위압정책에 희생되어 형사(刑死)한다. 나이는 39세였다.

그는 '명초 사걸(明初四傑)'의 첫째로 손꼽히며, 명대를 통틀어 최대의 시인으로 지목된다. 그의 시는 원대에 강남에서 출생한 시민문학의 정점이라 일컬어졌고, 이미 양유정 등에서 시작된 의고풍조(擬古風調)를 계승했으나, 후의 고문사파(古文辭派)처럼 그 모범을 성당에 한정하지 않고 한위육조당송(漢魏六朝唐宋)을 모두 취하였으며, 더욱 의고풍 속에 청신한 정취를 담고 풍부한 감성에 넘친다.

이반룡[편집]

李攀龍 (1514-1570)

중국 명대의 시인. 자는 우린(于鱗), 호는 창명(滄溟).

산둥(山東) 지난(濟南) 사람. 가정(嘉靖) 23년(1544)의 진사. 홍치(弘治)·정덕 연간(正德年間)의 이몽양(李夢陽, 1475-1531) 등의 '전칠자(前七子)'가 제창한 "문은 필히 진한(秦漢), 시는 필히 성당(盛唐)"을 모범으로 그 '격조'를 모방하라는 복고운동(고문사파)을 계승하여, '후칠자(後七子)'의 수령으로서 당시 절대적인 명망을 얻어, 의고주의의 절정기를 이룩하였다. 그가 편선(編選)했다고 하는 <당시선(唐詩選)>(사실은 僞託이라고 함)은 널리 읽혔다.

왕세정[편집]

王世貞 (1526-1590)

자는 원미(元美), 호는 봉주(鳳州), 또는 엄주산인.

가정 26년의 진사. 이반룡(李攀龍)과 함께 '후칠자(後七子)'의 중심인물이다. 특히 이반룡의 사후 그 뒤를 이어 문단의 맹주(盟主)가 되었고, 20년에 걸쳐 명망을 한몸에 모았다. 같은 고문사파의 의고주의자였으나 이반룡 등보다 폭이 넓고, 당송 고문(古文)이나 6조 시도 받아들였다. 특히 만년은 그 경향을 강화시켜 그와 대치했던 당송파의 귀유광(歸有光)의 문장도 칭찬하고 있는데 이것은 명말 문단 풍조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원굉도[편집]

袁宏道 (1568-1610)

중국 명말의 문인. 자는 중랑(中郞), 호는 석공(石公).

후베이(湖北) 공안(公安) 사람. 만력(萬曆) 20년(1592)의 진사. 형인 종도(宗道), 아우인 중도(中道)와 함께 공안파로 불린다. 명나라 중기부터 문단을 지배하고 있던 전·후 7자 등 복고파의 형식주의에 반해서, 언어문학은 시대와 함께 변화되어야 하며, 또한 문학에서는 무학(無學)인 부녀자나 어린아이의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마음의 발로야말로 숭고한 것이며, 의고파와 같이 고전의 자구(字句)를 표절, 형식만 옛사람을 닮은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성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령설'이라고 불리는 그의 문학론은 후세에까지 영향이 컸고, 이것은 그들 형제의 스승인 이탁오(李卓吾=양명학 좌파)의 반전통주의 사상의 문학상의 반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스승의 반체제적인 사상은 계승되지 않았고, 문인으로서의 취향이 강하고 시보다도 산문에서 청신하고 개성적인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 1930년대에 주작인(周作人) 등이 '소품문(小品文)' 운동을 일으켰을 때 이러한 면에서 재평가되었다.

종성[편집]

鍾惺 (1574-1624)

중국 명말의 문인. 자는 백경(伯敬), 호는 퇴곡(退谷).

후베이(湖北) 경릉(竟陵) 사람. 만력 38년(1610)의 진사. 공안파에 이어 고문사파 매도(罵倒)에 힘썼고 동향인 담원춘(譚元春)과 함께 '경릉파'라고 불리었다. 같이 '성령'을 주창했으나 그것을 보다 많이 고전 속에서 찾으며, 고인(古人)의 시선집 <시귀(詩歸)>를 엮어 그 가운데 이를 제시했다. 작풍은 공안파의 가벼움을 지양하고 심각한 표현을 기했는데, 현실과 유리된 난해·괴상한 자구를 나열한 형식주의에 빠졌다.

전겸익[편집]

錢謙益 (1582-1664)

중국 명말 청초의 시인. 자는 수지(受之), 호는 목재(牧齋).

장쑤(江蘇) 상숙(常熟) 사람. 만력 38년(1610)의 진사. 명의 멸망기에 복왕(福王)을 옹립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되었으며, 난징 함락 후, 재빨리 청조에 항복하여 지조(志操)를 더렵혔다. 두 왕조를 섬긴 그의 변절과 사행(私行)은 비난을 받으나 만년의 시문에는 청조의 기휘(忌諱)를 건드리는 말이 많아 건륭제(乾隆帝) 때 일체의 저서가 파기되었다. 그러나 명말에 이미 동림당(東林黨)의 명사로서 명성을 떨쳤고, 명말 청초의 수십 년간에 걸쳐 문단을 주재하여 그의 위망(威望)은 절대적이었으며, 전대의 고문사파와 경릉파를 무학(無學)이라고 단정하고 이를 철저히 비난하여 그 흐름을 단절시키고 청대의 새로운 시풍을 개척했다.

시에는 '본(本=내용)'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으로 공안파의 성령설을 계승하면서 다시 시에는 학문의 근저(根底)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인 것 같다. 그의 시는 송에 기울어져서 당에 근접한 오위업(吳偉業, 1609-1671)과 나란히 청초의 2대가로 불린다. <목재초학집(牧齋初學集)> 110권, <유학집(有學集)> 50권이 있다.

납란성덕[편집]

納蘭性德 (1654-1685)

중국 청초의 사인(詞人). 처음 이름은 성덕(成德), 자는 용약(容若)이다.

만주 귀족 출신. 22세에 진사가 되었으며 강희제(康熙帝)의 측근에 있으면서 재질을 사랑받던 귀공자였으나 31세에 병사했다. 사(詞=餘詩)는 청초 복고 풍조에 따라 다시 번성하여 그 당시 남송 완약파(南宋婉約派)의 주이존(朱彛尊, 1629-1709), 북송 호방파(北宋豪放派)의 진유송(陳維崧, 1626-1682)이 쌍벽을 이루었는데 그는 홀로 남당 이후주(李後主)의 양식을 계승하여, 기교에 흐르지 않는 섬세하고 슬픈 감상은 청대 최고의 사인으로 꼽힌다. <음수사(飮水詞)> 1권이 있다.

동성파[편집]

桐城派

청대 고문작가(古文作家)의 한 파(派).안후이성(安徽省) 동성 출신인 방포(方苞, 1668-1748)가 기초를 확립하고 그 계승자인 유대괴, 요내(1731-1815)가 같은 현 출신이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었다. 명말 청초의 당·송 팔가문(八家文) 유행의 뒤를 이어, 송학의 학통을 지키는 '도(道)'의 문학을 지향하여 문장의 '의법(義法)', 즉 내면적 이법(理法)과 외형적 법칙의 조화를 주장하고, 간결하고 실질적인 문장을 썼다.

유대괴는 방포를 사사하여 그의 의법(義法) 이론을 확대시켜 문장이 '신기(神氣)', 즉 정신을 주로 하고 기분은 신기를 돕는다고 주장, 문자의 음조도 중시했다. <고문사류찬(古文辭類簒)>의 편자인 요내는 유대괴에게서 배우고 온아중정(溫雅中正)한 의견과 작품으로써 동성파의 번영을 구축했다. 그는 한학파(漢學派)와의 절충을 시도했으며, 이러한 경향을 한층 추진시킨 것은 청말 문단·정계의 실력자인 증국번(曾國藩, 1811-1872)이었다. 그 체계에 정치와 경제를 첨가하고 경서(經書)도 문학으로 간주하는 등 종합학(綜合學)의 경향을 깊이하면서 구미사상과 구미 문학의 소개자인 엄복(嚴復), 임서를 배출하여 문학혁명과는 부정적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정섭[편집]

鄭燮 (1693-1765)

중국 청나라 중기의 문인·화가. 자는 극유(克柔), 호는 판교(板橋).

장쑤성 흥화(興化) 사람. 건륭시대의 진사로서 현지사가 되었으나, 사직 후 양주(揚州)에서 서화를 팔아 생활했다. 서(書)는 예(隸)·해(楷)·행(行) 3체를 다했고, 그림은 난죽(蘭竹)을 그려 유명하다. 시는 전통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개성을 발휘했다. 그의 작품으로 <판교집(板橋集)>이 있다.

부생육기(浮生六記)[편집]

(1877)

심복(沈復, 1763-? )의 자전적 소설. 그의 자는 삼백(三白)이며 1808년경에 씌여진 작품으로서 양인전(楊引傳)이 간행한 것이다. <규방기락(閨房記樂)> <한정기취(閑情記趣)> <감가기수> <낭유기쾌(浪遊記快)>

<중산기력(中山記歷)> <양생기도(養生記道)>의 독립된 6권으로 되었으나, 뒤의 2권은 없어지고 앞부분 4권만 현존한다. 대가족제도 속에서 고생하면서 남편에의 애정으로 일관한 죽은 아내에 대한 절절한 사모를 기조로 씌어졌으며, 지방관리의 비서를 지낸다든지 그림을 파는 빈궁한 생활을 하면서도, 속사(俗事)에 구애되지 않는 사나이의 성격이 가정생활 속에 부각되어 있다.

희곡[편집]

戱曲

중국의 희곡문학은 13세기 금(金)·원(元)시대에 갑자기 완성된 모습을 나타내는데, 그 역사적 모태(母胎)로서는 (1) 고대 제사(祭祀)의 공동체에서의 무술(巫術)적 무용, (2) 육조시대에 서역에서 북방 중국에 유입된 호악계(胡樂系) 무용, (3) 수당(隋唐)시대 이래 궁정에서 행하여진 골계대사극(滑稽臺詞劇=參軍戱) 등 선행(先行)의 여러 예능을 생각할 수가 있다. 당대 중기의 궁정에서는 이와 같은 여러 예능이 총합되어 '이원(梨園)'이라 칭하는 악극단체가 성립되었으며, 한편 각 지방 촌락에서는 '산악(散樂)'이라 불리는 편력(遍歷) 배우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 후 송대에 이르러 도시경제의 번영은 '이원'의 하부조직인 기원(妓院)의 여러 예능(속곡·무용)의 세련화와 환락가의 서민 예능(소설·야담·창곡)의 다양화를 가져옴과 동시에, 각 지방 진시(鎭市)의 발달을 통해서 지방 촌락의 제례 예능의 융성도 초래하며, 그것들의 상호교류에 의해서 북송 및 남송조에서는 '잡극(雜劇)' 금(金)조에서는 '원본(院本)'이라 칭하는 대사(臺詞)·무용 혼성의 소악극(小樂劇)이 성립되었다.

이와 같은 연극 형성에의 태동은 원(元)조에 들어와서 더욱 고양(高揚)되고, 특히 이 시기에 문인의 신분으로서 극작에 붓을 든 관한경(關漢卿), 마치원(馬致遠, 13세기 후반), 백박(白樸, 1226-?), 왕실보(王實甫, 생몰년 미상) 등의 대극작가의 노력에 의해서 종래의 원본·잡극과는 전혀 다른, 정연한 형식과 문학적 향기가 넘치는 희곡 작품들이 연이어 탄생하게 되었다.

보통 '원곡(元曲)'이라고 총칭되는 이와 같은 신연극(新演劇)은 10곡 내외의 소가곡(小歌曲)을 배열한 단위장면('折'이라고 칭하며 '幕'에 해당)을 네 개 연결한, 말하자면 4막의 가극으로서 등장인물은 주역(主役)·조연·악인·광대역 등 4-5명에 한정되었고, 대사도 극히 간단하며, 주역 한 사람이 전막(全幕) 40여 곡을 독창하는 것으로써 극정(劇情)의 전개가 유지되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원래는 산시(山西)·산시(陜西)·허베이(河北) 방면의 지방 촌락극이 대도(大都=베이징)에 유입, 도시 예능과 혼합되면서 집성된 것으로 생각되는, 현악(弦樂=거문고)을 주로 하는 음악은 북방 특유의 우수(憂愁)를 담아서 비장·웅건하고, 호방하다고 평해졌다. 관한경 등에 의해 비롯된 문체는 비창(悲愴)·화려하여, 원나라 일대에 걸쳐서 북방뿐만 아니라 남방 극계(劇界)에도 유행했다.

한편 여기에 대해서 장쑤(江蘇), 저장(浙江) 등의 강남지방에서는 남송(南宋) 이래, 박판(拍板)의 반주와 등장배역 전원의 자유로운 가창을 기본으로 하여, 몇 번이라도 장면을 중복시킬 수 있는 희문(戱文=또는 南戱)이라고 불렸던 장편 가극이 토착적으로 뿌리를 박고 있으며, 원대에는 한때 북방의 원곡(元曲=北曲 또는 雜劇)에 밀리면서도 세력을 유지하면서, 특히 원말 명초는 남희의 명작 <비파기(琵琶記)>의 출현을 계기로 부흥의 징조를 보였다. 그러나 전반기 명의 문단에서는 여전히 북극 애호의 풍조가 강하여, 이 동안에 주헌왕(周憲王), 서문장(徐文長) 등의 저명한 북극작가를 배출했으며, 명대 후반, 중국의 경제문화의 중심이 차츰 강남 삼각주(三角洲) 지대로 옮겨짐에 따라서 남희계 연극(南戱系演劇=남곡)의 세력이 확대되었다. 특히 가정(嘉靖) 연간, 남곡의 여러 유파들 가운데서 천재 위양보(魏良輔)가 창시한 곤곡파(崑曲派)가 남방 극계에 진출함으로써 북극파는 급속히 그 자리를 남곡에 넘기게 되었다.

이 시기의 남곡 희곡(傳奇)의 여러 작가는 송·원 남희의 전통에 입각하여, 30-40장에 달하는 장편 형식에 상투적인 재자(才子)·가인(佳人) 전기의 줄거리를 엮으면서, 문체의 조탁에 고심하여 문학적 완성을 지향한 것이 많고, 또한 그 일부에는 명대 특유의 개성 해방의 주장을 내포한 것도 볼 수 있다. 명말 청초에 걸쳐서 배출된 탕현조(湯顯祖), 공상임(孔尙任, 1648-1718), 홍승(洪昇, 1645-1704) 등의 대극작가는 모두 곤곡(崑曲)의 감미로운 음곡에 어울리는 화려한 문체로써 독자적인 사회적 주제를 추구한, 스케일이 큰 장편 희곡을 완성하여, 그 영향을 지방극을 주축으로 전개된 청대 후기의 극계(경극을 포함)에까지 미치고 있다.

관한경[편집]

關漢卿 (1210 ?-1280 ?)

중국 원대(元代) 초기의 극작가. 호는 이재(已齋) 또는 일재(一齋). 기주(祁州) 임인촌(任仁村=허베이성 안구현)에 태어나, 금(金)말 원(元)초 대의원윤(大醫院尹)을 지내고 대도에서 생활했으며, 장년에 관료생활을 떠난 다음은 아마도 유리기원(遊里妓院)에 몸을 던져 오로지 속곡(俗曲)·희곡의 제작에 몰두한 것 같다. 죽은 해는 미상이다. 극작은 명작 <두아원(竇娥寃)>을 비롯 60곡 이상에 달하며, 대도를 중심으로 활약한 초기의 잡극작가 그룹의 지도적인 실력자였다.

당시 원조 정권 아래서 관도(官途)을 잃은 중국인 지식층 사이에는 현실 불만의 기운이 충만되어 있었고, 그와 같은 사태를 배경으로 하여 시정(市井)에 묻혀 민간연극 운동에 몰두한 관한경의 원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안목은 극히 예리하다. 그의 작품은, 예컨대 원죄(寃罪)를 짊어진 채 형사(刑死)하는 과부의 비참을 노래한 <두아원(竇娥寃)>, 악역무도한 불량배 노재랑(魯齋郞)에게 가정의 행복을 짓밟히고 분사(憤死)하는 소시민의 원한을 생생하게 묘사한 <노재랑>, 기녀의 박명에 무한한 동정을 담은 <구풍진(救風塵)> <사천향(謝天香)> 등 대부분 원대 사회의 하층 빈곤층, 특히 최대의 희생자였던 여성의 숙명적 고뇌에 시점을 두고, 당시의 세태(世態=佃戶制 확립을 위해 지주세력이 폭력으로 억압하던 시기)의 암흑의 비참한 측면을 결척(抉剔)하려는 기백에 넘치고 있다. 문체는 실연(實演) 위주(본색파라고 칭함)로서, 백화(白話) 속어를 구사하여, 호방(豪放)·비장한 풍격을 담았고, 오랫동안 후속 작가들의 모범으로서 추앙받았다.

두아원(竇娥寃)[편집]

관한경의 희곡.불량배 장여아(張驪兒)는 남편과 사별한 과부 두아에게 재혼을 강요하다 거절당하자, 야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두아의 양모를 독살하려고 하다가 잘못하여 자기 부친을 독살하는데, 우연히 모르고 독약을 운반한 두아에게 죄를 전가하여 두아는 원죄를 쓴 채 끝내 형사(刑死)당한다. 제4막의, 형장으로 끌려가는 두아의 통곡 장면은 비장·격렬, 작자의 암흑사회에 대한 비판을 나타낸 작품으로서 명성이 높다.

서상기(西廂記)[편집]

원대의 희곡. 왕실보(王實甫=생몰년 미상)의 작품이다.

당(唐)대의 전기(傳奇)인 <회진기(會眞記=앵앵전)>를 소재로 한 금대 제궁조(諸宮調)인 <동서상(董西廂)>의 줄거리를 희곡화한 것. 통상의 4막극을 다섯 편 겹친 파격적인 장편으로서, 제5본은 관한경의 보작(補作)으로 전해진다.

재사(才士) 장생(張生=君瑞)은 산시(山西)의 한 명찰(名刹)에서 죽은 재상의 딸 최앵앵에게 반하여, 갖은 곡절 끝에 앵앵의 시녀 홍랑(紅娘)의 꾀로 하룻밤 겨우 서상(西廂) 밑에서 만날 수가 있었으나, 심창(深窓)의 긍지를 못벗은 앵앵의 강한 거절을 당하여 낙담 끝에 자리에 눕는다. 한편 사나이의 병에 앵앵도 마음이 아파 번민 끝에 드디어 스스로 장생에게 달려가서 두 사람은 깊이 맺어진다. 그 후 앵앵의 모친의 방해로 별리의 비애를 맛보지만, 최후에 장생의 과거(科擧) 급제로 대단원이 된다.

장생의 한결같은 애정, 예교(禮敎)와 사랑의 갈림길에서 번민하면서도 차츰 인간의 진정에 눈뜨는 앵앵의 심리 등이 긴밀한 구성과 수많은 감상적 비절(悲切)의 명문 속에서 전개되어, 원곡(元曲)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認定)받고 있다.

한궁추(漢宮秋)[편집]

원대의 희곡. 마치원(馬致遠=3세기 후반) 작. 호는 동리(東籬).

한나라 왕소군(王昭君)의 고사를 소재로 한 비극으로서 작자는 원곡작가 중 굴지의 문채파(文彩派)이다. 특히 본곡 중 막북(漠北=외몽고) 땅으로 강제로 시집가는 왕소군을 향한 원제(元帝)의 절절한 애석의 정을 엮은 제3절과 한궁(漢宮)의 상공을 배회하는 외기러기 소리에 왕소군을 그리워하며 홀로 체읍(啼泣)하는 제4절은 원곡의 대표적 명문으로서 정평이 있다. 본곡에 흐르는 통절한 감정은 당시 원조 지배하에 있던 한민족의 비애를 반영시킨 것이라고 하겠다.

오동우(悟桐雨)[편집]

원대의 희곡. 백박(白樸, 1226-? ) 작.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고사를 극화한 것. 특히 제4절 후반, 양귀비를 잃고 홀로 촉(蜀)의 행궁에 우거(寓居)하는 현종이 어느 가을밤 오동나무에 떨어지는 가을비 소리에 귀비를 그리워하여, 깊은 우수에 잠기는 장면의 비창·전려(典麗)한 문체(文體)는 비장미(悲壯美)의 표출(表出)에 뛰어난 초기 원곡의 한 극치를 보인 작품이다.

원곡선(元曲選)[편집]

(1616)

원곡의 선집. 선자는 명대 극작가 장진숙(臟晋叔)이다.

명대 중엽, 북곡(北曲) 쇠미의 과정에서 원곡선집의 편찬이 극작가 사이에 유행했는데, 내부본(內府本)을 기초로 강남의 유포본(流布本)을 참조하여 만들어진 이 선집은, 100종에 달하는 많은 원곡을 수록하여 가장 완성된 형태로 이루어졌고, 특히 대사 부분의 정리가 훌륭하여 열독(閱讀)에 편리했기 때문에 다른 선집을 압도하고 유포되었다. 일부 가사 중 고본(古本)에 충실치 못한 흠은 있으나, 현존 원곡 130종 가운데 1집으로서 100종에 달하는 중요작품을 후세에 전한 공적은 극히 크다.

비파기(琵琶記)[편집]

명대의 희곡. 작자는 고명(高明, 1305-1380). 원말 명초의 부흥기 남희(南戱)의 대표작으로서 전(全) 42척으로 구성되어 있다.

채백해(蔡白偕)의 아내 조오랑(趙五娘)은 신혼 2개월에 과거 보러 가는 남편과 작별하고 홀로 고향 진류(陳留)에서 시부모를 모시던 중 대기근을 만나, 자신은 겨를 핥으면서 시부모에 효성을 다했으나, 그들이 연이어 죽자 할 수 없이 비파를 등에 메고 노래를 불러 걸식하는 신세가 되고 서울로 올라가서 남편을 찾는다. 한편 이미 과거에 급제하여 재상의 사위가 되어 영화로운 생활을 보내고 있던 백해와 서울 거리에서 해후한 두 사람은, 재상 딸의 겸양(謙讓)한 주선으로 대단원이 된다.

소재(素材)는 송·원 남희에서 전래된 것으로, 도시 생활에 젖은 백해의 영화와 기근을 당해 고향에서 고투하는 오랑의 비참을 번갈아 대조시켜 남희의 독특한 장편 구성의 묘를 발휘하였고, 또한 전려(典麗)한 문체도 뛰어나서 이후 남곡의 부흥을 이끌었다고 한다. 또한 심각·비참한 기근의 장면에서 작자의 사회비판적 안목을 인정하려는 견해가 유력하다.

주헌왕[편집]

周憲王 (1379-1439)

중국 명대 초기의 극작가. 명태조의 손자이며, 본명은 주유돈(朱有燉), 호는 성제(誠齊)이다. 명초 북방의 여러 왕실(王室)은 배우를 고용하여 북극 유행의 거점이 되고 있었는데, 주헌왕은 영헌왕(寧獻王) 주권(朱權)과 더불어 최대의 연극 후원자 겸 극작가였다. 신선담(神仙譚)을 주축으로 하는 31종에 이르는 작품은 원나라 잡극의 의고체(擬古體)에 불과하고 생기가 없으나, 그때까지의 주역인 독창 이외에 조연진(助演陣)의 합창·윤창(輪唱)을 도입하는 등 연출 기술의 진보에 기여한 공은 매우 크다.

사성원(四聲猿)[편집]

명대 중기의 희곡. 작자는 서위(徐渭, 1521-1593), 자는 문장(文長).

전(全) 10척 가운데 <광고사(狂鼓史)>, <옥선사(玉禪師)>, <자목란(雌木蘭)>, <여장원(女壯元)>의 네 가지의 이야기를 구성한 남북 혼합의 단극(短劇)이다. 명대 초기 이래 남·북곡의 경쟁과정에서 이와 같은 혼혈적(混血的) 형식의 단극이 생긴 것인데, 본곡은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수작(秀作)이다. 고대부터 전해지는 네 개의 기발한 이야기를 빌어서 작자의 세상에 대한 울분을 토로한 이 비통·고고(孤高)한 풍격은 명대 문인 사이에서 인기를 떨쳤다.

탕현조[편집]

湯顯祖 (1550-1617)

중국 명대 후기의 극작가. 호는 옥명(玉茗).

장시(江西) 임천(臨川)에서 태어나 33세에 진사에 급제. 난징의 태상박사(太常博士)·예부주사(禮部主事)를 역임했으나 재상을 탄핵(彈劾)하여 좌천되고, 48세 때 관을 물러난 그는 자적함 가운데서 세상을 마쳤다. 30세경부터 극작을 시작. <자채기(荊釵記)> <환혼기(還魂記)> <남가기(南柯記)> <한단기(邯鄲記)> 등, 세간에서 '옥명당사몽(玉茗堂四夢)'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여러 작품은 염려(艶麗)·농후한 관능적 향기에 넘쳐, 명대 남곡(崑曲) 전기(傳奇)의 대표작으로서 일세를 풍미했다.

일반적으로 명대 극작가는 권력 밖에서 고투한 원대 잡극가와는 달리, 관계에서 뜻을 이룬 현관(顯官)이나, 왕족의 여기적(餘技的) 교양에서 나온 것으로, 그 내용은 황당한 신선담, 풍류 문인의 유락 일사(遊樂逸事), 또는 상투적인 재자 가인(才子佳人) 전기 등 문인 취미의 격식 속에 박혀서 사회를 보는 눈이 예리하지 못하고 생기를 결하고 있다.

그러나 가정(嘉靖) ― 만력(萬曆)에서 명말에 걸쳐, 중국의 봉건사회가 새로운 단계(이른바 '자본주의'의 맹아기)에 들어서는 시기에 강남(江南) 극계에 등장하여, 계통적으로도 태주학(泰州學)파나 동림당(東林黨) 등, 당시 진보적 문인 그룹과 유대가 깊었던 탕현조의 희곡 작품에는 그 때까지의 재자 가인 전기의 한계를 넘어 개성(個性) 해방, 봉건제 비판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와 대결한 면도 엿보인다. 그 점은 특히 그의 대표작

<모란정 환혼기>에 가장 집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모란정 환혼기(牡丹亭還魂記)[편집]

(1598)

탕현조의 희곡.명나라 남안태수(南安太守)의 딸 두여랑(杜麗娘)은 늦은 봄 어느날, 심창(深窓) 근처의 꽃밭에서 백화 난만하고 농후 감미한 춘경에 접하자, 회춘(懷春)의 정에 못이겨 아직 짝없는 신세를 장탄식하면서 저도 모르게 조는 가운데, 버들가지를 가진 한 서생과 만나 깊은 정을 나누는 순간 꿈에서 깨어난다. 다음날 다시 꽃밭으로 꿈을 본 장소를 찾아간 여랑은 모란정 기슭 한구석에

꿈에서 본 서생의 모습을 닮은 큰 매화나무를 발견하고 통곡한다. 그녀는 이후 몽유병자가 되어 끝내 고민하다 죽었고, 유언에 따라 매화나무 밑에 묻혔다.

한편, 광둥(廣東)의 서생 유몽매(柳夢梅)는 서울인 임안(臨安)으로 과거 보러 가는 길에 병을 얻어 남안에 머무르는 중에, 꿈에 나타난 여랑의 부탁을 받아 묘를 파보니 산 사람과 같은 여랑이 나타나서, 두 사람은 부부가 되어 서울로 향한다. 이후 여랑 부모의 방해로 고민하나, 서생의 과거 합격으로써 모든 것이 해결된다. 봉건 예교(禮敎)를 뛰어넘어서 죽음으로써 살려고 한 여랑의 연애는 같은 봉건적 질곡(桎梏)에 시달리고 있던 당시의 여성층에게 개성 해방의 문제를 환기시켜서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곡의 조탁(彫琢)을 극한 감미로운 표현기교와 몽환적(夢幻的)·낭만적 세계는 명대 희곡사의 새로운 면을 개척한 것으로서, 이후의 명·청 극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장생전(長生殿)[편집]

(1688)

청대 초기의 희곡. 홍승(洪昇,1645-1704)의 작.

현종과 양귀비의 고사에서 취재한 50척의 장편 곤곡전기(崑曲傳奇)이다. 그때까지 이 이야기에 부착되어 왔던 양귀비와 안녹산(安祿山)의 사통(私通) 관계를 줄거리에서 삭제하고, 전적으로 현종과 양귀비의 진지한 정사(情事)만을 재구성하고 있는 점에, 탕현조(湯顯祖)와 마찬가지로 "봉건제하에서의 인간의 문제"를 추구하려고 한 작자의 의도를 평가할 수 있다. 당대 압제 아래 고생하는 인민의 고뇌를 묘사한 장면에도 박력이 있으며, 이 작품을 일관하는 작자의 사회적 관심은 넓고 또한 강렬하였다.

음악이나 연출 면에서도 명대 이래 곤곡의 여러 성과를 집대성하여, 완성의 극치를 보였고, 청결·고아(高雅)한 비극적 풍경에 청초의 긴박한 시대상을 투영(投影)한 남북 극계에 대유행을 초래했다.

도화선(桃花扇)[편집]

(1699)

공상임(孔尙任, 1648-1718)의 희곡이다.

<장생전>과 비견되는 청초 곤곡의 명작. 복사(復社)의 문인 후조종(侯朝宗=方城)과 기녀인 이향군(李香君)의 비극적 연애를 중심으로, 명나라 망국 때의 강남 정계의 혼란을 생생하게 묘사한 장편 사극(史劇)이다.

제23척. 완대침(阮大鍼) 일파의 탄압으로 후조종이 망명할 때 간신 전앙(田仰)에게 납치당하게 된 이향군이 애인 후조종으로부터 선물받은 궁선(宮扇)으로 저항, 기절하고 이마를 깨어 선혈이 낭자하게 궁선에 뿌려진 것을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양문창이 핏자국을 따라서 도화(桃花)의 그림을 그렸다는 비통한 장면을 비롯해, 전편에 명조 망국에 대한 통한(痛恨)이 맥맥히 흘러, 청초의 극장에서 이를 듣는 유로(遺老)들은 암연히 체읍(啼泣)했다고 한다. 구성은 긴밀, 문체는 화려하며, 소설사상의 <홍루몽(紅樓夢)>에 비길 만한 청대 문학의 걸작이다.

육십종곡(六十種曲)[편집]

(1630-1640)

명 남곡 전기선집. 선자는 명말의 장서가 모진(毛晋)이다.

그의 서실(書室)인 급고각(汲古閣)에 전해지던 명인(明人) 전기(傳奇) 59종과 원인 잡극(元人雜劇)인 <서상기> 1종의 60종을 수록하고 있다. 현존 명대 전기선집 중 최대의 규모로서, <비파기> <환혼기> 이하의 중요 작품을 선본(善本)에 의해서 오늘에 전한 공적은 극히 크다.

소설[편집]

小說

당대 변문(變文)의 뒤를 이어 북송(北宋)의 서울 변경(지금의 카이펑, 開封), 남송의 서울 임안(臨安=지금의 항저우, 杭州)의 와시(瓦市)라고 불리는 환락가에서 서민 상대의 창극으로서 발달된 소설의, 원(元)대의 상황은 오늘날 알 수가 없으나 남송 말기에서 원초에 걸쳐 출판된 <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經詩話)> <대송선화유사(大宋宣和遺事)> <오대사평화(五代史平話)> 등 외에 <전상평화(全相平話)>(<武王伐紂平話> 등)의 5종이 현존하고 '전상'의 이름 그대로 매장마다 그림이 삽입된 것으로 보아 눈으로 보는 책으로서 유행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설화인(說話人)의 이야기 책(화본)이 본격적인 서적으로서 갖추어진 것은 명의 가정 연간 이후이다. 이것은 인쇄술이 발달한 시기이기도 하며, 독서 인구가 종래의 지배층으로부터 상인(商人)으로 확대되고 비약적으로 증대했다는 것과 대응된다. 여기서 하층 관료나 시정의 지식인이 화본이나 희곡의 줄거리를 대성시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등을 완성하였고, 또한 호사가(好事家)가 장서하고 있는 화본을 간행(<淸平山堂話本> 등)하여 구어(口語) 소설의 전성기를 맞았다.

자신들의 표현수단을 가진 민중문학은 만력 연간 이후에는 <금병매사화(金甁梅詞話)> <이박(二拍)> 등의 창작이 첨가되고 시대를 반영시킨 작품을 낳았다. 그것은 끊임없는 욕망의 충족과 인간긍정을 표출시키려는 시도로 보였으므로 지배계급측에서 유교적 윤리체계의 붕괴가 예견되고, 유가적 위기의식에 의해서 금서(禁書)로 날인되어 탄압을 받았다. 여기서 오륜(五倫)을 이야기로 꾸미는 방향과 도학(道學) 냄새가 나지 않는 기발한 제재(題材) 선택의 방향을 취해, 시대에 대한 비판이나 민중의 모럴을 구성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 작품이 속출했다. 청대가 되자, 송에 시대를 설정하여 이민족 지배에 저항을 나타내는 경향도 다소 나타냈으나, 주류를 점한 것은 상층계급 출신 작가의 작품이다.

명(明)의 작가들로는 하층관료 이외는 출판사 주인, 가숙(家塾)의 교사들이 알려져 있다. 그들은 하류계급이었으므로 잃는 것도 적었으나, 명가 출신인들은 사회적 지위에서의 부침(浮沈)을 직접 체험하고 있어, '승관발재(昇官發財)'(출세를 하고 부자가 된다) 따위의 서민의 원망(願望)의 허무함과 화려한 지위의 그늘에 있는 위선(僞善)의 속임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체험을 통해서 그것들을 폭로하든지 아니면 전혀 무연(無緣)의 경지를 지향하여 유흥의 문학에 몸을 맡기려 했다. <홍루몽(紅樓夢)> <유림외사(儒林外史)>는 전자이며, 일상용어가 지니고 있는 생생한 표현은 뒷전에 숨었으나, 문장력은 뛰어나서 읽는 책으로서의 예술적 완성에 접근하게 되었다(문학혁명의 제창자 후스가 이상적 문체라고 한 것도 수긍된다). <아녀 영웅전(兒女英雄傳)> <각세명언(覺世名言=12루> 등은 후자이며, 요컨대 재자(才子)와 가인(佳人)이 여러 장해를 뛰어넘어 결합된다는 이야기의 구성에 역점을 두었다고 하겠다.

한편, 문어소설에서 '지괴(志怪)' '전기(傳奇)'의 계통을 부활시킨 것으로는 명의 <전등신화(剪燈新話)>가 있다. 구어소설에 대한 불만에서 문재(文才)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되지만 '괴력난신(怪力亂神)'(공자가 말한 것을 비난했다)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평판이 떨어졌고, 그 유행의 뒤를 이어 이정(李禎)의 <전등여화(剪燈餘話)>, 소경담(邵景詹)의 <멱등인화(覓燈因話)>의 작품을 낳았으나 금서가 되었다. 청에 이르러 <요재지이(聊齋志異)>가 그 속작(續作)이라고 하겠는데, 명말 청초의 동란기에 성인이 된 체험이 정치기구에 대한 비판의 논을 갖게 한 것 같다.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불만과 빈번한 사상·언론에 대한 탄압 속에서 여우(狐)를 빌어 풍자하고 있다.

작가층이 사인(士人)계급으로 옮겨지자 계급이 갖는 사명감이 민중교화의 방향과 정치비판의 방향으로 옮겨졌다. 예술적 세련과 동시에 민중의 심정에서 떠나, 소설을 이상사회 실현의 수단에 이용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것이 청말에 나타난 정치소설로서 정치비판, 관료기구의 비판과 그 실태의 폭로라는 방향으로 향했고, 문학 자체의 가치 추구는 문학혁명의 과제가 되었다.

전등신화(剪燈新話)[편집]

(1378-? )

본래 <전등록(剪燈錄)>이라고 한 40권의 괴이(怪異)소설집.

작자는 명나라의 구우(瞿佑, 1341-1427), 자는 종길(宗吉), 호는 존재(存齋). 저장성(浙江省) 전당(錢塘) 사람으로서 시인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21편을 수록하고 있으며, 문어체 소설로서는 유일한, 최우수작품이라 할 만하다. 속편으로서 이정(李禎)의 <전등여화(剪燈餘話)> 소경담(邵景詹)의 <멱등인화(覓燈因話)>가 있으며, 또한 당시 유행한 구어소설이나 극으로 개작되었다.

요재지이(聊齋志異)[편집]

16권. 작자는 포송령(蒲松齡, 1640-1715). 자는 유선(留仙), 호는 유천(柳泉)으로 유재는 서재(書齋) 이름이다. 산둥성(山東省) 치천(淡川) 사람이다.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불우했으나, 박식하고 문재가 있어 1679년을 중심으로 오랜 시일에 걸쳐 집필, 1766년 조기고 등에 의해서 간행되었다. 문장은 당의 전기풍(傳奇風)의 것과 육조(六朝)의 지괴체의 것이 있는데 특질은 전자에 있으며, 고귀(孤鬼) 망령이 인간보다도 더 인간미가 있게 그려져 시정이 넘치고 있다. 문장 마지막 부분 평어(評語)는 훈계나 숙명론을 기술한 것이 많으며, 때로는 격한 분노를 보여 가공의 세계를 빌어 사회비판을 했다. 여담은(呂湛恩)의 주석 이래 각종 평주본(評註本)이 간행되어 유행을 촉진시켰다.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편집]

작자는 청(淸)의 기윤(1724-1805). 자는 효람(曉嵐)으로 허베이(河北) 헌현(獻縣) 사람.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에 종사하였고, 관직은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올랐다. 시호는 문달(文達).

1789년부터 1798년에 걸쳐 씌어진 <난양소하록> 6권, <여시아문(如是我聞)> 4권, <괴서잡지(槐西雜志)> 4권, <고망청지(姑妄聽之)> 4권, <난양속록> 6권의 5집을 1800년에 성시언(盛時彦)이 합편하여 <열미초당필기>라고 이름붙였다. 문장은 간결한 육조의 지괴체를 따랐고, 고귀(孤鬼)의 말을 빌어, 비인간적인 송유(宋儒)의 인간관을 풍자한 괴이소설집. 문말의 평어가 적절하여 저자의 식견을 엿볼 수 있다.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편집]

중국 명대의 장편소설. 나관중(羅貫中) 작.

후한말(後漢末) 천하는 난세가 되어 위·오·촉 삼국이 패권을 다투어 드디어 천하는 위(魏)로 돌아갔으나 그것도 잠시였고, 위는 진(晋)에게 빼앗긴 바 되어 여기서 삼국 정립(鼎立)의 시대는 끝난다. 이 기간인 대략 60년 동안의 파란을 허와 실을 섞어서 소설로 엮어 나간다. 연의란 내용을 부연(敷衍)한다는 뜻으로서, 부연되는 <삼국지>는 진(晋)의 진수(陳壽)의 손으로 된 정사(正史)이므로 연의의 공은 나관중이라는 원말 명초의 소설가 한사람에 돌아갈 성질의 것은 아니다.

삼국의 이야기는 이미 당대의 문헌에 강석(講釋)의 자취를 볼 수 있고, 송대 도시의 환락가를 번창하게 한 서민연예에는 <설삼분(說三分)>이라 불리는 삼국지 이야기가 있었다. 그 강담(講談)의 대본에서 나온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 3권이 현존하고 있으며, 이것은 원의 지야(至冶) 연간(1321-1323)의 간본이다. 나관중의 <통속연의>는 '평화' 계통의 속설을 집대성함과 동시에 다시 정사와 그 주(註)에 보존된 여러 기록을 참조하여 장편 역사소설의 선구를 이룩했다. 현재 돌아다니는 120회본은 청의 강희(康熙) 연간에 모종강(毛宗崗)이 수정을 가한 것이다.

소설에서의 촉한(蜀漢)을 편드는 것은 송유의 정통론을 거친 탓이겠으나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의 의형제에, 지모(智謀)의 제갈공명(諸葛孔明)이 보필하는 촉세(蜀勢)의 비극적 선전(善戰)은 과연 소설다운 구상이라 하겠다.

수호전(水滸傳)[편집]

중국 명대의 장편소설, 시내암(施耐庵) 작. 북송(北宋) 말인 선화(宣和) 연간, 송강(宋江) 이하 108명의 호걸들로 회집된 군도(群盜)가 산둥의 양산박(梁山泊)을 근거지로 관(官)과 맞서는 이야기. 108명의 전력(前歷)은 하급관리·무관·시골 학자·농어민·상인·도박꾼·도둑 등 다채롭기 짝이 없고, 이들이 각각 정정당당한, 또는 불령(不逞)한 여러 가지 죄상 때문에 속속 양산박에 흘러들어온 경위가 전반이며, 후반은 양산박을 진압 못한 조정의 귀순책에 속아서 관군(官軍)으로 둔갑, 북방의 요(遼)를 치고, 다시 강남의 방랍(方臘)의 난을 평정하다가 전사·이산되고 그 중 남은 거물들은 간신에게 독살당하는 비극으로 끝난다.

송강의 난은 역사상의 사실이며, <송사(宋史)> 등 기타에 약간의 기록이 있으나 전설화되어 남송·원의 2대를 통해서 강담이나 연극의 재료가 되었다. 그 단계를 볼 수 있는 사료나 작품이 얼마간 전해지는데 그 중에서 <대송선화유사(大宋宣和遺事)> 전후 2집이 가장 주목할 만하다. 강석(講釋) 대본식의 전기적(前期的) 역사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북송 멸망 전후의 애사(哀史)를 엮은 속에 '송강 36인'의 모반의 전말(顚末)이 이미 한 편의 결말을 예상할 수 있는 형태로 삽입되어 있다.

이와 같은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명(明) 초에(1400년 전후), 시내암(傳不詳)의 손으로 독본소설로 꾸며져서(또는 그의 門人 나관중과의 합작이라고도 전함), 처음에는 사본으로 유포되었다고 생각되나 다시 정리되어 가정 연간(1522-1566)에 <충의수호전(忠義水滸傳)> 100회의 간행을 보았다.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만력(萬曆=1573-1619)에 걸쳐서는 장편소설의 황금시대로서 어느 것이나 송(宋)·원(元) 이래의 민중연예의 정화를 전제로 하는 만큼, 풍부한 오락성과 동시에 정통문학인 시문(詩文)에 담지 못했던 왕성한 상상이나 적나라한 인간 관찰이 충만되어 있다.

작자는 대부분 무명의 하급 문인으로서, 전대의 연예장(演藝場) 고용작가의 의식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수호'는 그러하여 어조의 강석 기분은 아주 농후하고 쾌조(快調)하다. 이 시기의 걸작인 <삼국지> <수호전> <서유기(西遊記)> <금병매사화(金甁梅詞話)>는 모두가 세계적 소설 유산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데 족한 것으로서, 후세에 이것을 4대기서(四大奇書)라고 부르게 되었다.

<수호전>이 후세에 끼친 영향은 무수한 무협소설의 원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소설 그 자체의 규범이 된 느낌이 있고, 나아가서 소설의 울타리를 넘어 <삼국지>와 함께 서민의 역사 지식과 인간학의 보고(寶庫)이기도 했다. 또한 역대의 도둑·모반인은 다투어 양산박 건아(建兒)와 같은 별명을 자칭하였고, 관은 관대로 '도둑을 가르치는' 책이라 하여 연이어 압박을 가했다. 따라서 혁명 후의 성망(聲望)은 반대로 극히 높은데, 주제인 반관(反官) 정신은 원래 회도(誨盜)라든지 혁명으로만 부를 수 없는 통쾌한 불령감(不逞感)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100회본 후에 풍부한 운문을 삭제하고 후반의 줄거리를 늘린 120회본이 나왔으나, 문체를 더욱 철저히 산문화시키고 전반의 양산박 세력이 모이는 데까지에서 끊어 버린 김성탄(金聖歎)의 70회본이 여러 책을 압도했다.

서유기(西遊記)[편집]

중국 명대의 장편소설. 전 100회. 오승은(吳承恩, 1500 ?-1582 ?)의 작품.

삼장법사(三藏法師)가 천축(天竺)으로 가는 길을 답파하여 중국에 경전을 구하여 온다는 이야기의 골자는 당의 고승인 현장(600-664)의 역사적 장거 실록으로 현장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혜립(慧立)의 <대자은사 삼장법사전(大慈恩寺三藏法師傳)> 등에 따른 것으로, 소설의 대부분(제13-100회)은 요마(妖魔)에서 발을 씻은 손오공(孫悟空), 저오능(猪悟能), 사오정(沙悟淨)의 세 제자가 연달아 나타나고 기상천외의 요마들과 갖가지 싸움을 벌이는 '81난(難)'의 이야기이다.

토속의 환담(幻談)에 문인의 각색이 첨가되어 공상세계가 크게 팽창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태 인정을 파헤치고 정치의 비판에까지 이르는 성숙된 인간학이 담겨져 있다. 한편, 서두 부분(제1-9회)은 오공의 전신인 제천대성(齊天大聖)이 천계(天界)를 대혼란에 빠뜨리는 통쾌한 이야기로서 여래(如來)의 법력(法力)에 의한 조복(調伏)에서부터 서천취경(西天取經)으로 연결되는데, 제천대성이라는 요원(妖猿)에 대해서는, 인도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 원장 오공(猿將悟空)과 별개의 전승(傳承)을 외국의 소설이나 설화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이 소설에도 그 긴 형성사(形成史)를 증명할 자료가 몇 가지 남아 있으며, 가장 주목할 것으로 <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經詩話)> 3권이 있다. 남송의 간본(刊本)으로 추정되며, 매우 간략한 행문(行文)이면서도 백의수재(白衣秀才) 모습의 '후(=원숭이) 행자(行者)'가 삼장법사를 도와 신통력(神通力)을 발휘하는 이야기를 17회에 걸쳐서 엮고 있다. 그 후 명초 양경현(楊景賢)의 희곡 <서유기>에 이르러 소설의 줄거리는 이미 대강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전후에 신선과 요마가 싸우는 연극이 유행하고 있는 것은 유(儒)·불(佛)·선(仙)의 '삼교합일(三敎合一)'이라고 하는 통속 신학의 침투와 깊은 관계가 있으며, 소설 <서유기>의 완성도 그 풍조에 따른 것으로서, <봉신연의(封神演義)>나 <평요전(平妖傳)>을 포함한 이 계열을 루쉰(魯迅) 이후 신마(神魔) 소설이라고 부르고 있다.

오승은은 회안(淮安) 사람으로서 그의 시문집도 남아 있으며, 서유기 작가라는 증거가 충분한 것은 아니다.

금병매사화(金甁梅詞話)[편집]

중국 명대의 장편소설. 전 100회. 소소생(笑笑生)의 작품.

위세가 좋은 약방 주인 서문경(西門慶)과 떡장수인 무태랑(武太郞)의 아내 금련(金蓮)과의 밀통이 무태랑의 독살에까지 발전한 때에 그의 아우인 무송(武松)이 돌아온다. 여기까지는 <수호전(水滸傳)>의 문장을 그대로 빌었고, 이후는 호걸 아닌 시중 남녀의 욕망의 세계를 노골적이고 냉철하게 전개시킨다. 서문경은 뇌물의 힘으로 무송의 복수를 피하고 금련을 다섯째 부인으로 맞아들이며, 또한 이웃 친구의 불행을 이용, 그의 아내인 이병아(李甁兒)도 여섯째 부인으로 삼는다. 이 밖에도 왕성한 색욕(色慾)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갖은 비열한 수단을 다하는데, 금전이나 권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약장수 이외의 장사에도 손을 뻗치고, 엽관(獵官)운동으로 관리자리도 얻는다. 집 안팎에서의 첩끼리의 반목과 그들 주변 사람들의 난잡한 싸움을 비롯하여 질투·추종·불행·사기 등의 악덕과 거기 수반되는 불행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드디어 서문경은 향락이 지나쳐서 수명을 단축시키고, 이병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금련은 무송에게 죽음을 당하는데, 영락(零落)과 이산(離散)의 막이 내릴 때까지 금련의 시녀였던 춘매(春梅)를 중심으로 음란하고 방자스러운 인간의 모습 등은 여전히 계속되며, 최후에 선량하고 신앙심이 깊었던 본처 오월랑(吳月娘)만이 평안을 얻어 외아들을 출가(出家)시킨다. 책명은 중요인물인 세 여인의 이름에서 유래된다.

<수호전(水滸傳)>과 함께 북송 말년의 작품이라고 되어 있는데 작품의 세계는 오히려 현대(現代)와 깊은 관련을 가졌고, 또한 작자의 본명이나 내력이 미상이면서도 한 사람의 창작이라는 성격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점에서 소설사상 선구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음서(淫書)'라는 이유로 몇 번이나 관(官)의 금지를 당했는데, 이 대소설의 문학성 따위는 금압자(禁壓者)의 안중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풍몽룡[편집]

馮夢龍 (1574-1646)

중국 명대 말기의 문학자. 자는 유룡(猶龍), 이유(耳猶). 호는 향월거고곡산인(香月居顧曲散人), 고소사노(姑蘇詞奴), 전전거사(箋箋居士), 묵감재.

장쑤성(江蘇省) 우셴(吳縣)에서 출생, 후년에 푸젠성(福建省) 수령현(壽寧縣)의 지사가 되었으며, 명나라가 멸망하자 왕실을 따라 순사(殉死)했다고 한다. 그의 많은 필명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활동 범위도 매우 넓은 다재한 작가로서 경학(經學)에 관한 저술도 있으며, 가장 유명한 <삼언(三言)>의 편집·교정을 비롯하여 소설에서는 <평요전(平妖傳)> <열국지(列國志)> <정사유략(情史類略)> 등의 정보(訂補), 희곡에서는 자작인 수편을 포함한 <묵감재전기정본>, 쑤저우(蘇州) 민요를 채집한 <산가(山歌)>, 산곡(散曲)을 편찬한 <태하신주(太霞新奏)>, 소화집(笑話集)인 <소부(笑府)>, 일사(逸事)를 모은 <고금담개(古今譚槪)> <지낭(智囊)> 등 수없이 많다.

그의 저작 편집의 거의가 민간문학·구어문학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그의 본형이 통속문학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의 편집태도 자체가 전통적인 예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되고 있다.

삼언(三言)[편집]

(1620-1627)

통속 단편소설집. 풍몽룡 편저.

명말에 발행된 <유세명언(喩世明言)>(일명<古今小說>)과 <경세통언(警世通言)> <성세항언(醒世恒言)>의 3권의 총칭으로서 각 40편, 계 120편의 구어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송대의 환락가에서 유행했던 강석의 대본인 '화본(話本)'과 명대에 와서 그 형식을 밟으면서, 처음부터 읽기 위해서 창작된 '의화본(擬話本)'을 모아 풍몽룡이 교정(校訂)을 가한 것이다.

이박(二拍)[편집]

(1628-1632)

통속 단편 소설집. 능몽초 편저.

명말에 발행된 <박안경기(拍案驚奇)> <이각박안경기(二刻拍案驚奇)>의 두 책의 총칭. <삼언>과 마찬가지로 각 40편, 계 80편의 구어 단편소설을 수록했다. <삼언>이 주로 풍몽룡의 장서를 수록한 데 대해서, <이박>은 능몽초의 창작이 많은 것 같으며, 책 이름과 같이 수기(數奇)한 작품도 있으나, 약간 외잡(猥雜)한 면도 포함된다.

금고기관(今古奇觀)[편집]

(1632-1640)

명말의 통속 단편소설집. 편자는 포옹노인(抱甕老人)이다.

<삼언>에서 29편, <이박>에서 11편, 계 40편을 선정한 것인데, 이 책은 청(淸)조에 들어와 유행했다. 삼언·이박이 약간 팽대한 점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편자의 안목의 정확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삼언·이박을 화본의 집대성이라고 한다면 <금고기관>은 그 정수(精粹)라고 하겠다. 거의가 명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각 편에는 겨우 실력을 갖게 된 서민의 생기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어[편집]

李漁 (1611-? )

중국 청초의 문인·소설가·극작가. 자는 적범(謫凡), 호는 입옹(笠翁). 저장(浙江) 난계(蘭谿) 사람. 시사문(詩詞文)에 뛰어나 재자(才子)라고 평판받았으며, 명말의 동란기에 성장하여 벼슬길을 택하지 않고, 항저우(杭州)·난징(南京)으로 거처를 옮기다가 만년을 다시 항저우에서 보냈다. 가기(歌妓)를 신변에 두면서 작품을 연구, 상연 가능한 연극을 지향했다. 작풍은 당시로서는 참신하고 구성도 치밀하고, 단순한 권선징악(勸善懲惡)이나 오락에 빠지지 않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했으나, 상식의 범위를 넘지는 못했다. 저류(低流)의 금욕주의는 약간 특수하다. 또한 평론에 있어서도 개성적인 이론을 전개하여, 연극의 창작 상연, 거실기완(居室器玩), 음찬(飮饌)에 걸친 넓은 취미를 보이고 있다.

시사문을 모은 것으로는 <입옹일가언전집(笠翁一家言全集)>이 있고, 거기 수록된 <한정우기(閑情偶寄)>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소설에는 <무성희(無聲戱)> <연성벽(連城壁)> <각세명언(覺世名言)>(<12樓>)이 있으며 <각후선(覺後禪)>(肉蒲團)도 그의 작품이라고 전한다. 희곡에는 <입옹전기십종(笠翁傳奇十種)>이 있으며, 모두 희극(喜劇)적 요소가 있다.

오경재[편집]

吳敬梓 (1701-1754)

중국 청(淸) 중기의 문인. 자는 민헌(敏軒), 호는 문목노인(文木老人). 안후이성(安徽省) 전초현(全椒縣)의 명문 출신. 재산을 낭비하였고, 문재는 있었으나 관료의 길에 등을 돌렸다. 난징으로 옮긴 다음에도 박학 홍사과(博學鴻詞科)에 추천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퇴하고, 장서를 판다든지 친구의 도움을 받는 등 빈고(貧苦)의 생활 속에서 정치체제를 집요하게 분석하고, 통렬하게 비판을 가한 작품 <유림외사>를 썼다. 이 밖에 <문목산방집(文木山房集)> 4권이 있다.

유림외사(儒林外史)[편집]

55회의 풍자소설. 오경재 작.1745-1749년에 제작되었으나 처음에는 사본으로 유포되었으며, 1768-1779년경 양저우(揚州)에서 친구인 금조연(金兆燕)이 출판한 것이 최초의 판이라고 전한다. 그 후 산일되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판은 1803년의 와한초당본(臥閑草堂本)이다. 독립된 삽화(揷話)를 연결하여 사제(師弟)·우인 등의 관계를 가진 주인공의 교대로 작품의 전개를 꾀하며 각 삽화를 종합하면, 자연과 청조 치하의 출세욕, 허위에 가득찬 유림(儒林=지주 지식층)의 세계가 부각되도록 구성되어 있는 점은 정사(正史)의 열전을 읽는 느낌이 있어 <외사(外史)>란 이름에 손색이 없다. 현실의 냉정한 관찰안과 사실적인 필치가 조화되어, '과거(科擧)'제도가 인간성을 상실시키는 경로를 예리하게 파헤친 걸작이다.

조설근[편집]

曺雪芹 (1715-1763/64)

청(淸) 초기의 소설가. 이름은 점(霑). 자는 몽완(蒙阮)이며, 설근은 호, 또한 근계거사(芹溪居士)라고도 한다.

정백기한군(正白旗漢軍)의 가문에서 출생, 대대로 강녕직조(江寧織造)의 직에 있었고, 조부 인(寅)은 강희제(康熙帝)와 같이 자랐으며, 네 번 숙사(宿舍)에 직조서(織造署)가 설치되기도 했다. 그러나 부친대에 옹정제(雍正帝)의 황위(皇位) 계승 싸움에 말려들어 가산도 몰수당하고 일거에 몰락했다. 그 후 베이징(北京)으로 이주했으나 빈곤을 면치 못했으며, 그 속에서도 설근은 고고(孤高)를 지키고 시와 그림을 팔아 술에 빠졌으며, 아들의 죽음을 한탄하던 나머지 병이 나서 죽었다.

베이징으로 옮겨서부터 10년간에 걸쳐, 난징(南京)에서의 화려했던 생활을 회상하여 쓴 것이 <홍루몽>이 되었고, 그의 생전에는 80회까지만 완성되어 미완(未完)인 채로 끝나고 말았다.

홍루몽(紅樓夢)[편집]

일명 <석두기(石頭記)> <금옥연(金玉緣)>으로, 120회의 인정(人情)소설. 전 80회는 조설근 작, 후 40회는 고악의 속작.

처음은 사본으로 유포되었고, 1790년경에는 속본도 포함하여 사본이 되었는데, 1791년 췌문서옥(萃文書屋)에서 간행되었다. 이것은 초고(草稿)는 문어에 가깝고, 회화(會話)는 기인(旗人)의 베이징어였는데, 다음에 간행된 개정판에서는 공통어로 수정되어 청조의 독서인 사이에서 애독되었다. 그 후 음서라 하여 발행금지를 당했으나, 계속하여 판을 거듭하여 간본(刊本)은 70종에 이른다.

주인공 가보옥(賈寶玉)과 그를 둘러싼 12명의 여자들, 그 중에도 보옥의 연인 임대옥(林黛玉), 후에 아내가 되는 설보채(薛寶釵) 등의 유치한 사랑, 가연(賈璉)의 아내 왕희봉(王熙鳳)의 수완 등 대저택 내의 대가족 생활은 파란에 차 있으면서도 무사한 날이 계속되고, 보옥의 누이 원춘(元春)이 귀비(貴妃)로 입궐하는 등 영화의 극에 달한 듯이 보였으나, 표면의 화려한 이면에 부패가 계속되어 자살하는 자, 병사하는 자 등 차츰 희생자가 나오기 시작하고 드디어 가산을 몰수당하게 된다. 또한 보옥의 연인 대옥이 객혈(喀血)을 했기 때문에 희봉 등은 대옥과의 거식(擧式)이라고 속여서 보채와 결혼시킨다. 그 소식을 듣고 대옥은 숨을 거둔다. 보옥은 아버지의 명으로 과거에 응시, 제7석으로 합격하나 임신중인 아내를 남겨 두고 시험장에서 실종한다는 것이 줄거리이다.

이 작품은 영화는 멸망으로 통하고, 인생은 '꿈'이라는 주제를 기조로 하여 천상(天上)의 환경(幻境)과 지상의 가씨 집안을 대응시켜서, 선동(仙童)이 내려와서 보옥이 되고, 선초(仙草)가 내려와서 대옥이 된다는 인과(因果)를 복선(伏線)으로 하여 지상의 비극을 예상시킨다. 수백 명에 달하는 대가정의 사소한 일까지 극명하게 묘사하면서도 하나의 줄거리를 세웠고, 주인공을 "천하무능제일(天下無能第一) 고금불초무쌍"이라고 평하여, 그의 입을 빌어서 유가의 경전이나 효(孝)의 덕, 과거제도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리하여 무력한 여성들을 위하여 눈물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도, 당시의 상식 밖에 있었던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영화에서 몰락, 출가(出家)라는 줄거리는 <금병매>와 같으며, 명대의 벼락부자 집안의 불륜의 생태가 이 작품에서는 청조 귀족의

저택으로 옮겨져서, 계층의 차이는 역연(歷然)한 바 있으나, 똑같이 봉건시대 가정의 암흑면을 파헤친 걸작이다. 또한 천상에서 선녀가 내려와 갖가지 운명을 겪는 구상은 후의 <경화연(鏡花緣)>에 계승되고 있다.

연구 면에서는 왕국유(王國維)의 <홍루몽평론(紅樓夢評論)>(1905)이 그 비극성에 평가를 주었는데 왕몽완(王夢阮), 심병암(沈甁庵)의 <홍루몽색은(紅樓夢索隱)>(1916), 채원배(蔡元培)의 <석두기색은(石頭記索隱)>(1917)은 모랄 추구에 시종되어 있다. 후스(胡適)의 <홍루몽고증(紅樓夢考證)>(1921)은 판본과 작자의 고증에서 일보 전진하였고, 위핑보(兪平伯)의 <홍루몽변(紅樓夢辨)>(1923)은 원전의 복원에 노력했다.

원매[편집]

袁枚 (1716-1797)

청(淸) 중기의 문인. 자는 자재(子才), 호는 간재(簡齋), 또는 수원노인(隨園老人). 저장성(浙江省) 첸탕(錢塘) 사람.

24세로 진사에 합격하여 한림원 서길사(翰林院庶吉士)가 되었으나 만주어 성적이 나빠 지방관으로 율수·장닝(江寧) 등의 지현(知縣)을 역임하였고, 37세에 사직하여 장닝현의 소창산(小倉山)에 수원(隨園)을 영위하여 매문(賣文)에 의해서 취미의 세계에 사는 문인생활로 들어갔다. 시는 고인(古人)의 모방을 배제하고 자연의 성정(性情)을 노래하는 성령설을 제창하였고, 또한 부인에게 시작(詩作)을 권장하여 여류 제자의 작품집 <수원여제자시선(隨園女弟子詩選)>을 편집했다.

문은 변문을 특기로 했으며 고문·변문 공히 뛰어나서 기균(1724-1805)과 함께 '남원북기(南袁北紀)'라고 병칭되었다. 미식(美食)과 승경(勝景)을 찾아 각지를 유람하였고, 음식에 관해 쓴 <수원식단(隨園食單)>과 <유황산기(遊黃山記)> 등이 있다. 또한 귀신의 세계에 흥미를 나타내서 괴담집인 <자불어(子不語)>이 있으며 청년시대부터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시론으로서는 <수원시화(隨園詩話)>가 있다.

경화연(鏡花緣)[편집]

(1828)

풍자소설. 전 100회. 작자는 이여진(李汝珍, 1763 ?-1830)으로 자는 송석(松石). 허베이(河北) 대흥(大興=베이징) 사람이다. 1810년경부터 10여 년에 걸쳐서 집필하였다.

당의 측천무후시대에 당오(唐敖)라는 서생이 상선에 편승하여 해외를 편력하고 최후에 선경(仙境)에 숨는다. 또한 그의 딸이 아버지를 찾아다니다가 알게 된 여성과 같이 과거에 합격한다는 이야기로서 해외여행기에다가, 저자의 음운학에서부터 의학, 바둑에 걸친 박학다재(博學多才)를 첨가하여 구성했고 부인문제나 과거제도에 대한 풍자를 주제로 하고 있다.

아녀영웅전(兒女英雄傳)[편집]

1878년 베이징 취진당(娶珍堂) 간행. 작자는 비막문강(費莫文康, 생몰년 미상)으로 자는 철선(鐵仙)이다. 청의 도광(道光) 연간(1821-1850)의 작품으로서 전 41회.

하옥봉(何玉鳳)이라는 아가씨가 모살(謀殺)당한 부친의 원수를 갚는 이야기로서 장금봉(張金鳳)과 함께 안공자(安公子)에게 시집간다는 진부(陳腐)한 재자 가인소설이다. 작자는 당시 유행되는 소설, 특히 <홍루몽>을 적대시하여 그 정반대를 목표로 이상적인 가정을 그리려고 한 것과 베이징어(北京語)로 씌여진 경묘(輕妙)한 필치가 이 작품의 특색을 이룬다.

삼협오의(三俠五義)[편집]

(1879년 간행). 당시의 강석사(講釋師) 석옥곤(石玉崑=자는 振之, 텐진 사람)의 강담필기(講談筆記). 전 120회. 송의 명재판관 포증(包拯)이 인종(仁宗)의 어머니의 무고(無辜)함을 밝히고, 또한 세 협인(三俠人=실제는 4명)과 다섯 의적(義賊)을 감화시켜 조각(趙珏)의 모반을 염탐시켰다는 이야기로 등장인물도 포증, 인종 등을 제외하고는 가공 인물이며 이야기의 전개도 역사적 사실에서 빗나가고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걸출한 인물에 민간의 호걸을 배치하여 종횡으로 악을 퇴치한다는 것이 당시의 기호에 맞아 유행했다. 후에 유월이 인물을 첨가하고 사전(史傳)에 맞추어 <칠협오의(七俠五義)>로 고쳤으며, <소오의(小五義)> 등 속작이 많다.

해상화열전(海上花列傳)[편집]

1892-1894년 간행. 작자는 한자운(韓子雲), 본명은 방경(邦慶, 1856-1894), 장쑤성(江蘇省) 송강부(松江府) 사람. 전 64회의 화류(花柳)소설.

당시의 상하이(上海) 화류계에 출입하는 명사·배우 등을 조박재(趙樸齋)라는 화류계에 빠져버린 청년과 관련지어 그린 것으로 특별한 줄거리는 없으나 인물의 생생한 묘사와 함께 당시의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또한 회화가 쑤저우어(蘇州語)로 씌어져 작품에 더욱 생기를 주고 있다.

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편집]

1901-1903년에 걸쳐서 36회까지, 그 후 24회를 <상하이세계번화보(上海世界繁華報)>에 연재, 최초 예정인 120회의 반에서 끝났다. 작자는 이보가(李寶嘉, 1867-1906), 자는 백원(伯元), 장쑤성 무진(武進) 사람.

<유림외사(儒林外史)>의 수법에 따라 일정한 줄거리는 없으나, 관리생활의 부수물인 영합(迎合)과 속임수, 모략 중상 등 그 부패상을 세부에까지 걸쳐서 통렬하게 폭로하였고, 관리의 처첩(妻妾)에 따른 추문, 관리 지망자의 비열성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실록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청조 말기, 관계(官界)의 타락상의 폭로를 목적으로 한 폭로소설의 개조(開祖)이다.

노잔유기(老殘遊記)[편집]

전 20회의 소설. 작자는 유악(1857-1909). 자는 철운(鐵雲). 장쑤성(江蘇省) 단도(丹徒) 사람.

1904년 <수상소설(繡像小說)>에 13회까지 연재되고, 후에 <톈진일일신문(天津日日新聞)>에 다시 연재되어 20회로 완결, 1906년 상무인서관(常務印書館)에서 간행되었다.

이야기는 노잔(老殘)이라는 의사가 각지를 유력(遊歷)하며, 관리의 무능과 사리(私利)를 꾀하는 생태를 폭로하고, 청렴을 자인(自認)하는 관리가 잘못된 신념을 가졌을 경우, 더욱 큰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종래에 없었던 진기한 일이다. 작자는 의화단(義和團) 사건 때, 정부미(米)를 독단으로 난민 구제에 사용하여, 이 때문에 신쟝(新疆)에 유배되어 죽었으며, 직정(直情)과 기골(氣骨)이 작품에 일관되어 있다.

얼해화(壁海花)[편집]

전 35회의 사회소설. 금송잠(金松岑, 1874-1947)의 작품. 장쑤(江蘇) 오강(吳江)에서 태어난 금송잠은 1903년에 도쿄(東京)에서 강행되고 있던 잡지 <장쑤>에 이 작품을 2회에 걸쳐 발표하고, 3-6회의 원고와 60회까지의 구상을 증복(曾樸)(1872-1935)에게 넘겨 속작을 의뢰했다.

이에 증복은 1905년부터 개작·개정을 거쳐 속작을 발표했는데, 1959년에 31-35회를 부록으로 하는 상하이 중화서국판(上海中華書局版)의 완본이 간행되었다.

내용은 독일, 러시아 등의 견외사절(遣外使節)이 된 홍균(洪鈞)과 그의 첩 새금화(賽金花)를 모델로 하여 청조 말기 30년간의 관계의 변천상을 그린 것이다. 양무파(洋務派) 관료의 활약에서부터 변법유신파(變法維新派)의 발흥, 혁명파의 대두에까지 걸쳤고, 그 사이에 의화단 사건의 8개국 연합군의 사령관 발데르제의 보호하에 있었던 새금화의 활약, 청일전쟁(淸日戰爭)으로 인한 정계의 타격 등이 아로새겨졌으며, 많은 정객 등 실재 인물이 등장한다. 약간의 과장이 박진성(迫眞性)을 잃게 하지만 인물의 계층에 알맞는 회화 등 청말 소설의 걸작의 하나라 하겠다.

근대의 선구[편집]

近代-先驅

중국의 문예 평론은 문체의 화려함과 시구(詩句)의 교묘성에 집중되어 왔다. "문은 진한(秦漢), 시는 성당(盛唐)"이라고 항상 복고의 경향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것은 시문이 가치를 가질 수 있었던 사회로의 복귀의 원망(願望)이 담겨져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송학(宋學)의 뒤를 이어받은 '양명학(陽明學)'이 출현하여 전통적인 권위에 대해서 나의 '마음'을 대치(對置)시켜, 개체(個體)의 가치를 확립하려고 했다. 이들 양명학의 영향을 받은 인물은 농공상(農工商) 외에 병졸·광부(鑛夫) 등의 출신이고, 이들은 솔선하여 학문에서의 계급 타파에 앞장서서 남녀의 차별까지도 무시하고 인간의 가치를 수립하려고 했다.

문예평론에서 그 최초의 정점에 서는 것이 이탁오(李卓吾)이며, 그는 이슬람 교도였다고 하는데 무자각(無自覺)으로 신봉된 유교의 가치관을 역전시켜, 천하의 지문(至文)은 '동심(童心)'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당시에 있었던 <수호회도(水滸誨盜)> <서상회음(西廂誨淫)> 즉 <수호전>은 도둑을 <서상전>은 난봉꾼을 만든다는 당시의 속담에 반대하여 희곡소설을 시문과 동렬에 두었다.

김성탄(金聖嘆)은 이를 이어받아 <수호전(水滸傳)> <서상기(西廂記)>를 <사기(史記)> <두시(杜詩)> 등과 동렬에 놓고 문장의 1절 1구에 비판을 가하여 문예작품으로서의 가치를 확립시켰다. 이들은 상공업의 발달을 배경으로 지주를 주체로 구성되어 있던 지배체제에 반발하는 대변자였는데, 청말이 되자 유럽의 사상과 문예관이 도입되어, 정치체제의 변혁을 촉진하는 운동과 일체가 되어 종래의 가치관이 부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탁오[편집]

李卓吾 (1527-1602)

중국 명대 말기의 사상가. 이름은 지(贄). 호는 탁오, 온릉(溫陵), 굉보(宏甫) 등. 푸젠성(福建省) 천주부(泉州府) 태생.

26세에 향시(鄕試)에 급제, 국사감(國士監)의 교관(敎官) 등을 거쳐 54세 윈난성(雲南省) 요안(姚安) 태수를 마지막으로 관직을 떠났고, 후베이성(湖北省) 마성(麻城)의 룽후(龍湖)에서 오랫동안 은거하며 체발출가(剃髮出家)도 불사했으나, 구도(求道)에 대한 진지성과 비타협성이 기성질서를 문란케 한다고 당국의 박해를 초래하여 옥중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분서(焚書)> <장서(藏書)> 등의 저작이 있다.

그는 형해와(形骸化)된 기성의 도통이념(道通理念='道'에 대한 이념)에 대결하여 배워야 할 것은 공자의 생활태도지 그의 말이 아니라는 역사주의적 관점에 서서 당대(唐代)에 바람직한 도통이념을 모색하였고, 천의흘반(穿衣吃飯=인간 생활의 일상성)에 있어서, 공통되는 인간의 객관적 보편성에서 인륜물리(人倫物理)를 발견하고, 거기에 인간의 진성(眞性)이 있다고 하여, 그것을 자기 내부에서 추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문(文)에 있어서 동심을 중시하고 <수호전> <서상기>를 솔직하게 평가하는 등 문학사적 행위는 그의 사색(思索)이 낳아준 하나의 결과이다. 중국 사상사의 근대적 전개를 고찰할 때 가장 먼저 문제가 되어야 할 인물이다.

김성탄[편집]

金聖嘆 (? -1661)

중국 명말 청초의 문예비평가. 이름은 인서(人瑞), 성탄은 호이다. 만력 30-40년간(1602-12)의 태생인 것 같다. 장쑤성 우셴(吳縣) 사람.

그는 예리한 문장 감각으로서 소설 ― 휴먼(人間)이 전면에 앞세워진 것으로서의 ― 이 문학사의 선두에 뛰어나오려고 하는 전환점에 있었던 당시대의 문예사조를 분방하게 체현(體現)시켰다. <장자(莊子)> <초사(楚辭)> <사기(史記)> <두시(杜詩)> <수호전> <서상기>를 성탄재자서(聖嘆才子書)라 하여 같은 수준에서 평가했고, <수호전>을 70회에 끊고, 시를 두 개로 분해하여 비평하는 등 그의 발자취는 독특하였다.

옌푸[편집]

嚴復 (1853-1921)

근대 중국의 계몽사상사·번역가. 자는 우릉(又陵=幼陵), 호는 기도(幾道), 만년의 호를 유야(야만을 고치는 계몽이라는 뜻) 노인이라고도 한다. 푸젠성 후관(侯官) 출신이었기 때문에 엄후관(嚴侯官)이라고도 한다.

근대 중국은 서구 근대와 접촉하여 여러 가지 사상적 반응을 일으켰으며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실패를 내외에 폭로한 청일전쟁의 패배를 계기로 하여, 1898년 무술변법(戊戌變法)으로 결실되는 유신(維新)운동이 개시됐다. 옌푸, 캉유웨이(康有爲, 1858-1927), 량치차오(梁啓超), 담사동(譚嗣同, 1865-1898) 등의 변법운동과 거의 동시에 사상활동을 시작했다. 1895년, 톈진(天津)의 <직보(直報)>에 발표한 <논세변지극> <원강(原强)> <구망결론(救亡決論)> <벽한(闢韓)> 등의 논문이 그것이다. 벽한 즉 한유(韓愈)의 봉건적 사유(思惟)를 배격한다는 주장이, 즉각 장즈둥(張之洞, 1837-1909)의 노여움을 사서 그의 막객(幕客)인 도수인(屠守仁)에게 <변벽한서(辯闢韓書)>를 쓰게 한 것과 같이 옌푸는 서구가 부강해진 길을 긴급히 찾아 새 중국의 나아갈 길을 주장했다.

유학하는 동안 영국에서 수구 근대정신과 학술을 배운 엄복은, 신세계의 보편적 정신으로서 서구적 원리에 입각한 중국인의 교육 계몽을 기본으로 생각했다. 양무파의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이 갖는 보수성에 대한 명확한 비판이 내포되어 있다.

이를 위해서 옌푸는 서구의 근대 학술사상서의 번역을 실시했다. 그의 동성파 고문(桐城派古文)에 의한 역문(譯文)은 종래의 독서인들에게도 환영을 받아 20세기 초에 다대한 영향을 미쳤다. 헉슬리의 <천연론>은 특히 진화론(進化論)의 유포에 압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이며, 이 밖에 스미스의 <원부(原富)>(1902), 스펜서의 <군학이언(群學肄言)>(1903), 밀의 <군기권계론(群己權界論)>(1903), 몽테스키외의 <법의(法意)>(1904-1909), 밀의 <목륵(밀) 명학(穆勒名學)>(1905) 등의 주요한 역서가 있다. 서구의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정신을 근대의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거기에서 신중국(新中國)의 나아갈 길을 발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생각했던 방향은 결국 중국에서는 실현되지 못했다.

옌푸는 양무관료(洋務官僚)인 선바오정, 리훙장(李鴻章), 위안스카이(袁世凱) 밑에서 일했고, 만년에는 장쉰(張勳, 1854-1923)의 광쉬제(光緖帝) 복벽 운동도 찬동하여 받아들였다. 그것은 지난날의 전적인 서구화주의가 전통주의로 역전되었다고 보여지는 것인데, 제국주의 단계의 서구 자본주의가 엄복이 생각한 것과 같은 길을 중국에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연론(天演論)[편집]

(1898)

영국의 토머스 헉슬리(1825-1895)의 <진화(進化)와 윤리(倫理)>를 옌푸가 번역한 것.

중국이 식민지화되어 멸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의식 속에서 약육 강식의 사회 다위니즘(Darwinism)을 설명하는 이 책은 20세기 초기의 중국에 한 시기를 형성할 정도로 그 세력이 유포되었다. 경존(競存=Struggle for existence)이라든가 천택(天擇=natural selection)이란 말들이 사람 이름에 사용되었고, 후스(胡適)의 '適'자도 적자생존(適者生存)이란 말에서 따온 것이다.

옌푸는 헉슬리보다도 스펜서의 일원론(一元論)적 자연철학에 관심을 두고 그의 <종합철학(綜合哲學)>을 번역하려고 했다. 그러나 내용의 분량 관계로 때마침 1894년에 공간(公刊)된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라는 그의 만년의 강연을 번역했다. '천연'이란 진화의 중국 역(譯)이다. 즉 옌푸는 헉슬리가 스펜서에 대해서 주장하고 싶었던 "인간의 윤리를 탈락(脫落)시키고", 스펜서가 말하는 '자연의 진화만'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이다. <천연론>은 역문 중의 주(註)뿐만 아니라 각 절(節)에 붙인 안어(案語=코멘트)에 의해서 자신이 번역한 원저자인 헉슬리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고 스펜서에 가담하여 그의 설을 창도(唱導)한다는 기묘한 책이다.

그러나 루루룬(吳汝綸)이 칭찬해 권하는 고문(古文)과 신(信)·달(達)·아(雅)를 지향하는 고심의 역문에 의해서, 그리고 또한 서구 학술에 대한 신선한 감각에 의해서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끼친 영향은 옌푸의 역서 가운데에서도 가장 뛰어나다.

린주[편집]

(1852-1924)

중국 청말의 번역가·소설가. 자는 금남(琴南). 필명으로서 냉홍생(冷紅生) 등이 있다. 푸젠성(福建省) 민현 사람.

일찍부터 시문에 능하여 동성파의 고문을 익혀 고문에 의한 소설 등을 썼으며, 그 이상으로 서양문학의 번역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뒤마의 <춘희(椿姬)>를 시작으로 셰익스피어, 디킨스, 스콧, 어빙, 스토 부인, 대·소 뒤마, 발자크, 입센, 세르반테스, 톨스토이 등 십여 개국 작가의 작품 160편을 연이어 고문으로 번역했다.

그는 외국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에 협력자가 말하는 줄거리를 고문으로 쓴 것뿐이므로 엄밀하게는 번역이라 할 수 없고, 협력자의 능력에 따라서 작품의 선택이나 번역에도 우열이 있겠으나, 근대 초기의 문학자들은 거의 이 '임역소설(林譯小說)'에 의해서 서양문학을 접했다. 그러나 후의 '문학혁명'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입장에 섰다. 시집·수필도 적지 않다.

량치차오[편집]

梁啓超 (1873-1929)

중국 근대 초기의 사상가·저널리스트. 자는 탁여(卓如), 호는 임공(任公). 음빙 실주인이라고도 칭했다.

캉유웨이와 함께 청말의 개량주의 운동 '변법(變法)'파의 중심인물로서, 무술(戊戌)변법에는 참모 역할을 했다. 후에 일본에 망명하여 잡지 <신민총보(新民叢報)>를 중심으로 논진(論陣)을 펴고 <민보(民報)>를 중심으로 청조(淸朝) 타도를 주장하는 혁명파와 대립했다. 문학상으로는 시의 내용에 새로운 사물(事物)을 받아들이는 것을 주장한 '시계혁명(詩界革命)' 제창자의 한 사람이 된 이외에 다시 중요한 것으로서 <신소설(新小說)>을 발간하였고, 또한 일본의 정치소설을 번역하여 정치소설에 의한 민중의 계몽을 기도, 그 필요성을 주장(主張)한 것을 들 수 있다.

그의 문학적 주장은 비속한 효용주의(效用主義)를 면하지 못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소설의 지위를 인식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만년에는 사학(史學)에 주력했다. <청대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등 많은 저서가 있으며, <음빙실합집> 40권에 수록되어 있다.

황준헌[편집]

黃遵憲 (1848-1905)

중국 청말의 시인·외교관. 자는 공도(公度), 별호는 동해공(東海公), 법시 상임재(法詩尙任齋). 광둥성(廣東省) 자잉저우(嘉應州=현재의 梅縣)의 객가(客家=북에서 남으로 이민한 한민족의 일파) 출신.

1876년 거인(擧人)에 합격. 다음해 주일(駐日) 청국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부임. 이후에 미국, 영국, 싱가포르 등에서 외교관 생활을 보냈다. 그의 시는 종래의 구시(舊詩)에 없는 구어적(口語的) 어구를 사용하여, 신사상(新思想)·신사물(新事物)을 노래하여 '신시파(新詩派)'라고 불린다. 청말 '시계(詩界) 혁명'의 제1인자.

왕궈웨이[편집]

王國維 (1877-1927)

중국 청대 말기 사상가·문학자·역사학자. 자는 정안(靜安). 호는 관당(觀堂).

저장성(浙江省) 해령(海寧)에서 출생. 청년시대에는 캉유웨이, 량치차오 신학(新學)의 영향 아래 주로 서양철학 분야를 연구·개척하여, 그 성과를 기초로 문예평론·희곡사 연구 등에 선구적 업적을 이루었다. 신해혁명 때는 뤄전위(羅振玉, 1865-1940)와 함께 도일(渡日), 차차 중국 고대사학, 몽고 사학의 연구자가 되어 귀국 후 청화(淸華)대학 교수로 있는 한편 청조 잔존(殘存) 궁정의 남서방(南書房)에 관계했고, 이후 청조의 비운을 통분하면서 1927년 곤명지(昆明池)에 투신자살했다.

초기의 철학연구시대에는 독학으로 독일 관념철학의 이론적 구조를 소화하여 논리학·미학·윤리학의 세 분야에 걸쳐 칸트(1724-1804), 쇼펜하우어(1788-1860), 니체(1844-1900) 등의 제 설(諸說)을 중국 사상계에 소개했으며, 특히 쇼펜하우어의 미학설(美學說)에 의해서 쓴 <홍루몽 평론(紅樓夢評論)> <인간사화(人間詞話)> 두 편은 종래 전통적 문학사상 아래서 멸시당해 왔던 중국의 희곡소설·속곡(俗曲) 등의 미학적 가치를 서양 근대의 예술이론에 따라 해명·칭양(稱揚)하여 뒤의 신문학운동에 이론적 초석(礎石)을 구축했다.

인간사화(人間詞話)[편집]

(1908)

당송(唐宋) 이래의 속곡 <사 (詞)>가 지닌 미적 가치를 서양 미학의 관점에서 해명하려고 한 근대적 문예평론.

우미(優美)에서 장미(壯美)에 이르기까지의 개념을 도입하면서 문학에서의 내용과 형식의 문제를 추구한 '경계(境界)'론의 전개는 특히 유명하다.

예술형식을 통해서 표현된 미적 세계의 독자적인 구조를 분석하여 근대 관념론적 예술론의 하나의 극치(極致)를 제시하여 광범한 영향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