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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현대 문학/현대 전기 문학/현대 전기의 문학〔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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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前期-文學〔槪說〕한국의 현대문학사(現代文學史)를 편의상 전후기(前後期)로 나눌 때 일반적으로 1945년 해방기(解放期)를 경계선으로 한다. 또 그렇게 선을 긋는 데는 그만한 문학사적 이유가 있다.

우리가 신문학(新文學)이라고도 부르고 있는 해방전의 한국 현대문학은 그 기간으로 봐서 20세기의 초엽을 시발점으로 할 때 반세기(半世紀)에 미달하는 약 40년간의 이야기가 된다. 그러므로 이 글에선 우선 그 40년간의 한국문학의 수확(收穫)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검토 확인해 보는 차례가 된다. 그렇다고 이 짧은 글에서 40년간의 성과나마 구체적인 고찰과 서술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동안에 어떤 내용의 수확이 있었다면 그 결과는 어떤 원인에서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그 주요 원인을 따지고 거기 뒤따르는 결과를 추산하는 일이다. 그렇게 볼 때 우리 신문학사의 뒤에는 여러 가지 불공평한 원인들이 많이 있다.

그 원인의 첫째는 일종의 풍토론(風土論)이 된다고 본다. 40년의 신문학이 어떤 풍토에서 자라났는가 하는 외부적인 원인의 규명이다. 우선 말할 것은 그 풍토는 결코 문학이 자라는 데는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40년간의 태반인 36년간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환경이었다는 것은 신문학이 자라는 데 있어선 엄동설한과 같은 냉혹한 풍토였다.

한국의 신문학이 서구의 근대문학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면 국민문학(國民文學), 민족문학(民族文學)이란 것이 체질(體質)인데, 그 민족문학이 민족적으로 자주 독립을 못하고 남의 식민지인 환경 속에서 순조로운 성장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이 우리 신문학 40년간의 흉작(凶作)을 이야기하게 되는 풍토적인 원인이라 할 것이다.

둘째는 우리가 근대문학을 추진시킨 방법론(方法論)이다. 먼저 말했다시피 우리 신문학은 서구화(西歐化)의 성격으로 나타났다. 어느 나라의 근대문학이나 그 생성(生成)에서 선진(先進)한 나라의 문학 영향을 받는 것은 불가피하다. 막을 수 없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일은 소화력이다. 그래서 전통론(傳統論) 이야기가 된다. 우리 신문학 초기에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이 표어로 내걸린 일은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실현이 되지 못했다. '온고'는 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지신'에 열중하여 남의 문학에 대한 수박 겉핥기의 천박한 문학밖에 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셋째로 우리 신문학이 이와 같이 허겁지겁 남을 뒤따르게 된 데는 특수한 역사적인 사정이 개재된 면이 있긴 하다. 우리가 흔히 1920년대의 신문학 이야기를 할 때에 항용 여러 갈래의 근대 문예사조가 한꺼번에 혼류(混流)해 왔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낭만주의니 자연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것들이 선진한 나라에서 넉넉히 한세기를 두고 생겨나고 발달된 것인데 워낙 우리의 신문학의 경우는 뒤늦게야 그것들을 받아들이면서 충분한 시간의 간격을 못 두고 선후도 가리지 못하면서 혼잡을 이루었다. 1920년대는 우리 신문학의 파종기(播種期) 같은 때인데 이 때에 근대 문예사조와 작품세계를 깊이 이해해서 기초를 튼튼히 했어야 할 것을 그만 건너뛰고 만 것이다.

요즈음 와서 외국문학의 영향 관계에 대하여 많이 언급되지만 우리가 20년대에 그 외국문학을 이 쪽으로 배워 들일 때에 우선 텍스트부터 올바르게 쓰지 못한 점이다. 즉 원전(原典)을 쓰지 못한 것이 큰 약점이었다. 당시는 우리 문학자들이 외국 문학작품을 원전으로 읽을 만한 어학실력도 없었던 데다가 또 하나는 당시의 문화교류는 직접 유럽과 접촉을 못하고 일본을 거쳐야 하는 장벽 때문이었다. 따라서 당시 우리 신문학이 쓰고 있던 구라파 작품이란 그 태반이 일역(日譯)을 썼기 때문에 그 텍스트가 부정확하고 잘못된 것들이었다.

우리가 40년간 신문학의 성과를 고찰하는 데 있어서 먼저 이와 같은 부적당한 환경과 방법, 문화수준 등이 모두 불순한 원인으로서 고찰 반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어려운 환경과 사정에서도 한국의 신문학은 제나름대로의 싹이 트고 자라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 어느 언덕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고 할 대목들이 가상스럽게 눈앞에 떠오르기도 한다.

예를 들면 1926년의 국민문학운동이다. 당시 사회주의 사조 등 외래 풍조가 가두를 휩쓸고 있을 때에 이광수(李光洙), 최남선(崔南善), 이병기(李秉岐), 염상섭(廉想涉) 등이 중심이 되어 민족적인 문화 전통을 찾아서 국민문학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조부흥론(時調復興論)'이 큰 화제로 돌았다.

한 나라의 문학은 그 나라 문자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한글 창제를 기념하는 한글날이 기념된 것도 이 해의 일이었다.

또 하나 35년대의 문학 경향을 보는 데서도 주목할 것이 있다. 1935년대라고 하면 일본의 대륙 침략전이 시작되던 때요, 세계적으로 파시즘이 독수리 날개를 펴고 있던 시절,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일본의 탄압이 노골화되던 때에 한국문단의 경향이 농촌문학, 전원문학 그리고 특히 문학의 본고향이라 할 수 있는 한국적인 고유성·토착성(土着性)으로 작품성(作品性)이 마련된 것은 귀중한 일이었다. 그 경향은 현실적으로는 외세(外勢)의 탄압에 대한 일종의 저항의 뜻도 되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참고로 하면서 우리는 다시 40년간의 신문학사적인 성장과정을 간단하게 훑어내려갈 수 있다.

먼저 1910년대의 신문학을 개척한 춘원 이광수의 초창기의 공로가 크다고 할 것이다. 그 중 <무정(無情)>은 우리 신문학사에서 근대성의 장편소설의 시범(示範)이었다.

1920년대는 3·1운동이 실패된 뒤의 어둡고 추운 계절이었지만 그 속에서 신문학의 온상(溫床)이 마련되고 근대적인 시와 단편소설이 꽃을 피웠다. 시에서는 주요한(朱耀翰), 김억(金億), 황석우(黃錫禹), 이상화(李相和), 박종화(朴鍾和), 특히 김소월(金素月)의 민요풍의 서정시는 우리 신시(新詩)의 아름다운 전통을 세웠다. 소설에서 재능있는 젊은 작가들이 많이 나왔다. 김동인(金東仁), 전영택(田榮澤), 염상섭(廉想涉), 현진건(玄鎭健), 나도향(羅稻香) 등 그들도 모두 1920년대 신문학 초기를 대변하는 챔피언들이다. 그 중에서도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은 자연주의의 단편소설로서 모범적인 가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930년대는 우리 문학사에서 근대가 가고 현대가 시작된 전환기이다. 시에서는 영국의 이미지즘의 영향을 받아 모더니즘 운동이 일어났다. 시작(詩作)에서 말의 시각성(視覺性)을 중시하는 김기림, 김광균(金光均), 장만영(張萬榮) 등이 등장했다. 소설에서도 주지론(主知論)이 등장하였고, 이상(李箱)의 <날개> 같은 자의식 세계의 현대작품이 발표되었다. 20세기의 현대문학이 시작된 증거들이다.

먼저 암시했듯이 1930년대의 후반기를 접어들면서 한국적인 토착성에 뿌리를 박은 작품성들이 당시 작품을 결실(結實)케 하는 토양의 구실을 하였다. 그런 기운 속에서 이루어진 작품들로서 김동리(金東里)의 <바위> <무녀도>, 정비석(鄭飛石)의 <성황당>, 시에서는 김영랑의 서정시에서 서정주(徐廷柱)의 시집 <화사집(花蛇集)>, 뒤이어서 <문장(文章)>지를 통해서 등장한 이한직(李漢稷), 박두진(朴斗鎭), 조지훈(趙芝薰), 박목월(朴木月), 박남수(朴南秀) 등의 젊은 시인들이 모두 1940년 최하반기에 꽃을 피운 사람들이다.

<白 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