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I·세계문학·논술/북서-중부 유럽 문학/독 일 문 학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목차

독일문학〔개설〕[편집]

獨逸文學〔槪說〕

독일문학은 영국, 프랑스의 문학과 같이 기재문학(記載文學)으로서는 중세(中世)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대체로 8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그러나 그 전에 고대 게르만 민족 사이에 전승된 이른바 게르만 문학도 아울러 일컫게 됨은 물론이다.

한마디로 독일문학의 성격을 말하기는 어려우나 주된 특징은 의력적(意力的) 성격이 강한 것이며 목표로 하는 것을 끝까지 추구하는 철저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인간 내면(內面)의 움직임을 주장하는 모습으로 강하게 나타난다.

이런 독일문학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 개의 가장 큰 정점(頂點), 즉 최성기(最盛期)를 나타내고 있다. 그 하나는 12, 13세기(1150-1250)의 봉건기(封建期)의 문학이며 다른 하나는 18세기에서 19세기의 전환기, 즉 괴테와 실러를 중심으로 수립된 독일 고전주의 문학이 그것이다.

봉건기의 독일문학은 궁정문학과 민족 서사시가 중심이 된다. 즉 기사(騎士)가 소속하는 여러 궁정에서 기사계급의 시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궁정문학으로 서사시(敍事詩)와 연애시가 당시 문화의 최상층부의 의식상태를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한편으로는 민족적인 기재문학이 생겼다. <니벨룽겐의 노래>는 그 대표적인 민족 서사시라 할 수 있다.

이때까지 여러 방언으로 갈라져서 통일된 문장어(文章語)를 갖지 못했던 독일에 성서번역을 통하여 독일어의 통일을 이룩한 루터는 독일문학사상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단순한 종교개혁자에 머물지 않는다. 그로인해서 독일에 처음으로 참다운 사고(思考)의 자유가 확립되었으며 그의 번역성서는 당시 활발한 보급을 보게 된 인쇄술에 힘입어서 이른바 뉴하이저먼 시대(新高獨逸語時代)를 확립하여 독일문학의 근대적인 기초를 확고히 하였다.

이후 점차로 문화창조의 중심적인 기수(旗手)가 새로이 대두하기 시작한 시민계급으로 옮겨졌다. 문학의 경우 이 현상은 이른바 ‘직장가(職匠歌)’로서 나타나고 그 선도적 인물은 한스 작스라 할 수 있다. 소박하고 생활력 넘치는 쾌활한 유머, 명쾌한 도의심 등은 문학작품으로서의 결함을 보완하고도 남음이 있다.

특히 인쇄술의 보급으로 이른바 민중본(民衆本)의 보급은 민요와 전승문학의 보존에 기여하는 바가 컸다.

18세기에 들어서면 계몽주의 문학이라 불리는 시대가 온다. 그리고 1770년대에는 유명한 ‘슈투름 운트 드랑’기(期)의 청년운동이 일어나 괴테와 실러의 이름을 친숙하게 한다. 그러나 이들은 실로 진정한 의미에서 계몽주의자이며 위대한 창작가인 레싱을 길잡이로 하여 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의 가치는 진리를 소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으로 도달하려는 성실한 노고에 있다”고 말한 레싱은 희곡 <현자(賢者) 나탄(Natham Weise)>에서는 계몽주의 문학의 극치(極致)임은 물론 다가오는 독일 고전적 희곡의 선도자임을 보여 주고 있다.

독일 고전주의 문학은 우선 괴테와 실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사람은 ‘슈트름 운트 드랑’의 기수였다는 것만으로도 문학사상의 뚜렷한 대표자일 수 있다. 더욱이 그 뒤 스스로의 인간형성을 통하여 인류의 각종 유산을 받아들여 근대정신에 입각한 조화적인 인간상을 문학으로 형상화한 일은 독일에 국한하지 않고 전세계 인류에 대한 공헌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횔데를린이 있다. 그의 어느 유파에도 넣기 어려운 중간적인 과정을 거친 다음, 독일문학은 서서히 낭만주의 문학으로 진입한다. 감정(感情)과 지성의 종합으로 통일적인 우주관을 지향한 독일 낭만주의는 언어학이나 민속학 등의 학문연구의 의욕까지 불러일으킨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대표적 작가인 실레겔 형제의 경우에도 그 형은 뛰어난 비교 언어학자(比較言語學者)였으며 특히 그림 형제의 총체적인 업적은 독일 낭만주의의 큰 수확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작품으로서는 노발리스의 것이 이 시기의 문학을 대표하고 있다.

낭만주의 문학에 이어 사실주의 문학이 이어지는데 이 시기는 기술시대의 도래와 함께 보급과 집단화의 현상, 그리고 헤겔 등의 관념론적 철학의 완성 등의 여건으로 사실주의라는 한 이름으로 포괄하기 어려운 갖가지 문학이 출현한다. 그들은 각각 다른 입장에서 현실생활의 묘사를 시도한 것이다.

차츰 사회의 근대화와 함께 예술사상의 변동도 심해졌다. 그리고 외국문학 특히 러시아, 프랑스의 자연주의 문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독일 자연주의는 두 개의 중심지― 뮌헨과 베를린에서 각각 특색을 가지고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을 맞이한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토마스 만, 헤세, 릴케, 카프카, 카로사 등 뛰어난 작가를 배출하였으나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의 도발자로 출발하여 패망자로 낙착한 오늘의 독일문학은 재기가 어려울 만큼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1947년 분단된 베를린을 중심으로 나타난 ‘그루페 47’의 권위적인 문학단체는 차츰 이 난관을 극복하여 바야흐로 세계의 문학으로 확실한 참여를 보이고 있다.

1945년 이후 대부분의 독일 작가들은 나치 치하에서 국민들의 삶이나 전쟁 동안의 경험을 소재로 하여 작품을 썼다. 추크마이어(Carl Zuckmayer)는 <악마의 장군>(1946)이라는 희곡에서 양심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도덕적으로 타락한 국가에 복종하느냐 하는 갈등을 나치의 과거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였다. 또한 보르헤르트(Wolfgang Borchert)는 <문 밖에서>(1947)라는 희곡에서 부랑자가 된 귀향 독일병사들의 모습을 그렸다.

1950년대에는 브러히트의 사회비판에 영향을 받은 뒤렌마트와 프리슈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1960년대에 호흐후트는 <신의 대리인>(1963)을 써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는데 희곡은 교황 파우스 12세가 유대인을 박해한 나치를 묵인했다고 비난한 작품이었다.

또다른 희곡 작가 바이스(peter weiss)는 희곡의 전통적인 기법을 따르지 않고 심리학과 정치적 이상을 혼합한 작품 <마라/사드 Marat/Sade>(1964)를 썼다.

대표적인 서독의 전후 소설가로는 뵐, 그라스, 렌츠(Siegfried Lenz), 발저(Martin Walser) 등이 있다. 이들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주제는 나치가 독일에 미친 정신적·물리적 손실과 패배한 전쟁뒤의 재건의 고통이다.

그라스는 폴란드의 한 도시에서 있었던 나치의 통치를 풍자적으로 묘사하면서 전후 서독의 부유한 삶을 그린 <양철북>(1959)으로 이름을 떨쳤다.

동독의 소설가들 역시 전후 독일문학에 기여했는데 욘존(Uwe Johnson)과 볼프(Christa Wolf)는 분단된 독일의 불안을 진지하게 탐구했다.

현재의 독일문학은 몇몇의 대표적인 전후 작가들이 독일문학을 주도하고 있다. 뵐은 소설 <여인과 군상>(1971)에서 순수하고 인간적인 여주인공의 전쟁 전부터 1970년가지 이르는 삶을 추적했고, 그라스는 혁신적인 서사기법으로 소설 <넙치>(1977)에서 페미니즘을 비판적으로 고찰하였다.

동독의 작가들은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플렌츠도르프(Ulrich Plenzdorf)의 소설과 희곡 <젊은 베르테르의 새로운 슬픔>(1973)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郭 福 祿>

중 세[편집]

중세문학[편집]

中世文學

독일문학의 창시는 게르만 민족의 문화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게르만 민족이라고 하지만 민족 대이동 후 유럽 중부에 정주한 것은 서(西)게르만 민족의 일부이다. 이들 여러 부족의 언어는 그 후 각각 발달하여 상당한 차이를 나타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독일국민이라는 공동체의식을 갖게 된 것은 6세기 이래의 그리스도교의 수용(受容) 외에 카를 대제의 작센 정복(772-804)에 따른 대(大)프랑크 왕국 건설에 힘입은 바가 크다. 원래 프랑크 왕국의 통일에 필요한 조건이었던 게르만 민족의 그리스도교화는 카를 대제에 의한 게르만 민족 언어 옹호정책과 더불어 분산되어 있던 이 민족에게 독일국민·독일어권(圈)이 형성되는 원인이 되었다. 지리적으로도 베르됭 조약(843), 메르센 조약(870)에 의한 프랑크 왕국의 동서분할을 통하여 9세기 후반에는 중세 독일왕국의 범위가 거의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문학에 눈을 돌려볼 때 프랑크 왕국 이전에는 게르만 부족 사이를 편력하던 편력시인(遍歷詩人)이 주로 민족 이동기의 영웅을 주제로 하는 서사시를 부르고 다녔다. 13세기 초두의 <니벨룽겐의 노래>도 이 시대에 만들어진 서사시를 도외시하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 후 그리스도교 세력이 증대됨에 따라 현세적 문학은 쇠퇴해 버려, 게르만 문화유산은 이를 보존하려던 카를 대제의 의도도 헛되이 현대에 와서는 <힐데브란트의 노래>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한편 프랑크 왕국 창건 이래의 카롤링거 왕조의 문학은 학자와 승려에 의한 종교문학이었다. 처음에는 라틴어가 문학용어였으나 점차 독일어로 되는 번역문학, 이어서 독일어에 의한 독자의 종교적 작품도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9세기에 게르만 세계를 배경으로 한 성서의 이야기를 저지(低地)독일어로 저술한 <헬리안트>는 이 시대의 대표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900-1050년에는 다시금 라틴어가 성(盛)해져서 독일문학은 불모의 시기를 맞는다. 이 시기에 주목할 것은 고대독일어가 중세독일어로 변화를 보게 된 점이다.

12세기에, 남프랑스 프로방스의 궁정문학이 독일에도 도입되어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독일문학은 현실의 사건을 문학의 대상으로 하고 프랑스 문학의 소재와 양식을 모범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면에는 십자군 원정으로 동방을 알고 견문을 넓히게 된 그들의 세계관이 변화를 일으켰다는 점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새로운 문학의 담당자는 처음에는 승려나 또는 유랑시인이라 불리는 떠돌이 예인(藝人)이었다.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에 걸쳐 독일문학은 꽤많은 걸작을 낳아 사상 초유의 융성기를 맞이했다. 그것은 이미 즐거움을 찾는 유랑시인의 문학은 아니고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기사계급 문학이었다. 그들은 단순한 무인(武人)에 그치지 않고 프랑스 궁정사회(宮廷社會)의 본을 따서 정신적 도덕적인 교양을 쌓으며 신과 현세를 위한 봉사에 노력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르투스왕(아더 왕)의 전설이나 종교적 전설을 소재로 하여 기사의 이상을 묘사한 궁정 서사시와 기혼 귀부인에 대한 헌신적 봉사를 통해 욕망을 버리고 절대적 헌신을 이상으로 하는 사랑을 노래한 궁정 서사시가 탄생하였다.하르트만 (1165?-1215?)의 <불쌍한 하인리히>, 볼프람(1170?-1220?)의 <파르치팔>, 고트프리트(13세기경?)의 <트리스탄>, 발터의 민네장이나 격언시(格言詩) 등, 그 어느 것이나 이 시대(1150-1250)를 독일문학의 고전기라고 불리게끔 한 걸작들이다. 더욱이 게르만 시대의 영웅을 소재로 한 영웅 서사시(민중 서사시라고도 한다)도 이 시대에 새로이 쓰였다. 그 중에서도 <니벨룽겐의 노래>는 전기한 걸작들에 뒤떨어지지 않는 우수한 작품으로 독일의 민족적 유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13세기 후반에 들어서서는 기사계급의 몰락과 더불어 이 전성기가 끝나고 중세도 그 말기에 접어드는 것이다.

힐데브란트의 노래[편집]

Hildebrandslied (9세기초)

작자미상의 영웅 서사시.

처음에는 랑그바르데(게르만 민족의 한 부족)의 말로 되어 있던 것을 8세기 말에 독일어로 번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풀다(남부 독일의 소읍)의 승려에 의해 성경의 여백에 필기 연습으로 기입된 것으로 보이는 게르만 영웅 서사시로서 독일에 잔존한 오직 한 편이라 한다.

아내와 한 아들을 남기고 동방으로 달아났던 영웅 힐데브란트는 30년 후 고향에 돌아와 아들 하두브란트와 상봉한다. 부친이 죽은 것으로 믿는 하두브란트는 부친의 말을 흉노의 책략이라고 여겨 부친에게 싸움을 건다. 힐데브란트는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면서도 아들과의 싸움을 시작한다. 부자간의 대화를 주로 한 이 시는 67행째에 가서 끊어져 있어 그 결과를 알 길이 없다. 부자간이 대립하는 중에서도 모든 인간적 감정에 앞서 영웅의 명예를 중히 여기는 아버지의 태도에서 게르만 민족의 정신을 엿볼 수가 있다.

기사문학의 작자[편집]

騎士文學―作者

1150-1250년 사이의 백년간은 독일 기사문학(궁정문학)의 최고 전성기였다. 기사문학은 궁정 서사시와 궁정 서정시로 구분되어 전자의 대표 작가로서는,

▷ 볼프람 폰 에셴바흐

▷ 하르트만 폰 아우에

▷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등을 들 수 있다.

하르트만의 작품은 아르투스왕(王)의 전설에 의거한 <에레크> <이바인> 외에 G. 하우프트만에 의한 희곡화된 <가련한 하인리히>, 토마스 만의 <선택된 인간>의 원전(原典)이 되어 있는 <그레고리우스> 등 다수이다. 한편 고트프리트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가운데서 사랑의 고민과 궁정사회의 도덕적 갈등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도 바그너를 비롯한 몇몇 사람의 작곡상의 소재가 되어 있다.

서정시인으로서는,

▷ 발트 폰 데어 포켈바이데

▷ 라인마르 폰 하게나우

▷ 하인리히 폰 모룽겐 등을 들 수 있다.

볼프람 폰 에셴바흐[편집]

Wolfram von Eschenbach (1170?-1220?)

독일 서사시인.

1917년 이후 시인의 이름을 따서 볼프람스 에셴바흐라고 칭하게 된 독일 중부의 프랑켄이란 소읍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기사계급의 출신이지만 봉토(封土)를 받지 못하여 각지를 편력하면서 제후(諸侯)의 도움을 받아 시작(詩作)에 종사하였다.

독창적인 문체로 표현된 대표작 <파르치팔>은 아르투스왕의 전설을 소재로 하고 있는 것으로 중세 기사의 모습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른 이상상(理想像)으로까지 승화시켰다. 독일 중세 서사시의 최고 걸작이라 일컬어진다. 기사 파르치팔의 성장과정을 묘사한 이 작품은 또한 독일의 이 방면 소설의 기원이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편집]

Walther von der Vogelweide (1170?-1230?)

독일 서정시인.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짐작되나 그 전기(傳記)는 분명치 않다. 봉토가 주어지지 않는 종사(從士:고대 게르만 사회에서 상전을 지키는 시종) 출신으로서, 청년시절에는 빈 궁정에서 지냈으며 그 후 각지를 편력하였다. 1220년경 베르츠부르크에 봉토를 하사받았고,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빈 시절에는 라인마르의 영향을 받아서 전통적인 궁정 서정시를 썼으나 뒤에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소녀와의 사랑을 노래하고 여성의 미와 덕을 찬미하였다. 청신하고 풍부한 감정과 경험을 토대로 하는 시작(詩作)태도에 의해 궁정 서정시의 극복자·완성자라고 일컬어졌다. 예리한 정치비판을 지닌 격언시(格言詩)로도 뛰어난 바 있다.

니벨룽겐의 노래[편집]

Das Niebelungenlied (1200?)

작자 미상의 민중 서사시.

단편(斷編)적인 것을 포함해서 삼십 여 종의 사본이 전해지고 있는데 가장 오래된 사본도 122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원작은 그 저자와 더불어 불명이다. 오늘날에는 1200년경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일보던 기사(騎士)가 고대 게르만의 영웅전설을 집대성하여 발표된 작품으로 해석하고 있다.

내용은 전반에서는 영웅 지크프리트와 군터왕(王)의 누이동생 크림힐트와의 결혼, 그에 얽히는 군터왕(王)과 프룬힐트와의 결혼, 하겐의 배반에 의한 지크프리트의 암살이 화려한 정경묘사로서 표현되어 있다. 후반은 아주 판이하게 음울한 분위기 가운데 이야기가 펼쳐진다. 크림힐트는 흉노족의 국왕 에첼과 결혼하여 지크프리트의 원수를 갚을 것을 결의한다. 이렇게 해서 흉노국(匈奴國)에 초청된 부르군트의 사람들과 흉노족 간의 사투가 벌어져 마침내는 양(兩) 민족이 모두 멸망한다는 것이다.

게르만 민족 이동기의 영웅을 소재로 한 이 서사시에는 전후반 각각 저자가 참고로 한 작품이 따로 있었다고 보여지며 그 구성면이나 내용의 균형이 잡혀 있는 점에서 중세기 최대 걸작 중의 하나이다. 특히 화려하고 호사스러운 궁정사회를 배경으로 중세의 기사도덕(명예와 충성)을 게르만 민족의 영웅주의에 결부시키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또한 바그너의 가극 <니벨룽겐의 반지> 원전(原典)이다.

중세 말기의 문학[편집]

中世末期―文學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붕괴와 더불어 13세기 후반에 들어서자 기사계급은 몰락하고 시민계급이 대두된다. 문학면에서는 궁정문학에서 나타났던 이상과 조화는 소멸되고 혼란과 부조화의 시대에 돌입하였다. 그중에서도 직인조합(길드)의 예(例)에 따라 설립된 장인(匠人) 가수양성학교는 엄격한 규칙의 습득을 기본으로 하는 내용의 직인가(職人歌)를 남겼으니 중세 말기의 시민사회의 소산으로서 주목을 끄는 바 있다.

한편 오래도록 궁정문학의 그늘에 묻혀 있던 종교문학도 다시 세력을 되찾아, 현세에 있어서의 신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신비주의는 독일어에 의한 설교를 통하여 산문학(散文學)에 다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 교회의 부활제극은 시중의 광장으로 진출하고 주제도 그리스도의 탄생·수난 그 밖에 많은 것을 집어 넣어 시민의 참여를 얻음으로써 여기에 명실상부한 연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기사문학의 흐름을 탄 서사시는 점차로 저속하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러는 중에도 15세기에 풍자문학이 생겨난 것은 중세기말의 한 특징이라 지적될 수 있다.

에크하르트[편집]

Eckhart (1260?-1328?)

독일 신비주의자.

튀링겐 지방의 호호하임에서 출생하고 1302년 파리에서 신학의 마이스터(학위)를 받았다. 그래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고 불리었다. 파리나 쾰른에서 신학교수로 활약하였으며 독일어 설교로 “독일 산문학의 어버이”라고 불린다. 사후 이단으로 몰렸으나 그의 사상은 중세 말기의 사상가에게 비상한 영향을 주었다.

뷔트너(B

ttner)의 현대어역(現代語譯)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논문과 설교(Meister Eckharts Schriften und Predigten)>(1903-10)는 가장 유명하다. 그의 전집은 1936년 이후 간행되었다.

16·17세기[편집]

16·17세기문학[편집]

-世紀文學

근세 유럽의 시작이라고 하는 르네상스 운동은 독일에서는 다소 늦어져 16세기에는 보다 정신적 내면적인 양상을 시현하였다.

에라스무스(1466?-1536)에 의하여 대표되는 소위 인문주의자들의 고전연구와 루터에 의하여 포구가 열린 신교운동은 둘 다 중세적인 몽매(蒙昧)나 속박으로부터의 인간성의 해방을 지향한 점에서 르네상스적 성격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상으로 본 16세기는 종교개혁 시대로서의 성격을 반영한 신학·철학·윤리 등에 관한 팜플렛 유행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전(前)시대의 연장에 불과하며, 한편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愚神禮讚)>이나 피샤르트(1547-90?)의 작품 등과 같은 학자적 풍자문학과 또한 <파우스트 박사 이야기>나 <틸오이렌슈피겔>과 같은 대중서적의 전성, 그리고 이 양자의 중간적 존재에 해당하는 한스 작스의 창작활동 정도를 들 수 있을 뿐, 비크람의 산문소설에서 볼 수 있듯 너그럽게 보아 근세 시민문학의 태동기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때까지의 수난극이나 사육제극 외에 학교극이나 제수이트극(劇)이 생겨나고 또 영국인 극단의 영향 등도 받아 극 장르의 소지가 점차 형성되어 간 것은 이 시기의 주목할 만한 특색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독일문학은 외국의 르네상스 문학의 급격한 유입과 그에 자극받은 국민문학의 고양으로 갑자기 활기를 띠어 갔다.

이 상황은 ‘때늦은 르네상스’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전체적으로는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와 국민주의의 기이한 복합이라는 독특한 문학이 성립한다. 예술형태사(藝術形態史)에서 전용된 말로 17세기 문학에는 ‘이그러진 진주’라는 원의(原意)의 ‘바로크’라는 어휘가 붙여지는 일이 적지 아니한데 독일 바로크, 특히 오피츠를 위시한 신교의 문학은 그런 독자적인 왜곡성(歪曲性)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시대의 표징인 30년전쟁은 비록 비정상적이며 또 불행한 방법이기는 하였으나 외국문화의 유입과 모방, 또는 거꾸로 국민사상의 고무를 통해 오히려 문학활동을 촉진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생존과 신앙의 위기는 이 시기 최대의 극시인(劇詩人)인 그리피우스(1616-64)에게 불안과 절망의 소네트뿐만 아니라 장엄한 순교의 비극도 낳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소네트나 5막의 비극은 독일문학의 신형식이었다. 본격적인 희극이나 장편소설도 출현하게 되었다. 신교도인 게르하르트도, 구교도 시페도 소박하고 장엄하게 신의 영광을 찬양하였으며 개종자 세프라는 신과 피조물(被造物)의 일치를 주장하는 뵈메(1575-1624)의 신비사상을 아름답게 노래하였다.

이 세기는 <바보 이야기>에서도 묘사되었듯이 격동과 혼란의 시대로 시인들에게는 난세의 긴장과 고뇌의 그림자가 공통적으로 비쳤으며 그 그림자는 이윽고 로엔시타인이나 호프만 스발다우의 퇴폐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틸 오이렌피겔[편집]

Till Eurenspiegel (最古版 1515)

16세기에 전성을 보인 대중서적 중의 하나이다.

북부 독일 농민의 아들로 등장하는 동명(同名)의 주인공이 주거나 직업을 전전하면서 가는 곳마다 웃음을 퍼뜨리고 다닌다고 하는 장난꾸러기의 방랑기(放浪記)이다. 시골사람의 우직(愚直)함을 이용하여, 시민생활을 교활하게 공격하는 내용으로 이런 작법이 이 작품에 풍자적인 기조와 그 주인공에게 일종의 성격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루터[편집]

Martin Luther (1483-1546)

독일 종교가.

1517년 10월 31일 뷔텐베르크의 신학교수인 루터는 95개조의 질문서를 교회의 벽에 붙였다. 이 순간의 중요성과 의미는 가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복음의 유일한 근거일 수 밖에 없는 성서의 독일어 번역(사약 1522)을 위하여 수다한 방언(方言) 중에서 하나의 새로운 공통어를 만들어 냄으로써 독일문학에 직접적으로 거대한 공헌을 하였다. ‘신고지 독일어(新高地獨逸語)’의 문장어(文章語)는 이에 의해 기초가 잡혔다.

이 독일어로 신의 은총을 구하고 민중에 호소하며 적과 싸운 것이 루터의 승리를 가져오는 데 다대한 공헌을 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작스[편집]

Hans Sachs (1494-1576)

독일 시인·극작가.

4천 편의 직인가(職人歌), 1천7백 편의 각종 시, 61편의 비극, 64편의 희극 등 드물게 보는 다작과 광범위한 소재로 알 수 있는 인문주의적 박식, 발랄한 신교정신, 또 무엇보다도 전직(구두방)의 경험으로 해서 16세기 시민문학을 가장 잘 대표하는 뉘른베르크 시인이다. 개성이나 예술미가 결여되어 있고 단순하며 평면적인 작품은 거의 다 문학적 가치를 상실하고 있으나 도덕적·민중적 정신의 전통상 중요한 존재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독일의 소위 사육제극(謝肉祭劇)은 그를 빼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85편의 작품 중 오늘날까지도 상연되고 있는 것이 많다.

오피츠[편집]

Martin Opitz (1597-1639)

독일 시인·비평가.

북부 독일의 슐레겔 궁정시대에 각광을 받은 전기 바로크 문학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광범한 분야에 걸친 문학상의 계몽적인 실천활동을 통하여 독일문학에 서구화·근대화에의 전기를 가져오게 하였다. 특히 <독일 시학의 서>(1624)는 독일 최초의 문예이론서로서 유명할 뿐만 아니라 18세기초에 이르기까지 창작상의 규범으로 존중되었으며 특히 새 운율법과 시형(詩形)의 제창에 큰 공적을 남겼다. 그가 의도하는 바는 고전이나 근세 외국문학의 여러 형식을 적극적으로 모방하면서 국민문학의 수준을 높이려 하는 데 있었다.

그림멜스하우젠[편집]

Hans Jakob Christoffel von Grimmel- shausen (1622?-1676)

독일 민중소설가.

귀족적·학자적 교양 취미가 강조되던 풍조 밑에서 그의 오락적인 교훈소설(敎訓小說) <바보 이야기>는 이색적인 것으로 전(前)세기의 유산에 줄이 닿아 있는 보수적 문학 경향을 대표하는 것이다. 교묘한 요설(饒舌)과 풍자, 그리고 30년전쟁의 혼란기 특유의 생활감각을 일련의 피카레스크 소설(小說)속에 수록하고 있다. 그의 전기에 관해서는 불명한 점이 많다.

바보 이야기[편집]

Der abenteuerliche Simplicissimus (1669)

원제 <모험가 심플리치시무스>. 그림멜스하우젠 소설.

피카레스크 소설형식으로 30년전쟁시대에 생존한 주인공의 모험적 인생을 묘사하고 있다. 대중소설, 연대기, 여행기, 천문, 지리지, 박물지(博物誌), 고전, 철학, 종교서 등 이 세기의 잡다한 문학소재가 그의 특유한 무상관(無常觀)과 풍자에 섞여 생명력이 넘치는 난세(亂世)의 소영웅(小英雄)을 ‘재미있고 유익하게’ 자전적으로 엮고 있다.

18세기[편집]

18세기 문학[편집]

-世紀文學

18세기는 유럽의 정신사상 계몽주의 시대라 불리고 그 사상은 계몽사상이라 지칭되고 있다.

근대의 계몽사상은 처음 영국에서 발생하여 프랑스에서 최고도로 발달하고 독일에도 파급되었는데 과연 ‘계몽’이란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인가. 이에 관해서는 18세기의 철학자 칸트의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계몽이란 인간이 자기 책임 하에 있는 미성년 상태에서 탈각하는 것이다. 미성년이란 남의 지도 없이는 자기의 지성을 발취할 능력이 없는 상태라는 뜻이며 또한 미성년 상태가 자기의 책임하에 있다는 것은 그런 상태의 원인이 지성의 결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의 지도없이 지성을 발휘하려는 결의와 용기가 결핍되어 있음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힘써 현명하여라!’ ‘네 자신의 지성을 발휘할 용기를 가져라!’고 하는 것이 계몽의 슬로건인 것이다.” 이것은 1784년에 발표된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논문의 서두에 있는 한 구절로 이에 의하면 참다운 ‘계몽’이란, 인간이 자기의 지성을 활용하여 용기를 가지고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진리를 극복하는 것이라는, 적극적인 정신운동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결국 전통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합리적 지식을 보급하여 무지와 미신의 상태로부터 민중을 해방하고 그것에 의해 합리적·현세적인 근대 시민사회를 건설하려고 하는 생각, 이것이 즉 18세기의 계몽사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계몽사상에는 사유의 합리성, 종교적·정치적 권력으로부터의 독립, 과거 특히 중세에 대한 관계의 비역사성(非歷史性), 낙천적, 사해동포적 등의 특색이 있다.

독일 계몽주의는 30년전쟁의 차질로 인해서 선진국보다 뒤떨어진 결과가 됐으나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豫定調和說)이나,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제 계몽주의 등을 출현케 하였다. 독일 문학도 이러한 시대사조의 권외에 있을 수는 없었다. 당시에 활약했던 문학가로서는 곳셰트(1700-66), 보트머(1698-1783), 브라이팅거(1707-76), 클롭슈토크, 하게도른(1708-1754), 게레르트(1715-69), 빌란트 외에 다수가 있다. 그러나 이중에서도 독일 계몽주의 문학의 기수라고 불리기에 알맞는 사람은 라이프치히 대학의 교수인 곳셰트였다. 그는 독일 계몽주의 철학자 볼프의 제자로 독일문법을 저술하고 사전 편찬에 주력하는 등 독일어 정리에 공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우(女優)노이베린 등과 협력하여 독일 연극계의 향상에 힘을 기울여 그것을 시민의 교양을 얻는 광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그 자신은 독창적 시재(詩才)를 갖고 있지 못하였으며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을 모범으로 삼은 그의 문학관은 합리주의에 치우쳐 시야가 좁고 정열이나 감정의 권리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얼마 못 가서 비난을 받게 되었다.

반격자의 대표세력은 스위스의 보드머와 브라이팅거였다. 이 두 사람은 문학의 목적을 도덕의 교화와 오락에 두고 바로크적 난삽(難澁)을 배제하고 명석한 표현을 존중한 점에서는 계몽주의자에 속하나 문학의 세계에 비합리적인 요소를 허용하고 문학의 본질은 이성이 아니고 정서와 상상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라는 ‘공상(空想)’의 권리를 주장한 점에서 곳셰트와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곳셰트의 프랑스 취향이 무너지고, 영국문학이 독일문학에 도입되는 길이 트이게 됐다. 그들은 중세 독일문학에도 관심을 쏟아 그것을 간행하였다. 또 이 시대에는 전술한 곳셰트의 일파와 이와 부분적으로 대립을 보이는 스위스파(派) 외에 계몽적·교훈적인 시풍으로서 알려져 있는 슈나벨(1690-1750), 하라(1703-77), 브로케스(1680-1747) 등이 있으나, 이에 대항하여 차안(此岸)의 생활을 긍정하며, 생의 기쁨과 향락을 노래한 로코코 문학이 있어 전술한 하게도른, 게레르트 및 빌란트는 로코코 문학의 대표적 시인들로서 유명하다.

빌란트[편집]

Christoph Martin Wieland (1733-1813)

독일 시인.

목사의 아들로 슈바벤 지방의 오바호르츠하임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경건주의(敬虔主義) 교육을 받았다. 튀빙켄 대학에서 법학을 배우고(1750-52) 이어 보트머에게 초치되어 취리히로 나아가(1752) 경건주의에 심취하였다. 그 후 바이마르의 공비(公妃) 아마리아에게 채용되어 궁정고문관이 됐고(1772), 공자(公子) 카를 아우구스트의 교육 담당자가 되었다.

그는 레싱 클롭슈토크와 더불어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전기를 대표하며 다수의 창작물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소설은 <아가톤의 이야기> <아브데라의 사람들>(1776), 운문소설(韻文小說) <무자리온>(1768) 및 서사시 <오베론>(1780) 등 네 편이 있다. 그는 독일어 문체에 로코코풍(風)의 우아한 격조를 도입하여 문예지 <독일의 메르쿠르>를 편집하고 번역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아가톤의 이야기[편집]

Geschichte des Agathon (1766-67)

빌라트의 전형적인 교양소설.

이것은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을 서술한 작품으로 주인공 아가톤을 플라톤의 이상주의를 신봉하는 시인이나, 궤변가 히피아스는 그를 저속한 유물론자로 전향하도록 하려 한다. 아가톤은 이 설에는 빠지지 않았으나 다나에라는 매혹적인 여인에게 사로잡힌다. 여러 가지 사상적 방황을 겪은 주인공은 결국 이상과 현실과의 조화라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레싱[편집]

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

독일 극작가·비평가.

작센의 카멘츠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의학과 신학을 배웠으나 일찍부터 연극에 관심을 가져 초기의 희극 <젊은 학자>(1747)는 여배우 노이베린 극단에 의해 상연되었다. 그 후 베를린에서 문필생활을 계속하여 비극 <자라 잠프존 양(孃)>(1755)을 발표 하였고 브레슬라우의 총독 타우엔친 장군의 비서시절(1760-65)에는 향락생활을 보내는 한편 다방면의 재료를 수집하여 <미나 폰 바른헬름> <라오콘> <함부르크 연극론> 등의 구상을 준비하였다. 이중 <군인의 행복>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미나 폰 바른헬름>(1765 완성, 1767 출판 초연)은 독일 최초의 걸작 희극으로 7년전쟁 후의 정치권력이나 사회상태에 대한 비판이 담겨져 있다. 그 후 그는 1767년 함부르크에 창설된 국민극장에 고문으로 취임하여 연극평론 <함부르크 연극론>(1767-69)을 집필하였다. 이것은 그 극장에서 상연된 희곡에 관한 논평과 독일연극의 존재양식을 논한 것으로서 독일연극의 지표가 된 중요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 극장은 경영부진으로 얼마 후 해산되었으므로 그는 1770년 볼펜뷔텔시(市)로 가서 시의 도서관장이 되었으며 이곳에서 그의 연극이론을 그대로 실천에 옮긴 비극 <에밀리아 갈로티>(1772)를 완성하고 그의 최후 극시 <현자(賢者)나탄>을 집필하였다. 그의 최후 저작은 <인류의 교육>(1780)인데 만년에는 건강을 해쳐 52세로 박행했던 삶을 마쳤다.

레싱은 진정한 의미에서 독일 계몽주의의 가장 위대한 완성자인 동시에 독일 시민문학의 기초를 개척했으며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의 영향을 배척하고 독일정신에 근거한 문학을 명석한 이론과 창작의 실천이라는 두 가지 면에서 확립한 당대 제일의 지도자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라오콘[편집]

Laokoon (1766)

레싱 미학 논문.

이것은 독일의 미술사가로서 불후의 공적을 남긴 빈켈만의 주저 <고대미술사>(1764)의 오류를 정정(訂正)하려고 집필한 독일 최초의 본격적 예술론이다.

<회화와 시의 한계에 관하여>라고 부제를 붙인 것같이 그는 여기에서 회화를 통하여 조형예술 일반을, 시를 통하여 언어예술 일반을 대표케 하고 양자를 공간예술과 시간예술로서 대비시켜 그 본질적 차이를 논하였다.

즉 레싱은 트로이의 신관(神官)인 라오콘 부자의 빈사(瀕死)의 순간을 취급한 그리스 조각이 부자를 추한 표정으로 표현하지 않은 것은 빈켈만이 그리스 예술의 본질이라고 본 ‘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성’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조형예술의 본질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조형예술은 일순간을 포착하여 형태의 미를 표현하는 데 대해 문학은 일정한 결과를 밟는 행위를 서술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그때까지의 그릇된 견해를 반박하였다.

현자 나탄[편집]

Nathan der Weise (1779)

레싱의 종교사상극.

레싱은 함부르크의 교수 라이마루스의 유고를 <모씨(某氏)의 단편(斷片)>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발단이 되어 그는 함부르크 루터파의 목사 루체를 상대로 신앙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관한 치열한 신학논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때 레싱의 논문 15편은 이 방면의 논문 중의 수작이라고 평가되는 것이었으나 관헌에 의해 그 논의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는 본래의 연극 분야로 복귀하여 같은 종교문제를 이 분야에서 취급하였다.

그것이 극시 <현자 나탄>이었다. 이의 핵심을 이루는 세 개의 반지 이야기는 보카치오의 단편집 <데카메론>에서 그 소재를 얻은 것이다. 레싱은 나탄이 준 세 개의 반지의 진위(眞僞)를 둘러싼 3형제의 다툼을 빌어 진정한 종교는 회교이든 그리스도교이든 유대교이든 불문하고 종파를 초월하여 일치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는 종교상 또는 인간으로서의 이성적 관용의 정신을 설파했다.

슈투름 운트 드랑[편집]

Sturm und Drang

합리주의(合理主義)를 기조로 한 계몽사상이 레싱에 의해 문학적으로 완성되었을 즈음에 슈투름 운트 드랑(疾風怒濤)이라고 불리는 비합리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도화선 구실을 한 것은 루소로서 그는 그의 저서 속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며 인간존재의 근원인 자연으로의 복귀를 주장하고 개인감정과 의지의 존엄성을 자각하게 하였다. 이 가르침은 마침내 프랑스 혁명으로 발전하였으며 독일에서는 이것이 지성이나 작위(作爲)에의 반항, 자연감정의 해방으로 인식되어, 주로 정신적·문학적인 혁명운동으로서 발전되었다.

이 운동의 숨은 지도자는 북방의 마인(魔人)이라고 불리던 하만(1730-88)으로 헤르더를 거쳐, 당시 20대의 천재들에 의해 개화(開花)를 보았다. 그 시기는 1770년-1786년에 이르고 있는데 후에 클링거의 희곡 <슈투름 운트 드랑>(1776)의 표제를 가지고, 이 시기의 문학운동 전체를 호칭케 한 것이었다. 이 운동에 속하는 시인으로서는 클롭슈토크를 숭배하여 괴팅겐 시인동맹(森林同盟)을 결성한 J. H. 포스, 슈톨베르크 형제, 헤르더, 뷔르거 등의 서정시인이 있으나 그 주류는 셰익스피어를 숭배하던 렌츠, 클링거, 바그너, 라이제비츠 등의 극작가들이었으며, 이 쌍방에 걸쳐 진정한 천재를 발휘한 것은 괴테와 실러이었다. 희곡의 특징으로서는 형식적으로는 삼통일(三統一)의 법칙이 무시되고, 운문도 쓰이지 않으며 내용적으로는 형제살해, 영아살해 등이 테마로 즐겨 쓰였다.

클롭슈토크[편집]

Friedrich Gottlieb Klopstock (1724-1803)

독일 시인.

크베들린부르크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예나, 라이프치히 양(兩)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748년에 종교서사시 <구세주>의 최초의 3가장(歌章)을 <브레멘 기여(寄與)>(반(反)곳셰트의 기치 아래 라이프치히 대학생을 주체로 하는 브레멘 기여파의 주간 문예지)에 발표하였다. 그후 보트머에게 초치되어 취리히로 나갔으며, 함부르크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주저 <구세주>(1773)는 밀턴의 <실락원>을 본떠 저술된 20장으로 되어 있는 헥사메타의 대작으로 종교적 감정이 충만한 부분은 제3장까지이고 장편 서사시로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서정 시인으로서의 시재가 가장 잘 발휘되어 있는 것은 <송시(誦詩)>(1771)로서, 격조 높은 음악적 언어를 구사하며, 조국과 사랑, 우정, 신앙을 노래하여 젊은 괴테를 위시하여 횔데를린이나 릴케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 밖에 6편의 희곡 등이 있으나 뛰어난 것은 없다.

헤르더[편집]

Johann Gottfride Herder (1774-1803)

독일 사상가·문학자.

동(東)프로이센의 교사 아들로 태어나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신학을 마치고 리가에서 부목사 지위를 얻었다. 그 후 프랑스에 건너가 스트라스부르에서 괴테와 상봉하고 후일 그의 추천으로 바이마르 교회 감독장이 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하만(Hamann)의 생(生) 철학과 문학관·언어관 등을 계승하여 외국문학, 특히 프랑스 문학의 모방을 배척하며 호메로스, 소포클레스, 셰익스피어 등의 작품을 민족성에 뿌리 박은 진정으로 위대한 문학이라고 찬탄하였다. 그의 문학관의 특색은 진정한 시작(詩作)이라는 것을 세련된 개인의 작품으로서가 아니고 소박한 민족의 소산으로 보려는 점에 있다. 이 입장에서 그는 자연시(民衆文學=Volkspoesie)와 예술시(技巧文學=Kunstpoesie)로 구별하고, 전자를 후자보다도 한층 높이 평가하고 있다. 후일 <제(諸)민족의 소리>(1778-79)라는 민요집 2권을 출판한 것은 그 연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 체재중 직접 젊은 괴테에게 전해져, 독일문학의 일대 전환이 감행되는 것이다. 저서에는 <언어기원론>(1772), <독일인의 특질과 예술에 관한 팜플렛>(1773) 등이 있으나 주저는 <인류사의 철학을 위한 제이념(諸理念)>(1784-91미완)이다.

괴테[편집]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독일 시인.

법학박사·왕실고문관(王室顧問官)인 요한 카스파르를 아버지,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시장의 딸 카타리네 엘리자베트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북독일계(系)의 아버지로부터는 ‘체격과 근면한 생활 태도’를, 남독일계의 어머니로부터는 예술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짓는 흥미’를 이어받았다.

어려서 천재교육을 받았으며, 7년전쟁 중 그의 고향이 프랑스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프랑스극(劇)과 회화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레트헨과의 사랑(1763-64)이 깨어진 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을 마쳤다. 재학중(1765-68), 안나카타리나 쇤코프와 연애를 하였고, 이 체험을 통해 로코코풍(風)의 시나 희곡을 발표하였으나 분방한 생활로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향하여 성 요양 중(1768-70), 클레텐베르크 양(孃)과의 교제를 통하여, 경건한 종교감정을 키웠으며, 또한 신비과학이나 연금술(鍊金術)에 흥미를 기울였다. 회복 후,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법률박사 학위를 얻었다. 그러던 중에 헤르더와 상봉해, 문학의 본질에 눈뜨고 성서, 민요,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등에 친숙하였으며 제젠하임의 목사딸인 프리데리케 브리온을 사랑하여 민요풍의 청신 소박한 서정시를 지었고, 대승원의 건물을 보고 고딕 건축의 진가를 터득하기도 하였다. 귀향후 변호사를 개업(1771)하였으나, 관심은 오히려 문학에 쏠려 <괴츠>의 초고를 정리하고 다룸슈타트의 메르크와 친교를 맺었다. 1772년 법률실습을 위해 베츨라 고등법원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샤를로테 부프를 알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슈투름 운트 드랑기(期)의 대표작인 희곡 <괴츠 폰 베를린힝겐>(1773)과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하여 일약 그 문명(文名)을 높였다.

1775년 4월 릴리 쇠네만과 약혼을 하나 얼마 후 파혼하고, 바이마르공(公) 카를 아우구스트에게 초청되어 11월 바이마르에 도착했다. 바이마르 시절 전기의 약 10년간(1775-86)에는 정무를 담당하여 추밀참사관(樞密參事官), 추밀고문관, 내각수반으로서 치적을 쌓는 한편 광물학·식물학·골상학(骨相學)·해부학 등의 연구에도 정진하였다. 그 밖에 아우구스트공의 모후(母后) 안나 아말리아, 시인 빌란트, 고전적 교양미가 풍부한 크네베르 소령, 궁정가수 코로나 슈레타 등 궁정 안의 사람들과 밀접한 친교를 맺었다.

괴테는 이런 정무나 사회 및 자연연구를 통하여 자연과 인생을 지배하는 법칙을 터득하고 자기 억제를 배우며 슈투름 운트 드랑적(的)인 격정을 극복하여 점차 평정과 원숙의 도를 더해 갔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샤를로테 폰 슈타인 부인에 의한 감화가 있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우아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일곱 아이의 어머니였으나, 괴테의 이상적인 여인상이었다. 부인에 대한 애정과 동경, 절도와 체념, 이러한 것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시인에게 내면적인 평정을 갖게 하였다.

이러한 내면적인 변화에 응하여 저술된 것이 희곡 <타우리스섬의 이피게니에> <타소>와 서정시 <인간성의 한계> <신성(神 性)> 등의 시작(詩作)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10년간은 궁정생활의 중압으로 마음의 안정을 빼앗겨 정돈된 창작활동을 할 여유를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괴테는 1년반에 걸쳐서 이탈리아로(1786-88) 여행을 떠났다. 이에 관해서는 후일 <이탈리아 기행>(1816)과 <제2차 로마 체재>(1829)에 자상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탈리아에서 괴테는 남국의 밝은 자연과 고미술에 접함으로서 고귀한 내용을 완성된 형식으로 표현하는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타우리스섬의 이피게니에>(1786)와 <타소>는 그의 대표작이며, <에크몬트>(1787)는 슈투름 운트 드랑에서 고전주의로 옮겨가는 과도기의 작품이다. 귀국 후, 얼마 안 있어 불피우스와 동거하여 장남 아우구스트를 낳았으나(1789) 그해 7월, 프랑스 혁명 발발로 괴테는 아우구스트공을 따라 프랑스에 종군하여(1792) 마인츠의 포위전에 참가하였다(1793). 그러나 그 다음해에 독일 문학사상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괴테와 실러의 상봉이었다.

1794년 7월말, 예나에서 자연과학 회의의 귀로에 종합적이며 직관적인 괴테와 이념적이고 분석적인 실러는 괴테의 식물변형론을 통하여 상호 이해하는 바 되어 1805년 실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친교가 계속되었다. 양자간에 교환된 서한은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가장 귀중한 자료로 되어 있다. 실러와 사귀는 동안에 저술된 주된 작품에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헤르만과 도로테아>(1797)가 있다.

실러의 사후, 만년에 접어든 괴테는 <시(詩)와 진실(眞實)>을 위시한 일련의 자서전 저술에 착수하는 동시에 이미 착수하였던 창작의 완성에 힘썼다. <친화력(親和力)>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와 <파우스트>를 완성하였고, 또한 <서동시집(西東詩集)>(1819), <마리엔바트의 애가(哀歌)>(1823)가 저술되었다. 이 밖에 그의 만년에 관해서는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 속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편집]

(1774)

괴테 서간체 소설.

슈투름 운트 드랑기(期)의 대표작으로, 이 소설의 성립 계기에 관해서는 작자 자신의 세 가지 개인적인 체험을 들 수가 있다. 즉 샤를로테 부프와의 연애, 에루사렘의 실연 자살, 막시밀리아네 브렌타노와의 교섭이다. 괴테는 1772년 5월, 법률의 실무견습차 베츨라의 고등법원에서 일하면서 이곳에서 알베르트의 원형(原型)이 된 케스트너와 그 약혼녀 샤를로테, 그리고 유부녀 헤르트 부인에게 실연하여 권총자살을 한 에루사렘을 알게 되었다. 샤를로테에 대한 사랑을 고민하던 괴테는 9월에 이곳을 떠나 귀향 도중 코브렌츠에서 막시밀리아네를 알게 되었다. 귀향 후 1개월쯤 되어 에루사렘의 자살의 소식을 들었다. 이러한 외적 사건을 연결하여 괴테는 베르테르의 비극을 창조해 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실연의 이야기가 아니고, 일체의 사회적 통념을 배척하여서라도, 인간 본연의 감정을 살리며, 해방된 심정을 발양할 권리를 주장하려는 적극적인 정열의 저서로 젊은 괴테의 내면생활을 유감없이 토로한 작품이다.

타소[편집]

Torquato Tasso (1785)

괴테 희곡.

이 작품은 <타우리스섬의 이피게니에>(1786)와 더불어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대표작이라 불리고 있는데 <이피게니에> 보다도 한층 강하게 바이마르 궁정에 있어서의 괴테 자신의 개인적 체험이 수록되어 있다. 실제인물인 타소는 시인(詩人)으로서 1572년-1577년까지 페라라의 궁정에서 후한 대우를 받으며, 제1회 십자군을 제재로 한 <예루살렘의 해방>(1580)을 완성하였으나 대신(大臣)안토니오의 시기를 받아 그 자신은 피해망상에 걸려, 유랑하던 끝에 로마의 어떤 수도원에서 최후를 마친 이탈리아의 서사시인.

괴테는 이 타소를 작품 중의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거기에 공작과 그 여동생인 공녀 레오노레 대신 안토니오를 배치하는 한편 바이마르 궁정에 있어서의 괴테, 아우구스트공(公), 슈타인 부인과 대신 프리취 등의 관계를 투영시켰다. 바이마르 궁정에 드나들게 된 이후의 괴테는 궁정사회의 복잡한 인간관계에 염증을 느껴 실생활과 재능 간의 불균형으로 인해 고민하는 일이 많았으나 10년에 걸친 슈타인 부인과의 연애를 통하여 자제와 조화를 터득하고 고전시인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타소>는 이 고민과 체념의 과정을 묘사한 작품이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편집]

Wilhelm Meisters Lehrjahre (1796)

괴테 장편소설. 초고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연극적 사명>(1777-86, 1909발견)이라 불리던 미완성의 연극소설이었으나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 후 실러의 권유에 따라 이것을 주인공의 자기 형성과정을 묘사한 교양소설로 완성시켰다. ‘수업시대’라는 명칭은 독일 중세의 직인 조합에서 유래하며 직인이 되려면 우선 스승 밑에서 도제(徒弟)로서 수업을 쌓고 이어 직인으로 편력하면서 기술과 인격을 닦아야 비로소 마이스터로 독립할 수가 있었다. 주인공인 빌헬름은 유복한 상인의 자제였으나 연극에 열중하여 유랑극단에 몸을 의탁한다. 그는 이것을 계기로 넓은 세상으로 뛰쳐 나가 갖가지 인간관계의 와중에 휩쓸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인생의 여러 가지 양상을 체험하여 드디어 하나의 어엿한 인간이 되는 토대를 쌓아올린다는 것이다. 빌헬름의 교양이 완성된 모습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나 이 작품은 괴테 자신의 체험을 배경으로, 유년시대에서 연극에 친근하기까지 방황을 거쳐 바이마르 전기의 실생활에 도달하는 경로를 나타내고 있다. 근대의 독일소설은 대부분이 이 작품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의미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친화력[편집]

Wahlverwandt schaften (1809)

괴테 소설.

괴테는 1807년 일이 있어 예나에 체류하였을 때 그곳 서점 주인 프롬만의 18세된 양녀 민나 헤르츨리프에게 정열을 불태운다. 이 연애체험의 침전(沈澱)이 <친화력>으로 저술되었다. 두 종류의 화합물이 따로따로 떨어져 있을 때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으나 그것이 접근하여 상호작용하기 시작하면 원래의 화합물은 분해하여 새로운 화합물을 만드는 수가 있다. 이것은 원소간에 작용하는 친화력에 기인한다. 그러나 자연계를 지배하는 이 법칙도 인간계에서는 신성한 결혼생활을 파괴하는 위험을 품고 있는 것이다.

괴테는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정열과 도덕관을 대립시켜 체념(諦念)의 의의를 제시하고 있다. 소설에서는 재혼 부부인 에드아르트와 샤를로테의 가정에 친구인 대위와 샤를로테의 조카인 오틸리에가 들어옴으로써 에드아르트와 오틸리에, 대위와 샤를로테 사이에 새로운 감정의 결합이 일어난다. 뒤의 두 사람은 자제심이 있어 파멸을 면하지만 앞의 두 사람은 무분별한 정열 때문에 죽음을 가져오는 결과가 된다. 그 내용은 격한 정열을 담고 있으나 그것을 묘사하는 괴테는 이미 체념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편집]

Wilhelm Meisters Wander-jahre (1829)

괴테 장편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속편으로서 <체념의 사람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점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체념이 이 작품을 일관하고 있는 중요한 근본사상이다. 그러나 괴테가 말하는 체념이란 단지 욕망이나 정열을 억제하며 소극적인 무위의 생활을 보내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인 자기 규제와 근로를 생활의 지침으로 삼고 흩어지는 개인의 힘을 유익한 한가지 일에 결집시켜 사회의 이익을 위하여 공헌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 결과 <수업시대>가 빌헬름 개인의 인간형성을 다루는 것으로 일관하는 ‘교양소설’인데 반해 <편력시대>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 19세기에 있어서의 이상 사회의 창조나 그의 기초가 되는 교육문제를 다루는 ‘사회소설’로 발전하고 있다. 이에따라 주인공 빌헬름은 개인의 일반 교양을 목표로 한다는 <수업시대>의 아마추어 입장을 극복하고 하나의 기술을 익혀 사회에 봉사한다는 견지에서 훌륭한 외과의가 되어, 인간성의 완성을 추구하는 유용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소설의 구성 또는 그 밖의 여러 점에 유념치 않은 점은 있으나 <파우스트>와 함께 괴테의 일생에 걸친 재지(才知)가 전편에 흐르고 있다.

파우스트[편집]

Faust (1772-1832)

괴테 희곡.

1772년 산문의 장면인 <흐린날 들판>의 집필로 시작되어 그 후 시인의 사망 직전까지 장장 60년에 걸쳐 그 완성까지에는 <초고(初稿) 파우스트>(1775, 1871 사본발견), <단편 파우스트>(1790), <파우스트 제1부>(1808) 및 <파우스트 제2부>(1832)의 4단계를 경과한 것이다. 파우스트란 르네상스기(期)에 실재한 마법사(魔法師)(1840-1538)의 이름인데 이를 핵심으로 16-17세기에 그 전설을 전하는 ‘민중소설’이 유포되어 그것을 상연하는 극단이나 인형극이 탄생하였다. 괴테는 소년시절부터 이 이야기에 친숙하였다. 그리고 이를 소재로 이용하여 만일 인간이 외적인 속박을 받지 않고 마음껏 자기의 의욕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결국 어떠한 결과에 도달하는가를 묘사하고 비록 이 세상의 죄는 범할지라도 내연적(內燃的)인 자기 확충의 충동에 따라서 행동하는 자는 그의 심정과 행동의 순수성으로 해서 신에게 용납된다는 확신을 표시하며 구원의 계기에 유화적인 여성의 사랑을 삽입시키고 있다. 독일문학의 최고 걸작일 뿐만 아니라 전인류의 보배라 할 수 있다.

시와 진실[편집]

Aus Meinem Leben Dichtung und Wahrheit (1811-1831)

괴테 자서전.

괴테의 탄생(1749)으로부터 바이마르로 출발(1775)하기까지의 기간을 취급한 자서전으로 60세에 이른 시인이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그 중심 제재로 삼고 그의 특질의 싹틈·발효·개화·결실의 발자취를 돌이켜보며 기왕에 발표된 수다한 자기의 작품 사이의 맥락(脈絡)을 지어 주고 전체의 관련하에 자신의 유기적인 발전의 자취를 묘사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괴테는 이때 단순한 사실의 나열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실의 핵심을 찌름으로써 그 의의를 밝히려는 목적으로 시의 요소를 집어넣었기 때문에 작품 전체는 고도의 진실을 전하는 뛰어난 문학작품이 되어 있다. 또한 이것 외에 자서전의 성격인 것으로는 <이탈리아 기행> <제2차 로마 체재> <체불진중기(滯拂陳中記)> <마인츠 공방전> 및 <연대기> 등이 있다.

실러[편집]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

독일 시인·극작가.

슈바벤의 마르바하에서 출생하였다. 1773년, 카를 학원에 입학하여 규율에 매인 자유없는 날을 보냈다. 괴테나 셰익스피어, 슈투름 운트 드랑 등의 작품들을 탐독하면서, 문학습작을 시작하여 재학 중 처녀작 <군도(群盜)>를 쓰기 시작하여 졸업(1780) 다음해인 1781년에 완성을 보았다. 이 작품은 만하임 극장에서 상연돼 비상한 반응을 일으켰으나 그로인하여 박해를 받는 바 되어 1782년, 고향을 탈출하여 만하임으로 나가, 궁핍한 가운데 극작을 계속하여 <피에스코의 반란>(1783), <간계와 사랑>(1784)을 상연하였다. 1785년부터 2년간 드레스덴에 사는 동안에 청년기 때의 격렬했던 정열과 반항은 점차 장년기의 성숙으로 변해갔다. 1787년, 당시 문단의 중심지이던 바이마르로 나가 역사와 그리스 문학 연구에 몰두하며, <그리스의 제신(諸神)> <예술가> 등의 장시를 발표하고, <네덜란드 이반사(離反史)>(1788), <30년전쟁사>(1791-93) 등을 저술하였다. 예나 대학의 역사학 시간교수로 봉직하였고, 1791년 흉부질환의 중병을 앓았으나 병후에는 칸트 철학을 연구하여 수다한 미학론(美學論)을 남겼다.

1794년에는 괴테와의 친교가 실현되었다. 양자 간에 교환된 서간(書簡)은 풍성하고 순수, 진지한 두 사람의 영혼이, 문예문제를 놓고 행한 대결과 교류와 전개에 관한 귀중한 기록인 것이다. 그후 실러는 그의 본래의 영역인 극작으로 돌아가, 3부작 <발렌슈타인>을 완성하고 그 후로는 거의 매년, 투병 중에도 극작을 계속하였으며 매 작품마다 새로운 수법을 씀으로써 내적(內的) 자유를 테마로 전개하였다.

실러의 시 특색은 사상시·담시(譚詩=ballade)·2행시 등 많은 미학적 논문이 있으나 그 특질은 무엇보다 ‘아름다운 영혼’을 주요 논점으로 하고 있다. 아름다운 역사에 관계된 실러의 저술은 청신하고 흥취를 돋구어 주는데 <숭고에 대하여>(1796?), <인간의 미적 교육서간>(1794-95), <소박문학(素朴文學)과 정감(情感)문학에 관하여>(1795-96) 등 많은 미학적 글이 있으나 그 특질은 무엇보다 ‘아름다운 영혼’을 주요 논점으로 하는 데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영혼으로서 미적 조화의 존재로 인정되지 못할 때에는 감성의 경향을 단절하여, 숭고한 세계로 뛰어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비극시인으로서의 면모는 이러한 숭고(도덕적 자유)의 사상과 그의 극적 구상화에 나타나 있다. 그 특질의 두 번째는, 문예의 근본유형을 소박한 것과 정감적인 것의 대립개념으로 표시하여 독일문예학에 하나의 기초를 세운 데 있다.

실러의 역사관계 저술은 청신하고 큰 흥취를 돋구어 주는 것으로, 역사의 흐름과 개인의 자유와의 갈등을 시인의 감각으로 다룬 생기 발랄한 문화사이다.

실러는 어떤 의미에서나 비극시인이었다. 45세의 일생을 통해 완성된 희곡은 9개에 이르고 있다. 총체적으로 보아 <돈 카를로스>를 분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의 작품은 외적 자유의 테마를 중심으로 격렬한 경향을 띠고, 그 이후의 작품은 내적 자유를 추구하여, 숭고 유원(悠遠)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군도> <피에스코의 반란>(1783)에서는, 폭정에 대한 분노가 공화주의(共和主義)의 요구라는 형태로 나타나 있다. <간계와 사랑>(1784)은 독일의 시민비극으로 계급을 초월한 순애(純愛)가 귀족사회의 책략으로 깨지는 모습을 묘사하여, 독일의 현실에 냉혹한 비판을 가한 것이다. <돈 카를로스>(1787)는 사극으로 개인의 연애를 초극하여, 인류애에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발렌슈타인> <마리아 슈투아르트>(1800) 등은 현세에의 집착에 사로잡힌 인간이 내적 발전을 거쳐 정화되는 것을 테마로 하고 있다. <오를레앙의 처녀>(1802)는 잔다르크의 전설을 극화한 것으로 신탁(神託)과 현세의 사랑과의 모순에 고민하는 처녀의 영혼의 추이(推移)를 묘사하고 있다. <메시나의 신부(新婦)>(1803)는 그리스 비극의 합창과 운명의 개념을 받아들여, 한 사람의 소녀를 함께 사랑하는 형제의 비극을 그린 것이다. <빌헬름 텔>도 사극 중의 하나이다.

실러의 작품은 동양에서는 그렇게 많이 읽히지는 않고 있다. 독일형의 이상주의의 투사(鬪士)를 문제로 설정한 점이나, 정신의 이원(二元) 대립에서 나오는 긴장도 동양인의 성격과 크게 이질적인 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일 이상주의의 본질에 참여하는 데에는 이 시인을 능가할 사람이 없다.

군도[편집]

Die Rauber (1781)

실러의 처녀작인 희곡.

슈투름 운트 드랑 시대의 대표적 극작으로 5막 10장으로 되어 있다. 영주의 장남 카를 모르는 동생 프란츠의 모함으로 아버지에게 추방당하고 카를은 인습(因習)에 반항하여 사회부정을 실력으로 교정하려는 결의 아래 도적단의 수령으로 추대된다. 고향에 쳐들어가 동생의 모략을 분쇄하고 유폐된 부친을 구출하지만, 부친은 그의 아들이 도적단의 두목임을 알자 놀라 절명하며 동생은 목매어 죽는다. 카를은 매달리는 연인 아말리아를 자기의 손으로 살해하고, 죄갚음을 위해 당국에 자수하여 대죄한다. 필치가 생경(生硬)하고 표현이 지나치게 격하다는 등의 흠이 있기는 하나 젊은 실러의 면모는 저편에 넘치는 정열, 통렬한 사회비판, 자유를 향한 한결 같은 동경 등을 통하여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장면 배치의 교묘함, 뛰어난 군중묘사, 인물배열상의 선명한 대위(對位) 등은 이 시인이 선천적인 재질을 지닌 극작가임을 말하여 준다.

이 작품은 카를 학원 재학 중에 집필을 시작하여 졸업 후 완성하고, 1781년 자비로 출판하였다. 그 다음해에 만하임 극장에서 상연되어 독일 연극사상 희유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발렌슈타인[편집]

Wallenstein

(1789-1799)

실러 3부작. 전11막의 희곡.

30년전쟁시대를 배경으로 제1부 <발렌슈타인의 진영(陣營)>은 전란의 세상과 병사의 기질을 사실적(寫實的)으로 묘사하고 장군들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제2부 <피콜로미니 부자>는 막료(幕僚)들의 동향을, 제3부 <발렌슈타인의 죽음>은 비극적인 주인공의 운명을 묘사하여, 전편(3부작)은 훌륭한 피라미드형 구성을 채택하고 있다. 발렌슈타인은 냉혹하고 타산적인 현실주의자인 동시에 이상주의적인 면도 있는, 점성술에 대한 신앙을 갖는 복잡한 인간이다. 이런 인물을 커다란 운명과 대결시키면서 그리스 비극과 셰익스피어의 성격극(性格劇)의 수법을 써서, 장대한 드라마를 구성하여, 이에 발렌슈타인의 딸 테크라와 청년 사관 막스 피콜로미니와의 애절하고 숭고한 비련을 배치하고 있다. 또한 제1부는 군중극으로 주인공이 없으며 여러 부류의 병사가 군대 전체의 대표가 되어 있다. 제2부에는 <힐데브란트의 노래>이래 독일문학에 있어서 즐겨 취급되고 처녀작 <군도>이래 그의 장기로 삼고 있는 부자간의 상쟁을 테마로 하고 있다. 제3부는 점성술에 사로잡힌 발렌슈타인이 등장하나, 결코 ‘운명극’은 아니고, 비극의 전개는 명백히 주인공의 성격을 토대로 하는 것이다. 바이마르 극장에서는 괴테의 감독하에 상연되어 근대 연극사상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빌헬름 텔[편집]

Wilhelm Tell (1804)

실러 희곡. 전5막.

스위스의 순박한 여러 농민과 포수들이 오스트리아의 압정에 항거하여, 악한 영주대리 게슬러를 타도한 텔의 영웅적 행위에 호응해 일제히 봉기, 조국해방과 자유를 획득한다는 내용이다. “남아 대장부, 홀로 독립할 때, 가장 강하다”라고 하는 자주독립의 인사(人士), 환언하면 넘치는 정기, 의협심에 불타는 한편 좋은 지아비, 훌륭한 아버지, 소박한 농부로서 하루하루 근면히 일하는 사람-이러한 인간상 텔을 중심으로 민중의 움직임을 통하여 행동이 전개된다. 전편을 일관하여 흐르는 이념은 고귀하고 소박한 자유에의 정열과 조국애인 것이다. 한번도 스위스에 여행한 일이 없는 실러이지만 스위스의 자연·풍물·언어의 파악과 그것을 눈앞에 펼쳐놓은 듯이 묘사하고 있는 솜씨는 통찰력의 예리함과 창조력의 왕성함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국난을 당할 때마다 독일인에게 큰 감명을 주는 것이다. 스위스에서 취재된 이 희곡은 바로 독일국민 자체의 연극인 것이다.

19세기[편집]

19세기 문학[편집]

-世紀文學

독일의 19세기 문학은 낭만주의, 사실주의(현실주의), 세기말에 생긴 자연주의 등을 포함한다.

만년의 괴테 작품은 낭만적 사조와 교섭을 갖는다. 또 전기낭만파는 고전주의와 대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숭배하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원래 그리스 문화와 르네상스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고전주의에 대해서 고딕 정신의 앙양과 게르만 민족의 자각을 주장한 것이기 때문에, 1798년 슐레겔 등의 기관지 <아테네움(Athen

um)>이 발간을 보게 된 후로는 양자는

뚜렷하게 구분되게 되었다. 독일 낭만주의의 사상적 기초는 칸트에서 출발하여, 그 이원대립(二元對立)을 조화시키려는 피히테의 절대자아(絶對自我)의 관념이나 헤겔의 변증법은 절대진리의 추구와 무한에의 동경을 본질로 하는 낭만파 시인에게 다대한 영향을 끼쳤다. 셸링의 자연철학과 미적 이상주의도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낭만파의 풍조가 싹트기 시작한 것은 고전주의 전성기(1800년 직전)경으로 최고 전성기는 1820-30년경인데, 여기에 위대한 존재로 또 각각 고립되어 있어 어느 주의, 어느 유파로 규정지을 수 없는 시인이 있다. 즉 횔데를린과 클라이스트, 그리고 장 파울 등이다.

전기낭만주의 운동의 중심은 슐레겔 형제이고 티크, 노발리스, 바켄로더 등의 시인이 이에 참여하였다. 다분히 이지적(理智的)요소(要素)를 내포하며, 이론을 붙이기에 급한 나머지 창작면에서 뛰어난 것이 드물었다. 후기낭만파는 백화난만(百花爛漫)의 느낌이 있어 특히 서정시 중에 수작(秀作)이 많다. 그리고 이지적 면에 편중되었던 전기낭만파는 순정·소박·총합적인 요소가 지배적이었다. 또한 전자가 종교나 철학을 중시한 데 반해 후자는 자연과 역사에 치중하였다. 아르님, 브렌타노, 아이헨도르프, 쾨르너, 울란트, 슈바프, 하우프, 샤미소, 푸케, 호프만, 플라텐, 뤼케르트 등이 후기낭만파에 속한다. 또 그림 형제는 시인은 아니지만, 전설과 옛 이야기에 관한 연구 수집은 불후의 가치를 갖고 있다.

1830년대의 유럽의 양상은 일변되어 산업혁명에 의한 사회구조의 변혁은 현실주의·사실주의 문학의 대두를 촉진시켰다. 낭만주의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동경’이며 리얼리즘은 현재 또는 현실에 근거하는 태도이다. 또 이즈음에 사회적·정치적인 야심을 버리고, 소시민적 존재를 감수하는 경향이 대두하여 문학적으로는 낭만적 정서를 품으면서 사실적 필치로 보잘 것 없는 세계에 애정을 쏟는 ‘비데르미어(Biedermier)문학’이 탄생하였다. 즉 그릴파르처, 뫼리케, 슈티프터, 드로스테 휠스호프 등이 이에 속한다. 이것에 대하여 ‘젊은 독일’ 시인들은, 문학은 시대의 정치적·사회적·정신적 요청에 호응하며, 이에 봉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저널리즘의 발로라 보여지는 것으로 민주주의를 고취하면서 그 작품은 비데르미어적(的)·낭만적 경향을 띠는 것이다. 하이네가 가장 대표적인 작가이다.

1890년경에 이르기까지의 문학은, 이에 뒤따르는 자연주의 문학과 달리, 현실을 묘사하면서 거기에 영원의 그림자를 담으려고 하였다. 이것은 고전주의로부터 유래하는 문학정신을 계승하는 것으로서, ‘시적 현실주의’(특히 1860-70년대)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현실생활을 묘사하는 사실주의 문학의 흐름에서 볼 때 서정시나 희곡보다는 결국 산문소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대표적 시인으로는 독일에 헤벨과 루트비히, 스위스에 켈러와 마이어가 있으며, 리하르트 바그너는 ‘악극(樂劇)’을 창조하였다. 고전주의 시대를 독일문학의 ‘황금시대’라고 부르는 데 대해서, 이 시대를 ‘백은시대(白銀時代)’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이들 거장들은 각자의 개성을 지니고 있어 상호 남을 용납하지 않으며 자칫하면 자기 내부에만 칩거하는 폐쇄적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작품은 프랑스, 영국, 또는 러시아에 있었던 것과 같은 의미의, 즉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리얼리즘이 아니고 개인이나 개인주의에 매몰된 문학인 것이다. 슈토름, 로이터, 레나우, 프라이타크, 릴리엔크론, 폰타네 등이 이 시대의 작가에 속한다.

19세기 후반 근대과학의 비상한 발달과 사회경제 조직의 일대 변혁은 이상주의적·긍정적·낙천적 색조(色調)를 더욱 희박하게 하여서 도처에서 회의적·상대주의적·실증주의적·기계적인 것이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세상물정에 응해 등장한 문학이 자연주의 문학으로, 유물론적·자연과학적 인생관을 표방하며, 소재를 현실생활에서 구하고 물질문명의 암흑면, 세기말의 불안, 세기의 전변(轉變)으로 생기는 세계적 고민을 표현하려 하였다. 홀츠와 슐라프가 이 문학론의 제창자로서 이 제창을 실천에 옮겨 성과를 올린 것이 하우프트만과 주더만이다. 그러나 자연주의는 독일혼에 깊이 뿌리박은 낭만적 경향에 맞지 않아 단명으로 끝났다.

횔데를린[편집]

Friedrich H

lderlin (1770-1843)

독일 서정시인.

슈바벤에서 출생하였다. 신학을 전공하였으나 그 자신의 흥미는 그리스 문학에 기울어 있었다. 1793년, 대학을 졸업한 뒤 목사직을 기피하고 가정교사가 되었다. 1795년, 예나에 체류하면서, 피히테의 강의를 수강하는 데 열중하였으며, 실러에 몰두하였다. 이곳에서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과 접촉을 가지며 압도적인 인상을 받고 특히 실러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꾀했다. 1796년 1월 곤타르트가(家)의 가정교사가 되어 곤타르트 부인 수제테와 알게 된다. 이 여성에게서 시인은 고대 그리스적 이상의 여성상을 그리며, 조화와 평안의 구체화를 직관하였다. 두 사람 사이의 연애는 비할 바 없이 아름답고 순수한 것이었으나 1798년 9월 주위의 사정으로 곤타르트가를 떠났다. 그즈음 소설 <히페리온>을 완성하였다. 희곡 <엠페도클레스>저술에 몰두하였으나 결국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30세가 되도록 자립할 능력이 없었던 시인은 그 후에도 전전하며 가정교사를 지냈고, 1802년 최후의 임지 보르도에서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이미 정신착란의 상태에 있었다. 그 후 약간의 차도가 있었으나 재발하였다. 유복한 군기장인(軍旗匠人)의 집에서 극진한 보호를 받다가 1843년 사망하였다. 소설·희곡 이외에 다수의 뛰어난 서정시, 미학 논문 수편과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의 부분역(部分譯) 등이 있다.

그는 그리스 신화에서와 같은 자연(神)과 인간과의 융화를 현세에 재래토록 하는 것이 시인의 임무라고 생각하였다.’하나이며 완전한 것’을 스스로 체득하고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려는 소망을 순수하고 끊임없이 간직하며 노력한 시인이다.

히페리온[편집]

Hyperion (1797-1799)

횔데를린 작. 2권 전4장으로 되어 있는 서간체 소설.

<그리스의 은자(隱者)>라는 부제가 있다. ‘교양소설’이자 딜타이가 지적한 바와 같이 ‘철학소설’이며 또한 시인 횔데를린이 시대(時代)와 대결한 ‘시대소설’이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여러 차례의 개작을 거쳐 완성된 것으로 작품 전체가 서정소설로 되어 있어 통상적인 소설개념만으로는 규정지을 수 없는 일종의 ‘비가(悲歌)’라고도 할 작품이다. 주인공 히페리온은 18세기의 그리스 청년으로 당시의 국정과 인심에 분개하여 친구나 선배들과 제반의 개혁을 실현하여서 살기 좋은 시대를 만들려 한다. 한편 그리스적인 조화의 이상적 여성 디오티마와 해후하여 순수한 사랑을 바친다. 마침 러시아·터키 사이의 전쟁이 일어나자, 그리스의 독립을 보전하기 위하여 러시아에 가담하여 장도에 오른다.

전쟁터에서 부하병사의 행패와 난동을 보고 실망하며, 부상을 입고 귀국한다. 돌아와 보니 디오티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므로 독일로 방랑의 길을 떠난다. 이 나라 사람들의 인심이 각박한 것에 실망하면서도 따사로운 봄에 위로를 받는다. 일체(一切)와 하나가 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라는 달관의 경지에 이른다. 귀국 후는 자연과의 융합 속에 묻혀 은자의 생활을 보낸다. 자연으로부터 괴리(乖離)되어 전일(全一)의 생명을 상실한 근대적 인간의 위치를 벗어나 다시금 자연과의 합일에 귀의하고자 한다.

이 작품의 진의는 단지 로맨틱한 도취나 정관(靜觀), 현실도피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시인이 그리스의 ‘일차전(一且全)’이라는 사상을 그리는 마음은 결국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고 현재에 대처하는 자세에 상통하는 것이다.

클라이스트[편집]

Heinrich von Kleist (1777-1811)

독일 극작가.

프러시아의 귀족으로 대대로 군인 집안이다. 그도 군무에 종사하나 1799년 군적을 떠나 고향의 대학에서 수학한다. 칸트를 연구하여 진리인식의 불가능을 칸트 철학에서 깨닫고 절망한 나머지 방랑생활의 여정에 올라 독일 국내, 스위스, 이탈리아 등을 전전한다. 예술과 생활의 틈바구니에서 고투를 거듭하나 결국은 뜻에 맞는 것을 얻지 못하여 베를린 근교에서 자살하였다.

처녀작 <슈로펜슈타인가(家)>(1803)에서 벌써 클라이스트적 문학의 특질이 발로돼 있다. <로베르트 기스카르트>의 현존하는 것은 앞부분 10장(場)에 불과하나 그 박력과 밀도는 참으로 경탄할 만한 것이다. <깨어진 항아리>는 독일 희극 가운데 최고봉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암피트리온>(1807)은 몰리에르의 희극을 바꾸어 꾸민 것이다. <펜테질레아>(1808)에서 주인공의 주아적(主我的) 애증(愛憎)의 착란과 광포의 묘사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격렬한 바가 있다. <하일브론의 케트헨>(1810)은 그와는 대조적인 낭만적 희곡으로서 헌신적인 사랑과 절대적 복종을 테마로 하고 있다. 나폴레옹에 대한 적의와 증오 때문에 <헤르만의 전쟁>(1808), <홈부르크 공자(公子)>가 쓰여졌다. 후자는 이 시인의 최고 걸작이다. 그리고 단편에서도 독특한 재능을 보여 <미하엘콜하스>(1810), (1808) 등이 있다.

클라이스트의 고집 세고 철저한 성격은 현실과 사사건건 격돌하여 여기에 그의 인간적 비극이 생겼다. 20세기 초두에 겨우 클라이스트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천재적 극작가라는 평가(評價)가 굳어졌다.

깨어진 항아리[편집]

Der Zerbrochene Krug (1806)

클라이스트 1막 희극.

레싱의 <미나 폰 바르넬름>과 더불어 독일 2대 희극 중의 하나라고 일컬어진다. 시골 소읍의 구재판소(區裁判所)에서 ‘깨어진 항아리’에 대한 소송이 조사 진행됨에 따라 범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재판관인 촌장(村長) 아담스 자신이고 이를

숨기려 하면 할수록 폭로되어 간다는 줄거리이다. 그리고 뻔뻔스럽고 교활하게 증거를 없애려고 하면 할수록, 한층 유력한 증거가 드러난다.

사건의 진상은 아담스가 밤중에 원고의 집에 침입해서 딸을 겁탈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도망칠 때 ‘항아리’를 깨고 창으로부터 뛰어내리는 모습이 처녀의 약혼자에게 발견되어 몽둥이로 구타를 당하나 한밤중이기 때문에 그 정체가 발각되지 않고 도망쳤던 사건이다.

이 작품의 특색은 ‘독일식 철저성’을 보이는 것으로 이로부터 유머가 솟아나온다는 것이다. 운문으로 쓰여진 최초의 독일 희극으로 전편 오각(五脚)의 억양격(抑揚格)으로 구성되어 있다.

홈부르크 공자[편집]

Prinz Friedrich von Homburg (1810)

클라이스트 역사극.

프로이센의 전신인 브란덴부르크 후국(侯國)과 스웨덴 사이의 전쟁을 배경으로 군법을 위반하고 수훈을 세운 공자(公子) 홈부르크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된다. 그러나 막연하게 특사를 받을 것이란 예감을 믿고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약혼녀 나탈리에가 스웨덴으로 시집간다는 소식을 듣고 위기가 닥친 것을 알아, 죽음의 공포에 떨며, 공작부인에게 구명(救命)을 탄원한다. 나탈리에는 공자를 격려하며 그녀 스스로도 특사를 청원한다. 브란덴부르크공(公)은 이의 해결을 공자 자신의 선택에 일임한다. 즉 판결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무죄로 하겠다고 한다. 침착을 되찾은 공자는 자기의 잘못을 자각하고 당당하게 법에 복종할 결심을 한다. 나탈리에도 동의한다. 한편 공자 휘하의 연대(聯隊)는 모든 병사들이 공자의 구명운동에 나선다. 공자는 처형에 임해 눈가리개를 하나 눈가리개가 제거되고 나탈리에의 화환을 받게 된다. 테마 그 자체의 취급 솜씨,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조화를 최후의 막이 내려지기 직전까지 끌고 간 교묘한 솜씨가 훌륭하다. 클라이스트의 가장 원숙한 작품이다. “브란덴부르크의 모든 적을 무찔러라”라는 최후의 대사(臺詞)에서도 짐작되듯이 작자는 이 작품과 전작 <헤르만의 전쟁> 중에서 나폴레옹 지배하에 놓인 독일국민(특히 프로이센의)의 분기(奮起)와 번영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장 파울[편집]

Jean Paul (1763-1825)

독일 작가로 본명은 요한 파울 프리드리히리히터.

프랑켄주(州) 바이로이트 후국(侯國)의 가난한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794년 장편소설 <헤스페루스(샛별)>를 통해 문명(文名)을 얻어, 유행작가가 되었다. 1769년 바이마르시(市)를 방문하여 궁정생활과 사교계에 접하나 괴테, 실러 등의 귀족성·초국민성(超國民性)에 영합할 수 없었고 오히려 헤르더의 민족정신과 상통하는 바가 컸다. 대표작인 <거인(巨人=Titan)>(1800-03)은 바이마르에서의 체험으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1905년에 가장 독일적인 색조가 짙은 소설 <건방진 나이>를 발표했다. 총체적으로 보아 그의 작품은 낭만적 공상과 현실적 분별, 목가적 행복에 대한 동경과 허위를 증오하는 비판정신의 이원대립(二元對立)과 이의 해결을 위한 노력이 전작품을 일관하고 있다. 형식을 철저히 파괴하며 독자적 신문체(新文體)를 개척하여 독일적 감각성과 몽상성을 철저히 표현하였다. 주요 저술에는 <미학입문(美學入門)>(1804), <레바나>(1808)가 있다. 전자는 그의 문학론의 총결산이며, 후자는 루소의 <에밀>을 본딴 교육론이다. 독일국민의 생활감정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유머와 아이러니가 풍부한 그의 문학은 독일 산문정신(散文精神)의 선구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하이네, 로이터, 프라이타크를 거쳐 현대의 헤세에 이르는 여러 작가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프랑스에서는 발자크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낭만주의 문학[편집]

浪漫主義文學

독일문학사에 있어서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에 이어 온 시기에 해당하는데(1795-1830년경) 이것은 대체로 다음 3기로 나눌 수가 있다.

초기(1795-1806) 중심지는 예나

중기(1806-1815) 중심지는 하이델베르크

후기(1815-1830) 주요 중심지는 베를린

괴테와 실러의 협력에 의해 고전주의가 확립된 해(1794)에 실레겔(동생)의 낭만주의에 관한 최초의 이론적 저작이나 티크 등의 창작이 발표되어 고전주의에 대립하는 운동으로서 낭만주의가 자각되었다.

그들은 고전주의가 조화와 정적(靜寂)을 누리기 위해 낭만적인 공상을 병적인 것이라고 배격하는 것에 찬동하지 않고, 형식보다도 감정을 중시하여 동(同)시대의 철학자 피히테가 주장하는 자아(自我)의식, 주관의 표현으로 지향하였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의 고전뿐만 아니라 중세 독일의 예술문학에도 눈을 돌려 정신적 근원을 그곳에서 구하였다.

19세기에 들어와 낭만주의는 하이델베르크를 중심으로 하여 재차 개화한다. 초기와 견주어 볼 때 중기에는 ‘영혼의 밤의 측면’이라 불리는 무의식적인 것의 표현으로 쏠리었으나 그와 동시에 유럽전쟁 시대에 와서 독일 국민의식이 강화되고 고대전설이나 민요·민화의 연구가 진척되었다.

후기에 들어서자 동부 독일이 낭만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어 샤미소, 푸케 등의 프랑스계(系) 시인도 활약하였다. 이윽고 낭만주의는 운동의 중심을 상실하여 분산되고 사실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그 세력을 잃어 갔다.

슐레겔 형제[편집]

-兄弟 형,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August Wilhelm von Schlegel(1767-1845), 동생, 프리드리히 폰 Friedrich von Schlegel (1772-1829)

두 사람 다 독일 낭만주의 초기의 비평가·문학자. 형은 대학에서 신학과 언어학을 배우고, 후일 가정교사를 직업으로 하면서 예나에서 실러가 주재하는 잡지발행을 도왔다. 또한 대학교수가 되어 동생과 함께 낭만주의 잡지 <아테네움(계간, 1798-1800)>을 발간하였다. 예나를 떠난 후에는 베를린에서 강연자(講演者)로 유명해졌으나 만년에는 그리 빛을 보지 못하였다.동생 프리드리히는 고전을 배우고 고대 그리스를 연구하였다. 1796년에 예나로 나가 피히테 철학에 영향을 받고 노발리스, 티크 및 슐라이어마허 등등과 교제하는 가운데 낭만주의의 기초이론을 발견하게 된다. 그 후는 파리에 거주하며 잡지 편집에 종사하고 또 외교관으로도 활약하였다.

슐레겔 형제 중, 동생은 형보다 재능을 타고나 역설(逆說)을 즐겨 쓰며 아폴리즘(警句)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자서전적 소설 <루신데>(1799)는 도덕적 문제를 취급하여 스캔들을 불러 일으켰다. 이론면에 있어서의 저작 <그리스·로마 문학사>(1797), <고대문학과 근대문학의 역사>(1815) 등은 <단편(斷片)>과 더불어 낭만주의 문학의 본질을 밝혀주는 것으로, 노발리스를 비롯하여 낭만주의 시인들은 실레겔에 의해 육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노발리스[편집]

Novalis (1772-1801)

독일 시인으로 본명은 하르덴베르크이다. 초기낭만주의에 속한다. 귀족 집안에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였으나 병약(病弱)하였다. 어머니에게서 경건한 신앙을 물려받은 섬세한 소질의 소유자였다. 1790년, 예나 대학에서 배웠으며 그 다음해에 슐레겔 등과 사귀게 되었다. 부친이 제염소(製鹽所)의 소장이었으므로 그도 물리 화학을 배웠다. 그러는 사이에 소피 폰 퀸이라는 13세의 소녀와 사귀어 약혼하였으나 그녀는 15세에 사망하였다.

노발리스의 몽상적인 시재(詩才)는 이 사랑과 죽음의 체험으로 심화(深化)되어 1797년의 <밤의 찬가>에 결실(結實)로 나타났다. 6편으로 되어 있는 이 찬가는 소피와의 사별의 비통과 영원성의 확신, 재회의 희망을 서술하고 있다. 노발리스는 그 후 지병인 폐병을 앓으면서도 지질학·광물학을 배웠고 1799년 이후는 제염소에서 사무를 보는 한편 종종 예나로 나아가 낭만주의자들과의 교우(交友)를 계속하였다. 이 시절에 <파란 꽃>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소설 그의 대표작 <하인리히 폰 오프테르딩겐>이 탄생하였다. 1800년 가을부터 병이 악화되어 그 다음해 29세의 젊은 나이로 영면하였다. 노발리스의 서정시에는 사랑하는 소피와의 체험이 그 근저(根底)에 깔려 있어 마술적인 관념의 세계를 계시하는 어구들은 깊고 암울(暗鬱)한 환상과 신비한 죽음에의 동경으로 차 있다. 예술적인 면과 종교적인 면이 융합된, 보다 높은 세계를 지향하는 노발리스의 시는 낭만주의의 전형(典型)이라고 할 수 있다.

파란 꽃[편집]

(1802)

노발리스의 시와 동화가 포함돼 있는 장편소설. 원제 <오프테르딩겐>은 전설상의 중세 시인 이름이다. 1799년부터 쓰기 시작하여 다음해 제1부인 <기대(期待)>가 완성되고, 제2부 <실현(實現)>은 미완성으로 그쳤다.

노발리스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애독하고 있었으나 후일 이 작품은 시정신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아 불만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마이스터’ 형식을 빌어, 그 속에서 동화의 불가사의한 세계를 전개 묘사하려고 생각하여 <파란 꽃>을 썼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진정한 시적 세계는 동화 속에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어려서 본 ‘파란 꽃’을 찾으며 편력하여 갖가지 체험을 쌓아 점차 마술적인 동화의 세계로 들어간다. 소설의 줄거리는 그리 중요한 것이 못 되며 작자의 의도는 그의 세계관을 표현하는 데 있었다. 진정한 시가 존재하며,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사랑이 있는 신비로운 세계가 <파란 꽃>속에 상징되어 있는 것이다.

티크[편집]

Ludwig Tieck (1773-1853)

독일 시인, 소설가.

베를린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부터 바켄로더와 친교를 맺고 같은 대학에서 배웠다. 1797년부터 베를린의 니콜라이 문하에 들어가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으나 1799년 예나에서 슐레겔 형제나 노발리스 등 초기낭만주의 문인과 사귀며 낭만주의로 전향한다. 후일 각지에 전거(轉居)하면서 외국생활을 경험하고 극장 일에도 종사하였다.

그의 작품엔 서정시·산문·희곡 등이 있으며 폭 넓은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의 시는 때때로 기교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으나 낭만주의의 회화적·음악적 서정의 표현에 뛰어난 바 있다. 산문 중에서는 특히 동화 가운데 뛰어난 것이 많았고, 장편소설 <프란츠 슈테른발트의 방랑>(1798)은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의 좋은 예이다. 여기에는 바켄로더와의 우정이 반영되어 있다. 희곡으로는 동화극 <장화를 신은 고양이>(1797)가 대표작이며 또한 티크가 셰익스피어를 연구 소개한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바켄로더[편집]

Wilhelm Heinrich Wackenroder (1773-1798)

독일 소설가.

학생시절부터 독일 중세미술에 열중하였다. 특히 뉘른베르크에 남아 있는 뒤러 예술의 진수에 접하여, 그의 대표적 저작 <예술을 사랑하는 한 수도승의 심정의 토로>(1797)가 탄생하였다. 이 책은 생기 발랄한 정열로써 예술과 신앙이 일치되어 있던 중세를 추상하는 것이다. 친우 티크를 비롯하여 초기낭만주의의 생명관·예술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브렌타노[편집]

Clemeus Brentano (1778-1842)

독일 시인.

낭만주의 중기에 속하는 시인. 이탈리아계(系) 상인을 아버지로 하고, 괴테의 어릴 때 친구인 여인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같은 상인이 되었으나 어머니를 닮아 감수성이 풍부한 서정시인으로서의 재질을 타고 났던 그는, 낭만주의 시인들을 친구로 갖게 되었다. 1800년 예나에서 괴테, 슐레겔 형제, 티크, 피히테 등과 친교를 맺었고, 소피 메로우를 알게 되어 1803년에 결혼하였다. 또한 괴팅겐에서는 아르님과 친교를 맺었고, 1804년부터 하이델베르크를 본거지로 하여 아르님과 더불어 <은자신문(隱者新聞)>을 발행하고 서정시·소설·동화 등에 선천적인 풍부한 시재를 나타내어 ‘하이델베르크 낭만파(派)’의 융성을 보게 했다.

아이헨도르프가 브렌타노를 가리켜 “시 그 자체와 같다”고 평한 것같이 브렌타노의 시작(詩作)은 다방면에 걸쳐 활동이 눈부신 바 있었다. 만년에는 각 도시를 전전하면서 점차 카톨릭교에 귀의(歸依)하여 아름다운 신앙적 서정시를 썼다.

아르님[편집]

Achim von Arnim (1781-1831)

독일 소설가.

프러시아 귀족 출신. 1801년 봄부터 브렌타노와 친교를 맺어 그의 누이동생 베티나를 아내로 맞았다. 자주 독일 국내를 여행하여 각지에 남아 있는 민요나 전설을 수집하였다. 그 결과를 집대성한 것이 <소년의 마적(魔笛)>으로서 이것은 <그림 동화집>과 더불어 낭만주의가 민중문학으로부터 얻은 최대의 성과이다. 또한 이것은 아르님과 브렌타노와의 우정의 결실이라고도 할 작품이다. 아르님의 성격은 남성적이어서 그의 문학작품도 웅장한 규모의 것이 많다.

대표작 <왕관을 지키는 사람> 등 지난 날 독일의 위대한 정신문화를 취급한 역사소설은 그의 성공이었다.

그림 형제[편집]

-兄弟 형, 야콥 Jacob Grimm (1785-1863), 동생, 빌헬름 Wil-helm Grimm (1786-1859)

독일 문학자·언어학자.

이 형제는 헤센의 법률가를 부친으로 하여 태어나, 처음에는 함께 법률을 전공하나 낭만주의 문학의 영향을 받아 독일 국어국문학 연구에 뜻을 두게 되었다.

두 사람은 거의 모든 생활을 함께 하였으므로 연구에 있어서나 저작에 있어서나 두 사람을 구분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형은 의지가 강하고 정력적으로 연구에 임하여, 특히 언어학과 고대 독일문학에 큰 업적이 있으며, 동생은 유연한 감수성의 소유자로 특히 민화(民話)·민요의 연구에 뛰어난 바 있었다. 그러나 성격의 차이가 양자간의 협력을 낳게 하였다고도 한다.

처음 두 사람은 카셀의 도서관에서 사서(司書)로서 근무하다가 1829년부터 괴팅겐 대학에 초빙되어, 독일 고대학(古代學)을 강의하였다.

1837년 ‘괴팅겐의 7교수 사건’으로 대학을 떠나 1840년부터는 베를린의 학사원(學士院)에 들어갔다. 그 사이 형제는 행동을 같이 한 것이다.

형제간의 협력으로 된 저작은 <그림 동화집> 3권 외에 <독일의 전설>(1816-1818)<독일어 대사전>(1852-1960) 등이 있다. 후자는 그림 형제의 사후에도 후계자들에 의해 계속 집필되고, 1960년에 이르러 겨우 일단락될 정도의 방대한 것으로서 2세기에 걸친 독일문화의 위대한 성과이다. 이 밖에 그림 형제의 저작으로는 <독일문법>(1819-1837), <독일 신화학(神話學)>(1835) 등이 있다.

그림 동화집[편집]

Kinder und Hausmarchen (1812-1822)

정확한 제명(題名)은 <그림 형제에 의해 수집된 아이들과 가정의 민화>이다.

1805년 그림 형제는 브렌타노에게 민화의 수집을 권유받고 1807년경부터 각지를 순회하며 민화나 동화를 수집하였다. 그러나 민화에 가필(加筆)하는 것이 시인의 권리라고 생각한 브렌타노 등과 의견이 맞지 않았으므로 그림 형제는 협력을 단념하고, 자기들 힘만으로 이 <동화집>을 간행하였다.

그림 형제는 민화를 국민생활의 직접적인 표현이며 민족문화의 유산이라 생각하여, 이를 마음대로 개작(改作)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들의 기술방법은 민중의 이야기투를 충실히 옮겨 쓴 문장이 아니고 줄거리 있는 이야기로서의 인상을 강조하고 비유나 속담, 멋과 농담을 가미하여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또 독자가 아동이라는 점에 유념하여 종교적 색채를 가미하고 너무 잔혹한 이야기는 피하며, 약자와 괴로움을 받는 자에 대한 애정과 정의심을 배우도록 쓰여졌다.

1812년, 제1권의 초판이 나오자 큰 반향을 보여 각지로부터 새로운 민화에 관한 정보 등이 제공되었다. 이에 힘을 얻어 1815년에 제2권을 발간하고 1819년에는 1, 2권을 개정하였고 1822년에는 제3권이 추가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백설공주> <헨젤과 그레텔> <붉은 두건> <개구리 왕자>와 같이 현재에도 널리 읽히고 있는 동화 등 전부 240편의 민화가 수록되어 있다. 그림 형제의 민화 수집방법과 사고방식은 그 후의 독일 민중문학 연구의 귀감이 되었다.

호프만[편집]

Ernst Theodor Amadeus Hoffmann (1776-1822)

독일 소설가.

낭만주의 후기에 속하는 작가이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법률을 배우고, 회화와 음악에도 재능을 나타냈다. 1798년에 사법관이 되었으나 그 후 그 직책을 버리고 베를린 등에서 극장의 악장(樂長), 무대감독 등의 일을 하였다. 1814년 재차 관직으로 돌아갔으나 예술가 기질인 그는 술집이나 극장 등에 출입하면서 자유로운 예술가의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법률가로서도 그는 근면하였기 때문에 무리한 이중생활은 그의 목숨을 단축시켰다.

호프만의 작품에는 이러한 생활과 취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현실과 공상의 한계를 넘어서 몽환적(夢幻的)인 현상을 묘사한 그의 대표작에는 <황금단지> <악마의 영약(靈藥)> 등이 있고, 그 밖에 몽유병·최면술·유령 등을 취급한 소설이 많아 근대의 괴기(怪奇) 취미·비합리주의의 선구자로서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고 있다.

또한 호프만이 푸케의 소설에 의거하여 작곡한 오페라 <운디네>는 낭만주의의 이상인 시와 음악과의 일체화를 지향한 아름다운 환상이 넘치는 작품이다.

숫고양이 무르의 인생관[편집]

Lebensansichten des Katers Murr (1820-1822)

호프만 장편소설.

<음악당 악장 요하네스 클라이슬러의 전기 단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각기 성립사정이 다른 고양이와 인간 두 부분의 자서전이 상호 엮어져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 구성이다. 클라이슬러에 관한 부분은 작가의 자서전적인 요소가 강하며 1815년까지는 완성되어 있었으나 그 후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를 관찰한 경험을 토대로 환상적인 구상을 하였다. 즉 고양이가 자필로 고양이의 인생관을 쓴 것을 추가 삽입하여 그 구성에 자기의 독자적인 낭만주의적 기교를 구사하고 있다. “숫고양이 무르가 자서전을 쓸 때에 저자불명인 악장 클라이슬러의 전기를 되는 대로 찢어 흡인지 대용으로 끼워 두었던 것을 인쇄소에서 잘못 알고 그대로 인쇄를 한 것이다”라는 서문의 해설은 작자의 비꼬려는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

고양이와 인간의 두 개의 생활관을 대조하며 인간이 문명이라는 가면을 쓰고 본성을 망각한 속악한 생활에 빠져 있는 모양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샤미소[편집]

Adalbert von Chamisso (1781-1838)

독일 시인.

프랑스 혁명으로 독일에 망명한 프랑스 귀족 출신이다. 군인이 되었고 낭만주의 문인들과 교제하였다. 1815년부터는 식물학자로서 세계일주에 참가하였다. 프랑스인(人)이면서도 독일을 사랑한 그는 조국을 못 가진 사나이의 모습을 ‘그림자를 팔아 버린 사나이의 이야기’로 알려진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1816)에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서정시 <여자의 사랑과 일생>도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편집]

샤미소 작.

악마에게 그림자를 판 사람의 이야기로서 부자가 되긴 했지만 그림자를 잃은 탓으로 불행에 빠지게 되고, 결국은 이상한 장화를 입수하여 그것으로 지구를 뛰어다니면서 자연 과학 연구에 몰두하며 안식을 얻는다는 이야기이다.

주인공 페터 실레밀은 우연한 인연으로 어떤 부유한 상인의 사교장에 나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회색빛 옷을 걸친 사나이가 그의 주의를 끌게 된다. 사나이는 좌중의 누군가가 소원을 말하면, 즉시 포켓 속에서 그 물건을 끄집어낸다. 망원경과 터키 융단, 마구가 달린 삼두마 등등. 그날 실레밀은 그의 그림자와 무한히 금화가 쏟아지는 행운의 부대와 바꾸자는 회색 사나이의 제의를 받아들인다. 온갖 희비와 파란을 겪은 끝에 어느덧 계약했던 1년이 지나고 회색의 사나이가 나타나 그림자와 행운의 부대와의 교환 조건으로 주인공 사후의 영혼을 요구한다. 그는 단호히 그 유혹을 물리치고 부대를 들어 물 속으로 내던지지만 이미 바꾼 그의 그림자를 되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구제를 받는다. 그는 어는 고물상에서 우연히 헌 구두를 손에 넣게 된다. 과거의 죄과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 소외당했던 그는 그것을 신고 전세계를 다니면서 자연 연구에 심취한다.

인간은 생활에 극히 무의미하다고 생각되어진 것이 없어지게 되면 그때 비로소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적은 것일수록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의 고통과 슬픔은 큰 것이다. 이 소설은 그와 같은 교훈 형식을 취한 작품이다.

아이헨도르프[편집]

Joseph von Eichendorff (1788-1857)

독일 시인.

후기낭만주의에 속하는 시인이다. 슐레겐의 귀족 출신으로 카톨릭 교도이다. 대학에서 법률을 배우면서 슐레겔, 브렌타노 등의 낭만주의자들과 교제를 가졌다. 대(對)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국방군으로 가담하였으며 1844년까지 상급관리로서 근무하였다. 그의 서정시는 다른 낭만파 시인에 비해 기교가 덜하며, 민요로부터 영향을 받은 간명하고 소박한 격조(格調)로, 부르기 쉬운 음악적 어구로 되어 있다. <월야(月夜)> <망가진 반지> 등 그의 시는 많은 작곡가에 의해 가곡으로 만들어져 있다. 또한 온화한 그리스도교(敎)의 신앙을 노래한 것도 많다.

산문으로는 <명랑한 방랑아>(1826)가 대표작이다. 자유롭고 몽상적인 방랑을 계속하면서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 밀가루 상점의 청년을 주인공으로 하여 자연에 대한 낙천적 애정을 노래하는 이 작품은 낭만주의 문학 중에서 청춘문학의 대표작이다. 또 장편소설 <예감과 현재>(1815)는 교양소설의 한가지로서 청년의 정신적 성장을 주제로 하고 있다.

뮐러[편집]

Wilhelm M

ller (1794-1827)

독일 시인.

교사 등을 지내면서 평이하고 감상적인 시를 썼다. 그는 연작 서정시(連作敍情詩)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의 처녀> <겨울 나그 네>의 작자로서, 그 가락은 청신한 민요조여서 부르기 쉬우며 이러한 연작시를 슈베르트가 작곡한 가곡은 오늘날도 널리 애창되고 있으며 그 가운데 <보리수(菩提樹)>는 특히 유명하다. 또 뮐러는 그리스 독립전쟁에 공감하여 그리스 문학 연구에도 종사하였다.

사실주의로의 과도기[편집]

寫實主義-過渡期

호프만은 이미 후기낭만주의로부터 초기사실주의로의 전환기에 처해 있었으나 이즈음 낭만주의자가 각지에 분산되어 운동의 중심을 상실함에 따라 남부독일의 슈바벤 시파 등 각 지방의 향토에 밀착된 서민적이며 소박한 문학이 생겨나 19세기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가 되었다. 슈바벤에서는 울란트, 유스티누스 케르너, 슈바프 등이 대표적이며 또 동화로 유명한 하우프, 절충양식의 극작가 임머만 등이 있다.

울란트[편집]

Ludwig Uhland (1787-1862)

독일 시인.

슈바벤 시파의 대표자이다. 튀빙겐 출신으로 변호사·대의원(代議員) 등을 거쳐, 1829년부터 동시(同市)의 대학교수가 되어 문예학을 강의하였다. 시인으로서의 그는 간소평이한 문체(文體)로 민요풍의 시를 쓰며 조국애를 노래하였다. 특히 그의 산문시는 외국의 전설로부터도 소재를 취하는 등 뛰어난 것이 있다. 학자로서 울란트는 오래된 민요를 수집했고 또 중세 독일문학의 연구에 업적을 남겼다.

뫼리케[편집]

Eduard Morike (1804-1875)

독일 시인.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중간에 위치하며 슈바벤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부친과 사별하여 수도원에 의탁되었고, 후일 신학을 배워 목사가 되었다. 그 사이 연애경험을 통해 시인으로서의 뫼리케가 성장하여 아름다운 서정시를 썼다. 1834년 클레페르슐츠바하의 목사로서 안정되고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 그 후에도 사회적인 지위는 올라갔으나 시작력(詩作力)은 쇠퇴하여 만년에는 은거생활로 들어가 71세로 사망하였다.

뫼리케의 시는 연애의 괴로움이나 기쁨을 노래한 것 이외에 전원시(田園詩)·산문시 등 그 범위가 넓고 낭만주의의 민요적인 정서와 고전주의로부터 배운 형식의 입체성을 재치있게 조화시키고 있다. 소설로는 대작(大作) <화가 놀텐>(1832)과 <프라크를 여행하는 모차르트>(1856)가 대표작인데 전자에서 꿈과 현실 사이를 방황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후자에서는 빛나는 영광을 누리면서 마침내 쇠퇴의 길을 걷는 천재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사실주의 문학[편집]

寫實主義文學

문학사적 개념으로서 사실주의는 대체로 1830-1880년에 걸쳐 전(全) 유럽에 나타났던 현실주의적인 문학경향을 의미한다.

이 시대는 개괄적으로 보아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눈부신 진보, 기계적 생산수단이나 교통기관의 급속한 발달, 상공업의 비약적 발전, 시민계급의 현저한 진출로 특징지워진다.

이러한 사회정세와 그 속에서 자나라며 대두(臺頭)되고 있던 실증(實證)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염세주의 사상이 새 문학의 배경으로 놓여 있었다.

문학의 과제는 바야흐로 현실 시민사회에 있어서의 인간생활의 진실상을 정밀한 관찰과 분석에 따라 이해하여, 그것을 문학적 형상 속에 재현케 하는 것이었다. 경험적 사실을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또 충실하게 묘사하려는 수단으로서 흔히 소설형식이 이용되었다.

독일에 있어서의 사실주의 전개는 다른 나라에 비해 완만한 것이 있다. 이 시기의 시인들은 많든 적든간에 고전주의나 낭만주의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하고, 또한 이와 대결하면서 새로운 예술적 세계를 개척하려는 경향이 강하여 이들 시인은 그 창작방법과 현실사회에 대한 태도 여하로 3개 군(群), 즉 ‘비더마이어(Biedermeier)’(1820-1850), ‘청년 독일파’((1830-1850), ‘시적 사실주의’(1850-1880)로 구분된다.

하이네[편집]

Heinrich 〔Harry〕 Heine (1797-1856)

독일 시인이자 저널리스트.

뒤셀도르프의 유대 상인 집안에 태어났다. 19세 때 함부르크의 부호인 숙부 경영의 은행에서 견습행원으로 일하였다. 숙부의 학비조달로 1819-1825년까지 본, 베를린, 괴팅겐의 각 대학에서 법률학을 전공하였다. 1821년에 처녀시집을 출판하였다. 1825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였다.

1826년 <하르츠 기행> 제1권을 출판하였고 그 다음해에 <노래의 책>으로 크게 명성을 얻었다. 이즈음 영국과 이탈리아로 여행도 하였다. 1831년 이후 아우구스부르크 일반신문의 통신원으로서 파리에 정주하였다.

그는 파리에서 자주 예술가나 문학자의 살롱에 출입하고 저술에 정진하면서, 독일인에게는 프랑스의 실정을 전하고 프랑스인에게는 독일의 철학·문학·종교를 소개하여 양국민을 정신적으로 결합시키려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1832년에 <프랑스의 상태>, 1833년에 <낭만파(浪漫派)>, 그리고 1834-1840년까지는 <살롱>이라는 표제로 일련의 평론집을 발표하였다. 1835년 그의 전(全)저작은 독일 연방의회에 의해 발매금지가 의결되었다. 1843년과 1844년에 독일로 돌아가 그의 인상을 토대로 예리한 풍자를 담은 <아타·트롤>과 <독일·겨울이야기>를 발표하였다.

1847년경부터 점차로 척추병 증세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절망적, 투병생활 중에서도 초인적(超人的)으로 독서와 집필을 계속하여 1851년에 시집 <로만체로>를 완성하였다.

하이네는 독일 시인 중 괴테와 더불어 가장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시인이다.

노래의 책[편집]

Buch der Lieder (1827)

하인리히 하이네 시집.

1817-1827년 사이에 발표된 청년기의 시를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것이다. 전(全) 5부로 되어 있고 연대순(年代順)으로 배열되어 있다. 태반이 연애시로서 주로 그의 사촌 누이 동생 아말리에에 대한 연정(戀情)을 감상과 절망, 풍자와 자조(自嘲)를 통해 애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유명한 산문시 <척탄병(擲彈兵)>도 이 안에 있다.

연애시에 있어서도 산문시에 있어서도 즐겨 평이·소박한 민요조를 구사하고 있으나 특히 지적되어야 할 것은 그것의 절묘한 음악이다. <로렐라이>로 대표되듯이 아름다운 여운을 주는 하이네의 시구는 다른 시인에게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많은 작곡가들에 의해 작곡되었다. 슈만의 가곡집 <시인의 사랑>은 특히 유명한 것이다.

청년독일파[편집]

靑年獨逸派

대체로 1830-1850년까지 독일의 자유주의적 시인들에 의해 전개된 정치적 경향이 강한 문학운동을 지칭한다. 대표적 시인으로는 구츠코브, 빈바르크, 라우베, 문트 등과 여기에 하이네, 뵈르네도 더해진다. 이들 시인의 작품은 연방의회에 의해 금지되었다(1835).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위해 저널리즘을 무대로 활약하였으나 영속적인 가치를 지니는 작품이 드물다.

뵈르네[편집]

Ludwig Borne (1786-1837)

독일 저널리스트.

원명은 레프 바르프라고 하며,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거리에서 출생하였다. 의학·법률학을 배워 프랑크푸르트의 경찰서 서기가 되었으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1818년 루드비히 뵈르네로 개명하고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였다. 문필가가 되어 시종일관 유대인의 정신적·사회적 자유를 위해 펜을 무기삼아 싸웠다.

1830년 7월혁명 이래 파리에 이주하여 <파리 통신>을 써서 유명해졌다. 독일 연방의회는 이의 발매를 금지시켰다. 그의 독일에 대한 비판은 지극히 엄격하며 또한 신랄한 바가 있었으나 그의 타는 듯한 정의감, 기지(機智)와 유머가 깃든 유려한 문체, 기교나 주관성에 편중하는 것을 삼가는 객관적 태도 등으로 인하여 19세기 독일 신문문화란의 유형을 창시한 사람이 되었다.

레나우[편집]

Nikolaus Lenau (1802-1850)

독일 시인.

헝가리에서 출생하였다. 5세 때 부친과 사별하여 17세 때 빈에 있는 조부모의 곁으로 갔다. 1830년 조부모의 유산을 상속하자 공부를 중단하고 빈과 슈투트가르트 사이를 내왕하면서 방랑생활을 계속하였다. 1832년 신세계를 동경하여 미국에 건너가나 실망을 안고 돌아온다. 그러는 중에 시집이 출판되어 유명해진다. 1844년 발광하였다. 레나우는 즐겨 어둡고 우울한 기분의 풍경시(<갈대의 노래> <숲의 노래>)를 썼으나 그의 시에 나타난 강한 염세적인 정조(情調)가 시대적인 취향에 영합되었으므로 지나칠 정도로 높이 평가되었다.

하우프[편집]

Wilhelm Hauff (1802-1827)

독일 소설가·동화작가.

슈투트가르트에서 출생하였다.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을 마치고 귀족 자제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그의 유명한 동화집은 그당시 아이들에게 이야기로 들려준 동화를 토대로 한 것으로 출판된 3권의 <동화연감(童話年鑑)> 중 2권이 동방의 신비한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으로서는 <황새가 된 임금님> <꽃의 난쟁이> <차가운 심장> 등이 있다. 단편소설 <악마의 각서>(1825) 등에 의해 문재(文才)를 인정받고서, 영국의 스콧 예에 따라 저술한 역사소설 <리히텐슈타인>(1826)으로 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혔으나 아쉽게도 25세로 요절하였다.

플라텐[편집]

August von Platen (1796-1835)

독일 시인.

바이에른의 만스바하 귀족가(家)에서 태어났다. 1814년 사관(士官)이 되나 허가를 얻어 뷔르츠부르크, 에어랑겐 양 대학에서 8년간 법률학·철학을 배워 거의 모든 유럽어와 페르시아어에 통달하였다. 1826년 이후 바이에른왕(王)의 연금을 얻어 이탈리아에 이주하여 살았다. 젊어서부터 그리스·로마 고전문학에 열중하여 엄격한 형식 속에 우아한 미를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세계문학이란 대국적 입장에서 시작(詩作)을 시도한 그의 작품은 어딘가 개성미가 결여되어 있다는 흠은 있으나 곤란한 시형(詩形)을 다루는 데 있어서 그가 보인 표현기교의 완벽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바가 있다. 따라서 독일 서정시의 최대의 선구자라고 불린다. 그는 낭만주의 형식 경시의 경향을 비난하였으나 그의 작품을 일관하고 있는 것은 역시 낭만주의적인 우수(憂愁)와 동경이었다.

드로스테 휠스호프[편집]

Annette von Droste-Hulshoff (1797-1848)

독일 여류시인.

뮌스터 근교의 휠스호프 성(城)에서 출생하였다. 경건한 카톨릭 신앙, 귀족적 교양, 고향의 아름다운 자연과 신비한 전설 등이 그녀의 시작 전체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1820년에 종교시집 <거룩한 해> 제1부를 완성하였다. 1826년 부친 사후에는 모친과 함께 류슈하우스의 고독한 생활로 들어갔다. 이곳의 자연과 민화에 친하면서 시작에 전념하였다. 1840년 <거룩한 해> 제2부를 완성하였다. 다음해 가을 보덴 호반의 고성 메어스부르크에 이주하였다. 친구의 아들 레빈 쉬킹과의 경작(競作)으로 정열적인 연애시와 자연시를 썼다. 1842년 쉬킹과 헤어져 다시 고독한 생활로 들어갔다.

그녀의 특색있는 분야는 서정시. 특히 예리한 관찰과 자연에 대한 외경(畏敬)을 융합시킨 자연시였으나 산문시·서사시·단편 등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기고 있다.

뷔흐너[편집]

Georg Buchner (1813-1837)

독일 시인·극작가.

다름슈타트 근교 고델라우의 의사집안에 태어났다. 스트라스부르, 기센 양(兩) 대학에서 의학·자연과학을 전공하였다. 프랑스 혁명사,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의 저작을 탐독하였다.

그 후 과격한 정치적 자유운동에 투신했고 관헌의 혹독한 감시를 피하면서 프랑스 혁명의 한 장면을 묘사한 <단톤의 죽음>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완성 직후 위험을 느껴 스트라스부르로 망명하였다. 희극 <레온세와 레나>, 비극 <보이이크>, 단편 <렌츠> 등을 계속하여 발표하였다. 1836년 취리히 대학 강사가 되나 그 다음해 티푸스로 병사하였다.

뷔흐너는 참으로 반역아(反逆兒)란 이름이 붙을 만한 시인이었다. 그의 작품상의 특징은 인간의 생(生)에 있어서의 기만적인 베일을 모조리 벗기어, 그 밑바닥에 깔린 허무적인 물질성을 괴이할 정도까지 확대 묘사하고 있는 점이다. 다만 그것이 재래의 자연주의적·유물론적·숙명론적인 인간 해석의 벽을 타파하고 허무한 현실의 생으로부터의 구제를 구하는 영혼의 외침이 되려 하는 점이 주목을 끄는 것이다.

그릴파르처[편집]

Franz Grillparzer (1791-1872)

오스트리아 시인.

빈에서 출생하였다. 19세에 부친과 사별, 가계를 지탱하기 위해 공부를 중단하고 가정교사가 되나 굴욕에 분개하여 그 직을 그만두고 관리가 되었다. 1813년 궁정도서관 견습원으로 출발하여 1856년 퇴직할 때까지 하급관리의 지위를 감수하였다.

1871년 운명비극(運命悲劇) <조비>에 의해 일약 전유럽에

이름이 알려졌다. 1818년 발표된 <사포>에는 괴테적인 영혼상(象)에 관한 드라마와 같은 경향이 보인다. 또 동시에 이 작품은 그의 고대 그리스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이 계열에 속하는 것에는 <금양모피(金羊毛皮=Das Goldene Vlies)> 3부작(1822), <바다의 물결, 사랑의 물결>(1831) 등이 있다. 그는 또 열렬한 조국애에서 <오토카르왕(王)의 행운과 최후>(1825), <합스부르크가(家)의 형제 싸움>(遺稿) 등의 사극을 썼다. 그러나 희극 <거짓말쟁이에게 화(禍) 있으라>(1838)의 상연 실패 후 실망한 나머지 문단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의 작품에는 희곡 외에 자기 고백적인 서정시·정치시·단편 <가련한 음악사> 등이 있다.

시적 사실주의[편집]

詩的寫實主義

루드비히가 명명한 문학적 경향. 1848년의 3월혁명으로 ‘젊은 독일파(派)’ 등이 좌절되고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주의에 의해 독일통일을 목표로 나아갈 즈음, 독일문학은 사회에 대한 당파적 관심을 상실하고 시인 독자의 감정·감각에 따라 현실의 선과 악, 미와 추(醜) 등의 묘사를 중시하게 되었다. 이 경향은 1880년경까지 계속되며 현실의 내적 깊이와 미를 중시하는 표현양식은 그후의 자연주의보다는 오히려 고전주의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루드비히[편집]

Otto Ludwig (1813-1865)

독일 극작가·소설가.

튀링겐 지방 아이스펠트의 명문가(名門家)에서 태어났다. 21세 때 부친의 유산인 산장(山莊)에서 작곡과 독서에 몰두하였다. 집안이 몰락한 후 1839년 영주의 장학금을 얻어 라이프치히에 나가 멘델스존에 사사했으나 냉대를 받자 문학으로 전향하여 티크, 호프만의 영향을 받았다.

1844년 마이센에 은거하여 극작에 전념하였으나 실의(失意)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1849년 시민적 운명비극 <세습(世襲) 산림관>의 성공으로 드레스덴에 이주하였다. 1856년 바이에른왕(王)으로부터 연금을 받게 되었고, 1860년에는 실러상(賞)을 받았다. 또 소설에도 착수하여 <명랑한 계집애(He-iterthei)>(1854) 등은 극작을 능가하는 걸작이었다. 죄악·허위를 증오하며, 인간은 언제나 자기 운명의 타개자이며 자기에 대해 엄격하고 타인에 대해 관용을 주장하는 윤리적 태도와 낭만파와 상통하는 서정성·유머의 분위기는 그의 리얼리즘의 특색이 되어 있다. 또한 그는 셰익스피어의 철저한 찬미자였다.

슈티프터[편집]

Adalbert Stifter (1805-1868)

오스트리아 소설가.

보히미아의 오버플란(현 체코령에서 아마포(亞麻布)를 직조하고 판매하는 상인을 부친으로 하여 출생하였다. 관리를 지망하여 빈 대학에 입학(1826)하여 법률을 전공했으나 자연과학에 대한 흥미와 선천적인 화재(畵才)를 살려 가정교사를 하는 한편 그림공부를 계속, 대학을 중퇴하고 화가가 되고자 하였다. 한편 31세경부터는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고, 우연한 기회에 단편작품 <콘도르>(1840)가 빈의 잡지에 게재되어 호평을 받음으로써 작자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빈에서 레나우, 그릴파르처 등과 친교를 맺었고 그 후 발표된 작품(<수작집>)에는 티크와 호프만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그는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중시하였으나 3월혁명(1848)의 유혈과 혼란으로 환멸을 느껴 실의 중에 빈을 떠났다. 그 후에 린츠시(市)의 장학관(奬學官)이 되어 평생 그곳의 자연을 벗하며 교육·미술비평과 창작을 계속하였다.

단편집 <분테 슈타이네>(얼룩돌) 2권(1853)의 서문에서 “진정으로 위대한 것은 자연의 창조물의 가장 작은 것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거기에서 그의 미적 세계관, 대자연의 ‘평온한 법칙’이 토로되어 시적 사실주의의 일각(一角)을 지키는 작가인 헤벨의 비난을 반박하여 혁명체험 후의 예술관을 명확히 하고 있다.

장편 <늦여름>(1857)은 괴테를 되새기게 하는 인간형성의 이상상을 묘사한 교양소설이고. 장편 <비티코>(1867)는 정치적 이상상(理想像)을 묘사하는 역사소설이다. 단순하기는 하나 정열을 깊이 간직하며 자연스럽고 완전한 조화를 추구하는 문체는 최대의 자연묘사가임을 입증하고 있다.

켈러[편집]

Gottfride Keller (1819-1890)

스위스 소설가.

시적 사실주의의 대표적 존재로서 ‘스위스의 괴테’라고 일컬어진다. 프랑스 혁명 이래의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목공’을 아버지로 하여 취리히에서 출생하였다. 요절한 부친의 유지를 이어 공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교사 배척사건에 연루되어 퇴학(1834) 당한다. 보수적인 농민에 대항하여 자유주의적 목사 다비드 슈트라우스의 취리히 초빙(1839)에 찬성하는 등 자유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선천적인 자연애(自然愛)와 화재(畵才)를 지녀 풍경화가를 지망하고 뮌헨으로 나아갔다(1840). 이곳에서의 생활은 고통스러운 것이어서 2년이 채 못 되어 귀향, 정치시를 신문·잡지 등에 발표하며 지방의 보수파에 대항했다.

그즈음 문학에 관심을 쏟게 되어 1847년 스위스가 시민혁명에 성공하자 주정부(州政府)의 장학금을 얻어서 하이델베르크로 가서(1848-1850), 포이어바흐의 <종교의 본질에 관한 강연>에 큰 감명을 받았다. 신(神)을 인간의 힘과 의욕의 결집(結集)이라고 보는 현세적 인간주의로서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녹색(綠色)의 하인리히>(초판)에 착수하면서 베를린으로 나가 극작가가 되기를 지망하나 실패하여 다시 귀향했다. 그 후 앞서의 초판본(初版本)(1855)과 <젤트빌라의 사람들> 제1부(1856) 등의 두 작품을 남기고 작가활동을 중단한 후 주정부(州政府)의 서기관이 되었다.

재차 창작활동을 시작한 것은 퇴관(1876)을 전후한 50세를 넘어서부터로 젊었을 때의 사상태도에 입각하여 시민사회에의 참여, 시민적 윤리의 확립을 항상 문제로 삼았다. 그러나 그의 묘사만은 현실을 냉혹하게 폭로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성이 풍부하며 재미있고, 예리한 점은 있으나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장편에는 <녹색의 하인리히>외에 미완성의 사회소설 <마르틴 살란더>(1886)가 있으며 가까운 장래의 사회개혁과 인간혁명의 가능성을 묘사하고 있다. 수많은 단편이 <일곱 개의 전설>(1872), <젤트빌라의 사람들>(제1부 1856, 제2부 1874) 등에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젤트빌라>는 지극히 스위스적인 가공의 소읍(小邑) 풍속을 풍자와 유머로 묘사하여 인생의 진정한 의의를 구하고 있다.

녹색의 하인리히[편집]

Der grune Heinrich (초판 1885, 재판 1880)

켈러의 자서전적인 교양소설.

베를린 체류 중의 생활은 고통스러운 것이어서 인세(印稅)를 선불(先拂) 받은 기회에 착수한 작품이다. 초판은 부친 사후, 아들을 위해서 고생하다 돌아가신 어머님에 대한 회오(悔悟)를 포이어바흐적(的)인 체험에 의한 세계관에 서서 객관적으로 자기를 정산(精算)하려고 시도했다. 작품에서는 바로 이 반대적 요인이 리얼리즘 형식상 조화되지 않았고, 자기 정산은 주관적 요소에 머물지만, 스위스 시민으로서의 도덕적 무자격과, 시민권 회복에의 의도를 작자 자신이 동시에 자각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모순에 대한 보상은 재판(再版)을 기다려야 되었다. 초판(初版)의 비극은 주인공의 정치가로서의 재생(再生)으로 바뀌고, 초판의 모순도 포이어바흐적 체험을 쌓아서 교양소설적 성격을 강화함으로써 해소된다.

마이어[편집]

Conard Ferdinand Meyer (1825-1898)

스위스 시인·시인 소설가.

취리히의 명문에 태어났다. 법률가를 지망하였으나 선천적으로 섬세한 신경과 과잉된 자의식 때문에 주위 환경에 대한 괴로운 갈등을 계속하여 40대 중반까지 거의 무위로 소일하였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에 의한 보불전쟁의 승리에 자극받아 집필된 <후텐의 최후>(1878)를 계기로 하여, 60대 중반 재차 신경증으로 침묵할 때까지 20년 동안에 수다한 작품을 남겼다. 대부분은 ‘틀에 박힌 소설’ 형식의 역사소설로서 이탈리아 르네상스기(期)나 종교전쟁을 소재로 하고 있다. 또 형상시(形象詩)의 선구라고도 할 서정시를 중심으로 한 <시집>(1882)에서는 투명한 어구로 사랑과 죽음을 애처롭고도 아름답게 노래하여 후일 릴케의 작품세계를 느끼게 한다.

헤벨[편집]

Christian Friderich Hebbel (1813-1863)

독일 극작가·소설가. 홀슈타인의 베셀부렌 빈가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출생지는 덴마크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독립·반항의 정신이 투철하였다. 그의 강렬한 성격도 어느 정도 이 종족성(種族性)에 기인한다. 집안은 가난하였고, 완고한 부친 때문에 항상 고통을 받았다. 부친 사후 14세로 교회관리인의 서기 겸 심부름꾼이 되나 독서에 힘써 교회의 도서를 모두 읽었다. 그래서 20세가 되었을 때에는 독학으로 상당한 교양과 자신을 얻었다. 23세 때 몇 차례 시를 투고하였던 함부르크의 잡지사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어, 그 원조로 함부르크 대학의 청강생이 된다. 여기에서 9세 연상의 여인과 사귀어 그녀의 헌신적 사랑과 원조를 얻어 생활의 곤궁을 면하고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다.

처녀작 <유디트>의 완성, 상연의 성공은 덴마크 국왕에게도 인정을 받아 여행기금이 수여되어 파리, 뮌헨,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였다. 1845년에 빈으로 나가, 두 아이의 어머니인 함부르크 여인을 버리고 왕립극장의 여배우와 결혼, 극작에 몰두하여 평생 12편의 희곡을 발표하였다. 최후의 작품 <니벨룽겐족(族)>(3부작)으로 실러상(賞)을 획득하였다. 사적 사실주의의 대표적 존재로 작품에 시·소설도 있으나 희곡에 그의 진가가 나타나며, 초기의 내공적 경향(內攻的傾向), 정경의 어두운 묘사는 입센과 일맥상통하는 근대적 심각미의 표징이며, 만년의 원숙한 성격묘사에 의한 예술양식에는 고전파적 분위기가 나타나 있다. ‘개(個)’와 ‘전체’(사회)를 고찰하는 세계관을 제작동기로 하는 시대적 특성은 헤벨에게 있어서도 공통되는 것이었다.

유디트[편집]

Judith (1839)

헤벨 희곡.

당시 간행되어 있던 구츠코브의 비극 <사울>에 대한 대항심과 함부르크의 여인 엘리제 렌싱의 헌신적 원조 아래 착수되었다. 그 소재는 구약외전(舊約外典)의 유디트서(書)에 의하는 것으로 작품의 줄거리도 대체로 그것에 의하나, 작품에서 유디트는 처녀이면서 과부라는 기이한 처지에 놓인다. 적군에 포위된 고향 베투리야를 구출하기 위해 신의 계시를 좇아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타도코자 단신 적진에 들어간다. 그녀는 정조를 희생하여 그를 살해하나, 사실은 동포애 때문에 한 행위가 아니고 적장에 대한 자기의 욕정을 죄로 생각한 데에서 나온 자기중심적 보복이었다. 사랑하는 자를 살해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이 작품의 비극적 핵심이다. 이러한 여성심리의 분석은 근대적 수법에 속하는 것이다.

마리아 막달레나[편집]

Maria Magdalena (1843)

헤벨이 여행 중 파리에서 완성한 희곡.

함부르크의 여인 엘리제 렌싱의 애정과 헌신을 염두에 두고 집필되는데, 그녀의 모습은 극의 주인공 클라라의 고민하는 모습을 통해 묘사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시민비극이라 불리지만, 시민 대 귀족이라는 계급 간의 대립이 아니고, 소시민사회 그 자체 속에 있는 편협한 도덕관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작자의 부친을 연상케 하는, 완고하고 구식인 늙은 군기장인(軍旗匠人), 딸 클라라, 그녀를 임신케 하고 도망치는 약혼자 레온하르트, 세 사람 모두 체면에 신경을 쓰며 이야기는 진행되어 비극이 된다. 옛 애인에게서 서신 내왕이 끊겼다고도 하지만 출세에 급급한 사나이와 약혼하여 세상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꺼려하는 클라라에게는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받는 죄많은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와는 달리 구원이 없다.

기게스와 그의 반지[편집]

Gyges und sein Ring (1853)

헤벨의 만년 희곡.

친우로부터 그리스의 칸다울레스와 기게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기 스스로도 헤로도토스의 기록과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은 후 저작에 착수하였다. 전자로부터는 작품의 주된 줄거리를 후자로부터는 사람의 모습을 안 보이게 하는 이상한 마력을 지닌 반지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다. 칸다울레스왕(王), 절세의 미인 로도페 왕비(王妃), 왕명에 의해 마법의 반지를 이용, 왕비의 방에 침입해서 그녀의 아름다운 나신(裸身)을 엿본 기게스 청년이 주역으로 등장한다. 기게스는 왕비에 대한 연정과 천한 자기 행동, 사건을 안 왕비는 자기 남편에 대한 불신과 사랑의 갈등으로 괴로워한다는 비극이다. 여성을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하던 시대의 여성 비극을 주제로 하였다. 그러나 정묘한 심리묘사는 여성을 우아하고 청순한 존재로 승화시키고 있다.

라베[편집]

Wilhelm Raabe (1831-1910)

독일 소설가.

브라운시바이크 공국(公國)의 에셔스하우젠에서 재판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때 서점에서 견습원으로 있었으며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과 문헌학(文獻學)을 전공하였다. 이 베를린 시절의 시정(市井) 생활을 관찰하여 작품화한 <참새거리의 역사>로 명성을 얻고서 슈투트가르트, 브라운 시바이크에 살면서 작가활동을 계속하여 장·단편 70여 편의 소설을 남겼다. 기교, 신랄한 아이러니, 따뜻한 유머 등 장 파울과 상통하는 낭만파적 요소와, 인물·사상(事象)을 객관적으로 중후하게 묘사함으로써 디킨스와 상통하는 리얼리즘 요소의 총합이라고 볼 수 있는 작품 <숲에서 온 사람들>(1863)에서 보여준 창작태도로 19세기 가장 독창적인 작가라는 평을 듣는다.

프라이타크[편집]

Gustav Freytag (1816-1895)

독일 극작가·소설가·역사가.

슐레지엔의 크로이츠부르크에서 의사(후에 시장이 됨)를 부친으로 하여 태어났다. 브레슐라우와 베를린 양(兩) 대학에서 독일 문학을 배웠다. 1839년 브레슐라우 대학의 독일문학 담당 강사가 되나 여유 있는 생활이어서 곧 사임하고 1844년 이후는 문필활동에 전념하였다. 1848년 라이프치히에서 율리안슈미트와 더불어 주간지 <그렌스보텐>을 주재하며, 1870년까지 독일 자유주의를 육성 지도하였다. 그동안에 북독일 국회의 국민자유당 의원으로 선출된 일도 있다. 보불전쟁에 종군하여, 작위가 수여되나 사양하였다. 독일민족의 통일을 최대의 관심사로 하고 그 담당자를 시민계급(상인·학자·신문기자 등) 속에서 발굴하며 귀족·벼락부자와 대비시키면서 견실한 시민정신을 묘사한 희극 <신문기자>(1852), 장편소설 <대차(貸借』(1855) 등은 걸작이란 평을 받고 있다.

폰타네[편집]

Theodor Fontane (1819-1898)

독일 소설가·시인.

브란덴부르크의 노이루핀의 약국집에서 태어났다. 베를린의 직업학교를 졸업한 후 견습기간을 거쳐 약제사가 되었으나 1844년 지원병으로 1년간 입영했다. 이곳에서 젊은 시인들의 모임인 ‘슈프레 턴넬’의 동인(同人)이 되어 문필가가 되기를 지망하였다. 세 차례나 영국에 건너가, 산문시·극·미술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스콧이나 바이런의 영향을 받았다. 시작(주로 산문시), 극평을 하는 한편, 보불전쟁에 종군하는 등 기자생활을 계속하였으나 생활은 넉넉지 못하였고, 생활의 안정을 얻은 것은 최초의 장편 <폭풍 전(前)>(1878)을 발표하였던 59세경부터였다.

그 후 <미로>(1888)를 시위하여 18편의 장·중편소설을 발표했다. 극적인 박력은 약하나 풍부한 인생경험에 따라 모든 인간사를 따뜻하게 꾸밈없이 이해하고 산문시의 제작에서 얻어진 ‘대화’의 기교를 이용하여, 베를린 시민사회의 생활을 침착한 필치로써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심리묘사의 멋과 아이러니는 토마스 만에게 영향을 주었다.

에브너에셴바흐[편집]

Marie von Ebner-Eschenbach (1830-1916)

오스트리아 여류작가.

귀족의 딸로 메렌주(州)에서 출생하였다. 귀족 출신 사촌 오빠와 결혼하여, 빈에서 행복한 생활을 보내며 젊어서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다. 초기의 극작은 실패로 끝나지만 45세 때에 발표한 <소설집>이 있고, 이후 고향의 ‘선인(善人)’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인 농민·소시민들에게 따뜻한 동정과 공감을 표시하며, 세기말의 불안정한 사회에 사는 귀족에게는 동정과 동시에 거리낌없는 비판을 가한 소설 중에 뛰어난 작품이 많다.

슈토름[편집]

Theodor Storm (1817-1888)

독일 소설가·시인.

슐레스비히의 서해안인 후줌에서 변호사를 부친으로 태어나 킬 대학에서 법률학을 공부했다. 그러는 사이에 지방의 민화를 수집하였다. 졸업 후, 고향에서 변호사를 개업하나 고향이 덴마크 지배하에 들어간 후 그 직책을 박탈당하였다. 그 후 친지의 소개로 겨우 포츠담 법원의 배석판사가 되고 작센의 하일리겐시타트의 지방판사를 역임한다. 향수에 찬 나날을 보내다 덴마크의 지배를 벗어나게 되어 귀향하였다. 주시자·판사를 역임하다가 60세가 되어 직을 물러나고 하데마르센에서 은거하며 조용히 창작에 전념하였다.

시인으로서는 다작(多作)은 못 되나 뫼리케와 대등하다는 평을 받았다. 작품경향은 깊은 내면성·진실성·섬세한 감정으로 일관되어 있고 고향인 북해의 해안을 노래한 것이 대부분으로 민요적 성격을 띤다. 소설로는 초기의 작품 <임멘 호>를 비롯하여 단편·중편 총 50편 이상이 된다. 일반적으로 서정적 분위기의 작품이 많다. 중기의 추억(追憶)소설을 거쳐 심리(心理)소설로 발전하며, 후기에는 점차 리얼리스틱하게 되었다. 인간심리를 세분하여 파악하고, 조용한 스타일을 취하면서도 긴장된 국면을 표현하는 성격묘사를 특징으로 하였다. <백마의 기사>는 고향의 해안 제방(海岸堤防)의 건설에 얽힌 옛 민화를 취급한 최후의 역작이다.

임멘호[편집]

Immensee (1849)

슈토름 단편.

젊었을 때의 덧없는 사랑과 그 후일담. 소꿉친구인 라인하르트와 엘리자베스는 동화를 주고받으며 숲으로 바람을 쐬러 간다든가 하여 유년시절을 사이좋게 지낸다. 청춘시절을 맞아 라인하르트는 처음으로 엘리자베스의 곁을 떠나 유학길에 오른다. 2, 3년 후 서로 기쁜 마음으로 사랑을 다짐하나 돌연 엘리자베스는 타산적인 어머니에 의해 라인하르트의 친구인 유복한 청년과 혼인을 하게 된다. 라인하르트는 남몰래 괴로워한다. 수년 후 친구의 초대를 받아 임멘호(湖)의 저택을 방문하여 엘리자베스와 재회한다.

숲과 호수를 배경으로 두 사람 사이의 어찌할 수 없는 고민을 아름답고 슬프게 묘사하고 있다.

하이제[편집]

Paul Heyse (1830-1914)

독일 소설가.

유명한 언어학자 카를을 부친으로 하여 베를린에서 출생하였다. 베를린 대학에서 문헌학(文獻學)을 배우고 시인 가인벨과 친교를 맺었다. 졸업 후 약 1년간에 걸친 이탈리아 일주여행(1852)은 그의 창작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탈리아에서 소재를 취한 것 중에 걸작이 많으며, 유명한 단편소설론 <매[鷹]의 이론(理論)>(1871)도 데카메론 중의 한 설화(說話;제5일 제9화)에 의하였다고 한다. 긴박감과 형식적으로 완벽한 기교를 나타내는 장기간의 창작활동에 의하여 191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라라비아타(외고집의 딸)[편집]

L’Arrabiata (1855)

하이제 단편소설.

이탈리아 여행의 산물로서, 풍광(風光)이 명미(明媚)한 소렌토와 카프리를 무대로 하는 하룻동안의 이야기이다. 부친과 사별하고 그 부친의 폭력으로 인해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행상을 하는 아름다우나 외고집쟁이이고 남자들에게 불신감을 가진 처녀 라우라는, 남몰래 사모하는 청년 안토니오의 배로 카프리에 간다. 귀로에 안토니오의 구애를 받으나 맹렬한 반항으로 남자의 팔을 깨문다. 솟구치는 피, 바다에 흘러 들어가는 피를 보고 증오가 돌연 애정으로 변한다는 이야기이다.

슈피리[편집]

Johana Spyri (1829-1901)

스위스 여류작가.

취리히 근처의 히르첼에서 의사의 딸로 태어난 스위스 최초의 여류작가. 강한 종교감정(신교)에 바탕을 둔 그녀의 작품은 널리 읽히고 있다. 대표작에는 유명한 <알프스의 소녀>를 포함하여 16권으로 되어 있는 <아이들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1879-1895), <민중의 이야기> 2권(1844-1891) 등이 있다.

자연주의 문학[편집]

自然主義文學

프랑스의 졸라가 외친 실험소설론이나 극장의 자연주의 등에 자극받아 1867년 최초로 독일에 자연주의 문학을 이입한 것은 게오르그 콘라트였으나 이 유파의 선구는 서사시인 하르트 형제였다. 한편 홀츠와 요하네스 슐라프 등은 철저하게 자연주의를 표방하여, 공동으로 이론과 창작 양면에 활약하였다. 마침내 젊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희곡 <해뜨기 전>의 출현으로 독일의 자연주의도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였다. 한때 주더만도 극작가로서 하우프트만과 비견(比肩)할 만하다고 하였으나 그 밖에 흥행성적이 좋았던 극 <청춘>(1893)의 작가 막스 할베(1865-1944)나 게르하르트의 형인 카를 하우프트만(1858-1921) 등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독일의 자연주의는 전기한 졸라 외에 입센,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의 영향도 받고 있었다. 19세기의 리얼리즘 문학은 예술적 관점에서 현실을 취사 선택하여 묘사하나, 자연주의 문학은 자료(資料)나 사실을 광신하여 현실의 충실한 모사(模寫)를 중시한 나머지 지엽적인 것에 빠질 우려가 있다. 산업혁명과 급속한 기계공업의 발달로 사회의 모순이 격화된 세기말의 염세주의를 반영하였다. 독일의 자연주의는 생명이 짧아 벌써 헤르만 바르의 <자연주의의 극복>(1891)에 의해 점차로 인상주의·신낭만주의·신고전주의가 그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주더만[편집]

Hermann Sudermann (1857-1928)

독일 극작가·소설가.

하우프트만의 <해뜨기 전>이 자유극장에서 각광을 받은 다음해(1890), 처녀희곡 <명예>가 상연되었다. 한때 하우프트만과 더불어 극단(劇壇)의 총아가 되기도 하였다. 현실로부터 출발하는 하우프트만에 반하여 주더만은 명예라는 이념(理念)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주인집의 아들에게 정조를 유린당하는 누이동생을 위해, 돈으로 해결을 도모하는 부호의 이기주의에 대항하는 주인공 로베르트의 투쟁을 테마로 한 것이다. 또한 4막극인 <고향>(1893)은 여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마그다>라는 표제로 된 영역본(英譯本)이 나와 영화화되었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주장하는 신시대의 여인과 구(舊)사상의 완고한 아버지와의 충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주더만의 희곡은 무대기교에는 뛰어난 바 있으나 이야기의 전개가 안이하며, 관객의 갈채만을 너무 노림으로써 통속성(通俗性)을 벗어나지 못한 흠이 있다. 또한 그는 이전에 <우수 부인(憂愁夫人)>(1887)을 발표하여 소설가로서도 유명해져 있었다. 동(東)프러시아의 자연과 어두운 농민생활을 배경으로, 주인공 파울은 아버지와 연인을 구하기 위해 자기 집에 방화한다. 2년간의 옥살이를 끝내고 연인과 맺어지나 우수부인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회색(灰色)여인의 저주로 불행이 계속된다. 그러나 주인공의 자기 희생과 영웅적 행동에 의해 우수 부인을 쫓아버린다는 내용의, 현대 최초의 교양소설이다. 그 밖에 <리투아니아 이야기(Litanische Geschichten)>(1917)를 비롯한 다수의 장·단편이 있다.

홀츠[편집]

Arno Holz (1863-1929)

독일 소설가.

처음 <시대(時代)의 서(書)>(1885)에 수록된 서정시에서 출발하였다. <예술의 본질과 법칙> 속에서 “예술은 또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하여 철저한 자연주의를 제창하였다. 또 요하네스 슐라프(1862-1941)와 협력하여 <파파 햄릿>(1889)이라는 소설을 익명으로 발표하였다. 이어 저술된 <젤리케 일가(一家)>(1890)라는 희곡에서 주로 일상의 대화(對話)를 통해 표현되는 정교(精巧)하고 철저한 사실주의의 표현은 젊은 하우프트만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하우프트만[편집]

Gerhart Hauptmann (1862-1946)

독일 극작가·소설가·시인.

그는 슐레지엔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다. 일반적으로 휴머니스틱한 사회적 동정(同情)을 읊은 시인이라고 불리나 오히려 그 본질은 생(生)의 고뇌 그 자체를 이념으로서가 아니고 살아 있는 인간을 리얼하게 구상적(具象的)으로 표현한 데 있다. 알코올 중독과 악성유전(惡性遺傳)을 테마로 한 자연주의 희곡 <해뜨기 전>(1889)은 노작가 폰타네로 하여금 “입센 유(類)의 작풍을 보다 충실케 하여 생(生)의 일면(一面)을 관조(觀照)하게 한 걸작”이라고 격찬케 하였고, 자유극장에서 상연되어 일약 일류작가가 되었다.

그 밖에 우수한 사실극(寫實劇)을 열거하면, 자신의 체험을 엿보인 <외로운 사람들>(1891), 무능한 재판관을 풍자한 걸작 희극 <해리(海狸)의 모피>(1893) 지방 관리 슐레지엔의 사실(史實)을 토대로, 직조공들의 자연발생적 태업을 취급한 것으로 40인의 등장인물을 각기 실감있게 묘사하여 극적 박력을 나타낸 걸작 사회극 <직조공>(1891), 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야심작 <플로리안 가이어>(1896), 예술가의 고뇌와 부자(父子)간의 대립을 묘사한 <미하엘 크라마>(1900), 19세기말의 쇠퇴해 가는 마차꾼 생활 중에 자살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마차꾼 헨셸>(1898)과 농촌의 영아살해를 테마로 한 <로제 베른트>(1902)의 두 작품은 모두 리얼리즘의 극치(極致)라 할 수 있고, <리어왕(王)>을 연상케 하는 비극 <해지기 전(日沒前)>(1923) 등이 있다.

상징적·낭만적 극작 중의 중요한 것을 들면, 고뇌에 찬 현실과 천국으로 가는 꿈의 교착(交錯)을 묘사한 <하넬레의 승천>(1893), 야생녀 라우텐데 라이에 반해 처자를 버리는 주종장인(鑄鍾匠人) 하인리히를 주인공으로 한 운문극(韻文劇) <침종(沈鐘)>(1896), 중세에서 취재한 걸작 운문극 <가련한 하인리히>(1902), 그릴파르처의 소설에서 인용하여 업보(業報)로서의 에로스가 가지는 파멸적(破滅的)인 힘과 생의 무상감을 묘사한 <에르가>(1905), 난해(難解)하지만 아름다운 상징극 <그리고 피파는 춤춘다>(1906), 독일 군국주의를

풍자한 인형극 <축전극(祝典劇)>(1913) 등이 있다. 최후의 특기할 걸작은 그리스 비극의 숙명적 결정론을 더욱 심화(深化)시킨 <아토리덴>(4부작 1941-1949, 그의 사후 출판)이다.

소설분야에서는 섬세한 자연주의적 관찰을 반영한 단편 <선로지기 틸>(1888), 중편인 <소아나의 이단자(異端者)>(1918)는 창조적 에로스의 세계와 알프스의 자연을 원숙한 필치로 묘사한 근대 독일문학의 걸작 중 하나이다. 기행문인 <그리스의 봄>(1908), 일기체 자서전 소설 <정열의 책>(1930), 장편 중 대표작인 <그리스도 광(狂) 엠마누엘 쿠빈트>(1910)는 아코비메의 신비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미완성 장편소설 <신크리스토폴로스>와 함께 깊은 종교적 체험의 고백을 내용으로 하는 야심작이다.

서사시 중에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민족의 도의적 분기를 시사한 <틸 오이렌슈피겔>(1927), 단테의 <신곡> 시형(詩形)으로 꿈 속의 방황을 통해 죽음의 의문을 해명하고자 시도한 역작(力作) <위대한 꿈>(1943) 등이 있다. 그 밖에 서정시집으로 <5색의 책>(1888), <낙수집(落穗集)>(1939), <최후의 시집>(1946) 등이 있어, 어느 것이나 음악적 리듬으로써 대자연에 대한 사랑과 사생관(死生觀)을 차분히 노래하여 고고(孤高)한 시인 하우프트만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해뜨기 전[편집]

-前 (1889)

하우프트만 희곡.

유전과 환경의 강력한 힘을 묘사한 하우프트만의 5막 사회극이다. 사회 개혁주의자이자 금주론자인 로트는 광산 노동자들의 생활 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북독일 빅돌프에 갔다. 그 마을에는 로트의 대학 시절 친구인 호프만이 탄광으로 벼락 부자가 된 크리우제의 장녀인 마르타와 결혼하여 살고 있었다.

호프만은 학생 때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였다. 경력이 있지만, 졸업하자마자 금(金) 채광에 관심을 두어 크라우제 집안의 양자가 되었고, 지금은 광부들을 착취하고 있다. 로트는 변함없이 사회주의 운동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집은 알코올 중독자가 많은 대음주가의 집안으로 세 살된 아들이 음주벽 때문에 죽어버렸다. 아버지나 어머니 모두가 추하고 더러운 생활을 하는 환경속에서 순수함을 잃지 않은 차녀 헬레네는 로트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로트 또한 헬레네를 사랑하기에 이르지만 의사로부터 이 집안의 음주벽 등의 유전에 대해 듣게 된다. 그 후 로트는 자신의 이념과 가치에 충실하고자 헬레네를 버리고 그 마을을 떠난다. 헬레네는 로트가 남긴 편지를 보고는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작품은 하우프트만의 처녀 희곡으로 1889년 10월 베를린 레싱좌에서 상연된 후 수법과 내용의 참신한 감동으로 일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하우프트만은 자연주의 문학의 기수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20세기[편집]

20세기 문학[편집]

-世紀文學 자연주의 문학은 독일에서는 지극히 단명하였다. 이에 대신하여 20세기 초두에 신(新)낭만주의가 등장하였다. 이미 바르는 <자연주의의 극복>(1891)을 저술하였으나 그 정신적 원동력이 된 것은 니체였다. 그는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이래, 본래의 생명력을 잃어가던 기성 그리스도교(敎)를 공격하고 "신(神)은 죽었다"라는 정언(定言)을 던져 세기말 유럽의 니힐리즘에 예리한 메스를 가하는 한편 중다(衆多)를 앞세우는 사회주의나 민주주의에 반대하여 정신의 귀족과 개인주의에 근원한 생(生)철학을 설파하였다. 독일은 19세기에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는 빌헬름 2세 통치하의 제국주의시대로서, 사회주의적·인도주의적·반(反)군국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하우프트만의 희곡 <직조공>이나 <축전극>은 한때 상연이 금지되었다. 신(新)낭만주의는 정치적·사회적 비판을 단념하고 오로지 관념적인 주관세계에 빠져 있었다. 신(新)낭만주의도 이를 더욱 세분하면 지각 내지 감각과 기분에서 출발하여 될 수 있는 대로 관능(官能)과 형식의 아름다움을 구하고 덧없는 환상(幻像)을 추구하며 작자의 인상을 충실히 재현하려고 시도한 인상주의 문학(릴리엔크론, 데멜, 바르, 빈파(派)의 슈니츨러, 호프만시탈, 다우텐다이 등)과 현실의 예감을 상징적 수법이나 신비적 사상에서 구하는 상징주의 문학(게오르게, 릴케, 후흐, 오이레베르크, 슈토켄 등)으로 나뉜다. 자연주의 문학에서 신낭만주의를 거쳐 만년의 그리스적 운명감과 신비사상에 도달한 하우프트만이나 자연주의적 수법에서 출발하여 풍자적 문명비평의 교양소설을 쓴 토마스 만이나, 예리한 심리분석을 장기로 하는 풍속작가(風俗作家) 바서만이나 내면성을 파고들어 독자적인 교양소설을 세상에 내놓은 헤세, 카로사, 무질, 브로호나 부조리한 세계를 실존주의적 수법으로 표현한 카프카 등은 하나의 조류(潮流) 속에 묶어서 논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신낭만주의에 싫증을 느껴 고전주의 정신과 형식으로의 복귀를 외치며, 특히 헤벨을 재인식하려고 하는 일파(一派)의 신고전주의 문학(에른스트, 숄츠)이나 건전한 혈연과 향토에 바탕을 둔 문학을 제창한 향토문학(鄕土文學)(슈트라우스, 토마, 셰퍼, 슈미트본 등)도 민족성을 지나치게 고취한 나머지 나치스에 이용당하여 어용문학(프렌젠, 콜벤하이어, 그림 등)으로 전락된 것도 있다. 외계에서 내계로 방향을 돌린 인상주의에 대해 내계에서 외계로 자기의 감정을 표백하는 표현주의 문학(1912-1926)은 슈트린드베리나 도스토예프스키에 영향을 받고 하인리히 만이나 베데킨트를 선구자로 하여 현상학(現象學)과 프로이트나 베르그송의 철학적 배경하에 전후의 반전사상을 주로 하여 서정시나 희곡에서 전개되었다(카이저, 베르펠, 되블린, 슈테른하임, 추크마이어, 크라븐트, 벤, 트라클, 하임 등). 표현주의가 양식상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사회주의 혁명에로의 길을 밟은 작가(브레히트, 베허, 프랑크, 톨러 볼프 등)도 있었다. 너무나 주관주의적인 감정의 도취(陶醉)에 치우치던 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신즉물주의(新卽物主義)가 일어나 새로운 객관성, 마(魔)의 리얼리즘이라 불려 근대기술의 유선형(流線型), 특히 건축의 합목적적 실용성을 찬미하여 보고(報告)문학이나 전쟁문학(케스트너, 렌, 레마르크 등)으로 개화되었다. ‘피와 흙’의 문학을 구가한 나치스 문학에는 전술한 사람 외에 요스트, 브룽크, 그리제 등의 작가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스위스, 네덜란드, 프랑스, 소비에트, 미국에 망명한 작가들(만 형제, 프랑크, S.츠바이히, 되블린, 운루, 비헤르트, 포이히트방거 등)은 이민문학(移民文學)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전후의 문학으로서는 서독의 뵐, 자이델, 괴스, 융거 형제, 베르겐그륀, 르 포르, 안드레스, 카자크, 아이히, 그라스, 바이스, 슈미트, 서정시의 바하만, 엔챈스베르거, 스위스의 후리셰, 동독의 제거스, A. 츠바이히 등이 있다.

니체[편집]

Friedrich Nietzsche (1844-1900)

독일 철학자·시인.

라이프치히 부근의 뢰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리었고, 24세로 스위스의 바젤 대학 교수로 추천되었다. 학생시절부터 바그너의 음악과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친근하였고, 특히 성서와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를 애독하였다.

처녀작 <음악의 정신에서 오는 비극의 탄생>(1871)에서 그는 그리스 비극의 본질을 도취와 정열적인 음악의 신(神) 디오니소스와 명징(明澄)과 조화적·조형예술의 신 아폴로와의 융합으로 보았다. 바그너의 악극에 유럽 문화의 장래를 걸어보나 후에는 악극 <파르치팔>(1865-1882)을 그리스도교(敎)로의 복귀로 보고 바그너와 결별(訣別)하였다.

니체의 주저 <자라투스트라>(1883-85)는 페르시아 역사상의 한 교조(敎祖) 이름을 빌어 초인(超人), 힘에의 의지(意志), 영겁회귀(永劫回歸)의 사상을 담은 웅대한 철학적 서사시이다. 그 내용은 상징적·암시적·역설적·아폴리즘(警句)의 형식을 취하는 간결한 문체로 <밤의 노래>와 같은 걸작 서정시를 도처에서 볼 수 있으며, <선악의 피안>(1886)과 같은 아름다운 여운을 주는 문체와 동시에 독일의 신낭만주의, 나아가서는 세계문학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니체의 리드미컬한 산문은 루터의 성서역문(聖書譯文)과 괴테의 서정시와 더불어 독일어에 의한 표현상의 지보(至寶)적 존재이며, <가을> <소나무와 번개> <에케 호모> <베네디히> 등의 시에서 나타낸 그의 언어창조적인 조형력(造形力)은 횔데를린의 서정시를 연상케 한다. 또한 그의 시는 광(光)·색(色)·음(音)의 움직임과 변화에 대한 미묘한 감정·감각을 포착하여 인상주의의 선구자가 되어 타고난 음악과 언어의 마력을 불꽃 튀기는 듯한 격조 속에 다이내믹하게 노래하여 표현주의로의 길을 열어 놓았다.

오해를 받는 가운데 쓸쓸히 객사한 니체를 누구보다 먼저 이해한 사상가로는 부르크하르트, 브란데스, 텐 등이며 데멜, 게오르게, 베르트람, 만, 벤, 슈펭글러, 하이데거, 야스퍼스, 레비트 등 다수의 시인·사상가들이 니체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베데킨트[편집]

Frank Wedekind (1864-1918)

독일 극작가.

하노버 태생으로 유랑 서커스단에 입단하여 그 스스로도 배우로서 인기를 얻은 바 있다. 그의 부친과의 갈등은 하우프트만의 희곡 <평화제>(1889) 중에 모델화(化)되어 있어, 베데킨트는 이것을 읽고 격분하여 동년 <젊은 세계>라는 각본 속에서 하우프트만을 비꼬고 있다. 베데킨트는 사상적 내용과 소재상으로 보아 자연주의에 의거하였으나 예술적 양식상으로는 일찍부터 상징적 또는 회화적(繪畵的)인 수법을 써서 통렬한 야유와 풍자를 던지면서 성적(性的) 자유분방한 미(美)의 모랄과 육체문화(肉體文化)의 찬미에 치중하여 표현문학의 선구자로 간주된다.

유명한 <봄의 깨어남>외에 음부(淫婦)의 전형이며 육욕(肉慾)의 화신이라 할 유부녀 루루를 주인공으로 한 4막극 <지령(地靈)>(1859) 속편인 3막극 <판도라의 상자>(1904), <죽음의 춤>(1906)(후일 <죽음과 악령>이라 개제함) 희비극(喜悲劇) <카이트 후작(侯爵)>(1901), 단막극(單幕劇) <궁정가수>(1899), 그 외에 소설집과 시집이 있다.

봄의 깨어남[편집]

Fruhlings Erwachen (1891)

베데킨트의 희곡. 3막 9장으로 되어 있으며, 사춘기의 어두운 충동으로 고민하는 두 고교생과 14세의 소녀를 다룬 비극이다.

소녀는 세상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한 양친이 먹인 낙태약(落胎藥)으로 목숨을 잃는다. 한편 학업의 중압에 못 견디어 자살하는 소년과 죽은 소녀에 대한 자책감에 쫓기는 소년을 등장시켜 철저하지 못한 성교육에 대한 경고(警告)를 던져주는 작품이다.

마이어 푀르스터[편집]

Wilhelm Meyer-Forster (1862-1934)

독일 극작가.

수편의 희극과 소설을 저술한 외에 작자의 학생소설 <카를 하인리히>를 각색한 5막의 <알트 하이델베르크>(1901)는 주인공인 카를 하인리히 태공전하(太公殿下)를 통하여 독일 대학생활의 담담한 청춘시절의 일면(一面)을 묘사한 것으로 베를린 극장에서 장기흥행의 기록을 세웠으며 세계적으로도 유명해졌다.

토마[편집]

Ludwig Thoma (1867-1921)

독일 소설가·극작가.

수난극으로 유명한 바이에른의 오바안메르고에서 출생하여 풍자와 야유, 유머를 엮어 넣어서 고향 바이에른의 편협하고 고루한 농민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단편집이나 희극 <메달>(1901), <도덕>(1903) 등 외에 중편 <장난꾸러기 이야기>와 장편 <앙드레아스 페스트>(1905), <홀아비>(1911) 등은 특히 유명한 것이다.

장난꾸러기 이야기[편집]

Lausbubengeschichten (1904)

토마 소설.

속편 <프리다 숙모님>(1906)과 더불어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장난꾸러기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불손·자만·이기심을 교묘한 화술(話術)로써 신랄한 유머를 섞어가며 풍자한 것이다. 더욱이 그 배후에는 따스한 인간애가 스며 있다.

바서만[편집]

Jakob Wassermann (1873-1934)

독일 유대계 소설가.

토마스 만과 더불어 독일 근대소설의 지위를 세계적으로 높인 사람이다.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았고, 작법은 발자크나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익힌 몽상적 낭만주의자인 동시에 시대에 대한 비판적 관찰자이다. <독일인 및 유대인으로서의 나의 길>(1921)은 유대인으로서 인종적 편견에 괴로움을 받은 자서전적인 기록이다. <거위를 안은 사나이>(1915)는 동시에 자매를 사랑하는 천재 음악가의 일생을 묘사하여 많은 애독자를 얻은 성공작이다. 자산가의 자식이 사회사업가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크리스찬 반샤페>(1919)는 상하 2권의 교양소설이며, 또한 <마우리티우스 사건(事件)>(1928)은 대중적 인기를 얻은 그의 역작이다.

인상주의 문학[편집]

印象主義文學

인상주의라는 것은 원래 프랑스 회화에서 유래되어 독일문학에 있어서의 한 현상에 대해 사용되고 있는 어구이다. 독일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너무도 급격하게 근대국가화(化)되었기 때문에 그 물질적 번영과 동시에 새로이 프롤레타리아 문제 등 예기치 못한 사태를 낳았으며 이 현실을 개혁하고 진실을 구하려고 태동한 것이 자연주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이 너무나도 유물적 사상과 실증주의에 의해 현실의 재현만을 목표로 진전되어 나갔기 때문에 이에 반대하여 기분(氣分)·형식·정조(情調)·신비를 구하는 동향이 나타났다.

그중 하나가 인상주의로서 여기에서는 특히 작가의 기분이 강조되어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고 체험에 의해, 표현형식이 세련되어 순수문학으로의 복귀가 시도되었다. 릴리엔크론은 거의 독자적으로 그의 인상시(印象詩)를 발표하였으나 이 운동에 있어서 예언자와 같던 니체가 강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세기말의 데카당스도 빈을 거점으로 하여 이 운동을 도왔으므로 호프만슈탈, 슈니츨러, 아르텐베르크 등 소위 ‘젊은 빈’에 의해서 인상주의가 대표되는 것으로 되었다.

릴리엔크론[편집]

Friedrich Detlev von Liliencron (1844-1909)

독일 시인.

북부 독일의 킬에서 출생하여 프러시아 사관으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전쟁에 종군하였으나 부상과 방탕한 생활로 빚을 져 군직을 물러났다.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의 재건을 꾀했으나 실패, 귀국하여 행정관리가 되었다. 그는 이미 군적에 있을 때부터 시작(詩作)을 시작하고 있었으나 처녀작 <부관기행(副官騎行)>(1883)을 출판하였을 때에는 이미 40세가 다 되어서였다. 그 후 전쟁체험에 의한 일련의 시를 쓰는 동시에 그가 수렵가로서 그지없이 사랑하던 고향의 자연을 묘사하여 그 어느 것이나 대상의 순간적인 인상을 시각적·청각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이러한 시풍(詩風)은 그당시의 자연주의에 의한 어둡고 숨막힐 듯한 시 가운데에서 홀로 반짝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동시대의 시인들, 특히 <저 산 너머>의 시를 쓴 카를 부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데멜[편집]

Richard Dehmel (1863-1920)

독일 시인.

북부 독일의 브란덴부르크 근교에서 출생하여 베를린, 라이프치히 양 대학에서 배웠고, 졸업 후에는 베를린의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한편 시작에 힘썼다. 그는 선배가 되는 릴리엔크론과 평생토록 친교를 맺었으며 시풍은 릴리엔크론이 거의 무의식으로 인생사를 파악하는 낙천적인 천재형인 데 대해서 그는 중후(重厚)하고 보다 정신적이며, 영(靈)과 육(肉), 신과 악마를 동시에 묘사하는 등 모순을 내포하고 있으며 강한 의식성(意識性)을 특징으로 하였다. 이것은 그가 동시에 그 어느 시인보다도 가장 니체와 깊은 정신적 유대를 가져, 자아주의(自我主義)와 배덕주의(背德主義)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며 시집 <해방> <그러나 사랑만은> <두 인간> 등에 의해 에로스를 중심으로 한 남녀의 세계가 때로는 신비적이라 할 만큼 높은 차원으로 승화되어 있다. 한편 그는 "민중적이 아닌 예술은 모두 예술이 아니다"라는 주장 아래 50세를 넘어서도 민족애와 인류애의 대립을 고민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였다.

슈니츨러[편집]

Arthur Schnitzler (1862-1931)

오스트리아의 소설가·극작가.

대학의 의학교수를 부친으로 하여 빈에서 출생하였다. 그 자신도 의사가 되었으며 특히 최면술에 흥미를 가졌다. 이 사실은 후에 프로이트설(說)과 함께 그의 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가 작가로서 창작에 전념하게 된 것은 희곡 <아나톨>(1893)이 호평을 받은 것과 <구스틀 소위>(1901)라는 제목의 소설을 씀으로써 군의관직이 해임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빈은 베를린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던 자연주의 운동에 대해서 ‘젊은 빈 파(派)’라 불리던 사람들에 의하여 반(反)자연주의라고도 할 우아하고 음악적 기분을 중시하는 인상주의(印象主義)가 일어났으나, 이것은 다분히 프랑스에서 유입(流入)된 데카당스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며, 그는 그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작품의 수는 꽤 많고, 그 수법도 서로 닮은 바 있으나 다만 하나 만년에 집필된 <테레제>만은 별개의 것으로, 어느 여인의 비참한 일생을 기록형식으로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윤무[편집]

Reigen (1896-1897)

슈니츨러 희곡.

19세기말의 오스트리아 사회상을 배경으로 하여 남녀관계를 단지 성교(性交)의 면에서 포착하여 10개 장면의 대화형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처음은 창녀와 병사, 다음은 그 병사와 식모, 하는 식으로 각계각층의 남녀 열 명이 젊은 서방님, 유부녀, 그 남편, 가련한 소녀, 시인·여배우·백작과 같은 순서로 짝지워져 가 최후로 백작이 최초의 창녀의 집에서 묵음으로써 커다란 연결관계가 성립한다. 여기에 표제의 의미가 부각되며, 그의 독특한 인생관이 표출되어 있다. 당시의 빈은 종교적인 색채가 농후하였으므로 오랜 동안 발매금지를 당하다가 겨우 제1차 세계대전 후에야 상연이 실현되었다.

연애삼매[편집]

Liebelei (1895)

슈니츨러 희곡.

<아나톨>의 호평으로 작가로서 출발을 본 그로 하여금 더욱 결정적으로 그 지위를 굳히게 한 것이 2년 후에 뒤이어 발표된 3막으로 된 이 희곡이다. 주인공인 프리츠는 역시 빈의 기질(氣質)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것은 작가 자신의 기질이기도 하여 ‘상냥한 우울형’이라 불리었다. 한편 노리개로 사랑의 상대가 되었던 크리슈티네는 프리츠가 다른 여인 때문에 결투하다 죽은 것을 슬퍼하여 그의 뒤를 좇으니 이것을 가리켜 ‘가련한 소녀’형이라 하며 작자가 묘사한 독특한 여성 타입이다. 이것은 ‘젊은 빈’을 대표하는 작품의 하나이다.

다우텐다이[편집]

Max Dauthendey (1867-1918)

독일 시인.

뷔르츠부르크에서 출생하여 당초에는 화가가 되려 하였을 정도로 색채와 음향에 뛰어난 천분을 나타내었으나 23세경부터 시작(詩作)을 시작하여 유럽은 물론 세계 각처를 주유(周遊)하면서 낭만적인 이국정조(異國情調)를 시 속에 표현하였다. 그 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여행지인 자바에 억류되어 쓸쓸히 객사하였다.

호프만슈탈[편집]

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

오스트리아 시인·극작가·에세이스트.

빈의 부호 자제로 태어나 슈니츨러와 더불어 ‘젊은 빈’을 대표하는 작가였다. 슈니츨러가 30세를 넘어 <아나톨>을 발표하였을 때 그는 약관 20세의 청년으로 이미 일류작가로서 인정될 정도의 조숙한 천재였다. 17세 때 <어제(昨日)>, 18세 때 <티티안의 죽음>, 19세 때 <바보와 죽음> 등을 저술하였으나 평생을 통해 이 시기의 작품 이상의 걸작을 쓰지 못하였다고 할 정도이다.

유명한 시 <조춘(早春)>과

<무상의 3행시> 등의 시작도 모두 25세 이전까지에 저술되었던 것으로 그 어느 것이나 괴테 또는 노발리스를 비롯하여 유럽의 고전으로부터 배운 동시에 동시대의 시인인 게오르게로부터도 강한 영향을 받아 섬세하고 우아한 시구와 고전적인 형식에 의해 세기말의 데카당스를 묘사하였다. 중년 이후 만년에 걸쳐 작곡가 R. 슈트라우스와 협력하여 <장미의 기사> 등 오페라의 대본과 희곡을 쓰며 점차 종교적인 세계로 지향하였다. 또한 그는 에세이스트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그의 작품은 독일산문(散文)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바보와 죽음[편집]

Der Tor und der Tod (1893)

호프만 슈탈 시극(詩劇).

풍부한 천분(天分)을 타고난 시인이 19세에 쓴 작품으로 또한 이 소시극(小詩劇) 이후 이 이상의 작품을 쓰지 못하였다고도 평가될 정도의 내용을 갖고 있다. 더욱이 이 작품이 중요시되는 까닭은 다른 희곡의 주인공이 대개 시인의 공상으로 탄생된 인물인 데 대해 이 작품의 주인공 클라우디오는 작가 자신의 체험에 의해 탄생된 인물인 점에 있다. 거기에는 그와 똑같이 생활에 불안이 없고, 다만 예술을 향락하고 인생을 방관하며 예술을 위해 인생을 잃어버린 ‘바보’가 있을 뿐이다. ‘죽음’은 그러한 주인공에게 생(生)의 존엄을 제시하여 ‘바보’로 하여금 ‘죽음’에 눈뜨게 한다. 작가는 그것을 아름다운 시에 의해, 형식을 갖춘 독특한 극으로 완성시키고 있다. 그것은 예술을 통해 인생을 살찌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술 속에서만 살아버린 유미주의자(唯美主義者)의 파멸이요, 그것은 다름아닌 작가 자신의 한탄이기도 하였다.

츠바이히[편집]

Stefan Zweig(1881-1942) 오스트리아 소설가·전기작가. 유대계 실업가를 부친으로 빈에서 출생하였으며, ‘젊은 빈’ 중의 한 사람으로서 신(新)낭만주의를 배경으로 등장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스위스에 있어, 로맹 롤랑과 더불어 범(汎)유럽적 평화주의자로서 반전운동에 참여하였다. 대전 후 잘츠부르크에 살면서 창작활동을 계속하였으나 나치스에 의한 박해로 고향을 떠나서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다시 브라질로 망명하여 마침내 유럽의 장래를 한탄하며 제2의 부인과 더불어 리오 데 자네이루 교외에서 자살하였다. 그는 시·희곡·소설·에세이 등 각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으나 특히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소설이나 에세이 등의 산문에서 그 재능을 발휘하였다. 우연히 서로 알게 된 젊은 미망인과 어떤 청년의 24시간 동안의 생활을 묘사한 <여인의 24시간>이나 <아모크> 등 비정상 상태하의 인간심리가 섬세한 뉘앙스로 묘사되고 있으며, 이러한 수법이 가장 뛰어난 형태로 나타나 있는 것이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한 전기문학(傳記文學)이다. 프랑스 혁명에 등장하여 변절의 정치가라 불리던 <조세프 푸셰>를 위시하여 정확한 사료(史料)에다 시인의 예리한 직관을 통해 인간심리를 추구함으로써 수다한 걸작을 남겼다.

마리 앙투아네트[편집]

(1932)

S. 츠바이히 전기소설.

작자가 가장 재능을 발휘한 전기문학 가운데서도 대작(大作)인 동시에 걸작의 하나로 인정되어 세계 각국에서 읽히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아의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 태어나, 프랑스 왕(王) 루이 16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혁명이라는 비극적 운명을 만나, 마침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 기구한 일생을 작가는 이 작품에서 <한 평범인의 면모(面貌)>라는 부제(副題)를 붙인 것과 같이 단지 그녀의 38년에 걸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사료에 따라 소상히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운명의 변전(變轉)에 의해 자기의 본성을 감지(感知)해 가는 한 여성을 힘있게 예리한 심리해부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무질[편집]

Robert Musil (1880-1942)

오스트리아 소설가.

교수의 아들로 클라겐푸르트에서 출생하여 유년학교에 입학하나 중도에 뜻을 바꾸어 부륜, 베를린 양(兩)대학에서 기계공학·철학·심리학 등을 전공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장교로서 종군하고 기사(技師)로서도 활약했다. 그는 슈니츨러나 S.츠바이히 등과 마찬가지로 독일에서 데카당스의 온상이었던 빈에서 작가로서 등장하였다. ‘젊은 빈’ 중 그 어느 누구보다도 프로이트 학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이미 처녀작 <제자(弟子) 퇴를레스의 혹란(惑亂)>에서 그 응용을 시도하고 그 후의 작품에서도 철저한 분석을 계속 추구하여 결국에는 인간을 근원(根源)으로부터 파악하고 묘사하려 하였다. 그도 나치스의 박해를 피해 스위스로 망명하여 필생의 대작이었던 <특성없는 사나이>를 미완성으로 남겨둔 채 빈궁한 가운데 제네바에서 영면하였다.

그는 ‘젊은 빈’파(派)의 시인들과 같은 시대에 창작활동을 하면서도 생전에는 거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후 그의 사후에도 약 10년간은 전혀 망각된 채로 있다가 1950년쯤부터 조이스, 프루스트, 카프카에 비견될 수 있는 작가로서 재평가 되기에 이르렀다.

특성없는 사나이[편집]

(1952)

무질 장편소설.

작가는 처녀작 <제자 퇴를레스의 혹란(惑亂)> 외에 단편집이나 희곡도 저술한 바 있으나, 약 20년을 소비하여서도 미완성이 되어 버린 이 작품이야말로 필생을 바친 작품으로 그를 대표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미 제1권은 1930년에, 제2권은 1932년에 각각 출판되었으나 유고(遺稿)를 추가하여 정본(定本)으로 출판된 것은 1952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의 오스트리아를 배경으로 하여 주인공인 우를리히는 여러 가지 뛰어난 특성을 지니면서도 그 특성을 하나로 정리하여서 살릴 수가 없다. 그것은 사회가 이미 그러한 특성에 목표를 부여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표없는 사회에 다수 인물이 등장하여 근친상간(近親相姦)에서 살인 강간까지 구원없는 생활이 묘사되어간다. 작자는 그것을 예리한 아이러니와 철저한 분석에 의해 대화나 논의의 형식으로 웅장하게 묘사하고 있다.

표현주의·신즉물주의 문학[편집]

表現主義·新卽物主義文學

1910년경, 1880-1890년대 간에 출생한 젊은 사람들에 의해 전통과의 연관을 단절한 새로운 문학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외계(外界)에 의존하는 ‘인상’이 아니고 인간의 내계(內界)에 바탕을 둔 능동적·주관적인 자기 ‘표현’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표현주의라 불린다.

이 운동에 명확한 강령(綱領)은 없으나, 낡은 시대의 붕괴를 예감하고 있다는 것과 창작의 방법론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표현주의가 현대문학의 출발점이라고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서정시가 지배적으로 시대의 몰락을 예감하는 괴로움과 절망을 노래하는 예언적 성격의 작품이 많았다. 이 시기의 작가로서는 트라클, 하임, 슈타들러, 베허, 벤, 조르게, 코코슈카 등이 있다. 시대의 파국이 현실화된 제1차 세계대전 끝무렵부터는 희곡이 득세하고 작품은 정치적 성격을 띠고 베르펠, 카이저, 톨러, 하젠크레파, 브레히트, 되블린 등의 작가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의 후반에는 렌텐 마르크의 기적에 의해 사회는 안정기에 진입하였기 때문에 표현주의는 쇠퇴하고, 신즉물주의가 대두하였다. 이것은 시대적 문제를 객관적으로 관망(觀望)하여 사실에 들어맞게 표현을 하는 경향으로 브레히트, 케스트너, 추크마이어 등의 반어(反語)와 풍자를 구사한 작품도 출현시켰다.

트라클[편집]

George Trakl (1887-1914)

오스트리아 시인.

표현주의의 선구자. 일찍부터 마약과 술을 즐겼다. 약제사가 되었으나 생활은 불안정했으며 거칠었다. 1912년경부터 비록 마약과 술은 끊지 못했으나 금욕적 생활을 했고, 그의 시의 독자성을 발휘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여 전쟁의 비참에 절망, 코카인 과용(過用)으로 사망하나 자살인지 과실사인지는 확실치 않다. 누이동생과의 불행한 사랑이 추측되고 있다. 시집에는 <시집>(1913), <꿈 속의 세바스찬>(1915)이 있다. 죄의식(罪意識)과 그 괴로움을 노래하는 그의 시는 어둡고 슬프다. 그러나 구원을 찾아 고뇌와 죽음의 공포를 인내하는 그의 태도는 알지 못할 고요함을 시에 불어 넣어주고 있다. 그의 시는 순교(殉敎)의 노래이며 그는 횔데를린에 필적하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임[편집]

George Heym (1887-1912)

독일 시인.

트라클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표현주의의 선구자.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나 베를린의 초기표현주의 동인들과 어울려(1910) 본격적인 시작에 손을 대었다. 시집 <영원한 날>(1911), <생의 그림자>(1912) 속에 노래한 대도시의 모습은 세계의 종말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은유(隱喩)와 동적(動的) 공간형상(空間形象)의 사용, 사실(寫實)과 환상이 혼입되어 묘사되는 데 특징이 있으며 자살자·병자, 특히 광인을 테마로 하여 낡은 질서의 붕괴·몰락의 환상을 노래 불렀다. 스케이팅을 하다 익사하였다.

슈타들러[편집]

Ernst Stadler (1883-1914)

독일 시인·학자·비평가.

초기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처음 호프만슈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듯한 시를 발표하였고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1905-1910). 그동안에 인상주의와 대결, 사회적 정열·동포애를 추구하는 형이상적(形而上的) 시집 <출발>(1914)을 발표함으로써 표현주의 시인이 되었다. 부뤼셀 대학에서 독일문학을 강의(1910-1914)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전사하였다. 벤의 시를 재빨리 인정하였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베르펠[편집]

Franz Werfel (1890-1945)

독일 시인·소설가. 유대계인이다.

프라크(당시의 오스트리아령)에서 출생하였다. 최초로 시집 <세계의 친구>(1913)로 인류애를 설파하며 표현주의 시인으로 출발하였다. 희곡 <트로이의 여인>을 발표, 제1차 세계대전에 앞서 전쟁의 비참함을 제시하였다. 대전에 종군하였고 전후에는빈에 살면서 미망인 마라 부인과 결혼하였다. 그의 파우스트라고 불린 운문극(韻文劇), <시피겔멘슈(Spiegel-mensch)>(1920) 부자간(父子間)의 대립을 묘사한 표현주의의 대표적 소설 <살해당한 자에게 죄가 있다>(1920)를 발표했다. 시극 <후아레스와 막시밀리안>(1925)으로 그릴파르처상(賞)을 받았다.

만년에 점차 카톨릭 신앙으로 기울어 <바르바라, 일명 경건(敬虔)>(1929)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1938년에 망명하여 미국에서 객사하였다. 유작에는 미래소설 <미탄생자(未誕生者)의 별>(1946)이 있다.

[편집]

Gottfried Benn (1886-1956)

독일 시인.

가장 현대적인 성격과 문제를 안은 시인의 한 사람으로 프로이센의 만스펠트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프랑스계(系) 스위스인.

처음 대학에서 신학·문헌학을, 후에 베를린의 군의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1905-1912). <시체 안치소>(1912)를 발표, 표현주의 시인으로서 출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 군의로 종군(1914-17), 자아의 문제를 취급한 <렌네 연작(連作)>(1916)을 썼다. 베를린에서 피부과, 성병과의 개업의가 되었다(1917).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 회원(1932)이 되었으며, 한때 나치스를 찬미(1933-1934)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귀족적 망명형식’을 택하여 군에 입대하였다(1935). 전후 베를린의 개업의 생활로 돌아갔다. <정학적(靜學的) 시편(詩篇)>(1948)을 발표하여 문단에 복귀하고 칭찬과 비난이 교차되는 가운데 돌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뷔히너상(賞)을 받았다(1951). <프톨레마이오스의 일족>(1949), <이중생활>(1950), <서정시의 여러 문제>(1951) 등의 작품이 있다.

니체와 표현주의의 토양(土壤) 위에 성장한 그는 시대를 허무(虛無)의 시대라고 인식하여 허무에 형체를 부여하는 예술형식만을 신봉하였다. 그러나 그의 경우 자아(Ich)를 해부하여 그 붕괴를 체험한

창조 행위는 ‘각각(刻刻)의 자아(自我)’, 형체를 구하는 허무의 힘으로 영위된다는 것이다. 그의 자아가 항상 세계와 동일하다는 것은 주의하여야 할 점이며, 또한 그의 시의 독자성, 즉 현대성과 위험성은 거기에 내재하는 것이다.

카류아티데[편집]

(1916)

벤 시.

제1차 세계대전에 군의로서 브뤼셀에 체재하였을 때에 저작된 것이다. 표현주의적 색채가 짙은 벤의 대표적 초기 시작이다.

이 시의 주제는 몰락을 눈앞에 둔 계절(9월을 지칭하며, 이때를 그는 가장 좋아했다)에 대한 도취를 꿈꾸는 것. 신전 에레크티온을 파괴하고 카류아티데(女像柱)를 미레노스(디오니소스의 시종)로 변신(變身)시켜 아폴로적인 가상(假象)의 세계로부터의 해방을 노래하는 이 시는 충동적인 절규에 가깝다. 생의 근원인 디오니소스적인 것, 도취에의 동경은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자아의 붕괴를 체험한 그의 고뇌 ‘의식에 있어서의 괴로움’에서 유래하고 있다. 짧은 명령문과 성(性)과 춤의 형상(形象)을 퇴적(堆積)시키는 표현방식은 마력적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이 시의 성립과정에 관해서는 그 자신의 흥미있는 설명이 작품 <이중생활(二重生活)>(1950) 속에 수록되어 있다.

베허[편집]

Johannes Robert Becher (1891-1958)

독일 시인.

클라이스트 찬가(讚歌) <고투하는 사람들>(1911)로 시단에 데뷔하였다. 시집 <멸망과 승리>(1914)를 발표, 표현주의 좌파의 대표적 시인이 되었다. 사실적 시집 <위대한 계획>(1931)을 발표하고, 이어 소련(현 러시아)으로 망명하였다(1933). 1951년 귀국 후 소위 동독의 문화상(文化象)을 역임하고 귀국 후의 시집에는 <새로운 독일민요>(1950), <먼 행복 가까이서 빛나고>(1951) 등이 있다.

카프카[편집]

Franz Kafka (1883-1924)

유대계 독일 소설가.

20세기 최대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프라크(당시는 오스트리아 영토)의 거상(巨商) 장남으로 태어나 경제적 사회적 성공밖에는 생각지 않는 부친 때문에 평생토록 괴로움을 받았다. 대학에서 법률을 배우고 재학 중에 막스브로트와 사귀었다. 그즈음 발병한 결핵으로 그 후 요양소생활을 되풀이 하였다. 프라크의 노동 재해보험협회에서 근무(1908-1917)하였고, 이때의 체험이 작품에 나타나는 복잡·기괴한 관료기구의 바탕이 되었다. 세 번 약혼하였으나 모두 그가 원해 파혼하였다. 도라 튜만트와 베를린에서 동거생활에 들어가(1923) 그의 평생에서 가장 행복한 수개월을 보낸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빈 근교의 요양소에서 사망하였다.

생전에는 소수의 단편밖에 발표되지 않았으나, 그의 사후 친우 브로트가 그의 뜻을 어기고 유고(遺稿)를 발표, 그의 작품은 전세계에 주목을 끌었다.

그의 문학상의 독자성은, 우선 단편 <판결>(1916), <변신>에서 발휘되었다. 그 어느 것이나 부조리(不條理)의 세계, 이상한 사건을 억제된 사실적 문체로 표현한 것이다. 장편은 미국에 단신(單身)으로 건너간 카를 로스만 소년의 모험을 묘사한 <미국>(1916), 까닭 모르게 체포되어 ‘개처럼’ 죽음을 당하는 은행원 요제프·K의 이야기인 <심판>(1925), 일을 부탁한 주인의 성에 들어갈 수 없는 측량기사 K를 묘사한 <성(城)>이 대표작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독특한 그의 표현형식에다 배경으로 부친에 대한 콤플렉스 죄의식(罪意識), 유대인으로서의 이방인(異邦人) 의식 등이 깔려 있어 여러 가지의 해석을 내릴 수 있게 한다. 신부재(神不在)의 또는 신비적인 복잡한 메커니즘을 갖는 전체에 대해 그 톱니바퀴의 하나에 불과한 개체(個體)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를 테마로 하여 출구(出口)를 잃어버린 파국적인 현대의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변신[편집]

Die Verwandlung (1916)

카프카 단편소설.

생전에 발표된 많지 않은 작품 중의 하나로서 1902년에 집필되었다. 그의 단편 중 가장 성공한 것의 하나이다.

외판원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언짢은 꿈에서 깨어나보니 자신이 한 마리의 거대한 독충(毒蟲)으로 변해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우선 근무시간에 늦어 면직될까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일가(一家)의 부양을 그가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레고르의 결근이 수금한 회사돈의 횡령 때문이라 오해한 지배인이 그를 찾아온다. 그레고르는 변명하기 위해 지배인과 가족 앞에 나타난다. 지배인은 도망치고 어머니는 졸도하며 아버지는 통곡한다. 그는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나 그가 하는 벌레<蟲>의 말은 아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 고독한 그의 생활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는 점차 불면상태, 식욕부진에 빠져 쇠약해져 어느 날 아침 죽고만다. 한숨 돌린 그의 가족들은 수개월 만에 처음으로 산책에 나간다.

그레고르는 고독한 예술가와 유대인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특수(特殊)가 보편(普遍)을 나타낸다는 괴테적인 의미로서의 상징은 여기서는 문제되지 않는다. 변신은 사실로서 사실적인 문제로 보고되어 있다. 변신은 존재(存在) 인식의 방법인 것이다.

[편집]

Das Schloss (1926)

카프카 장편소설.

카프카 만년의 미완성 대작이다. 집필은 1921년에 된 것이다. 1920년에 사귀게 된 미레나 예센스카 포라크와의 연애관계가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1953년 브로트에 의해 극화되었다.

주인공 K는 측량기사로서 고향과 멀리 떨어진 어느 성(城)의 일을 하기 위해 성 기슭의 마을에 당도한다. 그런데 그는 마을에서 성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복잡하고 기괴한 관료기구(官僚機構)에 둘러싸인 성은 그가 들어가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를 마을에 머물러 있게도 하지 않는다. 성과 마을과의 정당한 유대를 원하는 그의 노력도 헛되이 그는 영원히 타향사람(他鄕人)으로 끝난다.

이 작품의 주제는 카프카 문학의 기본적인 주제의 하나로 개(個)의 전(全)에 대한 관계를 문제삼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불가해한 전(全)의 힘이 개(個)를 압도하고는 있으나 개가 전에 육박하려는 노력에 그 역점(力點)이 있으며, 또 거기에 특징이 있는 것이다.

더욱이 사랑의 문제가 심각하게 추구되어 있는 것도 이 작품의 특징의 하나이다. 그 경우 여인이 ‘성(城)과 관계(關係)’가 있는 여인임은 주목할 일이다. 성은 신의 은총(恩寵)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지배적이다.

카이저[편집]

Georg Kaiser (1878-1945)

독일 극작가.

모험을 구하여 아르헨티나 전기회사에 근무하나 말라리아에 걸려 귀국(1901)하였다. 인간성 회복을 테마로 한 반전극(反戰劇) <칼레의 시민들> 성공으로써 일약 표현주의의 대표적 작가가 되었다. 소심한 은행원의 횡령사건을 다룬 <아침에서 밤중까지>(1916)는 화폐경제의 비인간성을 나타내는 사회극.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을 찌르고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희구한 테마는 작품 <산호(珊瑚)>(1917), 2부작 <가스(Gas)>(1918-1920) 가운데 한층 더 발전되어 나간다. 기성의 권위를 풍자하고, 불합리한 사회체제를 폭로하는 작풍은 나치스의 반감을 사서, 1938년에 망명을 불가피하게 하였고 스위스에서 불우한 가운데 영면하였다.

칼레의 시민들[편집]

Die Burger von Calais (1914)

카이저 희곡

로댕의 같은 이름 조각상(彫刻像)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하며 그로 하여금 일약 독일 극단(劇壇)의 중심 인물이 되게 한 표현주의의 걸작이다. 칼레의 항구를 탐낸 영국 국왕은 6인의 인질을 보내오면 칼레시(市)를 공격치 않겠노라고 통고한다. 그러한 요구에 응하기로 하였으나 인질의 지망자가 7인이 나와 혼란을 일으킨다. 이를 본 지망자 중의 한 사람인 에스타슈가 자살하여 카레시(市)는 위기를 면한다. 한편 잡혀갔던 인질(人質)들은 영국 국왕에게 왕자가 탄생하였기 때문에 사면을 받고 국왕의 야망은 깨어지고 만다.

테마는 인간성 혁신을 위한 자기희생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 에스타슈의 행위는 보다 정신적인 사람의 행위로서 종래와 같은 낡은 애국심·영웅주의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의 죽움은 새로운 인간의 탄생인 것이다.

톨러[편집]

Ernst Toller (1893-1939)

독일 유대계 극작가·시인.

제1차 세계대전의 종군체험으로 평화주의자가 되어 혁명운동에 가담함으로써 옥살이를 하였다(1919). 옥중의 작품 <군중·인간>(1921)은 표현주의 희곡이다. 출옥 후도 같은 테마를 작품 <인생은 즐겁다>(1927) 속에서 취급하였다.

1933년 망명, 미국으로 건너가 자살하였다.

시인들[편집]

詩人-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십수년간에 활약한 표현주의파 시인들은 시대의 위기감 때문에 니힐리즘(벤), 인류애(베르펠), 정치와 행동(베허) 등의 갖가지 ‘외침’을 보였다. 그러나 이 시대의 시인을 논할 경우, 표현주의의 주변, 또는 그와 무관하였던 시인들, 즉 우주적 환상을 노래한 도이블러, 현대에 있어서 서사시를 회생케 한 슈피텔러, 그로테스크한 시를 쓴 모르겐슈테른, 신비주의적인 시를 쓴 숄츠, 여류 전원시인 슈트라우스 운트 토르나이 등의 우수한 시인들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게오르게[편집]

Stephan Geo-rge (1868-1933)

독일 시인.

라인 강변 빙겐의 근교 뷔데스하임에서 출생하였다. 생가(生家)는 유복한 포도주 도매상으로 고교를 졸업하자 외국을 여행, 파리에서 말라르메에게 인정받고 상징파 시인들과 교제하였다(1889). 보들레르, 베를렌, 랭보 등의 시를 독역(獨譯)하여 시인의 감정상의 움직임을 영적으로 승화시켜 독일어로 옮기는 노력에서 게오르게의 시작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귀국 후 베를린 대학에서 배웠고, 1890년에 빙겐에서 이다 코플렌츠(후일 데멜의 부인이 됨)와 알게 되어 사랑을 맺으나 6년 후에는 파탄을 가져왔다. 시집 <찬가(讚歌)> 100부 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1891년 12월에 빈에서의 호프만슈탈과의 상봉은 동인지(同人誌) <예술을 위한 책(Die Blatter fur die Kunst)>의 발간을 보게 하여 1892년-1919년까지 12권의 발행을 보았다. 1893년에 뮌헨에서 볼프스켈을 알게 되었고 게오르게를 따르는 젊은 시인들이 살롱에 모이게 되었다. 크라게스, 쉴러와 후일에는 헬링그라트, 베르트람 등이 가담하였다. 특히 막시민이라 불리는 미소년의 요절(夭折)은 게오르게에는 미신(迷神)의 강림(降臨)을 체험한 감격이 되었다. 미적 세계 건설의 사명을 동지에게 설득하는 <동맹(同盟)의 별>(1914) <새로운 나라>(1928)에서는 예언자로서의 모습이 역력하다. 그의 문하생의 거취도 복잡다단한 바가 있었다. 만년의 제자로서는 코메레르가 있다.

1917년 크루티우스에게 "프랑스 사람은 문학은 하나 시는 만들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상징주의의 극복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나치스의 폭력을 증오하여 스위스의 로카르노 호반으로 가서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영혼의 해[편집]

Das Jahr der Seele (1897)

가장 많은 사람에게 읽힌 게오르게의 시집.

게오르게의 예술에 공명하는 화가 레히터가 게오르게의 시집으로 장정·도안을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이 시집의 간행 전년(1896)에 파국을 가져왔던 코플렌츠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서, 시 속에 노래한 것은 파국 이전의 것이라 보여진다. 제1부는 포도의 수확이 끝나 가을부터 겨울과 봄철을 뺀 여름철의 경치를 마음에 비친 대로 묘사하고 있다. 서언(序言)에 ‘그대’라고 되어 있는 것은 ‘나’와 동일의 영혼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게오르게의 제자인 보크가 <영원의 그대>라는 시집을 출판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게오르게의 시집에서 쓰이고 있는 ‘그대’라는 호칭은 상징의 중심이 되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제2부는 친구에 대한 시인데, ‘그대’와 관련하여 생각한다면 제3부의 심상적(心象的) 정황의 심각성이 한층 더해 오는 것이다. 생명이 눈뜨는 봄이 없는 것은, 이 마음의 저미(低迷)가 언제인가는 깨우침을 갖게 된다는 예감을 가지면서, 계절의 변화를 마음에 반영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어, 허무에 빠져들어가는 것을 구원하고 있다.

릴케[편집]

Rainer Maria Rilke (1875-1926)

독일 시인.

프라크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군인이었으나 병으로 퇴역하여 철도회사에 근무하였다. 모친은 명문 출신으로서 귀족기풍이 강하며 신경질적이었다. 양친은 성격의 차이로 해서 릴케가 9세 때 헤어지고 말았다.

릴케는 부친의 뜻에 따라 군인이 되기 위해, 유년학교에서 사관학교로 진학하였으나 시인적 기질인데다 몸이 약했기 때문에 견디지 못하여 결국 중퇴하고 말았다. 그 후 프라크, 뭔헨 양 대학에서 배우고 작가생활로 들어갔다.

그가 개성있는 시인이 되는 데 러시아 여행은 큰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1899년과 1900년의 두 차례에 걸쳐서 행해졌는데 그는 이 여행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합일(合一)을 체험하며, 시인의 기본감정을 깊이 배양할 수가 있었다.

1901년 릴케는 여류조각가 클라라 베스토프와 결혼하였다. 그녀가 로댕의 제자였으므로 그 자신도 로댕을 만나게 되어 예술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았다. <말테의 수기>를 비롯하여 그의 중년기의 작품은 모두 로댕의 예술과 연관이 있다. 그 핵심은 안이(安易)한 서정성을 버리고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데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10년간에 걸쳐, 작품활동의 단절이 있었다. 1919년 스위스로 여행하여 그대로 그곳에 머물러, 독일로 돌아오지 않았다.

1922년 2월 뮈조트의 고성(孤城)에 머물며, <두이노의 비가(悲歌)>와 <오르포이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완성하였다. 사생합일(死生合一)의 세계를 이상으로 삼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난세(亂世) 가운데 있으면서 릴케가 추구한 것은 인간생존의 의의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비가>나 <소네트>는 수공업시대에서 대량제품시대로 옮겨가는 역사적 시점에서 그의 세계관이다.

말테의 수기[편집]

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 (1910)

릴케의 대표적 소설.

원래는 <말테 라우리즈 브리게의 수기>였다고 한다. 1904년 2월에 로마에서 기필(起筆)하여 1910년 1월 라이프치히에서 탈고하였고 동년 6월에 출판되었다.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특별히 이야기 줄거리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릴케 자신의 파리에서의 특수한 체험을 정리하여 지은 것이다. ‘수기’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소설은 5, 6개의 절(節)로 되어 있다. 가령 <파리의 인상> <죽음> <시와 고독> <소년시대의 추억> <사랑> <신(神)> <베니스의 여행> <탕아(蕩兒)의 전설(傳說)>과 같은 테마에 관해 주인공 말테의 감상이 서술되어 있다. 어느 것이나 시인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뿐이다. 즉 생(生)과 사(死)와 신(神) 등. 그 모든 세계를 주인공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들은 모두 만년의 시상(詩想)에 전개되어 있다.

두이노의 비가[편집]

Duineser Elegien

릴케 시.

1922년 2월 스위스의 뮈조트 고성(孤城)에서 완성했다. 이미 그 10년전인 1912년 1월 아드리아해(海)에 면한 두이노성(城)에서 제1, 제2의 비가(悲歌)가 탄생되었다. 완성작은 뮈조트에서 된 것이었으나 이 비가에 <두이노의 비가>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 때문이다.

10편의 비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비가는 서가(序歌)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제2비가 이하에서 주제로 되어 있는 여러 요소가 모든 연관성 밑에서 노래로 불리고 있다. 제2비가에서는 천사(天使), 제3에서는 청년의 애정의 숙명, 제4에서는 ‘전일(全一)의 세계’ 제5에서는 떠돌이 예능인의 숙명, 제6에서는 영웅, 제7에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의 아름다움, 제8에서는 금수와 인간의 생존방식의 차이, 제9에서는 인간존재의 의미, 제10에서는 현세와 앞으로 올 세계와의 맥락(脈絡) 등이 노래로 불리고 있다. 만년의 인생관·세계관이 시 형식으로 피력되어 있다.

후흐[편집]

Ricarda Huch (1864-1947)

독일 소설가·문화사가·여류 서정시인.

쇼펜하우어, 바그너, 니체, 부르크하르트 등을 애독하고 시에서는 마이어, 소설에서는 켈러, 괴테에게 모범을 구하였다.

시·극·단편소설의 대부분은 30세경에 저술되었고, 중기 이후는 시적 사실주의에 바탕을 둔 장편소설로부터 점차 역사적 저작으로 이행하였다.

거상(巨商) 일가의 몰락사(沒落史)를 묘사한 <동생 루돌프 우르슬로이의 추억>(1893), 이탈리아 빈민가에서 취재한 <개선의 거리>(1903)는 장편 걸작이다. <연애시집>(1922)은 사촌오빠와의 비련을 노래한 것이다. <낭만주의의 개화기>(1899), <낭만주의의 보급과 쇠퇴>(1902)는 독일 낭만파 연구에 관한 명저이다. 그 밖에 <독일대전> 3권(1912-14), <루터의 신앙>(1916) 등이 있다.

바인헤버[편집]

Joseph Weinheber (1892-1945)

오스트리아 시인.

호프만슈탈에 이어 20세기를 대표하는 서정시인이다. 빈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직전에 자살하였다.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처녀시집 <고독한 사람>(1920)을 출간한 후, 표현주의로부터 탈각해 버렸다. 벤의 시와 마찬가지로 예술가의 염세적인 고독한 생활감정이 횡일(橫溢)하고 있으나, 벤 이상으로 엄격한 고전형식을 존중하였다. 시집 <고귀와 몰락>(1934)으로 모차르트상(賞)을 획득하였다.

빈 음악을 깊이 사랑하고 방언시집(方言詩集) <말로 표현된 빈>(1935), <실내악(室內樂)>(1939), 미켈란젤로의 소네트를 모범으로 한 <늦어진 영관(榮冠)>(1936), 릴케나 횔데를린에게서 영감(靈感)을 받은, 40편의 송가(頌歌)로 구성된 <여러 신(神)과 악마와의 사이>(1938) 등이 있고 소설로는 <고아원>(1924) 1편이 있을 뿐이다.

나치스 지배시대[편집]

-支配時代

히틀러 정권(1933-1945)하의 문학을 일반적으로 나치스 문학이라고 한다.

히틀러는 정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사상, 언론의 통일을 기도(企圖)하였다. 그 때문에 다수의 유대적·자유주의적·마르크시즘적인 학자나 예술가들이 망명하였다. 그에 대신하여 국수적(國粹的) 작품이 각광을 받게 되었다.

조국애(祖國愛) 정신을 환기시킨 작품, 독일의 숙명을 묘사한 작품, 주지적인 작품에 대응하는 향토문학, 농민문학 등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슈테어, 빈딩, 콜벤하이어, 슈트라우스, 에른스트 윙거, H. 그림 등이 이 시대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림[편집]

Hans Grimm (1875-1959)

현대독일 소설가.

비스바덴에서 출생하였으며 독실한 크리스찬이다. 청년시절 상인으로 남아프리카에 건너간 일이 있었고 귀향(歸鄕)후에는 베제르 강변에 위치한 리포르스베르크에서 살았다. 남아프리카에 살 때 얻은 소재(素材)로 <토지없는 백성>(1928)을 썼다. 영국의 식민지를 낱낱이 볼 수 있었던 그는 독일인의 운명에 대한 깊은 의구심을 품었다. 이 작품은 그 시기에 있어서 중요작품 중의 하나이다.

불복종의 작가[편집]

不服從-作家

나치스가 지배하던 13년간, 독일 모든 문학활동은 ‘국민문학’이라는 기치(旗幟)아래 ‘피와 흙’의 신화를 구가하는 데 바치도록 강제되었다.

영합적인 어용작가나 추방 내지는 국외에 망명한 유대인 작가, 반(反)나치스 작가가 많았던 반면, 국내에 머물러 있으면서 소위 ‘국내망명자’로서 자기의 정신적 자유를 지키면서 레지스탕스를 시도한 작가들이 있었다. 베르겐그륀, 케스트너, 비헤르트 등이 그 대표자들이다.

케스트너[편집]

Erich Kastner (1899-1974)

현대독일 소설가이며 ‘국제 펜 클럽’ 부회장을 지냈다.

가난한 직공의 아들로 드레스덴에서 출생하였다. 장학금을 얻어 라이프치히, 베를린 양 대학에서 배워 학위 취득 후 저널리스트가 되고 처녀시집 <허리 위의 심장>(1928)을 간행한 후 창작에 전념하였다. 풍자소설 <파비안>(1930)을 비롯하여, 소년문학의 걸작인 <에밀과 탐정>(1928), <날아다니는 교실>(1933), <두 사람의 로테>(1945) 등을 발표했다.

케스트너는 냉혹한 관찰안으로 세상을 풍자한 합리주의자이며 나치스 시대에는 집필금지, 분서(焚書)나 체포 등 헤아릴 수 없는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에 희망을 잃지 않고 소년문학에 밝은 신풍을 불어넣었다. 그의 여러 작품은 현재 전세계 어린이들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비헤르트[편집]

Ernst Wiechert (1887-1950)

독일 소설가. 동프로이센 출신으로, 삼림이나 호수에 둘러싸인 고향의 자연 영향을 받아 음영(陰影)이 짙은 명상적이고 신비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작품을 썼다. 1938년 반(反)나치스 혐의로 강제수용소에 감금되었다. 전후 스위스에 이주하였다(1948).

작품으로는 <숲과 사람들>(1936), <사자(死者)의 숲> <단순한 생활>(1939), <예로민의 아이들>(1946), <죽음의 미사>(1945), <무명(無名)의 미사>(1950) 등이 있다.

망명자들[편집]

亡命者-

히틀러의 정권장악으로 도래한 독일문학의 암흑시대에 있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나치스 정책에 순응하지 않았던 양심적 작가들은 박해나 숙청을 피해 국외로 망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인리히와 토마스 만 형제, 토마스의 장남인 크라우스, S.츠바이히, 포이히트방거, 베르펠, 케스텐, H.브로흐, 무질, 되블린, A.츠바이히, 베허, 브레히트, 제거스 등 세계적으로 명성이 있는 작가들을 위시하여, 독일을 떠난 작가·시인은 약 5백 명이나 된다고 한다.

하인리히 만[편집]

Heinrich Mann (1871-1950)

토마스 만의 형이다. 북부 독일 뤼벡의 유명한 거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점 견습점원이 되었으나 그 후 화가를 지망하여 이탈리아로 건너갔고, 이때부터 창작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하인리히는 동생 토마스와는 달리 처음부터 정치적·사회적 경향이 강하여, 초기의 작품부터 신랄한 세상풍자와 정치적 탄핵을 기조로 삼았다.

표현주의의 대두기(擡頭期)에는 선구적 투사로서 추앙되고 또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있었던 토마스와의 논전에서 동생에 의해 대표되는 비(非)정치적·보수적인 독일정신을 서구 민주주의의 입장에서 비판하였다. 나치스 정권이 확립된 후에는 미국으로 망명, ‘전투적 휴머니스트’로서 부단히 나치스의 정책을 공격하였다.

하인리히 만의 입장은 내면으로의 침잠(沈潛)과 관념적 실험에 빠지기 쉬운 독일작가들의 일반적 경향과는 달리 현실사회·정치동향에 정면으로 대처해 가는 식의 극히 드문 예에 속한다.

작품으로는 <일락경(逸樂境)에서>(1900), <운라트 교수>(1905), <제국>3부작(191 4-1925), <앙리 4세의 청춘>(1935), <앙리 4세의 완성>(1936), 희곡 <레그로스 부인>(1913) 등이다.

브로흐[편집]

Hermann Broch (1886-1951)

오스트리아 소설가.

유대계 방적공장 주인의 아들로 빈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공과대학에서 방적기술을 전공한 후 가업을 계승하고 노동문제의 전문가로서 실업계에서 활약하였다.

1927년 공장을 팔아버리고 작가로 전신(轉身), 빈 대학에서 수학·철학·심리학을 연구하여 최초의 장편 <몽유병자들>을 완성하였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병합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프린스톤 대학에서 군중심리학을 연구. 한편 <베르길리우스의 죽음>(1945), <죄없는 사람들>(1949)을 저술하였고 예일 대학의 독문학교수로 근무했다(1959).

현대를 표현하기 위한 갖가지 실험적 시도, 서정성과 몽환성(夢幻性), 현실성과 신비성 등이 일체(一體)가 되어 형성되어진 독자의 신(新)산문형식과 시대의 위기와 그런 위기 속에서의 정신·예술·문화의 운명을 부단히 규명하려 하는 예술가·문학철학자로서의 통렬한 자기 비판 및 윤리성 등, 브로호가 제시한 문제의 중요성은 점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몽유병자들[편집]

Die Schlafwandler (1932)

브로흐의 3부작 장편소설. 1928년에 집필되고 1931-1932년에 걸쳐 발표되었다.

3부작 전체는 근대 유럽 시민사회의 일체의 가치체계가 붕괴하고 그와 더불어 인간생활의 근저가 해체되어 인간의 고독화와 절망이 심화되어 가는 과정을 시대정신의 변천을 배경으로 세기말에서 제1차 세계대전 말까지의 사회 각층에 걸쳐 역사철학적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분석을 곁들이면서 다층적(多層的)인 구성법으로서 묘사하여, 분열의 극복과 구제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으로써 끝맺고 있다. ‘몽유병자들’이란 자기 상실과 고독한 가운데 취생몽사(醉生夢死)하는 현대인의 별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보인 그의 현대비판과 실험적 수법은 그의 사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츠바이히[편집]

Arnold Zweig (1887-1968) 독일 소설가·극작가. 처음에는 세련된 감각으로 현대인의 운명이나 문제성을 취급하여 초기의 걸작 희곡 <헝가리의 제물>(1914)로 클라이스트상을 받았으나(1915) 후일 사회주의와 시오니즘(Zionism)으로 기울어져 나치스 정권이 확립됨과 동시에 팔레스티나로 망명. 전후 동베를린으로 돌아가(1948), 비판적 리얼리즘 입장에서 독일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다.

제거스[편집]

Anna Seghers (1900- )

독일 여류작가로 본명은 네티 라드바니이다.

대학시절부터 공산주의에 동조하였으며 나치스 정권확립으로 체포되었으나 국외로 탈출, 멕시코로 도피하였다(1940). 전후 동베를린으로 돌아가 <사자(死者)는 언제나 젊다>(1949)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제2차 세계대전하의 독일국민의 비극을 묘사한 것이다.

브레히트[편집]

Bertolt Brecht (1898-1956)

독일 극작가. 제지공장주의 아들로서 아우구스부르크에서 태어나 뮌헨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위생병으로서 종군하였고, 전후 뮌헨에서 극작가·연출가로 출발하여 후일 베를린으로 나가 막스 라인하르트의 독일좌(獨逸座)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먼저 처녀작 희곡 <바르>(1918)와 이어서 제2작 <밤의 북[鼓]>(1919)으로 클라이스트상(賞)을 획득하였고 <도시의 정글 속에서>(1923)와 <서푼짜리 오페라>로 극단에 결정적인 지위를 굳혔다.

나치스 정권이 수립되자 국외로 피하여 북유럽 여러 나라와 소련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전후 유럽으로 돌아와, 1949년에 ‘브레히트 극단’ 감독이 되어 동베를린에 정주하였다. 망명 중에 집필한 <제3제국의 공포와 비참> <갈릴레이의 일생>(1938), <배짱좋은 어머니와 그 아이들>(1939), <코카서스 백묵의 동그라미>(1944) 등의 상연으로 새로운 연극의 길을 제시하였다.

브레히트는 처음 표현주의 작가로 출발하였으나 후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하게 되었다.

레마르크[편집]

Erich Maria Remarqu (1898-1970)

독일 소설가.

1947년 미국에 귀화하였다. 고교시절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지원병으로서 서부전선에 종군, 제대한 후에는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장편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대히트로 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전후의 혼란기를 거쳐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후의 소연한 불안과 혼미(昏迷)한 세정(世情), 히틀러의 공포 정치의 출현과 그 붕괴에 이르는 전후 30년간의 파란 많은 시대의 추이(推移), 이러한 시대적 운명에 쫓기는 민중의 고뇌 등을 많은 장편에서 다이내믹한 구상력을 통해 묘사하였다. 그의 문학은 난삽(難澁)하고 둔중(鈍重)한 독일문학의 전통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것이다. 심각한 철리(哲理)를 내세우지 않고, 광대한 역사적 시야에서 이름없는 민중의 운명을 애정과 공감을 가지고 묘사하는 독일에서는 드문 독특한 존재이다. 그 밖의 작품으로 <개선문>(1946), <생명의 불꽃>(1952), <사랑할 때와 죽을 때>(1954), <검은 오벨리스크>(1956), <리스본의 밤>(1963) 등이 있고 유작으로 <천국(天國)의 암울>(1971)이 있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편집]

(1929)

레마르크 장편 전기소설(戰記小說).

지원병으로 종군하여 얻은 전쟁체험의 소설화로서 전쟁의 참상·무의미와 전쟁과 생의 문제를 다정다감하고 젊고 미숙한 청년의 심리를 통하여 리얼하게 또 서정적 정감을 실어 묘사하고 있다. 전후 10년을 지나 바야흐로 평화에 대한 희원(希願)과 반전사상이 대두되고 있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발표되기가 바쁘게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각국어로 번역되고 영화화되어 6백만 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독일 현대 거장들[편집]

獨逸現代巨匠-

20세기 초두의 독일에서는 문화의 위기가 거론되어 사회악을 묘사하는 자연주의를 낳았다. 데카당스, 니힐리즘의 와중(渦中)에 처하여 생명력 넘치는 괴테가 구원의 광명으로 생각되었다. 하우프트만은 괴테의 내면에 작용하는 악마를 에로스의 상징으로서 자연주의 발전의 계기를 부여하고 T.만은 아이러니에 의해 괴테의 정신과 물질의 조화된 세계를 재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표현주의는 자기 주장의 절규가 되었으나 자기의 고뇌를 인류의 고뇌로 차원을 높인 괴테의 태도는 베르펠, 되블린, 무질에 영향을 주었다. 괴테는 사랑의 시인인 동시에 양심을 가지고 시대에 대한 책임을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현대 휴머니즘의 기반이 되어 있다.

토마스 만[편집]

Thomas Mann (1875-1955)

독일 소설가·에세이스트.

한자동맹(Hansa 同盟)도시로서의 전통을 자랑하는 자유시(自由市)인 뤼벡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백년 이상 계속된 곡류(穀類) 도매상으로 부친은 시민귀족(市民貴族)에 알맞는 단정한 신사로 부시장에 피선된 일도 있다.

모친은 브라질 태생으로서 독일인 아버지와 포르투갈계(系) 브라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남국적 정열을 지닌 음악애호가였다. 그는 5남매로 형은 동부 독일에서 높이 평가되던 작고한 소설가 하인리히 만이며 그 외에 누이동생 둘과 남동생이 하나 있다.

만은 늘 공상을 즐겨하던 소년으로 학교성적은 별로 신통치 못하였다. 15세 때 부친을 잃어 부친의 상점은 문을 닫았다. 청산 후 그가 18세 되던 해에 집안이 뮌헨으로 이사하였다. 재산은 있었지만 일을 배우기 위해 화재보험회사의 무급 견습사원이 되었으나 창작에 열중하고 일에는 별로 힘을 쓰지 않았다. 19세 때 단편소설 <전락(轉落)>을 발표하여 시인 데멜에게 인정을 받았다. 보험회사를 그만두고 저널리스트가 되려고 뭔헨 대학과 공과대학의 청강생이 되었다. 29세가 되어 유산배당으로 매월 1백 마르크씩을 지급받게 되었으므로 이탈리아에서 그림공부를 하는 형의 권유에 따라 로마로 갔다.

로마에서는 형과 같이 한 채의 집을 세내어 러시아·북유럽 문학을 탐독하였다. 때마침 휘셔 서점으로부터 그때까지 발표된 단편을 모아 출판하자는 의뢰와 동시에 추가해 단편 1권을 더 쓰라는 권유를 받아 자기 집안의 역사를 테마로 하여 초안을 잡았다. 1년 후 귀국하여 <짐플리치스무스>(1944년에 폐간, 1954년에 복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풍자평론지)의 편집을 맡는 한편 집필을 계속하여 25세 때에 탈고(脫稿)하였다. 방대한 작품을 맡은 휘셔 서점은 처음 그 출판을 주저하였으나 한 줄도 삭제해서는 안 된다는 만의 주장을 받아들여 1901년 <부덴브로크가(家)의 사람들>2권의 출판을 단행하였다. 처음에는 매상이 시원치 않았으나 제1권의 염가판(廉價版)이 나오자 폭발적으로 독자가 불어, 얼마 안 있어 전유럽에 보급되었다. 생명력과 정신의 긴장된 대립관계에 있어서 정신의 순화(純化), 앙진(昻進)은 생명력의 저하를 가져온다는 테마는 만의 일관된 지론이며, 여기서도 마지막 4대째인 어린 한노는 음악에 도피하는 전혀 생명력이 없는 아이로서 장티프스에 걸려 죽는다.

그러나 이와 같이 죽음을 감수하는 니힐리즘은 <토니오크뢰거>(1903)에서는 생의 긍정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 중산층(中産層)의 아들이 문사(文士)가 되어 예술지상주의의 여류화가 리자베타에게 ‘시민근성’이라 힐책(詰責)을 받으면서도 문사에서 시인이 되는 계기는 시민을 사랑하는 점에 있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만이 이 작품에 지극히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만 자신이 이에 의해 괴테의 위대함을 감지하여 괴테의 생활방식을 택하는 출발점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이 시대를 기점으로 하여 전기(前期)의 변화가 후기(後期)에서 일어난다. <베니스에서 죽다>(1911)는 미소년에게 마음이 끌린 대작가(大作家)가 콜레라가 만연된 베니스에 머물다가 목숨을 잃는데 대도시에도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몰락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트리스탄>(1903)은 요양소의 인간을 묘사하는 <마(魔)의 산>으로 변했으며, <어릿광대>(1884)는 <사기꾼 페릭스 쿠르르의 고백>(1954)으로, <뷔르승의 피>(1921)는 회개로 구원을 받는 내용의 근친상간(近親相姦)을 소재로 한 <선택된 사람>(1951)으로, 니힐리즘의 극복은 <파우스트 박사>(1947)로 각각 변모를 가져왔다. 1933년에 스위스로 망명, 1934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휴머니즘을 세계에 널리 설파한 용기는 주지의 사실이다. 1952년 스위스로 돌아가 80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편집]

Die Buddenbrooks (1901)

토마스 만 장편소설.

이 작품에 의해 노벨상(1929)을 받았다. 곡물도매상 뤼벡시의 고향집의 백년간 4대에 걸친 몰락의 역사를 수록한 것이다.

이 가문(家門)의 초대는 생명력이 충일(充溢)하고 처세술에서 얻어진 신념에 의해 자타가 공인하는 투철한 계몽주의자였으며 다음대에는 영사(領事)가 되어 사회적 존경을 받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높은 차원의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그리스도교(敎)에 귀의(歸依)한다. 3대째의 토마스(만의 부친이 모델로 등장)는 부시장도 되고 세련된 취미를 가진 사람이었으나 인생을 부정하는 쇼펜하우어의 니힐리즘에 심취하여 자신이 꾸미는 위엄이 무의미하다는 것과 성격파탄자인 동생과 본질에 있어서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에 빠진다. 아내는 가풍(家風)과는 전혀 이질적인 정열가로 생명력이 없는 아들 하노와 음악을 통해 마음이 맺어져 부친 토마스는 소외당한다. 부친 사후, 소년도 죽고 거위라고 별명이 붙은 우둔한 숙모의 “모두 어디로 갔을까”하는 탄성만이 뒤에 남는다.

마의 산[편집]

Der Zanberberg (1924)

토마스 만 장편소설.

1912년 만의 부인 카차가 폐첨 카타르로 다보스의 요양소에 입원했을 때 찾아가 3주간 체재하면서 얻은 체험을 토대로 쓰여졌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중도에 발발했기 때문에 집필에 12년이 걸렸다.

다보스의 요양소에 있는 사촌 형제를 위문갔던 청년 한스 카스톨프는 의사에게서 흉부질환이 있음을 주의받아 7년간 요양생활을 보내게 된다. 생명의 위험이 예보(豫報)된 사람들의 사회는 반대로 생에 염증을 느낀 세계이기도 하다. 남이 하는 짓을 흉내내고 심령술(心靈術), 우표수집 등의 놀이가 무질서하게 유행된다. 죽음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 미래만을 희구하는 이상주의자, 광신적으로 신(神)의 나라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유대인은 이상주의자인 휴머니즘의 허위성을 반박하여 결투장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경환(輕患)인 러시아 여인은 이 남자 저남자와 애정행각을 하며 카스톨프의 구애를 무시하고 산을 내려가나 동물적인 정력을 과시하는 네덜란드 상인에게 끌려 되돌아온다. <마의 산>에서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카스톨프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코자 하산한다.

요제프와 그 형제들[편집]

Joseph und seine Bruder (1933-1943)

토마스 만의 4부작 장편소설이다. <야콥 이야기>(1933), <젊은 요제프>(1934), <이집트의 요제프>(1936), <양치기 요제프>(1943) 등이다.

만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신흥독일을 구세력인 열강(列强)이 핍박한다 하여 독일문화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지지하여 형인 하인리히와 불화를 빚었다. 그러나 민주적인 바이마르 헌법이 선포되고 이어 이에 반대하는 세력이 대두되자, 국민의 행복을 위해 데모크라시를 수호하는 전사가 되었다. <마(魔)의 산>이 12년간이나 걸린 것은 자기관망(自己觀望)을 위해서였다. 1926년부터 <요제프와 그의 형제들>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구약성서의 요제프 전기를 심리·사회학적으로 고쳐 써서 신으로부터도 사람으로부터도 축복을 받는 사람, 영(靈)과 생명의 조화를 훌륭히 수행한 사람으로서 요제프를 완전하게 인간화(人間化)하여 파시즘의 20세기적 신화를 조소하였다.

파우스트 박사[편집]

Doktor Faustus (1947)

토마스 만 소설.

파우스트 전설을 근대화한 것으로 부제(副題)로 <한 친우가 이야기하는 독일의 작곡가 아드리안 레베퀸의 일생>이라 쓰여 있다. 1949년 동·서 양 독일로부터 괴테상(賞)을 받았다. 이 작품의 해석에는 1949년 발표된 <파우스트 박사의 성립>이 참고가 된다.

줄거리는 작곡가인 아드리안이 인간을 사랑치 않을 것을 조건으로 예술창조의 감격을 위해 악마에게 자신을 팔아 비참한 최후를 마친다는 이야기로 악마는 매독으로써 주인공의 뇌(腦)를 해친다. 니체의 발광(發狂)을 모델로 삼고 세계의 종말을 예언하는 묵시록(默示錄)의 음악화(音樂化)에 잘 어울리는 음악이론을 쇤베르크의 음악에 의해 전개하고 있다. 만을 방문한 손자인 프리트가 “제가 찾아와 기쁘시지요”하고 말한 것을 그대로 작중(作中)의 어린 에히요에게 말하게 하고 있다. <부덴브로크>의 피날레인 “모두 어디로 갔을까”와는 반대로 ‘온다’고 하는 기쁨도, 사람을 사랑하여서는 안 되는 까닭에 어린 에히요를 죽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데 만은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헤세[편집]

Hermann Hesse (1877-1962)

독일의 소설가·시인.

남부독일의 뷔르텐베르크의 소도시 칼프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신교의 목사로 인도에 가 선교활동을 한 일도 있다. 외조부(外祖父) 헤르만 군델트는 오랜 동안 인도에서 선교사업에 종사한 뛰어난 신학자로 인도학(印度學)에도 조예가 깊으며 인격과 인도학에 관한 수천 권의 장서는 헤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슈바벤 지방은 경건파(敬虔派)의 전통을 이어 받아 현재도 이 지방에서 불리고 있는 찬송가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몸을 바치는 영혼의 정조(情調)를 노래하는 경건파의 우수한 작품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헤세의 작품상의 기조(基調)를 이루는 시는 이 영혼의 고향에서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슈바벤어(語)와 아레만어(語)(독일어의 스위스 방언)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언어와 영혼 사이의 견고한 유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미 소년시절에 조부의 서재에서 <로빈슨 크루소> <천일야화>를 위시하여, 18세기의 독일문학을 탐독하였다. 하만, 장 파울의 작품을 읽게 된 소년은 인생의 체험을 뛰어넘어 공상의 세계에 살게 되었다. 14세에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학교규율을 지킬 수 없어 퇴교하고 만다. 한때는 자살하려고까지 하는 등 폐쇄증(閉鎖症)환자같이 되어 부모 밑에서 소일하였다. 괴테를 읽고 심적 전환을 얻었으나 이것을 의식한 것은 50세가 되어서였다.

그 자신의 심적 자세는 오히려 루소와 흡사한 바가 있었다. 직공이 되려고 기계공장에서 3년간 시계의 톱니바퀴를 가는 일을 했으나 인텔리 직공이라 하여 조롱을 받고는 튀빙겐의 헤켄하우어 서점의 견습 점원이 되었다. 이 체험이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로 작품화되어 소년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위어른들에 대한 항의가 되고 급기야 인류의 고뇌로 확대되어 전쟁에 대한 권력자에의 항의로 변모하였다. 시집 <낭만의 노래>(1899)와 산문집(散文集) <한밤중 지난 후의 한 시간>을 발표하여 릴케에게 인정받는 바 되었다.

출세작은 <페터 카멘친트>(1904)로 교회를 버리고 고향의 자연 속에서 인간에 대한 애정을 탐구하는 자연아(自然兒)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크눌프>(1915)는 악기를 손에 들고 방황하는 자연아를 여실히 묘사한 것이다. 1911년에 그는 인도 여행을 하였다.

인도가 금욕과 승려적인 세계포기의 속에서 높은 감동적인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는 그의 견해는 <싯다르타>(1922) 중에 잘 나타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베른의 ‘포로위문사업국’에서 봉사하고 평화주의를 제창하여 독일사람들로부터 비국민(非國民)이라고 비난되었으나 호이스, 로맹 롤랑 등에게는 격려를 받아 롤랑과는 평생의 지기(知己)가 되었다. 1916년 아내의 정신병이 악화되고 그 자신도 신경장해로 괴로움을 받아 정신과 의사 랑그의 심리요법 로고테라피를 받았으며 그위 권유로 프로이트 심리학을 연구하여 소설 <데미안(Demian)>(1919)을 저술하였다.

선(善)과 더불어 악(惡)도 창조하는 아브락사스신(神)의 존재를 알게 된 싱클레어는 자신을 언제나 악의 구렁에서 건져 주고 있던 데미안이 자기자신의 분신(分身)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자연과 정신을 자기중심으로 완전히 조화케 하였을 때 인류의 어머니인 구원(久遠)의 여인(女人)을 연인으로 할 수 있다고 깨닫는다.

이 자연과 정신, 영(靈)과 육(肉)의 대립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1930)에서는 관능과 미를 구하여 수도원을 탈출해 나온 골드문트가 요한 상(像)을 아로새기어 신(神)의 예지(叡智)로 빛나는 친구 나르치스를 다시 만나는데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죽음으로 관능이 영화(靈化)되어 진정한 미(美)가 나타나는 것을 감지(感知)한다. <유리알 유희>는 극한에 달한 서양의 지성에 생명과의 융화의 길을 제시하려 한 것이다. <데미안>에 의한 헤세 자신의 위기 극복은 그 이후 작가로서의 안정된 자세를 낳게 하였다. 이 심경(心境)을 노장(老莊) 사상에 친숙하였던 그의 말을 빌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중국의 지혜는 경험을 쌓음으로써 현명하게 되나 경험으로 인해 환멸에 빠지는 일이 없으며 현명함으로써 부박(浮薄)해지지 않고 유머도 터득하고 있는 사람의 지혜이다."

수레바퀴 밑에서[편집]

Unterm Rad (1906)

헤세 소설.

작가의 학교시절 체험을 토대로 어른들 세계에 있어서의 아이들 고민을 묘사한 것이다. 헤세의 자학적(自虐的) 경향을 띠는 한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슈바벤의 시골, 읍(邑)의 장사꾼 기베란트에게는 영리한 아들 한스가 있다. 아들의 출세를 염원하는 아버지와 학교의 명성을 높이려는 교사와 목사는 주시험(州試驗)에 합격시키려고 무리한 공부를 강요한다. 어머니를 몇 해 전에 잃은 한스는 고독한 소년으로 과도한 공부를 강요당하여 때때로 심한 두통을 일으킨다.

주시험(州試驗)에 합격한 한스는 마울브론 신학교에 들어가나 문학을 좋아하며 자유분방한 학우 하이르너의 감화를 받아 성적이 떨어진다. 하이르너가 퇴학당하고 난 후에는 학교공부를 따라갈 수가 없게 되어 신경쇠약 진단을 받고 집에 돌아오게 된다. 어렴풋한 첫사랑을 경험한 후에 기계공장에 들어가나 주시험(州試驗) 합격의 직공이라고 조롱을 받고 절망한 나머지 강에 투신한다.

소년의 서글픈 모습을 둘러싸고 펼쳐지며 겨울에서 시작되어 가을에 이르는 4계절의 변화하는 풍경묘사가 아름답다. 이 작품은 교육계에 큰 파문(波紋)을 던졌다.

황야의 늑대[편집]

Steppenwolf (1927)

헤세 소설.

가정 안의 불행, 자기 자신의 신경증 극복을 작품 <데미안>에서 이원적인 정신과 육체를 자아(自我)에 통일시킴으로써 일단 해결을 본 헤세는 자기 응시에 있어서 자아를 통일체로 고집하는 것이 번민의 근원이며 이에 만족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게을리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아를 완전히 파악하기 위한 자기분석(自己分析)이 이 소설의 주인공 하리 하라의 수기이다.

그 자아가 인간의 혼과 황야의 늑대에 의해 형성된 하리는 고독하며 인간을 사랑할 수가 없어 정신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 볼 때 죽어 있는 것이다.

자기 조소(嘲笑)로 끝나는 사랑을 해 보나 자기애(自己愛)가 없는 한 타인애(他人愛)는 성립할 수가 없다.

자조(自嘲)를 만들어내는 자기를 해체하여 전체에 복귀하는, 즉 무한히 자기의 영혼을 확대하여 우주를 포괄(包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의무이어야만 한다. 하리는 그 모든 가능성을 보여주는 마법극장(魔法劇場)에 안내된다. 거기에서 상연되는 순간의 현상에서 영원을 보는 것으로써 개적 자아(個的自我)를 확대시킨 모차르트와 괴테의 유머 의의를 아는 것이다.

유리알 유희[편집]

Das Glasperlenspiel (1943)

헤세의 장편소설.

이 작품으로 노벨상을 받았다(1946).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는 200년 후의 미래인물이며 그의 전기를 다시 200년 후의 사람이 편찬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상향(理想鄕) 카스타리엔주(州)에 모이게 되는 사람은 플라톤적 이데아의 세계를 만든다는, 바꿔 말해서 개(個)를 없애고 전체에 봉사하는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무명의 사람들로서 음악과 수학을 토대로 명상과 수련에 의해 순수한 존재인 이데아를 존재로서 파악하는 사명을 가진다는 것이다. 유리알 놀이란 계산기와 같이 몇 줄인가 옆으로 평행으로 쳐진 철사줄에 유리알을 꿰어 만든 것으로, 철사줄은 보선(譜選)이고 유리알은 음표로 이 유리구슬의 배열로 주제(主題)를 표시하고 바리에이션으로 변화시키는 유희인데 후에 수학자가 이것으로 원리나 발전을 나타내는 데 이용하였다. 이것을 모든 학문에 응용하여 모든 현상을 음악에 의해 표시하는 것이 이 유희의 주안점으로 철학적으로는 후설(Husserl)의 현상학을 연상케 한다. 이 유리알 놀이 교단(敎團)의 비결을 보여주는 유희의 명인(名人) 크네히트는 교단의 세대 교체를 꾀하다 용인되지 않아 사표를 내고 젊은 제자에게 헌신적 사랑을 가르친 후 호수에 빠져 죽는다.

데미안[편집]

Demian (1919)

헤세 소설.

주인공인 소년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을 자각해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혼미한 독일의 청년들에게 크나큰 감격을 안겨주었다.

소년 싱클레어는 급우인 데미안을 통하여 점차 어두운 무의식세계의 의미를 알게 되고, 자기 내면에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드디어 데미안의 어머니에게서 모든 통일의 상징을 본다. 제1차 세계대전에 출전하여 전장에서 부상당하고 쓰러진 뒤 데미안과 재회하여 자기자신을 발견한다. 이 작품은 전쟁이라는 시대적 위기와 막내의 중병, 아버지의 죽음, 아내의 정신병 등 가정적인 위기에 직면한 가운데, 정신분석학의 수법을 빌려 자기 내면에 몰두함으로써 기성적 가치관으로부터 탈피하려고 시도한 작품이다. 원래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발표되었으나, 곧 비평가의 문체분석으로 작가가 헤세라는 것이 간파되었다. 이 작품이 헤세 자신에게도 재출발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소년기의 심리, 엄격한 구도성(求道性), 문명비판, 만물의 근원으로서 어머니의 관념 등 헤세의 전·후기 작품 특징이 나타나 있다.

카로사[편집]

Hans Carossa (1879-1956)

독일 소설가·시인.

남부독일 바이에른의 이자르강 상류 테르츠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개업의(開業醫)였고, 모친은 뮌헨에서 출생, 꽃 재배에 취미를 가졌었다. 카로사가(家)는 북부 이탈리아 출신으로 증조부는 나폴레옹군(軍)에 군의관으로 종군하여 저지(低地) 바이에른에 정주(定住)하였다.

카로사는 과작(寡作)인 편으로 그의 작품도 체험을 주로 하여 자기 영혼의 성장을 응시하는 태도이며 자전적인 연관성으로 일관하고 있다. 온몸을 오로지 일순(一瞬)에 바치는 <유년시대>(1922), 찬츠후트의 중학시절을 묘사하는 <청춘 변전>(1928), 뮌헨 대학에서 의학을 배울 때의 <아름다운 유혹의 해>, <젊은 의사시절>(1955), 의사로서 환자의 숭고한 영혼에 접한 체험으로 <뷔르거 박사의 최후>(1913)가 저술되고, 17년 후에는 시 <도주(逃走)>를 거기에 첨가시켜 <뷔르거 박사의 운명>이라고 개제(改題)하여 발표하였다.

제1차 대전 중 군의관으로서 종군한 체험은 <루마니아 일기>(1924)로 작품화되었다. 이것은 휴머니즘 향취가 그윽한 전쟁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지도(指導)와 신종(信從)>(1930)은 그때까지를 총괄하여 문학상의 교유(交遊) 관계를 수록, 여기에 그가 전선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릴케를 방문했음도 적혀 있다. "그러한 시작(詩作)(두이노의 비가)에 정혼(精魂)을 쏟는 사람은 진주 채취자와 같이 자신의 영혼 심저(深底)까지 재삼재사(再三再四) 더듬어 내려가야 하며, 더욱이 그때에는 몇 겹인지 헤아릴 수 없는 위로부터의 수압에 눌리어 두번다시 떠오르지 못할 위험도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카로사는 릴케가 <뷔르거의 죽음>을 읽고 진찰을 받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의사로서의 기쁨을 느낀다. 전후 혼란시대에 환자와 부랑아 간의 심적 교류를 묘사한 <의사 기온>(1931)은 픽션이 많이 삽입되어있다. 괴테의 <친화력>과 동일한 테마는 <성숙된 생의 비밀>(1936)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불균형의 세계>(1951)는 타의(他意)에 의해 ‘유럽 저작가연맹’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던 나치스 시대의 반성과 변명이 정리되어 쓰여 있다.

뷔르거 박사의 운명[편집]

Das Schicksal Dr. B

rgers (1930)

카로사 소설.

의사인 뷔르거의 일기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는 이미 이보다 17년 전에 <뷔르거 박사의 최후>(1913)를 발표하고 있다. 그의 작품 <지도와 신종>에 의하면 "나는 파사우 시절의 노트를 토대로 하여 뷔르거 박사의 일기 초고(草稿)를 잡아 보았는데 그것을 그 후 몇 년 동안 미완성인 채로 가지고 있었다. 최후에 젊은 의사를 자살하게 하는 줄거리로 하였으나 무리한 이런 결말이 충분히 동기(動機)지워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감지(感知)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도주(逃走)>라는 운문체(韻文體)의 독백을 써서 의사의 자살 의의를 밝히기로 한 것이다."

이 초고(初稿)에 <도주>(詩作)를 첨부하여 개제(改題)한 것이 1930년에 출판되었다. 젊은 의사 뷔르거는 세 살된 어린애를 키우는 군인이었던 연인(戀人)과 사별한 부인환자와 연애관계를 가져 환자인 것을 잊고 치료를 게을리하여 죽게 만든다. 그녀의 아름다운 정신에 이끌리어, 움울한 생명의 번뇌에서 벗어나 정신적 우주에서의 환희를 찾아 자살한다.

청춘 변전[편집]

Uerwandlungen einer Jugend (1928)

카로사의 자서전적 소설.

란츠후트 중학시절을 묘사하고 있다. 부모 곁을 떠나 기숙사에 들어간 카로사는 젊은 사람의 적응성으로 곧 그 생활에 익숙해진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는 마음은 무엇인가를 찾아 동요한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빌어온 사화집(詞華集) 속의 독일 고전시(古典詩)를 읽고 자기 스스로 상급반의 미소년을 동경(憧憬)하며 시작(詩作)을 하였다. 밤중에는 금지되어 있는 낭하(廊下)에서의 산책이 학감(學監)에게 발각되어, 자작시(카로사 시)가 압수된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을 때 상급반의 미소년이 카로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여 퇴학처분을 받게 된다. 귀향한 카로사를 양친은 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부친은 정신적인 재출발을 지켜본다. 그런데 그 미소년은 급성질환으로 죽을 때 카로사가 무고(無辜)함을 밝힘으로써 복학(復學)이 허락된다.

드노 강변의 여관집 딸 아말리에와 연어낚시를 같이하던 즐거운 날, 좌초된 배에서 앓는 아이를 부친을 흉내 내어 진찰하는 등, 전원시(田園詩)적인 아름다움이 삽입되어 있다.

아름다운 유혹의 해[편집]

Das Jahr der Schonen Tauschungen (1941)

카로사가 63세 때 원숙한 필치로 뭔헨 대학 의학생 시절을 묘사한 작품이다.

서두(序頭)에 "만일 이 세상에 최후로 사과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면 이 사과의 씨를 표본으로 만들어 현미경으로 그 조직을 조사하든가 또는 그것을 땅에 뿌려 자연의 품에 맡겨 생장(生長)하도록 하든가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이미 볼 수 없는 청춘의 생활이라는 식물을 한편으로는 그 조직을 조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종자를 친구들의 마음속에 뿌려 그 성장을 기다려 본다는 것이 이 작품의 의도"라고 했다. 어머니의 고향인 뮌헨에서 오래도록 부리던 노파의 집에 하숙을 하면서 가계(家系)에 속하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나 이 세계에 머물러 있기에는 도시의 자극이 너무나 강하였다. 자연주의 문학의 융성, 시인 데멜에 대한 찬양은 금단의 열매를 따는 용기를 주며 비약의 계기로 보게 하여 프랑스인(人)이라 자칭하는 부인과 잠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화학시험에 실패함으로써 원소가 갖는 신비적인 힘을 테마로 한 괴테의 <친화력>을 읽고 아주 정적(靜寂)한 경지를 마음속에 간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문학[편집]

第二次世界大戰後-文學

대전 직후의 현저한 현상은 전쟁 중에 국외에 망명하고 있던 노대가(老大家)나 국내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던 작가들이 예기치 않게 대작들을 발표한 사실이다. 1946년-1947년 사이에 발표된 것만도 <파우스트 박사>(T. 만), <악마의 장군>(추크마이어), <미탄생자의 별>(베르펠), <예로민의 아이들>(비헤르트), <지워지지 않는 표적>(랑게서), <정력학적 시편(精力學的詩篇)>(G. 벤) 등 여러 작품을 열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1947년에는 패전에 의한 혼란과 절망, 허탈감과 해방감 등이 얽힌 공백의 시기를 뚫고 나와 거기에서 출발한 작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첫째로 보르헤르트의 희곡 <문밖에서>, F. 하르트라우프의 <종군일기> 1947년에 결성된 ‘47년 그룹’ 중의 한사람인 하인리히 뵐 등에 의해 대표되는 전쟁체험의 표백(특히 르포르타주 풍의 전쟁기록물이 주목을 끈다).

둘째로 <강 건너의 도시>(카작), <부(否)-피고의 세계>(W. 옌스), <죽은 자에게 주는 예물> <죽음과의 인터뷰>(노삭), <레비아탄>(A. 슈미트), <헬리오폴리스>(E. 윙거) 등의 초현실적인 알레고리풍(風)의 몽환적인 이야기에 표현된 실존주의적인 경향.

셋째는 안드레스, 베르겐그륀, 르 포르트, 전술한 랑게서 등의 카톨릭계(系) 작가들의 활약 등이 그것이다.

특히 ‘47년 그룹’ 출신 작가들(안데르슈, 아이힝거, 바이스, 그라스, 욘존, 발저 등)의 그 후의 눈부신 활동은 갖가지 화제를 낳은 수다한 작품을 통하여 전후 독일문학을 진정으로 혁신적·창조적인 사업으로 완성시킨 것이었다.

추크마이어[편집]

Carl Zuckmayer (1896-1977)

현대독일 극작가·소설가.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고 전후 주목할 극작가로서 화려하게 활약하였으나 나치스 혁명 후에는 스위스로 망명,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농장경영에 종사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즉각 귀독(歸獨)하여 극단(劇壇)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그의 소설은 여러 작품 속에서 묘사한 옛 독일의 전통적 감정과 굳게 직결되는 점에서 애호를 받았으나 그의 진가(眞價)는 누가 뭐라 해도 희곡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처음 표현주의 영향하에서 출발하여 결국 신즉물주의적(新卽物主義的)인 작풍을 확립하고, <즐거운 포도산(葡萄山)>(1925)으로 클라이스트상(賞)을 획득하였다. 빌헬름 제정 치하(治下)의 군국주의적 광신상(狂信相)을 풍자한 <키페니크 대위>(1931)는 독일희극의 최고 걸작 중의 하나로 칭찬받고 있다. 사상성의 결핍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희곡 작법에 관한 한(限) 당대 제일가는 명수라 할 것이다.

르 포르트[편집]

Gertrud von Fort (1876-1971)

현대독일 여류작가.

오래된 유그노가계(家系)에 속하는 남작가(南爵家)에 태어나, 대학에서 철학·신학을 배우고 <교회찬가(敎會讚歌)>(1924)를 발표하고, 카톨릭교에 귀의하였다(1926). 그녀의 전작품(全作品)은 교회와 국가와 여성이라는 세 가지의 모티프가 복합적으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고 있는데, 견고한 카톨릭 신앙 위에 서서 뛰어난 단편적(斷片的)기교와 뚜렷한 상징적 표현으로 깊은 종교적·신비적인 체험을 조형화(造形化)하고 있다.

예술적으로 완성된 주옥과 같은 작품이 많아 현대 독일문학상 가장 우수한 단편작가라고 평가되고 있다. 단편 외에 장편·시집·에세이 등이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집 <교회찬가>(1924), <독일찬가>(1933), 장편 <베로니카의 수건> 2권(1928-46), <게토에서 온 교황(敎皇)>(1930), <마그데부르크의 결혼>(1938), 단편 <단두대의 최후 여인>(1931), <영원(永遠)의 여인(女人)>(1934), <바다의 법정>(1943), <천국의 문>(1954), <피라토의 처>(1955) 등이 있다.

베르겐 그륀[편집]

Werner Bergengruen (1892-1964)

독일 작가.

발트해(海) 연안의 리가에서 출생하였다. 독일의 여러 대학에서 공부하고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독일군으로 참전하였으며, 전후 러시아 문학의 번역, 저널리스트 생활을 거쳐 작가생활로 들어갔다(1927). 1936년 카톨릭으로 개종, 나치스 지배시대에는 박해를 받았다. 그는 현대의 저명한 카톨릭 작가로 ‘영원의 질서를 사람의 눈에 뚜렷이 보게 하고’ 또 ‘독일 기질과 그리스도교와의 풀기 힘든 상관관계’를 밝히려고 한 북방적인 깊은 사색과 정감(情感), 견실한 표현과 극적 구성으로써 영원한 질서의 비밀에 육박하는 진지한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즘이 그의 문학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대표작 중의 하나인 장편 <대폭군과 재판>(1935)은 권력과 정의, 죄와 속죄를 묘사한 대작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단편의 기법(技法)도 뛰어나 주옥

같은 명작을 많이 발표하고 있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장편 <하늘에도 땅에도>(1940), <봉화(烽火)>(1949), 단편 <왕관>(1946) 등이 있다.

카작[편집]

Hermann Kasack (1896-1966)

독일 작가.

장편 <강 건너의 도시>에 의해 일약 전후의 주목할 작가가 되었다. 기술문명에 지배되는 부조리한 생과 그 몰락을 초현실적인 수법으로 묘사한 것으로서 <직기(織機)>(1949), <커다란 그물>(1953)도 전기의 대작과 비견할 만한 대표작이다. 그 밖에 서정시·희곡·방송극·에세이 등 다수 작품이 있다.

노사크[편집]

Hans Erich Nossack (1901-1977)

현대독일 작가.

무역상의 아들로 함부르크에서 출생하여 예나 대학에서 법학과 문헌학을 배운 후,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 창작을 계속하였으나 출판을 보지 못하고 1943년 공습으로 그 초고(草稿)가 전부(대부분 희곡이었다고 한다) 소실되고 말았다. 1948년 <몰락> <단편집 <죽음과의 인터뷰>(1948)에 수록, 후일 <도로테아>라 개제(1950)>로 1943년 7월의 함부르크시(市) 대공습 때의 지옥상을 묘사했는데 이 작품으로 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생의 체험을 원초적(原初的) 체험으로까지 승화시켜 신화 속의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으면서도 공상과 현실을 교차시키면서 냉정한 눈으로 현대의 불안을 추구하는 그의 작풍은 현대 독일문학 중에서도 독자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안드레스[편집]

Stefan Andres (1906-1970)

현대독일 작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이탈리아에 망명하고, 전후 귀국(1950)하여 카톨릭시즘의 입장을 취하는 작가로서 그의 풍부한 구상력(構想力)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20년 후반부터 상당수의 작품을 저술하고 있으나 주목을 받을 만한 것은 오히려 전후의 작품에 많다. 특히 3부작 장편 <대홍수>(1949-59)는 제3제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정치적·풍자적인 대작이다. 단편의 기법에도 뛰어난 걸작이 많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장편 <적끼리의 결혼>(1947), <정의의 기사(騎士)>(1948), 자서전적 소설 <샘 속의 소년>(1953), 단편 <우리들은 유토피아>(1943) 등이 있다.

아이히[편집]

G

nter Eich (1907-1972)

독일 서정시인·소설가·방송극작가. 베를린·라이프니치 등에서 법학과 동양학을 연구하고 대전 후 ‘47년 그룹’에 가입, 중진으로 활약. 전쟁체험을 깊이 되새겨 쓴 <변지(邊地)의 농가>(1948)와 은은하고 낮은 목소리로 신변의 사물을 찬미하고 그 속에 묻혀 있는 인간존재의 불안을 묘사한 <비의 소식>(1955)은 그의 대표적 시집이며 주목받은 작가가 되는 터전이었다.

꿈 속에서 현대인의 불안을 여러 각도에서 접근하여 묘사한 <꿈>(1953)과 불가사의한 소리를 주제로 한 <소리>(1958)는 통속적 의미의 방송극 차원을 넘어서서 방송극의 독보적 위치를 굳혔다. 규수(閨秀) 작가이며 카프카풍의 주옥 같은 단편 <포박당한 사나이>(1953)의 작가인 아이힝거(1921- )의 부군이다.

린저[편집]

Luise Rinser (1911-2002)

현대독일 여류작가.

교직에 있으면서 쓴 처녀작 <투명한 바퀴>(1940)에 의해 문단에 데뷔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末期)에는 나치스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전후(戰後), 탈주한 유대인의 이야기인 <바르샤바에서 온 장 로벨>(1948)에 의해 다시금 명성을 높였다.

부녀와 어린이 문제가 그녀의 창작주제로서 장편 <생의 한가운데>(1950)와 그 속편 <비틀거리는 미덕(美德)>(1957) 두 작품으로 구성된 <니나>(1961)에서 현대에 있어서 여성의 본연의 자세를 추구하였다.

최근의 작품으로는 <월경(越境)>(1972)이 있다.

안데르슈[편집]

Alfred Andersch (1914-1980)

현대독일 작가.

고교졸업 후 공산당에 입당한 좌익작가. 강제수용소에서의 억류생활, 종군, 탈주, 포로생활 등을 경험하고 전후 ‘47년 그룹’의 작가가 되었다. 대표작 장편에 <잔지바르>가 있다. 최근작으로는 <동서남북(東西南北)>(1972), <겨울 밀>(1974)과 시집 <제3장>(1976) 등이 있다.

바이스[편집]

Peter Weiss (1916-1982)

현대독일 작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유럽 각국에 망명하여 오랫동안 스웨덴에서 살아 스웨덴어(語)로 된 작품도 있으나 장편 <마차꾼의 그림자>(1960)로 독일문단에 데뷔하였고,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보케 해 준 것은 실험극 <마라/사드>였다. 러시아 혁명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소련을 묘사한 희곡 <추방당한 트로츠키>(1970)를 내놓아 반소적(反蘇的) 경향을 띠었으며, <빈너스탠드의 미학(美學)>(1976)이란 자전적(自傳的) 소설을 내놓기도 하였다.

[편집]

Heinrich Boll(1917-1985)

현대독일 작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사병으로 각지에서 전투에 참가하였고, 제대 후에는 작가로 출발하여 47년 그룹을 결성하여 중심 멤버로 활약하였다.

초기의 작품은 전쟁체험과 전후의 황폐상을 일체의 우의(寓意)나 분식(粉飾)을 빼고 간결한 묘사를 구사하여 제1작 <기차는 늦지 않았다>(1949)를 위시한 일련의 작품(<길손이여 그대 소파에 갈진대> <아담 너는 어디 있었니?>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으로 가장 주목받는 전후작가로 지목되었다. 그 후에는 주로 사회적 테마를 취급하여 <지키는 사람 없는 집>(1954)이나 <9시 반의 당구(撞球)>(1959) 등으로 전후사회의 위선풍조를 공격하였다. 그의 휴머니즘은 특정 강령이나 사상체계에 입각하는 것이 아니어서 그의 세상풍자나 문명비판이 안이한 풍속묘사에 빠지는 경향이 짙다는 비판도 있으나 언어를 가지고 현실과 대결하는 ‘언어의 모랄리스트’로서의 그의 양심과 책임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72년 스웨덴 한림원은 “자기 시대의 폭 넓은 통찰력과 예민한 성격묘사를 조화시켜 독일문학에 크게 기여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밖에도 서독에서 카톨릭의 모순을 표현한 <나병(癩病)>(1970)을 비롯하여 <검은 양(羊)들>(1951), <어느 광대의 의견>(1963), 희곡 <한줌의 흙>(1961)이 있으며 <카타리나 블름의 잃어버린 명예>(1974), <국민의 신념상태에 관한 보고>(1975), <여인과 군상(群像)들>(1972)과 <시집(詩集)>(1972) 등 많은 작품이 있다. 특히 <여인과 군상들>에서는 매우 현세적인 여인과 주위의 많은 직업을 가진 남자와의 관계 속에서 현대 독일의 사회상을 보여 준다. 가장 저열한 생활을 하는 여주인공만이 전후 혼란과 비곤의 시대에 살아 남았다는 풍자적인 결말을 통해 뵐은 사회구조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라스[편집]

Gunter Grass (1927- ) 현대독일 작가.

단치히 근교에서 출생하여,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소년병으로서 종군하고 전후에는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였으나 1955년에 발표한 장편 <양철북>으로 대호평을 받아 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이후 방송·극장·정당 등에서 눈부신 활동을 계속하였고 그 사이에 중편(中篇) <고양이와 쥐>(1961), 3부작 장편 <개들의 시절(時節)>(1963)을 발표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의 소설은 어느 것이나 잃어버린 고향 단치히(현재 폴란드 영토)를 무대로 하고 있어, 고향을 그리는 시정(詩情)에 차 있다. 한편 전시(戰時)와 전후의 시대상에 대한 통렬한 풍자, 망측(罔測)한 수다스러움, 그로테스크한 유머, 작품 전체를 휘감는 패러디(Parody)의 범람(汎濫)이라는 느낌을 주지만 가슴 답답한 현대문학 가운데에서 독자에게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되찾게 해준 것은 그의 커다란 공적이 아닐 수 없다.

1999년에는 {양철북}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발저[편집]

Martin Walser (1927- ) 독일 작가. 보렌 호반(湖畔)의 여관집 아들로 태어나서, 튀빙겐 대학에서 문학·철학·역사를 공부했고, 1951년 <근대 서사시의 형성>으로 학위를 받았다. 1947년에 그루프상을 받은 <집 위의 비행기>(1955), 헤르만 헤세상을 받은 <필립스부르크의 결혼>(1957)에서 카프카의 영향을 볼 수 있고 마이크로적 수법을 써서 발자크를 연상케 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하프 타임>(1960)은 1인칭 소설로서 20세기 50년간을 총결산하는 거대소설로서 각광을 받았다. <들름길 여행>(1961)과 <떡갈나무와 앙고라 토끼>(1912) 등의 희곡이 있다. 후자는 만년의 공산주의자였고 강제수용소에 갇힌 바 있는 자의 출세와 몰락을 연대기(年代記) 풍으로 시니컬하게 묘사했다. 최근에는 <칼리스틀쉐의 질병>(1972)과 <사랑의 피안>(1976)을 발표했다.

욘존[편집]

Uwe Johnson (1934-1984)

독일 작가이며 포멜른주의 카민(현 폴란드령)에서 출생. 제2차 대전 후에 동부독일에서 학업을 닦았으나, 1959년 서베를린으로 옮겨와 장편 <야콥에 관한 추측>(1959)을 발표하여 현대독일이 부딪친 중심적 과제에 대한 정면대결을 하고, 모순과 부정확성에 적응하는 표현방법으로 기존의 구두법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아침에 관한 제3의 서(書)>(1961)와 단편 <카르시>(1964)는 서독 신문기자의 동독에 관한 추구의 좌절을 그린 것이다. 최근 미국땅에서 일하는 독일인의 눈에 비친 뉴욕의 여러 인상과 추억, 풍물을 엮은 3부작 <기념일>(1970)을 발표했다.

전후의 시[편집]

戰後-詩

전후 독일의 시는 표현주의 최대의 대표자 G. 벤의 화려한 복귀에서 시작된다. 주지주의(主知主義)를 니힐리즘의 유일한 지주(支柱)로 하여 “형식만이 신앙이요, 행위이다”라고 하는 그의 입장은 <정력학적 시론(靜力學的詩論)>(1947) 그 밖에 많은 수필(隨筆)로 압도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어 본래의 전후파 시인의 대표를 들어보면 권터아이히(1907-1972), 엔첸스베르거(1929- ), 오스트리아계(系)

잉게보르크 바하만(1926-1970), 파울 셀란(1920-1970), 동독 요하네스 보브로우스키(1917-1965) 등이 있다.

그 이외에 두드러진 경향으로서는 오스카 레르케(1884-1941)를 스승으로 하는 자연서정시 일파(一派), 빌헬름 레만(1882-1968), 칼 크로로우(1915- ), 동독의 피터프헬(1903- ) 등과 자연시파(自然詩派)에 대한 반박과 정치적 상황과의 연관관계를 시작의 동기로 하는 전기 엔첸스베르거와의 대조일 것이다.

윙거[편집]

Friedrich Georg Junger (1898-1977)

현대독일 시인·소설가.

작가 에른스트 윙거의 동생이다. 전통주의적 입장에 서서 고전시대(古典時代)에서 릴케에 이르는 독일 서정시를 계승하려는 시인으로 웅대한 정감과 엄격한 격조(格調)를 띠는 형식은 클롭슈토크나 게오르게, 또는 괴테의 <동서시편(東西詩篇)>을 연상케 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소설을 몇 편인가 썼으나 그 작풍은 역시 심미적 경향이 강하다. 시집 ·소설과 희곡·에세이 등이 다수 있다.

그 밖에 들 수 있는 작품으로는 시집 <서풍>(1946), <진주 목걸이>(1948), <바람 속의 이리스>(1952), <연륜>(1954) 등이 있다.

또한 단편집 <달마치아의 밤>(1950), <공작(孔雀)>(1952), <십자로(十字路)>(1960)와 장편 <제일보(第一步)>(1954), <두 자매(姉妹)>(1956) 등이 있다.

하우스 만[편집]

Manfred Hausmann (1898- ? )

현대독일 작가.

노르웨이의 작가 크누트함순을 모범으로 삼아 북부독일과 북해의 자연관조(觀照)에 젖으면서 청춘의 애환(哀歡)을 노래함으로써 인생의 다양함과 풍부함을 추구하고 있다. 낭만적·감상적인 작풍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작품으로 <람피온은 소녀와 작은 자작나무에 입맞춘다>(1928), <마르틴>(1949), <이자벨>(1953) 등이 있다.

홀투젠[편집]

Hams Egon Hol-thusen (1913- ) 현대독일 문예비평가.

릴케의 연구로 학위를 받은(1937) 후 사병으로 종군(1939-1944), 전후에는 먼저 시인으로 출발하면서 평론을 썼으나 그의 전문분야는 시인으로서보다는 오히려 현대독일의 지도적인 문예비평가로서의 활동에서 엿볼 수 있다.

그의 비평에 있어서의 출발점의 하나로 지적되는 것은 영국·프랑스의 고도로 발전한 문학 연구방법과 불모이며 융통성이 없는 독일 문예학·문학비평 사이에 가교(架橋)를 시도하는 것이며, 이 입장에서 현대 독일문학에 대한 예리한 정황분석(情況分析)을 행하여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유능한 젊은 시인을 발굴하기에 힘썼다.

주요한 저작으로는 <만년의 릴케> <초월 없는 세계>(둘다 1949), <살 집 없는 인간>(1951, 증판 1955), <미(美)와 진(眞)>(1958), <근대예술의 전위주의와 미래>(1964) 등이 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편집]

Patrick Suskind (1949- )

현대 독일작가.

1949년 독일 암바흐에서 태어나 뮌헨 대학과 엑상 프로방스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그는 일찍이 시나리오와 단편을 썼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34세 되던 해 한 작은극단의 제의로 <콘트라베이스>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콘트라 베이스>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인 한 예술가의 고뇌를 그린 남성 모노드라마인데 “희곡이자 문학 작품으로서 우리시대 최고의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러한 관심 속에서 그는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장편소설 <향수>(1985)를 발표했다. 냄새에 관한 천부적 능력을 타고난 주인공 그르누이가 향기로 세상을 지배하는 과정을 그린 기상천외한 이 소설은 발표되자마자 전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연약한 체격, 지나칠 만큼 반짝거리는 가드다란 금발에다 유행에 한참이나 뒤떨어진 스웨터 차림으로 전세계 매스컴의 추적을 받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는 모든 문학상을 거부하고, 사진 찍히는 일조차 피하고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해 발설한 사람이면 친구 부모를 막론하고 절연을 선언해 버리는 괴이한 성격으로 여전히 은둔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 그가 최근 평생을 사랑과 죽음 앞에서 도망치는 별난 인물을 그린 <좀머 씨 이야기>(1991)를 발표하여 또 한번 전세계 독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동독 문학[편집]

東獨文學

1945년 패전과 더불어 독일 국토가 양분되어 1990년 10월 3일 통일되기 전까지 동독에서 이루어진 문학활동. 비약적인 경제부흥을 구가하는 서독(西獨)의 다채로운 문학활동에 반하여 동독(東獨)은 여타의 공산권의 문학이 그러하듯이 예술적인 사이비성, 정치에의 예속화, 어용문학으로서의 성격을 그대로 노정하여 전전(戰前)활동을 통하여 알려진 몇몇 예를 제외하면 거의 국제적으로 알려진 작가를 찾을 수 없다. 전기한 몇몇 작가의 예로는 베허(1891-1958), 헤르믈린(1915- ), F. 볼프(1888-1953) 등의 소위 교조주의적 시인·작가들이 있다.

오스트리아 전후문학[편집]

-戰後文學

독일어권(圈)에 속하는 오스트리아 문학은 일반적으로 ‘독일문학’으로 불리지만 특히 ‘오스트리아 문학’으로서의 독자성을 논한다면 빈을 문화적인 중심지로 하는 구(舊)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帝國)의 영역 내외에 뻗는 지리적인 범위(範圍)와 민족적(특히 유대적)·역사적(다시 말하면 동서 양구(兩歐)에 걸쳐 있는) 제요소의 복잡한 연관관계로 성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1차 대전 중 요절한 게오르그 트라클이나 도데라(1896-1966) 등 구세대 작가들과 안팎의 관계를 이루는 것 같이 루마니아 출신의 셀란, 폴란드 출생의 시페르바(1905- ), 불가리아 출생의 카네티(1905-1994), 프라하 출생의 빌시딜(1896- ?) 또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두 여류작가 바흐만(1926-1973)과 아이힝거(1921- ) 등이 모두 빈을 문학적인 출발의 무대로 하면서 현재 서독, 파리, 로마, 뉴욕 등 국외에서 활약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현대 오스트리아 문학의 눈에 띄는 특색이라 할 것이다.

셀란[편집]

Paul Celan (1920-1970)

루마니아 출생의 독일어 시인.

처음에는 의학을 공부하였으나 전쟁으로 중단하고 소련군 점령 후에는 빈으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최초의 시집을 발표하였다(1947). 1948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얻어 파리에서 살면서 프랑스어·러시아어(語) 어학교사 겸 번역가로 일하면서 시인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시는 시선(視線)이 포착(捕捉)한 사물을 금욕적이라 할 만큼 응축된 시어에 정착케 하는 투명함과 순수함을 갖는 것으로 독일 현대시 가운데 이채를 발하는 존재이다.

주저(主著)로는 시집 <기이함과 기억>(1952), <문지방에서 문지방으로>(1955), <말의 울타리>(1959) 등이 있다.

바흐만[편집]

Ingeborg Bachmann (1926-1973)

오스트리아 여류시인. 오스트리아 크라겐푸르트에서 출생. 1956년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으로 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예된 시간>(1953)과 <대웅성좌(大熊星座)의 탄원>(1956)으로 현대독일 시문단에 확고한 위치를 굳혔다. 방송극 <매미>(1954), <만하탄의 선신(善神)>(1958)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말리나(Malina)>(1971)와 <동시대(同時代)>(1972)를 발표했다.

스위스 전후문학[편집]

-戰後文學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스위스 독일어 작가로는 막스 프리시(1911-1991)와 뒤렌 마트 두 사람의 극작가를 들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브레히트에게 강한 영향을 받아 출발하여 그와의 비판적인 대결을 벌였는데 브레히트의 근대사회에 대한 도덕적인 설문을 모범으로 삼으면서도 그의 사회개혁으로의 지향이나 반 체제적인 심정, 실험적인 극작의 시도 등에는 추종할 수 없으며 집단에 대한 개인의 무력함을 고백하여 ‘가설(假說)을 허구화(虛構化)하는’ 입장에서 현상의 인식을 주장하든가(뒤렌 마트), 예술가의 정치참가에 의혹과 불안을 강하게 표백(表白)하는(프리시) 특징을 보였다. 이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도 전화를 입지 않고 ‘전화(戰火)의 피안(彼岸)’에 있었던 영세중립국이라는 입장을 어떤 형태로든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막스 프리시[편집]

Max Frish (1911-1991)

스위스 극작가·소설가. 취리히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나 취리히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으나 부친의 사망으로 학업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신문인으로 동구(東歐)를 여행하였다. 전쟁이 있기 전에 다시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건축학으로 학위를 받았고, 전쟁때에는 징집되어 전쟁에 참가하였다. 이런 관계로 초기의 작품들은 신문기사나 여행담 비슷한 소설들이었는데 작가로서의 역량은 그 후의 희곡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의 최초의 희곡은 <산타쿠르즈>(1944)이며 그 후로 <이제 그들은 다시 노래한다>(1946), <전쟁이 끝났을 때>(1949), <외더를란트 백작>(1951), <돈 주안 또는 기하학에 대한 사랑>(1953) 등이 있으며 소설로서 <시틸러>(1954), <호모 파버>(1957), <내 이름은 간텐마임>(1964)이 있다. 그의 대표작은 <안도라>(1958)인데, 여기서 그는 반유대주의의 비판을 넘어 인간본질에 대한 탐구로서 인간이 다른 인간에 갖는 편견이란 인간에 관한 그릇된 현상을 초래하고 때로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데 있으며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빌헬름 텔 전(詮)>(1971)과 <일기>(1966-1971)>를 발표하였고 반(反)소비에트적 경향을 띤 <몰락>(1971)을 발표했다.

뒤렌마트[편집]

Friedrich D

rrenmatt (1921-1990)

스위스 작가.

베른시(市) 교외에서 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베른, 취리히 양(兩)대학에서 신학·철학·독일문학을 배운 후, 저널리스트가 되어 대전 직후에 발표한 최초의 극작이 성공함으로써 작가로 전신(轉身)한(1947) 이후, 극작 이외에 소설·라디오 드라마를 많이 쓰고 있다.

그의 창작의 중심은 극작으로서 표현주의와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아 출발하였으나 브레히트와의 대결을 통하여 독자의 세계를 형성하여 갔다. 즉 현대세계는 연극에 의하여 재현될 수 있고 또한 세계는 변혁될 수 있다는 브레히트의 테제에 의한 의혹과 반박을 출발점으로 하여 일체의 변혁과 이상에 치우치는 일 없이 가설과 허구의 세계를 통하여 현실의 세계를 ‘인간적 시각’으로 직시하고 인식하려고 한다. 개인과 개인을 무력화하는 집단(도시나 국가) 사이의 부조리한 역학관계나 인간의 심저에 내재하는 우열성(愚劣性)이나 악 같은 것을 일체의 전위주의를 거부한 패러디(Parody)적이며 희극적인 형식으로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폭로하고 있다. 또한 그는 ‘문학적’ 추리소설 수법에 특히 능하여 이 장르가 빈약한 독일문학에 특이한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