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예술·스포츠·취미/무 용/한국의 무용/한국의 무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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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무용가〔개설〕[편집]

韓國-舞踊家〔槪說〕

우리나라에서 '신무용'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1926년 3월이다. 당시 일본인 무용가인 이시이(石井漢)가 경성 공회당에서 가진 무용 공연의 명칭을 신무용공연(新舞踊公演)'이라 이름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무용이 서구식 스타일을 선보인 것은 다른 신예술의 태동이 그러하듯이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다른 자매 예술의 근대적 각성이 모두 일본 문화의 영향 아래 이루어졌던 것처럼, 우리의 신무용도 일본인의 대식민지(對植民地) 흥행이라는 피동적 여건 아래서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다.

1926년 3월 이시이(石井漢)와 그의 누이동생이 경성공회당에서 <수인(囚人)> <등산(登山)> 등의 레퍼토리로 신무용을 공연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조택원(趙澤元), 최승희(崔承喜) 등이 무용계에 투신, 두 사람 모두 이시이(石井漢)의 문하에서 민속무용의 현대화에 투신했다. 이들은 이시이 문하(門下)에서 우리의 민속(民俗)무용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으며 당시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이들의 무용이 민족의식의 발로로서까지 받아들여졌다. 1930년을 전후하여 비로소 과거의 무용에 대한 비판이 활발해졌으며, '신무용연구소'라는 간판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1931년 조택원도 무용연구소를 열고, 1933년에 제1회 발표회를 가졌다. 신무용에 민속적 요소를 전수해 준 한성준(漢成俊)도 1940년 '조선무용 발표회'를 가졌으며, 이후 꾸준히 민속무용을 전수했다.

1940년대 일본제국의 탄압이 극에 이르자 무용계도 잠시 침체한 상태였지만 박외선(朴外仙), 김천흥(金天興) 등이 새로운 시야에서 그들의 의욕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무렵 김민자(金敏子)·조용자(趙勇子)·정인방(鄭寅芳)·진수방(陳壽芳)·김미화(金美華) 등이 나타났으나 조택원·최승희 등을 능가하는 어떤 창의적 모멘트를 이룩하거나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광복이 되고 6·25가 발발하자 무용계도 많은 기성세대를 잃었다. 그러나 반면에 김백봉(金白峯)이 등장함으로서 민족무용계는 오히려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53년 송범(宋范)은 6곡의 신작 발표회를 가짐으로써 현대무용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으며 뒤를 이어 주리(朱莉)·조광(趙光)·이인범(李仁凡) 등이 의욕적인 활약을 보였고, 일본에서 백성규 문하에 있던 임성남(林聖男)의 귀국은 고전발레를 정리하는 데 이르렀다. 이 무렵부터 조동화(趙東華)와 김경옥(金京鈺)은 최초로 무용평론의 분야를 개척, 우리의 무용을 본궤도에 올려 놓았다.

1956년에 임성남 발레단이 그 제1회 공연에서 본격적인 발레의 경지를 개척하게 되었다. 한편 김천흥과 한영숙(韓英淑)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의 전통무용에 꾸준한 정진을 보였다. 1960년대 이후에는 정막(鄭漠), 육완순(陸完順) 등이 이념적 무용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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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무용가[편집]

한성준[편집]

韓成俊(1875-1941)

한국무용가. 명고수(名鼓手). 충청남도 홍성 출신. 구한말(舊韓末)에서 일제말엽까지 활약했던 민속무용의 대가(大家). 1940년 '조선무용발표회'를 가져 41년 '조선예술상' 중 무용 부문상을 수상했다. 1937년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열고 검무(劍舞)·승무(僧舞)·남무(男舞)·한량무(閑良舞) 등 한국 고전무용을 후진들에게 전수했다. 혼란스러운 정세(情勢) 속에서도 흩어져 있거나 사장(死藏)되어 가는 한국 고전무용을 집대성(集大成)하여 계승·발전시킨 공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김천흥[편집]

金千興(1909- ) 궁중무용·궁중아악가. 서울 출신. 14세 때인 1923년 이왕직 아악부 아악생양성소(李王職雅樂部雅樂生養成所)를 제2기생으로 졸업, 현재까지 아악과 궁중무(宮中舞)의 전승·보급에 몸바쳐 왔다. 그는 '탈춤'을 체계화시키고 보급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고, 국립국악원 이사, 국립국악원 국악사, 문교부 문화보존위원회 위원, 서울시 문화위원, 서울대 음악대학·경희대·이화여대 강사 등을 역임했다.

1962년 <처용랑(處容郎)>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1958년부터 '김천흥 무용연구소'를 개설, 5회의 발표회를 가졌으며, 1964년에 <종묘제례악>으로 기능보유자(소위 인간 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김보남[편집]

金寶男(1912-1964)

한국무용가. 경기도 광주 출신. 이왕직 아악부원양성소(李王職雅樂部員養成所) 제3기생. 국립국악원 아악수장(雅樂首長), 중앙여고·경기여고·이화여대에서 무용강사 역임. 국립국악원에서 무용을 전담한 바 있다.

한영숙[편집]

韓英淑(1920-1989)

한국무용가. 충청남도 출신. '경성조선고전무용연구소(京城朝鮮古典舞踊硏究所)'를 졸업. 1937년 부민관에서 제1회 무용발표회를 가졌고, 1940년엔 일본 도쿄 히비야(日比谷)공회당에서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1942년 조부(祖父)인 한성준(韓成俊)의 작고로 한성준의 연구소를 인수, '한영숙 고전무용연구소'로 바꾸었다. 한국민속예술학원·국악예술학교·서울예술고등학교·서라벌예술대학·수도여자사범대학·이화여대 등에서 무용을 담당했다. 1962년 서울특별시 문화위원이 되었고, 1967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1970년 서울신문사 제정 제3회 문화대상, 1970년 대통령 포상, 1971년 제3회 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법열곡(法列曲)> <승무(僧舞)> <살풀이> <태평무(太平舞)> <학춤> 등이 있다. <승무>로 1969년에 기능보유자 제27호에 지정되었다.

강선영[편집]

姜善泳(1925- ) 한국무용가. 서울 출신. 본명은 강춘자(姜春子). 안성여자고보 출신으로 한성준에게 사사(師事)했다. 1943년의 제1회 무용발표회(부민관)를 출발로 8·15광복이 될 때까지 만주·일본 등지에서 무용공연을 가졌다. 광복 후에는 '강선영무용연구소'를 개설하는 한편 여러 차례의 신작무용발표회를 가졌다. 1960년에 파리 국제민속예술제, 1962년과 1964년엔 일본에서, 1968년엔 중화민국에서 공연, 1972년엔 뮌헨올림픽 한국 민속예술단 지도위원으로 세계 각지를 순회공연했다. 1965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장희빈>), 1965년 아시아 문화예술제 문화부문 작품상 등을 수상, 주요 작품으로는 <수로부인(水路夫人)> <장희빈(張禧嬪)> <열두무녀도> 등이 있다. 무용협회 부회장 역임. 현 강선영무용단장.

송범[편집]

宋范(1926- )

한국무용가. 충북 청주 출신. 본명 송철교(宋喆敎). 양정중학교 졸업후 조택원과 장춘화에게 사사했다. 1950년에 '송범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익년 '한국무용단'을 창설, 단장에 취임한 후 1955년 6곡의 신작발표회를 가짐으로써 현대무용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서울예술고등학교·수도여자사범대학·서라벌예술대학·경희대학교·상명여사대·숙명여대·서울대학교사범대학 등의 무용강사를 역임했다.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예총 이사, 국립무용단 단장 등에 피임된 바 있으며, 1968년도 서울시 문화상 (<종송>)을 수상했다. 또한 1968년에 멕시코 올림픽 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지도위원, 1972년엔 뮌헨올림픽 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지도위원, 1972년에 뮌헨올림픽 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연출 및 안무자로 세계 각국을 순회공연하여 절찬을 받은 바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외국무용에서 한국무용으로 전향, 창작무용을 연구했는데 주요 작품으로는 <영은 살아 있다> <검은 태양> <멍든 산하(山河)> 등의 외국무용과 <강강수월래> <논개> <관등놀이> 등의 한국무용이 있다. 예술원 회원.

안제승[편집]

安濟承(1922-1996)

무용이론가·연출가. 서울 출신. 일본 다마가와(王川) 중학교 졸업, 경희대 대학원 무용학과 졸업. 최승희 무용연구소 무대감독을 비롯, 한국민속예술단 무대감독·연출을 맡아 프랑스·이탈리아·그리스·터키 등을 순방하는 등 오랜 연출경력을 가진 한국무용계의 중견 지도자였다.논문으로 <세계무용사개설> <무용창작개설> <전통무용의 해외 진출문제> 등이 있다. 1968년 국무총리 표창, 76년에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주요 연출 작품으로 <춘광> <월야수신> <반야월성곡> <우리 마을 이야기> 등이 있다.

김백봉[편집]

金白峯(1922- )

한국무용가. 평양 출신. 본명 김충실. 일본 쇼잉(松蔭)고등여학교 졸업. 1943년에 일본 소재 '최승희 무용연구소'에서 사사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월남하여 최승희의 고전무용을 재현시켰다. 수도여자 사범대학·서라벌 예술대학·한양대학 등의 무용강사를 거쳐 경희대학교 무용학과 과장에 피임되었다. 1953년 '김백봉 예술무용연구소'를 설립, 1954년에 제1회 작품 발표회(시공관)를 가진 이래 59년까지 5차례의 무용발표회를 가녔다. 1959년 이후에는 동남아·일본·멕시코 등지에서 한국의 민속무용을 공연, 문화사절로서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1963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68년 국무총리 표창 등을 수상하는 한편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국립무용단 부단장, 예그린악단 운영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주요작품으로는 무용극 <우리 마을의 이야기> <효심> 등이 있다.

김문숙[편집]

金文淑(1928- )

한국무용가. 서울 출신. 배화여고를 거쳐 중앙대학 교육학부 수료. 함귀봉에게 사사했다. 1950년 한국무용단에 입단함으로써 무용계에 데뷔. 1951년 부산여자상업중학교 무용교사, 58년 제1회 김문숙 무용신작 발표회를 가진 후에 홍콩·미국·일본·프랑스·로마 등지를 순회하면서 한국의 문화사절로서 활약을 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대궐> <기원> <서낭당> 등이 있다.

조용자[편집]

趙勇子(1921- )

한국무용가. 서울 출신. 일본 도쿄음악학교 졸업. 도쿄에서 현대무용을 연구하고 15회의 작품발표회를 가졌다. 도쿄에서 '조용자 무용연구소'를 주재하고 있다.

정인방[편집]

鄭寅芳(1926- )

한국무용가. 서울 출신. 니혼고등공업학교 졸업. 1940년대 민족문화의 공통적인 수난기에 데뷔했다. '정인방 무용연구소'를 주재하고 두 차례의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국립무용단 단원으로 활약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 등이 있다.

전황[편집]

全黃(1927- )

한국무용가. 서울 출신. 함남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에 최승희 무용연구소에서 사사했다. 1963년 서울민속가무단·예그린악단 무용부장, 64년 국악협회 무용분과 위원장, 64년 국악협회 이사, 70년 한국민속무용단 이사 겸 지도위원 등을 역임했다. 1964년 전황 민속무용발표회를 개최(국립극장)했고 그 후 일본·멕시코·동남아·유럽 일대를 순회공연했다. 1969년·70년·71년·72년에 각각 문공부장관 표창을 받았으며, 주요작품으로는 <장고춤> <부채춤> <농악> 등이 있다.

김진걸[편집]

金振傑(1926- )

한국무용가. 서울 출신. 본명 김형표(金亨杓). 국민대학 경제과 수료 후 장추화에게 사사했다. 1954년에 '김진걸 무용연구소'를 창설하고 55년부터 60년까지 10회의 문하생 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57년과 58년 2차례에 걸쳐 창작무용발표회를 가졌다. 한국무용협회 이사, 예총이사, 한국무용협회 한국무용 분과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주요작품으로는 <깨어진 청자기> <배신> 등이 있다.

박금슬[편집]

朴琴瑟(1925- ) 한국무용가. 경기도(京畿道) 출신. 일본 시미즈(淸水) 가정고등여학교 졸업. 1941년 일본 이시이바쿠(石井漢) 무용연구소에 입소. 1943년부터 강원도 백담사(百潭寺) 오세암에서 한국무용 수업. 1946년에 박금슬무용연구소를 개설, 1954년과 68년에 신작무용발표회를 가졌다. 1969년에 동남아시아 순회공연을 가졌으며 1972년 태국 방콕에 한국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한국무용을 소개하는 데 전력했다. 1976년에는 주 태국 한국대사관 공보관 주최 '한국의 밤'에서 한국무용을 소개했다. 주요작품으로는 <산조(酸調)> <승무> 등이 있다.

이매방[편집]

李梅芳(1927- ) 한국무용가. 서울 출신. 본명 이규태(李奎泰). 전라남도 목포공업학교 졸업. 이대조·이창희(李昌熙) 등에게 사사. 1951년 부산에 무용연구소 개설. 1953년에 부산에서, 1954년 광주에서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1959년 서울 원각사에서 3회 공연, 67년 국립극장에서 4회 발표회를 가졌다. 전남 광주 국악원, 부산대학교 전통예술연구회 강사 역임. 2회에 걸쳐 일본 순회공연을 가졌고, 1976년에 문예진흥원 지원으로 창작무용발표회를 가졌다. 1977년 <삼현승무(三絃僧舞)> <보렴승무(菩念僧舞)>로 이매방 승무전장발표회를 가졌다.

최희선[편집]

崔喜仙(1929- )

한국무용가. 경북 출신. 청구대학 국문과 졸업. 장추하에게 사사. 1954년 대구에 최희선 무용연구소 설립. 1958년 대구, 1959년 서울, 1961년 대구, 1962년 대구에서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1960년에는 프랑스 파리 국제민속예술제, 1972년 뮌헨올림픽 파견 민속예술단원으로 참가했다. 무용협회 경북지부장, 예그린악단 가무부차장, 한국무용협회 감사 등을 역임했다. 주요작품으로 <정이 흐르네> <대춘향전> <시집가는 날> <무당춤> 등 다수가 있다.

최현[편집]

崔贅(1929- ) 한국무용가. 부산(釜山)출신. 본명 최윤찬(崔潤燦). 서울사대 체육과 졸업. 김해랑에게 사사하고, 김해랑 무용발표회 공연에 30여회 출연. 경남지방의 민속 및 기방춤을 연구하였으며, 1955년 최현무용연구소를 설립. 서울대 음악대, 서울예고, 이화여대, 숙명여대 강사를 역임했다. 무용계 공직으로 1964년 이래 무용협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국립무용단 지도위원으로 재직, 국립무용단 공연에 다수 출연했다. 1971년 정부 파견 유럽 10개국 순회공연, 1975년 일본 규슈 지방 순회공연을 가졌다. 1976년 최현무용단 창단. 주요작품으로 <춤과 멋> <독서> <정한(情恨)> <대춘(待春)> <꿈>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 등이 있다.

신순심[편집]

申順心(1938- )

한국무용가. 서울 출신. 이화여대 체육과(무용전공)졸업. 1955년 송범에게 사사하고 1962년 상명여고 무용교사로 부임하는 한편, 동아일보 주최 신인 무용가로 당선, 금메달을 획득했다. 1963년 '선화어린이 무용단'을 창설, 1965년 미국·일본 등지를 순회 공연했고, 1967년 '리틀 엔젤스' 단장으로 부임, 68년 문화사절로서의 공적이 인정되어 국무총리 표창과 1971년엔 국민훈장 석류장(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홍금산[편집]

洪錦山(1949- )

한국무용가. 경기 안성 출신. 명지대 대학원 졸업. 안양 영화예술학교 강사. 1974년 국립무용단 입단. 공연작품으로는 '왕자호동' '심청' 등이 있고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공연, 1977년 유럽 11개국 순회공연.

정명숙[편집]

丁明淑(1935- ) 한국무용가. 경상북도 출신. 건국대학교 영문과 졸업. 김진걸(金振傑)에게 사사. 1969년 무용협회 주최 신인무용발표회로 데뷔. 국립무용단원으로 입단, 개성미 있는 춤을 보여 주었다. 1970년 아리아무용학원을 개설. 무용동인회 '무인회(舞人會)'를 조직. 수차의 해외공연을 가졌으며, 깔끔한 춤사위가 특징이다. 1977년 창작무용발표회를 가졌다. 주요작품 <밤바다> <심의 유동> <화첩(花蝶)> <인어> <가무보살> 등이 있다.

김옥진[편집]

金玉振(1936- )

한국무용가. 서울 출신. 이화여자대학 체육과, 동 대학원 졸업. 김보남에게 사사. 이화여대·서울대 음대·덕성여대 강사 역임. 현재 한양대 무용과장으로 재직. 대한무용학회 이사, 대한체육회 사회체육위원 역임. 주요논문으로 <무용창작에 관한 연구> <한국무용의 기본방향에 관한 연구> <한국무용교육의 문제점> 등이 있고 주요작품으로 <강강수월래> <흑과 백> <어디로 갈까> <이기고 돌아오라> <3> <공수래공수거> 등이 있다.

김세일라[편집]

金世一羅(1937- )

한국무용가. 서울 출신.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주리·김진걸에게 사사. 명신여상고·계성여고·은광중·고등교사 역임. 3회에 걸쳐 문하생 발표회를 가졌다. 수차의 일본 공연을 가졌으며, 1968년 김세일라무용학원을 설립. 한국무용협회 감사. 1977년 신작무용발표회를 가졌다. 주요작품으로 <선과 악> <홍채> <길> <난의 향기> <재활> <검랑> <신고> 등이 있다.

한보성[편집]

韓普成(1935-1989)

한국무용가. 경상북도 출신. 서라벌예대 무용과 졸업. 박금슬에게 사사. 1965년 제4회 문공부 주최 신인예술상대회에서 특상. 1966년 한보성무용학원 설립. 1973년에 일본 순회공연을 가졌다. 한국 무용협회 감사. 주요작품 <바라춤> <사친무> 등.

송수남[편집]

宋壽男(1938- )

한국무용가. 서울 출신. 서울사대 체육과 졸업. 김보남에게 사사. 전남여고·창덕여고·무학여고 교사, 한양대 강사를 거쳐 숙명여대 체육학과 교수로 재직중. 1971년 송수남무용학원 설립.

1974년 국립무용단 단원으로서 일본 10개도시 순회공연을 가졌고 유럽 8개국 무용계를 시찰했다. 한국무용협회 이사·감사, 대한무용학회 감사 역임. 1975년 창작무용발표회, 같은 해에 일본 오키나와 해양박람회에서 무용공연을 가졌다. 저서 <교육무용> <안전교육> 등이 있으며, 주요작품으로 <무영탑> <장고춤> <잔영(殘影)> <망부석> 등이 있다.

김매자[편집]

金梅子(1943- )

한국무용가. 강원도 고성(高城) 출신. 이화여대 사대 체육과. 경희대 대학원 졸업. 서울교육대학·상명여사대·이화여대 강사 역임. 현재 중앙대명예교수. 1969년 이래 5회의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저서로 <한국무용사>가 있고, 주요작품으로 <침향무> <용왕굿> <여운> <강·상·무·진> <헌선도> <비단결> 등이 있다.

임미자[편집]

林美子(1945- )

한국무용가. 경기도 안성(安城) 출신. 김진걸에게 사사. 서라벌예대 체육무용과 졸업. 동아일보 주최 제3회 신인 무용콩쿠르에서 금상 수상. 1966년 임미자무용학원을 설립하고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국립 무용단원으로 여러 차례 해외공연을 가졌다. TBC-TV 고전무용 안무자 역임. 주요 작품으로 <무녀무> <치맛자락> <승무> <살풀이> 등 다수가 있다.

문일지[편집]

文一枝(1945- )

한국무용가. 서울 출신. 서울대 음악대학 국악과 졸업. 김진걸·김백봉에게 사사. 서울예고·서울음악대·서울예술전문학교 강사를 역임했다. 일본 오사카 음악대학의 초청 연주를 비롯, 1970년 'EXPO '70' 한국의 날 공연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1975년 문공부 주최 '3·1절 기념 공연' '8·15 기념공연'의 안무 및 주연, 국립무용단 정기공연 <호동왕자>에서 낙랑공주역을 맡는 등 크게 활약했다. 1976년, 영국의 '오리엔탈 뮤직 페스티발'에 참가하고 유럽공연을 가졌다. 이때 영국의 유력신문으로부터 "우아한 문일지의 춤사위는 세계적 일품"이란 격찬을 받았다.

주요작품으로 <궁중정재(宮中呈才)> <춘앵전>, 불교무용인 <식당작법> <일무(佾舞)> 등이 있다. 문일지무용학원을 설립했으며, 한국무용아카데미 고문으로 활약하고 있다.

정승희[편집]

鄭承姬(1945- )

한국무용가. 서울 출신. 이화여자대학 무용학과, 동 대학원 졸업. 김백봉에게 사사했다. 상명여사대 조교수로 재직. 대한무용학회 감사 역임. 1974년에 창작무용 발표회를 가졌다. 주요 작품으로 <심청전> <사자의 고향> <고독의 심연> <광란의 제단> 등이 있다. 논문으로 <무용의 독자성에 관한 소고> <무대예술로서의 무용> 등이 있다.

이애주[편집]

李愛珠(1947- )

한국무용가. 서울 출신. 서울대 사대 체육학과, 동 대학원 졸업. 중요무형문화재 <승무> <학무> 전수자 등록. 1971년 서울신문 문화대상 무용부문을 수상했다. 1972년 뮌헨올림픽 파견 민속무용단으로 참가. 1974년 중요무형문화재 <승무> <학무> 예능 보유자, 한영숙 전수공연인 '이애주 춤판' 발표회를 가졌다.

주요 논문으로 <춤사위 어휘고> 등이 있다. 서울대·청주여사대 강사 역임. 현재 서울사대 교수. 1972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정양자[편집]

鄭洋子(1945- )

한국무용가. 경상남도 마산 출신. 숙명여대 무용과 졸업. 1970년 전국 신인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로 입상. 1972년 뮌헨올림픽, 유럽·중동·아프리카·아시아 23개국 순방 친선 공연에 참가하고, 1973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1976년 마산에 정양자무용학원 설립. 1977년 창작무용 발표회를 가졌다.

한국의 외국무용가[편집]

조택원[편집]

趙澤元(1907-1976)

현대무용가. 서울 출신. 서울 휘문고보, 서울 보성전문학교 법과 수학. 1927년 일본 '이시이바쿠 무용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32년 동 연구소 제1기생으로 졸업한 후에 1938년 프랑스에서 수업했으며, 귀국 후 일본 히비야 공회당에서 공연, 여명기 신무용의 선구자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1940년 역시 히비야 공회당에서 신작 무용시(詩) <학>을 발표했고, 1941년 귀국하여 무용시 <부여 회상무>를 발표(서울 부민관)했다.

1953년에 프랑스·벨기에·스웨덴·핀란드 유럽 각지를 3개월 간 공연, 한국인으론 처음 모던발레를 해외에 과시. 이후 58년까지 일본 도쿄에 체류하면서 한국 교포들에게 한국무용을 가르쳤다. 1960년 귀국 후 문총 최고위원 및 무용협회 회장에 피선. 61년 한국무용협회 고문, 62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65년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64년 제1회 무용상, 66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주요작품으로는 <학> <만종> <자유에 춤춘다> <승무의 인상> <소녀는 탄식한다> 등이 있다.

배구자[편집]

裵龜子(1907- ? )

현대무용가. 서울 출신. 1916년 일본인 마술단 덴쇼(天勝一座)의 '레뷰 걸'로 대성. 1929년 '배구자 무용연구소'를 개설함으로써 한국 최초로 신무용의 기치를 들었다.

1929년 제1회 공연(중앙관)은 종래의 곡예적인 춤에서의 탈피를 시도, 신무용과의 촉매적 작용을 한 데에 큰 의의를 들 수 있다. 이때의 작품은 <금은(金銀)의 황녀(皇女)> <아리랑> 등으로 템포·표정의 변화·무대장치 등이 구비되어 최소한 곡예적인 춤에서는 일단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박외선[편집]

朴外仙(1915- )

현대무용가. 서울 출신. 도쿄문화학원 불문학부 졸업. 1935년 도쿄 청년회관에서 제1회 창작무용발표회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때의 작품은 약소민족의 비애를 춤으로 승화시킨 <학대받는 자에 영광 있으라>이며, 1936년에 귀국하여 첫 공연 때 <사랑의 꿈> 이후 일본·대만 등지를 순회 공연하고 이화여대 무용과장을 역임. 1962년 이후 2차에 걸쳐 도미, 수학한 바 있다.

김민자[편집]

金敏子(1916- )

발레 전문. 서울 출신. 1940년대 민족문화의 침체기에 데뷔. 일본에서 엘리아나 파블로바 여사에게서 사사했다. 1939년의 귀국공연을 비롯하여 국내와 만주 등지에서 수차에 걸쳐 공연했다.

진수방[편집]

陳壽芳(1926- )

발레 전문. 서울 출신. 한성준에게 사사한 후 도쿄의 가와야마(河山鈴子) 발레 연구소에서 수업했다. 다시 도쿄의 비타리 오신스에게 사사했으며 1945년 이후 10여 회에 걸친 신작발표를 가진 후에 1962년 도미했다.

임성남[편집]

林聖男(1929-2002)

발레 전문. 서울 출신. 전주 사범학교 졸업. 니혼 음악학교를 거쳐 오랫동안 일본에서 무용생활을 하다 1951년 '도쿄청년발레단'을 창립, <백조의 호수>에 왕자역으로 주연했다. 1956년도에 귀국, '임성남 발레단'을 창단하여 12회에 걸친 개인 발표회를 개최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국립무용단 단장직을 맡은 후 국립무용단 정기 공연 제6회를 공연한 바 있다.

<살짜기 옵서예>에서 안무의 연출을 지도하여 절찬을 받았다. 1968년 미 국무성 초청으로 도미, 2년동안 모던발레를 연구했고, 그 후 서울 예술고등학교 무용과 과장, 무용협회 부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작품으로는 <예불(禮佛)> <오줌싸개의 향연> 등이 있다.

주리[편집]

朱莉(1927- )

에스파냐 민속무용가. 평북 출신. 본명 주선애. 경기대학 교육무용과에 수학. 일본 도쿄 마스다(益田隆)발레 연구소. 정지수(鄭志樹) 발레 연구소에서 사사, 56년 제1회 작품 발표회(시공관)를 개최했으며, 1957년 '주리 발레연구소'를 개설했다.

한국발레단 지도위원, 한국무용협회 이사, 한국무용협회 외국무용 분과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67년에 에스파냐 '황실무용학교'에 유학하고 69년엔 미국 '재즈발레 스튜디오'에서 수학했다. 본격적인 플라멩코를 한국에 옮겨 놓은 사람이다. 주요작품으로는 <푸른 도포> <무희 타이스> <코리안 판타지> <카르멘> 등이 있다.

조광[편집]

趙光(1929- )

현대무용가. 서울 출신. 장추화에게 사사한 후에 '조광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3회에 걸쳐 발표회를 가진 바 있다. 1965년에 이란으로 갔다.

이인범[편집]

李仁凡(1929- )

발레 전문. 서울 출신. 한동인(韓東人)에게 사사한 후 두 차례의 발표회를 가졌다. 국립무용단 단원으로 활약하고, '이인범 발레연구소'를 주재했다.

정막[편집]

鄭漠(1928- )

현대무용가. 전남 출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졸업. '조선교육무용연구소'에서 사사. 1954년 '정막 현대무용연구소'를 개설했다. 1954년 정막무용발표회를 대구국립극장에서 가졌다. 1961년에 '대구 발레아카데미'를 설립·개소(開所). 1970년에 <산하억백년(山河億百年)>으로 문화공보부 창작지원금(創作支援金)을 지급 받았다.

육완순[편집]

陸完順(1933- ) 현대무용 전공. 전북 전주 출신. 이화여대 체육과(무용전공), 동 대학원(현대무용 전공)을 졸업. 1963년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 대학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 마더 그레이엄 무용학교에서 현대무용을 사사했다. 1962년 제1회 육완순 귀국무용발표회(국립극장)에서 <흑인영가(黑人靈歌)> <공포> <마음의 파도> 등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무용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 후 1972년까지 미국과 서울에서 7회의 무용발표회를 개최했고, 또한 무용관계 논문을 집필하여 교육무용의 이론화에 공적을 남겼다. 이화여대 부속고등학교 교사, 경희대학교 무용과 과장, 이화여대 무용과 과장 등을 역임. 주요작품으로는 <부활> <황무지> <단군신화> 등이 있다.

홍정희[편집]

洪禎禧(1935-1997)

발레 전문. 제주도 출신. 이화여자대학교 체육과(무용전공), 동 대학원을 졸업. 1969년 제1회 홍정희 무용발표회를 가짐으로써 본격적인 활약을 시작하였다. 고전 발레를 우리나라 무용에 알맞게 도입시키는 창작법을 연구했다. 주요작품은 <조용한 대답> <코리아 환상곡> 등이 있다.

파조[편집]

波鳥(1926- )

교육무용가. 서울 출신. 본명 김호순. 일본 도쿄체육대학, 일본 교육무용 전문학원을 졸업. 1946년 귀국하여 전주 공립사범학교,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서울예술고등학교·서라벌 예술대학·수도여자 사범대학 등에서 교사 역임. 다년 간의 교단생활을 통해서 교육무용의 방법론을 체계화시켰으며, 1962년에는 한국교육무용 총연합회장, 65년에 한국중앙교육 무용연수원장 등을 지낸 바도 있다. 서울에 '파조 새 무용학원'을 주재하였으며 주요작품으로 <아름다운 한국> <팔도강산> 등이 있다.

정병호[편집]

鄭昞浩(1927- )

교육무용가. 전남 출신. 중앙대학교 대학원 졸업. 조선교육무용연구소에서 수업하고 무용 생활을 시작했다. 중앙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는 한편 <상기> <정이 흐르네> <산하억만년>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저서로는 <세계의 민속무용> <창작무용> 등이 있다.

김정욱[편집]

金貞郁(1925- )

외국무용가, 발레 전공. 무용이론가·교육가. 함북 출신. 니혼여자체육대학 졸업. 수도여사대 무용과장 역임. 1961년 한일친선 문화교류 일본 공연에 참가했다. 1967년 무용극 <신데렐라>를 발표, 1973년에는 발레 전막극 <호두까기 인형> 한국 초연을 안무했다. 1973년 <춘향전>, 74년 <나무꾼과 선녀>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이운철[편집]

李雲澈(1937- )

발레 전공. 강원도 출신. 김진걸·임성남에게 사사하였으며, 서라벌예대 무용과를 졸업하였다. 제2회 동아일보 주최 신인무용콩쿠르로 데뷔. 국립무용단·한국발레단 제1무용수로 활약하고 있다. 3회의 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한국무용협회 외국무용분과위원장, 인천교육대 부교수. 주요작품으로 <심판> <춘희> <원효대사> <무영탑> <왕자호동> 등이 있다.

김학자[편집]

金學子(1939- )

발레 전공.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와 경희대 대학원 무용과를 졸업하였다. 김천홍·임성남에게 사사. 1962년 국립발레단에 입단. 한양대, 서라벌예대, 상명여사대 강사 역임. 현재 서울예술전문학교 교수. 임성남 3회 발표회에서 주역으로 출연한 이래 <죽음의 사자> <마술사> <메스팔레스> 등 많은 작품에서 주역을 맡았다. 1975년, 이운철·김학자 창작발레 공연을 가졌다. 주요 작품으로 뮤지컬 <이 화창한 아침에> <영감> 등이 있다.

김혜식[편집]

金惠植(1942- )

발레 전문. 서울 출신. 이화여대 체육과(무용전공)을 졸업하고 동아일보 주최 신인 무용발표회에 입상함으로써 무용계에 데뷔. 임성남에게 사사했고, 5·16 신인예술상, 동아일보 주최 신인무용 콩쿠르에서 금상을 수상했고, 서울예술고등학교 무용교사를 거쳐 1965년 로열발레스쿨에서 연구생활을 한 후에 로열 발레단에 입단했다.

김절자[편집]

金節子(1940- )

발레 전문. 서울 출신. 이화여대 체육과를 졸업하고, 임성남에게 사사했다. 1964년 도미하여 마더 그레이엄에게 사사.

강석[편집]

姜夕(1936-1972)

발레 전문. 경기도 출신. 고려대학교 졸업. 1968년에 도미 유학. 1971년 귀국한 뒤에 KBS와 예그린의 안무자 역임. 1971년 예그린악단의 <종이여 울려라> 중 <종의 정(精)>에서 호연했다.

허경자[편집]

許京子(1942- )

현대무용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에서 수학했다. 송범·김백봉 등에 사사하여 발레와 한국무용을 수업하고, 1964년 도미, 마더 그레이엄 무용학교에서 현대무용의 실기 및 창작법을 연구했다.

<李 丙 姙>

한국의 무용평론가[편집]

조동화[편집]

趙東華(1922- )

함북 회령 출신. 무용평론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졸업. 1950년대에 김경옥(金京鈺)과 함께 무용평론을 시도하여 오늘에 이른 무용계의 발전을 뒷받침한 공로자다. 경기대학·건국대학 등의 교수를 역임하는 한편 <꽃과 사랑> <세계의 꽃과 전설> 등의 저서가 있다. 1960년 이후 서울특별시 문화위원을 역임했고, 1962년 서울특별시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국립극장 운영위원 역임.

김경옥[편집]

金京鈺(1924- )

평북 오산 출신. 고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한귀봉(韓貴奉)에게 사사했다. 예그린 단장, 문공부 공보국장, 청주대·경기대 교수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여명 80년>과 시집 등이 있으며, 한국 출판 문화상을 수상했다. 1950년부터 조동화(趙東華)와 함께 무용평(舞踊評)에 투신하고 있다.

이병임[편집]

李丙姙(1936- )

무용평론가. 서울 출신. 이화여대 체육과 졸업. 1968년에 무용평론에 데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여류평론가로 각 일간신문과 전문지에 발표해 왔다. 국립국악원에서 궁중무용을 김천흥에게 사사, 무대 활동과 창작 활동으로 직접 무용을 접한 평론가다. 인천여고, 풍문여고 교사, 한양대 교수와 이화여대 대학원, 중앙대 강사 역임. 74년 정부 파견으로 일본 문화계를 시찰한 바 있고 한국에서 최초인 평론가의 개인 자격으로 75년 미국국립무용단·AAHPER 공동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뒤 영국과 불란서, 에스파냐를 비롯한 유럽 무용계를 시찰, 그곳 평론가들과 평론계를 세밀히 관찰했다. 국제안무가협회 미국지부로부터 초청되었으며, 우리나라 무용계를 위해 이바지한 바가 크다. 대한무용학회 창설자이자 상임이사·무용용어통일위원을 역임했다. <한국속의 외국무용> <예술속의 휴머니즘> 등의 학술발표회를 남기고 있다.

<李 丙 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