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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국 제 정 치/세계각국의 정치사정/일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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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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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政治

일본의 정치체제는 역사적으로 세 가지 형태의 독특하면서도 연속성을 지닌 통치구조를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다. 즉 1600년부터 1867년까지의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체제, 1868년부터 1945년의 패전 당시까지의 전체적 근대체제 그리고 1945년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의회중심의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로 대별할 수가 있을 것이다.

12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무가(武家) 사이의 패권싸움이 일본을 전국시대(戰國時代)로 몰아넣게 되면서 패자(覇者)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실질적인 통치와 상징적이고 형식적인 위치로 전락한 천황(天皇) 중심의 이중적인 통치구조가 나타나게 되었다. 패자를 장군이라 했고 그의 통치기구를 바쿠후(幕府)로 칭하였다. 바쿠후체제는 1600년에 도쿠가와(德川) 씨족이 집권하면서 전국을 통치하게 됨으로써 근 300년간에 걸쳐 안정된 중앙집권적 봉건체제(封建體制)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평온과 안정 속에서 유지되어 온 바쿠후 정부는 내정상 극심한 재정난에 빠졌고, 봉건체제를 뒤흔들어 놓은 상업과 도시화를 중심으로 한 사회변화를 통제하지 못함으로써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또 밖으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이 밀어닥침으로써 일대 혼란에 처하게 되었다. 체제붕괴에서 올 예상할 수 없는 혼돈과 외세에 의한 지배 가능성을 우려한 서부지방의 4번(四藩:鹿島·長州·肥前·土佐)의 젊은 하급무사(下級武士)들이 영주(領主)의 호응과 천황 측근의 공경(公卿)들의 지원을 받아 바쿠후체제를 뒤집어엎은 것이 곧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다. 정치변화이긴 하지만 그것이 혁명이기보다는 기존체제에 큰 변동 없이 정치권력을 장군으로부터 천황으로 이관시키는 형태를 취한 것이 메이지유신의 특색이다. 이러한 특색이 그후의 메이지체제의 성격형성에 크게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1868년 이후 약 20여년의 혼란과 과도기를 거쳐 흠정헌법(欽定憲法)의 제정과 내각제도 채택의 과정을 통해 형태를 갖추게 된 메이지체제는 천황에게 절대적인 주권을 부여한 채 그를 둘러싼 소수의 과두적(寡頭的)인 지배세력에 의해서 운영된 것이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내걸고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산업화를 달성하였고, 근대화된 군사력을 갖추게 된 일본은 경제면에선 서구사회를 능가하는 근대화 과정을 겪었으나 정치면에서는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했고, 뿐만 아니라 1920∼30년대 전세계를 휩쓴 공황기 속에서 허약한 기반 위에서 운영되던 정당정치의 모순이 심화됨으로써 군국주의(軍國主義) 대두의 길을 열어놓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1945년에 패전의 쓰라린 경험을 맛보게 된 일본은 미국의 점령하에서 비군사회(非軍事化)·민주화(民主化)라는 미국의 2대 점령정책방향을 따라 새로운 정치변화 과정을 겪게 되었고, 그 결과 천황제를 상징적이고 형식적인 기능으로 축소시키고,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칙에 따라 입법부의 권한을 대폭 강화시키는 작업을 진행시켰다. 현대의 일본 정치체제는 명실공히 의회내각책임제로 성숙해 가는 단계에 있으며, 앞으로도 예상할 수 없는 돌변이나 일본 사회를 크게 위협할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그 체제가 계속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사회당(社會黨)이 집권하는 경우에도 본질적 제도의 테두리는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며, 의회중심의 정치체제도 발전되어 갈 것이 예상된다.

일본의 정치과정을 움직이는 주세력은 정당이나 압력단체로서의 노동조합·경제단체 등이며, 유권층의 정치참여도 보다 높은 수준으로 향상되어 가고 있다. 물론 과거의 잔재물이 완전히 불식되었다고는 볼 수 없으나 전전(戰前)에 비해 볼 때 현대의 일본 정치과정이 다수의 집단이나 개인의 참여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소수의 과두체제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관료 중심의 권위주의적인 통치체제에서는 탈피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일본의 정치체제가 보다 민주화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의회의 권위와 권력이 상승하고 있으며, 행정부와 입법부의 세력 균형이 이루어져 가고 있고, 따라서 의회를 중심으로 정당간에 활발한 경합이 나타나고 있다. 여당인 자민당(自民黨)과 야당인 사회당(社會黨)의 세력이 불균형하지만 또 하나의 야당인 공명당(公明黨)의 출현으로 여·야의 세력분배는 보다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 특히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고 있는 일본에서는 도시(京都·東京·大阪)에서 야당출신의 지사·시장이 당선됨으로써 진보세력의 등장이 현저히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주화를 가능케 한 여러 가지 요소 중에서도 전후 일본이 이룩한 눈부신 경제성장을 빼놓을 수가 없다.

경제발전은 새로 도입 또는 강화된 의회제도의 운영에 있어서나 전후의 심각한 사회적 혼란을 극복해가는 과도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안정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경제발전과 냉전(冷戰) 속에서도 유리한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격리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 정치체제가 양극화(兩極化)에서 다극화(多極化) 시대로 접어들게 되고 긴장완화의 무드가 조성됨에 따라 일본이 4대강국의 하나로 재등장하게 되었으며, 세계정치에 있어서 실질적인 주역을 맡게 되었다. 일본은 또한 중국과 국교정상화를 실현하였고, 구소련(러시아)과도 정상화하여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전전(戰前)과 달리 민주체제를 갖추고 세계 3위의 국부(國富)를 지닌 일본이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고 자신을 얻어 책임성 있는 국제행동을 취할 수 있기를 세계는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韓 培 浩>

일본의 의회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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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議會政治

일본의 의회정치는 국민주권에 기초를 둔 의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기구 밑에서 행해지고 있다. 정치기구가 헌법상으로 권력분립(權力分立)의 원칙에 따라 조직되어 있지만 국회는 국가정치의 중심으로서 최고기관의 지위에 있으며 국가권력을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의회정치를 보장하기 위해서 통치기구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1) 행정권은 의원내각제(議院內閣制)라는 제도로 존재하며, 내각은 항상 의회의 의사에 따라서만이 존속할 수 있는 것으로, 내각이 의회의 신임을 못 받는 경우 의회를 해산하든가 내각이 사직하든가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총리대신(總理大臣)은 의회에서 지명되고 내각구성원의 과반수는 국회의원이어야 한다.

(2) 의회는 재판권에 대하여 예컨대 탄핵재판소를 설치하고, 파면의 소추(訴追)를 받은 재판관을 재판하고, 이유가 있을 때에는 파면의 파견을 내릴 수 있다는 등의 방법으로 재판의 통제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의회는 주권적 기관이라는 데 근거하여 국가최고기관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의회의 조직은 중의원(衆議院)과 참의원(參議院)의 양원제(兩院制)로 되어 있다.

중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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衆議院

일본의 국회는 양원제인데, 그 하나가 중의원이다. 중의원은 국민이 직접 선거한 4년 임기의 의원으로 구성되고 의원 정수(定數)는 512명이다. 중의원은 참의원과 달리 임기 전에 해산될 수 있고, 법률·예산·조약의 승인과 내각총리의 지명에서 참의원보다 우월한 권한을 갖는다.

참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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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議院

중의원(衆議院)과 나란히 국회를 구성하는 1원(一院). 참의원도 역시 국민이 직접 선거하는데 임기는 6년이고 임기 전에는 해산되지 않으며 정원은 252명이다. 3년마다 절반씩을 새로 뽑으며 참의원 252명 가운데 100명은 전국적으로 선출하고 나머지 152명은 47개 현별로 뽑는다. 참의원은 중의원에서 인정되지 않는 긴급집회권의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중의원보다 권한이 낮다. 참의원은 '양식의 부(府)'로서 중의원의 의사결정을 견제하고 신중하게 하는 역할에 그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의 의회정치는 중의원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다.

2차대전 후 일본의 의회정치는 미·일안보체제란 구조속에서 1947년 사회당(社會黨)의 가타야마(片山) 내각을 제외하고는 보수당인 자민당(自民黨)의 우세와 집권으로 일관되면서 의회정치는 틀이 잡혔다고 볼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많은 곤란한 문제에 부닥치고 있다. 예를 들면 보수와 혁신의 2대정당제에 의해서 국민의 의사나 이익이 비례적으로 의회에 반영되는 것이 어렵게 되고, 2대정당 사이에서 이익의 충돌이 자주 일어나, 의회민주주의의 룰이라 할 수 있는 의회운영의 제 원칙이 다수라는 힘에 짓밟히고 변칙적으로 안건이 처리되는 소위 '난투국회(亂鬪國會)'라는 사태도 잦다. 또한 의회정치의 근본원칙인 의회의 민주적 운영도 침해되는 일이 많아서 특정 정당과 그 정당이 대표하는 사회층의 이익이 우선되곤 한다.

일본의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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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政黨

제2차대전 후의 일본정치에 있어서는 정당정치가 전면적으로 전개되고 있고 정당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차대전 직후 일본에서는 곧 정당의 결성이 진척되어 1945년 11월 중에는 일본사회당(日本社會黨)·일본자유당(日本自由黨)·일본진보당(日本進步黨)이 결성되었다. 이들 정당은 모두 전전(戰前)의 당파계열 및 전쟁중의 인적인 결합관계를 기반으로 한 것이고, 전후의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이념을 가지고 새롭게 태어난 정당들은 아니었다. 즉 무산정당(無産政黨)을 규합한 것이 사회당이고, 구정우회계(舊政友會系)가 자유당이고, 그에 대항하는 구민정당계(舊民政黨系)가 진보당이었다. 그리하여 미군의 점령체제하에서는 정당의 난립과 이합집산이 격심하였다. 이것이 요시다(吉田)정부와 미점령군과의 안정관계 시기를 거쳐 차차 정리되면서 안보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안보체제하에서 1950년 강화문제를 둘러싸고 분열되었던 사회당은 통일되었고(1955년 10월), 보수정당인 자유당과 민주당은 자민당(自民黨)으로서 통합했다(1955년 11월). 사회당의 통일과 보수당의 합동에 의하여 이후 일본의 2대정당제도가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67년의 선거 및 1968년의 참의원(參議院)선거에서부터 자민당의 지반이 흔들리는 경향이 나타나고, 사회당의 쇠퇴경향도 나타나기 시작하여 공명당(公明黨) 및 민사당(民社黨)·공산당(共産黨)의 진출이 현저하게 되었다. 즉 2대정당제가 붕괴되고 다당제(多黨制) 시대가 개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원래 보수당의 합동과 사회당의 통일에 의해서 발족되었던 2대정당제에서는 자민당은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고 사회당은 3분의 1의 벽을 깨지 못하였다. 다당화시대에 있어서도 자민당이 과반수 의석을 획득하고 있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20명 이상의 의석을 보유함으로써 의안발의권(議案發議權)을 가질 수 있는 권한을 자민당과 사회당 외에 민사당·공명당도 보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전까지와는 다른 의회운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런 다당화 현상은 고도성장으로 인한 산업화 내지 도시화의 경향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이나 궁극적으로는 역시 서구 자본주의국과 마찬가지로 보수 대 혁신의 정치이념에 따라 각 당끼리 제휴와 대결을 번갈아 하고 있다. 70년대 이후 일본의 정당정치는 이탈리아나 프랑스처럼 한때 혁신계의 진출이 급격히 늘어나기도 했으나 보수 집권세력에 위협을 줄 정도는 안 되고 있다.

자유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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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民主黨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정우회(政友會) 및 민정당(民政黨) 계열의 보수세력이 패전 후 자유당(自由黨)과 일본민주당(民主黨)으로 분리, 창당되었다가 1955년 합당된 보수정당이다.

전후 일본의 정당세력의 아성으로서 당조직이 보스를 중심으로 한 파벌 연합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파벌정치·금권(金權)정치의 대명사로도 불린다. 진보계열과 좌파(左派)의 세력신장과 록히드 사건·리쿠르트 스캔들 등 당색(黨色)에 염증을 느낀 국민의 지지도 감소로 1980년대에 접어들어 당세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1993년 7월 18일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해 최초로 정권을 내놓게 되었다. 당시 자민당과 공산당을 제외한 7개 정당이 연합하여 30년만에 처음으로 정권을 교체했다.

그러나 1996년 자민당은 군소정당과 연합하여 정권을 다시 장악했다.

일본사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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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社會黨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자생해온 프롤레타리아트 정당 제파(諸派)가 연합하여 1945년 창당, 1947년 총선에서 제1당이 되어 연립내각을 구성, 일시 집권하였다. 일본 신헌법을 유지하면서 평화·민주적인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실현을 표방하고 있으며 노동조합 조직을 세력기반으로 한다. 1970년대에 당내 좌우파 노선대립을 겪기도 했으며, 과거 친북한정책을 고수해 오다가 1988년 이후 2개의 한국정책으로 궤도수정을 시도하고 있다.

공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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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明黨

불교의 일련정종(日蓮正宗)에 연원을 둔 종교조직인 창가학회(創價學會)의 정치세력으로, 1961년 공명정치연맹으로 결성되었다가 1964년 공명당으로 개칭했다. 일본적 국수주의 경향이 강하며 점진적이지만, 1980년대에 들어 당세가 신장되고 있다.

일본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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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共産黨

1922년 지하정치조직으로 결성되어 1945년 합법화되었다. 1964년 이래 소련공산당과 단교상태를 지속해 오다가 1988년부터 화해를 모색하고 있다. 특징적인 것은 북한노동당을 패권주의의 전형이라고 비판하고 김일성 신격화를 비난하고 있으며, 1987년 북한의 대한항공 여객기 폭탄 테러 사건에 대해 사회당이 남한의 날조라고 주장한 데 반해 북한의 소행이라고 비난했다. 계속적으로 당세가 퇴조하고 있다.

민주사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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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主社會黨

일본사회당의 우파세력이 탈당하여 1960년에 창당하였다. 온건한 중도노선을 표방하고 있다.

기타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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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他政黨

1977년 일본사회당을 탈당한 일부 의원으로 조직된 사회민주연합(약칭 社民蓮)과 자민당 탈당의원으로 조직되었던 신자유 클럽이 해체된 후 구성된 신정(新政) 클럽 등이 있다.

일본 압력단체의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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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壓力團體-擡頭

1952년의 강화·독립 이후 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의회제 민주주의의 운영에 대한 외적 제한이 철폐됨과 동시에 군국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정치·경제·사회의 각 영역에 있어서 제 세력·제 단체가 재편성되어 가고, 또한 일본 자본주의의 재건·재확립에 따라 다양한 집단적 조직화의 경향은 일단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고 1955년경에는 정계에 양당제, 즉 실질적으로는 '하나에서 둘로 갈라진 1당제(一黨制)'가 성립하고, 사회적·경제적 영역에도 재계·독점자본의 제 단체, 중소기업단체, 노동조합, 특히 전국적 연합조직으로서의 총평(總評)과 전로(全勞), 농업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농업제단체와 의사회(醫師會)등의 전문직업단체, 각종 업자단체, 구(舊)군인단체, 구지주단체, 지방 6단체의 세력이 강해졌다.

그리하여 1955년경부터 일본경제의 고도성장과 보수파 정부에 의한 정책적인 가속(加速)을 중심으로 하여, 정부의 경제·사회과정에의 개입·침투도 본격화되었다.

일본의 권력구조와 압력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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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權力構造-壓力團體

일본의 정치에 있어서는 정당정치의 차원에서 보수와 혁신 사이의 대항과 병행하거나 서로가 견제하면서도 정치적 이익집단 상호간에는 기본적인 동질성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 정치적 이익집단이 하나의 압력단체 체제를 구성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1955년의 '보수합동'에 의한 자유민주당의 결성 이래 보수파에 의한 의회의 다수와 정권의 독점, 그리고 사회당의 집권 가능성 결핍으로 정당의 계열화가 강화되었고, 압력단체의 정책 결정과정에서의 영향력의 대소라는 관점에서 볼 경우 집단의 상하관계가 전제된 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압력단체의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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壓力團體-配置

노동조합 특히 총평계(總評系)의 노동조합은 권력의 핵(核)으로부터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정책결정에서 소외되어 있고, 그 때문에 정치행동은 때때로 항의행동, 반정부적인 대중행동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이에 대하여 재계나 독립단체는 그 자체가 권력중추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표면적인 압력행동을 취하지 않고 주로 정계 안에서의 정치헌금(政治獻金)을 통하여 그 이익을 실현해 간다. 이 두 압력단체 사이에 신·구 중간층의 기타 특수이익을 대변하는 다양한 압력단체들이 있는데, 이들 집단은 그 자체가 가진 보수적 성질 때문에 자민당(自民黨)에 계열화되어 있고, 표(票)와 금력(金力)에 따라서 영향력의 대소가 정해진다. 따라서 압력단체의 압도적 다수가 보수파 정부에 계열화되어 있고, 권력핵의 거리에 대응한 피라미드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압력단체의 성격·활동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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壓力團體-性格·活動方式

일본에 있어서 압력단체의 전략적 접근지점은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당과 관료기구에 설정되어 있지만, 집권당의 장기집권과 정권교체 가능성이 희박한 점 등 때문에 자민당(自民黨)과 관료기구에 거의 전적으로 집중되어 있다. 일본 압력단체의 획득목표는 해당집단의 이익 실현 내지 옹호를 위한 입법조치, 행정상의 편의, 국가자금 배분의 획득 등 자본주의 국가의 보편적인 경향과 차이가 없으나 다만 더 많은 국가자금의 배분을 받으려고 압력단체가 서로 경쟁하는 점이 특색이다. 일본 압력단체의 압력행사 방법은 압력이나 조직적 영향력을 공공연하게 행사하지 않고 주로 진정(陳情)에 의존하고 있다. 공공연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은 서로 묵시적인 양해하에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비공개적이고, 대공중(對公衆) 관계에 비중이 두어지지 않으며, 관료의 부패나 오직(汚職)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대중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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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大衆運動

제2차 대전의 종료와 더불어 시작된 일본의 대중운동은 미군 점령치하에서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1960년의 안보투쟁을 절정기로 삼아 이후 정치적으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2,000만 명이 서명한 안보투쟁은 청원과 데모로 대규모 정치운동의 한 사례를 남겼고, 이 밖에도 원수폭(原水爆) 금지운동, 월남 평화운동 등의 시민적 대중운동이 대성행했는데 주로 보수정치에 대한 비판정신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일본의 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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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勞動運動

사회주의 정당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일본의 근대 노동운동 조직은 종전(終戰)후 활발히 전개·성장하여 정치·사회적인 압력단체로 성장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의 고도성장으로 산업자본주의가 토착화하자 좌경적인 정치이념에 입각한 노동운동이 분열되어 중도파, 우익, 반공적인 노동운동 단체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중요 노동자 조직으로는 일본 노동조합 총평의회가 있다.

일본의 농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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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農民運動

근대화 과정에서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으로 인한 농민운동이 주축을 이뤄오던 일본에서 본격적인 농민조직이 생겨난 것은 역시 좌익계 정당과의 제휴에 의해서였다. 2차대전 후 토지개혁 문제가 대두했을 때를 최절정기로 하여 그 이후는 농민운동의 뚜렷한 쟁점을 잃어 쇠퇴해 버렸으나 고도 성장의 산업사회 속에서 빈농(貧農)의 노동자화 현상이 두드러져 노동운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농민들은 아직까지 보수 정당의 지지 세력권을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일본의 학생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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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學生運動

전전(戰前)의 대중적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학생운동이 전후에는 학생계층 독자적인 운동으로 전환하여 어느 나라 못지않게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2차대전 직후에는 학원 민주화, 교육제도 등의 학생문제 자체에 대한 운동이 주축을 이뤄왔으나 이후에는 평화운동·민주화운동·개혁운동을 망라하여 조직적인 학생운동이 전개되었다. 운동 조직으로는 극좌세력에서 극우파까지 다양한 성향의 파벌이 있는데 그 중 전국 일본학생 자치회 총연합회(약칭 전학련)가 가장 대표적인 조직이다.

전학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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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學聯

전국 일본학생 자치회 총연합회의 약칭. 1948년의 대학 이사회 법안과 수업료 인상 반대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성립된 조직으로 이듬해 국제학생연맹에 가맹했으며 중앙 및 지방조직을 강화하여 막강한 실력으로 각종 운동을 해 왔다. 특히 1960년의 안보반대투쟁 때는 학생들을 대거 동원하여 실력을 과시했으나 그후 내부의 사상적 대립으로 끊임없이 분열과 재결합을 반복하고 있다.

좌익계 학생조직이 기본을 이루고 있는 전학련은 코민포름이 일본공산당을 비난하자 학생 내부에서도 코민포름 지지파와 일공(日共) 지지파로 나눠졌는가 하면 트로츠키파까지 등장하여 복잡한 분파를 이루게 되었다. 한편 1967∼1969년 사이에는 돌·화염병·곤봉 등으로 경찰관과 맞서 싸워 유혈 참사를 빚었는가 하면 대학점거 사태 등의 극단적인 투쟁이 잇따라 동경대학 입학시험 중지 사태까지 몰고 왔다. 이런 난폭화 현상은 대중들로부터 학생운동의 불신풍조를 조성함과 동시에 파벌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자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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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衛隊

제2차 대전 후 완전 해체된 일본군은 중국의 성립과 한국전쟁의 발발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즉 주일(駐日) 미군의 한국전 개입은 일본 국내 치안병력의 증강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동북아시아에서의 공산세력의 확대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일본이 재무장해야 된다는 정책이 미국에 의해 세워졌다. 이로 인해 1950년 10월 설치된 경찰 예비대는 이듬해에 구안보조약 이후 보안대로 되었다가 1954년 방위청 설치 및 자위대 법안이 성립되어 육·해·공 3군 자위대가 창설되었다. 일본 자위대는 미·일 신안보조약 이후 4차에 걸친 방위력 증강계획(1958∼1976)을 추진, 전력증대를 기도하고 다시 1976년 '방위계획 대강(大綱)'을 수립, 과거의 '소요 방위력구상'에서 국지적이고 소규모의 무력침략은 독자적으로 배제한다는 '기반적 방위력구상'으로 방위정책을 전환했다. 세부계획으로 1980년 국방회의를 개편하고 통합안보 막료회의를 신설했으며, 1985년 '중기 방위력 정비계획'을 확정했다. 1987년 방위비가 GNP대비 1%를 초과했으며, 1991년 이후의 '차기 방위력 정비계획'수립을 방위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이미 중화기·미사일·항공기·탱크 등 각종 병기의 국내 자급체제를 갖추고 있는데, 그 규모는 본래 자위대의 목적을 훨씬 초과하는 공격력을 보유하고 있다. 과거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반성으로 헌법에 군사력 억제에 관한 조항을 두고 있으나 사실상 주요 정치쟁점으로 대두되고 있다.

일본의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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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外交

근대 이후 일본 외교의 기본 자세는 국제적 고립을 피하기 위한 세계 정세에 순응하는 것이었다. 이런 대세 순응의 외교정책은 종종 우방들로부터 비판받기도 하지만 전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기본 노선이다. 2차 대전 후 일본은 미국과의 깊은 유대 속에서 외교전을 펴나갔는데 그러면서도 순응주의의 이념에 입각하여 자유·공산 양대진영에 걸쳐 다각적인 국교 관계를 수립했다. 뿐만 아니라 정경분리라는 구호로 적대국에 대해서도 경제교류를 통한 간접외교로서 꾸준히 고립을 면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 대북한 관계 등은 그 좋은 예가 된다.

미 점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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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占領期

초기에 민주화·비군사화 정책을 폈던 미국은 냉전이 격화되자 반공국가의 구축을 위한 우방으로 일본 외교의 방향을 잡아 나갔다.

구안보체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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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安保體制期

1952년의 강화조약과 구안보조약으로 반공기지 역할을 맡은 일본은 미군기지의 제공, 아시아 반공외교의 거점, 유엔 중심의 외교 등에 초점을 맞췄다.

신안보체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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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安保體制期

1960년의 신안보조약 이후를 일컫는 말로 미국과의 관계를 기지대여적(基地貸與的)인 것에서 상호방위적인 성격으로 전환시킨 것이 특징이다. 경제대국으로서의 일본이 아시아 반공 전선의 주축이 되어 미국의 역할을 대신하는 데까지 발전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1969년의 사토·닉슨 공동성명은 1970년대 후반기까지 동북아시아 안보의 기본 이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한편 일본은 세계 정세의 순응주의 외교를 더한층 넓게 전개시켜 나가고 있다.

다나카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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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中外交

제2차대전 후 대미(對美) 의존의 외교·경제·정치에서 탈(脫)미국의 정책을 모색했던 다나카의 외교전략. 중국 고립정책을 버린 닉슨 외교에 당황한 일본이 미국보다 앞서 대중국 관계 정상화를 이룩함으로써 정치·군사적인 면에서 아시아 안정세력의 주축을 이루려는 8억 인구(국교 정상화 당시)의 중국을 수출시장으로 삼자는 것, 소련의 일방적인 아시아 진출에 억제력을 행사하자는 것 등의 목적을 추구하였다. 일·중국관계의 정상화는 동북아시아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는데 소노다 외상의 중국 방문과 덩샤오핑의 방일로 1977년에 결실을 거두었다.

대동북아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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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東北亞政策

러시아·중국 및 한반도 문제가 얽혀 있는 동북아의 미묘한 회오리 속에서 일본은 시종 현상 고정화를 위한 등거리 외교정책을 쓰고 있다. 1972년의 오키나와 복귀 이후에도 미국과의 협조는 계속되고 있고, 북방 4개 도서(島嶼) 반환과 평화조약 문제가 얽혀 있는 러시아와의 관계나, 평화조약 문제로 대치중인 중국과도 일본은 실리(實利)와 화해의 외교 방법을 적용시키고 있다. 한국과 외교를 갖고 있으면서도 정경분리 원칙을 내세우고 북한과도 교류를 증대시켜온 일본은 1974년 기무라(木村俊夫) 외상이 "북으로부터 남침은 없을 것"이라 하여 큰 반발을 사기도 했다. 러시아·중국의 양대 세력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로 동북아의 현상 고정화를 시도하고 있다.

자원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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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源外交

1973년 중동 전쟁으로 야기된 석유파동은 자원이 없이 기술만으로 경제대국이 된 일본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결국 그 해 11월 니카이토(二階堂進) 관방장관은 전후 처음으로 미국적인 외교노선을 배격하는 친 아랍 정책을 공포하게 되었고, 미키(三木武夫)를 비롯한 거물급 특사가 중동 8개국을 순방하였다. 이로써 석유난을 해결한 일본은 그후 계속하여 자원 획득을 위한 줄타기 외교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한때 미국측과 미묘한 관계에 빠지기도 하였다. 1974년 4월 유엔 자원 특별 총회에서는 자원 소유국과 비소유국의 공동 책임론을 주장하는 줄타기 정책을 표방하였고, 해양법 회의에서도 200해리 선포로 인한 손해를 면하고자 시종 반대하였으나 워낙 다수국이 주장하여 관철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자원이 없는 나라인 일본은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서는 원칙을 뒤집는 정책을 추구한다는 인상을 씻기 어려울 것이다. 동남아·아프리카·남미 제국과의 유대를 시종 자원외교의 입장에서 전개해온 일본은 각국으로부터 반일 데모까지 유발시키기도 했다.

신국제질서와 일본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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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國際秩序-日本外交

1993년은 전후 일본 정치사에 있어서 1955년 자유당과 민주당이 사회당 등 혁신 세력에 대항하여 연합한 자유민주당의 장기 집권 체제가 첫번째 변질을 시작한 역사적인 해였다. 1993년에 정치 개혁과 정계 개편을 요구하는 신진 세력의 요구에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한 미야자와(宮澤)나 가지야마(梶山) 등의 자민당 원로 중심의 수구 세력에 불만을 품은 오자와와 하타 등 신진 세력이 자민당을 이탈하면서 정계 개편이 개시되었던 것이다. 자민당을 이탈한 오자와 대표 간사를 중심으로 한 신생당과 호소카와의 신당, 다케무라(竹村)의 신당, 사키가케. 이치가와(市川)의 공명당이 1993년 여름의 중의원 해산에 이은 총선거에서 약진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서 대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생당 등 신보수주의 세력이 사회당과 연합하여 자민당의 의석수를 초과하게 되어 사회당이 포함된 역사적인 연립 여당에 의한 자민당 정권 붕괴가 가능해졌던 것이다. 초기에 자민당의 오랜 장기 집권에 염증을 느껴 온 일본 유권자 여론에 힘입어 연립 여당의 호소카와 수상은 정치 개혁 추진으로 높은 국민적 지지를 누렸다. 그러나 호소카와 자신도 사가와 규빈 사건에 휘말리고 호소카와의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국제 역할 확대에의 노력에 반발한 매파의 오자와·하타의 신생당 및 공명당과 의견 마찰이 노출되었다. 결국 호소가와가 사임하고 신생당의 하타 수상이 중심이 된 신연립 여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연립 여당 내에 사회당과 신생당의 노선 차이가 부각되고, 북한 핵문제를 비롯한 대외 정책에서 하타 세력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가 연립 여당을 이탈하면서 일본 정국이 또다시 불안정한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연립 여당의 취약성을 이용하여 사회당을 포섭하여 정권 재창출을 기도한 자민당의 노력이 성공하여 결국 자민당·사회당·신당 사키가케라는 제3의 연립 여당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잦은 정권 변동의 배경 중에는 일본의 향후 국가 외교 동향에 대한 오자와 등의 국제 공헌 확대론과 이에 저항하는 소극적 역할 한계론과의 노선상의 기본적인 대립이 깔려 있다. 이것은 경제 대국화한 일본의 국가적 잠재력과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역할 구조 간의 불균형에 대한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적인 압력과 일본 국내의 신보수주의 세력의 일본 지위 향상 노력이 결합된 총체적 대국주의와 경향에 대한 일본 내의 국론 대립을 반영하는 것이다. 더욱이 최근에 와서는 이른바 무라야먀 전 사회당 위원장이 이끄는 제3차 신연립 정권의 기본 대외 정책이 사회당의 기존 노선과는 큰 변화를 보여주면서 이른바 일본 정계에서 혁신 세력의 무력화 내지는 탈색화가 진행중이라는 평가를 낳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당은 기존의 자위대 위헌론, 미·일 동맹 반대, 반핵 정책을 대폭 수정하여 1994년 9월 3일의 제61회 임시 당대회에서 현실적인 신 기본정책을 채택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아사히 신문, 1994.9.4). 즉 첫째 기본의 비무장·중립의 원칙은 냉전이 종결됨으로써 역사적 역할이 소멸되었고, PKO 등 신뢰 구축 차원의 대외 군사 협력을 용인해야 한다. 둘째로 자위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도의 자위대를 인정하고 미·일 안보조약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셋째, 원자력 발전에 대해서도 가동중인 원자력 발전에 대해서는 대체 에너지 확립까지 과도적 에너지로서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존의 전통 보수당인 자민당과 신 보수세력의 협공에서 존멸의 위기를 맞고 있는 사회당의 대폭적인 노선의 수정은 현재 일본에서 진행중인 정계 개편과 정치 대국화·국제 공헌 확대의 추세에 따라 불가피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기본적인 원천은 앞에서 지적한 바대로 보통 국가론을 주창하고 나선 오자와를 중심으로 한 적극적 국제 역할 확대론자들의 정치력이 신장된 결과인 것이다. 오자와는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일본 전략 연구센터의 연구 결과물인 '국제 안전 보장에 관한 제언'이라는 보고서와 『일본 개조 계획』이라는 저서에는 일본의 국가 목표의 새로운 설정과 전략을 제시하고 있는데, 오자와(小澤)가 제시한 5대 외교 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 민주·인권·시장 경제라는 가치관은 다른 민주주의 국가와 공유하는 일본의 이념이며, 이 이념의 추구를 통해서 일본의 안정과 번영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

② 미국이나 유럽과 함께 일본은 새로운 세계 질서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나가야 한다.

③ 21세기를 향한 일본의 외교 목적과 그 전략을 대외적으로 명확히 해야 한다.

④ 일본 외교의 기축은 앞으로도 미·일이며, 그 관계를 시대 변화에 대응시켜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

⑤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중시하는 외교 자세를 명확히 한다.

이와 같은 외교의 기본 방침은, 신보수주의의 대표적 인물이며 80년대 전후 청산을 주장한 나카소네가 회장으로 있는 세계 평화 연구소의 총합 전략 연구회의 최신 보고서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 내용이다.

위의 나카소네가 주도하는 신국가 전략 대강에서도 나와 있지만, 오자와를 중심으로 한 신보수주의·국제 역할 확대론자들의 논지는 일본이 이미 전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서 통상 등 주요 국가 이익을 위한 현재의 시장 경제 질서의 안정적인 유지에 있기 때문에 소련 붕괴 후 전세계적으로 빈발하는 지역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 대국·정치 속국의 불명예를 씻고 국제연합에서 상임이사국 등으로 주도적인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이른바 '보통 국가'로서 ― 진정한 의미는 정치 대국으로서 ― 인정받자는 것이다. 이처럼 소극적인 외교 소국에서 정치 대국으로의 변화 압력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미·일 관계가 과거의 수직적인 보호·추종 관계에서 수평적인 파트너 관계로 변화하기를 요구하는 미국의 역할 분담 요구에도 기초한다고 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은 걸프전을 통해 미국의 전세계적인 경찰 활동에 대한 일본의 재정적 지원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래서 부시는 방일중에 미야자와의 회담을 통해 이른바 '미·일 글러벌 파트너십에 관한 동경 선언'을 천명하였다. 그래서 오자와의 외교 5원칙에도 미·일 관계의 지속적 강화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일본의 보수주의적 지역주의를 부분적으로 반영하여 오자와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경제 성장을 지렛대로 일본의 대외·대미 협상력을 높인다는 점이 눈에 띄는 대목이다. 이것 역시 과거의 일방적인 보수 민족주의의 성향을 부분적으로 수용·반영한 것이다.

오자와는 일본의 국제 역할 확대를 추진하기 위해 우선 국내의 정치 개혁 요구를 이용, 세대 교체를 통한 정계 개편에 주력하였다.

오자와는 소선거구제를 통한 총선거를 통해 사회당·공산당 등을 정계에서 축출한 뒤 수상의 권한을 강화한다든지 지방 분권으로 관료의 부담을 줄여 국제 역할 확대 역량을 강화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그의 외교 노선의 실현에 필요한 사전 정지 작업을 추진하였다.

1993년 호소카와의 연립 정권이 수립되면서 탈냉전 시대의 도래와 소련의 직접적인 위협 격감에 부응하여 일본의 방위 정책의 기본 정향을 규정하는 방위 대강을 개정해야 한다는 요구에 따라 호소카와는 방위 대강의 조기 수정 의향을 밝힌 적이 있다. 그래서 호소카와는 수정 방향을 우선 검토하기 위해 1994년 2월 15일 수상 및 주요 각료가 참가하는 안전 보장회의에서 전문가 9명으로 구성되는 수상 직속의 '방위 문제 간담회'를 설치했다. 이 간담회 구성원은 정부의 핵심 부처, 방위청 관계자, 주미 대사 등을 역임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갖는다고 볼 수 있고, 신생당과 연립 정권 당시 구성된 조직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국제 역할 확대 노선을 제시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이 보고서는 앞에서 냉전의 종결과 안전 보장 환경의 질적 변화에 대해 미·소의 대결이 종식되고 일본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세력이 사라지고 군비 관리, 군축의 움직임이 진전되고 있는 한편 예상하기 어려운 위협에 대비하고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안전 보장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또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안전 보장 환경의 특징으로 아시아·태평양의 제국은 군비 증강 추세에 있으나 지역안보 체제는 미성숙 단계라고 하면서 동북 아시아와 북서 태평양 지역은 미국·러시아·중국 등 군사대국의 이해가 집중적으로 중첩돼 있고 그래서 일본은 안전보장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간담회는 일본이 지금까지의 수동적인 안전보장 정책에서 탈피하여 능동적인 질서 형성자로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고, 다각적 안전 보장 협력과 미·일 안전 보장 협력 관계의 기능 충실화를 통해 일본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고 하였다.

앞의 오자와의 일본 개조 계획과 방위문제 간담회 보고서를 비교해 보면 대략 일본의 향후 국가 전략의 방향이 미·일 안보 체제의 안정적 유지와 국제 공헌의 확대라는 두 가지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양대 외교 전략을 통해 일본의 향후 외교 정책의 기본 방향은 미·일 동맹과 국제 공헌의 확대를 통해 자유경제질서의 안정, 대량 살상 무기의 확산 억지, 일본의 국제적 지위 향상이라는 탈냉전기 신외교 목표를 추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의 대북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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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對北政策

일본의 대북 접촉이 본격화된 것은 한국보다 훨씬 늦은 1981년 3월 북한 노동당과 일본 사회당이 동북아시아 지역 비핵·평화지대 창설 공동 선언을 발표한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일·북한 관계는 그러나 1983년의 랑군 폭파사건과 1988년 1월 김현희의 대한 항공기 폭파 사건 후 대북한 제재 실시로 냉각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일·북한 교섭이 재개되었는데, 이 배경에는 앞서 지적한 일본의 장기적인 대한반도 정책 기조와 1990년 일본 자민당의 국내 정치적 요인도 개입되어 있었다. 가네마루 자민당 당시 부총재는 1989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압승하자 사회당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일·북한 교섭을 추진했던 것이다. 북한 역시 한국의 노태우 정부의 북방 정책이 성공하자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 하였고, 무엇보다도 북한 경제의 어려움으로 대외 경제협력이 불가피해졌던 것이다.

일본은 1990년 9월 가네마루(金丸) 신 전 자민당 부총재를 대표로 한 자민당·사회당 대표단을 평양에 파견(1990년 9월24일-28일)하여 3당 공동선언을 조인하였다. 이 당시 한국의 북방 정책을 상쇄해야 할 외교적 현안 해결이 긴급했던 북한이 국교 정상화 교섭을 제안하여 의외로 협상이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양국은 협상을 통해 기본 외교 현안과 과제를 천명한 자민당·사회당·북한 노동당 3당간 공동 선언을 발표하였다.

그 뒤로 양국은 1991년 1월 30일-31일에 제1차 일·북한 수교 회담을 개최한 이래 8차에 걸쳐 수교 협상을 진행하였다. 협상은 난항을 거듭한 끝에 제8차에 걸쳐 수교 협상(1992년 11월 5일-6일)에서 일본측이 또다시 이은혜와 북한의 핵문제를 제기하여 협상에 나서자 북한은 다음 회담 일정도 정하지 않고 갑자기 수교 회담을 중단하게 되었다.

일·북한 양국간의 협상 과정에서 드러난 외교적 현안은 우선 북한은

일본이 북한만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북한은 또한 일본의 과거 청산과 승전국으로서의 배상 문제 및 전후 보상 문제를 수교 교섭에 연계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측은 만주에서의 빨치산 활동과 북한 정권의 정통성 여부는 논점 외로 하고, 보상 문제에 대해서는 교전국간의 배상이 아니므로 재산 청구권의 차원에서만 대화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 일본은 또한 KAL기 사건에 일본인 여성이 강제 납북되어 일본어 교사로 이용된 이은혜 사건을 미·북한 수교 교섭의 전제 해결 문제로 거론하였다. 이와 유사한 내용의 외교적 현안으로 북한은 일본의 몬주(文殊)와 로카쇼무라(大所村)의 핵 재처리 시설과 다량의 플루토늄 도입을 핵무장의 시도라고 비난하면서 일본의 첨단무기 등의 위협을 전전의 군국주의와 팽창주의의 부활 움직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북한의 사정거리가 1,000 킬로미터가 넘는 중거리 노동 1호 및 대포동 미사일 개발을 주시하면서 동시에 생화학 무기 등의 다량 살상 무기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일본은 또한 북한의 수많은 현역 병력과 전방 배치 등 공세적인 태세를 우려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1993년 이철의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 선언 후의 북한의 핵개발 의혹에 대해 탈냉전기 일본 안보의 최대 현안 문제로 취급하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1992년 북한의 일방적인 수교 협상 중지 후 일본은 북한의 이철이 1993년 3월 IAEA 탈퇴를 선언하자, 즉 일·북한간 관계 정상화의 전제 조건으로서 북한의 핵 의혹 해소를 들고 나옴으로써 기존의 수교 협상이 전면 중단되게 되었다. 북한 핵 의혹에 대해 일본은 즉시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1993년 3월 23일 참의원 예산 위원회에서 부총리 겸 외상 와타나베 미치오는 북한의 핵확산 방지 조약(NPT) 탈퇴 철회가 일·북한간 국교 교섭의 전제 조건이 된다고 강조하였다. 한편 1993-1994년 정계 개편으로 일본 국내 정치가 혼미해지면서 외교 정책 수립에 혼선을 낳지 않도록 하기 위해 대북한 정책의 기본 원칙으로서 연립 여당은 4월 19일 대표자 회의에서 사회당의 입장을 일부 반영하면서 대북한 정책 연정 합의안을 제시하였다.

1994년 10월 핵문제의 미·북한 제네바 타결로 북한의 경수로 건설 비용 및 폐연료봉 처리비용에서 미국이 한국과 일본의 경비 부담을 추진하면서 일본은 앞에서 지적한 동북아 정책 기조하에 대한반도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협상 성과를 발판으로 일·북한간 수교를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입장에서도 안보의 최대 현안인 핵문제 조기해결과 북한의 개방 유도를 역내 불안정 세력의 해결 차원에서 주요한 국가 이익으로 판단하고 수교의 성공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연립 여당은 11월 중에 구보(久保) 사회당 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수교 협상 대표단 파견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모리(森利) 자민당 간사장, 자민당 총무회 및 외무성 등의 신중론에 밀려 의견 절충을 하던 중 북한의 일본 대표단 방북 거부로 교섭이 교착되었다. 일본측이 내세운 신중론의 배경에는 1990년의 3당 공동 선언이 일본에 불리하게 되어 있고, 이은혜 문제의 선결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일·북한 수교를 무리하게 서두를 경우 코리아 에너지 개발 기구(KEDO) 등에서 일본이 대북 경수로 지원 경비를 과도하게 부담할 수 있다는 점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1994년 10월 29일 방한한 이가라시(五十嵐廣三) 일본 관방장관과 김영삼 대통령간의 회담과 무라야마에게의 요청에서 보여지듯 일본의 여당 방북단의 방북 외교에 한국측이 불쾌감을 전달하면서 신중한 접근을 요구한 것도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종합적으로 결론을 맺는다면, 1995년 3월 수교 협상을 재개한 일본 정부는 앞으로도 북한 내 김정일 정권 승계 여부 및 미국의 대북 정책 변화 가능성 등의 상황을 보아 가면서 일·북한 수교의 시기와 수위를 조절하면서 수교가 성사되도록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록히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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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kheed 事件

1976년 2월 미국 상원 다국적 기업 소위원회(당시 위원장은 프랭크 처치) 공청회에서 밝혀진 록히드 항공회사의 국제적인 뇌물 공여 사건을 말한다. 록히드사가 자사의 항공기 판매 촉진을 위해 세계 15개국에 총 2억 2백만 달러를 제공했다는 사실이 공개되어 특히 이탈리아와 일본에서 커다란 정치 문제가 되었다. 마침 자민당 내분과 보수정치에 염증을 느끼던 일본은 록히드 사건을 계기로 야당이 일제히 대여 공격에 나섰고, 자민당 일부에서는 탈당 사태까지 일어나 한때 정치적 위기를 조성했다. 록히드 사건의 핵심인물인 록히드사 일본 비밀 대리인인 고다마(兒玉譽士夫)의 의회 증언과 다나카(田中角榮) 전 수상의 구속(1976년 7월 27일∼8월 16일) 사태로까지 확대되었으나 여론의 예상과는 달리 직접 정계 개편의 힘은 되지 못했다.

보혁 역전과 연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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保革逆轉-聯立

1970년대 초반기에 급성장해 오던 공산당은 한때 좌파 연립 세력으로 집권 가능성마저 보였으나 중반기부터 다시 퇴조 기세를 보여 일본의 정국은 보수세력이 도리어 상승하는 방향 역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자민당은 금권(金權)정치와 록히드 사건 등으로 내분이 심화되어 보수계열 내부에서의 분열 징조가 뚜렷해졌다. 한편 혁신 좌파정당 사이에도 사회·공산당의 협조와 내분이 번갈아 나타나 1970년대 후반기에 와서는 특이한 정치 기상도를 나타내게 되었다. 즉 좌우파 이념에 의한 정당간의 연립이 아닌 보혁 연립(保革聯立)이라는 형태의 정치 풍토가 이룩되어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거듭하였다.

자민당의 재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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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民黨-再執權

이른바 금맥사건(金脈事件)으로 퇴진을 강요당한 다나카내각의 뒤를 이은 미키(三木) 내각은, 1976년 록히드 사건을 수습하지 못한 채 연말의 '록히드 선거'에서 후쿠다 부총재 및 오히라 장상(藏相)의 제휴로 패배, 1977년에 이르러 후쿠다 내각의 성립을 보았다. 그러나 오히라의 절대적인 지지 아래 발족한 후쿠다 내각 역시 1978년 12월의 총재 예비선거에서 오히라에게 패배함으로써 1979년 오히라 신임 자민당 총재의 내각이 출범했다.

국내외적인 지탄속에서도 수십년간 정권을 장악해온 자민당은 마침내 1993년 내분과 연립야당의 등장으로 집권에 실패한다. 이후 와신상담 끝에 1996년 재집권에 성공한다. 특히 1998년 출범한 오부치 내각은 약체내각이라는 비판을 불식시키기 위해 경제 활성화와 외교 방면에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1999년 1월 들어서는 구 자민당의 한축이었던 자유당과 재합당하여 보수 색채를 강화, 나름대로 권력기반을 다져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