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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국 제 정 치/지 역 분 쟁/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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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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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說

1975년의 베트남 공산화를 시작으로 캄보디아·라오스의 공산화는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의 공산화 위기로까지 고조되었으나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그러나 소련의 대(對)아시아 팽창정책은 인도양·극동 지역에서의 군사력 증강과 동시에 베트남과 라오스를 그 세력권하에 놓음으로써 인도차이나 반도 전역에 긴장을 고조시켰고, 이에 동(同)지역에서의 소련의 주도권 확대를 견제하려는 중국, 소련의 대아시아 세력확대를 저지하려는 미국·일본 등과의 군사적 각축이 벌어졌다.

베트남·캄보디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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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tnam·Kambodia 戰爭

1977년 12월 31일 베트남의 선공으로 일어난 이 전쟁은 사실상 최초의 중·소 대리전 성격을 띤 캄보디아 2차 내전의 시작이었다. 베트남의 지원으로 공산화에 성공한 폴 포트 정권은 베트남의 인도차이나 3국 연방화(聯邦化) 의도를 간파하고 중국에 밀착, 지원을 요청하고, 반 베트남 노선을 취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와 같은 의도를 갖고 있던 베트남은 전통적으로 좋지 않은 민족감정까지 촉발시킴으로써 양측은 국지분쟁과 군사적 대립을 계속하여 왔다. 여기에 베트남을 '아시아의 쿠바'로 이용하여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혁명 확산과 인도양·남중국해에서의 해군력 증강과 세력 확대를 기도한 소련과 그에 위협을 느낀 중국이, 경제·군사 원조를 미끼로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각각 배후에서 사주하고 있었다. 1978년 11월 소련·베트남 우호협력조약이 체결되자 베트남은 폴 포트 정권의 살인적인 인민개조작업의 타도를 이유로 동년 12월 캄보디아 구국통일전선(KNUFNS)을 수립, 이들이 폴 포트 정권과 대항하는 형태로 침공을 개시했다. 폴 포트 정권은 베트남의 치밀한 기습작전과 당시 미국과의 수교문제(1979년 1월 1일)로 중국이 약속한 지원을 행하지 못해 개전 14일만에 붕괴, 1979년 1월 친베트남 행 삼린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와 동시에 캄보디아는 친중국 크메르 루즈(키우 삼판), 전 국가주석 시아누크파, 친서방 캄보디아 인민민족해방전선(손 산) 등 반베트남 3세력과 행 삼린 정권 등 4세력의 내전상태에 돌입하게 되었고, 반베트남 3파는 1982년 6월 말레이시아에서 민주캄보디아 연정을 수립, 베트남군과 행 삼린군(軍)을 상대로 국경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1988년 7월 양측은 인도네시아에서의 제1차 캄보디아 평화회담을 시작으로 정치적 타결을 추진했으나 심각한 의견차이를 보였고, 1989년 8월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과 이행당사국 등 19개국이 참석한 파리 평화회담에서도 파행을 일삼은 크메르 루즈의 연정참여 문제로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난제였던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이 중·소 관계 정상화의 영향으로 막후협상 끝에 1989년 9월 완전철수함으로써 1990년 1월 국제연합은 캄보디아에서 자유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국제연합이 관리하고 국제연합 평화유지군이 안보를 담당한다는 안을 채택했다. 1991년 캄보디아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1993년 신정부가 출범하였다.

중국·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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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Vietnam 戰爭

1979년 2월 17일 중국으로 선공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외견상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한 응징과 캄보디아 침공 베트남군의 철수를 기도, 폴 포트 정권에 대한 중국의 지원약속 이행으로 보여질 수 있으나 그 이면은 복잡했다.

인도차이나 공산화 이후 소련을 배경으로 한 베트남의 인도차이나 반도 연방화 기도는 화교권(華僑圈)을 기반으로 이 지역의 기득권을 주장하는 중국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친소 베트남의 세력확대는 중국으로서는 새로운 위협으로 인식되어졌다. 이에 캄보디아를 이용, 중국은 베트남 견제를 강화했는데 이에 반발한 베트남은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난제였던 화교들을 중국과 국외로 추방했다(중국·베트남 화교분쟁:당시 베트남 거주 화교들은 공산화 이전부터 사이공을 중심으로 상권을 독점해오고 있었는데, 베트남측에서 보면 이들은 개조·규제해야 할 부르주아지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 속에서 양측의 무력충돌은 불가피하였으며 중국이 그 계기를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으로 잡은 셈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처음부터 베트남·소련 우호협력조약에 의한 소련의 개입 가능성과 캄보디아 폴 포트 정권의 재건 불가능을 인식, '제한된 기간에, 제한된 지역에서, 제한된 병력만을 동원한' 철저한 제한전쟁으로 전면공격을 회피, 동년 3월 5일 베트남 점령지역에서 완전 철퇴했다. 이후 두 나라는 캄보디아 문제로 경직된 관계를 지속하였으나 1989년의 중·소 관계정상화와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철군으로 정상화 되었다.

캄보디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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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mbodia 內戰

캄보디아 내전은 1기와 2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1970년 론놀의 친미 우익 쿠데타로 실각한 전(前) 국가원수 시아누크가 동년 5월 베이징에서 캄보디아 왕국 민족연합정부(GRUNK)를 수립, 론 놀 정권과 무장투쟁을 시작하고, 여기에 1960년대 반시아누크 세력이었다가 북베트남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급격히 성장한 크메르 루즈가 시아누크와 연합, 그를 앞세워 베트남군의 지원 아래 1975년 4월 론 놀 정권을 붕괴시킨 후 1976년 4월 시아누크의 민족주의·왕제(王制)파를 제거하고 키우 삼판을 국가원수로 하는 민주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한 6년간이다.

제2기는 폴 포트 정권의 소위 '인민개조 작업'으로 불리는 테러와 공포통치 과정에서 이에 저항한 시아누크의 민족주의 계열과 친서방 손 산의 캄보디아 인민민족해방전선의 반크메르 루즈 투쟁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에 1978년 KNUFNS를 앞세운 베트남의 침공으로 폴 포트의 크메르루즈 정권이 붕괴하고 행 삼린의 친베트남정권이 수립되자 캄보디아 내전은 지극히 복잡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시아누크나 손 산은 크메르 루즈의 살인행위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했으나 그 크메르 루즈도 베트남에 의해 타도되었고, 행 삼린 정권은 사실상 괴뢰정권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시아누크·손 산·크메르 루즈(키우 삼판) 3파는 공동의 적 베트남에 대한 투쟁과 동시에 시아누크·손 산 2파와 크메르 루즈 사이의 갈등이라는 기묘한 양상을 띠었다.

1982년 6월 반베트남 3파는 말레이시아에서 '민주캄보디아 연정'을 수립, 베트남과 소련의 세력확대에 위협을 느낀 아시아 제국(諸國)과 중국의 지원 아래 행 삼린 정권과 베트남에 대한 항전을 선포하였으며, 동년 9월 국제연합 총회에서 캄보디아 대표권을 승인받았다. 그러나 연정은 다수 세력인 크메르 루즈의 과거와 급진좌경성 때문에 심각한 내분과 외부의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1988년 연정측과 프놈펜 정권은 내전의 정치적 타결을 위해 인도네시아에서 제1차 평화회담을 열고 타협에 들어갔으나 양측의 주장이 맞서 성과는 없었다. 1989년 2월 개최된 제2차 회담 역시 진전이 없었고, 동년 8월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과 이해당사국 등 19개국이 파리에서 평화회담을 개최하였으나 크메르 루즈의 연정참여 문제로 진전이 없었다. 캄보디아 내전은 본래 베트남의 인도차이나 반도 연방화와 소련의 대 아시아 팽창정책, 이에 대한 중국의 견제라는 중·소분쟁 이후 공산권 내부의 주도권 투쟁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던만큼 1989년의 중·소관계 화해분위기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그 대표적인 결과가 동년 9월 캄보디아에서의 베트남군 완전철수로 나타났다. 1991년 10월 파리에서 4개 정치세력이 평화협정에 서명함으로써 13년간의 내전이 종식되고, 1993년 출범한 신정부는 크메르 루주를 제외한 3개 정치세력의 군대를 통합하여 신정부군을 창설하여 크메르 루주 토벌작전에 나서 병력을 약화시켰다.

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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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tnam 戰爭

1428년 명(明)의 속방으로부터 독립, 후여씨 왕조가 하노이에 도읍(都邑)하여 국호를 대월(大越)이라 하였다.

1867년 코친차이나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것을 시작으로, 1900년경에는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3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으로 통합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1925년 결성된 '베트남 청년동지회'를 필두로 '베트남 광복회베트남 국민당' 등이 이를 주도하였다. 호치민(胡志明)은 1911년 이후 프랑스에서 식민지 독립투쟁 운동을 전개하고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열린 베르사유회담에 베트남 대표로 참가, '베트남 국민의 8항목 요구'를 선언하는 등 초기에는 민족주의 운동가였으나, 1920년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지지파에 가담한 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 공산주의자로 전향했다.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조직한 호치민은 반식민주의 무장투쟁을 선언, 대프랑스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민족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1941년 베트남 독립전쟁(Viet Minh)를 결성, 대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베트남 전쟁의 비극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프랑스의 복귀와 베트남의 좌·우파 대립에서 시작되었다. 종전 후 호치민은 1945년 9월 호치민시(구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했으나 지배권 회복을 기도한 프랑스는 이를 무력으로 진합하려 함(인도차이나 전쟁)과 동시에 1949년 6월 사이공에 구엔 왕조 바오 다이를 내세워 베트남국(보호령)을 수립하였다.

8년간에 걸친 인도차이나 전쟁은 결국 프랑스의 패배로 1954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북위 17°선을 경계로 남북 베트남 분단이 결정되었다(제네바 협정).

제네바 협정에서는 2년 후 베트남의 통일의 위한 총선거 실시를 규정하고 있었는데, 1956년 7월 북베트남이 그 이행을 요구하였으나 남베트남의 고 딘 디엠 정권은 이를 거부, 반공정책을 강화하여 북베트남과 대치하는 한편 국내의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제네바 협정을 프랑스와 인도차이나 4국에 미·영·중·소 등 9개국이 강대국의 인도차이나 4국에 대한 중립 및 주권·통일·독립·영토보전과 내정불간섭 보장을 골자로 하였는데 미국과 남베트남은 이에 서명하지 않았다. 결국 베트남의 비극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식민주의가 빚어낸 산물이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를 양극으로 한 냉전체계 속에서의 공산주의 혁명의 확산과 반공 이데올로기의 충돌이라는 구제적 대리전의 결과였다. 즉, 소련과 중국은 북베트남을 배후에서 지도했고, 미국은 공산주의 저지와 대아시아 세력확대를 목적으로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에는 프랑스를 지원했고, 제네바 협정 이후에는 베트남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식민지 독립전쟁에서 출발한 베트남 전쟁은 호치민의 공산주의, 식민지 시대부터 성장해온 민족주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보수우파 3세력 사이의 내전이면서도 자본주의·공산주의간의 이데올로기적 대리전이었다는 비극적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

1960년 12월 남베트남의 민족주의 제파는 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속칭 Viet Cong 이라 불린다)을 결성, 베트남의 통일과 고 딘 디엠 정권의 타도를 선언하고 무장투쟁에 돌입하는 한편 북베트남 정권과의 연계를 기도했다. 남베트남 정권은 이러한 위기 속에서 불과 2년여 사이에 10 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하는 등 정권투쟁과 파행에 휩싸였고, 인도차이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은 자국의 이해관계에만 집착해 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강화하는 한편 NLF와 북베트남에 대한 도발을 계속했다.

1964년 8월 통킹만(灣)에서 북베트남 어뢰정이 미국의 구축함을 공격한 사건이 발생하자, 직접개입 명분을 찾고 있었던 미국은 이를 계기로 북베트남에 선전을 포고하고 개입했으며, 북베트남과 NLF 또한 미국에서 선전을 포고함으로써 베트남 전쟁은 혼돈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한국도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의 요청으로 1964년 9월부터 비무장·의료 요원을 파견하기 시작한 이래 1965년 2월 '맹호부대' 파병을 시작으로 전투병력을 파병했다. 1973년 3월 완전 철수했다.

베트남 전쟁은 동족간의 무차별 살상이라는 비극과 국토의 완전한 파괴, 한 나라의 내전에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수호라는 명분하에 파병되어 싸워야 했던 미국과 한국의 젊은 병사들의 희생, 수없는 전쟁범죄와 참극 등 미증유의 사태를 야기시킴으로써 1960년대에서는 1970년대 초반 전세계적으로 반전운동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데올로기와 양극체제의 신제국주의적 사고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북베트남과 NLF의 인내와 최후적 결사항전에 비해 남베트남 정권은 국민적 의사의 결집이나 비극의 수습을 위한 노력없이 오직 집권세력 사이의 정쟁(政爭)과 부패·방관으로 일관함으로써 전쟁은 미국과 한국 대 북베트남과 NLF의 대결로 주객이 전도되었으며, 이러한 아이러니는 초강대국인 미국의 엄청난 경제력에 의한 병기와 병력 투입, 한국군의 용맹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중국의 군수지원이 있었지만 완전한 열세에 있던 북베트남의 재래식전과 NLF의 원시적 게릴라전의 승리로 끝났다. 1967년 미국 닉슨 행정부는 베트남전 종식을 위한 비밀협상을 추진, 1968년부터 양측의 접촉이 시작되고, 1972년 파리에서 미국·남베트남·북베트남·NLF 등 4자 대표가 휴전협상에 들어갔다. 1973년 1월 27일 4자는 미군 등 모든 외국군의 철수, 전쟁포로의 송환, 현상태로의 정전, 남베트남에서의 NLF와 현 남베트남 정부 2자를 통합한 연합정부 구성협의, 모든 정치범의 석방 등을 골자로 한 '베트남 정쟁종결과 평화회복에 관한 파리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양측 모두 이 휴전협정을 이행하지 않았고, NLF는 이 당시 사실상 북베트남에 종속된 상태였다. 북베트남과 NLF는 정체기간 중 전력을 정비한 후 1975년 1월 남베트남에 대한 대공세를 취하였고, 동년 4월 30일 남베트남 정권의 항복으로 베트남전은 공산화로 막을 내렸다. 형식적으로는 NLF가 남베트남 정권을 인수, 1976년 7월 남북베트남이 통합하여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이후 진행된 국가통합과정에서 NLF 계열은 숙청·거세되고 공산당 일당독재가 시작되었다.

중·소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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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蘇紛爭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이 창당된 이래 소련은 공산주의 지도국으로서 중국공산당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 결과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하여 1949년 10월 1일 중국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레닌과 스탈린으로 이어진 소련 지도부의 마오쩌둥에 대한 지원은 지대했으며, 마오쩌둥의 레닌·스탈린에 대한 신뢰 역시 광신적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 양극 냉전체제 속에서 일국 사회주의론(一國社會主義論)에 기초한 스탈린의 세계혁명 전략에서 볼 때 중국의 공산화는 지극히 만족스러운 것이었고, 소련의 절대적 지원 아래 공산주의 혁명을 달성한 마오쩌둥은 그의 인민민주독재론을 통하여 대소편향의 대외정책을 지도원칙으로 제시, '인민정치협상회의(政協)'에서 채택된 '공동강령(헌법)'에 명문화했다. 스탈린·마오쩌둥 사이의 개인적 신뢰를 기조로 한 중소관계는 냉전체제하에서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1950년 2월 모스크바에서 조인된 '소련과 중국 사이의 우호·동맹 및 상호원조에 관한 조약(중소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을 시작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협정·의정서·약정·선언 등 갖가지 형태의 유대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중소의 밀월은 1953년 2월 스탈린이 사망함으로써 전기를 맞게 된다. 그의 사후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소련 지도부 내에서 권력투쟁이 발생하여 흐루시초프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1956년 2월 제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비밀보고를 통해 스탈린 비판을 전개했다. 스탈린의 개인우상화·실정(失政)·독재에 대한 비판과 '레닌으로의 회귀'로 집약되는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스탈린주의자였던 마오쩌둥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충격이었고,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노선은 폭력혁명론을 고수하고 있던 그에게는 미·소의 접근과 그들에 의한 세계분할 패권지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1957년 11월 볼셰비키 혁명 40주년 기념식과 제1회 국제공산당 대회에 참석코자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은, 국제공산당 대회에서 소위 지도국가론을 강조하여 간접적으로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을 비난하면서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제국의 반제반봉건(反帝半封建) 통일전선 수립을 제창했다. 1956년 10월의 헝가리 민주화 의거에서도 소련 지도부에 적극적인 진압을 요구하는 등 계속되어 온 마오쩌둥의 이러한 태도는, 공산주의 지도국을 자처하는 소련공산당의 권위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당시까지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당내 스탈린주의자들의 반발과 그들과 중국공산당의 연대 위협 때문에,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당내 정지작업을 끝낸 1959년까지는 직접적인 움직임을 억제할 수밖에 없었고,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 또한 당시에는 독자노선을 추구할 수 있을 만큼의 공고한 지반이 없었기 때문에 당내에서 소련공산당을 상대로 이론투쟁을 전개하였지만, 경제·군사 등의 국가관계에 있어서는 소련에 밀착, 공동이익의 추구라는 기본노선에는 외견상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마오쩌둥은 소련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중국공산당 정권의 지반안정을 도모하였고, 또한 이미 마오쩌둥주의라 일컫는 독자노선을 상정하고 있었다(물론 그 이론적 기반은 스탈린주의이다). 중소분쟁은 중소논쟁이라 일컫는 '중소 이념분쟁'과 '중소 국경분쟁'의 2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두 사건의 원인은 모두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와 반스탈린주의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1959년 흐루시초프는 1957년 10월 자신이 체결한 중소 국방기술협정(핵기술 제공)을 일방 파기하고, 중국의 '3면홍기운동(三面紅旗運動:總路線·大躍進·人民公社)'을 교조적(敎條的)이라고 정면 비난하였으며, 중인(中印) 국경분쟁에서는 인도에 군사·경제 지원을 실시하는 등 그 동안 억제해 왔던 중국공산당에 대한 제재를 단행했다. 이는 소련공산당 내에서 스탈린주의자가 숙청되고 흐루시초프의 권력지반이 안정된 것을 의미한다. 제재조치는 계속되어 1960년 7월 흐루시초프는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각 분야의 기술자·고문단 전원을 소환하고, 중소간에 체결되었던 수백 건의 각종 협정·계약을 파기했으며, 중국에 대해 소련 주재 대사관원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소련의 조치로 중국의 정치·경제·군사적 타격은 엄청났고, 이로써 수면 아래에서 진행되어 오던 중소간의 대립은 실체화되었다.

중소이념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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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蘇理念紛爭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와 평화공존노선 채택으로 발단된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 지도부 사이의 논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둘러싼 공산주의 원론(原論)의 해석논쟁으로 전개되었다. 현대세계(주로 자본주의)의 기본적 모순, 전쟁(폭력전쟁)과 평화, 평화공존, 과도기에 대한 시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스탈린(주의)·비판논쟁 등의 주요쟁점들을 중심으로 계속 확대되고 심화되어 소련공산당이 중국공산당을 교조주의(敎條主義)로, 중국공산당이 소련공산당을 수정주의(修正主義)로 규정·비판하는 극한에 이르게 되었다.

1963년 2월 소련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마르크스주의적 통일을 강조하면서 중국공산당을 분열주의자로 몰아붙였고, 중국공산당은 1963년 6월부터 1964년 7월 사이에 소위 '9평(九評:9편의 논문)'을 통해 흐루시초프를 수정주의자라 비난하며 소련공산당의 프로레타리아트 독재 탈피에 대해서도 맹공을 가하였다. 공산주의 2대국의 이념분쟁은 쿠바위기, 중인분쟁, 1963년 7월의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 체결 등 양국의 이해관계가 개재된 국제정세 속에서 국가 대 국가간의 대립과 투쟁으로 변질되었고, 중국공산당은 소련공산당의 지도권에 대한 거부를 분명히 했다.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내란적 권력투쟁인 동시에 마오쩌둥주의의 대두를 의미하며, 류샤오치(劉小奇)·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조정파(調整派)를 수정주의자로 몰아 숙청함으로써 극좌적·섹트주의적 노선을 강화하였다. 중소간의 지도권 쟁탈전은 공산권의 3분화로 귀결되었으며(친소·친중·독자노선), 1968년 8월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자유화운동에 대한 무력개입과 브레주네프 서기장의 '제한주권론'에 이르러 최고조에 이른다. 중소간의 논쟁은 1969년 국경분쟁의 근본원인으로 작용했고 모스크바에서의 소련인과 중국 유학생간의 난투극, 문혁 당시 홍위병(紅衛兵)에 의한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관 포위나 소련 외교관 가족에 대한 위협사태 등 민족적 감정의 대립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중소국경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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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蘇國境紛爭

1969년 3월 우수리강 진보도(珍寶島)에서 중소국경 경비대 사이의 무력충돌로 본격화된 양국간의 국경분쟁은, 역사적으로는 청나라와 러시아 간의 1858년 아이훈 조약, 1860년 베이징 조약, 1881년 이리조약으로 소급되며, 직접적인 계기는 중소이념분쟁에 있었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서구열강의 침탈을 받았고, 러시아 역시 이에 편승하여 상기한 불평등조약을 청에 강요, 러시아는 영토 일부를 할양받고 자국에 유리하도록 국경을 획정했다. 문제는 지도의 부정확성으로 인하여 국경하천인 우수리·아무르(헤이룽) 강상(江上) 섬들의 귀속이 불분명해진 데 있다. 여기에 신장(新疆)지구 카자흐족 지역 귀속문제와 파미르 고원(현재 소련 타지크 공화국 영토의 일부. 1885년 영·러조약에 의해 일부가 러시아에 귀속되었다)에 대한 중국의 반환요구 문제가 추가되었고, 1966년 1월 소·몽고 우호협력 상호조약 개정으로 몽고에 소련군이 진주하였는데 중국은 과거 몽고를 중국의 한 성이라고 주장해 왔으므로 쟁점화되었다. 청나라나 러시아 양국 모두 내란을 거쳐 구체제가 타도되고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는데, 레닌은 서구 열강과 러시아에 의한 중국분할을 범죄행위로 규탄하고, 과거에 맺은 조약들의 불평등성을 인정하면서 1920년 '소비에트 정부는 과거 러시아가 중국정부와 체결한 모든 조약을 무효화시키고, 탈취한 영토 및 모든 것을 영원히 중국에 반환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국경을 중국측 연안으로 획정, 강상의 섬들 대부분을 자국에 귀속시켰다. 스탈린 생존시에도 이 문제가 대두되기는 하였으나 당시의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부각되지 못했다.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와 평화공존노선으로 발달된 중소논쟁이 이념 대립에서 국가 대립으로 변질되기 시작하자 이 문제가 양국간의 선결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1964년 베이징에서 양국간 국경 획정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이미 갈등이 격화된 양국의 주장은 엇갈릴 뿐이었다. 중국은 과거 러시아의 중국 침략·강점사실 인정, 불평등조약의 무효와 국경측량 및 신조약체결, 무력충돌의 회피를 요구하였으나 소련은 이를 거부했다. 1963년 8월 모스크바에서 체결된 미·영·소 3국의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은 중국으로서는 이들에 의한 중국 포위와 소련의 군사적 견제로 판단되었고(당시 중국은 최초의 핵실험을 준비 중이었다), 결국 국경의 수비병력을 증강시킴으로써 양국충돌의 주원인이 되었다. 소련도 평화공존·긴장완화 정책으로 서방측과 전술적인 여유가 생기자 동부 유럽에 배치된 병력을 긴장이 고조되고 있던 국경지대로 이동, 공산주의 형제국을 자처했던 양국관계는 서로 상대방을 가상적국으로까지 상정하는 최악의 상태로 치달았다.

우수리강에서의 충돌에 이어 아무르강·신장 위구르 지역에서도 무력충돌이 발생, 세계를 또한번 대전(大戰) 위기로까지 긴장시켰으나 다행히 그 이상의 악화는 없었다. 1969년 9월 코시긴과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베이징 공항에서 현안을 논의한 후, 10월 양자가 국경회담에 들어갔지만 진전 없이 공전했고, 이후 1980년대까지 양국은 접촉조차 없이 무력 평화 상태를 지속하였다.

중소분쟁은 공산권의 분열과 동서해빙을 촉진시켰다. 중소의 지도권 쟁탈전은 중국과 소련의 대 서방접근을 가속화시켰는데 그 이유는 자국의 세력권 확대였다. 공산권의 다극화 역시 평화공존 무드 확산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대외정책에서 양국은 수시로 충돌했는데, 1979년 4월 중국은 1950년 2월 체결된 중소우호동맹 상호조약(1980년 4월 기한만료)을 일방파기하였으며, 1977년 12월 발생된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이나 1979년 2월 발생된 중국의 베트남 침공의 배경에도 중소간의 패권 다툼이 개재되어 있었다.

중소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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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蘇和解

1970년대만 하더라도 중소간의 화해는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동서 데탕트 무드 속에서 중국은 1971년 11월 국제연합에서 중화민국을 축출하고 중국대표권을 획득할 만큼 국제정치 무대에서 공고한 지위를 확보했으며, 1972년 닉슨의 중국방문을 계기로 하여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증진하는 한편 제3세계와 비동맹권에 대한 협력을 강화, 대소포위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976년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10월 정변'으로 '4인방'으로 지칭되던 문혁파가 실각하고, 문혁 당시 실각했던 덩샤오핑 등의 실권파가 복권되어 실용주의 노선을 표방하자 일시 중소화해 가능성이 예상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은 공동강령에서 명문화하였던 대소편향 노선을 1970년대 중반 이후 180°전환하였다. 그 대표적 사례가 1979년의 중소우호조약 일방파기이며 친소국가인 베트남에 대한 침공이다. 1981년 6월 제11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6中全會)에서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 문화혁명을 전면부정하고, 마오쩌둥의 실정에 대한 비판이 행해졌으나 반면 그의 공적 또한 인정되었으며, 중요한 것은 역사결의가 마오쩌둥주의의 일부 수정이었지 포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국의 덩샤오핑을 주축으로 한 실권파의 실용주의 노선은 국가 근대화를 위한 경제개혁과 개방정책이지 마르크스·마오쩌둥주의의 포기는 아니며, 1989년 6월 발생된 톈안문(天安門) 사태는 그것을 분명히 증명했다.

소련에서는 흐루시초프가 실각하고 1964년 브레즈네프·코시긴·포드고르니 3두체제가 형성되었는데 브레즈네프가 1인자의 위치를 점하였다. 1968년 8월 체코 자유화 운동과 동유럽 위성국가의 정치적 위기상황에 직접개입한 브레즈네프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제한주권론)'을 천명,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소련의 지도권을 강화하며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대 및 제3세계·비동맹권 민족해방투쟁 지원을 역설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데탕트(긴장완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소련의동구권에 대한 지도권 강화는 중국의 맹공과 유고·루마니아·알바니아 등 독자노선 국가들의 거부에 부딪쳤으며, 1977년 이후 유로코뮤니즘까지 대두되자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동유럽 경제협력회의(코메콘)로 축소되었고 사실상 독자노선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닉슨 독트린'과 인도차이나 공산화로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이 후퇴하자, 소련은 데탕트 정책의 추진과 동시에 아시아에 대한 세력확장을 기도, 아시아의 기득권을 주장하는 중국과 또다시 충돌했으며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서방측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1979년 10월 중소외무차관 회담이 개최됨으로써 중소화해가 추진되는 듯하였으나 그러한 사태로 무산되었다. 1982년 3월 브레즈네프는 타슈켄트에서 행한 연설에서 중국과 전제조건 없이 관계개선을 위한 협상 용의가 있음을 강조하고 소위 '2개의 중국론'을 지지하지 않음을 표명하였다.

당시 미국과 중국 사이에는 미국이 중화민국에 무기판매계획을 추진한 관계로 1979년 1월 수교 이후 미묘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중국은 브레즈네프의 연설내용을 국내에 보도하는 등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중국에서도 지도부 유력인사가 다른 공산주의 국가에 대해서 수정주의라는 용어를 사용치 않았다고 표명하여, 부분적이지만 학술교류나 화물수송조약이 체결되는 등 화해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실 1960년대 중소논쟁 이후 양측은 국경지역에 상당한 군사력을 배치, 그 부담은 군사·경제적으로 엄청난 것이었고 이러한 이해관계는 냉각된 양국관계를 해소해야만 풀 수 있는 것이었다.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가 사망하고 안드로포프가 권력을 장악했는데 그는 브레즈네프 노선을 그대로 답습했다. 1983년 3월 모스크바에서 양국 외무장관 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 철수 문제, 국경지역 군사력 감축,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 철수 문제 등 3가지

현안에서 의견접근을 보지 못해 무산되었다. 진전 없이 계속되던 중소화해 교섭은 1985년 3월 고르바초프가 등장함으로써 전기를 맞이한다. 후야오방(胡耀邦)의 이례적인 고르바초프 취임축하 메시지와 고르바초프의 강력한 대중국 관계개선 의사피력을 시작으로 레닌그라드와 상하이에 상호 영사관 개설합의, 양국간 산업·무역협정 체결, 외무장관 정례회담 개최 등 구체적인 조치가 잇달아 양국 관계개선의 청신호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양국 공산당의 화해나 정치관계 개선은 3대 현안으로 아무런 진전이 없는 가운데 1986년 7월 고르바초프의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으로 양국 사이에 정치관계 개선 움직임이 나타났다. '아시아 안보구상전태평양회의'로 집약되는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에서 고르바초프는 브레즈네프의 구상보다 전향적이고 긍정적인 대중국 입장을 표방했다. 국제정세와 양국 국내정세 변화를 예리하게 간파하여 전개된 고르바초프의 대아시아 외교공세는 중국의 실권자 덩샤오핑의 관계개선 용의 멘트가 나올 만큼 상당한 효과를 나타냈다. 그러나 여전히 선결조건인 3대 현안과 뿌리 깊은 중국의 소련에 대한 불신은 고르바초프의 적극적인 대중국 제의를 무산시켰다.

1987년 2월 재개된 국경회담은, 7월 우수리강과 아무르(헤이룽)강 중간선을 국경으로 하자는 고르바초프의 제의를 중국이 수락함으로써 급진전을 보였으며, 8월 우수리·아무르 하천무역 재개와 소련 선박의 상하이 선박수리소 사용 등을 내용으로 하는 협정이 체결되는 등 긴장완화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동년 11월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 70주년 기념식에 중국대표단이 참석하고 헤이룽강 수자원(水資源) 이용계획협정의 합의로 이어진 중소화해 움직임은 친소권 동구국가와 중국의 관계정상화를 유발하고 무역 및 경제협력 증대와 지도층의 교환방문으로 확대되었다.

국경획정 합의에서 도출된 양국 사이의 화해는 1988년 4월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평화협정의 타결로 5월 소련군의 철수가 진행되자 중국은 고르바초프의 정상회담 제의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고, 1989년 2월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소련 외무장관으로서는 30년만에 베이징을 방문, 중국과 캄보디아 내전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공동성명을 이끌어내고, 이어 베트남군의 철수가 진행됨으로써 3대 장애요인이 합의되어 1989년 5월 15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대통령)의 중국방문과 중국실권자 덩샤오핑의 중소정상회담 개최로 어어졌다.

그후 중국은 1989년 5월 천안문 사태가 발생했으며, 1990년 천안문 사태 후 악화되었던 대외 이미지 개선을 위해 계엄령을 해제했다. 천안문 사태 여파로 보수파가 세력을 잡는 듯했으나 1991∼1993년에 밀려든 개혁·개방의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93년 3월 제14기 2中全에서 장쩌민-리펑 체제를 유지, 개방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한편 소련은 1990년 2월 대통령제 도입, 1990년 3월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초대 대통령으로 피선, 1991년 7월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식포기를 선언하고 12월에 소련연방이 해체되고 옐친 대통령이 러시아공화국으로 계승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양국은 이러한 급속한 변화를 거치면서 1995년 5월 장쩌민 주석이 러시아를 방문,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의 동반자 관계를 확인한 데 이어 7월 리펑 총리도 방문, 8개항의 양국협정에 서명했다. 9월에는 양국의 교역 증대 및 군사협력 강화에 합의하는 등 양국 관계가 급속히 개선되었다. 1996년 4월 옐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핫라인 설치, 지적재산권, 우주개발, 핵에너지 개발, 상호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에 관한 협정 등과 관련한 13개의 합의문과 협정에 서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