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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국 제 정 치/지 역 분 쟁/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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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아프리카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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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Africa-民族主義

아프리카 민족주의는 아시아·아랍민족주의의 형성과 성격 및 그 과정에 있어서 다른 것으로, 아시아·아랍민족주의는 서구의 충격이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혁명과정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따라서 아프리카 민족주의는 제1차적 저항 또는 원주민보호주의(nativism)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대내적으로 서구의 식민주의는 극히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아프리카 식민지에 근대문명을 도입하였다. 근대화는 식민통치의 방편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근대화가 미치는 범위 역시 식민본국의 통상과 행정에 필요한 극히 일부지역에만 국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된 근대화도 아프리카사회에 다음과 같은 변화를 일으켰다고 보겠다.

첫째, 경제·사회적 측면에서 볼 때 서구 식민지 통치국은 식민지 경제체제를 자급자족경제로부터 화폐경제로 변화시켰다. 그 결과 노임계급과 신중산계급이 등장하였다. 또한 근대산업과 상업의 발전은 도시화의 경향을 가져왔으며, 도시화는 전통적 혈연관계를 약화시키고 국가통일을 촉진시켰다. 교통통신의 발전은 사회적 유동성(social mobility)을 촉진하였고, 이를 통하여 사회적·정치적 통일을 강화하였다.

둘째, 종교적·교육적 측면에서 볼 때 식민지 통치국이 보급한 서구식 교육과 기독교는 아프리카인들에게 인간의 평등과 자유주의사상을 가르쳐 주었다. 서구적 교육은 서구적 지성인을 산출하였으며, 이 서구화된 엘리트는 자기들이 창출한 식민지 통치자가 바로 자기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정적(政敵)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토착인과는 인종은 같으나 문화적으로는 동화하기 어려운 반면에 통치국인과는 인종은 다르나 문화적으로는 친근감을 갖는 이율배반적인 인간이 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토착인에 대해서는 지배자의 위치에 설 수 있으나, 통치국인에 대하여는 피지배자의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셋째,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식민지 통치국은 식민지역 내에 있는 여러 통치적 정치체제를 통합하고 중앙집권화된 단일정부를 수립하였다. 따라서 전통적 권위를 약화시키고 식민시대 이전의 사회·정치적 단위를 감소시켰다. 또한 유럽세력에 의한 영토소유화는 새로운 민족(nation)을 창조하였고, 이것은 사회적 소통과 경제적 상호교환이 확대됨에 따라 경계선의 창설과 공통된 행정구조와 법률제도, 그리고 지역적 개별성을 상징하는 정치기구의 결과로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서구열강의 식민통치의 결과는 아프리카 민족주의 발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임금노동자와 산중산계급의 등장은 토착인의 정치의식을 배양하였는데, 식민지배체제하에서 노임계급은 실업과 빈곤을 맛보게 되고 산중산계급은 식민지 자본가로부터 압박과 차별을 경험하게 된다. 도시화 및 교통·통신의 발달과 그에 따른 급속한 사회적 이전(移轉)은 비부족적(非部族的) 인종집단간의 사회적 소통을 촉진시킴으로써 민족의식의 근원인 공동운명체적 연대감을 조성하고 민족통합(national integration)에 기여하였다.

또한 서구교육은 식민지 원주민에게 신분과 위세를 누릴 수 있는 지식과 도구가 되었고 새로운 사회구조내의 자극제가 되었으며, 외국통치와 식민주의를 공격하는 이념과 가치가 되었다. 아프리카인은 서구교육을 통하여 과학적 방법과 진보적 사상으로 각성되었다.

서구교육과 기독교의 영향으로 일어난 자유와 평등사상은 식민지 통치국인들이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는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결국 식민통치가 배출한 토착지성인은 식민통치의 모든 부산물을 이용, 식민지주의(植民地主義) 자체를 매장하는 주역이 되었던 것이다. I.Jennings 경이 설파한 것처럼 '수입된 유럽인의 특권제 관료제'가 토착사회에 정착함으로써 여기에 대한 토착인의 정치적 각성이 아프리카 민족주의를 태동시켰다고 볼 수 있겠다. 유럽의 교육에 영향받은 엘리트들이 바로 반식민주주의기치를 들 수 있었는데, 반식민의 감정적 동기는 유럽체제에 대한 가치부정이나 강압에 대한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흑아프리카 민족주의 발생의 대외적 측면에서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2차세계대전이었다. 2차세계대전이 흑아프리카 민족주의의 형성에 미친 영향으로 다음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겠다.

첫째, 민족자결주의와 민주주의 정치사조의 영향이다. 민족자결주의는 윌슨 대통령이 국제연맹에서 제창하여 1918-1919년 전후처리에 적용한 이래 2차대전 후 전세계적으로 만연하여 식민지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민족주의적 운동을 자극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민주주의 정치사상의 국제적 적용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즉 아프리카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식민지 통치자에게 자국에서 실시하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칙'을 식민지에도 적용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둘째, 국제정치의 구조적 변혁, 즉 동서냉전의 영향을 들 수 있다. 2차대전 후 자유주의 이념과 자본주의적 체제를 갖는 국가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자유진영을 형성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소련을 맹주로 하는 공산진영으로 양분되었는데, 미·소는 이질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모두 자기 세력의 확대를 위하여 대체로 반식민주의 원칙을 신봉하면서 냉전을 전개하였기 때문이다.

소련은 반식민주의가 서방세계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공격 이데올로기임을 인식하고 서구의 식민지주의를 비판함으로써 서방을 분열시키는 동시에 식민지 지도자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서방의 식민주의를 공격하면 식민지 지도자들의 지지는 획득할 수 있어도 서방진영의 결속이 약화될 우려가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나 점차 미국의 국가이익을 위하여 우방국들에게 식민지주의를 버릴 것을 종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영국·프랑스 등은 양차대전 기간동안 아프리카 원주민으로부터 협력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아프리카인들에게 자치권의 허용을 약속함으로써 자치의 의지가 충만되었는데 이것이 민족주의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같은 양진영의 대립 와중에서 아프리카인들의 민족적 투쟁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반면 아프리카의 민족주의는 양 강대국이 자신의 국가이익을 위하여 이용하려 했기 때문에 민족주의의 발전에 저해요인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셋째, 아시아 식민지역에서 일어났던 민족주의 운동에 자극받아 아프리카사회에 있어서도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증대되어 아프리카인의 정치의식을 앙양하였기 때문이다. 2차대전후 아시아 지역에서 인도네시아(1945), 인도(1947), 파키스탄(1947), 미얀마(1948)가 차례로 독립을 획득하였는데, 특히 인도의 독립운동 지도자인 M. 간디는 비폭력 수단에 의하여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은 아프리카의 여건상, 그리고 아프리카의 문화적 전통에 비추어 비폭력적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인도의 독립은 그 가능성을 시사해 준 것이다.

마지막으로 식민지국의 쇠약과 식민지의 국제감독화의 영향도 컸다. 2차대전후 서구 식민지국은 전승국, 패전국을 막론하고 정치적·경제적으로 쇠약하였다. 특히 패전국인 독일·이탈리아의 아프리카 식민지는 전후에 창설된 국제연합의 관할하에 들어갔는데, 국제연합은 그 전신인 국제연맹보다 더 강력한 식민지 창설에 중추적 역할을 한 서방 식민통치국의 반대로 극히 약화되었다. 국제연합은 식민지를 두 가지로 분류하고 옛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있던 식민지와 패전국민의 식민지만 신탁통치하에서 국제연합이 감시하고 궁극적으로는 독립을 부여하도록 되어 있으나 전승국의 식민지는 신탁통치기구의 감시하에 두지 않고, 비자치령이라는 이름아래 국제연합의 감시를 거의 받지 않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생독립국은 대거 국제연합에 가입한 후 세계여론의 힘을 입고, 서구분쟁의 혼란을 이용하여 비자치령에대한 감시를 강화하였다. 식민지주의의 종결과 식민지의 즉시 독립을 요구하는 국제연합의 결의는 식민지국에 직접·간접으로 압력을 가하였던 것이다.

또한 지그문트에 의하면, 아프리카대륙에서 민족주의를 성장하게 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① 생존경제에서 화폐경제로의 변동, 임금노동력의 성장에 따른 중산계층의 생성 ② 도시화를 통한 인종집단의 강화와 상대적인 민족집단의 성격 강화, 사회적 동원을 통한 의사소통과 교통의 확대로 정치·사회적 재결합의식의 고양, 그리고 서방교육의 영향으로 원주민에게 촉진시켰으며, ③ 기독교의 복음전파, 서방교육에 대한 욕구불만, 국가상징의 갑작스런 날조 등이 민족의식을 촉진시킨 요인이라고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상에서 필자는 흑아프리카 민족주의 발생의 중대한 여건을 대내적 측면과 대외적 측면에서 각각 열거하였다. 이 요인들은 그 어느 것이 더 중요한 변수였다고 하기 어렵고, 대내외적 제변수간에 상호회귀적 효과가 작용함으로써 민족주의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흑아프리카 민족주의 전개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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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Africa 民族主義-展開過程

맹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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萌芽期 (1900-1945) 이 시기는 1900년의 범아프리카 항쟁회의에서부터 1945년의 제5차 범아프리카회의 이전까지를 말하며 그 특징은 범아프리카주의(Pan-Africanism)라고 할 수 있다.

흑아프리카 민족주의의 연원은 1900년 런던에서 개최되었던 '범아프리카항쟁회의(Pan-African Protest Conference)'까지 소급해 올라가는데, 이 회의는 이후 5차에 걸쳐 열린 범아프리카회의(Pan-African Conference)의 전신이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범아프리카회의를 줄곧 주도해 왔던 듀뵈는 1900년부터 런던 회의에서 '20세기의 문제점은 인종차별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인종적 장벽을 초월하여 황색·갈색·흑색인에게도 민주주의적 이념을 확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듀뵈의 인종박애주의적 평등사상은 1919년 파리에서 열린 제1차 범아프리카 회의에서부터 1945년 맨체스터 제5차 범아프리카 회의에 이르기까지 일관하였으며, 흑인의식(Black Consciousness)을 고취하고 흑인의 인종적 해방과 흑인이 사회적 지위 향상에 메시아적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듀뵈의 범아프리카주의 사상보다 훨씬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범아프리카주의가 자메이카 출신 가비(Marcus M. Garvey)에 의해 뉴욕을 무대로 등장하였다. 가비는 1916년 미국에 건너와 블랙시오니즘(Black Zionism)의 기치아래 UNIA(Universal Negro Improvement Association)를 조직했다. 그는 전세계 흑인 인종선언을 발표하는 동시에 '아프리카인을 위한 아프리카(Africa for the Africans)'라는 '흑인연대(Black Solidarity)'를 고무하면서 아프리카로의 귀환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가비의 이같은 운동은 듀뵈 중심의 온건주의자들의 도전을 받고 1923년 그가 독직사건으로 체포됨으로써 무산되지만, 그의 철학과 사상은 후에 엔크루마와 같은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와 같은 아프리카대륙 외부로부터의 민족주의운동과는 별개로 대륙 내에서도 민족주의적 조직이 결성되기 시작했다. 1920년에는 황금해안(Gold Coast)을 중심으로 나아지리아, 시에라리온, 감비아의 대표가 아크라(Accra)에서 영국령 서아프리카 국민회의를 조직하였고, 영국령 동아프리카의 케냐에서는 매콜리에 의해 KCA(Kikuyu Central Association),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세네갈에서는 구에이에 의해 SFIO(The Sengegalese Section of French Socialist Party)가 각기 결성되었다.

또한 1923년 매콜리의 NNDP(Nigerian National Democratic Party)가 조직되는 등 초창기 흑아프리카 민족주의의 생성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요컨대 제1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의 아프리카 민족주의의 특징은 범아프리카 민족주의라는 점이며, 이것은 인종적·지리적 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인종적 성격이 강한 민족주의였으나 점차 지역적 성격이 강화되는 변화를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개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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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花期 (1945-1960) 이 시기는 1945년 제5차 범아프리카 회의로부터 1960년 아프리카의 해(Year of Africa)를 맞이하기 직전까지의 기간에 해당하며, 범아프리카주의가 후퇴하고 아프리카 대륙에 국한되는 본격적인 아프리카 민족주의 성격, 즉 영토적 민족주의가 그 특징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흑아프리카 민족주의의 대두는 제2차대전을 계기로 크게 진전되었는데, 그것은 1945년의 맨체스터 5차 범아프리카회의를 계기로 주도권이 듀베에서 엔크루마, 케냐타, 비오그니 등 아프리카 토착민출신 지도자들에게 넘어가면서 사하라 이남의 흑아프리카 민족주의운동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1947년 단쿠아(J.Danquah)에 의한 황금해안통일회의(United Gold Coast Convention)나 1951년 요루바족 문화단체인 Egbe Omo Oduduwa를 기반으로 한 행동집단 등 영국령 아프리카에서 민족주의 정당단체들이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령 아프리카에서도 1946년 코트디브와르의 비오그니를 중심으로 AOF(Afrique Equatorale Fran

aise)의 모든 영역은 물론이고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인 토고 및 카메룬을 횡적으로 결합시켜 지역간 민족주의정당인 아프리카민주동맹(RDA:Rassemblement Democratique Africaine)을 창설하였는데, 이 동맹은 아프리카의 개성 확인과 자유의사에 의한 제국민의 연합에의 동의에 의한 식민지 지배에서의 탈피를 지도이념으로 하고, 정치적 차별의 철폐, 평등한 시민권의 적용 등을 주장하면서 아프리카 최대의 민족주의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50년대에 들어와 아프리카 민족주의 운동은 아시아와의 연계 속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1955년의 반둥회의가 그 대표적 모임이었다고 보겠다.

그런데 1957년 가나(Ghana)가 사하라 이남의 흑아프리카국가 중에서 최초로 독립함으로써 흑아프리카 민족주의운동은 엔크루마를 중심으로 하는 새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1958년 Nkrumah의 주도로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서 제1차 아프리카독립국회의(CIAS;Conference of Independent African State)가 개최되어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반인종차별주의·반둥회의 원칙고수 및 중립주의 외교노선 등 11개항을 결의하였다. 또한 동년 12월 역시 아크라에서 소집된 제1차 전아프리카인민회의(AAPC:All Africans Peoples Conference)에는 전아프리카 대륙에 산재해 있던 62개의 민족주의 정당단체가 참가하여 AAPO(All Africans Peples Organization)를 창설하였다.

이러한 흑아프리카 민족주의운동은 기니의 토레(S. Toure)가 "기니는 노예의 몸으로 부를 누리는 것보다 자유인으로서 빈곤을 택하겠다"면서 프랑스 공동체의 참가를 거부하고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아프리카 민족주의 사조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고, 제2회 ICAS가 1959년 8월 라이베리아에서, 제2회 AAPC는 1960년 1월 튀니스에서 계속됨으로써 1960년을 전후하여 절정에 달하였다.

갈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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葛藤期 (1960-1975) 이 시기는 1960년 소위 '아프리카의 해'를 맞이하여 개최된 제3회 CIAS로부터 현재까지를 말하는데, 그 특징은 범아프리카주의가 분열하면서 대륙적 범아프리카주의와 영토적 민족주의간에 갈등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1960년 아프리카대륙에는 17개국이 대거 독립하여 아프리카대륙의 정치구조 형성에 새로운 문제점을 제기했으며, 아프리카 민족주의의 목적추구에도 전후의 동질적 일체성이 소원(疎遠)하게 되고 개개의 국가이익이 우선하는 분열화 경향으로 그 양상이 변질되었다. 이같은 분열을 가속화시킨 외적 변수는 동서냉전이었으며 아프리카대륙이 강대국의 세력확장 대상지역으로 등장함으로써 이해관계의 상충으로 내적 단합이 저해받게 됨을 의미한다.

아프리카 독립국들의 부조화는 1960년 모리타니공화국의 UN가입 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소집된 브라자빌 회의에서부터 더욱 노골화되기 시작한다. 이 회의는 아프리카 통합에 점진론을 주장하는 국가들의 모임으로써 전 프랑스령 아프리카에 속했던 12개국이 참가하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브라자빌그룹에 반기를 들고 아프리카 통합에 급진론을 주장하는 국가들이 1961년 1월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회의를 개최함으로써 아프리카 민족주의운동은 이원화되었다.

브라자빌그룹과 카사블랑카그룹에 이어 제3분리집단이 1961년 5월 리베리아의 몬로비아에서 회의를 개최함으로써 '몬로비아그룹'이 형성되었는데, 그 목적은 브라자빌과 카사블랑카그룹의 대립을 해소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2차에 걸린 이 회의에 카사블랑카그룹이 계속 불참함으로써 양 그룹의 통합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같은 다양한 단계를 거치면서 아프리카 민족주의는 소국적 민족주의(Micro-Nationalism)보다는 대륙전체를 단위로 한 대국적 민족주의(Macro-Nationalism)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대국적 민족주의의 하나의 결실로 1963년 OAU(Organization of African Unity)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외관상 아프리카대륙의 공동체 결성과는 달리 개별 독립국가에 게재하는 다양한 이질적 요건의 이해관계가 상치되기 때문에 목적 추구의 동질성을 쉽사리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아프리카 민족주의는 효과적인 국가건설에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OAU의 귀속이 그러한 일차적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에는 개별국가의 소속의식은 그만큼 약화될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흑아프리카에 대한 강대국의 개입은 다양한 국가이익을 갖고 있는 이들의 합의(Consensus)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1976년 1월 10일 아디스아바바에서 OAU 창설 이래 처음으로 흑아프리카의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긴급 수뇌회의를 열었으나 르안다 정부(MPLA) 승인문제에서 회원국이 22대 22의 동수로 분열됨으로써 부결되었으며 앙골라, 남아프리카 문제를 둘러싸고 급진·온건파간의 분열이 심화되었음은 하나의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이 단계에서의 흑아프리카 민족주의는 범아프리카주의와 영토적 민족주의, 소국적 민족주의와 대국적 민족주의가 상호갈등을 일으켰으며, 특히 범아프리카주의는 대륙적, 인종적인 성격이 아니라 사상적 성격이 강하다고 보여진다.

혼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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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현재) 混亂期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과 탈식민지화 이후의 정치상황은 내적으로는 군부쿠테타의 악순환으로 인한 끊임없는 정정(政情)불안으로 요약되며 이는 정치지도자의 잦은 교체로 나타났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각국의 정치지도자 교체과정과 '민족없는 민족주의' 형성과정에서 나타난 지역분쟁에 따른 새로운 외부세력의 개입으로 이 시기는 대내외적으로 분쟁 및 혼란기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독립 후 정권교체를 한 차례도 겪지 않은 국가는 아프리카대륙 전체 55개국 가운데 단지 9개국뿐이었으며, 1950년대 이후 아프리카 각국 전체의 정치지도자 교체는 총 137회로, 이 가운데 폭력적 교체 92회, 평화적 교체 45회로 나타나고 있어 아프리카 대륙의 전반적인 정정불안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생독립국들은 서구 열강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는 대로 보다 평화스러운 장래를 기대했으나, 이와는 반대로 끊임없는 내란, 전쟁, 인종문제, 학살, 추방 또는 인민해방, 독립전쟁 등으로 시달려 왔다. 그 결과 1958년 이후에 치른 주요전쟁만 해도 20회가 넘으며, 약 40회의 쿠데타를 겪었다. 21개국이 아직도 일당독재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10개국가가 군정하에 있는 실태이고, 1979년에만도 무려 15개국 이상이 참전해야 했던 전쟁이 8회나 있었다. 그리고 민주화가 이루어진 나라는 세네갈, 베냉 등 단 2개국뿐이며, 많은 국가들이 민주화 과정에 있거나 그 이전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중국·소련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제각기 아프리카대륙에서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보장받기 위하여 치열한 외교적 노력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아프리카민족주의에 또 다른 도전이며 분열의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로디지아분쟁, 에리트리나분쟁, 콩고위기, 앙골라사태, 소말리아 국경분쟁사태, 나미비아문제 등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살펴보면, 새로 독립한 아프리카제국은 현대국가건설에 있어서 중요한 민족형성, 민족통일체, 민족적 단일성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었으나, 부족의 개념이 더 강한 아프리카인들에게 민족적 의식을 주어 현재의 국경선 안에서, 국가의 통일성을 추구하고 부족을 넘어 하나의 새로운 민족의 이름으로 국가를 충성의 대상으로 삼게 한다는 것은 7백에서 1천에 가까운 부족들이 있는 아프리카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결과 정치제도의 안정화, 정책의 일관성, 정치문화의 탁월성보다도 개인중심의 정치체제, 정치적 참여의 허구화, 비효율적인 관료제도와 행정, 정책형성의 독립과 일당독재 등의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또한 부족간의 그와 같은 동족의식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식민주의가 사라지기 전 민족주의운동에도 저해요인이 되었으며, 그들의 힘의 부족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민족주의자가 열망하는 국가의 형성에 장애요인이 되었으며,범아프리카주의도 매우 복잡하고 광범위하게 범아프리카주의를 이론상의 환상에 지나지 않게 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최근의 흑아프리카 종족분쟁상황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사하라사막 이남에 살고 있는 종족은 1천개가 넘는데, 국가는 그것도 인위적으로 46개만이 세워졌다. 이처럼 많은 종족들이 한 울타리 안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국가적 통합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자연히 주도권을 잡은 종족이나 정치집단은 독재적인 통치를 시행하고, 이를 지속하기 위하여 외세와 결탁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200만명의 난민이 발생한 '르완다사태'도 후투족과 투치족의 해묵은 갈등의 연속이다. 또 1993년까지 내전과 기아로 수십만명이 사망한 '소말리아사태'도 결국은 종족을 바탕으로 결성된 5개 전투단체간의 싸움의 결과이다. 갈등의 원인으로는 생태적이고 역사적인 것도 있지만 여기에 종교, 이데올로기 등 갖가지 외래적인 요소들이 중첩돼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해결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즉 아프리카를 분할통치했던 서구 열강들은 식민지 지배를 쉽게 하기 위해 종족간의 경쟁, 적대감 등을 이용했다. 그 결과 이전까지 있었던 종족간의 반목은 더욱 더 깊어지게 되었으며, 독립 후에도 인위적인 국경선 때문에 정치발전을 꾀하기는 어려웠다. 여기에 전후 냉전체제가 아프리카신생국들을 대상으로 미·소의 치열한 영향력 확장의 시험장이 되어 왔는데, 이것 역시 종족간의 경쟁과 반목에 다시 이데올로기라는 갈등요소를 첨가시켰다.

냉전체제하에서는 세계사를 압도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해 종족간의 갈등이 아프리카민족주의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지 못했지만, 냉전의 점진적 종식과 더불어 종족간의 갈등이 재연되고 있다. 이에 대한 처방으로 처음에는 각국에서 다당제 선거 등 민주화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오히려 서구적인 민주제도가 이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것만이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흑아프리카 대륙의 수많은 종족들이 공동도 선을 찾지 못하는 한 부족간의 세력다툼은 전쟁, 학살, 추방으로 나타나고, 이에 따른 범아프리카주의의 향방도 매우 유동적일 것이다.

앙골라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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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戰

1855년 이후 포르투갈의 식민지배하에 놓인 앙골라는 1951년 포르투갈의 해외속주로 편입되었는데 1953년부터 앙골라 혁명 망명정부와 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을 주축으로 독립투쟁이 가속화되었고 1961년 이후 무장항쟁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혁명 망명정부가 앙골라 민족해방전선(FNLA)과 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UNITA)으로 분열, 3파간의 헤게모니 투쟁이 일기 시작했다. 식민지배체제의 붕괴라는 세기적 조류에 아랑곳없이 독재체제와 식민주의를 고수해 왔던 포르투갈에서 1974년 4월 군부의 쿠데타가 발생, 독재정권을 붕괴시키는 동시에 식민지배체제의 포기를 선언하였다. 그 결과 1974년 10월 포르투갈 군사정부는 앙골라 독립운동 제파와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1975년 1월 3파와 독립협정을 조인, 동년 11월 11일을 독립선포일로 정하였으나 MPLA·FNLA·UNITA 3파가 정권획득을 위한 투쟁에 돌입함으로써 내전이 발발하였다. 결국 앙골라는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는 MPLA와 중국·자이르·미국 및 서방국가들의 지원을 받는 FNLA,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잠비아, 포르투갈계 및 백인의 지원을 받는 UNITA 간의 3파 내전에서 MPLA가 양파를 제압하고 1975년 11월 앙골라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앙골라 내전은 외세의 개입으로 인한 국제대리전 양상과 더불어 로디지아(현 짐바브웨)·자이르·남아프리카공화국·잠비아 등 주변국가들에 대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을 야기시켰으며 미·소간, 미·쿠바간 외교적 대립을 심화시켰다. MPLA에 밀려 자이르 접경지역으로 퇴각한 FNLA는 1980년 초반 이후 궤멸하였으나 잠비아 국경지역으로 퇴각한 UNITA는 미국 등 서방국가의 지원하에 대 MPLA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앙골라의 MPLA 정권은 아프리카의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지원을 선언, 나미비아와 로디지아의 해방투쟁을 지원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계속적인 무력충돌을 빚어왔는데 1984년 2월 양측간 정전협정을 체결, 분쟁을 일단락하였고 1988년 10월 쿠바·앙골라·남아프리카 공화국 3국은 국제연합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서남아프리카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나미비아 독립과 앙골라 내전의 종식을 위한 동협정에 의해 1989년 1월 쿠바군의 철수가 시작되었으며, 1995년 5월 산토스 대통령과 반군지도자 사빔비간의 평화회담으로 20년간의 내전이 종결되었다.

차드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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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戰

1960년 8월 프랑스령 아프리카 공동체에서 독립한 차드는 차드진보당(CCP)의 일당독재가 계속되는 가운데 종족·종교분쟁의 불씨가 확대되고 있었다. 즉 11개 주요종족에 192개 소수종족이라는 복잡한 국민구성에 북부지역의 아랍계·회교계 부족과 남부지역의 기독교계·흑인계 부족간의 대립이 날로 격화되고 있었다. 1965년 이후 북부·중부의 회교계 부족이 분리독립운동을 전개, 중앙정부와 대립하기 시작했고 남부의 흑인계는 사라족을 중심으로 차드 민족해방전선(FCNC)을 결성, 식민주의 타도와 연합정부의 수립 및 외세의 철수 등을 요구하면서 집권 CCP에 대한 투쟁에 돌입했다. CCP 정권은 남부계로서 그 때문에 북부의 회교계가 분리독립투쟁을 전개한 것인데 1978년 11월 주요종족간의 합의로 남북부 통합과도정부(GUNT)가 수립, 집권 CCP를 붕괴시키고 선거에 의한 신정부수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남부·북부부족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GUNT는 대통령 우에에이와 국방장관 아브레가 권력을 양분하는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는데, 아브레가 반정부 북부군(FAN)을 이끌고 우에데이 정부와 내전에 돌입했다. 종족·종교대립에서 발단된 차드 내전은 1980년 12월 우에데이가 카다피에게 지원을 요청, 7천 명의 리비아군이 개입함으로서 그 양상이 변질되기 시작했고 아브레는 수단·자이르·이집트(그 배후는 프랑스)의 지원 아래 우에데이에 대항했다. 1982년 6월 아브레가 우에데이 정부를 축출하고 은자메나를 점령하여 대통령에 취임, 정권을 장악하였고 리비아로 망명한 우에데이는 반군의 입장에서 아브레 정권타도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1983년 6월 리비아군의 지원하에 우에데이의 공격이 재개되었고 이에 구종주국 프랑스와 인접국 자이르가 아브레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파병했으며 미국 또한 군사원조를 제공하였다. 이미 강대국·주변국가들이 이해관계가 얽히기 시작한 차드 내전은 우에데이가 북부지역의 전략요충지를 점령하면서 '적색선'을 중심으로 아브레 통치지역(흑인·사라족 지역)과 우에데이 점령지역(아랍·회교계 지역)으로 2분되었다. 1984년 9월 프랑스와 리비아간 주둔군 철수가 합의되어 소강상태에 들어가 수습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으나 리비아가 합의를 파기, 1985년 2월 리비아군의 지원하에 우에데이의 공격이 재개되자 프랑스도 아브레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재파병함으로서 내전은 재확대되었다. 이 기간중 아브레는 FAN을 독립혁명 민족운동(UNIR)로 개편, 정치세력화함과 동시에 강대국·주변국가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외교적 공세를 전개했는데 인민군(FAP)을 주축으로 한 우에데이 측은 1984년 8월 이후 애국세력동맹(RFP)과 행동조정위원회(CAC)로 분열되었다.

1986년 2월 이후 내전이 격화되면서 프랑스가 우에데이측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확대했고 이에 리비아가 아브레측에 보복공격을 가하면서 프랑스군과 리비아군의 직접 대결이라는 국제전 양상을 시작되었다. 결국 차드는 프랑스의 직접개입하에 미국·이집트의 지원을 받는 아브레측과 리비아의 직접지원하에 소련·에티오피아에 밀착한 우에데이측 사이의 정권획득 투쟁의 결과로 사실상 파괴와 사살이 계속되는 국제대리전장이 된 것이다.

전세는 점차 아브레측에 유리해져 리비아군과 우에데이는 북부지역으로 몰리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우라늄·마그네슘 등 광물보고인 북부 아오즈 지구의 귀속문제로 차드·리비아간 일대쟁탈전이 전개되었으나 양국이 OAU에 일임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일단락되었고 이를 기초로 아브레측과 리비아는 정전에 합의했으며 1988년 5월 리비아는 아브레정권을 승인, 전쟁종결을 선언했다. 1990년 12월 데비의 구국애국운동(MPS)이 리비아와 수단의 지원하에 쿠데타가 성공하였고, 1997년 첫 민선대통령이 되었다.

콩고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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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戰

벨기에 국왕의 사유지(직할식민지)에서 1960년 6월 킨샤샤 콩고로 독립한 직후부터 카사부부·루뭄바·촘베 3인이 3파전을 벌였는데 당시 총리 촘베가 동부의 카당가주에서 분리독립을 선언, 당시 대통령 카사부부와 대립하는 사이에 1965년 11월 당시 육군사령관 모부투가 쿠데타를 일으켜 2자를 축출하고 집권했다. 모부투는 탈서구화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1971년 국명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하고 일당독재 체제와 민족주의가 짙은 사회주의적 개조작업을 강행하였다. 좌경화하기 시작한 모부투는 중국·북한에 접근했으나 1976년 이후 앙골라 내전사태를 둘러싸고 자이르가 친서방계인 FNLA를 지원하는데 반하여 북한이 MPLA를 지원하고 그 전해인 1975년 11월 북한 군사고문단에 의해 양성된 군대 일부가 무장항명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친서방으로 반전하기 시작했다. 1977년 3월 소련과 쿠바군의 지원을 받고 있는 앙골라(MPLA 정부)로부터 '콩고 민족해방전선(FNLC)'이라고 밝혀진 무장세력이 남부 샤바주에서 카탕가주로 침입하자 모부투는 그들이 반란세력을 빙자하여 앙골라군이 소련과 쿠바의 지원하에 침공한 것이라고 비난하며 서방측의 원조를 요청했다. 전기한 바와 같이 콩고민주공화국(자이르)는 앙골라 MPLA 정부에 대항하고 있는 친서방계 FNLA를 지원하고 있었고 앙골라의 MPLA는 소련과 쿠바의 지원하에 아프리카 민족해방투쟁과 사회주의혁명의 전위임을 자처하고 있었으며, 1972년 이후 좌경화하기 시작하였다가 다시 서방측으로 반전하고 있었다. 소련·쿠바·앙골라 MPLA는 자이르의 주장을 부인했으나 이미 앙골라에서 경험한 바와 같이 아프리카 신생국가들의 공산화를 우려한 서방국가들은 콩고 정부에 대한 군사지원을 추진했다. 1977년 4월 모로코군이 직접 개입했고 이어 프랑스·미국·벨기에·이집트·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의 지원과 개입이 계속됨으로써 자이르 콩고군은 반격을 개시, 반란세력은 패퇴하였다. 1978년 5월에도 FNLC가 앙골라·쿠바군의 지원하에 재침입하였으나 프랑스·벨기에·모로코의 직접 개입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자이르 정부군의 반격으로 격퇴되었고 1979년 12월 동부지역에서도 일련의 정부 전복기도가 있었으나 역시 진압되었다. FNLC 또는 카탕가군으로 지칭되는 반정부 세력은 과거 모부투에 의해 축출된 촘베를 지지하는 분리주의 세력으로 1983년 1월 망명 반정부그룹을 결집하여 '콩고 민주회복전선'을 결성, 반정부투쟁을 전개하였다. 그후 1994년 르완다에서 후투족이 투치족을 집단 대학살하였고, 투치족 정부가 들어서면서 보복을 우려한 후투족 200만 명이 콩고로 탈출하여 분쟁이 확대되었다.

에티오피아·소말리아 영토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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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土紛爭

에티오피아 영토의 4분의 1을 점하는 아프리카 동북부 오가덴 사막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양국간의 분쟁사태를 말하는데 '아프리카의 모서리'라고 지칭되는 에티오피아·지부티·소말리아 및 그 주변부는 전략적 가치 때문에 미·소의 군사전략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긴장지역이다. 에티오피아는 식민지시대부터 아프리카 유일의 독립국으로서 1936년 이탈리아에 일시 점령당했다가 1941년 영국의 지원하에 국권을 회복했다. 1952년 이탈리아령 에리트리아 분리독립투쟁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군주정 당시에는 친서방노선을 견지해왔으나 1974년 9월 쿠데타로 군사조정위가 정권을 장악, 1975년 3월 군주정을 폐지하고 일당제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내부의 권력투쟁을 거쳐 군사정부는 반미친소 좌경화노선을 선언했는데 그 와중에서 에리트리아 분리독립운동이 가열되자 군사정부는 강경한 탄압을 가했고 이러한 에티오피아 정정불안에 편승, 소말리아가 오가덴 사막지역의 '서부 소말리아 해방전선(WSLF)'의 투쟁을 지원한다는 명목하에 에티오피아에 침입함으로써 양국간의 분쟁이 발달된 것이다. 소말리아는 식민시대 당시 이탈리아령과 영국령으로 분리되어 있다가 1960년 6월 북부의 영국령이 먼저 독립, 동년 7월 이탈리아령을 합병하여 단일국가를 이루었는데 1969년 10월 쿠데타로 군사혁명평의회가 정권을 장악,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하면서 친소 비동맹노선을 추구하였다. 소말리아 집권 군사정부는 인접국가들에 흩어져 있는 소말리족을 흡수, 대소말리아 건설이라는 침략적 세력확대정책을 추진하여 인접국들과 분쟁이 계속되었는데, 오가덴 사막지역에 거주하는 소말리아계 주민을 사주하여 WSLF를 조직케 하고 그를 지원하여 오가덴 지역을 장악한 것이다.

오가덴 사막은 우라늄 매장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에티오피아는 국가 총동원령을 선포, 반격에 나섰으나 초기에는 WSLF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사실상 양국은 모두 사회주의 좌경화 노선의 군사정권들로서 서방세계로서는 달갑지 않은 국가들이나 분쟁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에티오피아가 소련에 원조를 요청, 쿠바의 직접 개입하에 소말리아군과 WSLF를 패퇴시킴으로써 일대 변화가 발생했다. 즉 당시까지 친소노선으로 편향해온 소말리아는 소련이 에티오피아를 지원하자 1977년 11월 14일 소련·쿠바와의 외교관계 단절을 선언함과 동시에 친서방 노선으로 급선회했다. 그 결과 소말리아는 미국·프랑스·중국·온건 아랍국가들의 지지를 받아 에티오피아와의 분쟁을 계속했는데 일단 에티오피아가 오가덴 지역을 회복했다. 그러나 양국간의 군사적 긴장상태가 지속되고 있고 WSLF는 에티오피아 군사정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는데, 친서방화한 소말리아는 1980년 미국과 군사기지 제공협정을 체결하였다.

에리트리아 분리독립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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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離獨立紛爭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의 유일한 해안지역의 일부로서 19세기중 이탈리아에 강제 할양되었고 이를 근거로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에티오피아를 강점하였다. 1941년 국권을 회복한 에티오피아는 1947년 강화조약에서 이탈리아가 동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자 국제연합에서 영토회복을 주장했고 에리토리아측은 독립을 주장, 논란끝에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연방제'가 결정되었다. 그 결과 1952년 6월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연방법이 공포되고 에리트리아 헌법이 제정되어 연방제가 실시되었으나 에리트리아측은 연방제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는데, 에티오피아 중앙정부가 1960년 5월 연방법을 폐기하여 에리트리아를 특권주로 격하시키고 1962년말 다시 일반주로 격하시켜 합병함으로써 분리독립투쟁이 본격화된 것이다. 저항정신이 강하고 더욱이 독자적인 정치권력을 구축·향유한 바 있는 에리트리아인들은 에티오피아에 맞서 저항조직을 결성했는데 그것이 '에리트리아 인민해방전선(EPLF)'이다. EPLF의 투쟁이 가속화되자 에티오피아정부는 에리트리아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독자적인 제도를 인정하는 등 유화정책을 실시함과 동시에 EPLF에 대한 정치적·군사적 탄압을 강화했는데, 1970년대 중반 에티오피아의 정치적 변혁사태와 더불어 주변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려지면서 사태는 확대되기 시작했다. 1991년 5월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과 함께 에티오피아 멩기스투 독립정권을 축출하고 에리트리아 인민해방전선 독자정부 수립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