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과 미국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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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의 관계〔서설〕[편집]

韓國-美國-關係〔序說〕

일제에서 해방된 한국의 시한적인 통치기관이었던 미군정은 소련과 한국통일의 방법을 모색하기 위하여 1946년 3월 서울에서 양국 점령군 대표로서 구성되는 미·소 공동위원회를 열었다. 그러나 양측은 이 회의에서 아무런 타결을 보지 못하고 다음해 8월 해산하였다.

공동위원회는 본질적으로 한국통일을 위한 어떠한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화합이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한반도의 통일이 친미적으로 이루어지기를 주장했고, 소련은 소련대로 친소적으로 통일되기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소련 점령군과의 협상에 실패한 미국은 양자간의 타협에 의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1947년 9월 유엔총회에 한국문제 해결을 위탁했다. 당시 공산블록을 제외한 대다수의 회원국들은 미국측의 영향하에 있었으므로, 미국이 제의한 한국통일 결의안은 11월의 총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반대로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어 1948년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이 날짜로 미군정은 통치권을 한국정부에 일임하고 해체되었다.

건국초기의 한국외교는 대미일변도였다. 이 시기에는 대내적으로 정파(政派)의 난립과 사회혼란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시기였는데다가, 북한이 38선 부근에서 군사적 도발행위를 자행하고 남한에서 게릴라와 선동을 일삼고 있었으므로 미국의 군사적 뒷받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2차대전 이후 국내사정 때문에 대폭적으로 군사비를 삭감해야 했고, 그 결과로 병력감축이 불가피하게 되자 한국으로부터의 철군(撤軍)이 또한 어쩔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미국은 원자탄의 위력을 과신한 나머지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국지전(局地戰) 또는 제한전(制限戰)은 원자탄의 위협 때문에 발생치 않을 것이라고 오판(誤判)하게 되어, 주한미군의 철수가 전략적으로 정당화되었다. 또한 주한미군에 대한 소련의 날카로운 비난도 겹치고 해서 미국은 1949년 6월 군사고문단(KMAG)의 자격으로 500여명의 병력만 남겨 놓고 미군을 완전히 철수시켰다.

2차대전 중 동구(東歐)에서 시작된 미·소간의 냉전(冷戰)은 확대되어 이미 한반도에서도 날로 격화해 가고 있었다. 트루먼 미국대통령은 한국을 민주주의가 공산주의의 위협하에서도 경제적으로 번영할 수 있다는 시금석(試金石)으로 삼으려 했다. 1949년 6월 이른바 한국을 시금석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의회에 보냈다. 그래서 애치슨 국무장관도 1950년 1월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할 때 트루먼 대통령의 2개 시금석안을 반복해서 지지했다. 즉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은 알류샨열도(列島)로부터 일본의 류큐제도(琉球諸島)를 거쳐 필리핀에 이른다고 밝힌 다음, 미국이 일본의 안전보장에 직접 책임을 지고 있는 바와 같이 한국의 안보에도 미국의 책임이 지워져 있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이후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의 경제부흥을 위하여 장기원조계획을 입안하였으나 이 안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의 몰락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공화당의원들의 비협조적인 의회전략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고 미미한 원조만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을 뿐이다.

한국은 처음부터 주한미군의 철수를 강력히 반대했으나 일단 미국의 결정에 의하여 철수가 단행되기 시작하자 무기원조 획득에 집중적인 정책을 폈다. 이대통령은 집권하면서부터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미국에 충분한 군비(軍備)를 지원해 달라고 촉구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세력의 서유럽에의 팽창저지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터였으므로 북한 정복에 흥미를 갖지 않았다.

실상 1949년 12월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축출이 되고 중국 본토를 중국공산당이 장악함으로써 소련 이외에도 중국이 북한측에 국경을 접하게 되었으므로 북진통일은 한층 더 어렵게 되었다. 더구나 미국의 대한정책(對韓政策)은 군사력의 증강보다도 서구의 부흥을 모방한 경제부흥을 최우선 정책으로 설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통령의 북진통일을 군사적으로 뒷받침하기는 곤란했다.

1950년 6월 북한이 무방비 상태인 남한을 침범하자 한국을 민주주의 성장의 시금석으로 결정한 바 있는 미국은 즉각 한국에 3군을 파견하였다. 한편 미국은 북한의 남침을 유엔에서 탄핵하고 16개국으로 편성된 유엔경찰군을 파견하는데 성공하였다. 휴전회담이 개시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집요하게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과 유럽의 안보문제 그리고 미국내의 사정 때문에 전쟁종결에 박차를 가했다. 한국에는 경제원조와 한·미 방위조약의 체결을 약속하고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1953년 7월 휴전을 성립시켰다.

미국은 그해 10월에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고, 계속 전쟁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군사원조와 경제부흥에 힘썼다. 1965년 한국이 월남에 국군을 파견하게 되자 미국은 1967년에 한·미 안보협의회를 구성하여 매년 한국의 안보에 관한 문제들을 숙의하기로 하였다. 1948년부터 1971년 중기에 이르는 동안에 미국은 46억 달러의 원조를 한국에 제공했다.

1960년대에 들어와 이른바 평화공존의 불가피성이 대두하게 되면서부터 미국의 대공산권의 정책도 완화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1969년 7월 닉슨대통령은 '닉슨 독트린'을 선언하여 전후 25년간 지배해 온 미국의 대외정책의 기본적인 전환을 예고했다. 닉슨 독트린은 종래 미국에 의하여 전담되었던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에게 맡겨져야 한다는 것과 대공산권정책을 종래의 대결에서 대화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었다. 이 원칙의 일환으로 1970년 7월 미국은 주한미군의 감축계획을 한국정부에 공식적으로 통고했다. 한국정부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한국군의 현대화를 대안으로 제시한 채 상당수 감축시켜 왔다.

그러나 한·미 관계에서 1970년대 후반기 이후 1980년대에 가장 깊은 영향을 주는 것은 역시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의 완전 철수정책이었다. 1976년의 선거공약으로 제시했던 미군 철수계획은 1977년 카터의 취임후 미국·일본을 비롯한 태평양과 동북아시아 전역의 중대한 관심사가 되어 논의를 거듭하고 있으나 선보완(先補完) 후철수라는 기본정책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초창기의 대미외교[편집]

初創期-對美外交

한국외교는 독립과 국토분단이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처음부터 국가안보외교(國家安保外交)가 중심이 되어야 했고, 또 전후 미국과의 특수관계 때문에 대미외교에 제일 큰 비중을 두어야 했다. 한·미 외교관계는 1949년 1월 1일 미국정부가 대한민국정부를 정식승인, 4월 20일 무초를 초대 주한 미국대사로 파견하고, 한국정부가 3월 25일 장면(張勉)을 초대 주미대사로 파견함으로써 개시됐다. 정식국교수립 후 6·25 전쟁까지의 초창기의 대미외교는 사회·경제적 불안, 맹목적인 국민의 통일염원 및 점증하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 속에서 미국의 경제원조보장과 지원을 확보하려는 데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성공적인 것이 못 되었다. 경제면에서는 미군정(美軍政)이 한국에 제공해온 구호적 성격의 가리오아자금(GARIOA 資金), 미국 점령지역에 대한 구제자금)이 경제협조처(ECA)로 이관되어 제공되었으나 한국의 장기적인 경제부흥대책을 위해 마셜 플랜을 모방하여 투르먼 정부가 1949년 6월 미국의회에 제출한 한국경제원조안이 1950년 1월 부결됨으로써 한국경제원조에 차질을 가져왔다. 그 대신 '극동경제원조안(極東經濟援助案)'이 채택되어 1950 회계연도에 9천만 달러가 할당되긴 했으나 6·25시까지 불과 4,500만 달러만이 사용됨으로써 한국경제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또한 한국정부는 주한미군 철수문제가 제기되자 1948년 10월 21일 국회의 주둔 계속 요청결의 등을 통해 이의 저지에 노력하는 한편 사절단 파견과 주미대사관을 통해 군사원조를 획득하려 노력하였다. 당시 대미교섭의 논거로 삼은 것은 한국 분단의 책임이 미국에도 있고, 한국안보는 미국에도 중요하며, 소련의 원조와 사주를 받은 북한의 무력남침 위협이 촉박하다는 것, 그리고 한국은 무기만 있으면 즉시 통일할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남침준비에 대한 한국측의 정확한 정보를 경시하고, 오히려 이대통령의 의도가 무력북침에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필요한 정도의 군사원조도 제대로 제공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미국은 주한미군이 사용하던 각종 장비 및 무기의 일부만을 양도한 데 이어, 아시아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위해 1949년 10월 제정한 상호방위원조법안의 일환으로 한국군 장비를 유지·보수하는 데 필요한 원조만 제공해 주고 1950년 1월 21일 한미 상호방위원조협정을 체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그뿐 아니라 1949년 6월에는 미국 군사고문 단만 남겨 두고 주한미군의 철수를 끝냈고 1950년 1월 12일에는 애치슨 국무장관이 한국과 대만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는 정치적으로 극히 위험한 발언을 하였다. 그 결과 6·25 직전에는 현대식 무기로 장비한 20만 대군을 가진 북한과 38선을 경비하는 데도 불충분한 정도의 경무장을 갖춘 한국군 사이에 군사적 불균형이 심하게 나타나게 되어 북한이 남침을 촉진하게 된 것이다.

한·미 상호방위조약[편집]

韓美相互防衛條約

한국과 미국간에 상호방위에 관하여 체결한 조약. 휴전문제가 제기되자 이 기회에 통일을 완수하려던 한국정부는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휴전을 반대하고, 단독으로라도 통일전쟁을 계속하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1953년 1월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이 취임한 후의 사태는 휴전성립을 불가피한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 전개되어 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정부는 휴전반대의 태도를 취하는 한편, 미국에 대해 재침략을 받을 경우 미국이 참전한다는 것을 보장하고 한국군을 강화시켜 준다는 내용의 한·미방위조약을 휴전성립 전에 체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미국은 한국 측 요구에 대해 1953년 6월 6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서한 형식으로 대한경제원조의 강화, 유엔을 통한 한국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의 계속, 휴전성립 후 상호방위조약 문제의 협의 등을 내용으로 한 소위 한국문제 3원칙을 제시하여 한국정부를 무마시키려 했을 뿐 8일에는 포로교환협정을 체결하여 휴전성립에만 열중하였다.

휴전성립전의 방위조약체결을 목표로 삼았던 한국정부는 이에 불만을 품고 6월 18일 반공포로를 석방하여 만일 한국의 요구가 수락되지 않을 경유 휴전교섭 파기를 위해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다. 이 조치는 휴전성립을 낙관하던 미국에 큰 충격을 주었고, 휴전성립을 위해서는 이대통령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케 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이대통령을 회유하기 위해 1953년 6월말에 로버트슨 국무차관보를 특사로 파견한데 이어, 휴전성립 후인 8월에는 델레스 국무장관을 한국에 파견하여 구체적으로 상호방위조약 문제를 협의, 8월 8일 상호방위조약안에 합의를 보고, 10월 1일 정식으로 동 조약에 조인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의 휴전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체결된 동 조약의 내용은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1조), 무력공격 위협에 대한 협의 및 방지수단의 지속·강화(2조), 무력공격을 당할 때는 공통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각자의 헌법상 수속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3조)과 미국군의 한국영토 및 주변 주둔(4조) 등으로 되어 있다. 휴전 직후의 상황 속에서 체결된 이 조약은 한국측에서 보면 만족스런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197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국제 정세가 지역분쟁의 해결을 지역 당사자들 사이에서 해결짓는 방향으로 나갔기 때문에 이 조약의 실질적인 효력은 미지수였다. 또 월남전 이후 미국의 기본입장인 세계 국지전에의 직접 참여에 대한 회의 등도 이 조약의 불신의 씨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자주국방의 의무로 미비점을 보완시키고 있다.

휴전 후 민주당 정부까지의 대미외교[편집]

休戰後民主黨政府-對美外交

이 시기는 잇달은 국내정치의 격변과 전쟁 후유증 때문에 외교정책 역시 일관성을 가지지 못하고 과도적 혼란성을 보였으나 대미외교만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53년 10월에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고 1953년 7월에는 1954년도에 한국경제 부흥비로 3억 달러를 책정한 법안이 미국의회를 통과한데 이어 1954년 7월에는 이대통령이 방미(訪美)하게 된 것을 계기로 군사 경제 문제 전반에 걸친 토의를 진행시켜 1955년도 군사 경제원조비로서 7억 달러를 획득하였다. 또한 양국간의 통상관계 정상화를 위해 정부수립부터 계속 노력해 온 통상조약체결 교섭에 성공하여 1956년 11월 28일 전문 25개조로 된 한미 우호통상조약(韓美友好通商條約)이 체결되었으며 1957년 11월 7일 발효된 동 조약에 의해 양국민의 경제활동·여행·거주·투자에 대한 기준이 확립되었고, 이후 양국간의 주요 경제관계가 정상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불과 3개월간 존속했던 과도정부시에는 독자적인 정책을 밀고 나갈 형편이 못되었으나 일본의 안보파동 때문에 부득이 일본방문을 중단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60년 6월 서울을 방문,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의해 한국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을 재확인한 것은 불안상태에 있던 한국으로서는 큰 소득이었다. 민주당정부시는 경제안정을 위한 미국원조의 최대확보라는 것을 제1과제로 삼고, 1억 8,000만 달러의 원조를 요청·교섭한 결과 요청액대로 확정되었다. 또한 1961년 4월에는 유엔총회 참석차 도미한 외무장관과 러스크 미국무장관 사이에 한·일 국교정상화의 촉진 및 장기간 논의되어 온 한·미행정협정의 조속체결원칙에 합의한 정·러스크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한·미 유대강화와 정상외교[편집]

韓美紐帶强化-頂上外交

5·16 혁명 후에 성립한 공화당정부는 전진적인 적극외교를 표방, 국제관계의 다원화에 대처하여 종전까지의 대미의존 관계에서 대미협력을 통한 자주적인 외교정책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대미의존도는 상대적인 의미에서 점차 줄어드는 경향이 있었으나 안보 및 자립경제의 달성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는 한·미 유대의 강화가 불가결하기 때문에 대미외교에 계속 큰 비중을 두어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60년대의 대미관계는 5차에 걸친 한·미정상회담이 대종(大宗)을 이루었다.

박·케네디 정상회담[편집]

朴·Kennedy 頂上會談

혁명정부의 최고회의 의장으로 있던 박정희 장군이 케네디 미대통령의 초청으로 1961년 11월에 방미하여 개최된 회담으로서 한국의 경제개발계획, 군사력 증강의 유지문제 등이 협의 대상이 되었다. 회담 후인 11월 14일에는 장기경제개발계획에 대한 미국의 경제원조 및 협력 계속, 무력공격 재개시 군사력 사용을 포함한 가능한 모든 원조의 즉각제공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 후 미국은 1962년 3월 해리먼 미극동문제 담당 국무차관보의 방한(訪韓), 10월의 김종필(金鍾泌) 중앙정보부장의 방미 등의 빈번한 접촉을 통해 이를 거듭 확인하였으며, 1962년 9월부터는 행정협정의 체결을 위한 실무교섭에 착수하였다.

박·존슨 워싱턴회담[편집]

朴·Johnson Washington 會談

존슨 대통령의 초청을 받은 박대통령이 1965년 5월 방미, 양국의 공동관심사를 광범위하게 논의하였으며, 5월 18일 우호관계의 증진, 대한원조 계속, 한·일 국교정상화, 한국경제개발을 위한 1억 5,000만 달러의 장기개발차관 공여, 한·미 공동의 과학기술연구원의 설치, 한·미 행정협정 조기타결 등을 내용으로 한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후 1965년 10월 국군 1개 전투사단의 파월이 단행되고 3월 7일에는 월남정부의 국군증파 요청을 계기로 한국안보문제와 경제발전 등 제반문제의 해결을 선행조건으로 미국정부에 제시, '브라운 각서(覺書)'로서 보장받았다.

박·존슨 서울회담[편집]

朴·Johnson -會談

박대통령의 초청으로 존슨 대통령이 1966년 10월에 서울을 방문, 월남에 대한 지원, 한국 경제발전을 위한 계속지원, 한국안보 및 국군 현대화를 위한 군사지원 계속 등에 합의하였다. 그후 1967년 3월 정일권(丁一權) 총리가 방미, 미정부 고위층과 일련의 회담을 가진 후 월남에 대한 공동협조, 한국군의 현대화 계속,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대한 지원계속, 대한민국 국제차관단의 구성, 한·미간 무역증대를 위한 연례 상무장관회의(常務長官會議)의 개최 등에 합의한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여 양국의 협조관계를 재확인하였다. 또한 1966년 7월 9일에는 장기간 현안문제로서 되어온 한·미 행정협정이 체결되었다.

박·존슨 호놀룰루 회담[편집]

朴·Johnson

Honolulu 會談

1·21 무장공비 남침, 푸에블로호 납북사건 등 북한의 잇달은 무력도발에 의해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된 속에 1968년 4월 호놀룰루에서 세 번째로 박·존슨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는 북한의 도발이 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에 위협이 되며, 중대사태가 발생할 경우 이에 대한 조치를 즉각 결정키로 합의하고, 국군 현대화의 필요성을 인정, 한·미 국방각료회의를 개최하기로 하는 한편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재확인하는 공동성명을 4월 18일에 발표하여 한·미 유대의 긴밀성을 재확인하였다. 이 회담의 결과 1968년 5월 워싱턴에서 국방 각료회담이 열려 1억 달러의 추가군원(追加軍援) 등이 제공되었다.

박·닉슨 샌프란시스코 회담[편집]

朴·Nixon San Francisco 會談

'아시아인의 아시아'라는 새로운 아시아 정책을 내걸고 등장한 닉슨 대통령의 초청으로 1969년 8월에 박대통령이 방미하여 열린 회담. 이 회담에서는 8월 22일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아시아·태평양지역 문제에 대한 상호협조, 한국방위공약 준수, 향토예비군에 대한 지원 계속과 월남문제에 대한 긴밀한 협조, 한국의 경제자립 노력에 대한 지원 계속, 한국의 과학·기술발전을 위한 기술협력지원의 계속, 한국에 대한 민간투자·합작투자의 강화 등을 확약하였다. 그러나 닉슨정부 성립 후 미국의 대한 우호정책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으나, 닉슨 독트린에 따른 아시아 정책의 재평가에 따라 점차 한국의 독자적인 군사적·경제적 역할이 강조되어, 한국의 다변적(多邊的)인 외교관계의 확립과 자체부담 요구가 증대하게 되었다.

한·미 행정협정[편집]

韓美行政協定 Status of Forces Agreement in Korea(SOFA)

대한민국과 아메리카합중국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이다. 1966년 7월 9일 한국정부대표 외무부장관과 미국정부대표 국무장관간에 조인되어 1967년 2월 9일 발효되었으며 1991년 부분개정을 하였음에도 여전히 불공평한 협정이다. 이 협정은 전문 31조로 된 본문과 합의의사록·합의양해사항·교환서한 등의 3개 부속문서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내용은 미국의 정의, 시설과 구역, 공익사업과 용역, 접수국 법령의 존중, 출입국, 통관과 관세, 선박과 항공기의 기착 등 주한 미군과 관련된 사항들이다. 이 중 형사재판권은 중요한 문제이며 협정 제22조에 의하면, '주한 미국 군대의 구성원·군속 및 그들의 가족이 한국 내에서 죄를 범한 경우에 그것이 미국법령에 의하여서는 처벌할 수 있으나 한국법령에 의해서는 처벌할 수 없는 범죄(미국의 안전에 관한 범죄 포함)일 때에는, 미국이 전속적(傳屬的) 재판권을 행사할 권리를 가진다. 또한 한국법령에 의해서는 처벌할 수 있으나 미국법령에 의해서는 처벌할 수 없는 범죄(한국의 안전에 관한 범죄 포함)일 때에는, 한국이 전속적 재판권을 행사할 권리를 가진다. 한편 재판권을 행사할 권리가 경합하는 경우에는, 미국의 재산이나 안전에 대한 범죄와 미국군대·군속 및 그 가족의 신체나 재산에 대한 범죄, 공무집행 중의 작위 또는 부작위에 의한 범죄에 대해서는 미국이 제1차적 재판권을 가지며, 기타의 범죄에 대해서는 한국이 제1차적 재판권을 가진다. 그러나 합의의정서에서는 한국측은 미국군 당국의 요청이 있을 때 재판권행사가 중요하다고 결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1차적 권리를 포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유신 이후의 한미관계[편집]

維新以後-韓美關係

1972년 미국이 중국과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동북아시아의 냉전체제에 모종의 변화가 오리라고 예상하는 가운데 7·4 공동성명이 있었고, 이어 10월 17일 국내에서는 유신체제가 성립되었다. 닉슨과 키신저 시대에 비롯한 한국에서의 유신체제는 당분간 한미 관계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은 채 안보·경제·대 유엔 외교상의 협조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다가 1974년 닉슨이 사임하자 그 뒤를 이은 포드는 긴급조치로 인하여 미국회에서 한국내 문제에 대한 약간의 비판이 있음에도 방한(訪韓)하여 한·미 유대에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유엔에서의 제3세계권의 발언권 강화와 세계적인 화해 분위기로 유엔군 사령부와 언커크의 해체가 이루어졌고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거듭 논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으로 미국은 한국의 방위산업 육성과 자주국방을 위한 국군현대화에 차질이 없도록 유신 이후에 적극 지원해 주었다.

그러다가 1976년 주한미군 철수를 선거 공약으로 한 카터 대통령이 당선이 되자 잠시 한·미 관계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에서의 대한 지원정책 비판론과는 달리 행정부는 시종 한국의 군사 및 경제 현대화를 위한 지원을 계속하여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큰 변화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1980년대의 한미관계[편집]

-年代-韓美關係

미국은 한국에 있어서 혈맹관계라고 지칭될 만큼 전통적인 우방이다. 그러나 제5공화국 출범 초기인 1982년 3월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시작으로 학생·재야에서는 반미운동이 가속되었고 정부간에는 통상마찰이 심화되어 급기야 국민적 갈등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양국간의 위상조명과 관계 재정립 주장이 대두되고 있는 바, 이는 한국현대사를 돌아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즉 군사적으로 한국이 미국의 보호 아래 있다고 지금까지의 정치적·경제적 대미 의존성이나 불평등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은 더 이상 한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